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검색 결과(64);
-
-
-
-
-
-
-
-
[무서운글터] 방배동에서 생긴 일 (New ver.1)
어쩌면 이글은 무게와 어울리지 않을수 있습니다. 흥미 위주로 짧고 강렬하지도 않거니와 비문이 없는 까닭에 읽기 지루 하실 수도 있습니다. 몇해전 방배동에서 생긴 일 이라는 글을 쓰며 '이거 나중에 장편으로 제대로 써야겠다' 생각 했었는데, 요즘 다른 습작들을 쓰는 틈틈히 시간이 날때 마다 머리도 실힐겸 조금씩 써나가고 있습니다. 그 중 서두에 관한 부분만 올려 봅니다. 인터넷 어느 곳에도 올릴 생각이 없었는데 작금에 조금 왁자지껄해진 짱공도 좀 식힐겸 올려 봅니다. ********************************************************* 1장 누구나 살면서 한두 번쯤은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겪지 않을까? 논리적으로 결코 설명되지 못할 일들 말이다. 너무 현실과 어긋나서 ‘어차피 말을 해도 믿지도 않을텐데 뭐’ 라고 자포자기 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실제 그런 경험들은 스스로 빛을 잃고 사그라지는 경우가 많다. 분명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인데, 너무 비상식적인 탓에 시간이 흐를수록 어딘가 잘못 보관된 기억이라고 스스로 단정한다. 예를 들자면,나는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 포항에 위치한 구룡포로 3박4일로 피서를 갔다. 피서라는 단어를 써도 될지 모르겠다. 어떻게, 누가, 그곳으로 데려다 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삼촌’ 네 집이니 즐겁게 놀다 오라고 말을 들었다. 내 또래 아이들이 많았고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바다에서 놀아 살이 온통 까맣게 타있던 아이들은 살결이 하얀 나를 보고 샌님 이라고 놀렸다. 아이들은 정박해 있는 배에 올라가 다이빙을 한다던지, 수영을 해서 누가 제일 멀리까지 다녀 오는지를 경쟁했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 하자니 위험하고 아찔하지만, 확실히 이천년대 아이들 위험 개념과, 80년대 아이들 위험 개념은 달랐다. 아이들은 위험하다고 말하는 나를 두고 낄낄 거렸고,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 높은 뱃전에 올라가 손 쉽게 다이빙을 했다. 수영을 못한다는 나의 말에 삼촌이라는 사람은 자신 등에 나를 태우고 바다를 헤엄쳐 갔다. 낮에는 바다에서 놀았고, 밤이 찾아오면 묵고 있던 삼촌집 평상에 모여 앉아 수박을 먹으며 귀신 이야기를 했다. 80년대 시골집이 그렇듯 삼촌집 화장실도 마당에 위치했다. 저녁에 먹었던 수박 때문에 새벽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나게 되면 무서움에 곤욕을 치뤘다. 기억하는 사건은 그곳에 내려가서 이틀째 되는 날 벌어 졌다. 아이들과 어울려 해수욕장에 몰려갔던 나는,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래사장에 앉아 아이들이 바다에서 뛰어 노는 모습을 바라만 봤다. 어쩐 일인지 하늘은 쨍쨍 맑은데 굉장한 너울이 쳐대던 날이었다. 나는 집채만한 너울 모습에 압도되어 바다 속으로 뛰어 들지 못했다. 그때 백사장 뒤편으로 있던 웅덩이 쪽으로 내 시선이 향했다. 그곳은 밀물 때 바다에서 밀려 왔던 물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혀지게 만들어진 곳이다. 웅덩이라고 표현 하기에 너무 크고 깊었기에, 차라리 저수지라는 표현이 맞을 듯 하다. 처음 구룡포에 도착한 날 삼촌이 그렇게 말했다. 바다에 들어가는 건 상관 없는데 저 웅덩이 쪽 물로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왜요? 라고 묻자 삼촌은 당황했다. 그저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삼촌 뿐만 아니라 같이 어울리게 된 아이들도 그런 말을 했다. “저는 절대 들어가지 마래이, 희한하게 관광 온 사람들이 바다에서 멀쩡하게 놀다가 저서 빠져 죽더라.” 또래 친구 중 대장격인 아이가 처음 해 준말 이었다. 하지만 수영을 못하던 내 눈에는 그곳이 더 안전해 보였다. 일단 그곳은 파도 없이 잔잔 했고 물은 따스했다. 아이들이 노는 것만 하릴없이 바라보던 나는 가만 일어나 웅덩이 쪽으로 향했다. 발목께 오는 곳까지 조심조심 들어가자 오후내 햇살을 받아 따스해진 물의 감촉이 심상하게 찌르르 올라왔다. 발을 통해 느껴지는 물은 바닷물 보다 밀도가 높게 느껴졌다. 주위에서 단단히 들은 주의 사항 때문에 나는 더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 서 있었다. 