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대 최고의 천재들

sony3 작성일 13.08.17 05: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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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는 중국은
세계4대 문명의 발상지중 한곳이며 동양역사의 중심축을 이루며  
수많은 영웅, 호걸, 기인, 천재, 성인, 현인들을 배출한 나라입니다
특히 중국역사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대략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한, 삼국시대, 당, 송, 명 시대가 그러합니다
 
특히 위, 촉, 오가 대립하던 삼국시대 [222 ~ 280] 는 중국역사상 가장 기이할 정도로
빼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아직도 중국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토록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는지 이해가 안될정도라고 말합니다   

그럼 중국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천재들을 제가 아는 범위에서 열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네이버, 위키 참조]

 
단,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진녕, 이정도같은 현대과학자들은 제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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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공 -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또한 그는 병법서인 육도삼략의 저자이기도 하다



곽가 - 자는 봉효(奉孝)이고 죽은 후 내려진 시호는 정후(貞侯)이다.
          영천군 양책현(陽翟縣)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앞을 내다보는 식견을 지녔으며
          조조(曹操)가 가장 아끼던 일급 참모였다
          곽가는 그 뛰어난 통찰력과 주도면밀한 계책으로 살아생전 조조로부터 두터운 신음을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풍토병에 걸려 38세라는 짧은 나이에 그만 요절을 하고 만다
          곽가의 죽음을 접한 조조는 크게 애통해하면서, 순유 및 다른 이들을 향해 말하기를
          "그대들은 모두 나와 동년배이다. 곽가만이 매우 젊었다. 천하가 태평한 시기가 오면 후사를
          그에게 맡기려 했었는데…"라고 한탄하였고
          208년 적벽 대전에서 패배하였을때도 조조는 탄식하여 말하기를“봉효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 라고 말했을 정도로
          곽가에 대한 조조의 총애는 무척 남달랐고
          그만큼 곽가의 재능과 지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조조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수가 있다
   
     
곽상 - 서진(西晉)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 자는 자현(子玄)이다.
           일찍부터 노장 사상에 정통했고, 왕연(王衍) 등 청담지사(淸談之士)와 사귀었다.
           변재(辯才)에 막힘이 없어 사람들이 위(魏)나라의 왕필(王弼)이 다시 태어났다고 칭송했다.
           저서에 『장자주(莊子注)』 33권이 있는데, 『장자(莊子)』의 본문에 완전히 충실하지는 않지만
           역대의 장자 주석서를 두루 읽은 지식을 담았고, 불교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관로 - 용모가 추하고 술을 좋아해서 언행에 거친 면이 있었지만, 『주역』과 수학에 정통하고 관상술에 능했다.
           조조(曹操)가 태사로 봉하려 했지만 사양했다. 신출귀몰하게 앞날을 알아맞히어
           노숙(魯肅)과 하후연(夏侯淵), 조상(曹爽)의 죽음과 허도(許都)의 대화재를 예언했다.
           자신이 48살에 죽을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 나이에 죽었다.


공융 - 자 문거(文擧). 공자의 20대 손. 후한(後漢) 말기의 학자로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으며
          문필에도 능하여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도 꼽혔던 인물이다.
          삼국지에는 그의 총명함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 있는데
          하남윤(河南尹)이었던 이응(李膺) 과 태중대부 진위(陳?)와의 유명한 일화가 바로 그것이다
       


굴원 -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이자 비극시인. 학식이 뛰어나
          초나라 회왕(懷王)의 좌도(左徒:左相)의 중책을 맡아, 내정·외교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작품은 한부(漢賦)에 영향을 주었고, 문학사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된다.


