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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중국의 동북공정을 아시나요?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획기적인 프로젝트를 2002년 2월부터 진행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변강사지연구중심'이 주관하고 있는 동북공정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과 관련이 깊은 만주지역의 북방영토에 대한 불안감의 표출이다.
즉 남북한의 통일 후에 제기될 가능성이 있는 간도영유권 문제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다. 또한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적 연원과 족원(族源)을 왜곡하고 있다.
특히 동북아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이들이 차지했던 영토는 또한 중국영토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기 위하여 국내성의 유적들을 크게 복원하였으며, 최근에는 발해 도읍지까지 정비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우리의 고대사 왜곡 태도에 대하여 우리는 학술회의를 개최하였으며, 이에 관련 학회 대표들이 '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국회의원 25명이 '중국 역사 왜곡 중단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며, 심지어 고구려연구재단까지 설립하였지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에는 미흡한 조치였다.
중국이 20년간 북방영토에 관심을 갖고 동북공정을 추진한 결과 내린 결론은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며 이들이 남긴 유적, 문화 등이 모두 중국에 속하며, 중국의 문화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 작업으로써 중국은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족원 및 국가의 성격, 문화 등의 전반적인 분야를 국가 차원에서 왜곡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북공정의 기본 이론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왜곡 조작된 대량의 저술은 북방영토가 역사적으로 중국 영토임을 기술하여 후대의 증거자료를 남기기 위한 목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 배경과 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목적이 북방영토인 간도지역의 영유권 분쟁에 대비하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의 정체성 및 의식 개혁에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동북공정의 추진 배경과 목적
1. 동북공정의 추진 배경
중국은 1983년에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에 '변강사지연구중심'을 설립하여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변방지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빈번해진 한국인들의 동북지역 출입과 조선족들의 한국 입국 선호 현상 및 탈북자로 인한 북방지역의 불안상황이 2002년에 "동북변강역사와 현상계열연구공정"(약칭 동북공정)을 추진하게 만들었다.
북방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내닫는 행태에서 중국 정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국은 중국이며 모국은 한국이라며 이 지역에서 실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조선족에 대해 그 원인을 규명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우리민족이 공유하고 있는 반만년의 역사성과 족원(族源)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과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였다. 이 지역에 거주했던 종족과 현대의 한민족과의 단절을 중국은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 존재했던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단정하였다. 따라서 1980년대 규정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변방 소수민족정권으로 인식한 왜곡된 저서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중수교 후 북방지역의 고구려 유적과 고분벽화에 한국인들이 갑자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중국은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에 고구려 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려 하자 중국은 이를 보류시키고 2004년 6월 소주의 28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북방영토에 소재한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기 위하여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하는 등 그 동안 방치했던 고구려 유적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국은 이 지역이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전략적 요충지임을 인식하였으며, 특히 1909년 청일 간에 맺은 간도협약으로 인한 간도영유권 분쟁의 발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따라서 이 지역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 동북공정인 것이다.
동북공정을 이끄는 실제 최고 지도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으로서 동북공정의 조장을 맡고 있는 왕락림(王洛林)이다. 그는 동북공정의 기초연구 과제의 성과물인 [중국동북변강연구]에 기고한 다음의 글에서 동북공정의 추진배경을 알 수 있다.
"최근 소수의 남북한 학자들이 중국 역사를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며, 소수 정치가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종종 오류를 퍼뜨리고 있다.
첫째, 다른 마음을 품고 고구려와 발해 등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정권을 고대 조선족의 독립 국가이며, 오늘날 중국 동북 변강이 역사상 고대 조선의 영토였음을 논증하려고 한다.
둘째, 역사상 민족분포와 이동문제에 있어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만들고 있으며, 대부분 청동단검의 출토지역이 모두 고대 조선의 영역이다. 심지어는 부여 등 고대 동북 변강 종족이 모두 고조선에서 분열되어 나간 하나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의 일부분으로 논증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동북지역을 고조선의 범위로 넣으려고 한다.
셋째, 이른 바 간도문제로서 근대 조선민족의 연변지역 이민문제를 국경문제로 제기하였다. 이를 근거로 영토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 학자들이 중·러시아 관계역사를 왜곡 저술하였으며, 연해주의 지방관리와 일본, 구미 학자들이 중국위협론을 제기하였다.
여기에서 왕락림은 동북공정 추진의 중요성과 긴박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동북변강사지 연구는 150년의 역사인데 1980년대 이후 이에 대한 연구가 매우 진전되어 연구저서가 200 여 종이 넘고, 학술논문도 수천 편에 달한다. 이들의 연구내용은 동북강역 및 지방역사의 모든 영역을 내포하고 있으며, 중요 연구 분야의 초점은 동북지방사, 동북변강민족사, 동북변계연혁사, 고구려역사 및 고고학, 발해역사 및 고고학, 19세기 조선이민 중국사, 동북 및 주변국가지역관계사와 변계연혁사 등을 포괄하고 있다.
또한 중국변걍사지연구중심의 제3, 4대 주임을 역임하고 동북공정의 부조장을 맡고 있는 마대정(馬大正)은 "동북공정의 시작은 시대적 요구"임을 주장하였다. 즉 동북공정의 시발은 우연성과 동시에 필연성을 갖고 있으며, 지난세기 80년대 이래, 변방학 분야의 발전에 따라 변방연구에 대해 높은 수요가 제기되었다. 시대는 우리가 동북변강연구에 대해 큰 실천과 큰 발전을 품고 이제 시작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동북공정 시작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어떤 우연적인 요소가 또한 이 동북공정이 올해 정식으로 시작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우연성은 바로 우리가 변방의 역사연구의 도전 및 변방의 안정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1997년 7월에 조사하여 이듬해 9월에 보고한, "한반도 형세의 변화에 대한 동북지구의 안정과 충격"의 보고서 내용은 동북공정의 추진배경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에 의하면 동북지구에 대한 조사공작의 중점 사항은 길림성의 안정에 있어서 도전과 대책이다.
이에 대해서는 첫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전쟁과 탈북자들의 흐름과 방향이며, 둘째는 눈앞에 닥친 길림성의 중·조변경 현상을 들고 있다.
이 해의 하반기에 착수한 2개 공작 중 하나는 길림성 중·조변경지구의 조사연구였으며, 다른 하나는 길림성 당안관 소장 청대 중조관계 당안자료의 수집과 정리였다.
그리고 조사연구 공작의 중점 사항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한반도 형세의 조사연구, 중조 역사상의 중요 문제점 : 기자조선, 위만조선, 고구려, 발해, 중조변계 및 계무교섭, 19세기 하반기 조선이민의 중국으로의 이동, 중국조선족 형성 등 역사적 연구, 눈앞에 닥친 동북지구 마약 문제, 종교 문제, 민족관계 문제 등의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문제 연구, 북한의 탈북자 흐름과 실현 가능한 대책이다. 그리고 7원 12일부터 14일까지 길림시에서 "조선한문 고적 정리 및 연구 학술연구토론회"에 고찰조가 참가한 후 중·조변경지구를 7월 15일부터 7월 23일까지 관찰하고 7월 25일 북경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중국변걍사지연구중심의 마대정, 유위, 이국강, 서경려, 이치정 등 11인이었으며, 이들은 9일간 한중국경선을 답사하였다. 결국 1999년에 "중국변강지구역사 및 사회연구 동북공작 팀"이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해 볼 대목은 탈북자의 흐름인데, 당시 대부분 탈북자들이 연변지역으로 숨어들었으며, 북한과의 외교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하였다. 또 하나는 중·조변경 현상에 대한 중국의 과민한 반응이다. 결국 당시 중국변걍사지연구중심의 지도자인 마대정 주임을 위시한 11명은 집안에서부터 국경선을 따라 백두산 천지의 한중국경선을 답사 후 훈춘의 방천 지역과 두만강 지역까지 실제 답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답사 광경은 마치 300년전 백두산 일대를 답사한 목극등의 백두산지역 답사 광경을 연상시킨다.
이와 같이 동북공정의 추진 배경에는 북방지역의 영토 및 역사적, 국제정치학적 요인들이 잠재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 근대 한·중 양국간에 분쟁이 되었던 간도지역의 영유권 문제와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비한 중국은 고대 한국사의 기원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역사적 연원의 왜곡과 조작이 필연적이었다. 또한 1909년 청일 간에 체결한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분명 무효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결과이다.
즉 이 지역이 과거에 미해결된 분쟁지역이었음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역대 한국 정부는 외교상의 시끄러운 문제 발생을 피하기 위해 중국 정부에 간도협약의 무효를 정식으로 통보하지 않았던 결과로 오히려 중국이 20년 넘도록 북방지역과 간도분쟁을 풍부한 연구 인력과 자금을 충당하여 철저히 연구하여 한국에 "동북공정"이란 역사전쟁을 제기하였다.
2. 동북공정의 목적
연구중심이 추진하고 동북 3성(요녕, 길림, 흑룡강성)의 성(省)위원회가 참여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2001년 6월 장춘에서 중국사회과학원과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가 연합으로 주관한 "동북변강역사와 현상연구공작 좌담회"에서 동북공정의 의사일정이 제시되었으며, 2002년 1월 24일부터 25일가지 흑룡강서의 하르빈에서, 1월 26일부터는 2월 2일까지는 길림성의 길림에서, 2월 3일부터 5일까지는 요녕성의 심양에서 동북공정 추진 지도자 및 전문가 회의가 열어 준비를 한 후, 2002년 2월 28일에 5년 기간의 "동북변강역사와 현상계열연구공정(동북공정) 이 정식 출발하였다.
이 공정은 동북변강연혁사 연구를 더욱 강하게 하라는 중앙정부의 지시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중요한 학술가치일 뿐만 아니라 특별히 중국의 안전과 국가주권을 구현한다는 중요한 정치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연구공정의 시작은 동북변강역사와 현상연구영역에 장차 참신한 국면을 제공할 것이라고 하면서 동북공정의 지도그룹의 조장인 왕락림(王洛林)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동북변강역사와 현상연구공작에는 중요성과 긴박성이 있다. 즉 동북지구는 토지가 광활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중국의 중요한 변강 지역이다. 이 지역은 러시아, 북한, 한국, 몽골, 일본, 미국과 모두 연관되어 있으며, 최근 십여 년이래 동북아의 정치·경제 지위가 날로 향상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의 중심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둘째, 동북공정의 중요한 임무는 "동북지방사, 동북변강민족사, 동북변계연혁사, 고구려역사와 고고, 발해역사와 고고, 19세기 조선이민의 중국사, 동북지역과 주변 국가지역의 관계사와 변계연혁사 등의 연구방면의 연구 성과를 집중하고, 주변 국가에서 제기하는 의혹과 난점을 우세한 역량으로 집중 공략하여 해결하는 데 있다." 또한 동북공정의 방향은 충분한 연구인원으로 연구역량을 정리 종합하여 높은 정품 성과가 나도록 하며, 국가이익, 국가외교정책, 민족정책, 경제정책 등의 민감한 문제들을 잘 이끌고 관리에 역점을 둔다고 하였다.
동북공정 지도그룹의 부조장인 길림성 부성장인 전철수(全哲洙)도 "동북변강 문제연구를 펼치는데 있어 몇 가지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첫째, 동북변강문제 연구의 중요한 의의를 충분히 인식한다. 동북의 변강문제는 학술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영토, 국가강역, 국가주권의 정치문제이며, 변강이란 차원의 지역문제가 아니라 중국 전체의 문제이다. 둘째, 동북 변강문제 연구 중의 몇 가지 관계를 정확하게 처리한다. 그 중에서 학술문제와 정치문제를 정확하게 처리하며, 영토문제의 완전한 처리, 변강의 안정, 민족결단을 추구하며, 또한 역사와 현실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 변강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심을 둔다. 셋째, 동북 변강문제 연구를 계속 강화시킨다. 변경의 각 성은 자금지원과 지지를 지속적으로 보내 변경문제 해결에 적극 노력한다.
동북공정의 리더 격인 왕락림과 전철수의 주장에서 동북공정의 목표가 중국의 정치문제,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장기 프로젝트임을 알 수 있으며, 조선족이 거주하는 북방영토가 당면한 정치, 경제, 민족, 영토문제 등을 동북공정을 통해 해결하려는 것이다. 특히 동북아의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간도영유권 분쟁의 재발과 이에 따른 북방영토 지역의 혼란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역사를 중국사로의 왜곡이 절대 필요하였으며, 조선족은 중국역사의 틀 속에 존재하는 소수민족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결국 동북공정의 목적은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에 대한 의식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3. 동북공정의 성공조건
동북공정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대정은 5가지 의식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정치의식이다.
이 공정의 직접적인 목표는 바로 長治久安(국가가 장기간 태평하고 사회질서와 생활의 안전이다)이다. 이것은 또한 국가의 통일, 민족단결, 변방의 안정, 이런 큰 목표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정치의식은 이 공정은 충분히 입안되고 충분히 시작할 수 있는데 결정적이다.
우리가 학술연구에 종사하는 것은 순수한 학술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학술 연구가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대세(전체적인 국면)의식이다.
이 공정은 직접적으로 말해서 바로 동북 변방을 연구하는 것이다. 동북변방은 중국변방의 일부분인 동시에 다민족국가의 통일에 있어 결코 분할 될 수 없는 구성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대세의식은 통일된 다민족 국가의 대세의식이며, 세계적인 대세의식으로 이 점을 우리는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셋째는 책임의식이다.
정치의식 대세의식보다 앞서 반드시 책임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은 반드시 '①국가에 대한 책임, ②인민에 대학 책임, ③역사에 대한 책임' 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넷째는 정품의식(일류품 의식)이다.
우리의 연구 성과는 시간의 검증을 이겨내고 우리 후대 사람들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우선, 우리의 연구 성과가 충분히 국가 정책의 자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또 다른 의식 위에서, 연구 성과가 후대사람들의 변방연구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성실 신용의식이다.
이 공정에 비록 리더그룹, 전문가위원회가 있고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삼성의 주요 인사들의 참여조직이 있다 할지라도 조직과 실제 담당자간의 관계에는 엄격한 행정관계가 없다. 우리가 과제를 담당하여 완성했을 때 우리는 연구자들에 대해 자율, 성실과 신용을 견지할 것이다.또한 마대정은 동북공정을 성공하려면 다섯 가지 관계의 해결을 주장한다.
첫째, 정치와 학술과의 관계를 해결해야 한다. 학술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역사문제를 현실화하고 학술문제를 정치화하는 어떤 사람 어떤 주변국에도 반대한다. 우리가 종사하는 학술연구의 목적중의 하나가 학과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정부의 정책 입안을 위해 자문을 제공하는 것이다. 동북변방이라는 이 특수한 영역에서 학술과 정치 두 가지관계의 결합은 매우 긴밀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연구와 정책입안과의 관계를 해결해야 한다. 연구와 정책 이 두 가지는 완전히 양자를 동등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연구에는 과학적이고 역사의 검증을 받을 수 있는 역사 결론이 나와야 하며 정책입안자들을 위해 정책의 기초를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계를 해결하는 데는 연구자의 책임뿐만 아니라 정책입안자의 책임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기초연구와 응용연구와의 관계를 해결하여야 한다. 의식적으로 역사상 어려운 문제와 현실의 핫이슈 등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역사의 난점과 현실의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가 연구하는 첫 번째 과제로 삼아 기초연구와 응용연구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이 두 가지의 관계를 해결하여야 한다.
넷째, 개인의 탐구와 집단의 합작연구와의 관계를 해결하여야 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어떤 난관을 돌파해야 할 시점이 오는데 이때는 많은 학과의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개인의 연구와 집단합작연구가 결합된다. 물론 이 두 가지의 관계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서는 연구자들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서로 이해하고 양해를 구하는 합작이 필요하다.
다섯째, 보급과 향상의 관계를 해결하여야 한다. 제고(향상)는 일류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또한 높은 학술 수준을 가진 우량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우량품을 만드는 동시에 반드시 보급의 문제도 생각하여야 한다. 보급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①반드시 많은 백성들을 대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학술이 대중에게로 나아가고 대중으로 하여금 학술을 이해하게 한다는 뜻이다. 고상한 예술작품을 혼자만이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되고 연구 성과의 전달이 통속적인 지식의 도서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동북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②장편의 연구 성과를 농축하여 정련되고 정확한 조사연구보고로 이루는 것으로 역사문제의 조사 연구보고를 포함하여야 한다. 이렇게 현실감이 강한 문제를 농축하여 만든 조사연구보고서를 중앙과 지방의 지도자들에게 참고하게 해야 한다. 보급과 향상의 관계가 결합되면 동북공정의 발전을 촉진시킬 수 있다.
동북공정의 성공 조건을 제시한 마대정의 이론에는 부분적으로 상호 충돌적인 면이 보인다. 중국은 다른 나라가 학술문제의 정치화를 반대한다면서 자신들은 역사적 관점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등 학술문제를 정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구자들의 연구 자료는 정책입안의 기초로 제공되고, 연구 성과가 주민과 중앙 및 지방의 지도자들에게 참고하도록 한다는 주장은 바로 동북공정이 단순한 학술연구 활동이 아닌 긴박한 정치문제의 해결 수단으로써 추진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의식 교육을 시킨다는 것이다.
Ⅲ. 동북공정의 추진 실상
1.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
1983년에 창설된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의 지도자는 제1대(1983-1986) 주임은 옹독건, 부주임은 등예령, 제2대(1986-1994) 주임은 여일연, 부주임은 마대정, 제3대(1994-1998) 주임은 마대정, 부주임은 안경(1997-1998), 제4대(1998-2001) 주임은 마대정, 부주임은 여성, 제5대(2001-2003) 주임은 여성( 聲)이며, 지금까지 연임하고 있으며 부주임은 지난해부터 이국강이다.