그렇게 햇살을 받으며 따스한 물의 기운을 받으며 서있던 것 까지. 딱, 그 부분까지 기억 난다. 정신을 차리자 나는 물속에 있었다. 당황하여 위를 바라보자 머리 한참 위쪽으로 수면이 보이고 수면 너머로 태양이 물속으로 햇볕을 내려 보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물을 벌컥벌컥 무의식적으로 삼켜 버렸다. 밋밋하고 느끼한 물 맛을 아직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분명 물속 내 옆에 나 말고 누군가 한명 더 존재 했다. 아마 여자일 것, 이라고 생각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면서 왜 여자라고 단정 지었을까? 생각 하지만 확실히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동네 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싸서 내려다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이들 중 한명 어쭙잖은 인공호흡을 실시한다고 내 가슴을 펑펑 치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정신이 돌아 왔다. 아이들은 바다에서 놀다 내가 사라진걸 발견 하고 불안한 예감에 백사장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때 한아이가 저수지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내 모자를 발견했고, 여러명이 물에 뛰어 들어 나를 건져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자가 둥둥 떠있던 그 아래, 일자로 서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비밀로 했다. 시골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나와 같이 놀되 안전하게 놀아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이 일이 알려 진다면 녀석들이나 나나 심하게 잔소리를 듣게 될 것이 뻔 할 일이었기에, 우리끼리만 공유 했다. 녀석들은 내게 어쩌다 그렇게 깊은곳까지 들어 갔냐며 타박을 했지만, 그건 내가 대답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분명 발목 부분께에서만 있었기에, 그 깊은 곳 까지 언제 들어 갔는지 기억이 없다.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어린 내 머리로 생각해도 논리적으로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내가 겪었던 이야기이다. 실제 있었던 아이들과 대화나, 알싸하게 맞으며 뛰어다니던 바닷바람, 백사장에서 주어 올려 낄낄대던 불가사리 감촉들, 지금도 정확히 형상해 낼 수 있는 아이들 뱃전 다이빙 같은 것들이, 그저 기시감 같은 것으로 치부 하기에는 너무 생생하다. 하지만 이후, 구룡포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구룡포에서 체험들은 입밖에 내어서 안될 것 같은 사위 스러운 기분을 항상 받고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성인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께 한번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어머니와 둘이 저녁을 먹던 중 어느 티비 프로그램에서 구룡포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 그 왜, 나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 방학 때 구룡포에 갔었잖아요?”“뭐, 구룡포?”“응 구룡포, 기억 안 나세요? 무슨 삼촌네 집이라고.”“무슨 소리야? 네가 구룡포에 삼촌이 어디 있어?”“응? 그럼 그때 내가 며칠 놀다 오던 그 집은 누구 집이에요?”“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초등학교 2학년 때면 너 한참 어릴땐데 엄마가 얼마나 걱정이 많은 사람인데 너 혼자 그런 데를 왜 보내?”어머니는 정색을 하고 말씀 하셨다. 나는 입을 닫고 말았다. 웬지 말을 하면 안 되는 일을 발설 해버리고만 같은 찜찜한 기분이 한동안 따라 다녔다. 돌이며보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부분들이 너무 많다. 삼촌 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 였을까? 분명 나는 삼촌 등에 올라타 바다를 지난 기억이 남아 있다. 나를 태웠던 삼촌의 매끈하고 넓은 등판 감촉 까지. 