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로드 시절때의 비틀즈)
에.... 처음에 올렸던 척 슐디너에 대한 답글을 보고 괜찮겠다 싶어서(누구 맘대로!!!) 이번에는 비틀즈에 대해 올려볼까 합니다
=_=a 제목을 보고 거슬리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애교로 봐주세요 ^^;;; 그리고 항상 얘기드리는 거지만
(앞으로도 그럴거지만.....)
좋은 충언들 많이 부탁드립니다 ^^(악플 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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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7년-1960년대의 구성
1957년 03월, 리버풀에 있는 퀘리 밸크 그래머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존 레논은 콰리맨(한글로 번역하면 채석공이라고
하더군요;)이라 불리운 스키플(1950년대 후반에 유행한 재즈와 포크가 섞인 음악)밴드를 결성 했었습니다. 레논과
밴드(학교) 기타리스트인 폴 메카트니(예전에는 기타였는데 비틀즈 하면서 베이스로 바꿔나보네요;)를 1957년 07월06일
성 피터스 성당에서 주최한 woolten garden fête에서 만났고 몇일후 그를 밴드에 가입시켰습니다. 1958년 02월 06일
젋은 기타리스트였던 조지 해리슨은 리버풀, 갈스톤, 윌슨 연주회장에서 콰리맨(나중에는 밴드 이름을 많이 바꿔가면서 공연
을 합니다.)이 공연하는데 초청 받았습니다. 메카트니는 해리슨을 리버풀 교육기관에 가는 아침 학교 버스에서 익히 알게 되
었습니다. 둘 다 스페케에 살았기 때문이죠. 메카트니의 권유로 인해, 해리슨은 퀘리맨을 1958년 03월의 리허설 이후로 리드
기타로서 참가했습니다, 해리슨의 어린 나이때문에 반대한 래논의 의견을 압승하고. 그 시기에는 래논과 매카트니 둘 다
리듬 기타(백킹 기타라고 한다죠 ㅋㅋ)를 연주했었고, 드러머에 대해 높은 전복(먹는 전복이 아니에요 ㅋㅋ;;)이 있었습니다.
퀘리맨은 이름을 연속적으로 바꿧습니다 - "조니 앤 문독스" 그리고 "롱 존 앤 비틀즈" 였죠. 래논의 미술학교 친구인
스튜어트 삿클리프는 1960년 01월 배이스로 참가했고, 그때의 밴드 이름은 "더 실버 비틀즈" 였습니다.
("롱 존 앤 더 실버 비틀즈"에서 파생된 래리 파네즈의 의견에 따라)- 물론 1960년 08월에 "더 비틀즈" 를 설정하기
이전 일 이었습니다. 삿클리프는 "더 비틀즈를"(저희가 알고 있는 지금의 비틀즈와 스펠링이 좀 다릅니다;)
버디 홀리와 더 크리킷즈의 트리븃 밴드로서 활동하자고 제안 했었습니다. 그 제안은 그와 래논이 밴드 이름을
'더 비탈즈'(비탈길-_-?;;)로 바꾸길 생각하게 했었고 그들은 '실버 비츠'로 이름을 바꿧으며 '더 실버 비틀즈(beetles)', 그리
고 '더 실버 비틀즈(beatles)'에 이르기까지 바꾸었지만(엄청나게 바꾸네-_- 누노도 이 영향을 받았을지도..),
래논은 밴드 이름을 '더 비틀즈(the beatles)'로 간추렸습니다. "롱 존 실버 오브 더 실버 비틀즈"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것
을 피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조니 앤 더 문독스'와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죠. 스콧랜드에서 조니 젠틀과 합께 투어를
마친후, 그들은 그 들의 밴드명을 '비틀즈' 로 바꾸었습니다. 신디아 레논(존 레논의 배우자 였더군요-_-)은 "랜셔 홀 술집
에서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브레인스토밍(각자가 아이디어를 내놓아 최선책을 결정하는 창조 능력 개발법)
개정을 하던 중 레논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견해를 말하기로 잘 알려진
존 래논은 1961년에 메르시 비트 메거진 기사에 밴드명에 대한 장난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순간 환영이 왔었고 불타는 파이(먹는 파이-_-?;;;)위에서 남자가 나타났으며 그들에게 말하길
(비틀즈 맴버들인거 같습니다;),' 이날부터 너는 a자를 가진 비틀즈다(beetles 에서 beatles로) 라고 하더군요"
(뭐여 -_-;; 난 이 개그 썰렁해;;) 2001년 인터뷰 도중, 폴 매카트니는 밴드 이름에 기묘한 철자법을 넣은것으로 크레딧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길 "존은 우리를 비틀스(beetles)로 부르는 아이디어가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비틀즈(beatles)'는 어떨까? 그러니까, 드럼의 박자처럼 말이야' 그때, 모두가 그것에 대해 너무 우스워서 굳어버리고
말았지요. 그렇게 해서 역사가 만들어졌다는게 우스꽝스러웠어요" (철자 개그... 이해 못하겠다 ㅠㅠ)
1960년 5월, '더 실버 비틀즈는' 스코트랜드 북동쪽으로 싱거인 조니 젠틀과 함께 반주자 밴드로 투어를 갑니다.
