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말입니다......

버드화이트 작성일 13.08.18 17:4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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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깃발인 성 조지의 십자가입니다. 뭐 애니메이션이나 라이트노벨을 좋아하신다면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에나오는 성조지의 드레곤할때 그 드레곤을 죽인 게오르기우스의 의미하는 십자가입니다.



근현대사는 만약에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만약에 흥선대원군이 계속 집권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임오군란으로 민비가 살해당하고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했다면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게 이겼다면 어떻게되었을까?러일전잰에서 러시아가 이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우리나라가 영세중립을 표명했다면 냉전시대의 우리나라의 위치는 국제사회에서 어떠한 입장에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황제를 모시고있는 입헌군주제등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겠군요.

등등 수많은 IF이야기를 할 수 있을듯합니다.

 

유리뱃살님이 말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에데해 생각해 보도록합니다.

 

만약 기존의 역사가 진행되었다는 가정하에 이야기 해보도록합시다.

 

일단 세도정치는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막을 내립니다. 흥선대원군은 10년간 집권합니다.

일단 여기서 일본이랑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하나 일어나게 되겠군요.(서계접수) 흥선대원군 집권이후 민씨 정권이 서게되고 이때 우리는 통상개화론이 점점 고개를 들게되는 시점에 운요호사건이 일어나고 우리나라는 문호를 개방하겠군요. 만약여기서 일본대신에 영국을 집어 넣을 수 있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는 일본과 문호를 개방하게되고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조규를 체결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 청나라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근대화를 배우는 중일것입니다.

1883년 영국.독일과 조약을 맺게 됩니다. 사실상 영국과 첫 만남이겠지요.

 

이후 영국과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은 전라남도 거문도에서 였습니다. 1885년 거문도 사건이지요.

러시아의 남하정책 적극적으로 저지하던 영국이 러시아가 영흥만에 침흘리는 것을 알고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이지요.

영국은 2년간 점령했고 포트해밍턴이라고 거문도를 불렀습니다. 이후 청의 중재로 러시아가 포기함으로써 영국은 다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거문도에 가면 영국군묘지가 있다고합니다.

만약 조선의 식민지를 바라면 거문도사건이후 조선에 경제적 침탈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조선은 이미 조청 상민 수륙무역 장전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인해서 이미 EP(economy.point)는 빨피인 상황인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영국이 조선에대해 손을 쓸려면 영국역시 상당한 힘이 존재해야합니다.

문제는 영국이 인도를 완전히 식민화 한 것이 강화도 조약이 맺어진 1876년이라는것입니다. (이말은 인도가 완벽하게 통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인도를 통일했던 왕조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무굴제국은 인도 북부에 있던 이슬람 왕국을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직접군대를 이끌고 또는 정식적으로 접촉한 것은 약 6~9년정도가 흐른 시점이라는것입니다.

즉 약 9년동안 식민지화를 해야했다는것입니다. 그리고 대 조선 식민지화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것입니다.

문제는 인도는 조선의 십여배나 큰나라이고 더욱이 엄청난 자원을 가지고 있는 나라인것입니다.

그당시 영국에서 인도=?>>>>>>>>>>>>>>>>>>>>>>>>>>>>>>>>넘사벽>>>>>>>>>>>>>>한반도

정도 였을것입니다.(엘리자베스1세가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고 한 것은 교역국이였을 때이지요)

 

또한 문제는 영국와 조선은 정반대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서유럽과 동아시아. 같은 위도상의 정반대에 있는 국가였지요. 즉 너무 먼것입니다. 제가 하던 게임인 대항해시대라는 게임의 경우 게임에서도 거의 90분정도거리는데 현실은 더욱 걸리는 것이 당연한것입니다. 그리고 조선보다 노다지인 청나라가 있고 이미 영국에게 떡실신해서 빌빌 거리고 있을때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1893년대에야 증기선의 수송량이 드디어 범선의 수송량을 능가하는 때였습니다.존키건의 1차세계대전사 23p

또한 영국은 엄청난 비용을 인도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항구도 증설해야고 농토도 넓혀야겠지요. 그리고 그 넓은 인도를 관리할 관리며 경찰 군대 인프라도 완성해야 했습니다.

 

일단 영국은 유럽에 1139(백만달러) 대서양분가 6562(백만달러) 대아시아3169 대아프리카 등 해서 약17335(백만달러)의 자금을 사용했습니다.(1938년 기준)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에 약 5배정도 해외에 투자했습니다.

무지막지하게 투자한것이지요. 일본에 비한다면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수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었지요. 그만큼 자금을 많이 사용한 만큼 국내의 산업에 투자를 얼마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자국으로 부가 유입이 되지만요. 그만큼 빠져나가기에 산업의 활성도가 떨어지는것입니다.

이에 독일의 수상이자 명외교관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식민지의 양명성 때문에 식민지에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뭐 자국을 위해서 몇몇의 식민지는 거느리고 있었지만 세계최고의 공업대국으로 성장하는데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의 보유하고 있는 금은 1차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 4000천만 파운드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영국은 2400만 파운드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영국은 대부분의 자금이 지나는 길이기는 했습니다.

참고로 천조국 미국은 이때 이미 14천만 파운드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1890년 기군-참고서적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 24P

 

이러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식민지는 영국의 저력을 다해서 막았지만 아시다 싶이 대부분의 식민지는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의 식민지로 산다는 것이 과연 좋은것일까요? 인도 사람이 1차세계대전에 참여한이유는 독립을 해준다는 약속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갈리폴리에서 처참히 죽어야했습니다. 

 

영어중에 Blue bloo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귀족혈통을 말하는 것이지요. 동맥은 푸른색으로 보입니다. 농민들은 매우 고된노동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햇빛에 피부가 검게탔습니다.

귀족은 노동을 하지 않고 대부분시간을 실내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니 백인의 피부에 동맥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blue blood라고 불리는 단어가 나타난것입니다.

 

글이 이상하고 길게 써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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