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달마대사는 중처럼 벽만 쳐다보고 앉아 9년 만에 득도해탈(得道解脫)해서 부처님이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캔버스를 마주하고 앉아 물방울 그리기로 40년을 보냈어.” 그렇게 해서 탄생한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보라! 어쩌면 저렇게도 희한한 물방울이 있을까! 어쩌면 저렇게도 진짜 물방울 같을까! 물방울의 모양새와 표정은 또한 얼마나 다채로운가! 구슬처럼 영롱하게 무리를 지어 방울방울 매달려 있기도 하고, 탁 터지다 만 듯하다가 때로는 터져 흐르다 그대로 멈춰 있다. 곧 사라질 듯한 순간을 붙잡고 있는 그림, 존재와 부재의 아슬아슬한 경계, 그 짜릿한 긴장으로 내모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그 물방울 하나하나에는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고, 어떤 아련한 추억을 불러내는 따뜻한 정감이 흐른다.
김창열은 물방울 작품을 40년 동안 그려왔다. 물방울이 앉아 있는 표면(물질)은 캔버스에서 신문지로, 다시 모래에서 나무판으로 변화했다. 그 변화에 따라 물방울은 ‘천의 얼굴’을 드러냈다. 물방울 모양의 유리병이나 투명한 입체로 설치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창열은 왜 하필 물방울을 그리고 있는 걸까? 그가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파리에 정착한 지 3년째인 1972년부터다. “어느 날 캔버스에 뿌려본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걸 봤어.” 그것이 물방울 제작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일생의 예술 화두가 된 물방울의 탄생은 좀더 근원적인 뿌리가 있을 것이다. 물방울은 [상흔], [제사] 등과 같은 1960년대의 뜨거운 추상, 앵포르멜작품과 1970년대의 [현상] 같은 작품과도 연관이 있다. 구멍이나 날카롭게 갈라진 틈, 그리고 구멍에서 흘러나온 액체 이미지들이 물방울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물방울은 유년시절 강가에서 뛰놀던 티 없는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하고, 청년시절 6.25 전쟁의 끔찍한 체험이 담겨 있기도 하지. 전쟁이 끝나고 나니 중학교 동기 120명 중에서 60명이 죽었어. 나이가 많아야 스물이야. 앵포르멜 작품에서는 총에 맞은 육체, 탱크에 짓밟힌 육체를 상징적으로 그리려 했던 것이지. 그 상흔이 물방울 그림의 출발이 되었어.”
김창열의 물방울은 20세기 한국사를 관통하는 고통과 상처의 원형이 진화해 온 형태다. 물방울 그림이 대중들에게 친근하게 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방울이 한국인들의 기저에 흐르는 집단적 기억의 어떤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창열의 물방울은 독창적인 발상과 완벽한 회화 방법이 매력이다.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은 진짜 물방울이 아니다. 그가 그린 물방울은 현실의 물방울이 아니라 ‘착시현상’이다. 바탕을 칠하지 않는 캔버스에 그린 물방울에서 우리는 금방 스며들거나 배어 나오는 듯한 착시현상을 본다. 물방울 그림은 캔버스 마대라는 물질적인 현상과 물방울의 착시현상(환상)을 중첩시킨 것이다. 화가이자 비평가인 이우환은 김창열의 물방울 그림을 ‘물체와 관념의 조화’로 규정한 바 있다. 마대를 무시하고 물방울을 강조하면 그림이 되고, 반대로 그림보다 마대를 강조하면 오브제로 바뀌는 절묘한 관계에 주목한 것이다.
김창열은 일찍이 국제무대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1961년에는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1965년에는 제8회 상파울로비엔날레에 출품했다. 1966년에 김창열은 미국길에 오른다. “한국을 떠나야 한다. 이제 내 작품은 국제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물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런 절박한 생각을 가졌어. 원래 나는 프랑스 유학을 꿈꿨어. 파리 땅만이라도 밟아 봤으면 좋겠다고 꿈을 꿨는데 록펠러재단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던 거였어. 한달 동안 30개의 미술관, 학교를 견학했지. 이 여행이 세계 미술계의 도전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 같아. 그 뒤 미국에 계속 체류하면서 넥타이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다가, 운 좋게 일년간 다시 록펠러재단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 장학금을 아끼고,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럽·이집트·그리스·인도 여행을 계획했지. 그런데 결국 유럽에 머물렀어.”
