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써본 소설 - 선택

트라우마리 작성일 13.03.19 23:4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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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제 갓 사회생활 시작한 직장인인데..

원래 글쓰는 걸 좀 좋아해서 평소에 이것저것 잘 끄적이거든요~

사실 소설은 써본 적이 없는데.. 그냥 문득 생각나는 소재가 있어 오늘 한번 적어봤네요~

적고나서 혼자 보려니, 그것도 영 그렇고.. 그래서 이렇게 나도작가 게시판에 올려봅니다 :)

 

 

 

 

선택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란 법은 없다.”

 

며칠, 아니 몇 년은 환기를 안 한 듯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좁디좁은 이곳. 내 한 몸 누이면 남는 공간 하나 없는 것이, 가끔은 여기가 방 안인지 관 속인지 헷갈리는 이곳. 이 고시원이 내가 10년째 살고 있는 곳이다.

내 나이 서른하고도 일곱. 멀쩡하게 서울 사년제 대학 나와서 고시공부를 한다고 이곳 고시원에 들어온 게 벌써 10년이라니. 가끔은 내가 살아가는 건지, 죽어가는 건지, 공부를 하는 건지, 공부가 나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 2평짜리 인생이다.

 

“오빠!”

“오~빠!”

“야, 이연성!! 무슨 생각해!?”

 

이연성. 이게 내 이름이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여자는 내 여자친구 은아 밖에 없다. 어느덧 나 따라 나이를 먹어 서른셋의 노처녀가 되었지만, 단 한 번도 나에게 결혼을 보채지도, 투정 한 번 부리지도 않은 고맙고 미안한 친구다.

 

은아를 처음 만난 건, 내가 군대 전역하고 막 복학했을 때였다. 아마 2000년쯤이었던 것 같다. 그 해 봄은 유독 햇살이 예뻤고, 햇살에 비춰지는 여자 신입생들의 모습은 더욱 싱그러웠다. 아마 내가 군대를 막 전역해서 더욱 그래 보였으리라. 그리고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친구가 은아였다. 피부는 하얗다못해 투명해보였고, 동그란 눈동자와 쌍꺼풀 없는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은아는 신입생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복학생들 사이에서도 화제였다. 마치 누가 먼저 은아를 차지 하냐 내기라도 하듯 은아에게 다가가는 짐승 무리들이 많았다. 물론 나도 그 짐승 무리 중 하나였다. 은아를 보려고 신입생 환영회, MT 등 안 따라가는 곳이 없었고, MT에서는 당시 학회 임원들에게 사정사정해서 일부러 은아와 같은 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작전은 결국 성공했다. 내가 익숙해져서였는지, 아님 정말 내 어디가 그리 좋았는지, 은아가 먼저 나에게 다가와 고백을 했고, 나는 마치 전혀 의외의 고백이라는 듯, 무려 튕기기까지 하며 마지못해 그 고백을 받아줬다.

 

은아를 사귀고 나서 알게 된 건데, 은아네 아버지는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아는 그룹의 계열사 부사장이셨다. 게다가 은아는 그 귀하고 예쁘다는 셋째 딸. 그래서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곱고 바르게만 자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아무 것도 없는 나를 만난다니……. 사실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긴 했다. 나도 그러니, 그 집안에서는 어떠랴. 부모님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나를 만나는 것을 반대하셨다. 한 번은 은아네 어머니와 큰 언니가 나를 찾아와 헤어지라고 압력을 넣고 가시기도 했다. 돈 봉투도 주셨다. 그러나 그 돈 봉투는 다시 은아에 의해 그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은아는 집안사람들과 거의 연락을 끊고 지내는 것 같다. 가끔 부모님께 연락하고 찾아뵈라고 말은 해보지만, 괜찮다며 나중에 연락드리고 찾아갈 거라며 배시시 웃는다.

 

그렇게 은아와 내가 처음 만난 지도 13년이 지났다. 은아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준다. 조금 오그라드는 말이지만, 가끔 보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크기가 훨씬 큰 것 같다. 수입이라곤 전혀 없이 고시원에만 쳐박혀지내는 나를 위해 그녀는 사무실에서 주말근무까지 자처하며 일을 하고, 그 돈으로 내 고시원 비용과 삼시 세끼를 해결해준다. 자기도 자취방을 얻어 나와 살며 쓸 돈이 많을 텐데, 그녀는 항상 내가 쓸 돈을 먼저 챙겨둔다. 그런 그녀를 보면 내가 얼른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해서, 행복하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메시지가 도착 했습니다~♪”

 

아침부터 문자가 왔다. 은아다.