모든 동북지역의 특히 한중관계사에 대한 연구 및 정책전략, 저서 출간 등은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다. 위 인물 중에서 제3대, 4대 주임을 역임한 마대정이 동북공정 추진을 위한 기초 작업을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방영토의 한중관계에 관련된 저술과 이론 개발에 앞 장 섰다. 즉 발간된 중국변강사지총서 중에 "중국고대변강정책연구"(1990, 마대정 주편), "청대변강개발연구"(1990, 마대정, 마여형 주편) "청대의 변강정책"(1990, 마대정, 마여형 주편)이 있으며, 변강사지총서 중에 "변강과 민족 - 역사단면 연구"(1993, 마대정), "20세기의 중국변강연구"(1997, 마대정, 유적), "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2001, 마대정 외)이 있고, "고대중국의 북부변강"(1993, 마대정 외), "중국변강경략사"(2000, 마대정 주편), "중국동북변강연구"(2003, 마대정 주편),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2003, 마대정 외) 등의 저서를 통해 중국의 동북 변방의 전략과 학술적 이론을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연구 방법은 기초연구를 위주로 하며 응용연구를 보완하고 있다.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의 홈페이지에 의하면 동북공정의 주요한 연구대상 중 기초연구 분야로는, 중국근대변계연구, 중국고대강역연구, 중국변강연구사가 3대 연구 과제이며, 중점 연구과제로는 중국근대변계변천, 중국 통일다민족국가형성과 발전적 규율, 역사상치변정책의 경험교훈이다. 응용과제로는 당대중국변강지구쟁점문제, 중요문제진행 대책성과 예측성 연구이다.
또한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은 6개의 부처가 있으며, 임영귀를 비롯한 5명의 학술위원회 위원이 있다. 모두 학술교류와 학술회의 개최 및 성과물의 출판을 관장하고 주요 연구 과제를 선정하였다. 1999년에는 중점 연구 과제를 14개, 2001년에는 22개, 2002년에는 22개의 연구 과제를 선정하였다. 중요 발표 성과물로는 2001년에 10개의 저서 및 논문, 2002년에는 18개의 저서, 논문, 고적정리가 있고, 2003년에는 저서, 논문 등 52개가 완성되었다. 또한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는 연구지인 "중국변강사지 연구"를 계간으로 간행하고 있다.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의 목적은 학술을 발전시키고 국가 통일 보호하고 중국 변강지구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초연구, 이론연구, 응용연구를 융합하여 연구중점 과제를 확정하였다. 특히 중국강역사, 중국해강사, 중국변강연구사 등의 영역적 연구에 대한 개척과 새로운 창조가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의 임무였다. 여기에 동북공정의 추진이라는 임무가 추가된 것이다.
2. 동북공정의 실체와 연구 과제
동북공정에 필요한 경비는 2002년도를 기준으로 보면 중국정부인 재정부에서 200만 위엔, 길림성과 흑룡강성, 사회과학원이 각각 25만 위엔을 제공하였다. 이를 5년 프로젝트에 맞추면 대략 1,375만 위엔, 한국 돈으로 환산하면 20억 6,250만원이다. 여성( 聲)주임도 동북공정의 예산이 이와 비슷한 규모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국내성 유적을 복원하고 고구려 유적지를 크게 정비하는 것으로 봐서 중국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것은 분명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 인력은 고문2, 책임지도급 6인, 전문위원회 3인, 연구위원 12인, 사무처(판공실)3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문에는 이철영, 항회성, 영도소조 조장에는 왕락림, 부조장에는 양광홍, 전철수, 조신량, 마대정, 비서장에는 여성, 전문위원회 주임에는 마대정, 부주임에는 진기명, 여성, 연구위원에는 성문덕, 왕정, 학시원, 왕위, 우패, 반춘량, 보평, 궁극, 병정, 상위국, 조자상, 유후생, 동북공정 사무처 주임에는 이국강, 유위, 이대로가 있다.
동북공정의 제1부분의 연구계열은 모두 6개 항목으로 세분되어 있다.
중국 강역 이론 연구: 중국의 국가, 강역, 국경 이론문제 연구와 더불어 고대 중국과 주변의 여러 종족, 국가의 관념과 근대에 이르는 기간의 변화에 대한 연구, 봉건왕조 시기의 번속관계, 속국, 조공제도의 연구 동북지방사 연구 : 동북변강역사의 형성과 변천의 연구, 동북변강의 영토, 국경 교섭, 국경조약 등의 문제 연구, 발해유적지 현상의 조사연구, 간도문제연구, 근대 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에 대한 동북역사 지리의 조사와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 명청시기의 동북 여러 종족들의 의식과 변강사회 연구, 동북 변강지역 양측에 걸쳐 있는 민족 연구, 고조선의 역사, 종족의 연원, 문화연구 중조관계사 연구: 조선반도의 고문명 기원, 조선반도의 국가, 종족 연구 중국 동북변방과 러시아 원동(연해주)지역의 정치 경제 관계사 연구 : 중국 동북변강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민족정책 비교연구, 중국과 러시아의 동단 변계 연혁 및 국경임무 문제연구 위의 5항목을 기초로 더욱 심화되는 응용연구이다.
제2부분의 자료(당안), 문헌정리, 번역 연구로 2개의 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자료 문헌 정리 : 동북변강에 관한 사료정리와 연구, 동북변강역사 지도집 수집, 정리, 연구와 함께 동북 변강 역사 사진수집, 정리, 연구. 중요저작의 번역 : 일어로 된 관련 중요저작 및 자료의 번역, 서양어로 된 관련 중요 저작 및 자료의 번역이다.
동북공정의 지도자 그룹의 구성을 보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면서 중국사회과학원장인 이철영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재정부장인 항회성이 고문이다. 동부공정의 리더자 격인 조장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인 왕락림이 맡고 있다. 또한 부조장은 흑룡강성 위원회 부서기인 양광홍, 길림성 부성장인 전철수, 요녕성 부성장인 조신량이 맡아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동북변강역사에 관한 저서가 200 여 종이 넘고 학술논문도 수천 편에 달한다. 출판한 주요 총서를 보면, 중국변강통사총서 7권 중 중국변강경략사와 동북통사는 동북지역과 밀접한 저서이며, 변강사지총서가 1991년부터 36권이 간행되었으며, 2003년에 동북변강연구총서 6권이 간행되었는데 이 총서는 동북공정 추진 결과 기초연구분야 과제를 결집하여 출판한 것이다.
따라서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지도자 그룹의 구성과 연구과제 및 연구성과의 규모를 보면, 동북공정은 중국공산당의 당차원에서 국가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으로 1차 통과된 과제는 다음과 같다.(숫자는 완성시기)
1. 흑룡강 통사, 보평, 2002. 042. 20세기 중국 동북 변강 문화 연구, 황정천, 2002. 063. 호태왕비 1580년, 경철화, 2002. 084. 중국 동북과 러시아 경제관계사, 장봉명, 2002. 095. 발해국사, 위국충, 2002. 096. 기자와 기자조선 연구, 장벽파, 2002. 097. 러시아 동부 이민 개발문제 연구(1861-1917), 왕효국, 2002. 098. 발해사론, 주국침, 2002. 099. 중국 동부 고민족 발전사, 이덕산, 2002. 0910. 중국 상관 성씨족원 고론, 왕아헌, 2002. 09
11. 민국시기 동북지방정부 치변연구, 호옥해, 2002. 0912. 근대 중국 동북지구의 국제이민문제연구, 왕승금, 2002. 1013. 간명 고구려사, 손옥량, 2003. 0114. 동북민족구역 설치연구, 정니나, 2003. 0615. 역조동북치변연구, 서덕원, 정빙천, 2003. 0916. 국제법과 중조변계쟁의문제, 초윤명, 2003. 0917. 청대변강성진연구, 이치정, 2003. 1218. 삼국사기 역주 및 연구, 유자민, 박찬규, 2003. 1219. 장백산 지구 역사와 문화 및 귀속문제 연구, 유후생, 2004. 0220. 동북한족 인구사 연구, 맹광요, 2004. 05
21. 중국 역대 치리 동북 변강 사상 연구, 유신군, 2004. 0622. 발해이민의 치리와 귀속연구, 무옥회, 2004. 0623. 청대 압록강 유역의 봉금과 개발연구, 장걸, 2004. 0624.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유지조사 연구, 서일범, 2004. 0825. 러시아 원동지구의 중국인, 장종해, 2004. 1226. 동북변강 이민족 문화교류와 융합, 병정, 2004. 1227. 만주국 시기 동북변계와 충돌 및 계무교섭 연구, 왕경상, 2004. 12
이 27개의 과제 중 13개가 동북변경문제(간도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6개 과제가 고구려, 발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3개가 러시아와 관련이 있다.
이 중 "러시아 원동지구의 중국인"과 "기자와 기자조선 연구" 및 "중국 동부 고민족 발전사"는 결국 족원의 문제와 귀결된다. 따라서 4개의 과제가 동북지역 즉 간도지역의 족원과 관련이 된다.
그러므로 1차 통과된 27개의 과제의 성격으로 단정한다면 동북공정의 목적은 1909년 이후 미해결된 간도 영유권의 확보에 있음이 명백해진다. 더구나 동북지역의 인구 및 이민사에 관련된 과제가 3개이며, 동북지구의 문화교류와 귀속문제를 다룬 것이 3개이다.
이것은 동북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을 염두에 둔 과제이다.
그리고 제1차 번역류와 당안자료 과제 일람표는 다음과 같다.
1. 손계림 고명학, 조선한국사학계의 고조선, 부여연구논저선편2. 권혁수, 고명학, 조선학계 고구려 연구문헌3. 정영진, 박찬규, 국외 발해사 연구자료 선편4. 장연괴, 우취홍, 조문상관 중요저작과 자료 번역5. 고경수, 허준수, 중조변경사, 백산자료원 총서 선역 6. 장영조, 여금, 조선반도 현상연구7. 오건화, 박성호, 한국과 조선의 경제, 사회상황 비교8. 조입지, 서창한, 21세기 러시아 동부 발전전략과 구획9. 장종해, 조입지, 아목이 연안지구의 중국인10. 장종해, 영건항, 90년대 상반기의 중국과 러시아의 원동지구 합작문제11. 왕사, 서창한, 이미 확정된 조약조관12. 숙봉림, 영근항, 러시아와 중국 및 소련과 중국간의 경제무역관계사13. 왕정고, 문봉, 자본주의 시대 원동에 있어서 러시아와 중국의 여행공작14. 임수산, 요풍, 대흑자도 상의 여진고고유존
제1차 자료(당안류)과제 일람표
1. 오원풍, 중국 제1역사 당안관, 동북변강역사당안선편, 훈춘아문당휘편, 2005. 122. 조환림, 요녕성당안관, 동북변강역사당안선편, 요녕권, 2003. 123. 유봉루, 길림성당안관, 동북변강역사당안선편, 길림권, 2003. 124. 전여정, 흑룡강성당안관, 동북변강역사당안선편, 흑룡강권, 2003. 9제1차 번역류와 당안자료 과제 일람표에서도 동북변강의 역사와 중조변경사 및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관련된 과제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중국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목적이 간도지역의 영유권 확보에 대비한 것이 더욱 분명하다.
3. 중국이 주장하는 고구려사의 핵심 쟁점
첫째, 1980년대 후반 이후의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고구려를 중국 변방의 소수민족 정권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연합군에 멸망함으로써 고구려는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를 조공으로 확립된 신속관계로 보는 것이 최근 중국의 입장이다. 이들은 고구려가 스스로 칭신납공(稱臣納貢)하였으며, 당이 고구려에 책봉한 결과로 당과 고구려는 신속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 종족은 고조선, 부여와 같은 예맥족이 아닌 중국 고이(高夷)의 후손이다.
넷째, 고구려 유민은 모두 한족으로 동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아니고 태봉과 신라를 이은 국가이며, 고구려의 문화는 고려와 조선의 문화와 상관없는 중국의 고대 고구려의 문화이기 때문에 중국의 문화라는 것이다.
여섯째, 동북지역(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이민(移民)민족으로서 고대 동북의 고구려인과는 계통적으로 내려오는 혈연관계나 계승관계가 없는 별개의 민족이라는 것이다.
일곱 번째, 고구려의 수와 당과의 전쟁이 국가간의 전쟁이 아닌 변강의 소수민족 정권을 통제하기 위한 중국통일전쟁이다.
여덟 번째, 고구려의 평양 천도 후에도 정권의 성질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므로 고구려의 영토는 중국의 영토이다. 이것은 과거 중국학자들의 관점을 수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양소전의 이론을 수정한 것이다. 즉 고구려의 평양 천도(427년)를 기점으로 천도 이전 시기의 고구려는 동북의 소수지방 정권이므로 당연히 중국의 영토이나 천도 이후는 한국의 고대국가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중국의 현재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인식한다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의거하여, 고구려 뿐만 아니라 고조선, 부여, 발해 등 중국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국사로 인식한다는 관점에 일치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이 성립된 이후 "동북공정"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1996년 이후 시기에 간행된 대부분의 저술은 똑같은 입장의 학설을 여기 저기 반복하여 되풀이하는 형편이다.
Ⅳ. 중국의 변경문제 해결의 관점과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1. 중국의 변경문제 해결의 원칙
중국은 지금까지 한중국경분쟁, 즉 간도분쟁에 대해서는 1909년 간도협약으로 해결된 것으로 보고, 간도분쟁에 대한 저서나 논문 발표가 저조하였지만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이 설립되면서 간도분쟁에 관련된 논문의 발표가 1990연대 후반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중국변경사지연구]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이 사실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전에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 이미 간도문제를 공식 과제로 선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중국은 일찍이 정부 수립 후 주변국가의 변경문제 해결을 위한 5가지 해결 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 중국은 역대 관할 하에 형성된 전통적인 관습상의 영토선을 존중한다. 전통적인 관습상의 영토선은 장기적으로 역사 발전과정 중에 점차 형성되어 쌍방 역대 행정 관할이 미치는 범위를 결정하는 근거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관습상의 영토선은 정식으로 국경 획정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양국간에 공동으로 국경획정 협상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원인으로 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쌍방 협상과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둘째, 강압적이고 불법적이며, 비밀협상에 의한 국경선은 승인하지 않는다.
셋째, 일방적인 국경선의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
넷째, 중앙정부가 위임한 전권대사가 체결한 것 외에 지방당국이 체결한 어떠한 국경획정조약도 승인할 수 없다.
다섯째,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국경문제도 양국의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 중국은 1954년 4월 중국과 인도 간에 티베트 문제에 대한 타결의 전제 원칙으로 내세웠던 평화5원칙인 영토와 주권의 상호 존중, 상호 불침략,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호혜, 평화적 공존이라는 기초 위에서 주변 각국의 분쟁을 협상을 통해 해결하였다.
이것은 국제연합헌장 규정과 일치하여 이후로 국제법 중의 하나의 기본원칙이 되어 세계의 대다수 국가가 수용하였다. 이 원칙은 평등, 존중, 평화적인 협상원칙, 침략과 무력사용의 반대이다. 중국은 이웃 국가간에 영토분쟁이 일어날 경우에는 협상을 통해 해결한다는 점을 기본으로 하였다.
일반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간의 영토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한 경우가 매우 적으며, 소요되는 시간이 또한 매우 길다. 더구나 한중간의 간도영유권 분쟁은 평화적인 해결이 어렵다. 그것은 간도지역이 양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이익이 교차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중국이 현재 불법 점유하고 있는 간도 지역에 대해 제일 급선무는 간도협약의 무효선언을 통한 중국의 점유 시효를 단절시키는 방법이다.
2. 중국의 간도분쟁에 대한 국제법적 해결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 이후 한중 국경분쟁(간도분쟁)에 관련하여 국제법상의 해결을 제시한 논문은 초윤명(焦潤明)의 "국경분쟁 해결의 법리 원칙"이다.
간도분쟁이 발발 후 국제법적 해결을 언급했던 중국학자로는 1908년에 [간도문제]를 저술한 송교인(宋敎仁)이 유일하다. 그 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간도분쟁에 대하여 동북공정 이후 이제 중국도 다각적인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출간된 간도문제 관련 서적의 해석 작업으로 시작으로 국제법상의 해결에 대한 시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초윤명의 국제법적 해결 원칙을 고찰해보자.
초윤명은 각국간의 영토, 국경분쟁의 현대 국제법상의 처리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국제 연합 헌장에 따른 각국간의 우호 관계와 협력에 관한 국제법 원칙의 선언에서 선포된 7개 항의 국제법 원칙이다.
①위협 또는 무력사용의 금지원칙으로 어떠한 국가라도 자신의 무력에 의해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②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 ③내정 불간섭 원칙, ④국제 협력 원칙, ⑤각 민족의 평등권과 자결권의 향유 원칙, ⑥각국의 주권 평등 원칙, ⑦의무 담당 및 국제 연합 헌장 이행의 원칙이다.
위의 국제법 원칙 선언은 분쟁 해결의 실마리를 각국에 제공하는 기본지도 원칙이라는 것이다.둘째는 현상 승인 원칙 또는 점유 유지 원칙이다. 국경 분쟁의 해결은 우선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견지하여 국가에 관하여 담판 혹은 협상을 통해야 한다.
