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축구를 보면 시원찮은 득점력과 골결정력으로 실망을 많이 하곤 합니다. 전통적으로 윙포워드를 이용해서 득점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스트라이커의 역활이 커지는데..
누가 제2의 황선홍이니, 황선홍이 후계자로 뽑았다느니 하는 말은 있지만.. 황선홍을 누가 대체할수 있단 말입니까?
94년 미국월드컵.. 한골을 따라잡고 분이 풀리지 않는지 화난 듯한 셀레브레이션..
비난이 큰 만큼 선수생활도 순탄하지 않았죠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서지 못한 시간만 따지면 3년 가까이 된다는 기사도 있었고..
어쨋든 제가 기억하는 황선홍의 최고의 순간은
98년 4월 부상에서 회복한 후 잠실경기장에서 펼쳐진 한일전에서 멋진 오버헤드킥을 골로 연결. 2-1 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이날 보여준 슬라이딩 세리머니는 최고였죠.
한창 축구보러 돌아다닐때라 경기장에서 직접 봤는데, 일본에서 원정온 수천명의 울트라스 중 눈물을 뿌리며 돌아가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두번째는 역시 02 월드컵 폴란드전에서의 골..
-------------------------------------------------------------------------------- `황선홍이 쓰는 황선홍 이야기'
프롤로그
8살때 어머니가 떠났다.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공터에서 혼자 공을 차기 시작했다.그리고 어느날 깨어 보니 유명한 축구선수가 되어 있었다.그 만큼 나는 축구에 미쳐 정신 없이 살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축구가 있었기에 나는 외롭지 않았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날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서 축구를 빼면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게없다. 아버지와 형제,아내와 딸 모두가 축구 때문에 견고해진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거역할수 없었던 나 황선홍의 운명,축구 이야기를 이제 축구 팬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 덜그덕 덜그덕 그릇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뜬다. 살짝 젖혀진 커텐사이로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고개를 뒤밀고 있다. 모처럼 늦잠을 잔 모양이다. 아이는 아직도 깊은 잠에 취해 있는 듯 세근거린다. 아내의 경쾌한 설겆이 소리와 아이의 부드러운 숨결은 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를 고요하고 달콤한 아침의 세계로 안내한다. 혼자가 아닌 가족과 함께 있다는건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모처럼 맞은 휴일이므로 늦잠을 자도 되건만 아내는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아침 준비의 마무리인 찌개의 간을 보고 있다. 그런 아내를 놀라게할 요량으로 살며시 다가가 허리를 덥썩 껴안는다. 순간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내. 이내 까르르르 햇살 같은 웃음을 온 집안에 뿌린다. 그런 아내를 이번에는 가슴에 힘껏 안는다. 참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진 여자다.
" 어머니 없이 보낸 유년 시절 "
- 나의 고향은 충남 예산군 응봉면 입촌 2리. 예산읍에서 약 4km 떨어진 산촌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 마을은 집성촌으로 지금도 황씨 이외의 성을 가진 사람은 보기 드문 곳이다.
1968년 7월 13일에 태어난 나는 이 곳에서 네 살까지 산 후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가 운수업을 하는 관계로 할머니와 할아버지 품을 떠나 우리 식구만 따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워낙 어렸을 때의 일이라 이때의 기역은 뚜렷한 게 없다.
1975년 3월 나는 집에서 가까운 묵동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놀기 좋아했던 나는 학교가 파하는 대로 중랑천변에 있는 둑방으로 달려갔다.그 곳에는 학교운동장보다도 넓은 놀이터가 잘 조성되어 있었다.
그 날도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신나게 공을 차며 놀다 어두컴컴해져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여느날과는 많이 달랐다. 고질병처럼 집안을 눅눅하고 냉랭하게 점령하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화가 마침내 정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어디에 갔는지 안 보이고, 아버지만 안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부부 싸움이 있고 난 후에는 반드시 어머니가 2, 3일 정도 친척집에 머무르곤 했다. 때문에 며칠만 지나면 곧 어머니가 돌아오고 집안은 다시 예전의 평온을 되찾으리라 생각했다.그것은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우리는 아버지에게 "엄마 왜 이렇게 안 오냐"고 보챘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이제 너희들 엄마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끼리 살자"라고 타이르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 몰래 어머니를 기다렸다.