 

‘오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정말 너무 수고했어! 나에겐 항상 오빠가 최고야! 사랑해! 이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러고 보니 오늘이 사법시험 2차 합격자 발표일이다. 2차만 붙으면... 2차만 붙으면 정말 꿈에 그리던 변호사의 길로 갈 수 있다. 3차가 있긴 하지만, 3차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2차가 가장 중요한 고비가 된다.

 

그렇게 중요한 날을 은아의 문자를 보고 깨닫는다. 역시 은아 밖에 없구나. 나름대로 아침에 개운하게 일어났는데, 은아의 문자에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체한 것 같이 답답하다. 열 손가락을 다 따고 싶은 느낌이다. 화장실에 가서 억지로 토를 한바탕 쏟고 나온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법무부 홈페이지에 들어가 합격자 명단을 확인해본다. 내 이름을 찾아본다. 이..이...이강우, 이구훈... 이명훈... 아 이씨 엄청 많네, 이씨. 그리고 그 밑에 익숙한 이름이 드디어 보인다. 이.연.성. 합격이었다. 순간 명치 끝부터 뭔지 모를 감정이 올라오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순간 난 더럽게 못생겨 보였을 거다. 보는 사람 없어 다행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못났어도, 이제 내 인생은 그러지 않으리라. 은아야. 오빠, 합격했다.

 

아직 퇴근시간도 안됐는데 은아가 고시원을 찾아왔다. 나를 보자마자 내게 안긴다. 따뜻하다. 그리고 미안하다. 어떻게 이 시간에 왔냐는 내 질문에 회사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고 집에 가본다고 하고 뛰어왔단다. 은아는 늘 그렇다. 나를 위해서라면, 뭐든 포기할 수 있고, 뭐든 다 해주는 아이다.

 

“그래도 회사 끝나고 와도 되는데~ 회사에 눈치 보이잖아~”

“지금 와도 되거든!! 오빠가 합격했다는데, 내가 회사에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있어야지!!”

 

아... 정말 사랑한다. 오빠가 행복하게 해줄게, 고맙다, 은아야.

 

 

5년 후

 

 

“자기야~ 일어나~ 와이프 전화 온다~”

“아~ 그냥 냅둬, 귀찮게~ 난 더 잘 테니까 너 먼저 가라~”

“알았어~ 저는 먼저 갑니다요, 이변호사님! 쪽!”

 

자는 내 볼에 입을 맞춘 채 그녀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선다. 나는 그제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든다.

 

부재중 통화 2통

 

모두 은아다. 사무실에서 밤 샌다고 말을 해놨으니, 그다지 의심을 하진 않을 거다. 그냥 피곤하진 않은지, 눈은 좀 붙였는지 확인해보려 전화한 거겠지.

 

나도 옷을 챙겨 입고, 바로 내 변호사 사무실로 향한다. 먼저 출근한 내 비서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내 책상엔 향이 가득한 커피 한잔이 준비되어 있다. 아, 지금 이 비서가 아까 나에게 입을 맞추고 간 그 여자다. 이름은 김지나. 나이가 스물.. 여덟인가 아홉인가. 나랑 띠동갑도 넘어선 여자. 처음엔 그냥 정말 비서였고, 그래서 같이 일도 하고 야근도 많이 했는데, 그러다보니 다른 짓도 함께 하게 됐다.

 

은아와 내가 결혼한 지는 3년이 됐다. 사법 연수원 연수생 생활을 끝내고 우린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엔 나를 거들떠도 안 보던 은아네 식구들은 내가 변호사가 되자 나를 마치 가족인 것처럼 여기기 시작했고, 난 그런 그들이 싫었다. 돈 봉투를 들고 헤어지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젠 나를 찾아와서 부탁이란 것도 한다. 은아랑 나랑 헤어지라고 가장 압력을 넣던 장모와 큰 언니라는 사람은 가족들 몰래 나를 찾아와서 이혼을 하고 싶은데 위자료 어떻게 많이 받을 방법 없냐고 묻고 앉아있고, 장인은 대기업 임원직에서 은퇴하고 새로 중소기업 이사직에 앉았는데, 나를 그 회사에 데려가려한다. 웃기지도 않다. 그런 그들이 내 앞에서 이서방, 우리 사위 할 때마다 위액이 기도로 넘어오는 기분이다.