그리고 국경조약을 체결하여 국경분쟁을 해결하는 것은 이것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유효한 협력 방법이다. 중국은 건국 후 이 방법을 채택하여 12개 인접국과 연이어 국경문제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점유 유지의 원칙은 국가 강역을 안정시키는 데 일정한 의의가 있다. 국경 담판 중에 이 원칙을 적용하고 또 공평 원칙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분쟁지의 주민의 관습도 고려해야 한다. 이 원칙은 한중 국경 분쟁의 해결을 위해 일반적 원리로 제출된 것이다.
셋째는 불평등 조약에 의거하여 점유한 영토는 무효라는 원칙이다.
국가 주권 평등은 국제법상의 제일 중요한 기본 원칙이며 통상 각국 조약 체결에서 쌍방이 모두 호혜적이며 평등한 주권관계여야 한다. 만약 체약국이 상대방의 평등권리를 부인하고 법률상의 불평등한 규정을 둔다면 이것이 바로 불평등 조약이다. 불평등 조약은 통상 일국이 다른 일국에게 위협과 무력으로 강박을 사용하여 다른 일국 혹은 담판 대표로 하여금 조약체결에 동의토록 하는 것이다. 근현대의 국제 관계 중에 일국이 위협과 무력으로 강박하여 다른 일국이 조약을 체결하게 한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국제법상 국가간의 국경분쟁 해결 원칙은 아직도 많다. 즉 국적 변경의 원칙, 영토 우선 설치의 원칙, 선점 원칙, 시효 원칙 등 모두 한중국경분쟁을 중국이 해결하는 법적 원칙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외에도 역사상 각국이 체결한 조약 중에 형성된 국경 획정 원칙, 그리고 역사상 각국이 국경분쟁 해결 시에 사용한 합리적인 관례도 또한 한중국경 분쟁의 해결의 법적 원칙이 될 수 있다고 중국은 주장하고 있다.
3. 남북한의 간도연구에 대한 중국의 비판
동북공정 전 간도문제에 대한 남북한의 연구동향을 언급한 중국학자의 논문은 양소전의 [중국, 조선, 한국의 中朝邊界 연혁 및 계무교섭의 연구동향에 관하여](중국사회과학원 계간, 1994)이다. 동북공정 후에는 초윤명(焦潤明)이 남북한의 간도 연구동향을 처음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북학자들의 견해를 황당무계한 이론으로 단정해버리고 있다. 그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국경 분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리 원칙으로 한중 양국간에는 확실한 하나의 역사상에 남겨진 국경 분쟁 문제가 존재한다. 이 분쟁 문제는 소위 역사 강역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역사상 민족의 이동과 변화 발전에 따라 한중 역사상의 각 왕조의 국경이 변화 이동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본래 전근대에 속한 문제이며 현대 한중 국경분쟁의 이유가 성립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최근 거의 십년 이래로 남북 사학계의 일부 학자 집단은 한정된 민족적 이기주의적 입장에서 각자 국가의 정치적 요구에 영합하여 일련의 역사 강역 귀속이론을 제시하였다.
그중 북한 학자 박시형이 조선의 역사과학(1962.제1기) 잡지에 발표한 "발해사의 연구를 위하여"가 대표적이다. 북한학계는 소위 발해사 고구려사 등에 상관된 연구는 완전히 박시형의 관점을 채용하여 저술을 진행하였다. 이런 관점이 구체화 된 것은"조선통사"의 이론구성의 영향이 크다. 1970년대 이래로 한국학술계에서는 한중 양국 역사 강역의 왜곡을 비판하는 학술 서적들이 계속 출판되었다. 중국에 대한 영토야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은 유정갑의 '북방영토론', 노계현의 '고려영토사', 신기석의 '간도 영유권에 관한 연구', 김덕황의 '백두산과 북방강계', 양태진의 '한국국경사연구' 등이다.
'국사회복협의회'에서는 역사교과서 개정을 요구하였으며, 심지어 고토 수복의 구호를 내걸고 중국이 동북지역을 한국 역사강역 판도에 넘겨주라고 주장하였다. 위의 상술한 학자의 언론은 특별히 일부는 역사 강역 귀속이론이며 역사과학적 기본원칙에 엄중히 위배된다. "역사과학" 잡지가 보급됨에 따라 동북아지구의 고대사연구 조성에 혼란을 초래하였다. 그들의 주요 황당무계한 이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위 조선고유형인(朝鮮古類型人)이다. 현대 조선인의 직접 선조이며 분포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 대부분과 러시아 연해주의 광활한 지구를 포괄한다. 따라서 이 지역은 고래로부터 조선의 영역이다.
둘째, 고조선(실제는 기씨조선과 위만조선이다)과 부여 및 고구려은 모두 "조선의 고유형인"의 후예로 선조 활동 범위 내에 건립한 국가이다. 따라서 모두 조선역사상의 왕조의 연대이다. 이러한 강역은 역사상 모두 한국의 영토이다. 고구려 구 영토 내의 역사유적도 모두 한국에 속한다. 단지 중국이 잠시 점유한 것이고 대신 통제할 뿐이다.
셋째, 전국시대로부터 수당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이 모두 한국을 침략하였다. 한 무제는 위만 조선을 멸망한 후에 낙락, 진번, 임둔, 현도 4군을 설치하였다.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그 고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를 하고 42주 100현을 모두 침략하여 한국의 국토를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넷째, 발해국은 고구려의 직접 계승국이다. 이것은 한국 역사상의 중요한 왕조이고 신라와 동시에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남북국, 혹은 남북조를 이루었다. 그로 인하여 남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점유하고 북으로는 흑룡강 유역에 다다랐고 동으로 동해에 접하였다. 서로는 송화강과 요하일대에 광활한 발해국의 강역이 되었다 역사상 이것은 한국의 영토에 속한다.
다섯째, 당은 발해에 대하여 침략자였으며,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침략자다. 중국 역대 왕조는 한국에 대하여 모두 침략자다.
여섯째, 도문강(두만강) 유역 북안이 간도이며, 장백산을 이씨조선의 발상지로 구실 삼았으며 중국의 연변지구는 역사상 한국의 영토라고 함부로 소리쳤다. 상술한 조선과 한국학술계는 한중변계사지 연혁과 계무의 기본관점에 다툼이 있다.
남북 학자들의 황당무계한 이론을 뒷받침하는 중요 이론은 개괄한다면, "원시 선민 활동 범위가 강역의 귀속을 판정한다"는 설, "통치계급의 족속이 국가강역의 귀속을 판단한다"는 설, "현대의 주민의 선조 족속이 국가역사강역의 귀속을 판정한다"는 설, "통치 계급 출생지가 영토귀속을 판정한다"는 설 등은 한국과 북한이 스스로 결정한 역사강역 귀속이론이다. 이 이론에 의거하면 한국이 인식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모두 역사상의 국가이며 그 강역은 한국에 속한다. 이에 대하여 논박을 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첫 번째 광할한 인류사적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인류문명은 오래된 고인류의 각 종족간에 융합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 경쟁 가운데 발전이 이루어진다. 각 민족은 장기적인 각축 경쟁 가운데에 소실되기도 하고 특별히 민족가운데에 영입되기도 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한다. 어떤 이는 민족이 강대해지고 비록 그 옛날 이름이 존재하더라도 그러나 이미 흡수되어 대량의 종족 혈통을 이끈다. 만약 오래 된 선민의 거주지 혹은 활동범위가 현대 국가의 역사강역의 귀속을 판정하는 원칙이라 한다면, 각국간의 중대한 혼란이 일어나고 국제법상에 있어서도 또한 성립되기가 어렵다.
둘째로는 이론각도면으로 볼 때 국제관례에 의거하거나, 아니면 국제 승인에 의거한 역사강역 이론은 논할 필요가 없다. "통치계급족속이 국가강역 귀속을 판정한다"는 이론은 모두 성립되기가 어렵다. 중세로부터 근대역사에 이르기까지 보면, 일반 정황은 각개 민족국가의 중요성은 그 거주민의 족속과 일치한다. 역사 계보로 볼 때 한 국가는 특정시기에 나타나서 외래 정복자가 되어 통치자가 된 상황이다.
셋째로는 현대 거주민의 조상 족속으로 국가강역 귀속을 판정한다는 것은 인류역사 변화에 국제 배경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국제사회가 함께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근대 국가 형성상의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현대 주민의 조상의 족속이 국가 역사강역의 귀속을 결정한다는 설은 탈법이고 아마 강역의 귀속이 중대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다. 이 이론이 성립하기가 어려운 것은 명백하다.초윤명의 간도문제를 보는 시각도 결국 중국이 추구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4.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
중국변강은 중국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장기적인 발전 산물이다. 중국변강의 특징은 첫째,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수천 년의 역사적 유적을 가지고 있다. 둘째, 광활한 지역으로 분산 발전이 진전된 후에야 통일이 이루어진다. 중국은 멀고 광활한 영토를 지닌 통일적 다민족국가이다.
고대의 중국 통일적 다민족국가로 선진(先秦), 진한(秦漢)시기의 중국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로의 발전 과정에서 심대한 영향력을 미친 3대 요인을 든다면, 첫째, 국가의 외연과 내포를 부단히 확대한다. 둘째, 국가의 정치구역과 변강의 정치형태를 발전적으로 통일한다. 셋째, 중국은 다민족적 공동체로 날로 유익하게 완성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변강 개념은 역사적, 상대적 개념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 문화, 지리위치 등의 요소를 종합 고려한 개념으로 보고 있다. 결국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변강의 내지화(內地化)가 필수적이다. 변강의 내지화는 변강의 문화 다원성을 보호하고 민족모순의 관점을 모면하게 한다. 그리고 변강 내지화에는 다음의 세 가지 중대한 의의가 있다. 첫째. 변강지역을 안전하게 한다. 둘째, 사회를 평준화하게 발전시킨다. 셋째, 종합적인 국력을 제고(提高)시킨다. 넷째, 국민소질을 제고(提高)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거 중국정부는 동북지역의 문제점을 분석하여 동북공정을 추진하였다. 가장 큰 걸림돌은 중원지역과 전혀 다른 동북의 역사와 문화였으며, 간도분쟁 발발의 잠재성이었다.
중국은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구려를 신라, 백제와 더불어 삼국의 하나로서 한국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 고구려를 중국의 변방 약소민족 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에 "중국변강사지 연구중심"이 성립시기와 일치한다. 또한 중국학계는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인식한다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의거 동북의 고대민족사를 해석하려는 견해가 일반화되었다.
즉 첫째, 고구려민족은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정권이다.
둘째, 고구려는 7백여 년간 중원왕조와 책봉을 받고 진공칭신(進貢稱臣)의 일종의 번속(藩屬)관계였다. 셋째, 고구려가 영유한 지역은 당초에 압록강 유역의 작은 모퉁이를 점거하였으며, 강성해진 후에는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북부를 영유하였을 뿐이며, 역사지리상의 명칭인 "동북지구"의 범위를 모두 넘지 못하였다. 넷째는 고구려 멸망 후의 고구려 민족은 일부분은 중원으로 옮겨졌고, 일부는 돌궐에 투항하였으며, 일부는 발해에 편입되었고, 가칭 고구려 유민은 이후 모두 중화민족으로 융화되었다. 대동강 이남의 일부는 신라에 융화되었으며,
동북의 고구려 후예는 지금의 조선족, 왕씨 고려, 이씨 조선과는 계승의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중국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의 조선족은 19세기 중엽 이후 월경하여 이주한 이민 민족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은 고구려와 고려, 조선, 조선족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은
첫째, 동북공정을 추진하기 위해 조작된 기본이론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서 동북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성을 중국사와 연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상 기록된 모든 자료를 발굴, 인용하여 이들 국가가 우리 민족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중국의 변방 약소민족 정권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둘째, 통일한국 이후 반드시 제기되는 간도분쟁의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논리로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간도지역이 애초부터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동요를 막으려는 것이다.
셋째,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은 간도지역이 존재했던 국가들의 족원(族源)을 왜곡시키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족은 대부분 한족으로 동화되어 오늘날의 한국민족과는 상관이 없는 종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손진기의 "동북민족원류"에서 주장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북공정이 추진된 이후 나타난 것은 고조선의 '기자동래설'과 일주서(逸周書)의 '고이'(高夷)를 고구려 선인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귀속시키기 위해 고구려의 족원을 한족의 후예로 설정하여 한국사와 단절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덕산은 '동북변강사의 연구' 결론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다른 주변 국가와 민족을 서로 관련지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기타 변강지구와 서로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동북사의 독특한 연구방법으로 동북사의 기본 특징을 찾아낼 수 없다. 따라서 독특한 연구 방법을 버리고 동북고민족과 중원내지의 고민족을 특별히 동이족계 가운데 여러 종족과 연계하여 연구를 진행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덕산의 주장은 동북의 민족과 중원의 민족을 동이족으로 간주하여 연구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결국 북방지역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왜곡시키려는 것이다.
넷째, 동북공정의 전략에 의해 출간되는 대부분의 저서들은 한결같이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에 입각하여 북방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된 이론에 의해 반복 기술하였다. 이러한 이들의 목적은 이 지역에 대해 역사적으로 중국사였음을 문헌으로 남겨 후대에 증거로 삼자는 것이다.그러므로 이 지역에 사는 중국조선족에게 이러한 동북공정의 이론을 교육시켜 민족정체성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2002년 8월부터 연변조선족자치구에서 실시하고 있는 3관(觀) 교육은 이러한 맥락에서 실시되었다.
Ⅴ. 간도영유권과 한중국경론
1. 중국이 주장하는 고구려ㆍ발해시기의 한중국경선
1) 한중국경선이 고구려·발해의 南界라는 관점
이 說은 고구려ㆍ발해가 신라와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지점을 한중국경선으로 단정하였다.이와 같이 주장하는 학자들과 저서로는 장박천 등의 [동북역대강역사], 동동의 [중국동북사] 손옥량 등의 [고구려사] 양소전 등의 [중조변계사]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저서를 중심으로 고구려ㆍ발해와 中原의 관계 및 한중국경선을 고찰하겠다.
장박천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남북조시기에는 동북의 각 종족들이 모두 북위를 中原의 대국, 천부(天府)로 여겼으며 그의 封함을 받고 신민이 되었다(p.65). 북위가 공손 씨를 통일한 후 요동ㆍ요서ㆍ현도ㆍ낙랑ㆍ대방군을 설치하였다. 낙랑군은 조선현 등의 6현을 거느렸는데 지금의 대동강 南岸이다(pp.76∼78). 고구려는 남북조시기에 북위, 북제, 북주의 번부(藩部)로 취급받았으며, 일방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北朝의 봉호를 받았다(p.93). 수ㆍ당 시기의 고구려는 그들의 속국이었다(p.120).
연의 진개가 조선을 공격하여 이천여리를 탈취하였는데 만번한(滿番汗)이 경계로서 지금의 압록강이다. 따라서 연은 이미 압록강 이서지역을 통일하였다(p.25). 그러므로 연과 조선의 경계는 패수인데 만번한과 패수는 모두 압록강의 하류를 지칭한다. 또한 한서 지리지의 함자현 주(注)에 "帶水西至帶方入海"라 하였는데 이 대수(帶水)를 지금의 한강으로, 대방현을 서울 부근으로 간주하였으며 함자(含資)를 지금의 충주와 강릉 사이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조령ㆍ소백산ㆍ태백산에 이르는 선이 낙랑군의 南界로, 태백산과 삼척에 이르는 선을 임둔군의 南界로 보았다 (pp.53∼54).
동동( 冬)도 고구려는 동북지구의 하나의 소수민족으로서 시종 중원정권의 통할하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p.584-585). 또한 만번한을 압록강 하류로 보았으며(p.165), B.C.30년의 낙랑군 북쪽 경계가 청천강에 이르렀으며, 후한 B.C.200년 전후해서 낙랑군의 위치를 황해도 해주부근으로, 대방군을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고당성으로 추정하였다(pp.328∼329).
손옥량도 고구려가 중원왕조에 대해 신하로 자칭하여 조공을 바치고 봉호를 요구하였으며(p.17), 중원왕조와의 예속관계를 철저히 벗어나지 못한 중국 북방의 할거정권의 하나였다고 보았다(p.93).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을 수복하여 고구려와는 살수(청천강)로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또한 위서 고구려 전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최강성기 南界를 소해(한강 하구)로 보았다(pp.134∼136).
양소전도 연과 조선의 경계를 만번한으로 보았다. 그는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검토한 결과 만번한은 고패수(漢代패수)이며 이것은 조선의 대정강으로서 지금의 청천강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연과 조선의 경계는 청천강이 된다(pp.26∼27). 또한 兩漢시기의 패수는 청천강을 가리키며, 수성은 패수의 남에 위치하므로 응당히 지금의 청천강과 대동강의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p.29). 진 시기의 조선과의 경계는 전국시대와 같았다.
따라서 연의 장성 동쪽 끝이 지금의 평남 용강이며, 진의 장성 동쪽 끝은 조선의 수성갈석이라고 단정하였다(p.32). 그리고 양소전은 한사군의 위치도 모두 한반도 북부와 중부 및 남부의 일부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pp.39∼54). 또한 그는 부여와 고구려를 중원왕조에 예속된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보았다(pp.61∼87).
그러므로 동진시기의 한중국경은 동진왕조에 예속된 고구려 지방정권과 한반도의 백제ㆍ신라의 경계선이 된다. 즉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가 되는 한강과 신라와 경계를 이루는 실직(강원도 삼척)이 한중국경선이다. 남북조 시기에는 고구려의 장수왕 재임시기로 아산만ㆍ조령ㆍ죽령ㆍ평해를 잇는 선이었다(pp.88∼89).
