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두 얼굴, 나와 우리

말라카오 작성일 16.06.05 07:3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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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맹 기 (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교수)  

한국 사회에는 자신과 남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생각하는 "우리주의"가 발달되어 있다. "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 집사람," "우리 학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분명히 "나"를 의미하는 것임에도 우리는 "우리"라는 표현을 쓴다. 이러한 표현을 영어로 직역하여 "Our wife"라는 표현을 쓴다면 서양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가 일처다부제 사회에 살고 있는 줄로 착각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주의"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집단주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식이 강하다고 해서 우리 사회를 집단주의 사회로만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사회는 집단주의 못지 않게 개인주의적 사고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특히 근대화와 함께 서구적 가치관이 유입되면서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는 더욱 강화되어서 때로는 집단주의와 충돌하여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집단주의와 결합되어 집단적 이기주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따라서 적어도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집단주의 의식과 개인주의 의식이 병존하는 사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가 형성되어온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고, 현대 사회에서 이 두 가지 이념이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개인주의의 역사적 배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무리를 지어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산다는 것이 인간의 집단성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사회성은 본능적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즉,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그 약점을 보충하고 먹이감을 쉽게 얻기 위해 군집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익사회(Gesellschaft)"는 이점을 고려하여 계약과 기능을 중심으로 형성되며, 그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개인주의 사상의 근원은 동서양 어디에서나 찾아 볼 수 있지만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사고는 동양보다 서구사상에서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양의 개인주의 이론은 개인의 존엄성과 집단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  

1)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  

개인주의적 사상의 정립자라고 할 수 있는 밀(J.S.Mill)은 자유론에서 "만약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의견으로 통일되고 오직 한 사람만이 반대의 의견을 제시한다면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모든 사람을 침묵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의 의견을 침묵시킬 수 없다"라고 역설하면서 개인의 의견이 존중되는 사회를 개인주의적 사회의 기틀로 보고 있다. 로크(Locke)는 관용론에서 "영혼의 문제에 대한 배려는 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고 결론지음으로써 밀과 같은 맥락에서 개인의 자유를 역설한다. 이러한 밀과 로크의 사상은 인본주의적 사상의 핵심을 이루어 "개인의 존엄성은 차별 없이 보장해야 한다"는 기본명제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는 기독교적 사상, 특히 개신교의 가르침에 의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신만이 소유할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인간에 의해서 소유되거나 침범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신이 가진 이성의 일부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바탕한 세속적 개인주의가 절정에 달하면 무정부주의(Anarchismus)가 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타인의 의지가 자신에게 부과하는 성가신 과제를 거부하며, 자기 의지에만 종속되어 있고 자기가 만든 질서에만 복종하려는 원칙을 고수한다. 따라서 무정부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운동이라 하겠다.  

2) 합리주의와 이기주의  

이처럼 대부분의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자는 원칙에서 출발하는데,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존중하자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기초한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말이나 합리적이라는 말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합리적이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떤 수단이 가장 좋은 것인지를 계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차인석, 1992). 이를테면,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은 회사의 번영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될 것이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인재를 고용하여야 한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장은 정실위주로 사원을 채용하지 않고 능력위주로 사원을 채용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성은 때로는 목적 합리성이라고도 불린다. 그 이유는 합리성이 어떤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합리성이란 결국 자신이 잘 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상은 개인의 합리성을 이기심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요소로 간주한다. 루소(J.J.Rousseau)는 이기심이란 모방과 격정(激情)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모방은 자신보다 앞선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흉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관성이 결여된 상태로, "대세를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합리성을 포기하는 사람들의 심리에서 잘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방이란 합리성의 부재이며 책임의 회피인 것이다. 격정은 비합리적인 욕망을 일컫는 말이다.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사회생활에서 남보다 더 칭찬 받고 싶어하고, 재산을 모아서 허세를 부리고 싶어하고, 남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모든 인간의 욕심을 루소는 격정이라고 표현한다. 격정 때문에 쾌락은 사랑과 분리되고 자기 사랑은 이기심과 일치되고,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합리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모방과 격정에서 벗어나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가장 현명한 수단을 찾아낼 수 있도록 해준다. 인간이 합리적이지 않다면 개인주의는 모방과 격정을 조장하여 사회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이기주의에 빠져 사회를 파멸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회가 파멸되면 결국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이기심은 결국 이타심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이기적인 인간들을 통제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이처럼 인간에게는 맹목적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이성의 손 또는 합리의 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서양적 개인주의란 진정으로 자신을 이롭게 만드는 것은 자신과 사회가 모두 잘되는 것이라는 합리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개인적 가치를 존중하며 살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동양적 개인주의의 뿌리  