그런데 사람이 거북이처럼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등에 태우고 자유자재로 수영을 할수 있을까? 그 때 이후 부모님은 단 한번도 삼촌 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꺼낸적이 없으셨다. 또 나는 깊은 물에 빠졌는데 어떻게 일자로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사람이 물에 빠지면 부력으로 떠오르지 않는가? 설령 물속에 있다해도 무거운 추를 달고 있지 않는 이상 그렇게 꽂꽂히 서있는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때 물속 내 옆에 같이 있던 그 여자 아이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하는.도저히 상식적으로 설명 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스스로도 사실인지 그저 단순한 내 착각인지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또 다른 기억은, 그 즈음 우리 아파트 5층에 살고 계셨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다. 당시 우리 아파트 5층에 신혼부부가 아이 두명과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와 그 집 새댁이 친했던 관계로 새댁 아주머니는 네 살 두 살 아이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모시고 계신 시 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해 한글도 깨치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이가 드셔서 정신도 오락가락 하신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으로 봐선 아마도 당시 치매에 걸려있지 않으셨나 유추한다. 어느 날 새댁 아주머니가 사색이 되어 우리 집에 뛰어 내려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주고받은 후 쏜살같이 같이 5층을 오르 내렸다. 어머니는 내게 왜 5층을 그리 자주 왔다갔다 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그 날밤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잠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이야기에 잠이 깻다. “아니 글쎄, 그 한글도 모르는 양반이 한문으로 된 법구경을 앉아서 줄줄 읽고 있더라니까.”“그래? 한글은 몰라도 한문은 아시는 거 아냐? 원래 시골 분이시라 매?”“아냐, 농사만 지어서 글 자체를 모르신데, 글쎄 내가 새댁하고 올라가니까 새댁하고 나한테 막 소리를 지르는 거야. 이번 생에도 스님 몸을 받았어야 하는데 농부 몸을 받아서 다음 생에도 성불 하긴 틀렸다고 소리소리를 지르지 뭐야.”“그래? 전생에 스님 이었단 말이야?”“그렇지 않겠어? 한문으로 된 법구경은 웬만큼 한문을 아는 배운 사람들도 읽기 힘들어. 글쎄 나하고 새댁을 앞에 앉으라고 큰소리를 치더니 그걸 줄줄 읽고 해석까지 해주더라구. 어이구야, 소름 끼쳐서 혼났네.” 그때 나는 소파에서 잠든척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걸 보면 나는 또 다시 잠든 모양이다. 그 뒤 할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시절 그런 얘기를 다른 아주머니가 와서 할 때면 어머니는 나를 밖으로 내보거나 듣지 못하게 하셨다. 절에 오래 다니셨던 어머니는, 사람이 영계 이야기를 들어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런저런 자잘한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자면 한 없이 길게 늘어진다. 말하자면 누구나 살면서 그렇게 논리적으로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 하나 둘 정도는 가지고 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어릴 적 들었던 학교괴담이나 군대괴담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놓고 보니 너무 오래전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부터 해 본다. 이미 십여년이 훨씬 더 넘은 기억들이다 보니, 그때 그 감정들, 벌어졌던 현상들에 대해 얼마나 자세히 복기해 낼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아무래도 중년에 훌쩍 다다른 지금 혈기왕성하게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자니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이나 사고도 많이 눈에 띄인다. 