몇 달이 지나도 우리는 어머니의 귀가를 단념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어머니를 향한 우리들의 맹목적인 기다림은 그리움에서 미움으로 차츰 변색되어 갔다.
그 해 겨울 내내 나는 중랑천변의 둑방에서 친구들과 공을 차며 놀았다. 저녁이 되면 친구들은 저녁 먹으라며 데리러 온 어머니 손에 끌려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모두 들어가고 어둠만이 내려앉은 둑방에서 나는 한참 동안을 앉아 있곤 했다. 불꺼진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워 했던 건 어머니가 있고 불빛이 따스하게 어려 있는 집이었다.
"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 "
-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아버지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우리 3남매를 시골 할머니 댁으로 내려 보냈다. 서울에 올라온 지 만 5년 만에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전학 수속을 밟은 나는 곧 예산국민학교 2학년에 배정되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약 4km. 버스가 없어 10리 길을 꼬박 걸어다녀야 했다. 그것도 덩치가 제법 큰 산을 두개씩이나 넘어서. 코 앞의 학교를 다니던 서울 생활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달픈 하루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나는 시골생활에 재미를 붙였다. 워낙 놀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금방 사귀었을 뿐만 아니라, 멀게만 느껴지던 학교와의 거리도 걸음걸이가 익숙해지자 차츰 가깝게 느껴졌다.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시골 생활에 쉽게 젖어들 수 있었던 건 나를 사랑해 주고 귀여워해 주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서울에서처럼 불빛이 있는 집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골에서의 행복했던 나날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아버지가 다시 우리를 서울로 불려들였기 때문이다.우리 3남매는 고향 마을과 두번째 이별을 감수해야 했다. 할머니 할어바저는 물론 친구들도 이내 섭섭해 했다.각별히 친했던 친구 몇 명은 떠나오던 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트럭은 목동을 지나 한참 더 동쪽으로 달렸다. 그때서야 나는 우리가 살 곳이 옛날에 살던 집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헤거름에야 우리가 짐을 내린 곳은 묵동보다 더 시골스러운 곳이었다. 동생 선경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빠 여기도 서울이야?" 하고 묻자 아버지는 "이곳은 서울이 아니라 구리라는 곳이란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봄 나는 구리시 도농동에 있는 양정국민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양정국민학교는 다른 학교와 달리 특이한 전통이 하나 있었다. 해가 바뀌고 신학기가 되면 4,5,6학년이 모여 1천M`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형과 나는 전학 수속을 밟자 마자 환영식인 양 대회에 참여했다.
달리기를 비교적 잘했던 나는 촌놈이라고 얕볼까봐 더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한참 뛰다 보니까 내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지켜보던 학교 선생님들을 깜짝 놀라게 하며 1등으로 골인했다. 대회 역사상 4학년이 1위로 골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신학년 달리기 대회 이후 나는 교내 스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육상부원으로 차출되었다. 그래서 구리시에서 주최하는 각종 대회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소년 체전에 출전할 경기도 대표 선수를 선발하는 대회에도 나갔다. 그러나 2등까지만 출전권이 주어지는 이 대회에서 나는 아깝게 3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때 내가 대표로 선발되어 소년 체전에 출전했다면 나의 인생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축구 선수가 아닌 육상 선수로 성공할 수도 있었다는 예기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니었을 확률이 더 많지만 말이다. 사람이란 언제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있게 마련인 모양이다.
