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없이도 ‘기억’ 할 수 있다
막스플랑크, 원생동물서 기억 메커니즘 발견
2021.02.25 07:26 이강봉 객원기자
더운 여름철이 되면 화단에서 밝고 노란색의 칙칙한 얼룩을 볼 수 있다.
이 얼룩을 그냥 놔두면 회색으로 변하고 단단해지다가 갈색 가루로 분해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이 가루가 주변을 더럽힌다고 불쾌해 한다.
그러나 이 얼룩은 황색망사먼지, 혹은 황색망사점균이라고 하는 점균류다. 과거에는 일시적으로 진균(곰팡이)으로 분류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핵을 가지고 있는 생물 중 가장 단순한 원생생물계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이 번식을 위해 수백만 개의 포자를 갈색 분말로 남겨놓는다.
썩은 나무에서 자라는 밝은 노란색 황색망사점균. 뇌가 없는 상태에서도 튜브처럼 생긴 관을 통해 유전자로부터 전달되는 ‘보디 플랜’에 따라 움직이면서 기억을 대체하고 있다. ⓒWikipedia
세포 내 튜브 속에 기억을 저장하고 있어
흥미로운 사실은 이 황색망사점균(Physarum polycephalum)이 신경계 없이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23일 ‘라이브 사이언스’에 따르면 막스플랑크 연구소 과학자들이 두뇌가 없는 이 점균들이 어떻게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면서 그 기억을 관리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발견했다.
이 노란색 얼룩처럼 생긴 점균들은 하나의 핵을 가진 작은 세포들이다. 그런 만큼 하나의 세포를 가진 작은 세포로 존재할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 여러 세포가 융합해 많은 핵을 가진 거대한 세포를 형성할 수 있다.
융합된 세포 면적이 수백 제곱센티미터에 이를 수도 있는데 이렇게 거대해진 세포는 내부적으로 미세한 튜브를 통해 마치 사람의 혈관과 같은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그리고 이 튜브가 수축하면서 체액과 영양분을 전달한다.
더 흥미로운 점은 거대하게 융합된 세포의 이런 대사 활동이 뇌가 없는 상태에서 신경계의 통제를 받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를 수행한 막스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 for Dynamics and Self-Organization) 과학자들은 그 메커니즘을 추적했고, 이 거대한 점균 세포가 기발한 방식으로 신경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양원에 대한 유기체의 반응을 실험적으로 추적한 결과 영양소 위치에 대한 기억이 네트워크 모양으로 구축된 유기체 형태에 이미 암호화돼 있었다. 관찰 결과 보디플랜(body plan)에 따라 먹이에 대한 메모리를 인코딩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디 플랜이란 동물의 발달과정에 있어 유전적으로 그 기억과 기능이 이미 몸체 각 위치에 결정돼 있어 그대로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만큼 뇌를 지니고 있지 않더라도 뇌가 있는 것처럼 활동하고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논문은 22일(현지 시간)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게재됐다. 논문 제목은 ‘Encoding memory in tube diameter hierarchy of living flow network’이다.
뇌 없는 동물도 복잡한 환경서 번성할 수 있어
기억(memory)은 신경계를 가진 유기체와 관련이 있다.
매우 단순한 유기체조차도 복잡한 환경에서 번성하기 위해 과거의 경험에 대한 정보를 저장한다. 영양원을 성공적으로 포획하고, 또 포식자로부터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억을 못 하는 것으로 알려진 원생동물과 같은 단순한 유기체는 어떻게 이런 기억들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오랜 기간 생물학자들의 머리를 긁적이게 한 중요한 질문 중의 하나였다.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이번 연구 결과는 노란색 얼룩 모습의 황색망사점균이 자신의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암호화해 기억장치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거대한 단세포 점균을 구성하고 있는 네트워크처럼 엮어진 튜브 ‘보디 플랜’이 영양원(먹이)의 위치를 인코딩하고 또한 상황 변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결정해 놓고 있었다.
점균이 먹이를 발견하면 빠르게 튜브형 네트워크를 재구성해 일부 튜브를 넓히고 다른 것을 축소하면서 먹이에 대처하고 있었다. 또 먹이를 섭취한 후에는 그 형태로 남아 또 다른 먹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구팀은 영양원에 반응하여 직경이 커지거나 줄어들면서 튜브의 직경 계층 구조에서 영양소의 위치를 각인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또 이론적 모델과 실험 데이터를 결합해 이 점균의 기억이 어떻게 암호화되고 있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먹이는 세포질의 흐름에 의해 운반되는 부드러운 물질을 방출하고 있었는데 이 연화제를 받아들인 튜브는 직경이 커졌고, 다른 튜브들은 직경이 작아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먹이의 위치가 네트워크의 튜브 직경 계층 구조에 저장되고 있으며 계속해 검색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 결과가 점균류‧곰팡이 같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유기체가 복잡한 환경에서 어떻게 번성하는지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고생물학자들은 ‘보디 플랜’이 약 5억 7000만 년 전부터 5억 1000만 년 전까지 캄브리아기 폭발에서 순식간에 진화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물 진화는 초기 고생대 ‘보디 플랜’의 점진적인 발달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이번 연구 결과가 향후 고생물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