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끝나고난 뒤 / 이정하
참 어이가 없네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시면 나는 어찌합니까.
그토록 강렬하게 흩뿌려 놓고 지금 와서 슬쩍 다른 데 가 계시면 나는 뭡니까.
이게 대체 무슨 경우랍니까.
내 몸과 마음은 이미 폭싹 다 젖었는데.
밤새 내린 비 / 이정하
간밤에 비가 내렸나 봅니다
내 온몸이 폭삭 젖은 걸 보니
그대여, 멀리서 으르렁대는 구름이 되지 말고
가까이서 나를 적시는 비가 되십시오
사랑의 우화 / 이정하
내 사랑은 소나기였으나
당신의 사랑은 가랑비였습니다
내 사랑은 폭풍이었으나
당신의 사랑은 산들바람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었지요
한때의 소나긴 피하면 되나
가랑비는 피할 수 없음을
한때의 폭풍 비야 비켜가면 그뿐
산들바람은 비켜갈 수 없음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