수ㆍ당시기의 고구려는 중원왕조와 예속관계를 계속 유지하였기 때문에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인 서쪽의 한강, 동쪽의 이원ㆍ단천을 한중국경으로 보았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고구려 지역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A.D.735년부터 당이 망한 A.D.906년까지 패강(대동강)이 한중국경선이었다(pp.90∼91). 이것은 성덕왕 34년(735년) 김의충(金義忠)이 당에서 귀국할 때 현종이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 칙사하였기 때문이었다(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제8, 성덕왕 34년조).발해도 당 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간주하여 신라와 경계를 이루는 니하(함남 용흥강)로서 한중국경선으로 보았다(pp.104∼106).
요ㆍ금시기의 한중국경은 고려와의 경계인 청천강 유역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겨란 정권(遼)은 중국 동북지역에 건립한 소수민족으로 보았으며 금을 세운 여진족도 중국 소수민족으로 간주하여 여진 각부가 거주하는 지역도 중국영토의 일부라는 주장을 하였다(pp.109∼116). 1130년(고려 仁宗 8년)에는 압록강 하구지역이 고려에 속하게 되어 이 지역이 金과의 국경이 되었다 (pp.116∼117).
원 초기의 고려와 국경선은 압록강 하류지역에서 설한령에 이르는 지역이었으며, 그 후 西의 자비령에서 동의 철령 이남이 고려의 소속이 되었다. 원 말기의 고려의 국경선은 니성(창성), 정주, 함흥, 북청지역이었다(pp.121∼127). 명ㆍ청시기에는 압록강과 도문강(두만강)이 조선과의 국경하천이 되어 한중국경이 이후로 고정되었다(pp.132∼146).이와 같은 중국의 논리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에 입각하여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신진학자들에 이어져 다시 주장되고 있다.
2) 한중국경선이 고구려의 西界라는 관점
이 說은 고구려가 한국의 고대 국가라는 관점에서 주장하였다. 주요 학자들과 저서로는 범문란의 [중국통사], 전백찬의 [중국사강요] 上, 한국반의 [위진남북조사강], 박진석의 [조선간사], 유택화 등의 [중국고대사] 上 당장유 편의 [수당오대사], 그 외로 중국사회과학출판사가 발행한 [중국북방민족관계사](북경:1987), 인민출판사가 발행한 [중국사고](북경:1982), 서연달 등의 [중국통사](상해:1986), 부낙성의 [중국통사](台北:1979) 등이다.
위의 저서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중원 국가에 예속된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즉 중원 국가들의 대외관계 또는 해외관계를 설명하면서 고구려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학자들의 입장은 대체로 객관적인 평가로서 우리의 주장과도 부합되기 때문에 문제시할 필요가 없다. 다만 위의 저서들의 출판년도가 늦어도 1980년대 후반 이전이며 대부분 중국의 동북지역이 아닌 북경이나 상해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3) 한중국경선이 고구려의 평양 천도(遷都)(AD 427년) 전후에 따라 다르다는 관점
이 說은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기준으로 하여, 천도 전(BC 37 - AD 427)은 고구려의 南界가, 천도 후(AD 427 - 668)는 고구려의 서북계가 한중국경선이라는 관점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천도 전은 중국 고대 소수민족 정권이며, 천도 후는 한국 고대국가라는 입장이다. 이 학설은 곽말약(郭沫若) 편의 [중국사고]에서 주장하였다. 또한 담기양(譚其 )도 이 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을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 부르며, 일찍이 곽말약이 주장하여 한시기 중국학계를 풍미하였다.
곽말약은 주변 소수민족과 중원왕조와의 관계를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남북조시기에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에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부여가 망한 후 고구려가 이 지역의 정치적 중심역할을 하게 되어 새로운 소수민족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러나 A.D.342년 모용황이 환도성을 침입하여 왕의 친척과 5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니 이에 고구려는 전연을 향해 칭신하고 조공하였으며, 다시 요동을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A.D.352년 연왕 모용준은 고구려왕을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군공으로 봉하였다. A.D.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오래지 않아서 물길이 일어나서 부여를 멸망시키고 송화강 유역을 점령하니 고구려의 영토가 전에 비교하여 크게 축소되였다. 이것은 평양 천도 전의 고구려를 중원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으로 규정한 반면, 평양 천도 후의 고구려를 중원왕조에서 벗어난 국가로 간주하여 고구러의 영토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곽말약은 전에 비교하여 축소되었다고 한 것이다.이러한 견해도 최근 통일적 다민족 국가이론에 의해 완전히 수정되었다.
2. 중국이 최근 주장하는 고구려시기의 수정된 한중국경선
종래의 주장되어 온 "고구려는 중국에 예속되어, 한에서 당에 이르는 중원왕조 관할의 동북 소수민족 지방정권"이라는 관점을 수정하였다.
즉 고구려는 중국 동북의 소수민족 할거정권이며, 중국의 영토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인식한다는 관점에서 수정되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영토의 계승문제에 관하여 다음 세 가지 견해로 나누어진다.
가. 고구려 영역은 고조선의 고토였고 이곳은 한의 현도 혹은 진번의 관할 지역이었다. 따라서 고조선 역시 고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영역이 원래 중국에 속하였다.
나. 고구려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인식하였고 고구려의 영역이 원래 고조선이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지금의 조선의 고대국가이다
다. 고구려는 혼강 유역에서 나라를 세웠지만 오래 전 고이(高夷)가 탈출하여 와서 새로운 민족 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고이는 서주시기에 주의 천자가 선포한 주의 "북토"의 내에 거주하였다. 고구려 족과 고구려국은 모두 요동군 관할지나 후에 설치한 제2현도군 관할지에서 생겨났다. 후에 발전하여 한반도 북부에 이르고, 전성기에는 영역이 원래 한사군의 관할지였으며, 고구려가 중국고대 영토를 계승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위의 나항의 입장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영역은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고구려 역시 중국의 지방정권이므로 영역이 중국에 귀속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3. 한중국경 감계교섭(1712-1904) 및 간도협약 교섭과정(1907-1909)이후의 한중국경선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관점
중국학자들은 고구려의 귀속유무에 따라 한중국경선도 세 종류로 주장하였지만 양국간의 감계교섭 및 간도협약 교섭과정을 보는 관점은 다음과 같이 일치하고 있다.
한중 양국의 정권이 자주 바뀜에 따라 양국간의 국경이 변천되었다. 명초기에 한중의 국경은 압록, 도문강(一名 土門江, 豆滿江)이 된 이후 지금까지 양국간에 국경의 변화가 없었다. 압록강·도문강 중류 이하는 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양국간의 국계가 분명하다.
그러나 도문강의 강원(江源)에 이르는 상류는 여러 개의 하천이 있고 수심이 얕아 경계가 불명확하여 변민들이 불법으로 월경하여 분규가 일어났다. 1712년 양국 관리들이 답사하여 장백산의 분수령에 입비하였다. 1762년(청건륭 27년)에 청은 동북지역을 봉금정책을 실시하여 양국의 국민이 함부로 월경하는 것을 막았다.
1871년(청 동치 10년) 청은 봉금정책을 폐지하고 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1882년에 월경점간한 조선인의 쇄환문제가 일어났으며 이듬해 조선정부는 오히려 중국 연변지역의 해란강이 토문강이라 주장하여 토문강 이남이 조선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즉 도문강 이북 토문강(실제는 해란강) 이남의 연변지역이 조선영토라는 것이다. 1885년 6월 조선정부는 토문·두만 양강설을 주장하여 쌍방감계를 요청하였다.
양국간의 1차 감계(1885.9.30-11.29)의 주요 논쟁점은 2가지 이었다.
하나는 토문, 두만, 도문강이 하나의 강(중국측 주장)이라는 것과 토문, 두만(도문)강이 서로 다른 강이라는 조선의 주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 강의 정원을 홍단수로 보는 중국 측과 홍토수로 보는 조선의 주장이 대립되었다.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고 1차 감계는 결렬되었다. 2차 감계(1887.4.7-5.19)에서 조선은 1차 감계 때 주장한 토문, 두만 양강설의 착오를 정식으로 인정하였으며, 따라서 양국은 토문, 두만, 도문강이 하나의 강이면서 음이 다르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여 도문강으로서 양국의 국경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무산 이동의 강류는 계한이 분명하나 강의 상류인 석을수·홍토수 합류처 이상의 강의 정원(正源)에 대하여 문제가 되었다.
중국 측은 홍단수를 주장하다가 양보하여 석을수로 주장한 반면 조선은 홍토수가 강의 正源임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2차 감계도 최종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1888년 1월 이홍장이 조선정부에 양국의 파원감계를 요청하였지만 조선은 거부하였다.
같은 해 1월 조선정부도 청이 도문강의 正源을 석을수로 보는 관점에 반대하며, 다시 홍토수가 강의 正源임을 밝혀 이 강으로서 국계를 정할 것을 청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 후 조선정부도 2차 감계안을 모두 불승인하고 다시 파원 감계할 것을 청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정부에 재차 협상을 요구하여 중조감계 문제를 원만히 타결 지어 이에 대한 최종 해결을 보려고 하였으나 그의 실각으로 청제에게 품신도 하지 못하였다.
청일전쟁 후 조선은 중조변계 논의가 있었지만 재차 토문, 두만(도문)의 양강설을 주장하였다. 더구나 조선인이 개척한 도문강 北岸은 반드시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파견하였으며, 한·청인 간에 충돌이 심화되자 1904년 7월 13일 양국 변계관리들 간에 [한중변계선후장정]이 약정되었다. 이 해에 조선정부는 청에 감계논의를 제의하였으며 청도 2차에 걸쳐 조선정부에 파원감계를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청에 노일전쟁 후에 양국의 감계문제를 논의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을사늑약을 체결한 후 간도 한인들을 보호하는 구실로 사이또(齊藤季治郞)중좌 일행 61명을 1907년 8월 19일 간도에 파견하였으며 8월 23일 용정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개청하였다. 이에 청·일 양국간에 간도 문제에 대한 논의가 1909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2년의 교섭을 거쳐 청은 '동삼성육안'에 대하여 중대한 양보를 함으로써, 또한 청의 권익을 대거 상실하는 조건하에 1909년 9월 4일 [도문강중한계무조관](즉 간도협약)과 [동삼성교섭오안조관]이 청일 간에 체결되었다.
이 두 조약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한 진일보한 확대였다. 또한 중국주권에 대한 침범이었다. 즉 [도문강중한계무조관] 중 일본이 도문강을 한중의 국계로, 도문강의 북안을 중국영토로 승인하였지만 도문강은 본래 한중간의 국경하천이였으며 도문강 북안은 중국영토였다. 일본은 이 조항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다른 각 조항의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즉 일본은 [동삼성오안]의 특권을 취득하였다. [도문강중한계무조관] 제1항은 "도문강으로서 한중 양국의 국계로 하며 그 강원은 정계비로부터 석을수에 이르는 선으로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것은 중국으로 하여금 적지 않는 영토를 상실토록 하였다. 왜냐하면 본래 도문강의 正源은 홍단수였는데 1887년 2차 감계 시에 중국 감계대표가 조선 측과 타협하기 위하여 석을수로 양보·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위의 [간도협약]으로 한중간의 장기적인 국계논쟁이 이와 같이 終結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학자들은 명의 초기부터 1712년 이후 압록·도문(두만)강으로 한중국경선이 결정되어 지금까지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Ⅵ. 중국의 한중국경론에 대한 비판
1. 중국의 고구려 발해시기의 한중국경선 주장에 대한 비판
중국학자들이 고구려·발해의 남계를 한중국경선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고구려족과 발해족의 원류는 다르나 이들 국가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화되였다는 관점이다. 둘째, 고구려와 발해가 중원왕조에 예속된 소수 민족국가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이 성립할 수 있는 근거는 한인들이 왜곡시킨 사료에 근거하여 그들의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들의 역사 인식은 중국 중심사관인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하여 저술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첫째의 고구려·발해족이 국가가 망한 후 대부분 한족화되었다는 주장은 손진기가 처음 내세우고 있다.
고구려는 전통적으로 부여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으며, 또한 예맥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으나 손진기는 고구려족을 형성하는 족원으로 부여족, 옥저족, 예족, 맥족, 한족, 한반도의 고조선인과 백제인을 들고 있다. 또한 그는 고구려민족은 고구려가 존재하는 기간동안 여러 족들을 흡수하여 장대해졌으나 고구려가 멸망하자 각족 사람들은 고구려민족으로 융화되지 못하였으니 고구려 국민과 고구려족은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통치하의 한족들은 결코 모두가 고구려에 융화되지 못하였으며, 최초에 고구려에 들어가 융화된 부여인을 제외하고는 5세기경에 편입된 부여인은 고구려족으로 완전 융화되지 않았다. 숙신계도 언어·종족·경제·문화의 차이가 비교적 커서 고구려족에게 융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손진기는 고구려 민족의 주류는 오늘날의 한족으로 화했으며, 발해가 망한 후에는 발해에 융화되었던 고구려인들의 遼·금에 의해 서쪽으로 이동, 차례로 동몽고·요동을 거쳐 산동으로 옮겨졌다가 최후에 대부분 한족에 동화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한족도 고구려족의 형성에 하나의 중요한 족원으로 삼고 있으며 숙신계는 비교적 고구려족에 융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 민족의 주류는 한족화 되었다는 손진기의 논리 전개에 있어서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또한 왕건군은 고구려의 원류를 부여의 한 갈래이나 예맥으로 보지 않고 있다. 고구려를 예맥족이라고 한 것은 '한서·왕망전'의 착오적인 이해에서 일어난 것이며, 예맥의 거주지는 한반도 중·동부로 간주하였다. 부여는 숙신 계통의 퉁구스족 즉 후대의 여진족이기 때문에, 고구려인도 응당 숙신인이며 여진족과 동일한 족속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와 발해가 존재했던 중국 동북지역은 동방족(동이)의 후예가 살았던 것이므로 한족의 족원인 화하족과는 거리가 멀다. 동방족의 고장은 그 시원부터가 남북만주, 한반도, 연해주, 몽고지방이다. 그러므로 송화강 유역에서 만리장성 이동은 복희氏에서 진개의 난(B.C.4000-280)에 이르기까지 서방족(夏·漢族)이 진출하지 못한 곳이다.
더구나 夏代 이전의 산동지역에는 특징적인 문화가 존재하였으며 夏代 이후에는 동이부족이 활동하였음이 청동기 유물로 통해 입증되고 있다. 이 지역에 있었던 춘추시대 國문화의 연원이 동이문화에서 유래되고, 후에 노의 문화로 동점하였다. 중국의 고문헌은 동방족의 국가를 숙신씨라 칭하였으며, 10여 갈래의 이름으로서 만주·중국본토를 무대로 하여 활동하는 동방족 중 숙신·동이·동호 등은 조선족과 같은 뿌리 같은 조상의 겨레이다. 숙신(朝鮮)에서 發한 읍루는 그 후 물길·말갈·요·금·여진 등으로 바꾸어지며 이것은 단군조선의 후예와 그 지족들이 동북 만주지역에서 발전해 나가는 모습이다. 리지린도 숙신을 B.C. 12세기 전후시기 고조선족의 명칭으로 보았다.
그리고 손진기가 주장하는, 고구려족을 형성한 족원에 대하여 그들의 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반고와 사마천은 예와 맥을 두 개의 종족으로 구별하여 보았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전연 혈연적 관계가 없는 별개의 종족이 아닌 동일한 종족의 두 갈래이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예족은 고조선족이며 거주지역은 하북성에서부터 요서·요동 일대와 송화강 유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부여는 고대 조선인 자신들의 이두식 기명이며 예는 한식기명이다. 즉 부여를 漢音으로 전환시켜 [후이] (濊)를 改寫한 것이다. 따라서 예인은 고조선족의 통칭이다.
고구려는 貊의 국가이며 부여왕계와 그 왕계가 동일하니 고구려는 夫餘 왕계의 본계인 [탁리국](고리국)과 관계가 있다. 고구려의 명칭은 고리( 離)와 관계가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동호를 격파한 흉노가 예, 맥, 조선과 인접하였다고 썼는 바 이 맥은 동천하여 예지에 거주한 부여나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옥저인도 예인이었다. 부여는 맥족이 고조선족 즉 예인의 나라인 [不與]에 건국한 국가이며 그것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으로서 貊國 즉 고리국의 문화를 주체로 하고 거기에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하였다.
발해에 대해서도 중국학자들은 말갈을 주체민족으로 간주하여 중원왕조와 예속관계인 변방정권으로 인식하고 있다. 심지어 부랑운(傅郞雲)은 발해를 중국의 지방민족정권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족이 숙신족 뒤에 출현했다고 하였다. 손진기도 발해는 중국의 하나의 지방자치 정권으로서, 주체민족은 발해족이라고 하여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내었다. 더구나 발해가 망한 후 대부분 발해족은 한족화되어 여진족에 가입한 수는 적었기 때문에 여진족이 발해족을 계승했다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인이 세운 우리 민족국가임이 틀림이 없다. 구당서에서도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라 하였듯이 북한에서도 발해가 주민, 영역, 주권의 모든면에서 고구려를 계승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고대 우리민족과 고구려족의 족원의 분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발해가 망해서도 그 유민들이 한족화되지 않고 동이문화의 계승국가인 요·금·청에 의해 민족성이 유지되어왔다. 설혹 그들의 주장되로 그 유민들이 한족화되었다 하더라도 당시 고구려·발해민족은 엄연히 한족과 다른 동이족(朝鮮族)의 후예인데 같은 민족인 신라와의 경계를 한중국경선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궤변이다.