" MVP 받고 울어 버린 날 "
- 매일 뛰기만 하는 육상에 싫증을 느낄 무렵 나는 교내 축구 선수로 선발되었다. 정식 축구팀이 생긴 게 아니라 경기도 내 국민학교 친선 경기를 갖기 위해 일시적으로 구성한 팀이었다. 운동이라면 뭐든 소질이 있었던 나는 축구 대회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남다른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5학년 봄 어느날 서울 숭곡국민학교 이종수 선생님이 나를 찾아왔다. 축구팀을 창단하는데 선수로 뛰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이 사실을 안 담임 선생님은 어떻게 내가 축구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종수 선생님은 "가능성 있는 선수를 찾아 경기도 일대를 돌던 중 우연히 게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말하자면 나는 기초부터 훈련만 잘 시키면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방과 후 친구들과 공을 차면서 은연중 '나도 차범근 같은 선수가 될 수 없을까?'하고 꿈을 꾸었던 나인 만큼 싫어 할 이유가 없었다.날아갈 듯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했다. 반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뻐했다.
숭곡국민학교로 전학하자 또 다시 장거리 통학이 시작되었다. 구리에서 서울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때문에 늦어도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아침 운동에 지각하지 않았다. 구리에서 통학하는 선수는 나 말고도 나승화(이 친구는 아무래도 현재 포항의 주전 사이드어택커이지만 부상으로 휴식중인 전 올림픽 대표 나승화선수를 일컫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괄호안은 옮긴이 주.)라는 친구가 있었다. 승화는 이상하게도 나랑 죽이 잘 맞았다. 사는 곳도 그랬고 미쳐도 좋을 만큼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그랬다. 우리는 남들보다 운동장을 한 바퀴라도 더 돌고 공을 단 1분이라도 더 차 보기 위해 등교 시간을 더욱 앞당기기도 했다.
숭곡국민학교는 늦게 창단된 팀이었지만 전국에서 우수한 선수만을 모아 만든 팀이었기 때문에 서울 시내에서 열리는 대회마다 우승하며 화제를 낳았다. 그러던 중 6학년 때에는 마침내 서울시 국민학교 대회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 대회에서 나는 총 5골을 기록해 유력한 득점왕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3,4위전으로 밀려 뒤늦게 게임을 가진 허순구라는 친구가 한꺼번에 3골을 넣는 바람에 득점상을 목전에서 놓치고 말았다.
시상식에서 내 이름 대신 허순구라는 친구의 이름이 불려졌을 때 나는 그만 챙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을 쏟았다. 다 잡은 토끼를 놓쳐 아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팀이 우승을 해서 기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데 갑자기 내 이름이 불리워졌다. 얼떨결에 눈물을 훔치고 시상대에 섰더니 나 보고 최우수 선수라며 트로피를 주는 것이었다. 놀라기는 나 뿐만 아니라 동료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최우수 선수상은 기존에 없던 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한번 울고 말았다.
" 외로운 아버지와 그리운 어머니 "
- 81년 나는 마침내 숭곡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용문중학교에 입학했다. 용문중학교는 축구부가 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팀이어서 성적이 최하위였다. 내가 그런 용문중학교를 택한 것은 좋은 팀에 가서 후보나 교체 멤버로 뛰느니 성적이 저조한 팀에 가서 주전으로 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만큼 축구에 자신이 있었다. 이 같은 생각은 나의 단짝 승화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나란히 용문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는 운동량이나 환경이 국민학교와는 많이 달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는 합숙 훈련 때문에 통학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합숙 훈련은 통학할 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사실 하나를 친구들에게 알려 주었다. 내게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 다른 친구들의 경우 어머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었는데 나는 한번도 찾아와 주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내 신세를 한탄하거나 비참해 하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숙소 대신 내가 뛰는 경기장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게 열성적으로 경기장을 찾아다니던 아버지가 어느 날 횡반 보도를 건너다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치여 한 쪽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아버지는 자신의 고통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내가 뛰는 경기를 못 보게 된것에 대해서만 굉장히 안타까워 했다.