개인주의의 뿌리는 서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일찍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성선설은 주장한 맹자는 인간의 내면적 천성을 천명(天命)과 연결시켜 생각하였다(김형효, 1990). 천명이 없는 천성은 보편성이 결여된 인성이며 천성이 없는 천명은 인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결국 인간의 천성은 천명과 같은 것이어서 고결하고 존엄하다는 이야기이다. 불교도 따지고 보면 상당히 개인주의적 종교이다. "해탈"을 추구하는 승려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의 개인적인 구원을 갈망한다. 때로는 사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저버리면서까지 자신의 구원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주자학자들은 불교의 해탈의식을 이기주의적 발상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조혜인, 1990).

주자학자들은 인간의 마음이 이(理)와 기(氣)의 결합으로 이뤄진다고 본다. 그들은 마음의 수양을 통하여 '기'의 표현인 욕정을 극복하고 '이'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 하였다. 보통사람은 '기'가 불순하여 자기 속에 있는 '이'를 따르지 못한다. 단련과 수양을 통하여 '기'의 발현을 막지 못하는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군자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는 것이다. 맹자는 <양혜왕 상편(梁惠王上篇)>에서 "군자는 불변의 생업이 없더라도 불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군자가 아닌 사람은 생업이 없으면 일정한 마음, 즉 항심(恒心)을 가지지 못하며, 항심이 없으면 행동을 함부로 하고, 고집을 부리며, 간사해지고, 사치스러워진다.

주자학 또는 유교가 관심을 두는 것도 결국은 개인을 완성시키는 방법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학도 사회나 집단의 생리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개인의 생리를 설명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것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나라와 천하의 근본은 개인이며 개인을 완성시키는 것이 사회를 완성시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주자학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불교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겠다.  

4) 인(仁)과 이기주의  

맹자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는 선(善)하나 문화생활 속에서 이기심을 배워 타락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임금은 내 나라를 어떻게 이롭게 할까만 생각하고, 대부는 어떻게 하면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만 생각하고, 사서인(士庶人)은 어떻게 내 몸을 이롭게 할까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상하가 그렇게 이익만 쫓게 되면 결국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고 하였다(맹자, 양혜왕 상편). 즉, 후천적으로 배운 이기심에 사로잡힌 인간은 결국 악한 모습을 갖게 된다고 본 것이다. 공자는 <논어> <이인편(利仁篇)>에 이런 인간상을 "소인(小人)"으로 규정한다. 이(利)에 밝으면 이익충돌, 이기심, 욕심 등에 사로잡혀 타인들에 대한 원망이 늘어난다고 본 것이다.

서양사상이 이기심을 억제하는 요소로 이성과 합리성을 들고 있다면 유교사상은 인(仁)이 그러한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은 합리성과는 달리 본능적인 것이 아니고 수양을 통하여 체득, 즉 습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사상은 습관화가 본능을 제압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본능은 다분히 맹목적이며,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인 양상을 띠고 있지만 습관은 내적 욕구, 심리적 요인, 나아가 외부적 제약 등이 결합하여 형성한다. 공자는 개인들이 인을 습관화하길 요구한다. 즉 공자는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발생하는 본능적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그 대안적인 습관으로 인의 철학을 편 것이다.