둘째 이유인 고구려와 발해가 중원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국가라는 관점은 1980년대 이후 중국학자들이 제기한 이론이다. 전술한 장박천, 동동, 손옥량, 양소전 등 외에도 경철화는 고구려가 중국의 중원정권에 대한 지방정권의 성질을 지닌 북방 소수민족이며, 중원국가와는 신속(臣屬)·조공·통혼 등의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것이다.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으로 간주하는 중국학자들의 주장도 대부분 1980년대 초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이론은 조공과 책봉이라는 교섭형태에서 한 중관계를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구려와 발해의 對중국관계를 조공과 책봉이라고 기재된 史料의 해석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은 그 관계의 성격이나 내용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고대사가 갖는 사료적 제약, 즉 한국사에 있어서 당대 사료의 부족과 화이관에 입각하여 윤색된 중국사서의 기술태도 때문에 기인하는 바가 큰 것이다. 특히 남북조시대의 조공관계는 중국이 종속관계를 전제로 外夷를 견제하고 臣屬시킨다는 본래의 정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에서 중국의 모든 사서에 주변국가의 對中國使行을 획일적으로 조공으로 기록한 것은 중화주의적 筆法에서 말미암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남북조시기는 중국이 주변민족을 충분히 제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 시기의 남조와 북조의 관계는 수평관계를 전제로 한 교빙관계로 발전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중원왕조와의 관계를 조공과 책봉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 없다.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재검토와 당시 동북아의 국제정치상황 및 문화수준, 군사력 등을 파악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남북조시대의 중원의 諸國家들의 통치기간을 보면 西晋이 53년, 東晋이 104년, 宋이 60년, 齊가 34년, 梁이 56년, 陳이 33년이며 北魏가 149년이다. 존속기간이 30년 미만의 국가로는 東魏(17년), 北齊(28년), 西魏(22년), 北周(25년)이며 隋가 37년이다.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이후부터 수양제가 등장할 때까지(400-603) 200년간은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더구나 북위는 광개토대왕의 토벌로 130여 년간 고구려의 복속국이 되었으며, 장수왕 때는 고구려의 정략 결혼정책에 의하여 고구려의 사위국( 國)이 되었다. 이와 같이 지배기간이 짧은 중원의 諸국가들이 900년 역사의 고구려를 예속시켰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229년간이나 존속하였으며, 武王 13년(732년)에 장문휴가 해적을 거느리고 등주자사 韋俊을 공격하였다. 당시 발해는 국제적 환경인 거란 및 돌궐과 당의 대립을 이용하여 당을 공격하였다. 이미 730년에 발해는 거란·돌궐 등과 연합하여 당의 북진정책에 대비하고 있었다. 발해의 唐 공격을 지원한 세력은 돌궐·거란·해가 있었다.
당은 돌궐 중심의 대당 연합세력이 약화되었을 때는 혼인정책으로 동북 여러 주들을 회유하고 군사적 정벌을 통해 북진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발해는 돌궐세력이 약했을 때는 당에 접근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 영토회복을 위한 주변지역에 대한 병합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신라는 발해의 이러한 남진정책에 맞서 강릉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
당시의 발해는 신라와 남북국시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武王 때에 이르러 말갈을 정복하는 등 고구려 故地를 다 회복하여 국토를 크게 넓혔다. 즉 흑수말갈의 땅을 흡수하여 흑룡강이남, 남북만주 전부, 연해주 일대 및 대동강과 용흥강 이북의 땅을 탈환하였다. 이에 신당서 발해전은 이것을 "지방이 5천리로, 부여 옥저 변한 조선 해북의 諸國을 모조리 얻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왕 때에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그러므로 이러한 근거에서 고구려 발해는 중원왕조의 변속국가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발해의 南界가 한중국경선이 될 수 없다.
또한 양소전은 요 금시기의 한중국경선을 고려와의 경계로 간주하였지만 요 금은 중국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차지한 지역이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오히려 동이족의 영토라고 규정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郭沫若의 고구려의 평양 천도 전후의 한중국경선 구분은 비판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2. 중국의 고구려시기 전의 한중국경선 주장에 대한 비판
우리 古代史에 있어서 논쟁이 첨예했던 부분이 漢四郡의 위치문제일 것이다. 대부분의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더불어 나타나는 고대 지명에 대한 오류문제이다. 장박천, 동동, 손옥량, 양소전 등은 낙랑군, 遂成, 滿番汗, 浿水, 薩水, 含資縣, 帶方郡 등의 위치를 왜곡된 중국사서에 의거 한반도내로 잘못 추정하였다.
韓·中·日의 학자들은 한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당 고종이 고구려를 점령한 후 한반도의 주요 지명을 정략적으로 중국의 지명과 동일하게 만들어 놓은 까닭으로 중대한 오류에 빠져 있다. 漢四郡地는 위만조선의 강역이다. 사기 조선열전의 진번군은 "故眞番 朝鮮胡國"이라고 應 가 밝힌 곳으로 지금의 남만주 광녕의 남부지방이다. 임둔군은 요동반도 南端部 지역이다. 현도군은 요동반도 동부해안이 원위치였지만 조선족의 공세에 밀려 진번·현도 양군을 포기하고 현도군을 광녕의 고구려현지로 옮겼다. 漢이 설치한 낙랑군 東部都尉는 동옥저지역이며 즉 玄 郡地이다. 후한서, 위서에 나오는 단단대령은 요동반도 천산산맥이다.
낙랑군의 위치문제가 지금까지 가장 많은 억측과 오류를 자아내게 하였다. 漢人들은 조선어의 [樂浪]의 의미가 국가라는 보통명사인 것을 모르고 고유명사로서 해석하였다. 최초의 樂浪은 漢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조선고토에 한사군중의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낙랑군은 요하를 중심으로 동서의 양 지역으로 나누며 동부낙랑은 요동반도의 구옥저지역으로 嶺東7縣이라고도 하였다. 서부낙랑은 산해관 以西의 난하 유역이며 은 주시대의 고죽국지, 한초의 위만조선 왕검성의 소재지로서 낙랑군의 중심 지대였다.
그러므로 중국학자들이 한반도내로 언급한 낙랑군과 한사군의 위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와 같이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착오는 浿水에 대한 無知에서 비롯되었다. 漢代 이후로 漢人들은 한 중의 국경선이 되는 강을 浿水라 호칭하였으며, 이러한 浿水는 난하, 대능하, 遼河, 대동강이 있다. 난하가 浿水라는 것은 漢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기 때문이다.
대능하가 浿水가 된 것은 후한의 盛世와 요동군의 팽창으로 난하의 浿水가 대능하로 옮겨졌던 것이다. 遼河가 浿水가 된 것은 공손 강이 요하 동쪽의 지방을 차지하여 치소를 요양지방에 옮겨 대능하 - 요하를 大遼河로 옮김으로써 遼河의 浿水가 나타난 것이다. 대동강이 浿水로 변화한 것은 唐고종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북의 땅을 모두 차지한 후 평양을 낙랑, 대동강을 浿水, 압록강을 염난수, 동가강을 馬 水를 고치고 한반도 내의 지명을 중국의 지명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括地志가 처음으로 "高麗郡平壤城 本漢樂浪郡 王險城"이라 기록하였다.
따라서 장박천이 압록강을 浿水로 본 것이나 양소전이 청천강을 浿水로 본 것은 큰 착각이었다. 또한 장박천이 압록강 하류지역으로 본 만번한은 서한과 고조선의 국경이었던 浿水인 난하의 동부 연안에 있었다. 또한 그가 한강으로 추정한 帶水는 小凌河이며, 충주와 강릉 사이에 있다고 한 含資縣은 소능하 하류지역이며, 서울 부근으로 본 帶方縣은 소능하 중류지역으로서 帶方發祥地이다. 이것은 임진강(帶水)과 예성강(浿江)이 중심이 된 한반도 중부지방의 帶方國(B.C. 100-50)을 잘못 혼동하였다.
동동이 황해도 부근으로 추정한 낙랑군과 대방군의 근거는 소위 樂浪遺蹟이라고 말하는 唐土域의 유적과 고분군, 張撫夷의 墓塼을 1912년 황해도 사리원 남방에서 일본인이 발견한 것에 기인한 것 같다. 그러나 漢人의 고분군 등을 종합할 때 그 유적은 전부가 고구려 美川王시대를 전후한 유적이다. 이것은 일본침략주의사가들이 평양을 漢代樂浪郡地로 조작하기 위한 증거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손옥량이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을 수복하여 薩水로 고구려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고 하면서 薩水를 청천강으로 추정한 것은 큰 착오이다.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낙랑을 토벌한 것은 대무신왕 24년의 사건이며 "光武帝遣使伐樂浪…薩水以南屬漢"이라는 三國史記 本紀에 근거하여 孫玉良이 단언한 것으로 보이나 중국사적엔 이 기록이 없다. 여기에 薩水는 요동반도의 州南河(古名은 淸河, 沙河)이다. 그러므로 후한 광무제시기의 고구려와의 국경선은 요동반도 州南河이다.
양소전은 遂成을 청천강과 대동강 사이의 지역으로 보았으며 연의 장성 끝을 평남 龍岡으로, 진의 장성 끝은 조선의 수성현 碣石으로 추정한 것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낙랑군에 遂成縣이 있고, 遂成縣에 碣石山이 있어, 이 碣石山이 만리장성의 동남쪽 기점이 되어 있다.이와 같이 중국학자들이 주장한 당시의 한중국경선은 한반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왜곡된 사료에 의하거나, 자의로 진실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저술을 남겨 후세에 또 하나 왜곡된 증거를 남기려고 한 것이다. 즉 古代로부터 우리의 領土에 대한 축소작업인 것이다.
3. 명 초기이후 압록 두만강이 한중국경선이라는 중국 측의 한중국경론 비판
이 說은 1909년 3월 伊集院 일본공사와 曹汝霖 참의 간에 오고 간 교섭내용에도 중국 측이 주장한 내용이다.
본래 백두산 일대의 두만강지역은 원 이후 발해여진 소속이었으며 다 중국에 羈 하였다. 明初부터 조선의 王이 강남에 있어 중국과 江으로 경계하여 두만강 북의 영토주권이 조선과 관계없다는 것이 당시 청의 주장이었다.
특히 吳祿貞은 고려가 원대 이후로 압록ㆍ도문 兩江의 남쪽에 있었으며 明ㆍ淸代에는 모두 속국이 되어 조선의 병력이 도문강을 한 걸음도 넘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연길청이 간도라는 것은 허황된 것이라는 것이다(延吉邊務報告, 제1장 結論).
그러나 명조 초에도 고려는 尹瓘이 구축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임을 주장하였으며, 이성계는 동북경략에 힘썼다. 즉 1382년 李豆蘭을 보내어 여진 각부를 정복하였으며 1391년에는 李必을 보내어 그들을 초무하였다. 세종시기 두만강의 6진을 개척할 당시의 조선의 강역이 두만강을 넘지 않은 것 같으나 江外의 女眞은 거의 다 내부한 상태였고 江內에도 잡거하여 훈춘하, 애하, 포이합통하, 해란하의 諸유역을 타국의 영토로 보지 않았다. 이것은 명조의 세력이 선덕 말년 이후 차츰 여진지방에서 쇠퇴하여(1449년 경) 동북지역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민왕은 元 明의 교체기에 명이 고구려의 고토인 요양 심양 일대를 점유하지 않은 허점을 이용하여 잃었던 북방영토 회복을 추진하였다. 1356년 압록강을 건너 8站과 3站을 공략하였으며, 1370년 1월에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遼陽 潘陽地域)를 정벌토록 하여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그 일대를 장악하였으며, 그 해 11월 지용수 이성계 등은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지용수는 남합출과 야선불화 등에게 "본국은 주무왕 때부터 대대로 서의 요하에 이르기까지 강역을 지켜 왔고, 元이 통일한 이후 공주를 고려에 시집가게 하여 심 요지역을 공주의 湯水地로 하였다"고 말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고려는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동녕부에 문서를 보내어 "심 요지역은 원래 고려의 영토였다" 라고 통고하였다.
북원(몽고)도 1371년 윤3월에 요양성 평장 劉益과 우승 王哈刺不花 등이 明에 항복할 시에 '심·요지역'이 고려의 땅임을 시인하였으며, 동년 4월에 明 태조가 요양성을 군대의 지휘소로 삼았음을 고려에 통고해 오자 이듬해 3월 고려는 '동녕과 요양은 일찍이 明에 귀속한 바가 없는 곳임'을 문서로 항의하여 이곳이 우리의 땅이라는 것을 통고한 것이다.
또한 압록 두만 以北지역을 강도회맹(1627)으로 조·청간에 봉금하기 전에는 청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선의 국경이 봉황성의 동쪽에 있었다고 佛人 De Halde의[Description de la Chine]에 설명하고 있다고 하였다. 영조 7년 초하·애하 합류지에 수로방신(水路防迅)을 설치하는 일과 영조 22년 청의 관병을 첨주·방수하는 일 등이 조선의 항의로 폐지되었다.
나이또(內藤虎次郞)도 [포이합도하연안고적도설]에서 성자산 부근의 석채와 토루 및 석비에 의거 조·청 양국의 국경이 포이합도하 부근으로 추정하였으며, 간도지방에 韓人이 거주하였던 것은 심히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며 소위 월간에 즈음하여 시작한 것이 아니 다고 하였다. 더구나 조선근해의 경호권도 조선이 행사하였으며 압록강 도선장 관할도 조선에서 하여 봉금지역인 무인지대의 실제 관할권이 조선에 소속되었다.
1902년에는 이범윤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하여 호구 및 재산을 조사하였으며, 그 후 그는 사포대를 조직하여 간도한민을 보호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1897년 서상무를 서변계 관리사로 임명하였으며, 1900년 경 평북관찰사 이도재는 압록강 북안지역을 각 군에 배속시키고 충의사를 조직하여 서간도한민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백두산 일대의 대한 역사적 유적과 사실들을 종합할 때 淸의 세력은 이곳까지 미치지 못한 반면에 한국의 세력범위가 압록 두만강밖에 미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明 초기부터 압록·두만강으로 국경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상 실로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Ⅶ. 동북공정과 간도영유권의 문제
1. 동북공정과 조선족 동포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목적은 간도분쟁 재발의 방지와 간도영유권의 확보에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에 대한 역사적,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되어 진다. 결국 동북공정도 조선족 동포의 문제로 귀결된다.
국가의 구성 요소로는 인구, 영토, 정부를 들고 있으며 국가란 인간의 사회적 조직체이므로 국가의 인구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주민이 하나도 없는 국가란 상상할 수 없다. 주민이 다 떠나버린면 국가는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유태 민족이 사방으로 흩어진 예는 유명하다. 이와 같이 국가가 성립하려면 人的 요소가 필요하다. 국가의 人的 요소는 보통 국민이라고 부르는 데 그 구성원들은 국가와 국적이라는 연결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국적은 국가의 人的 요소를 이루는 개인과 국가간의 연결 내지 결속인 동시에 국가 人的 관할권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현 조선족자치주의 구성 요소이다. 그러나 자치주의 조선족 비율의 감소는 자치정부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이 역사적으로 지속되어 온 주권 발현의 단절을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이 점이 장래 간도영유권 주장의 장애 요소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간도지역은 국제법상 무효 조약인 1909년의 간도협약에 의거 일본이 중국에 불법적으로 할양한 지역이다. 또한 할양은 할양지 주민의 투표를 조건으로 하는 예도 있다. 주민의 희망이 곧 그 지역의 귀속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주민의 일반투표가 국제법상 확립된 일반 원칙도 아니나 주민 의사를 존중한다는 민주적 배려에 말미암은 것이다. 프랑스 헌법(제27조)처럼 "영토의 여하한 양도, 교환, 부가도 관계 인민의 동의가 없으면 유효치 않다"고 명시한 예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족은 대부분 1948년 이전에 중국 국적을 강제로 취득케 하여 우리 국적을 상실토록 하였지만, 우리 국적법 상으로는 이중국적자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최근 중국 정부의 조선족자치주에 대한 조선족 수를 전체의 30% 선으로 낮추기 위하여 실시하려는 非조선족 유입정책과 조선족의 이주정책은 국제법상 소수민족 보호 정책에 위배된다. 소수민족이 보호받는 권리는 매우 광범위하며 국적의 권리, 모국어 사용권, 종교의 자유, 모국어 교육의 권리, 다수 민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 즉 차별을 받지 말아야 할 권리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소수민족이 국제법상 마땅히 보호되어야 함에도 중국에서 조선족이 받고 있는 차별대우와 동화정책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다. 결국 이제는 중국이 이들 조선족을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것이다. 정부는 조선족정책을 이러한 관점에서 장기적이고 국가 안보 차원에서 새로운 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통일 한국이 될 경우 중국과의 관계가 현재의 우호 관계에서 상호 경쟁 및 적대 관계로 발전할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중국과의 영토분쟁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간도지역에 있어서 조선족의 역할은 우리 민족에겐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 앞으로 국경 개념이 희박해진다 하더라도 간도지역에 중국인 보다 더 많은 우리 조선족이 거주하여야만 그곳이 장래 우리의 영토가 될 수가 있다. 즉 중국이 불법적으로 간도지역을 점거하고 있더라도 실지적인 영토의 주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상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이 최초의 국가를 세운 곳이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문화유산과 민족의식을 그들이 보존·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역사적으로 평화적인 주권발현을 조선족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영토분쟁이나 민족분쟁 지역에선 그 지역 주민의 투표에 의하여 귀속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캐나다의 퀘벡주 분리 독립운동이 주민 투표에 의해 부결된 경우는 좋은 예다. 그러므로 조선족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려야 할뿐만 아니라 본국과 민족의식에 바탕을 둔 연대 관계를 수립하여야 한다. 만약 중국과 간도영유권 분쟁이 재연 될 경우 조선족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 후손들의 미래 사회에 있어서도 조선족은 매우 중요하다. 장래 우리 민족은 좁은 한반도에서 모두 살아갈 수가 없다. 언제 가는 세계 각국으로 이주하여야 할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그 시기에는 만주지역이나 연해주 특히 간도지역은 우리 후손들이 쉽게 이주할 수 있는 지역으로 대두되어질 것이다. 더구나 이곳은 우리말과 우리의 고유한 풍속을 잃지 않고 생활하고 있는 동포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것보다는 쉽게 적응할 수가 있으며 조선족들과 함께 같은 민족의식을 공유한 채 살아갈 것이다. 즉 장래 우리 민족의 생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족은 절대 필요하다.