1번째 연주회를 하기 1시간전에 그들은 젠틀을 만나고 메카트니는 그 투어를 밴드로서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투어에서는 드럼이 없는 그룹이 자주 있었고(밴드의 핵심인 드럼을 무시하다니...) 다른 사람들(밴드 맴버들)보
다 상당히 나이가 많았던 토미 무어로 어느정도 안정이 됐습니다. 무어는 투어를 끝내고 바로 떠났으며, 병 공장에서 지게차
일꾼으로 다시 일하러 갔습니다. 놀만 챕 맨이 밴드의 다음 드러머로 왔었지만 국민 병역(1958년에 폐지된)
(군대 간거냐 ㅠㅠ 역시 군대가 음악인들을 망치는 군... 궁시렁;;;)으로 떠났습니다. 그의 이탈은 밴드의 비 공식적
매니져 였던 알렌 윌리엄즈가 독일, 함부르크, 리펄반에 있는 클럽에 공연을 잡아놨던것에 심각한 문제를
끼쳤습니다.
2. 음악적 영향
존 레논 曰: "엘비스 프레즐리가 나로 하여금 그의 레코드를 사도록 만들었어요. 나는 그의 옛날 레코드가 대단했다고
생각해요. 빌 할리 시대를 지나갔던 적도 있죠. 그의 레고드가 무선으로 나왔을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그것들을 듣고는
하셨어요, 하지만 그 레코드가 저에게는 별로 맘에 들지 않았죠. 엘비스가 저에게 비트음악을 좋아하도록
만들었어요. 제가 '하트브릭 호텔'을 들었을때 저는 '바로 이거야' 라고 생각했고 저는 옆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복장도
샀지요..." 그는 또한 주장하길: "아무것도 저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어요 엘비스를 듣기 이전까지는. 만약 엘비스가 없었다면,
비틀즈 또한 없었을꺼에요."
3. 1960년에서 1970년대: 더 비틀즈
(비틀즈, 1964년 에드 설리반의 쇼에서)
함부르크
(비틀즈가 함부르크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공연한 오늘날의 인드라 클럽의 모습)
함부르크에 예정되어 있는 공연을 위한 드러머가 없다는 것을 안 비틀즈는 1960년 08월 12일에 피트 베스트를 드러머로
초대 합니다. 베스트는 피트의 어머니, 모나 베스트가 소유한 카스바 커피 클럽에서 블랙젝과 같이 연주한적이
있었습니다. 이 클럽은 리버풀, 웨스트 더비에 있는 포도주 저장소 클럽이기도 했습니다, 비틀즈도 자주 연주하면서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구요.'더 컴플릿 비틀즈'라는 다큐멘타리에서, 윌리엄즈가 말하길
"베스트는 연주하는데 있어서 영리하지는 못했지만 감동을 줄 수는 있었습니다."