그래도 최대한 가감 없이 내가 겪었던 대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진실이란 세상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이니까 말이다. 담담히 내가 겪었던 이야기 들을 서술하듯 풀어내 이야기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이건, 내 이야기 이다. 실제 겪었던 이야기 이고 어쩌면 지금 현재에도 연결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2. 이천일년도라고 하면 ‘번쩍’, 바로 떠 올릴수 있는 사고가 무엇이 있을까? 많지 않다. 당신 기억력이 나쁜 것이 아니다. 실제 그해, 이천일년도에 각별하게 기억해 낼만한 사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아드레날린을 대량 방출 시킨 월드컵이 개최된 해는 이천이년이었고, 한국인 최초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것은 한해전인 이천년 이었다. 이천일년에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이 사망해 전국민을 충격에 빠트렸다. ‘아무리 돈이 많은 왕회장도 죽음을 피해 갈수는 없구나’, ‘돈으로도 살수 없는 것이 있다니’. 단순한 진리에 전 국민이 화들짝 놀랐다. 방콕발 아시아나 3423편을 삐융 쏘아 올리는 것을 필두로 인천공항이 개장 했다. 인천공항이 개장 하자 사람들은 김포공항을 빠르게 잊었다. ‘아니, 저렇게 코딱지 만한 공항에서 해외를 나갔었단 말이야?’ 다들 그렇게 입을 모았다. 지붕만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하던 출국 관문은 화려한 시대를 접고 국내선이나 가까운 일본 선을 위주로 하는 낡고 쇠락한 공항으로 전락했다. 세대는 그렇게 바뀌어 간다.한발 더 나아간다면 가난한 나라 중국이 어느새 WTO에 가입하고 올림픽 유치에 성공해 강대국으로 가기 위한 위대한 여정 첫발을 디뎠다. 사람들은 중국의 저력을 두려워 했다. 이 사람이 중국가서 떼돈을 벌었다 더라, 저 사람이 중국가서 떼돈을 벌었다더라. 소문은 무성한데 실제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세계 자본을 무섭게 빨아 들이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 몰랐다. 메이드인 차이나 제품을 싸구려라 무시했고 더럽고 천박한 중국인 이라며 손가락질 했다. 무시를 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찝찝한 두려움이 남는데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쨋든 돈을 벌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남자들은 돈을 벌려면 중국으로 가야 한다고 떠들어 댄후, 술과 여자로 돈을 쓰러 중국으로 떠났다. ‘양주 맘대로 먹고 여자 두명 불러서 밤새 놀았는데 십만원 이면 떡을 치더라’. 호사가들은 남자들의 음험한 환타지를 부추겼다. 끼리끼리 모여 십만원으로 떡을 치기 위해 중국행 비행기를 탔다. 뭐, 그렇다. 하나 더 보태자면 기아타이거즈가 해태타이거즈를 인수 했다는 것? 왕조의 몰락이라고 스포츠 신문은 연신 떠들어 댔으나 푸흡. 왕조의 역사는 자본주의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렇게 말하자니 평화로웠다고 생각이 든다. 사건사고가 유독 많은 나라 관점에서 봤을때 따분하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다음해 이천이년도에 축구로 온 나라가 들썩였지만 어찌됐건 그건 다음해 일어 날 일이다. 그때만 해도 그저 다음해 월드컵이 개최 되려니, 대표님이 4강에 안착하리라고 꿈도 꾸지 않던 시기 였으니까. 개최국이니 망신은 당하지 않겠지, 막연히 생각 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조용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기억할만한 사고만 없었을 뿐, 사회는 벤쳐 혹은 닷컴 기업에 대한 거품으로 기이하게 뒤틀려져 갔다. 벤쳐나 닷컴 기업을 창립하면 기획서 한 장당 10억을 펀딩 받을수 있다는 부풀려진 소문이 공공연히 돌았다. 모기 날개만큼 조그마한 능력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너도나도 회사를 박차고 나가 벤쳐를 차렸다. 테헤란로에 나가면 이십대 젊은 친구들이 벤츠와 비머를 끌고 다닌다거나, 그 친구들이 룸싸롱에서 하룻밤 수천만원씩 펑펑 쓴다는 풍문이 직장인들 가슴을 뛰게했다. 