 

물론 은아는 여전히 정말 좋은 사람이다. 그런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가족들 탓인지 이제 그녀를 보기도 뭔가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나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아이라도 가져볼까 했지만, 은아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 아이가 생기지도 않는다. 은아는 나에게 함께 병원에 가보자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냥 나는 은아 탓이라고, 은아는 내 탓이라고 여기고 살면 서로 마음이라도 편할 테니까. 뭐 세상사 고단하고 신경 쓸 일도 많은데 피임이라도 신경 안 써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보면 되니까. 지금 이것이 나의 결혼 생활이다.

 

“여보, 오늘은 같이 저녁 먹어. 무슨 날인지 알지?”

 

집을 나서는데 은아가 말한다. 가만 보자. 오늘이 무슨 날이지.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는데 무슨 날인지 아냐 묻다니. 에휴. 모르겠지만 대답은 하고 나선다.

 

“알지, 그럼. 이따 맛있는 거 먹게 사무실 쪽으로 나와.”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은아의 얼굴에 연분홍 미소가 번진다. 오늘이 확실히 무슨 날이긴 한가보구나. 집을 나서며 휴대폰의 날짜를 확인해본다. 5월 29일. 결혼기념일이구나.

 

3년 전, 5월 29일. 은아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아니, 세상 밖까지 다 합쳐도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으리라. 순백의 천사가 장인의 손에서 내 손으로 넘어올 때, 난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고, 이제 더 바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뭐, 여튼. 결혼기념일이라... 선물을 사야겠네. 점심시간에 김비서와 함께 백화점을 찾는다. 은아에게 예쁜 목걸이를 사주기 위해서였다. 은아 줄 선물을, 그것도 결혼기념일 선물을 김비서랑 사러오다니. 백화점에서 목걸이를 고를 즈음에야 이 상황이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뭐... 이미 같이 온 것을 별 수는 없었다. 얼떨결에 김비서 줄 작은 귀걸이까지 함께 사버렸다. 좋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귀걸이를 하는 김비서에게 예쁘다고 말하며,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쓴 가래를 다시 삼킨다.

 

그 날 저녁, 사무실 근처에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마주 앉은 은아의 모습, 그리고 휑한 그녀의 목을 보며, 목걸이를 사길 잘했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여보, 우리... 나 더 나이 들기 전에 아기 만들면 안 될까?”

 

은아가 묻는다. 나도 아이를 갖고 싶다.

 

“그래, 그러자. 나도 우리 아이 보고 싶네. 당신 닮아 예쁜 아이.”

 

꽤 좋은 대답. 대답을 하고 혼자 만족감에 젖는다. 그러자 은아가 말한다.

 

“당신이 좋다니까 좋다! 사실 우리 엄마, 아빠도 손주 보고 싶어 하시고...”

 

갑자기 화가 난다. 장인, 장모 얘긴 뭣하러 한담.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지, 그 노인네들 보여주려고 낳아야 되나. 갑자기 화가 치민다. 은아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이해는 하지만, 그냥 나도 모르게 잠깐 배신감이 든다. 하지만 화를 내고 싶지도 않다.

 

“그래,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밥 먹어~ 맛있네.”

 

레스토랑에 조용히 흐르는 국적불명의 잔잔한 노래와 스테이크를 가르는 칼과 그릇의 마찰음만 공간을 채운다. 밥을 다 먹고, 집에 가기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자 은아가 말한다.

 

“여보, 우리 오랜만에 예전에 당신 살던 고시원 쪽 가볼까? 그 옆에 공원에서 얘기도 많이 했었잖아~”

 

듣는 순간 더 이상 화를 참을 수가 없다.

 

“고시원 얘긴 해서 뭐해? 그때가 행복했어? 뭐하러 가 거길?”