베스트를 고용한지 4일 후, 밴드는 합부르크로 떠났습니다. 비틀즈는 합부르크에 있는 인드라 클럽에서 공연하고
1960년 04월에 카이져 켈러로 이동합니다. 그들은 공연을 1주간 7일 밤을 하룻 밤에 6~7시간 동안 공연을 해야
했습니다. 1960년 09월 21일, 해리슨은 독일 당국에 그의 나이를 속인 일로 인해 국외로 추방당했습니다.
1주 후, 더 편한 방을 찾기위헤 숙소를 비웠을때 숙소에서 작은 불이 일어났었고, 메카트니와 베스트는
체포 되었습니다, 방화죄로 죄목이 되었고 추방당했습니다. 레논은 12월 중순에 다른 맴버들을 따라 리버풀로
갔습니다, 삿라이프는 새로운 독일 약혼자 아스트리드 커크헤르와 같이 오기위해 나중에 왔고. 재결성된 밴드는
1960년 12월17일에 카스바 클럽(삿라이프를 대체한 채스 뉴비와 함께)에서 공연 했습니다.
비틀즈는 1961년 04월 에 함부르크로 돌아와서는 탑 텐 클럽에서 공연했습니다.(클럽 이름 참;)
탑 텐 클럽에서 공연하는 동안 그들은 독일 폴리돌 레코드 레이블에서 시리즈를 만든 싱거인 토니 *단의 반주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명성이 있는 밴드 리더인 버트 캄프퍼트가 프로듀스를 맡았습니다.
캄프퍼트는 비틀즈를 그 자신의 폴리돌 계약서에 1961년 06월 22일에 첫 세션을 하기로 사인했습니다.
그 해 10월 31일, 폴리돌은 "마이 보니"라는 레코드를 출시했습니다, 독일 차트에서 '토니 *단과 더 비트 브라더스' 라는
이름 아래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상표명이 없는 이름은 *단의 반주자 밴드에 누구든지 같다 붙일 수 있었습니다.
전설에 덧붙이자면, 이 레코드는 비틀즈를 자동적으로 브라이언 엡스타인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또한, 미국 언론에 처음으로 언급된 결과를 가져다 주기도 하였구요.
1962년 초쯤에, 캐쉬박스가 언급하길 "마이 보니는 새로운 락 앤 롤 팀인, 토니 *단과 더 비트 브라더스"의 데뷔곡
이었다고 합니다. 몇 개의 복사본들 또한 데카 레이블에 의해 미국 디스코 자키에 보내졌습니다, 미국 데카는 폴리돌의
모체인 도이치 그래모폰과 유통 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리버풀로 비틀즈가 돌아왔을때, 삿라이프는 커크해르(배우자)와
함께 함부르크에 머물렀습니다.(눌러 앉으셨구만 -_-) 그래서, 그때부터 메카트니는 베이스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1961년 12월 10일 nems에서 그룹과의 미팅이 있었을때,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메니저를 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역사적인 날이네요 비틀즈로서는 'ㅅ ') 비틀즈는 1962년 12월 24일 엡스타인과 5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엡스타인은 비틀즈를 영국 레코딩 레이블과 계약을 맺는 탐색으로 이끌었습니다. 엡스타인은 노스 앤드 뮤직 스토어
(nems)라는 레코드 매장에서 매니저를 맡았습니다, 그의 가족의 가구 가게의 분가로서 말이죠. 그는 nems의
상징이었습니다, 메이저 레코트 계약사로서 프로듀서들과 레코딩 회사 중역들의 성공을 얻어주기로 한데 있어서
말이죠. 지금 유명한 전환으로서, 데카 레코드 a&r 중역인 딕 로위는 엡스타인을 납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에게
"기타 그룹들은 나가는 곳에 있네, 미스터 엡스타인."(한마디로 꺼지란 얘기죠 -_-;) 엡스타인이 데카사와 협상하는 동안,
그는 또한 emi마케딩 중역인 론 화이트에게도 접근 했습니다. 화이트는(그 스스로는 레코드 프로듀서가 아니었지만)
차례로 emi프로듀서들인 노리 파라모어, 월터 리들리, 그릭 노만 뉴웰가 계약을 맺었습니다. 모두 비틀즈와 레코드 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죠. 화이트는 emi의 4번째 프로듀서인 조지 마틴에게는 접근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휴가였기
때문이죠.