실제 나는 그때 자그마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십억을 끌어 올테니 그럴듯하게 한방 날리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야, 이정도 규모면 오십억 펀딩은 식은 죽 먹기지. 치고 빠지면 돼. 한번 날리자. 내가 알아서 다 할게.” 졸업후 모은행 M&A팀에 입사했던 친구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녀석은 이미 억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주식으로 벌써 몇십억정도 세이브를 해놨다고 큰소리 쳤다. 서른이 채 되기전, 녀석은 이미 벤츠를 타고 또래 친구보다 저만치 앞서 나갔다. 나는 제안을 거절했다. 사회를 보는 안목이나 정의감 때문이 아니다. 내가 가진 커뮤니티는 순수하게 젊은 친구들 모임을 주선하는 사이트 였는데, 도무지 무슨 수로 수익내? 알수 없는 이야기들이 세상에 가득했다. 그렇게 기회를 날려 버렸다. 어쩌면 나도 어린 나이에 많은 돈을 거머쥘수 있었을 지도? 세월이 훌쩍 지나 돌이켜 보면 부지식간에 감당할지 못할 돈이 손에 쥐어 졌다면 내 삶은 얼마나 망가 졌을까, 생각해 본다. 세월은 그렇게 제정신이 아니었다. 너도나도 일확 천금을 꿈꿨고 헛된 꿈으로 일그러진 현실은 카드로 돌려 막았다. 신청만 하면 신용카드가 날라오던 시기이기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예닐곱장 카드는 기본 이었고 매월 말일이 되면 이카드에서 저카드로, 또 저카드는 이 카드로 돌려막기 바쁜 시기였다. IMF 후폭풍이 시작 되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옆자리 동료 책상이 복도로 나와 있더라는 괴담이 흉흉했다. 문제는 괴담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는 것 이다. 어느날 출근하니 내 옆자리 계장 책상이 깨끗이 하루밤새 비워졌다. 계장은 어제 저녁 퇴사를 통보 받았고 욱하는 마음으로 밤에 사무실로 들어와 짐을 빼갔다. 어제만 해도 정직원 이었던 사내 운전기사들이 아침에 계약직, 용역직으로 통보 받았다. 회사 전체 인원의 오분의 일정도가 하루아침에 비 정규직으로 내몰렸다. 우리는 항거 하지 못했다. 내가 아닌걸 다행으로 생각했고 다음에 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언론은 IMF 원인이 국민들 과소비 탓이라고 각성을 요구했고, 국민들은 진정한 언론 역할에 대해 각성했다. 해외 여행 한번 나가보지 못하고 열심히 일했던 직장인들은 졸지에 나라 경제를 파탄시킨 주범이 됐고, 정작 IMF 주범인 정부와 기업은 칼자루를 손에 쥐고 무섭게 휘둘러 댔다. 모든게 헝클어져 버린 것 같은 세상 이었다. 새천년이 밝아 온다며 희망차게 보신각 종을 두들겼던 영상을 보고 있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찌된 영문이지 희망찬 밀리니엄 세기는 혼돈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시기 였다.말하자면, 중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다가 왔는데 미처 깨닭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천일년도에 대한 기억은 명확하지 않다. 그저 브라운 아이즈의 벌써일년을 흥얼거리며 변화하는 세상을 무심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구월십일일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911테러가 벌써 그렇게 오래된 사건이라는게 실감 나지 않는다. 테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아니 그때만 해도 영화에서 누군가 여객기를 납치해 고층빌딩에 자살 테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면 말도 안된다며 피식 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 비행기는 곧바로 세계국제무역센타로 날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에 이럴수가, 라고 한탄 했다. 우리는 삼삼오오 둘러 앉아 미국본토가 공격당하는 장면을 며칠내내 바라봤다. 정말 기묘한 해였다고 하자.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크게 일어난 사건사고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쩐지 큰 일이 벌어져 버린 그런 해였다. 현실과 꿈, 망상과 공상의 구분이 모호 했다. 내가 할 이야기는 그해 겨울 벌어진 이야기 이다.