인은 서양적 의미에서 감정이입(empathy)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 자신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측은해 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2. 집단주의의 사상적 배경  

개인주의의 뿌리를 서양 사상에서 찾아야 한다면 집단주의의 뿌리는 동양 사상에서 찾아야 한다. 동양 사상 중에서도 집단주의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은 유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무엇보다도 인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개인의 인격을 완성시키고자 하는 데도 있었지만 보다 더 궁극적인 이유는 인의 실천을 통하여 사회를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데 있었다. 즉, 인을 실천하는 것만이 개인의 사사로움을 죽이고 전체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라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유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한 것은 사사로움이 없는 개인들 간의 조화로운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다.  

1) 가족 공동체와 집단의식  

유교적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가족이다. 공자는 인을 우선 가족 구성원과 더불어 습관화시키길 바란다. 공자는 인의 구체화된 형태를 어버이의 섬김, 즉 효(孝)에서 찾는다. 효는 부모가 준 자신의 몸을 잘 돌보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효경(孝經)>은 "우리의 신체와 머리카락, 피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처럼 부모의 유산에 대한 존엄성에 출발한 효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 부모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 그리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실행하여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 등을 요구한다(최재석, 1983).

한편 부모는 자식을 성실하게 키워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어진 마음을 가지고 자식을 보살피며 자식의 입신을 위하여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아야 하고 필요시에는 자신의 욕구를 희생해서라도 자식이 잘 되는 길을 택해야 한다. 사실 효라는 것도 이러한 부모의 희생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모 자식간의 관계는 가족 성원 전원에게 확대되어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정성껏 보살피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효를 다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가족내의 인의 실천은 가족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보다는 구성원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타자중심적 삶을 추구하도록 하였으며, 가족내의 개인들은 복수의 개체가 아니라 단수의 일체로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가족은 이미 죽어 없는 자들과 미래에 태어날 자들까지도 일체 속에 포함시키며, 그 일체내에서는 한 구성원의 아픔이 전체의 아픔이며 한 구성원의 죄악이 그 일체의 죄악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일체로서의 가족 속에서는 개인성은 무시되고 개인은 권리보다는 의무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부모는 자식을 정성스럽게 키우는 의무를 지니며, 자식은 부모를 공경할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따라서 일체적 가족문화는 의무문화라 이름할 수 있다. 의무는 개인의 본능적 감각이 집단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규제하며, 구성원 상호간에 집약적 커뮤니케이션 관계를 유지시킨다.  

2) 예(禮)와 집단주의  

가족내의 집단의식은 예를 통하여 생성되고 예를 통하여 재강화된다. 그 이유는 예가 가족내 인을 표현하는 행위양식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란 인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논어 <안연편(顔淵篇)>에 "인이란 곧 자기를 이겨내고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爲仁)"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에 대한 효도 예를 통하여 실천된다. 이것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예의로서 섬기며, 돌아가셨을 때에는 예의로써 장사 지내고, 또 예의로써 제사 지내는 것이 효도이다"라는 논어 <학이편(學而篇)>의 가르침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예는 일상의 생활질서라 할 수 있다. 즉, 예는 하늘의 질서요, 가정에 적용됐을 때는 가정의 질서가 되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효의 표출형태인 의례를 통하여 각자의 행위를 집단의 위계질서에 맞추어 간다. 일례로 문안인사를 들 수 있다. 문안인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가족 성원들은 상하의 질서를 명확히 하고 서로의 존재를 재확인한다.

제례 역시 집단의식을 재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제사에 바치는 제물은 때로는 자신의 몸과 같은 것이 된다. 조상의 혼에게 몸을 바치는 의식을 통하여 가족구성원들은 상호간에 동질적 믿음의 분위기를 확산시킨다. 한 조상에 대한 제사가 절기마다 반복되는 것도 집단내의 일체감을 지속적으로 재강화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제례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반복함으로써 구성원 사이에 공감의 폭을 넓혀갈 수 있다는 것이다.  