함부르크에서의 그들의 3번째 머무름은 1962년 4월 13일에서 4월 31일 까지 였고, 그들이 비틀즈의 도착에 맞춰 스타 클럽을
열었을때, 그들은 삿라이프의 죽음을 뇌출혈로 인한 것이라고 통보 받았습니다.
4. 레코드 계약
(메르시 비트 메거진에서 비틀즈가 그들의 첫 레코드 게약을 얻었다고 엡스타인에게 알려주는 전보)
데카 레코드에 인상을 주는데 실패한 뒤, 엡스타인은 런던, ?뵈宕?거리에 있는 hmv가게로 데카 테이프들을 디스크로
전환하기 위해 갔습니다. 거기서 레코딩 엔지니어 짐 포이는 엡스타인에게 emi의 출판을 맡고 있는 시드 콜맨을
언급했습니다. 콜멘이 비틀즈의 데모 데이프를 듣고는 그는 테이프를 코메디 레코드를 하고 있는 조지 마틴에게 가져가
보라 하였고 emi에 있는 팔로폰 레이블로 갔습니다. 엡스타인은 자연히 마틴을 만났고, 비틀즈를 emi에 1년 갱신 계약으로
했고 그들의 첫 레코딩 세션을 1962년 06월 북 런던에 있는 emi사의 에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스케쥴을 잡았습니다.
마틴은 밴드의 데모 레코딩이 썩 인상 깊지는 않았지만, 그는 비틀즈를 만났을때 곧바로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음악적 재능은 미숙하지만, (나중의 인터뷰에서 말하길) 마틴이 비틀즈의 대한 태도를 바꾼건 그들의 재치와
유머가 있어서였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틴은 피트 배스트(비틀즈 前 드러머)와 문제가 있었습니다, 시간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거에 비판을 했었죠.
그는 개인적으로 엡스타인에게 밴드가 스튜디오 안에서 다른 드러머를 써야할꺼 같다고 제안했습니다.
베스트의 인기에 대한 것들은 마찰에 관한 다른 원인을 불러 일으킬수 있어 심사숙고를 했어야만 했었습니다.
덧 붙여서, 엡스타인은 밴드의 통합된 외모가 필요한데 베스트는 특이한 머리스타일을 고수했고 통합된 스타일을 거부해
서 엡스타인을 격분하게 했습니다.(짱나죠...밴드하는데 지만 잘났다는 사람-_-) 베스트는 또한 수많은 공연을 아파서 참석
못한 일들도 많았습니다. 3명의 기존 맴버들은 엡스타인에게 베스트를 밴드에서 나가게 하는것에 대해 동의 했습니다.
1962년 8월 16일에 일어난 일이고요. 그들은 메르시비트 그룹과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에서 드러머인 링고 스타
(본명: 리차드 스타키)에게 밴드에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스타는 자주 비틀즈와 함부르크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레논, 메카트니. 해리슨, 스타가 처음으로 같이 한 레코딩은 1960년 10월 15일에 만들었습니다, 싱거 루 월터의 반주로
일하는 동시에 함부르크에서 몰래(표현이 어째;;) 데모 레코드를 만들고 있었던거죠. 스타는 1962년 9월f 4일에 비틀즈의
2번째 emi레코딩 세션으로 연주했지만, 마틴은 세션 드러머인 앤디 화이트를 비틀즈의 다음 세션인 9월11일로 하도록 고용
했습니다. 그들의 레코딩 계약은 1싱글이 팔릴때마다 1페니(우리나라돈으로 10원 정도?;;)를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4명의 비틀즈에게 분할 할 양이 맴버 1인당 1 파싱(영국의 옛 화폐 1/4 페니이며 1961년에 폐지)을 줬습니다.