 

한바탕 쏘아붙이고는 악셀을 밟는다. 얼른 집에 가서 자고 싶다. 씻지도 않고 이불 속에 파묻혀 자버리고 싶다. 얼굴까지 이불을 덮고 자버리고 싶다.

 

...

...

 

“이연성, 정신 차려!”

 

누군가 날 깨운다. 형태도 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 앞에 서있다. 너무 눈이 부셔서 그 사람의 검은 실루엣 밖에 보이지 않는다.

 

“누구세요?”

“누군지는 알 필요 없고. 너는 지금 교통사고로 죽는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너는 지금 교통사고로 죽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마치 목욕탕에서 말하듯이 그 사람의 목소리는 엄청난 울림이 있었다. 꿈인가 싶었지만, 깨어지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말을 이어갔다.

 

“사람은 누구나 첫 번째 죽음의 위기에서 선택권이 주어진다. 자신이 죽든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너가 죽는다고 하면, 그냥 넌 이대로 죽는 거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너는 살아나고 너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 기회는 한 번뿐. 선택해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게다가 내가 죽는다니. 당장 이 사람의 말을 믿기도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었다. 순간 수많은 일들과 얼굴이 스쳐갔다. 그리고, 은아. 은아와 있었던 일들, 은아를 처음 본 순간, 은아가 나에게 고백하던 날, 내가 사법고시 합격하던 날, 그리고 우리의 결혼식. 모든 순간이 스쳐갔다. 은아야...

 

“선택하겠습니다.”

“말해보거라.”

“저는... 제가 살고 싶습니다.”

 

머리론 은아를 생각하면서, 나는 내가 살고 싶다고 내뱉었다.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아니 주워 담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이렇게 죽을 순 없었다.

 

“알겠다. 너는 살고, 너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이 선택의 기회는 첫 번째 죽음의 위기에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고로 너가 다시 죽게 되는 순간엔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잘 살거라.”

 

은아가... 죽었다. 나와 함께 교통사고가 났고, 둘 다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은아는 오히려 회복이 빨라 의식을 되찾고 있었고, 나는 거의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은아는 다시 의식을 잃고, 다시 의식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나는 기적처럼 깨어났다. 쉽게 말해 은아는 죽고, 나는 살았다.

 

은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그러 면에서 나는 최고봉인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나쁜 놈이지만, 나는 그 사건이 있던 이듬해 재혼을 했다.

 

지금의 아내는 그때 그 김비서, 김지나. 지나는 내조도 잘했지만, 워낙 똑똑한 여자라 변호사로서의 내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일처리 또한 똑 부러지게 해주는 여자였다. 덕분에 나는 변호사로서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당연히 부와 명예 모두 나를 따라왔다. 부와 명예가 쌓일 수록 은아에 대한 죄책감은 사그라져 갔다. 나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TV 프로그램도 자주 출연하여 스타 변호사가 되고, 변호사 수익 뿐만 아니라 여러 부가 수익까지 손에 쥘 수 있었다. 정말 무서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다. 집도 훨씬 넓은 곳으로 옮기고, 차도 비싼 차, 기사도 두고, 정말 어릴 때 tv 속 드라마에서만 보던 재벌들이 살 듯이 나도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가 행복해지면, 행복해질수록 의심도 들기 시작했다. 젊고 예쁜 아내와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좋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아내는 내가 바쁘게 일하면 할수록, 점점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는 시간이 많아졌다. 심지어 내 차와 내 차를 운전해주는 박기사까지 자신이 쓴다며 돌아다니기도 했고, 구두, 가방, 반지, 목걸이, 심지어 차까지. 그녀의 과소비도 점점 심해졌다.

 

“당신 요즘 너무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죽어라 일만 하는데, 당신은 놀러만 다녀!!? 어디서 뭐하고 다니는 거야? 친구 만나는 건 맞아?”