3) 가족 공동체의 연장  

유교는 가족주의적 공동체의식을 사회전체로 확대시켜 나아간다. 가정은 나아가 집안, 즉 문중을 이루고, 여러 문중은 국가를 형성한다. 따라서 가정에서 강조되던 일체의식은 대단위 가족인 문중에도 그대로 적용되며 나아가서는 국가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 한 개인은 자신의 직계 가족에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위에 걸친 가족의 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확대과정에서 효는 충으로 확대된다. 충은 직계 조상이 아닌 확대된 가족 단위의 장에게 보내는 효와 같은 것이다. 위로는 군왕에 대한 충성에서 시작하여 아래로는 자기 조직의 장에 대한 충성에 이르기까지 충은 효와 그 근본을 같이 하는 것이다. 효가 충으로 확대되듯이 조상에 대한 예는 사회적인 예로 확대된다. 군왕과 신하, 그리고 장과 부하는 사회적 예를 통하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간에 위계질서를 확립해 가는 것이다. 그 질서 속에서 도덕이 형성되고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공유의 범위가 확산된다. 그래서 부자간에는 친화가 생겨나며, 군신간에는 의리가 생겨나고, 부부간에는 분별이 생겨나며, 장유 간에는 서열의식이 생겨나고, 친구간에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확대 공동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가족과 유사한 집단의식을 갖게 된다. 공동체는 개인의 군집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인식되어 한 구성원의 아픔이 전체의 아픔으로 인식되고, 전체의 행복이 개인의 행복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속에서 각 개인은 개인성을 상실하고 공동체에서 수행하는 역할에서 의미를 찾게 된다. 즉, 개인은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집단주의 공동체에서는 개인이 집단으로부터 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평가는 그 개인의 가치에 근거하지 않고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가치에 근거하게 된다. 따라서 개인들이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속해 있는 집단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 집단의 개인들은 스스로를 자기집단과 동일시하게 되고 이러한 일체감이 "우리의식"을 낳게 된다.

우리의식은 개인주의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따라서 집단의 한 성원이 의무를 무시하고 개인적 자유를 추구하거나 집단과 별개로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강조하게 되면 집단의 다른 성원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식이 강한 집단은 공동체의 체면이나 이익을 중시하고 구성원 개인의 존엄성, 개인의 자각, 혹은 독립성 등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3. 일터에서 형성되는 집단주의  

이상에서 집단주의의 사상적 근거가 된 유교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동양의 집단주의, 특히 우리 나라의 집단주의가 유교의 사상교육에 의해서 형이상학적으로만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유교가 우리 사회에 강한 영향을 미쳐왔고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을 길러준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집단주의가 형성된 이면에는 유교 이외에도 우리의 독특한 생활환경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집단주의는 우리의 조상들이 일터에서 쌓아왔던 여러 가지 공동체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형이하학적으로 이루어진 면모도 강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조상들이 일을 통하여 집단의식을 형성해온 과정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하자.  

1) 이웃사촌과 두레 공동체  

유교의 가족주의적 집단주의 사상은 양반사회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농민을 비롯한 평민계층에는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평민들은 양반과 다른 가족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 가족의 연장선인 문중이나 국가사회에 참여할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평민, 상민, 천민들은 자신의 농토를 갖지 못하였다.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뿔뿔이 흩어지는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대가족을 형성하지 못했고 주로 핵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대부분 늦게 결혼했으며, 그들의 후손들도 영양의 부족으로 혹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탓으로 일찍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평민들에게 있어서 가족의 개념은 양반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었고 효의 개념도 허위의식, 즉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중요한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라 이웃이었다.

가족과 흩어져 살던 평민들에게 이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농사일을 할 때도 이웃의 도움이 필요했으며, 집을 짓거나, 혼인을 하거나, 상을 당하여도 이웃이 도와주어야만 했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두레'이다. 두레란 일종의 직업공동체(Arbeitgemeinschaft)로서 두루, 모두, 전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신용하, 1987). 두레라는 말은 '부분'과 '전체'를 모두 포함하는 언어이다. 즉 두레 속에서 부분은 부분으로 인정되지만 그 부분은 전체에 의해서 묶여진다는 것이다.