(조지 마틴이 메카트니와 레논이 만든 곡을 미리 컴토하는 중 [1963년])
이러한 로얄티 비율은 영국 밖으로 팔려나가는 싱글은 더 감소 되었습니다, 즉 싱글 1장당 반 밖에 받지 못했단 얘기죠
(그것을 또 4등분 하고... 안습 ㅠㅠ) 마틴은 나중에 그것을 "꽤나 지독한" 계약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틀즈의 첫번째
emi세션인 1962년 6월 6일은 발매된것에 비해 그다지 이득을 본 결과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9월 달 세션을 하고 몇 개월 후
"러브 미 두"라는 곡은 영국에서 하위권 히트를 쳤습니다, 차트에 조금이나마 모습을 보인것이죠 17위로서. ("러브 미 두"는
1964년 5월에 미국 싱글 차트에서 18개월동안 상위권을 차지합니다) 1962년 11월26일 그들은 그들의 2번째 싱글인
"플리스 플리스 미"를 녹음합니다, 공식 영국 순위권에서 2위 까지 올라가고 nme순위에서는 1위를 차지했죠. 3개월 후,
비틀즈는 그들의 첫 번째 앨범을 녹음합니다. ('플리스 플리스 미'로 앨범명이 된) 밴드의 첫 번째 탤레비전 공연은
'피플 앤 플레이시스' 라는 프로그램에서 했고, 1962년 10월 17일 그라나다 텔레비젼에 의해 맨체스터 실황공연으로
전송되었습니다. 비틀즈의 명성이 사방에 퍼지자, 십대 여성 소녀들로 구성된 열광적인 팬들은, 비틀매니아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비틀즈는 또한 음악 비평가들에 의해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1963년 12월 23일, 타임즈 지의 음악 비병가인 윌리엄 맨은
비틀즈의 작곡에 대해 칭송을 하는 에세이를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신선하고 음조가 좋은" "틸 데어 워즈 유"에서의
기타소리, 그들의 c 메이저에서 a플랫 메이저로 하중음을 바꾸는 역할", 그리고 "아이 원트 홀드 유어 핸드"에서 옥타브가
상승하는 것등을 예로 들어서 말입니다. 비틀즈 그들 스스로는 맨에 의해 분석되어진 것을 보고 당황했습니다.
1980년 레논은 말하길, " 오늘날까지도 저는 [에올리안 칸덴시스]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 소리는 마치 이국적인 새소리
같거든요.
5. 미국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 싱글즈)
1963년 8월, 필라델피아에 있는 스완 레코드사는 라디오에서 녹음될 연주를 못한 "쉬 러브스 유"를 발매했습니다.
딕 클락의 티비 쇼인 어메리칸 밴드 스텐드에 곡을 시험삼아 공연하였을때 비틀즈의 독특한 머리 스타일은 미국 십대들로
하여금 웃음을 터트리게 하였습니다. 1963년 이른 11월,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에드 설리반에게 비틀즈를 2월달에 있을
그의 쇼에서 3번 출연할것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증된 공개발뵤를 케피톨 레코드사와 레코드 계약을 하는데
활용 했습니다. (완전 천재네 -_-;;) 캐피톨은 1월 중순에 " 아이 윈트 투 홀드 유어 핸드"를 발매 할것을 약속했습니다.
1963년 12월 10일, 비틀매니아의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cbs오후 뉴스에 영국으로 5분동의 이야기가 보여줬습니다.
(실은 오전에 나올 이야기였지만 존. f.케네디 암살 사건으로 인해 지연 되었습니다.)
사건은 매리랜드, 실버 스프링에 거주하는 10대 소녀인 마샤 알버트가 워싱턴 dc에 wwdc라디오 스테이션에 디스코 자키로
있는 캐롤 제임스에게 비틀즈 음악을 틀어달라는 요청을 보낸 편지를 받고서 영감을 받게 되었습니다. 케롤 제임스는
뉴스 기사를 보았고 친구에게 비틀즈의 새로운 싱글인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 카피본을 그에게 보내도록 하게
했습니다. 12월17일 레코드 데뷔를 제빨리 한후, 라디오 스테이션은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관객들의 반응을 받았고 차츰
비틀즈의 레코드를 라디오 녹화시간 때마다 틀었습니다. 뉴욕시에 있는 라디오 스테이션, 처음엔 wmca, 다음은 wins
그리고 wabc가 아이 원트 투 홀드 유어 핸드를 틀었습니다, 앨범이 발매 된 날. 워싱턴에서 긍정적으로 시작된 반응은 뉴욕,
그 다음은 다른 나라 시장으로 퍼져갔습니다. 레코드는 10일 만에 1억개의 레코드가 나갔구요(억 소리 나게 만드네요;;),
그리고 1964년 1월 16일, 캐쉬 박스 메거진은 레코드 1위라는 확정을 줍니다.