         
김용 - 김용은 중국 문단의 기인(奇人)이자 무협소설의 거장, 혹은 신필로 불리는 인물이다
       

두보 -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던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마량 - 삼국 시대 촉(蜀)나라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 마속(馬謖)의 형으로, 자는 계상(季常)이다.
          형제 다섯이 모두 재주로 이름이 있었는데 그가 가장 어질고 덕이 높았다.
          흰 눈썹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마씨의 다섯 형제 가운데
          흰 눈썹의 마량이 가장 뛰어나다.(馬氏五常 白眉最良)”고 했다.
          이 말에서 고사성어 백미(白眉)가 나왔다.
          마량은 제갈량과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이며
          삼국지에는 화살을 맞은 관우(關羽)가 화타(華?)의 치료를 받는 동안에 함께 바둑을 두는 상대로 나오기도 한다  





방통 - 자는 사원(士元)이다. 촉의 책사로 유명한 인물이며 제갈량을 와룡(臥龍)에 비유하였고
          방통은 봉추(鳳雛: 봉황의 새끼)라고 하였다.



백거이 [白居易] - 당나라 화주(華州) 하규(下?) 사람. 조적(祖籍)은 태원(太原)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다.
                          백계경(白季庚)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5살 때부터 시 짓는 법을 배웠는데,
                          15살이 지나자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詩才)를 보였다.



범증 - 중국 초나라 항우(項羽)의 모사. 기묘한 계교에 능하여 항우로 하여금 제후의 패자가 되도록 도왔다.
           그는 항우에게 한의 패공(沛公 : 고조 高祖)을 죽일 것을 권했으나
           오히려 의심을 받고 파면되었으므로 항우를 버리고 팽성(彭城)으로 가서 거기서 사망했다.
           후에 항우는 고조에게 패했고, 고조는 그것이 항우가 범증의 말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다.





서위 [徐渭] - 명나라 절강(浙江) 산음(山陰) 사람. 자는 문청(文淸) 또는 문장(文長)이고,

                   호는 청등(靑藤) 또는 천지(天池)다.
                    제생(諸生)이다. 명성이 대단한 데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으며,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모두 뛰어났다.
                   스스로도 자신은 서예가 최고이고, 다음이 시고, 문이 그 다음이며 그림이 다음이라고 자부했다.
                   그림은 화초죽석(花草竹石)이 아름다웠고, 서예의 필치는 자유분방한 데다 기상이 넘쳐 창의력이 넘쳐났다.
                   병법이나 기계(奇計)도 좋아해 호종헌(胡宗憲)의 막하에 있기도 했다.
                  시서화에 각각 일가를 이루는 천재적인 문인으로,

                   특히 잡극(雜劇) 「사성원(四聲猿)」을 발표하여 유명해졌다.
                   자기의 독창성을 중시하여 명나라 초기에 문단을 풍미했던 의고파(擬古派)의 모방을 비웃었다.
                   죽은 뒤 개성적인 시풍은 공안파(公安派) 원굉도(袁宏道)를 경탄시켰을 정도였다.
                   저서에 『남사서록(南詞敍錄)』과 『서문장전집(徐文長全集)』 30권이 있다.
                   명청(明淸) 시대 문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다.




섭천사 [葉天士] - 청나라 강소(江蘇) 오현(吳縣) 사람. 이름은 계(桂)인데, 자로 행세했다. 호는 향암(香?)이다.
                         가업이 의술(醫術)인데,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제자에게 배웠다.
                         나중에 명의(名醫)들을 널리 찾고 그들의 장점을 수집하여 더욱 정통하게 되어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기존의 치료법에 얽매이지 않고 옛날의 비방(秘方)까지 두루 활용했는데, 항상 놀라운 효험을 거두었다.
                         특히 비위(脾胃)와 아동과(兒童科)의 병에 재간이 있었다.
                         그가 지은 『온열론(溫熱論)』은 온병학설(溫病學說)의 발전을 가져왔다.