두레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돌아가면서 서로의 농사일을 도와준다. 품앗이, 품들이, 계 등은 자신이 해놓은 일의 대가를 준만큼 돌려주는 일이지만 두레는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도맡아 주는 작업의 형태이다. 두레에서는 작업의 분화도 전체 안에서 결정되고, 일의 능률도 집단적으로 계산되는 것이 특징이다.

자작농, 소작농, 농업노동자로 구성된 농민들은 주로 평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서로가 평등했다. 논어의 <계씨편(季氏篇)>에도 나오듯이 "국가를 가진 자는 부족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균등하지 않은 것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단지 안정되지 않음을 걱정한다. 대개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화합하면 부족이란 없으며 안정되면 위태로움이 없는 법이다." 농민의 상호간 평등은 그들로 하여금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하였고 그들 내의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켜 주었다.

두레의 구성원들이 일하는 방법은 퍽 민주적이었다. 두레의 우두머리격인 '영좌'가 인도를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손놀림은 절도를 요구했지만 그 절도를 강압적인 방법으로 이끌어낸 것은 아니었다. 마치 농악에서의 북, 징, 쇠의 소리가 따로 존재하듯이 두레의 단위는 개개인의 집합이었다. 그러나 따로 존재하는 소리가 절묘하게 서로 어우러짐과 같이 일의 진행은 집단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2) 두레 공동체의 일체화 의식(儀式)  

두레 공동체는 여러 가지 의식을 통하여 일체감을 조성했는데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농악이다. 노동을 위한 두레에는 반드시 농악이 따른다. 논밭일은 혼자서 해도 무방하나 두레에는 집단으로 일함으로써 고됨을 잊고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더 신명나게 일하자는 의미가 있다. 노동의 고통과 긴장을 노동요로 완화시키고 신명나게 분위기를 북돋워주는 수단이 농악이다. 농악의 신명남은 작업장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룬다. 앞쇠가 앞서가고 태평소, 북, 징, 장고, 소고 등이 따라오고 뒷쇠가 마무리를 한다. 농악은 두레가 움직일 때 마다 같이 붙어 다닌다. 일을 마치고 지친 때에도 농악놀이는 어김 없이 따라 붙는다. 그래서 두레의 구성원들은 피곤한 줄 모르고 작업터에서 돌아오는 것이다.

농악은 들의 놀이판에서 끝나지 않고 마당에서 벌어지는 마당놀이로 이어진다. 이 놀이 마당에는 관객과 배우가 구분되지 않는다. 마당이란 두레민의 삶의 토대이자 그 삶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문화의 장이었으며 아울러 공동집회의 장소였다. 두레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놀이를 통하여 공유의 범위를 넓혀갔다. 놀이를 통하여 구성원들은 자기 집단의 다른 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들과 신념들을 공유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의식의 공유는 총체적인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두레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깃발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 깃발 역시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조상의 혼에 대한 제례를 통하여 가족구성원들 사이에 동질적 믿음의 분위기를 창출하듯 두레는 깃발을 통하여 성원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였다. 깃발은 두레마다 독특했으며 그 두레의 힘의 정도를 나타내기도 했다고 한다. 큰 두레가 움직일 때 작은 두레는 경의를 표하거나 길을 비켜주었으며, 심지어 말을 타고 가던 양반도 말에서 내려 두레 깃발 앞을 지나갔다고 한다.