최선을 다해 뛰어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마음 속에 새기며 경기에 출전했다. 경기장은 경기도 시흥이었다. 우리 팀은 나와 승화가 3학년이 되면서 전력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는 깁스를 하고도 나의 선전을 기원하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쉬지 않고 뛰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관중이 많지 않은 스탠드를 한번 힐끗 보았는데 그 곳에 아버지가 와 있었다.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하고 다시 보았지만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불편한 다리를 목발에 의지해 겨우 겨우 온 것이었다. 갑자기 뜨거운 무엇인가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 치솟았다. 골문을 향해 뛰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깊이 다짐했다.'아버지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리라'고.
84년 나는 용문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용문고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내가 키운 꿈은 후에 월드컵 대표 선수가 되어 20여년 넘게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한국 축구의 한을 풀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월드컵 본선 진출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라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루어져 버렸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내 키는 180 Cm를 넘어섰다. 축구 선수치고는 큰 키였다. 그러나 바짝 야윌 대로 야위어 체충은 형편 없었다. 이런 나를 볼때마다 아버지는 안타까워 했다.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건강에 더 많은 신경을 쓸수 있을텐데'하고 속상해 하는 것 같았다. 벌써 10년 가까이 독방을 지키고 있는 당신의 외로움을 접어두고 자식 걱정부터 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오래 전에잊어 버린 듯한 어머니가 떠오르곤 했다. 괜히 미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슴 한편에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이 자리를 차지하고있었다. 낯선 곳에서 힘겨운 삶을 지탱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 월드컵이 달아 준 화려한 날개 "
-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대학 진학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축구에 대한 개인기나 볼 감각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체력이 약해 나는 대학들이 탐낼 만한 선수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대학진학에 있어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청소년 대표 경력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명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한양대 진학에 꿈을 갖고 있었던 것은 감독을 맡고 있던 이회택 선생님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양대는 우리와 자주 연습 게임을 가져 친숙한 팀인데다 당시 대학 축구의 최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나는 한양대에 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각 대학의 선수 스카웃이 한창 진행될 때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이회택 감독이 포항제철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었고 나에게 믿음을 준 견고한 끈 하나가 끊어지자 나의 한양대 진학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겪은 좌절이었기에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런 나를 붙들어 준 이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애정어린 격려에 힘입어 나는 건국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이회택 감독을 만나볼 기회가 생겼는데 그는 내게 한양대에 진학하지 않았냐고 의아해 했다. 감독으로 가기 전 후임 감독에게 용문고의 황선홍을 꼭 스카우트 하라고 부탁해 놓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버스가 떠난 후였다. 이회택 감독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건국대도 훌륭한 팀이니까 열심히 해라. 그래서 다음에는 꼭 나랑 함께 뛰자".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나를 인정해 주는 그가 너무나 고마웠다.
내 이름 석자가 신문지상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대학 2학년 때 였다. 그 해 봄 내가 속해 있는 건국대는 전국 대학 축구연맹전에서 최정상의 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4학년에 재학중이던 고정운선배(이때부터 대표팀 최고의 콤비중 하나인 이둘의 플레이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나 봅니다. 괄호안은 옮긴이 주)와 이상윤 선배의 절정에 달한 기량과 나의 어시스트가 빛을 발한 것이다. 이 대회를 계기로 내 이름 앞에는 언제나 '미완의 대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88년 11월 7일. 이 날은 내가 생일 다음으로 소중히 생각하는 기념일이다. 처음으로 태극 마크를 단 날이기 때문이다.
대학 선수로서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는 나와 고려대 4학년에 재학중이던 홍명보, 단 두 선수였다.(역시 대표팀 최고의 콤비중 하나인 이둘의 인연은 이때부터.. 괄호안은 옮긴이 주.) 월드컵 대표 선수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붕 뜬 상태에서 한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의 첫 시험 무대인 제 9회 아시안컵 대회 결전의 날이 밝았다. 첫 상대 팀은 일본이었다. 대표팀 막내였던 나는 이태호 선배의 교체멤버로 투입되어 헤딩슛 한골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88년 12월 6일 카타르에서 첫선을 보인 나의 신고식이었다. 대일전이었던 만큼 나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다.