-
-
-
-
-
[엽기유머] 야구 인프라
위 사진은 1965년에 완공되었으며....
1982년, 프로야구 원년부터~ 작년 2013년 시즌까지...
10번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호랑이들의 소굴 '무등 야구 경기장'
라이벌 '삼성 라이온즈' 가 홈으로 사용하는 '대구 야구 경기장' 다음으로 오래된 경기장.
숱한 명경기, 수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배출했던 이곳이....
이젠 말그대로 한국 야구사의 전설로 남게 되었음....
그 이유는....
KIA 타이거즈가 2014년 올시즌 시작 전, 이 전설의 무등 경기장 떠나
바로 옆에 완공될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이사를 가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사진들은 KIA 타이거즈의 새로운 홈구장인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의 조감도.
공사비로,,,,,,,,,,,,,,,,,,,,,,,,,,,, 1000억이 들었다 함.
그리고 위에 열거한 사진들이....공사 초기 부터....최근까지의 실사....
조감도에 나타난 우측외야의 관중석은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이후에 점진적으로 설치한다고...
구 무등경기장의 취약점으로 지적됐던..... 관중 편의 시설과...구장 주변 조경 시설이 대폭 강화되고....
메이저리그 구장 처럼.. 포수석 뒤에 기록석을 배제시켜 관중석으로 이용함.
또 스카이 박스와 최고의 화질을 자랑하는 신식 전광판 설치...외야석의 패밀리 존, 바베큐 파티 존 등의.....
다채로운 이벤트 구역을 마련하여.... 관중들의 편의를 최대한 돕는다고....
기아 타이거즈는 프로야구 출범 후....최다 우승팀이라는 명예와는 무색하게.....
전용 훈련장 시설이 없어...꿈나무 육성과 기존 1군 선수들이 경기력을 유지하는 데....
많은 애로 사항이 있었음.....
허나...2011년 전남 함평에 300억원 가까이 들여...
(전남 함평에 위치한 기아 타이거즈 챌린저스 필드)
최고 시설의 트레닝 센터를 완공하기에 이르니.....
2014년 올 시즌부터는......
국내 '최고의 인프라' 에서 야구만 집중하면 됨......
또..... 동렬이 형~ 혓바닥 각도만 좁히면 됨...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구 야구장)
굿 뉴스 하나 더~!!
메이저리그 시설 전문가에게도 까이고....정전과 침수를 밥먹듯 해대는...
국내 최고령 야구장 '대구 야구장' (1948년 완공)
또한.. 신축 구장 터파기 작업이 차질 없이 진행중.....^^
(2015년 준공을 목표로 한, 대구 야구장 조감도)
2015년 준공을 목표로...... 대한민국 최초의 '팔각 야구장'을 볼 수 있게 됨.^^
(삼성 라이온즈의 '경산 볼파크')
모그룹의 사훈에 걸맞게... 뭐든지 일류을 지향하는 '삼성 라이온즈'는
이미 90년대 부터, '경산 볼파크' 라는 트레이닝 센터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음....
경기장만 완공 된다면... 삼성 라이온즈 또한 내,외적으로 최고의 인프라를 구축하게 됨.
최첨단 신축 구장에서 사자들이 하루빨리 포효하길~!
(올 5월 완공 예정인 SK 와이번즈 '강화 트레이닝 센터)
SK 비룡들 또한~!! 국내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기존의 '문학 야구장'에............
드디어 올 하반기.....숙원 사업이었던......'강화도 트레이닝 센터'를 개장.....
일류 팀으로써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듯~!^^
(한화 이글스의 서산 훈련장)
한화 독수리들도... 2012년 충남 서산에 그들의 전용 트레이닝 센터를 개장 하였음.