넷째,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에 대응할 가강 적절한 전략은 조선족에 대한 정책을 새로 수립하는 것과 동시에 중국에 대하여 간도영유권의 선포에 있다.
다섯째, 간도지역은 동북아시아의 심장부 지역이다. 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로서 우리 민족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역이다. 따라서 간도지역을 확보하여야 동북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가치와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조선족의 가치는 오히려 중국으로 볼 때 눈의 가시인 것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간도영유권 분쟁의 실상
1) 간도 분쟁은 국경분쟁이 아닌 영유권 분쟁이다
일반적으로 간도분쟁은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을 둘러싼 국경분쟁인 법률적 분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분쟁의 실상은 백두산 일대의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임과 동시에 정치적 분쟁이다. 따라서 간도분쟁의 핵심지역인 간도영유권의 범위 규정이 선결 문제이다.
대개 두만강·압록강 대안을 동·서간도라 일컬어 왔다.
이 간도에서 우리의 주권이 발현되면서 시간이 지남에 간도의 개념은 봉금지역으로 더욱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인식의 발단은 양국이 봉금한 지역이, 우리 민족의 고토라는 정체성도 작용하였다. 이 봉금지대의 범위는 '천하대총일람지도'와 '해룡현지'에 의해 추정하면 유조변책 밖에 있는 지역으로 봉황성에서 북쪽으로 심양 부근을 거쳐 개원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북동쪽으로 길림시의 송화강과 흑룡강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백두산을 에워 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이 봉금되자 연해주도 자연 봉금되어 무인지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청은 러시아의 강박에 의해 1860년 북경조약을 맺고 봉금되어 온 민족의 고토인 연해주를 러시아에 불법 할양하였으며, 당시 조선은 조약체결 사실도 몰랐다. 그러므로 간도분쟁은 백두산정계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중 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간도분쟁은 봉금지역인 무인지대를 둘러 산 영유권 분쟁임과 동시에 한국, 중국, 러시아, 일본이 개입된 정치적 분쟁이다.
2차에 걸친 한·청 국경회담과 1909년 일·청간의 간도협약 체결 과정에 나타난 논쟁점을 분석하면 간도분쟁을 국경분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논쟁점을 열거하면,
첫째, 백두산정계비의 가치, 둘째, 비문 내용의 해석, 즉 토문강의 실체, 셋째, 을유, 정해 국경회담의 효력, 넷째, 1885년 이후의 교섭서 및 선후장정에 대한 견해,다섯째, 역사상의 사실에 관한 쟁점이다.
한국과 일본은 정계비를 인정하고 토문강이 송화강의 원류로 보았으며, 청은 정계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보았다. 한·일은 2차의 국경회담이 모두 무효로 간주한 반면, 청은 두만강 상류 2백 여리만 미정일 뿐 나머지 두만강은 국경이 획정되었다는 관점이다. 결국 이러한 쟁점들도 일본의 책략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1712년 목극등에 의해 세워진 백두산정계비를 조약으로 하는 국경분쟁으로만 간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즉 백두산정계비 건립과정에 나타난 국제법상의 하자(瑕疵)는 다음과 같다.
문서에 의한 합의가 아니며, 정계비 건립시 조선의 대표인 박권과 이선부를 억압하여 백두산의 동행을 거부한 채, 조선의 대표 대신 군관인 이의복과 조태상 등을 동행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비문에는 조선의 조약 체결당사자인 박권, 이선부의 성명과 서명, 낙인이 없다. 이것은 강희제의 독단과 목극등의 강박에 의해 임의대로 정계비를 설치하였으며, 당시 실질적인 조·청의 국경선이 반영되지 않는 법률적 착오 등의 국제법상 조약의 성립조건에 문제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백두산정계비를 국경조약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도 을유·정해 감계회담 때부터 백두산정계비를 심시비(審視碑)로 간주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백두산정계비를 부정하는 대표적 학자는 오록정(吳祿貞), 왕숭시(王崇時), 서덕원(徐德源) 등이다. 왕숭시는 목극등의 감계는 청의 일방적인 변경시찰에 불과하여 정계비의 성격이 없다고 평가하였고, 서덕원은 조·중 양국이 공동으로 설립한 정계비가 아니라 목극등이 압록·두만강의 수원을 심시한 표지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 정계비 건립시 양국 간의 공식적인 담판기록이 결여되고, 비석에 대청(大淸)이란 청의 국명만 있고 조선이란 국명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에 비해 양소전, 장존무는 사실상의 정계비로 간주하고 있다. 여하튼 백두산정계비가 한·중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근본 원인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압록·두만강은 실질적 국경이 아니었다
정계비 건립을 전후한 실질적인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Du Halde의 지도 중 레지의 비망록에는 "봉황성의 동쪽에 조선국의 국경이 있다"고 하였으며, '달단중화전도' 중 '조선왕국지도(Kaoli Koue ou Royaume de Cor e)에 평안(PING-NGAN)의 영문자가 압록강 대안의 변책선까지 표시되어 있다. 나이또(內藤虎次郞)는 "포이합도하연안 고적도설"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다음과 같이 포이합도하 부근으로 보았다.
"당시 조·청 양국의 경계는 복아합토(卜兒哈兎) 부근에 있었던 같다. 한인(韓人)의 구비(口碑)에 의하면 국자가의 남방 벌가토(伐加土)는 근년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무역지점이었다고 말했다.
벌가토는 포이합도하의 대음이므로 양국의 경계선이 포이합도하 부근에 있었던 것은 의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 지방의 토성은 여진인의 옛터에 속하고 석성은 모두 한인(韓人)이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간도지방에 한인(韓人)이 거주하였던 것은 심히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며, 소위 월간에 즈음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이것은 봉금지대의 동북 경계가 포이합도하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한인(韓人)의 구비(口碑)는 윤관이 1107년 선춘령의 공험진에 세운 "고려지경"의 경계비를 말하는 것으로 이후 이 지역이 양국의 경계선이었음을 밝혀 주는 것이다.
이상의 증거 자료로 볼 때 봉금지대와의 경계가 압록·두만강 선이 아니며, 양강의 본류에 대한 관할권도 조선에 있었다. 즉 봉황성의 남에서 압록강의 수계를 안은 산맥을 포함하여 두만강 북의 흑산령산맥을 포괄하여 노야령산맥 이남의 포이합도하가 봉금지대의 경계이다.
조선과 청 사이에 약정한 봉금지대는 청이 북경지역으로 입관한 후 한족들이 만주에 들어와 토지를 개발하는 것을 금지시키자 이 지역은 무인의 한광(閑曠)지대로 변하였다. 이 지역에서 간도문제를 직접 다루었던 국제법학자 시노다 지사꾸(篠田治策)는 "간도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무인의 중립지대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조·청간의 강도회맹에서 양국이 이 지역을 각전봉강(各全封疆)하여 봉금지대로써 무주무인의 중립지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무인지대가 조선과 청에 의해 개간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은 청이 개간에 착수하기 수년 전에 이미 지방관이 지권을 발급하여 개간을 허용하였으므로 이 때부터 중립의 성질을 상실하였다. 즉 종래 무주무인의 중립지대였던 간도지역이 중립의 성질과 무인의 상태를 잃고 단순히 무주의 토지로 남게 되었다.
영토의 취득방법에는 선점(occupation)이 있다.
즉 무주지를 취득한 의사를 명백히 한 국가는 그 곳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이 선점적 지배사실을 이해관계국에 통고하면 선점지는 취득국의 영역이 된다. 이 선점의 원칙에 의거하여도 간도지역은 한국의 영토임이 분명하다.
3. 간도영유권 분쟁의 해결 방안
한·중간에 완전한 국경선을 결정하지 못한 것은 양국 간에 광활한 무인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봉금지역을 시뇨다 지사꾸(篠田治策)가 언급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무인무주의 중립지대였지만 19세기 후반에 봉금이 해제되면서 무주지의 성격이 변화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양국 중에 누가 더 실효적 지배와 역사적 권원이 발현되었는가에 따라 영유권이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간도분쟁의 해결을 위해선 다음과 같은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영토취득방법에는 선점이 있다.
즉 "무주지를 점유의 의사를 갖고 실효적 지배를 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도지역은 봉금지대로서 무주지였기 때문에 누가 먼저 이주하였으며, 또한 행정기관을 설치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 선점이론에 의하면 간도는 당연히 한국의 영토이다.
둘째, 간도지역에 이주한 한·중 양국의 주민비율을 고려하여야 한다.
1900년대 한인 이주자는 간도 지역의 총인구 13만 명 중 10만 명이 차지하였으며, 두만강 대안은 한인이 독점하는 등 한인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셋째, 이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평화적 주권발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Palmas도 사건에 의하면 "영역취득의 권원에 관해 발견의 권원이란 성숙되지 못한 것으로 실효적 선점에 의해서만 주권이 확립되는 것이고 성숙되지 못한 발견적 권원은 계속적이고 평화적인 주권발현에 기인하는 종국적 권원에 우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넷째, 간도분쟁에서 결정적 시점(Critical Date)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봉금정책을 양국 간에 약정한 1627년, 백두산정계비 건립 해인 1712년, 을유 국경 회담이 시작된 1885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1909년, 장래 한·중간에 간도분쟁의 해결절차를 회부하기로 한 시점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시점이 가장 유리할 것인가를 분석하여야 한다.
다섯째, 국경의 획정시 고려되는 자연적 국경, 순환 등 비법률적 요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04년 영국령 가이아나 - 브라질 국경분쟁의 중재판결처럼, 실효적 지배에 의한 국경획정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자연에 의한 선(line traced by nature)"에 따른 국경획정을 한다고 하였다.여섯째, 앞으로 간도영유권 주장의 성패는 중국조선족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도지역에서 실제 점거하여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야말로 평화적인 주권발현을 하고 있는 당사들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려 요소를 볼 때 간도영유권 주장에선 한국이 우세하다고 볼 수 있지만 장래 간도분쟁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위의 고려 사항을 철저히 분석하여 장기적으로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떠한 평화적인 해결 방법을 기대할 수 없다. 간도지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한국인으로서 면면이 살아 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정부와 국민이 조선족들이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만큼 큰 것은 없다고 본다. 이 길이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간도분쟁의 해결을 위해선 중국에 간도협약의 무효를 하루 빨리 통보하여야 하며, 미해결된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Ⅷ. 맺는 말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목적은 결국 간도영유권의 확보로 귀착된다. 오랜 세월동안 조선족이 가졌던 민족정체성의 상실과 역사적 연원의 왜곡을 통해 점진적인 한족(漢族)으로의 동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간도영유권의 문제점은 단순히 과거에 얽매인 분쟁 해결을 위한 학설이나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미래에 다가올 통일시대에 있어서 간도분쟁지였던 간도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에 관한 문제로 낙착된다는 점이다.
조선족 동포는 우리 민족에게 특히 간도영유권 주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도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족의 제반 문제에 관심을 기울려야 한다. 또한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의 본질을 분석하고 그들의 장기적인 동화정책에 대한 대응책도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정부는 간도 지역에 대한 국민의 합의나 국가정책을 제시도 하지 않았으며 민감한 외교문제라서 가능한 회피하는 경향이었다. 정부는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는 비자주적이며 주체성 없는 외교정책을 탈피하여 이제라도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여야 한다.
우리가 추진해야 할 대외정책이나 대외 활동에서 상대국의 정책 방향과 대립되지 않는 방향에서 신중한 정책을 추구해야 한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국가적인 핵심이익은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
영토문제는 국가의 절대적인 핵심 이익이다.
특히 간도지역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러나 현재 연변자치주가 해체될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목적이 바로 연변자치주의 해체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에 대비하여 조선족 정책과 전략을 다시 수립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조선족의 실상은 중국의 동화정책에 의해 연변자치주가 해체될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의 조선족에 대한 정책이 중국정부를 의식하여 소극적으로 신중하게만 추진한다면 연변자치주의 해체를 막을 수 없다. 조선족 문제와 연변자치주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정부차원에서 모색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은 장기적인 한족(漢族)으로의 동화, 즉 중국화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족 정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신중하고 소극적인 태도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조선족에 대한 정책대안을 제시하면서 간도영유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족 문제가 간도영유권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광복 이후 어느 때 우리 정부가 상대국과 대립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적 이익을 추구한 역사적 사실이 있는가. 항상 집권자의 업적위주의 외교활동이나 전시행정으로 국민들의 희생만 강요하였다.
조선족 문제와 간도영유권에 대하여 정부는 그 역사적 진실을 국민에게 밝혀야 하며 국가차원의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 조선족 문제는 바로 간도영유권의 인식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족의 문제는 바로 민족의 문제이므로 국가차원의 문제로서 기존의 인식의 틀을 탈피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청·일 간에 맺은 간도협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중국에 통보하지도 않았다. 또한 대외적으로 간도 지역에 대하여 영유권이 있으며 한·중간에 미해결된 분쟁지역임을 밝히지도 않았다. 그 결과 최근 각종 국제회의에서조차 동북아 경협이나 동북아 안보를 논하면서 간도지역이 영토분쟁지라는 사실을 언급한 외국인 학자는 없었다.
일본·러시아간의 북방영토문제, 한·일 간의 독도문제 남사군도·조어대열도의 영유권분쟁을 예를 들면서도 이들보다 분쟁의 역사가 더 오랜 간도지역 영토분쟁은 한 마디조차 없다.