4. 스튜디오의 해
1966년 4월, 비틀즈는 그들의 가장 야심찬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합니다, 리볼버라는 앨범이죠. 앨범을 위한 레코딩
기간동안 태이프 루프를 하고 옛날 샘플링은 발라드, 알 앤 비, 소울, 그리고 월드 뮤직으로 완전 믹스를 했습니다.
비틀즈는 그들의 마지막 공연을 1966년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캔들스틱 파크에서 치뤘습니다. 매카트니는 토니
배로우에게 이 이벤트를 녹음하라고 했지만, 30분짜리 녹음 테이프는 마지막 곡에서 반만 하고는 녹음을 못했습니다.
공연은 35분 좀 않되서 끝났고요.
그 이후로, 비틀즈는 녹음에만 전념했습니다. 리볼버를 내놓은지 7개월 좀 않되서 비틀즈는 1966년 11월 24일 애비로드로
돌아갔습니다. 8번째 앨범인 써전트 페퍼스 론리 하츠 클럽 밴드의 129일 간의 녹음 기간을 위해서지요. 앨범은 1967년 6월 1
일에 발매 되었습니다. 1967년 6월25일, 비틀즈는 텔레비전에 세계적으로 수신되고 전 세계적으로 400억의 사람들이
바라보는데 등장한 첫 밴드가 되었습니다. 밴드는 처음으로 위성으로 연결된 전세계적 텔레비전에 나왔고, 그 쇼는
우리의 세계(our world)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밴드의 사업은 1967년 8월 27일에 32살의 나이인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마약 과다복용으로 인해 사망함으로서 좋지
않게 됩니다. 1967년 말에는 그들은 처음으로 영국에서 그들의 첫 부정적인 보도를 받게 됩니다.
그들의 초현실주의 티비 쇼인 메지컬 미스테리 투어의 비난하는 평가와 함게 말ㅇ죠. 비평가들중의 일부가 일어난것은
칼러(색깔)가 쇼부분에서는 없어서는 않될 필수적인 것이라서 라고 주장하는데, 이 때 당시에는 영국에는 칼러 티비를
가진 가정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68년 초반, 비틀즈는 인도에 있는 우타 프라데시의 리쉬케쉬(러쉬 앤 캐쉬는 아니고 -_-?)에서 초월 명상법을
공부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는, 레논과 메카트니는 뉴욕으로 가서 애플 기업과 구성을 맺었습니다. 1968년 중반에는 밴드는 더블앨범일
더 비틀스(화이트 앨범으로도 잘 알려져 있죠) 를 녹음하느라 바빳습니다. 오프닝에서부터 엄청난 분열이 있었는데, 링고가
밴드를 일시적으로 나간것부터 시작해서 입니다. 또 다른 불일치는 레논의 새로운 여자친구인 오노요코가 녹음 기간 내내
계속 따라 붙었었다는 거입니다(그래서 랫 잇비 비디오때도 오노 요코가 보였었구나 ㅡㅡ;;).
그리고, 메카트니가 너무 권위적으로 나간다는거에도 불만이었지요.
내적 분열은 처음에는 작았지만 밴드에서 계속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거의 명백하게도, 이것은 명백히 해리슨이
비틀스 앨범에 들어갈 노래를 만드는데 있어 어렵다는 것을 잘 반영해줍니다.