이듬해인 89년 5월 마침내 이탈리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이 전개되었다. 4조에 속한 우리 팀의 첫 상대는 싱가폴이었다. 5월 23일 열린이 경기에서 나는 두 골을 성공시켰다. 첫골은 전반 7분 경 황보관 선배의 문전 센터링을 헤딩슛으로 연결시켰고, 두번째 골은 전반 20분 경 최순호 선배의 어시스트를 받아 왼발로 성공시켰다. 이를 시발로 말레이지아, 네팔 등 세 팀과 6번의 경기에서 총 7골을 터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국가대표 막내로서 처음으로 출전한 월드컵 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 드래프트 거부와 독일 유학 "
- 월드컵 예선전이 끝난 그 해 가을 나는 낯선 여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학교 체육실로 걸려왔는데 받자 마자 내 이름을 확인하곤 흐느끼는 것이었다. 직감으로 나는 어머니임을 알았다. 갑자기 머리속이 아득해진 것이었다. 말문이 막히기는 어머니도 마찬가지인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수화기만 들고 서 있었다. 내가 먼저 거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잠시 머뭇머뭇거리더니 대전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 날 저녁 나는 무작정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다. 20년 만의 상봉인데도 눈물이 안 나왔다. 어머니의 생활이 너무나 안정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재혼을 해 잘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순간 우리 3남매 때문에 재혼도 마다하고 홀로 외롭게 살아온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심한 배신감과 분노가 가슴 속에 이글거렸다. 그래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어머니의 간청을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는 말로 매정하게 뿌리치고 황황이 돌아서 버렸다. 서울행 새벽 기차에 오르자 마자 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가엾어서 울었고, 20년 만에 만난 어머니에게 너무나 매정했던 내가 싫어서 울었다.
졸업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온 그 해 겨울 나는 선수들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프로 축구 신인 드래프트를 거부했다. 아시안 게임과 월드컵 대표 선수로 활약한 내가 연봉 3천 만원이라는 헐값에 몸을 팔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내가 원하는 팀에서 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생각은 홍명보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출전을 통해 극도로 가까워진 명보와 나는 의기투합했다. 스타 플레이어에 대한 정당치 못한 대우를 우리가 좀 희생해서라도 개선해 보자고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결국 명보와 나는 프로 구단의 노여움을 사 소속이 없는 그라운드의 미아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해가 바뀌었고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그 사이 포항제철의 이회택 감독을 만나 장래 문제에 대해 의논한 결과 독일유학을 결심했다. 그에 드는 경비는 유학을 끝마친 후 입단한다는 조건으로 가계약을 맺은 포항제철이 지원해 주기로 했다.
독일 유학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89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전에서 나의 활약을 눈여겨 봐 두었던 독일 아마 리그 클럽 축구단들이 곧바로 입단 테스트를 제의해 온 것이다. 그래서 한 달 후 테스트를 받은 결과 레버쿠젠 아마 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이 클럽은 분데스리가 아마 리그 팀으로 90-91 시즌에서 8위를 차지한 팀이었다. 또한 레버쿠젠 1부 팀은 한국 최고 스타였던 차범근 선배가 몸담았던 팀이어서 낯설지 않았다.
7월 7일 레버쿠젠에 정식 입단한 나는 베스트11로 기용되어 4차례의 연습 경기에서 5골을 터뜨려 독일의 스포츠 잡지인 'BILD"지로부터 '황색 폭격기'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91-92 시즌에서 총 17골을 성공시켜 차범근의 '차붐'에 이어 '황붐'이라는 유행어를 창출해냈다.
그러나 독일 생활은 너무나 힘들고 외로웠다. 주말이 되어도 찾아올 이가 없는 아파트에서 진한 향수병과 싸워야 했다. 입에 맞는 음식이 없어 끼니를 그대로 거른채. 게다가 동료 선수들의 베타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은 아마 리그를 거쳐 1부 리그로 진출하는 것이 정규 코스처럼되어 있어 선수들 간의 경쟁력이 심했다. 그런 자국 선수들이 피부색이 다른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 줄 리가 없었다.
