2013년 4월, 112에 신고 전화가 한 통이 걸려왔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여우고개 부근, 흙 사이로 사람의 다리로 추정되는 물체가
묻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출동해 흙을 파내기 시작했고 곧 들짐승에 의해 왼쪽 다리가 훼손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신원확인 결과, 피해자는 지난 2012년 12월 어느 겨울날 서울에서 실종됐던 남성 김석준 씨(가명)였다. 그가 왜 이
곳, 파주 여우고개에서 발견된 걸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집에 오면
어떤 음식물도 선뜻 먹지 마라. 누군가 독극물을 뿌렸다.
안쪽 현관문 열쇠를 소지하거라. 아침부터 나쁜 소식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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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김 모 씨가 실종되기 전 작은아들에게 보낸 문자 中
서울에서 실종돼 4개월 뒤에야 파주에서 발견된 김씨.
2012년 12월 15일, 작은아들의 출근을 배웅하는 모습이 찍힌 CCTV를 마지막으로 그는 어디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김 씨가 실종되던 날 CCTV에 또 다른 수상한 장면이 포착됐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큰 여행용
가방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얼마 후 9층에서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 남자는 전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는 여행용 가방을 두 손으로
밀며 1층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모자를 뒤집어 쓴 CCTV속 남자의 얼굴을 식별할 수는 없었고, 9층 주민들 중 CCTV 속 남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은, 실종자 주변에 대한 탐문수사 후, 김 씨의 큰아들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가족의
증언으로는, 큰아들은 피해자 김 씨와 금전관계 등 여러 문제로 갈등이 있었고, 김 씨가 실종되기 전에도 종종 아버지의 집에 찾아와서 협박을
일삼았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큰아들의 집 CCTV 화면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자와 비슷한 가방을 들고 비슷한 옷을 입은 큰아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소유의 아파트를 몰래 자신의 명의로 옮기는 등 수상한 행적들도 발견됐다.
하지만, 범행동기와 여러 정황 등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찰은 큰아들을 범인으로 지목할 수 없었다.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사체도,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도, 범행에 쓰인 도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의 끈질긴 추궁에도 큰아들은 끝내 혐의를
부인했다.
“타일러도 보고 자장면도 먹여가며 설득도 하고, 이 추운 날 아버지 묏자리 마련해
줘야하지 않겠냐 설득도 하고 회유도 했는데.........분명히 살인범인데....못 잡아넣는 그 심정 알아요?”
“ 여러 가지
타일들이 조각조각 있는데.....큰 조각을 못 찾은 상태로는 송치를 하거나 기소를 할 수가 없었던, 그런 단계였지요.” - 경찰
관계자
영구미제로 남는 듯 했던 사건. 하지만 실종자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경찰이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큰 조각, 진실의 열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시신 곁에선 큰아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인 영화관 카드 영수증이 나왔다.
묻혀버릴 뻔 했던 진실은 이제 들어날 수 있을까? 그 날 큰아들이 본 영화는 <내가 살인범이다>이었다.
범죄가
점점 지능화되어감에 따라 간접 증거만 있는 강력범죄가 많아지고 있다. 정교한 완전범죄의 시나리오 속에서 직접 증거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때문에 수사기관, 사법기관의 판단은 더 어려워진다. 재판만 5번을 했던 부산 ‘시신 없는 살인사건’에서처럼, 물적 증거가 없을 때
무엇이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