이러한 결과가 누구의 책임인가. 이것은 간도영유권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국민 모두가 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도영유권을 분명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2년 넘도록 간도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한 시뇨다(篠田治策)도 일본이 만주의 여러 현안 때문에 간도를 청에 양보한 것은 한국통치상의 화근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간도영유권을 분명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가장 적절한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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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삼국지 정사 요약
촉나라=====================
관우전---------------------------관우의 자(字)는 운장(雲長)으로 원래의 자는 장생(長生)이었으며, 하동(河東) 해현(解縣) 사람이었지만 탁군( 郡)으로 도망하여 망명했다. 선주(先主:유비)가 향리(鄕里)에서 무리를 모았을때 관우는 장비와 함께 이를 도왔다. 선주(先主)가 평원상(平原相)이 되자,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임명하여 부곡(部曲)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선주(先主)는 잠을 잘 때에도 두 사람과 침상(寢牀)을 함께 했으며, 그 은혜는 형제와 같았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는 여려 사람이 모여 앉아있는 자리에서도 하루종일 선주(先主)를 모시고 서 있었고, 또 그를 따라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도 어렵고 험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1)선주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기습하여 죽이고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下 城)을 지키도록 하고, 태수(太守)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2)그리고 선주(先主)는 소패(小沛)로 돌아갔다.건안(建安) 5년, 조공(曹公)이 동쪽 정벌길에 나서자 선주(先主)는 패(敗)하여 원소(袁紹)에게로 달아났다. 조공은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갔는데, 그에게 편장군(偏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예(禮)로써 심히 후하게 대우했다. 원소(袁紹)가 대장 안량(顔良)을 파견하여 동군태수(東郡太守)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曹公)은 장요(張遼)를 관우과 함께 선봉으로 삼아 맞서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대장기와 마차의 덮개를 멀리서 바라보더니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나가서는 수만의 병사들 사이에 있는 안량을 찔러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그러나 원소의 여러 장수들 중에 능히 관우를 당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원소는 하는 수 없이 백마의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이에 조공(曹公)은 즉시 표(表)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로 봉했다. 처음에 조공은 관우의 사람됨이 용감하고 기상이 굳세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오래 머무를 뜻이 없는 것을 살피고 장요에게 말하기를, '경(卿)이 그의 뜻을 시험해보게.'라고 했다. 장요가 관우에게 그의 의중을 물어보니 관우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조공께서 나를 후히 대우해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함께 죽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이를 어길 수는 없소. 그러니 여기 끝까지 머무를 수는 없고, 대신 다른 공을 세워 조공께 보답하고 떠날 것이오.'라고 하였다.장요가 이를 조공에게 보고하자 조공은 관우가 진정 의기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1) 얼마 안있어 관우가 안량을 죽이자 조공은 그가 반드시 떠날 것임을 알고 상을 무겁게 베풀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상을 모두 봉(封)해 놓고 떠나감을 알리는 글을 올려놓은 후 선주(先主)가 있던 원소군으로 달아났다. 조공(曹公)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하였지만, 조공은 '누구나 각기 그 주인이 있는 것이니 추격하지 말라.'(2) 라고 하였다. 관우는 선주(先主)를 따라 유표(劉表)를 따르게 되었다. 유표가 죽자 조공(曹公)은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선주는 번성(樊城)에서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하며 별도로 관우를 보내 수백 척의 배를 이끌게 하여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공은 추격을 계속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阪)까지 이르게 되자, 선주는 한진(漢津)을 끼고 달려 관우의 배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하구(夏口)에 이르게 되었다.(1) 손권(孫權)이 병력을 보내 선주를 도와 조공을 막도록 하자, 조공은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여 돌아갔다. 선주는 강남(江南)의 여러 군(郡:무릉·장사·영릉·계양 등)들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고, 공이 있는 자들에게 상을 내렸으며 관우를 양양태수(襄陽太守)·탕구장군( 寇將軍)으로 봉하여 강북에 주둔하게 했다.선주가 서쪽으로 익주(益州) 원정길에 올랐을 때, 관우에게 형주(荊州)를 맡아 지키도록 하였다. 마초(馬超)가 선주에게로 투항하여 왔다는 소식을 듣자, 일찌기 그와 교류하며 지냈던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관우는 제갈량(諸葛亮)에게 글을 써 보내 마초의 인물됨과 재주가 누구와 비교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제갈량은 관우의 오만함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곧 답장을 보내 '마맹기(馬孟起)는 문무(文武)를 겸비했고 그 능력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일세의 호걸로써, 경포( 布)·팽월(彭越)과 같은 무리일 것이니 마땅히 익덕(益德)과 나란히 앞섬을 다툴 수 있을 것이고, 미염공(美髥公)의 절륜(絶倫)함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오.'라고 했다. 관우는 수염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제갈량은 옛날부터 그를 '염(髥)'이라 했다. 관우는 서신(書信)을 살펴보더니 크게 기뻐하며 이를 빈객(賓客)들에게 보여 주었다.일찍이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화살 촉에 독(毒)이 있어 그것이 뼈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관우는 순순히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마침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 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를 나눌 뿐 태연했다.건안 24년, 선주(先主)는 한중왕(漢中王)이 되자 관우에게 전장군(前將軍)의 벼슬을 내리고 절월(節鉞)을 내렸다. 그 해에 관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번성(樊城)의 조인(曹仁)을 공격했다. 그러자 조공(曹公)은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했다. 가을이 되어 큰 장마비가 내리자 한수(漢水)가 범람하여 우금이 이끄는 칠군(七軍)이 모두 물 속에 잠기게 되었다.우금은 관우에게 항복하였는데, 관우는 또 장군 방덕(龐悳)의 목을 베었다. 양(梁)·협(陜)·육혼(陸渾)의 여러 도적들은 관우의 관인(官印)이나 봉호(封號)를 받아 그의 한 무리가 되었고, 관우의 위엄은 화하(華夏:중국을 일컫는 말)에 떨쳤다. 조공(曹公)은 그의 예봉(銳鋒)을 피해 허도(許都)를 떠날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기까지 했으나, 사마선왕(司馬宣王:사마의)·장제(蔣濟) 등은 '관우가 뜻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은 손권(孫權)이 반드시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므로,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관우의 배후를 치도록 권하고 강남을 나누어 손권이 갖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번성의 포위는 스스로 풀릴 것'이라고 주장하자 조공(曹公)은 이에 따랐다.그런데 그 이전에 손권이 사람을 보내 그의 아들과 관우의 딸을 혼인시킬 것을 제의한 적이 있었는데, 관우는 손권의 사자에게 모욕적인 말로 꾸짖으며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손권은 대노(大怒)했다.(1) 또한 남군태수(南郡太守) 미방( 芳)이 강릉(江陵)에 있었고 장군 부사인(傅士仁)은 공안(公安)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소 관우가 자기들을 경시했던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우가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면서 미방과 부사인에게 군수물 자를 공급하는 일을 맡겼지만, 이들은 서로 최선을 다해 관우를 원조하려 하지 않았다.그러자 관우는 '돌아가면 마땅히 이들을 문책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미방과 부사인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손권이 몰래 미방과 부사인을 유혹하자 이들은 사람을 보내 손권을 따르겠다고 했다. 한편 조공(曹公)은 서황(徐晃)을 보내 조인(曹仁)을 구원했다.(2) 관우는 이것을 당해낼 수 없게 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그러나 손권이 이미 강릉을 점령하고 관리들과 처자식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관우의 군대는 흩어져버렸다.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공격하여 관우와 그의 아들 평(平)을 임저(臨沮)에서 참수했다.(3)유비는 관우의 시호를 장무후라고 봉했다. 아들 관흥은 작위를 계승했다. 관흥은 자가 안국이고, 어릴때부터, 명성이 있었으므로, 승상 제갈량은 그를 높게 평가했다. 약간의 나이에 시중 증감군이 되었지만, 몇 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관통이 작위를 계승하였고, 공주를 아내로 맞았으며, 관직은 호분중랑장까지 올랐다. 관통이 죽은후 아들이 없었으므로, 관흥의 서자 관이에게 작위를 잊게 했다
방통전---------------------방통은 자가 사원(士元)이고, 양양군(襄陽郡) 사람이다. 소년 시절에는 소박하고 노둔했으므로 그를 높이 평가하는 자가 없었다. 영천의 사마휘(司馬徽)는 청아했는데, 인품을 감별할 줄 알았다. 방통은 약관의 나이 때, 사마휘를 찾아가 만났다. 사마휘는 뽕나무위에서 뽕잎을 따고 방통은 그 나무 아래 앉아서 낮부터 밤까지 함께 담소를 나누었다. 사마휘는 방통을 매우 특이한 인물로 느끼고, 방통을 남주(南州) 선비들 중에서 제일 인자가 될 만하다고 했다. 이로부터 방통의 명성은 점점 빛나게 되었다. 후에 군에서 공조로 임명했다. 방통은 천성이 인물을 평가하기 좋아했고 사람을 교육시키는 일에 노력했다. 그는 매번 말할 때마다 칭찬만 해서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재능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괴이하게 여겨 질문했다. 방통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천하는 크게 혼란스러우며, 정도(正道)는 파괴되었고, 착한 사람은 적고 나쁜 사람은 많습니다. 지금 풍속을 일으키고 도덕적 행위를 드날리게 하려고 하면서 명성을 높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우러를 가치가 충분치 못하게 될 것이고, 우러를 가치가 충분하지 못하면 착한 일을하는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현재 칭찬한 열 명 가운데 다섯 명은 잃어도 그 절반을 얻어 세상의 교화를 높일 수 있으며, 뜻있는 선비로 하여금 노력하게 하니, 또한 옳지 않습니까?'
오나라 장수 주유는 유비를 도와 형주를 얻었으므로 남군태수를 겸임하게 되었다. 주유가 죽자, 방통이 그의 유해를 가지고 오나라로 갔다. 오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방통의 명성을 듣고 있었다. 방통이 서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를 전송하기 위해 모두 창문(昌門)에 모였는데, 육적(陸績), 고소(顧邵), 전종(全琮)이 모두 참가했다. 방통이 말했다.
'육 선생은 노둔한 말이니 빠른 발의 힘을 갖고 있고, 고선생은 노둔한 소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곳까지 갈수 있겠지요.'
전종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펴는 것을 좋아하고 명성을 흠모하므로 여남의 번자소(樊子昭)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지혜의 힘은 많지 않지만,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인물입니다.'
육적과 고소가 방통에 대하여 말했다.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면, 그대와 함께 사해의 인사들을 평가해야 할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방통과 깊이 사귀고 돌아갔다.
유비는 형주를 다스리게 되자, 방통에게 종사(從事)의 신분으로 뇌양현(뇌양현)의 현령을 대행하도록 했다. 방통은 현에 재임하여 치적을 쌓지 못했으므로 면직되었다. 오의 장수 노숙이 유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했다.
'방사원(龐士元)은 백리(百里 : 현을 가리킴)를 다스릴 재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치중, 별가의 임무를 맡도록 해야만 비로소 인걸의 재능을 펴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 역시 방통을 유비에게 추천했다. 유비는 방통을 만나 깊은 예기를 하고 유능한 인물로 평가하여 치중종사로 임명했다. 그에 대한 유비의 신임은 제갈양에 버금갔다. 그래서 방통을 제갈양과 함께 군사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제갈양이 형주에 남아 지킬 때, 방통이 유비를 수행하여 촉으로 들어갔다.
익주목 유장이 유비와 부성에서 회견했는데, 방통이 계책을 진언했다.
'현재 이번 회담을 이용하여 유장을 잡을 수 있다면, 장군께서는 병사를 사용하는 수고로움이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들어왔으므로 은혜나 신의는 아직 빛나지 않으니,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유장이 성도로 돌아간 이후, 유비는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을 정벌해야 했다. 방통은 또 진언했다.
'은밀히 저예병사를 선발하여 밤낮으로 가서 성도를 직접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본래 무용이 없으며 또 평소 미리 방비하지 않으니, 대군이 갑작스럽게 이르게 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상의 계책입니다. 양회(楊懷),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력한 병사를 갖고 관두(關頭)를 지키고 있습니다. 듣건대 이들은 유장에게 여러 차례 간언하여 장군을 형주로 돌아가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장군은 아직 도착하기 전에 사자를 보내 그들에게 통보하여 형주에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으므로 돌아와 구원을 바란다고 설명하고, 아울러 군대가 행장을 꾸려 외견상 돌아가는 형세를 만들도록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에 감복하고 있으며, 또 장군이 가는 것을 좋아하니, 틀림없이 날쌘 말을 타고 만나러 올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 기회에 그들을 붙잡아 놓고, 진군하여 그들의 병사를 배앗아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물러나 백제성으로 돌아가 형주까지 연결하여 서서히 일을 강구하십시오. 이것이 맨 마지막 계책입니다. 만일 깊이 생각만 하다가 가지 못한다면, 장차 큰 곤경에 처하게 되어 오래 지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유비는 두 번째 계책을 채용하여 즉시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군사를 돌려 성도로 향해 가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는 부성에서 대연회를 개최하여 술을 차리고 음악을 울렸다.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연회는 즐겁다고 할 만합니다.'
방통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나라를 토벌하고 즐겁다고 여기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는 술에 취한 상태였으므로 노여워하며 말했다.
'무왕이 주를 토벌할 때, 앞에는 노래부르는 자가 있었고, 뒤에는 춤추는 자가 있었으니, 어진 사람이 아니었겠군요? 그대의 말은 맞지 않소. 빨리 일어나 나가시오.'
그래서 방통은 머뭇거리다 물러났다. 유비는 곧바로 후회하고 돌아올것을 요청했다. 방통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돌아보고 사과하지 않고 태연하게 음식만 먹었다. 유비가 말했다.
'방금 했던 논쟁에서는 누가 잘못한 것입니까?'
방통이 대답했다.
'군신(君臣)이 함께 잘못한 것입니다.'
유비는 크게 웃었고, 처음처럼 연회를 즐겼다.
진군하여 낙현을 포위했다. 방통은 병력을 인솔하여 성을 공격할 때,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유비는 애통해 했으며, 그의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유비는 방통의 부친을 의랑으로 임명하고, 간의대부로 승진시켰으며, 제갈양이 직접 사령을 주었다. 방통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추증했으며, 시호를 정후(靖候)라고 했다.
방통의 아들 방굉(龐宏)은 자가 거사(巨師)이며, 강직하고 솔직하며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상서령 진지를 경시하면 오만하게 보여 진지의 미움을 받게 되었으며, 부릉태수의 직책에서 세상을 떠났다.
방통의 동생 방림(龐林)은 형주치중종사의 신분으로 진북장군 황권(黃權)을 따라 오를 정벌하러 갔다가 패배하게 되자 황권을 따라 위나라로 들어갔다. 위나라에서 열후에 봉해졌고, 관직은 거록태수(巨鹿太守)까지 이르렀다.
곽준전--------------------곽준전 곽준은 자가 중막이고 남군 지강현 사람이다. 형 곽독은 고향에서 수백 명의 병사를 모았다. 곽독이 죽자, 형주목 유표는 곽준에게 병사들을 받아 관리하도록 했다. 유표가 세상을 떠난 후, 곽준은 병사들을 이끌고 유비에게 돌아갔고, 유비는 곽준을 중랑장에 임명했다. 유비가 가맹으로부터 남쪽으로 돌아 유장을 습격할 때, 곽준을 가맹성에 머물게 하여 지키도록 했다. 장로가 장수 양백을 보내 곽준을 유인하여 함께 성을 지킬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곽준이 말했다. '소인의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성은 얻을 수 없습니다.' 양백은 즉시 물러났다. 후에 유장의 장수인 부금, 상존 등의 병사 만여 명이 낭수로부터 올라와 곽준을 공격하며 포위했지만, 거의 일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성 안에 있는 곽준의 병사는 겨우 몇 백명 뿐이었는데, 적군이 게으름을 피고 있는 틈을 타서 정예병사를 뽑아 출격하여 대대적으로 격파하고 즉시 상존의 머리를 베었다. 유비는 촉군을 평정하고, 곽준의 공로를 칭찬하며 광한군을 분할해 재동군으로 만들고 곽준을 재동태수로 임명하고 비장군으로 삼았다. 곽준은 관직에 3년간 있다가 나이 4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시신은 성도로 옮겨져 매장됐다. 유비는 매우 애석해했으며, 곧 제갈양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곽준은 훌륭한 선비였으며, 게다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술을 부어 혼령을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고 싶다. 그래서 유비는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조제에 참석하고 그 묘위에 머물며 잤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영예로 생각했다.
위연전-----------------위연전(魏延傳)
위연은 자가 문장(文長)이고, 의양군(義陽郡) 사람이다. 그는 부속(部屬)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가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므로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을 때, 성도로 옮겼으므로 한천(漢川)을 지킬 중요한 장수를 얻어야 했다. 사람들의 의론은 틀림없이 장비가 임용될 것이라는 데 있었고, 장비 또한 마음속으로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유비가 뜻밖에 위연을 발탁하여 한중왕 진원장군(鎭遠將軍)으로 임명하고 한중태수를 겸임하도록 하자 군사들은 전부 놀랐다.
유비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 위연에게 질문했다.
'지금 그대에게 중임을 맡겼는데, 그대는 직무를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 말해 보시오.'
위연이 대답했다.
'만일 조조가 천하를 들어온다면, 대왕을 위해 그를 막기를 원합니다. 부장이 인솔하는 10만 병사를 이르게 한다면 대왕을 위해 그들을 소멸시키기를 원합니다.'
유비는 그를 매우 칭찬하고,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장엄한 말에 감복했다. 유비가 제호를 칭한 후, 위연을 진북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원년(223)에는 위연을 서쪽의 강중(羌中)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위나라의 *군 비요(費搖)와 옹주자사 곽회(郭淮)는 위연과 양계(陽谿)에서 싸웠는데, 위연은 곽회 등을 크게 격파시켜 전군사정서대장군 가절로 승진했으며 남정후(南鄭侯)에 봉해졌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수행하여 출정하였다. 병사 1만 명을 요청하여 제갈양과는 다른길로 진출하여 동관(潼關)에서 만나 한신의 선례에 따르려고 했지만, 제갈양이 제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위연은 항상 제갈양을 겁장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음을 한탄했다.
주석) 하후무(夏侯楙)가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어 장안 수비를 맡았다. 제갈양이 남정(南鄭)에서 부하들과 전략을 논의할 때, 위연은 이렇게 말했다. '듣건대 하후무는 젊고, 조조의 사위이며 겁장이이고 지모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 5천명과 휴대할 식량 5천 석을 주신다면, 곧장 포중(褒中)을 뚫고 나가 진령산(秦嶺山)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子午谷)에 당동하여 북쪽으로 간다면 열흘이 지나지 않아 장안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틀림없이 배를 타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성 안에는 단지 어사와 경조태수만이 있을 뿐이므로, 횡문(橫門)에 있는 식량 저장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물로 군사의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동쪽(위)이 병력을 모으는 데는 20일은 걸릴 것이므로 공이 사곡(斜谷)을 뚫고 나오면 반드시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번의 행동으로 함양(咸陽) 서쪽 지역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갈양은 이것을 위험한 계책이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연은 사졸을 잘 양성하였고 사람들을 뛰어넘는 용맹성이 있었으며, 또 성격이 오만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피했다. 오직 양의(楊儀)만은 위연에게 조금도양보하지 않았으므로, 위연은 매우 분개했는데, 마치 불과 물 같았다.
건흥 12년(234)에 제갈양이 북곡구(北谷口)로 출병하자, 위연이 선봉이 되었다. 제갈양의 진영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간 위연은 머리에 뿔이 나는 꿈을 꾸었다. 꿈 해몽가인 조직(趙直)에게 묻자, 조직은 위연을 속이며 말했다.
'기린은 뿔이 있지만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싸우지 않고 적군이 자멸하려는 징조입니다.'
조직은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각(角)이라는 글자는 칼(刀)아래에 쓰였습니다. 머리 위에 칼을 쓰고 있으므로 매우 불길합니다.
가을, 제갈양이 질병의 악화로 위험한 지경에 이르자, 비밀리에 장사 양의, 사마 비의, 호군 강유 등과 자신이 죽은 후에 군사를 철수시키는 일에 관한 지도를 주었다. 위연에게는 적의 추격을 차단시키도록 하고, 강유에게는 그 앞에 위치하도록 했다. 만일 위연이 혹시라도 명령을 따리지 않을 경우에는 군대를 그대로 출발시키도록 했다. 제갈양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상을 발표하지 않았다. 양의는 비의에게 명하여 위연이 있는 곳으로 가서 태도를 살피도록 했다. 위연이 말했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비의는 위연을 속여 말했다.