" 결혼과 또 다른 날의 시작 "
-그 즈음 나는 지금의 아내와 열애에 빠졌다. 우연히 교포들이 마련한 유학생들을 위한 만찬에 갔다가 만났는데 처음 본 순간 반해 버렸다. 그래서 내 가이더를 맡고 있던 친구에게 특별히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덕성여대 독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어학 연수 차 유학을 온 그녀는 본대학에서 공부 하고 있었다. 첫 만남 후 얼마 안 되어 나는 그녀와 단 둘이 만났다. 교포 2세이면서 나의 가이더였단 친구가 내가 그녀에게 반한것을 알고 자리를 주선해 준 것이었다. 그녀와 나는 본 대학 캠퍼스를 거닐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끝도 없이 나우었다. 언어와 풍습의 차이로 그 동안 서로 많이 외로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본으로 달려갔다. 부터팔에서 본은 1백30여 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어 자동차로 거의 2시간 정도가 걸렸다. 그럼에도 나는 피곤한 줄 모르고 달려가곤 했다.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너무나 편안했기 때문이다.
그 해 8월 나는 상파울리와의 경기에서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검사 결과 무릎 십자 인대가 파열되었다는 진단이 나왔다. 결국 나는 남은 경기를 포기한 채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한 동안 입원해 있어야 했는데 그녀가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이것 저것 먹을 것들을 챙겨 병문안을 왔다. 그리고 근처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얻어 며칠 동안 나를 간호해 주었다. 그녀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이 여자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부상으로 5개월여 간을 쉬고 완쾌되어 갈 무렵 한국에서 월드컵 대표 선수들이 독일로 전지 훈련을 왔다. 내가 속해 있던 팀과 연습 경기를 갖기로 되어 있던 전날 나는 밤새 한잠도 못잤다. 고정운, 하석주, 홍명보등 그립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은 것이었다.
다음 날 부퍼탈 팀과 경기를 가진 월드컵팀은 다른 팀과 몇 차례 더 연습 경기를 가진 뒤 귀국길에 올랐다. 매일같이 연습이 끝난 뒤 대표팀숙소를 찾아가 명보와 밤을 새며 이야기 꽃을 피우던 나는 귀국 가방을 챙겨주며 솟구치는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대표팀 무리에 끼어 당장 귀국하고 싶었던 것이다. 명보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온 나는 텅빈 아파트에서 누가 볼새라 목욕탕 샤워기를 틀어 놓고 펑펑 울어 버렸다.
그리고 5개월 후 나는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포항제철이 국내 프로 축구 활성화를 목적으로 나를 부른 것이다. 드래프트 제도상 전년도 시즌 꼴지팀인 유공에 입단해야 하는 나를 지명 선수 5명과 트레이드시키는 파격적인 조건하에 맞아 준 것이다. 끝내 분데스리가 1부팀에 진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고국에 돌아온 기븜은 컸다.
귀국한 후 한 동안 휴식을 취했다. 독일에서의 부상 휴우증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곧바로 월드컵 대표팀에 합류했으며 크리스마스 때는 독일에서 만나 함께 귀국한 지금의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다. 얼마 안 되어 월드컵 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카타르로 떠났다. 내가 진 책임감의 부피는 선배들이 많았던 4년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무거웠다. 그런 부담감 때문인지 나는 제대로 뛰지 못했고, 우리 팀은 카타르에 형편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패배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온통 내게로 쏟아졌다. 카타르 경기 이후 축구 팬들은 내게 치욕스런 징크스 하나를 붙여주었다. '황선홍이 뛰는 경기는 무조건 진다'라고. 어둡고 긴 터널과 같았던 그 징크스는 올해 들어서야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독일 유학 전의 내 페이스를 이제야 되찾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버지와 이회택 감독님의 끊임없는 격려가 있었고, 아내의 정성어린 내조가 있었다. 이 지면을 통해 두 분 스승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사랑 아내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