4.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현대적 의미  

이상에서 우리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사상적 배경과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그러면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 두 이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갖는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오늘날 우리는 흔히 서구사회를 개인주의적 사회라고 하고 동양사회를 집단주의적 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는 단순한 편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반복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서양과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이 집단이나 조직으로부터 "감정적으로 독립되어(Emotionally independent)" 있다(홉스티드 Hofstede, 1980). 즉 개인은 집단의 일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는 개인의 이익은 개인 스스로가 돌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에 동양과 같은 집단주의적 사회에서는 개인이 그가 속한 내집단(內集團)의 일부가 되어 그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떼놓을 수 없다. 즉,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집단이 그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하고 구성원은 그 반대급부로 집단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한 개인주의적 사회나 완전한 집단주의적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도 가족이나 친구를 중심으로 한 집단의식은 존재하며 집단주의적 사회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은 존중되고 있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구분은 개인과 집단 중 어느 하나가 완전히 무시되고 어느 하나가 유일한 존재처럼 간주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서구사회가 개인주의 사회라고 함은 그 사회내에서는 집단보다는 개인이 더 중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양사회가 집단주의 사회라는 것은 이 사회내에서는 개인보다는 집단이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더 중시하고 집단주의는 집단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개인주의 사회와 집단주의 사회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이게 된다(Hui & Triandis, 1986). 그러면 여기서 집단주의 사회가 갖는 특성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집단주의 사회의 개인은 개인주의 사회의 개인에 비하여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영향에 대하여 더 많은 고려를 한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행동이 내집단 성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경우 집단주의 사회의 개인은 무척 신중해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 욕을 먹을까봐" 또는 "가족이 실망할까봐" 하고 싶은 일도 포기하고 만다.

둘째, 집단주의 사회의 성원들은 정신적 또는 물질적 자원을 서로 공유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주의 사회의 성원들은 내집단 안에서도 서로 "네것" "내것"을 따지지만 집단주의 사회의 성원들은 적어도 자기 집단 안에서는 "네것" "내것"보다는 "우리것"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우리는 "제것만을 챙기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유의식은 사유재산의 경계선마저도 모호하게 하는 경향이 있어 우리는 간혹 집단의 재산을 개인의 재산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셋째,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성원들끼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서로 함께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서로가 함께 속한 집단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한 집단 내의 다른 성원에게 좋은 일이 있거나 나쁜 일이 있을 때 집단주의 사회의 성원들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한다. 오늘날 우리가 친지의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는 것도 모두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넷째, 집단주의 사회의 성원들은 삶의 의미를 집단생활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 감정적으로 밀착되어 있어서 집단의 목적과 자신의 목적을 동일시하며 집단의 성공에서 자신의 성공을 찾으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집단주의 사회의 성원들은 자기 집단에 헌신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부모가 희생을 감수하면서 자식을 위하는 것이나 자식이 가족을 위해 부모가 원하는 직업이나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집단주의 사회는 성원들 간의 조화를 중요시한다. 한 집단내의 성원들은 서로에게 서로를 맞추어 전체가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화음을 이루어낼 때 행복해 한다. 오케스트라의 각 부분은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이 있어서 그 역할만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맡겨진 것 이상을 탐하게 되면 화음은 깨어지게 되는 것이다. 집단주의 사회의 성원도 같은 논리에 의해서 지배된다. 자신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튀어나오는" 것은 금기이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만족해야만 집단 전체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제12장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유교사회의 오륜이라는 것도 인간관계의 조화를 중시한 가름침에 불과한 것이다.

이상에서 집단주의 사회가 갖는 다섯 가지 특성을 논의하였다. 개인주의는 이 다섯 가지 측면에서 모두 집단주의와 상반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개인주의 사회의 개인은 필요한 경우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른 성원과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정신적 또는 물질적 자원도 자신과 아주 가까운 몇 사람이외의 다른 성원과는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행불행을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으며 집단적 목적을 위해 개인적 목적을 희생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성공이나 불행이 자신의 책임이며 자신의 운명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5. 우리 사회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혼재해 있는 사회이다. 집단주의는 유교의 전통과 두레 공동체를 배경으로 오랜 기간동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주의의 지배속에서도 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맥을 유지해 왔으며 이러한 개인성에 대한 존중의식은 근대화 이후 서구에서 유입된 개인주의와 결합하여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지배의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집단주의적 사회로 볼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개인주의적 사회라고 볼 수도 없다. 구태여 한국사회를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차원에서 진단해 본다면 우리 사회는 집단주의를 근간으로 하되 개인주의를 상당 부분 인정하는 사회라고 하겠다.