1969년부터 김창열은 파리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김창열의 작업실이자 생활공간은 파리 남쪽에 있는 팔레조였다. 여기에서 이른바 ‘마구간 화실’ 생활이 시작된다. 김창열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면 이 마구간 화실에서의 가난과 결핍이 거론된다. “마구간을 작업실로 썼어. 콘크리트 바닥에, 벽은 흰 페인트 그대로고, 문은 있으나마나 바람이 숭숭 들어왔어. 들고양이들이 제 집처럼 뛰어다니던 곳이었어.” 그러나 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 김창열에게 새로운 희망이 찾아왔다. 인생의 반려자 마르틴느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또한 이 마구간에서 김창열의 작품 화면에는 마침내 영롱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1973년 김창열은 파리에서 물방울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비평가들의 격찬이 이어졌다. “물방울들은 보기 드문 최면의 힘을 지니고 있다.” “정지된 시간과 불변하는 세계의 이미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는 이미지들이 주조를 이룬다.” 2년 뒤 1976년에는 물방울 그림을 처음으로 한국에 선보였다. 그 해 도쿄화랑에 이어 서울의 갤러리현대(당시 현대화랑)에서 열린 개인전은 개막 전에 출품작품이 모두 팔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국 미술시장에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 물방울 그림의 인기몰이는 이미 이때부터 불이 붙었다.
김창열의 고향 맹산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300리 떨어진 곳으로 1천 미터의 고산지대다. 대동강 상류여서 물이 깊고 맑은 지역이다. “할아버지하고 정이 깊었지. 천자문을 배우면서 붓글씨를 쓰게 되었어. 할아버지께서는 명필이어서 인근 지역의 비석 글씨를 쓰던 분이었지. 글씨를 배우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동그라미를 그렇게 잘 그리느냐’고 칭찬해 주시니까, 나는 신이 나서 신문지가 새까맣게 될 때까지 글씨를 써 나갔어.” 김창열이 1980년대부터 그리기 시작한 한문과 물방울의 조합 [회귀] 시리즈는 바로 붓글씨를 즐겁게 써 내려가던 이 유년시절로의 동경,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붓글씨라는 게 사실은 그림이야.” 김창열은 서화이명동체(書畵異名同體-글씨와 그림은 하나)라는 동양의 예술론을 작품으로 구현했다.
김창열은 평양의 광성고보를 다니면서 외삼촌의 영향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고보 3학년 때 해방을 맞았다. 새 나라, 새 시대에 걸었던 벅찬 기대와 달리 세상은 이미 격동과 혼란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창열은 반공주의자로 유치장 신세를 지는 등 이데올로기의 사슬에 시달리다 1946년에 월남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시작한다.
김창열은 한국 리얼리즘 회화의 거장 이쾌대(1913~1965)가 운영했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나는 그분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 이쾌대 선생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야.” 이쾌대는 6.25 때 북으로 건너간 이후 정치적 금기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월북작가들의 해금조치 이후 1991년 신세계미술관 회고전에서 극적으로 부활했다. 김창열은 이쾌대의 수제자였다. 김창열은 검정고시를 거쳐 1948년 서울미대에 입학했다. “나는 학교에서 성분이 나쁘다고 낙인이 찍혔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쾌대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어.”
김창열은 대학 2학년 때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민의용군에 강제 입대한 김창열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나 경찰학교를 졸업했다. 휴전이 되자 김창열은 서울의 경찰전문학교에서 근무했다. 이 때 김창열은 도서주임을 맡아 일본에서 화집이나 미술잡지를 구입해 볼 수 있어, 당시 세계미술을 풍미했던 앵포르멜의 흐름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또 학교 교실에 아틀리에를 마련해 작품 제작을 병행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김창열은 앵포르멜 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그는 1961년 경찰 생활을 그만 두고 서울예고 교사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