사업면에서, 메카트니는 리 이스트맨(자기의 여자친구 린다 이스트맨의 아버지인)이 비틀즈의 매니저를 맡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맴버들은 뉴욕 매니저인 알렌 클라인을 원했구요. 모든 지난날의 비틀즈의 맴버들의 결정은
항상 만장 일치 였습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4명은 동의 할수 없었습니다. 레논, 해리슨 그리고 스타는
(언제 돌아오셨나요 -_-;;) 이스트맨이 그룹보다는 메카드니의 관심만 채울것이라 느꼇습니다.
(불신은 모든 나쁜일의 시작 ㅠㅠ) 1971년 예정된 매니저였던 클레인 비틀즈의 계좌에서 5억 파운드를 횡령합니다(헐;)
1년 후 앤쏠로지 인터뷰중, 맥카트니는 " 뒤돌아보면서, 저는 왜 그가(이스트 맨)저를 위해편파하고 그들(비틀즈)에
대항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5. 이별: 렛 잇 비
(2007년에 찍은 3 세빌로의 모습)
그들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은 1969년 1월 30일 런던 3 세빌로에 있는 애플 건물 옥상에서 했습니다. 이러한
힘든 기간은 자연스럽게 랫 잇비의 앨범이 되었고, 보조 매니저인 알렌 파슨과 함께 했습니다.
대부분의 공연은 찍혔으며 나중에 랫 잇 비라는 필름으로 나왔습니다. 밴드가 연주하는 동안 지역 경찰들이 불려 지기도
했습니다, 소음으로 인해 주민들이 불만을 말했기 때문이죠 . 비록 비틀즈가 공연을 끝 마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나중에 앤쏠로지 비디오에서 말하길, 체포 않해서 실망했더라고 하더군요 (아니 이 할아버지들이 -_-;;)
밴드 맴버들이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모습은 공연의 적절한 끝이었을거라고('ㅅ ';;;;)
비틀즈는 그들의 마지막 앨범인 애비로드를 1969년 여름에 녹음했습니다, 보조 엔지니어인 알렌 파슨과 함게
말이죠. 앨범에 들어갈 완성된 곡인 "아이 원트 유 (쉬즈 소 헤비)"는 1969년 8월20일에 됐고 그 곡으로 4명의 비틀즈는
스튜디오에서 같이 녹음한것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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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비틀즈에 대한 것은 여기까지였고요 대략 그 후를 매우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다들 각자 솔로 앨범을 냈으며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은 마크 데이빗 챕 맨 이라는 사람에 의해 피살당합니다 (ㅠㅠ)
1981년 5월 조지 해리슨은 "올 도스 이어즈 어고"라는 솔로 앨범을 내고요 그것은 레논이 죽기 1달 전쯤에
녹음 됐습니다. 드럼에는 링고 스타, 그리고 나중에 레논에게 추모하는 가사를 오버더빙하고 폴고 린다 매카트니도
나중에 트렉에 백킹 보컬로서 기여했습니다 (우정 ㅠㅠ)
1988년 비틀즈는 명에의 락앤롤 전당에 임명하게 됩니다.
임명식 밤에는 해리슨과 스타는 시상식에 레논의 미망인인 요코와 그들의 2 아들들과 함게 나타납니다. (응 난 션 레논만 알았는데? 나머지 1명은 누구?;;;) 그러나 메카트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레논, 스타, 해리슨의 부동산에 대해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언론이 발표했기 때문이지요. 1994년 2월, 3명의 살아남은 비틀즈 맴버는 재결합하여 레논의 약간의 홈 레코딩을 위해 추가 음악을 프로듀스하고 레코딩을 합니다. "프리 에스 어 버드"는 텔레비전 다큐멘타리인 더 비틀즈 앤쏠로지 시리즈에 보여지기도 했지요. 그리고 1995년 12월에는 발매되기도 했습니다. 1966년 3월에 발매된 리얼 러브와 함께. 늦은 1990년에는 조지 해리슨은 폐 암에 걸렸습니다. 그는 병으로 인해 2001년 11월 29일에 타계했습니다. 2006년, 조지마틴과 그의 아들 길스 마틴은 오리지날 비틀즈 레코딩을 리믹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