이미.... 그들은 메이저리그 구장 시설 관계자들로 부터 최고점을 받은....
대전구장을 보유하고 있음.
(위: 리모델링 당시 대전 구장 조감도 / 아래: 그로인해 쾌적해진 라커룸)
낙후된 대전구장을 리모델링하여 최고의.... 야구 환경을 조성하고....
선수단 복지를 실현시킨 한화그룹에 야구팬으로써..... 박수를 보냄^^
(위: 올해 확장 예정인 두산 베어스의 '이천 베어스 파크' / 아래: LG 트윈스 이천 트레이닝 센터 조감도)
한지붕 서울 라이벌 '두산 베어즈'와 'LG 트윈스'는 마치
약속이나 한듯...올해까지 경기도 이천에 최신식 전용 훈련센터를 확장 & 개장함.....
(롯데 자이언츠의 김해 트레이닝 센터)
롯데 자이언츠는 전통의 명가답게...멋진 연습시설과......
많은 돈을 들여 리모델링한 매머드급 사직 야구장을 보유함.....
사직 구장은 구식적인 외관과는 달리....
열정적이고 유별난 팬심을 다잡기 위해....
내부 시설이 해마다 업그레이드 된다고 함....
또한 과거에 아시아 시리즈까지 개최하여....잔공사까지 마무리.
현재, 9개구단들 중 손꼽히는 구장 시설을 보유 중.
마지막으로...... 말 많고 탈 많은..... 고척동 돔구장^^;
이밖에 100억원을 들여
NC 다이노스가 훌륭히 리모델링한 마산구장,
신식구장으로 리모델링 중인 KT 수원구장 등...
2014년 새해를 전후로......국내 프로야구 인프라가 많은 발전을 한 것 같아 뿌듯함^^
이같은 인프라의 확충이......선수들의 실력을 더욱 향상시키고...관중들의 편의를 도모하며,
더불어 우리 리그에서 활약하게 될 외인 선수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로 남았음 함.^^
* 점심먹고.... 짬내서 올리는 자료라.....내용이 허접하네요^^
곧 '세계사'를 주제로 찾아뵐께요^^
졸라맨2작성일 2014-01-07추천 36
-
-
-
-
-
-
-
[엽기유머] 일베 용어 정리(전라디언 뜻을 모르시는 분이 많아서 올립니다.)
1. 오/오/미 디씨에서
파생된게 정설이라고 하지만
일단
시초는 이글루에서 시작됐어.
카카루라는
이글루저가 쓴 이 댓글이 거의 시초라고 볼 수있고 그 뒤로 정사갤, 야갤 등 사이트로 퍼져나가면서 알려진 단어야.
원래
오/오/미라는 단어를 써왔다는 건 말이 안되는거지.
오메나
워메의 발음을 오-미로 할 수는 있지만 직접 타자로 오/오/미라고 쓰는건 이게 시초.
애시당초
전라도를 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고
그
뒤로 이호성 살인사건이 주목받으면서 그걸 디씨 정사갤이나 야갤등에서 깔때
오/오/미
호성형님 지리것소. 등으로 파생되서 여기까지 온거지.
절대!
절대 그저 사투리가 아님.
2. 슨/상/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을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던 그 시절에 이름 대신 '선생님'이라는 단어로 지칭했고
그게
사투리로 불릴때 '선상님'이라는 단어로 불리우게 된거고
박정희때
지역감정이 아예 가시화 된건 알거야.
그때부터
반 김대중 세력 + 보수 네티즌 들이 합쳐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적개심을 표현한 단어로
슨/상/님,
개/대/중, 쩔/뚝/이 등으로 표현된거고
그게
다시 전라도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반감+호남에 대한 적개심 이 짬뽕되서
슨/상/님이라는
단어가 전라도 비하 단어가 된거지.