소동파 -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손무 -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큰 존경을 받는 손무와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은 물론
          세계 군사사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다.
          인물은 병가의 성인이란 뜻으로 '병성(兵聖)' 또는 '무성(武聖)'으로 추앙받고,
          그 저작은 병가의 바이블이란 뜻의 '병경(兵經)'으로 불릴 정도다.
          군사 모략학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손무는 첫손가락에 꼽히는 모략의 대가이기도 하다.




승조 - 중국 진(晉)나라시절 구마라습(鳩摩羅什)하에서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했다.
          그가 남긴 논문집 《조론(肇論)》은 대승의 공(空)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것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안회 - 3천 명의 제자를 두었다고 전하는 공자에게는 여러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특히 뛰어난 제자들을 10명으로 추려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안회는 공문십철중에서도 학문과 덕행에있어서 으뜸으로 꼽혔던 공자의 수제자였다
          하지만 안회못지않게 뛰어났던 제자가 있었는데 바로 자공이다
          자공은 공자로부터 비록 제사에 쓰이는 보배로운 그릇과 같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스스로의 재주를 믿고 자만심이 강하여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경계를 듣기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루는 공자가 자공을 불러 안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자만심이 강한 자공의 속을 떠본 것이다. "너와 회를 비교하면 누가 더 잘 하겠느냐?(女與回也孰愈)"
          그러자 자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회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듣고도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우리가 흔히쓰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안다는 말인‘문일지십’[聞一知十] 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왕발 - 초당(初唐) 4걸(四傑)이라 불리는 중국 당나라 초기의 대표적 시인.
          종래의 완미(婉媚)한 육조 시(六朝詩)의 껍질을 벗어나 참신하고 건전한 정감을 읊어

          성당 시(盛唐詩)의 선구자가 되었다.
          일찍이 여섯살때부터 뛰어난 시문을 짓기 시작한 왕발은
          아무리 술이 취한상태에서 글을 써도 고칠데가 없다해서
          뱃속에 완성된 원고가 들어 있다는 뜻의
          복고[腹稿]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뒤에 관노(官奴)를 죽였다는 죄로 관직을 빼앗기고 교지(交趾:베트남 북부)의 영(令)으로 좌천된
          아버지 복치(福?)를 만나러갔다가 돌아오던 중, 배에서 바다로 떨어져 익사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26세때의 일이다






왕필 - 왕필은 중국역사상 기인, 영웅, 천재가 기이할 정도로 많이 배출되었던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학자이다
           하안(何晏)과 함께 위·진(魏晉)의 현학(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왕필은
           의(義)와 이(理)의 분석적·사변적 학풍을 창설하여
           중국 중세의 관념론체계에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그리고 왕필은 불과 16세에 『노자』를 주해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내용의 심오함과 정확함은 아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다
              
          오죽하면 후대의 학자들로부터 왕필이 《도덕경》의 주를 단것인지
          그 반대인지 모를 정도다 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로
          왕필의 천재성과 박식함은 그 시대는 물론 후대에까지도 대단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또한 왕필은 노자뿐만이 아니라『주역』에 대해서도 중국역사상 가장 탁월한 주를 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천재적인 식견과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도 위나라의 하급관리에만 머물렀으며,
           풍토병에 시달리다 23살이라는 짧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양수 - 폭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독서로 조조의 의중을 읽어내는 데에 탁월하였으며
           특히 '계륵(鷄肋)'에 관련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조조가 한중에서 철수할 때 '계륵'을 들어 명령을 내리자 누구도 그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나

          양수만이 이를 해석하였다.
          양수는 닭의 늑골은 국물을 우려내기에는 좋지만 먹기에는 어렵다고 하였으며
          이는 버리기는 아까우나 쓸 데는 없다는 의미로 한중을 늑골에 비유하였다고 이해하고
          한중으로 부터의 철수를 준비하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평소 대단히 비상한 두뇌를 지닌 양수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던 조조는
          이 계륵에 관련된 일로 크게 노여워하였으며 이 일이 발단이 되어 219년 참수되었다.






