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의사의 애국행위에 대한 논란

임종구 작성일 15.04.14 09: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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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입니다. 해당 블로그 외에도 치하포 사건을 검색하면

 

상당히 많은 글들이 존재합니다. 해당 사건 관련한 논문도 존재하니 단순히 국까 정도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http://blog.naver.com/purmir00/150157480653 

 

 

 

1. 사건 장소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입니다.

 

2. 살해당한 일본인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 1866년 ~ 1896년)입니다.

일본군 중위라는건 김창수(김구 선생)의 주장이나 현재로선 그를 일본군이나 혹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범인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확인되는 내용은 쓰치다 조스케는 쓰시마 출신으로 이즈하라항의 무역상 오쿠보키에 고용되어 조선에 약 장사를 하러 들어왔던 인물입니다. 그는 1895년 10월 진남포에 도착 11월 4일에 행상을 하러 황주에 갔다가 사건 당시 황주에서 배 한척을 빌려 인천으로 돌아가던 길이였습니다.

계림장업단(조선 경제 침탈에 앞장섰던 일본 상인 연합) 소속이라고 하는데 계림장업단은 1896년에 결성되었으므로 그가 계림장업단 소속일 수도 없습니다.

그냥 조선에서 약장수 하며 돈 벌다가 인천으로 가던 중 변을 당한 민간인 피해자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3. 살인 혐의로 김창수(김구)는 조선 순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습니다. 김창수는 국모의 원수를 갚은 의거라 주장햇지만 단순 살인 강도 사건으로 결론 짓고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주장이 효력을 발휘한건지 사형 판결 이후에 형이 집행되지 않은체 해를 넘겼습니다. 고종이 전화를 걸어 김창수의 사형 집행을 중단시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당시엔 아직 전화가 가설되기 전이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부분은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논란이 있습니다)

감옥에서 한 해를 넘긴 김창수는 수감된 동료 죄수들과 탈옥에 성공합니다.

탈옥한 김창수는 이름을 김구로 바꾸고 충청도로 도주하여 사찰에 몸을 숨겼습니다. 사찰에 몸을 숨기면서 아예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으며 한때 평양 인근의 암자의 주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사건이 잊혀질 즘 김구는 환속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김구선생님이 의사인건 사실이지만 미화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김구선생님의 어마어마한 업적에 누를 끼치려는게 아니라. 


이 나라의 역사의 태동이신분인만큼. 오히려 허점없이 확실히 따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역사적 기술이 김구 선생님의 자의가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오점은 오점이고 역사는 역사라 생각합니다.


의견이 분분한 부분도 있고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오히려 백범일지에는 전혀 기록도 안된 내용으로 미화되어서 올라오는 글이 참 많다는 점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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