 

내가 가끔 타박을 할 때만 그녀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녀가 말하는 사랑에 나는 성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나는 뭔가 내 자신이 나약해짐을 느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날 사랑해주고 있다니. 그런 마음에 난 그녀가 말하는 사랑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것도 잠시 뿐. 그녀는 나에게 사랑을 말한 다음 날도 또 친구들과 놀기에 바빴다. 나는 그런 그녀에 대한 의심을 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하루는 박기사에게 아내를 미행해볼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별 특이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난 내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 내 아내가 바람이라도 피길 바라고 있는 건지, 분명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미행을 붙였는데 막상 진짜 아니라고 할 때 드는 기분은 뭔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무 특이한 점이 없었다는 박기사의 보고를 들으며, 괜시리 아내에게 미안해진다. 오늘 저녁엔 외식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여보, 오늘 맛있는 거 먹읍시다. 7시까지 집으로 와요. 같이 외식하러 나가게.’

 

7시, 아내가 집에 돌아왔고, 아내와 나는 차를 타고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여기 분위기 좋다~ 그런데 갑자기 왜 외식이에요?”

 

아내가 레스토랑에서 내게 묻는다.

 

“그냥~ 당신이랑 맛있는 거 먹고 싶어서. 여보. 우리, 아이 가질까?”

 

아내는 무슨 대답을 할까. 괜히 긴장된다. 아내의 당황한 눈동자가 조금 맘에 들지 않지만, 당황했겠지, 충분히.

 

“뭐~ 당신이 원한다면 그래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여기 맛있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대답이다. 은아의 얼굴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레스토랑에 조용히 흐르는 국적불명의 잔잔한 노래와 스테이크를 가르는 칼과 그릇의 마찰음만 공간을 채운다.

밥을 다 먹고 다시 차에 오른다.

 

“박기사, 날도 좋은데, 한강변으로 드라이브나 하고 가지~. 당신도 좋지?”

“네,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창문을 반쯤 내리고 달리니, 바람이 내 얼굴을 감싼다. 배가 부르고, 피곤했는지 잠도 조금씩 오는 것 같았다. 아내의 손을 살짝 잡아본다. 아내가 나를 보고 짧은 미소로 답한다.

 

행복하다.

 

...

...

 

눈을 뜨니,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눈이 부시다....그가 보인다. 또 교통사고구나.

 

...

 

“...제가 죽나요?”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침묵마저 무섭게 느껴져, 그냥 먼저 질문을 던졌다.

 

“더 이상 너에게 선택권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선택의 기회는 첫 번째 죽음의 위기에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고로 너는 이번엔 선택권이 없다.”

 

... 허망하다. 순간 아내는 어떻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저기.. 근데 제 아내는요? 김지나.. 김지나에요”

“가만있어 보자.. 김지나.. 김지나. 너의 아내는... 죽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하더군.”

 

순간 눈물이 핑 돈다. 아내가 보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는 일. 나는 하지 못한 일인데. 그 사람에게 사랑이란 그리 소중한 것이구나.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일. 갑자기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내가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아내에게 더 해주고 싶다. 아내에게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말해야 하는데...

 

“하지만 너는 죽는다.”

 

그가 내게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의 말과 함께 스르르 잠이 몰려온다. 이상하다... 내가.. 죽는 건가?..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아내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린다고..안했나?

그리고 그 순간 또 한번 은아의 모습도 스쳐 지나간다. 가만... 그러고보니 은아..도 선택의 기회가 있었을...

...

 

그 날 저녁, 라디오 뉴스엔 이런 기사가 흘러나왔다.

 

“mbc 라디오 뉴스입니다. 올림픽대교 남단에서 있던 승용차와 트럭의 충돌사고로 인해 승용차에 타고 있던 이연성 변호사 부부와 그의 기사 박 모씨가 사망했습니다. 아, 정정합니다. 운전기사 박모씨는 현재 의식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연성 변호사 부부만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란 법은 없다.”

 

3년 전

 

“최은아. 너는 지금 교통사고로... 아니 누군가에 의해 죽는다. 사람은 누구나 첫 번째 죽음의 위기에서 선택권이 주어진다. 자신이 죽든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너가 죽는다고 하면, 그냥 넌 이대로 죽는 거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너는 살아나고 너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 기회는 한 번뿐. 선택해라.”

 

“저는... 제가 죽을께요. 우리 남편은 살려주세요.. 이제 그렇게 원하던 변호사가 되었는데 이렇게 죽을 순 없어요. 제가 죽겠습니다. 우리 그 이는 살려주세요.. 우리 연성 오빠는 살려주세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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