여몽 - 여몽(呂蒙, 178년 ~ 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무장으로 자는 자명(子明)이며 여남군 부피현 사람이다
          흔히 여몽은 괄목상대라는 고사성어의 인물로
          아니면 관우를 생포하여 죽인 몹쓸인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진수는 여몽에 대해 평가하기를 용맹하면서 지략에도 능하였으니
          무장으로써 그만한 인물은 없었다고 평하였다



예형 - 후한 말기 평원(平原) 반현(般縣) 사람. 자는 정평(正平)이다.
          젊었을 때부터 말주변이 있었고, 성격이 강직하면서 오만했다.
          오직 공융(孔融), 양수(楊修)와만 마음을 터놓고 사귀었다.
          예형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비범하였고 날카로운 식견이 있었지만
          특유의 독설과 무례한 언행으로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은 듣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결국 예형은 그 오만방자함때문에 25세라는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유기  -  제갈량의 라이벌로 손꼽히는 유기
           유기는 제갈량과 동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도 중국의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의 라이벌로 사마의와 함께 유기를 제갈량의 라이벌로 손꼽는다
           명태조의 스승겸 참모였던 유기는 스스로 제갈량보다 낫다고 자부할 만큼
           천문과 지리, 정치, 군사 등 모르는것이 없었고
           미래에 대한 예언은 물론 독특한 고도의 역술지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미 유기는 중국에서 제갈량과 함께 천재 군사로서 숭배를 받고 있다



이세민 - 당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26-649). 시호는 태종(太宗)이다. 아버지는 이연(李淵)이고 어머니는 두(竇)씨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영주(英主)로 알려져 있으며, 북방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武人)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수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거병,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건립했다. 왕위 쟁탈전을 치르면서

              무덕(武德) 9년(626)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수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명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기에 힘썼다.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治)’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이시진 - 중국 명나라 말기의 박물학자·약학자. 《본초강목》(전52권)의 저자이다.
             본초강목은 우리나라의 명의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과 함께 동양의학을 대표하는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책이다
             본초강목은 저자가 혼자의 힘으로 30년에 걸쳐 집대성한 것으로,
             원고를 고치는 일만 3차례나 하였다 한다. 약용(藥用)으로 쓰이는 대부분의 것을
             자연분류를 주로 하여 분류하였으며, 총계 1,892종의 약재가 망라되어 있다.
 
         



이태백 -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며 시선(詩仙)으로 불린다.



이하 - 특출한 재능과 초자연적 제재(題材)를 애용하는 데 대해 '귀재(鬼才)'라는 명칭이 붙었던 중국 중당(中唐) 때의 시인.





장량 -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공신. 진승 · 오광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유방의 진영에 속하였으며,
           후일 항우와 유방이 만난 '홍문의 회'에서는 유방의 위기를 구하였다.
          선견지명이 있는 책사로서 한나라의 서울을 진나라의 고지인 관중으로 정하고자 한 유경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장중경 [張仲景] - 본명 張機(장기)이나 장중경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河南省(하남성) 南陽(남양) 출생이라고 전해지며 傷寒論(상한론)의 저자이다.
                          長沙(장사)의 태수(太守)를 지냈으나, 그의 일족이 열병으로 목숨을 잃자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질병을 병기와 병증으로 인식하여 그 전의 의학을 진일보 시킨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정호 -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다.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정이 - 중국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철학을 수립하여 큰 업적을 남겼다.