3. 홍/어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전사자의 시신 썩는 냄새를 쿠테타군 관계자가 홍/어 삭힌 냄새에 비유한데서 유래했다는 말이 있지.
근데
이게 원래 유래가 디씨 정사갤임.
스펀지에서
홍/어회 냄새에 대한 내용이 나왔는데 그걸 본 정사충(정치사회 갤러리의 유저들을 벌레만도 못하다 하여 부르는 말)이
'광주
사람들이 시신 냄새를 맡으며 홍/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멍청한 놈들ㅋㅋ' 이라는 식의 비아냥의 글이 올라왔고
그
댓글에 '홍어 놈들은 동족 홍어도 먹었을거다' 라는 식의 또다른 비꼬는 글이 올라오는 식으로
정사갤에서
집중적으로 전라도를 비하하는데 많이 사용 됐어.
그리고나서
09년도에 기아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때
홍/어홍/어 하면서 기아랑 전라도랑 싸잡아서 많이 까면서 널리 퍼진거야.
홍/어드립
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정사갤이고 야갤이고 별로 가본적도 없겠지만
아프리카
챗방이나 네이버 댓글 등 여러매체를 통해서 접하고 그냥 남들이 쓰니까 나도 쓴다 이런식으로 썼을 가능성이 큰거지.
이
외에도 전장군님 나가신다, 전장군님 땅끄엔 자비란 없다, 민주화 당했다 이런식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의
희화화 시키고 호남지방을 비하하는 단어들, 말들이 굉장히 많아.
전라도
뿐만이 아니지
과메기(경상도),
통구이(대구) 이런 말들... 다 이런 유래인거 알거야.
+
4. 전/라/디/언
전라도
+ 인디언 이라는 설도 있지만
전라도
+ ian(사람을 나타내는 영어 접미사)=전라디언
이라고
부르지.
보통
ian이 붙는 말은 국적이나 인종을 구별지을 때 쓰는 말인데
예시로
캐네디언, 아메리칸, 코리안 등이 있어.
그
말인즉슨, 한국인과 따로 전라도 사람들을 구별지어 말하는 말이다 이거지.
한국사람과
정서적으로 맞지 않는다, 보통 한국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라고 보면 돼.
결국
전라도를 배척하는 그런 말과도 비슷한거지..
비슷한
말로는 잘 안쓰지만 전/라민국 이라는 말이 있어.
모르고 썼다는 말 이제는 그만들었으면 좋겠고
그런의미로 쓴게 아니다 라는 말도 안들었으면 좋겠어.
애시당초 태생이 그런 말들은 아무리 좋은 뜻으로 써도 좋은 말이 될 수
없는거잖아?
니그로라는 말 알지?
흑인들을 비하하는, 정말 쓰면 난리나는 그 말.
원래 'nigger'라는 스페인어로 '검은'이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영국인들이 식민지 흑인들 비하의 뜻으로 'negro'라는 말로 쓰면서 나쁜말이
된거거든.
결국 오/오/미, 슨/상/님 이런 말들 쓰면서
'난 나쁜뜻으로 쓴거 아닌데 왜들 그래? 다들 쓰잖아? 안그래?' 하는건
이태원 한복판에서, 할렘가에 가서 '니그로'라는 말 쓰는거랑 똑같은거야.
하물며
디씨 기아타이거즈 갤러리에서도 저런 말 쓰면서 비하하하거나 자기는 아니라면서 계속쓰면
무조건
고소하고 5.18관련 단체에 바로 신고해.
그만큼
민감한 단어고 쓰면 안되는 단어야.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는 말도 알거야...
저런
단어 자꾸 쓰다가 고소내지는 신고당하면
미성년자일
경우 부모님 대등하고 경찰서 가서 형사님, 부모님 앞에서
자기
아이디 읽고 자기가 쓴 글 또박또박 낭독하고 벌금물고 와야해
그만큼
쓰면 안되는 말이고 진짜 잘못썼다가는 된통 혼나는 말이니까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