우리 사회 속에 혼재하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때로는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내지만 때로는 서로가 갈등하여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우선 이 두 개념이 조화를 이루거나 상호절충되는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적 전통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을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전통적 조직 내에서는 일의 통제보다는 인간관계의 통제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 왔다. 한편 서구적 개인주의에 바탕한 조직은 일의 통제를 우선으로 하며 인간관계의 통제는 차후의 문제로 취급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조직은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영향을 골고루 받아 일의 통제와 인간관계의 통제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사무실 안에서 업무에 임할 때는 비교적 서구적인 패턴을 따르지만 사무실 밖에서는 회식이나 상조회 모임 등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절충을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이 두 이념이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역할의 갈등이다. 개인주의 하에서 한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역할을 갖는다. 즉 사회를 구성하는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성원으로서 스스로의 성공과 실패를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주체인 것이다. 그러나 집단주의 하에서 개인은 무척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다. 즉 한 집단의 성원으로서 그 집단의 위계질서 속에서 극히 제한된 기능만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은 자기 스스로의 주체여서는 안되고 집단의 한 부품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역할은 개인을 혼돈에 빠트리게 되고 정신적으로 갈등하게 만든다.

이러한 역할갈등은 우리 사회의 도처에 널려있다. 일례로 한 성인남자의 혼인상대가 결정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전통적 집단주의 의식에 따른다면 혼인이란 가족이라는 집단이 집단적으로 결정할 일이다. 이때 아들이 할 일은 부모가 정해주는 배필을 기꺼이 맞아들여서 백년해로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의식에 따른다면 혼인은 한 개인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일이므로 자신의 행불행을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성인 남자가 독립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아들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배필을 결정하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 가정의 아들들은 이 두 역할, 즉 가족의 일원으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과 하나의 독립된 성인으로서 수행해야 할 역할 사이에서 고뇌하고 있다. 가장 행복한 경우는 이 두 역할이 수행한 결과가 일치하는 경우, 즉 자신이 고른 배필을 부모가 좋아하는 경우이지만 그런 일은 별로 흔하지 않다.

이러한 역할의 갈등은 세대간의 갈등을 초래한다. 젊은 세대들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개인주의 사회를 좋아하지만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그리고 위계질서가 확실한 집단주의 사회에 애착을 갖는다. 따라서 젊은 세대들은 개인주의적 역할을 고집하고 기성세대들은 그들에게 집단주의적 역할을 강요한다. 위의 예에서 이야기 하자면, 아들은 자기가 스스로 배필을 결정하겠다고 우기고 부모는 가족의 동의에 의한 결정을 수용해야 한다고 고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들이 언제나 개인주의에 집착하고 기성세대들이 언제나 집단주의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 두 세대가 집착하는 이념이 바뀌기도 한다. 이를테면 기성세대들은 간혹 "요즘 젊은이들은 독립심이 없다"고 욕을 한다. 결혼해서도 부모덕으로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굴리며 살려하는 젊은이들을 꼬집어 하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극히 개인주의적 관점이다. 왜냐면 집단주의 하에서는 집단의 일원인 부모의 덕을 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부 젊은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에게 충분한 혜택을 베풀어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한다. 이러한 도움의 요구는 집단주의 하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개인주의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는 세대간의 갈등 이외에도 여러 가지 갈등을 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원죄는 집단주의나 개인주의 그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은 어느 한 집단이 하나의 이념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각 집단이 이 이념 저 이념을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즉, 개인주의가 자신에게 유리하면 개인주의를 내세우고 집단주의가 자신에게 유리하면 집단주의를 내세우는 무원칙주의가 우리 사회가 가진 갈등의 주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김형효 (1990). 맹자와 순자의 철학사상. 삼지원.  

신용하 (1987). 공동체이론. 문학과 지성사.  

조혜인 (1990). "한국의 사회조직과 종교사상." 한국사회사연구회 논문집 17. 문학과

지성사.  

차인석 (1992). 사회의 철학. 민음사.  

최재석 (1983). 한국가족연구.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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