정현 - 중국 후한(後漢)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 시종 재야(在野)학자로 지냈다.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경학의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외에 천문(天文) ·역수(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삼국지에는 유비의 스승 노식이 유비에게 추천서를 주면서 정현에게가서 배워라 라는 대목이 나타난다

        
      
조식 - 조조의 셋째 아들로 10여 세 때 이미 "시론 및 사부 10만 자를 외웠다.(誦讀詩論及辭賦十萬言.)"고 할 만큼
          총명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
          형 조비와 조창과의 후계자 권력 다툼에서 조식은 조비에게 패하고 말았다.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식을 죽이기 위해 일곱걸음을 걷는 동안 시를 지어 읊어보라고 했다.
          조식이 시를 짓지 못한다면 죽일 것이라고 하였다.
          조식은 “콩을 삶는 데는 콩깍지로 태운다(煮豆持作羹). 같은 뿌리의 형제가 왜 다투지 않으면
           안 되느뇨(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라고
           노래한 7보의 시(七步之詩)를 지었고 이에 조비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그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주돈이 [주렴계] -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유교이론을 창시하였다.
                          세계는 태극->음양->오행->남녀->만물의 순서로 구성된다고 하였다.
                          또,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우주생성 원리와 인간의 도덕원리는 같다고 하였다.




주희 -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이라는 학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주희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우리나라의 유학은 엄밀히 말해서 공자, 맹자의 고대유학이 아닌 주희의 사상이 녹아있는
           주자학이 우리나라 유학의 본질이다

 


제갈량 - 자는 공명(孔明). 촉의 승상. 유비의 삼고초려 이후 세상에 나와 유비와 유선을 받들어 죽는 날까지

             한의 중흥에 혼신을 다한다.
             당대의 기재로서 천문, 지리, 병법 등에 능통하다.
             또 그의 명성은 중국사상 제1인자로 추앙(推仰)되며,

             탁월한 지략과 지성충의(至誠忠義)의 사람으로 존경되고, 공자와 아울러 후세 중국에 끼친 영향이 크다.



추연 -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추연(騶衍)이라고도 한다. 맹자보다 약간 늦게 등장하여 음양오행설을 제창하였다.
           세상의 모든 사상(事象)은 토(土) ·목(木) ·금(金) ·화(火) ·수(水)의 오행상승(五行相勝) 원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하경명 [何景明] - 명나라 하남(河南) 신양(新陽) 사람. 자는 중묵(仲默)이고, 호는 대복(大復)이다.
                          8살 때 시를 지을 줄 알았고, 15살 때 거인(擧人)에 급제했다.
                          홍치(弘治) 15년(1502) 진사에 급제, 중서사인(中書舍人)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정덕(正德) 초에 유근(劉瑾)이 집정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하안 - 왕필과 더불어 위진(魏晉) 시대 현학(玄學)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인물이며
          젊어서부터 수재(秀才)로 명성을 얻었다.
          용모가 아름다운 데다 얼굴이 희어서 사람들이 ‘부분하랑(傅粉何郞)’이라 불렸다
       




화타 - 중국 한말(漢末)의 전설적인 명의. '외과의 비조'로 통할 만큼 외과에 특히 뛰어나나,
          외과뿐 아니라 내과·부인과·소아과·침구 등 의료 전반에 두루 통하였고, 특히 치료법이 다양하면서도
          처방이 간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혜능 - 중국 선종(禪宗)의 제6조로서, 육조대사(六祖大師)라고도 한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홍인 문하의 2대 선사로 남종선(南宗禪)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설법을 기록한《육조단경(六祖壇經)》이 전해진다.




호설암 - 청나라의 거상(巨商)인 호설암(胡雪岩·1823∼1885)은 비록 빈손에서 시작하였지만
             천재적인 장사수완으로 일약 청나라 제일의 거부가 된 인물이다
         


 

       


제가 꼽은 랭킹 1, 2, 3




천재성 - 1 왕필 2 소동파 3 서위, 유기

다방면 - 1 소동파 2 서위, 유기 3 정현  

   업적 - 1 주희 2 정호, 정이 형제, 추연 3 이시진

영향력 [한, 중, 일 포함] - 1 주희 2 승조, 혜능 3 이시진

인지도 [한, 중, 일 포함] - 1 제갈량 2 방통, 손무 3 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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