'저는 그대를 위해 돌아가 양장사(楊長史)를 이해시킬 것입니다. 장사는 문관으로 군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하므로 틀림없이 그대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의가 문을 나와 말을 달려 떠난 후에야 위연은 비의를 보낸 것을 후회하고 추격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위연은 사람을 보내 양의 등을 살피도록 하여, 제갈양의 지도에 따라 군영들은 순서대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연은 대단히 분노하여 양의가 출발하기 전에 인솔하던 자신의 부하들을 먼저 남쪽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지나친 길은 불을 질러 다리를 끊어 놓았다.위연과 양의는 각자 서로 반역을 했다는 내용의 표를 올렸으며, 하루 사이에 긴급함을 알리는 문서가 조정으로 전해졌다. 유선은 시중 동윤과 유부장사(留府長史) 장완에게 이 일을 물었다. 장완과 동윤은 모두 양의를 보증하고 위연을 의심했다. 양의등은 산의 나무를 잘라 길을 여는 것을 밤낮으로 겸하여 역시 위연 군대의 뒤를 바짝 이었다. 위연은 먼저 도착하여 남곡구를 차지하고 병사들을 보내 양의 등을 역으로 공격했다. 양의 등은 하평(何平)에게앞에서 위연을 막도록 했다. 하평이 위연의 선봉부대에게 질책하여 말했다.
'제갈공명이 죽어 그 시신은 아직 식지도 않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감히 이런 행동을 하느냐!'
위연의 병사들은 잘못이 위연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명령에 따르는 자가 없었고 군대는 모두 흩어졌다. 위연은 혼자 아들 몇 명과 함께 도망쳐 한중으로 달아났다. 양의는 마대(馬岱)를 보내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베도록 했다. 위연의 머리가 양의에게 전해지자, 양의는 일어나 직접 그 머리를 밟고 말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재능꾼아! 또 다시 나쁜 일을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위연의 삼족을 멸했다. 당초 장완은 숙위(宿衛) 제군을 이끌고 위험을 피해 북쪽으로 갔는데, 몇 십 리 가서 위연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돌아왔다. 위연의 마음을 추측해 볼 때, 북쪽으로 가서 위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남쪽으로 돌아온 것은 단지 양의 등을 제거하여 죽이려고 한것이다. 평상시 여러 장수들과 항상 의견이 달랐고, 그 당시 여론이 틀림없이 자신이 제갈양을 대신해야 한다고 하기를 바랐을 뿐 위연의 본래 뜻은 촉나라를 배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조운전------------------------조운(趙雲)의 자(字)는 자룡(子龍)이고, 상산(常山) 진정(眞定)사람이다.
본래 공손찬(公孫瓚)에 속해 있었는데, 공손찬이 선주(先主:유비)에게 전해(田楷)를 도와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을 때 조운은 선주를 따라 기병을 이끌었다.(1)
선주가 조공(曹公:조조)에게 쫓겨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곧 후주 유선이다)을 품에 안고, 감부인(甘夫人:곧 후주 유선의 어머니이다)을 보호하여 모두 화를 면하게 했다. 그리고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주가 촉(蜀)으로 들어갈 때 조운은 형주(荊州)에 남았다.(2)
(1) 《조운별전(趙雲別傳)》에 이르는 바는 다음과 같다. 조운은 신장이 8척(尺)에 풍채는 크고 늠름했다. 본래 군(郡)에서 천거되었고, 의(義)로움을 추구하는 아전과 병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로 갔다. 이때 원소는 기주목(冀州牧)을 칭하고 있었는데, 공손찬은 기주 사람들이 원소를 따르는 것을 매우 우려하여, 조운이 자기에게로 온 것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조운을 비웃으며 말하기를, "들으니 귀주(貴州) 사람들이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고 하던데, 그대는 어찌하여 혼자 마음을 돌렸는가? 마음이 혼란스러워 혼자 반(反)하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라고 묻자, 조운은 대답했다. "천하가 심히 어지러운지라 백성들은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데다, 현(縣)에 재앙이 들이닥치면 백성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고을에서는 어진 정치를 펴는 쪽을 따르겠다는 것일 뿐, 원공(袁公)을 홀대하거나 장군을 섬기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는 공손찬을 따라 정벌길에 올랐다. 이때 선주 또한 공손찬에게 의지하고 있었는데, 선주는 조운과 자주 만나 사귀었다. 조운은 스스로 선주에게 의탁하려고 결심하게 되었다. 조운이 형님의 상(喪)을 당하여 공손찬의 양해를 얻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주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굳게 손을 잡으며 헤어지려 할 때 조운은 선주에게 말했다. "그간 입었던 덕(德)을 죽을 때까지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가 원소를 따르게 되었을 때, 조운은 업( )에서 선주를 만났다. 선주는 조운과 한 침상(寢牀)에 누워 잠을 자며 몰래 조운을 보내 병사 수백 명을 모집하며, 모두 유(劉) 좌장군(左將軍)의 부곡(部曲)이라 하였지만 원소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조운은 선주를 따라 형주(ゑ?로 갔다.
(2) 《조운별전(趙雲別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처음에 선주가 패하자 조운이 북쪽으로 가버렸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선주는 손에 극(戟:창의 일종)을 들고 소리쳤다. "자룡은 나를 버리고 달아날 사람이 아니다." 얼마 안있어 조운이 도착했다. 조운은 강남을 평정하고 편장군(偏將軍)이 되었고, 계양태수(桂陽太守)를 겸하여 조범(趙範)을 대신했다. 조범에게는 번씨(樊氏)라는 형수(兄嫂)가 있었는데 그 용모가 매우 뛰어났다. 조범은 조운과 짝을 지어주려고 했지만, 조운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경은 나와 같은 성씨(姓氏)이니, 경의 형수는 곧 나의 형수와 같은 것이오." 끝까지 사양하며 배필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조운에게 번씨를 받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운은 이렇게 말하며 번씨를 취하지 않았다. "조범이 항복하여 따르기로 했지만, 그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없소. 더우기 천하에 여자는 많은데 어찌 급히 취하려 한단 말이오." 과연 조범은 달아났으나, 조운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전에 조운이 하후돈(夏侯惇)과 박망(博望)에서 싸울 때,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다. 하후란은 조운의 고향사람이었지만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운은 선주에게 하후란이 법률에 밝아 군을 바로잡을 것이라고 하며 그를 천거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운은 하후란이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의 삼가고 살펴 생각함이 이와 같았다.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갈때, 조운을 남겨 사마(司馬)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 손권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오(吳)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방자하여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西征)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後主)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고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선주(先主:유비)가 가맹관( 萌關)에서 돌아와 유장(劉璋)을 공격하면서 제갈량을 불렀다. 제갈량은 조운·장비 등과 함께 강(양자강을 말하는 듯함)을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며 군현(郡縣)들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이르자, 조운을 보내 육지로 나와 강양(江陽)으로 오도록 하여,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합류하도록 했다. 성도가 평정되자 조운은 익군장군(翊軍將軍)이 되었다.(1)
건흥 원년(建興元年; 촉한 유선의 연호로 서기 223년),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었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으며, 얼마 뒤에 다시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되었다.
건흥 5년, 제갈량을 따라 한중(漢中)에 주둔했다. 다음 해에 이르러 제갈량이 군대를 일으켜 사곡도(斜谷道)에서 나아가 승승장구 하자, 조진(曹眞)은 대군을 보내 이에 대적했다. 제갈량은 조운을 등지(鄧芝)와 함께 가서 항거하도록 하고, 자신은 기산(祁山)을 공격했다.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敵)은 강한 군사였으므로 기곡(箕谷)을 잃게 되었는데, 군사를 모아 다시 지켰으므로 대패(大敗)하지는 않았다. 군대를 물린 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벼슬이 낮아졌다.(2)
(1)《조운별전(趙雲別傳)》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익주(益州)가 평정된 뒤, 성문 밖의 뽕나무 밭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논의하기 위해 성도(成都)의 옥사(屋舍:임시거처)에 모였는데, 조운이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곽거병(u去病:전한의 무제 때 흉노를 정벌한 명장)은 아직 흉노(匈奴)를 토벌하지 못하자, 황제가 내린 집까지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역자주: 武帝는 곽거병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대저택을 하사했는데, 곽거병은 "흉노를 멸망시킬 때까지는 저택에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제는 곽거병을 더욱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지금 나라의 적은 비단 흉노만이 아닐진데, 어찌 편안함을 구할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천하가 평정된 후라고 해도, 뽕나무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밭을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처음 병란(兵亂)을 겪어 어려움이 많았으니 밭과 집을 돌려주고, 영(令)을 내려 편안히 거주하며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그런 연후에 부역을 줄여준다면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주(先主)는 그의 말을 따랐다.
하후연(夏侯淵)이 패한 후, 조공(曹公)은 한중 땅을 차지하기 위해 군량미를 북산(北山) 아래로 운반하였는데, 군량은 수천만 포대나 되었다. 황충(黃忠)이 이를 취하려 하자 조운도 군사를 이끌고 황충을 따라 나섰다. 황충이 때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경무장(輕武裝)한 수십 기(騎)의 기병을 이끌고 나가 주위로 황충을 찾아 나섰다. 이때 조공(曹公)의 대군이 나타났는데, 조공이 병사들을 출전시키자 조운은 그 앞의 한 곳을 날카롭게 공격하며 싸웠다. 대병(大兵)이 점점 다가오자 형세는 위급해졌지만 조운은 그 진영으로 돌진해 들어가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빈틈을 찾았다. 조공의 군사는 패했으나 다시 세를 모아 주위를 포위했다. 조운은 적진에 빠져 있었는데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장수 장저(張著)가 부상을 입자 조운은 다시 말을 달려 장저를 구하여 데리고 왔다. 이때 면양(沔陽)에는 장익(張翼)이 있었는데 조공의 군사가 추격하여 주위를 포위하자, 장익은 문을 닫고 저항하려 했지만, 조운은 진영으로 들어오자 문을 다시 크게 열더니 기(旗)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게 했다. 조공의 군사는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물러갔다. 조운은 다시 하늘이 진동할 듯 북을 울리며 조공의 군사들의 뒤에 쇠뇌를 쏘아대자, 조공의 군사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 짓밟고 밟히며 한수(漢水)에 이르렀는데,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다음날 아침, 선주(先主)는 조운의 진영으로 와서 그가 싸운 곳을 둘러보더니, "자룡(子龍)의 몸은 담력 덩어리로구나!"라고 말하면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주연(酒宴)을 베풀어 먹고 마셨다. 군중(軍中)에서는 조운을 일컬어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고 불렀다.
손권이 형주(荊州)를 기습하자 선주(先主)는 대노(大怒)하여 손권을 토벌하고자 했다.
조운이 나서 간(諫)했다.
"국적(國賊)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그러니 먼저 위(魏)를 멸하면 오(吳)는 곧 스스로 굴복할 것입니다. 비록 조조의 몸은 죽었다고 해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제위를 도적질하여 찬탈했으니, 마땅히 민심을 따라 속히 관중(關中)을 도모하여 황하(黃河)와 위수(渭水)를 점거한다면 흉악한 역적을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관동(關東)의 뜻있는 선비(義士)들은 반드시 군량을 가지고 말을 달려와서 대왕을 맞이할 것입니다. 위(魏)를 놔두고 먼저 오(吳)와 싸우기 위해 병력을 일으켜 교전한다면 싸움은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주는 듣지 않고 동정(東征)길에 오르며, 조운을 남겨 강주(江州)를 감독하도록 했다.
선주가 자귀( 歸)에서 패하자, 조운은 군사를 이끌고 영안(永安)에 이르렀으나 오군(吳軍)은 이미 물러난 뒤였다.
(2)《조운별전(趙雲別傳)》이 전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제갈량이 말하기를, "가정(街亭)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 장졸들은 돌아오지 못해 흩어져 버리고 말았는데, 기곡(箕谷)에서 군사를 물렸을 때는 능히 장병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어찌된 연고인가?"라고 묻자, 등지(鄧芝)가 대답했다.
"조운이 스스로 후방을 끊어 엄호한 뒤 군수물자(軍需物資)를 소홀히 버리지 않았기에, 병사와 장수들도 서로 힘을 합해 나뉘어지지 않고 두루 따르게 된 것입니다."
조운의 군수물자에 명주가 많이 남아있자, 제갈량은 이를 장사(將士)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는데, 조운이 나서서 말했다.
"군대의 일이란 이로움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나누어 주려 하십니까?
청컨데 그 물건들을 모두 적안부(赤岸府)의 창고에 넣어두었다가, 겨울이 오는 10월이 되기를 기다려 하사하시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따랐다.
7년(229)에 세상을 떠났는데, (261년 3월) 시호가 순평후로 추증되었다
장비전-----------장비는 자가 익덕(益德)이며, 탁군(啄郡) 사람이다.
젊어서 관우와 함께 유비를 섬겼다. 관우가 연장자였으므로 장비는 그를 형처럼 대우했다. 유비는 조조를 따라 여포를 공격하고, 함께 허도로 돌아왔다. 이때 조조가 장비를 중랑장으로 임명했다.
유비는 조조를 등지고 원소, 유표에게 의지했다. 유표가 죽자,조조가 형주로 들어왔으므로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다. 조조는 그를 추격하여 하루 낫, 하루 밤이 지나 당양현 장판까지 이르렀다. 유비는 조조가 곧바로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처자식을 버린 채 달아나며, 장비에게 기병 20명으로 뒤를 차단하도록 했다. 장비는 냇물을 점거하여 교량을 끊고,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잡으며 말했다. "나는 장익덕이다. 나와 함께 죽음을 결정지으며 싸울 수 있는가!" 적군들은 모두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고, 이 때문에 유비는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유비는 강만을 평정하고 장비를 의도태수(宜都太守) 정로장군으로 임명하고 신정후(新亭侯)에 봉했으며, 후에 남군(南郡)으로 전임시켰다. 유비는 익주로 들어와 군사를 돌려 유장을 공격하려고 했으므로 장비와 제갈양 등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나누어 각 군과 현을 평정시켰다. 장비는 강주(江州)에 도착해 유장의 부자인 파군태수(巴郡太守) 엄안(嚴顔)을 무찔러 생포했다. 장비가 엄안을 꾸짖어 말했다. "대군이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고 감히 저항하며 싸웠는냐?" 엄안이 대답했다. "당신들은 예의도 없고, 우리 주를 침략했소. 우리 주에서는 오직 머리를 잘리는 장군은 있지만 항복하는 장군은 없소." 장비는 분노하여 측근들에게 끌고가서 머리를 베도록 했지만, 엄안은 안색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머리를 자르면 머리를 자르는 것이지, 어찌하여 분노를 하시오!" 장비는 용감함에 감복하여 풀어주고 불러서 빈객으로 삼았다. 장비는 지나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고 성도에서 유비와 만났다. 익주가 평정된후 제갈양, 법정, 장비 및 관우에게 각각 금 5백 근, 은 1천 근, 동전 5천만 개, 비단 1천 필을 내리고,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각각 격차를 두어 하사했다. 장비를 파서태수(巴西太守)로 임명했다.
조조는 장로를 무찌르고 하후연과 장합을 머물게 하여 한천을 지키도록 했다. 옮기려고 탕거(宕渠) 몽두(蒙頭) 탕석(湯石)까지 진군하여 장비와 50여 일간 서로 대치했다. 장비는 정예병사 만여 명을 이끌고 다른 길로부터 장합의 군대를 맞아 싸웠는데 장합의 군대는 길이 좁아 앞뒤가 서로 구원할 수 없었다. 장비는 그래서 장합을 무찔렀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단지 부하 10여 명과 산을 따라서 사잇길로 물러나와 남정으로 돌아갔고, 파서 지역은 평정을 되찾았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었고, 장비를 우장군 가절에 임명했다.
장무(章武) 원년(221) 거기장군으로 승진하고, 사예교위를 겸임하였으며, 승진하여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짐은 황통을 계승하고, 대업을 이어 받들어 흉포한 무리를 제거하고 동란을 진압했지만, 아직 그 이치를 밝히지는 못했다. 현재 역적과 강도는 해악을 만들고, 백성들은 도탄의 고통을 받고 있으며, 한왕실을 생각하는 선비들은 학처럼 목을 빼고 바라고 있다. 짐은 이 때문에 슬프며, 자리에 앉아 있어도 불안하고, 음식을 먹어도 단맛을 느끼지 못한다. 군대를 정돈하기로 맹세하고 하늘의 뜻에 따라 적을 토벌했다. 그대의 충성과 강인함은 주선왕(周宣王) 때, 회이(淮夷)를 토벌한 소호(召虎)와 비교되며, 그 이름은 가까운 곳이든 먼 곳이든 펴졌기 때문에 특별히 명령을 나타내어 작위를 높이고, 경도 및 그부근을 겸하여 다스리도록 하겠다. 하늘의 위엄을 조장하고, 덕행으로 복종하는 자들을 위로하녀, 형벌로 반항하는 자를 제압하여 짐의 뜻에 따라. <<시경>>에서 '백성을 해롭게 하지 마라, 완성을 구함에 급급하지 마라. 모든 것이 바르려면 주왕조를 본받아야 한다. 큰 공업을 신속하게 세우면 너에게 북을 내리리' 라고 하지 않았던가.면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초 장비의 웅장함 위풍 용맹함은 관우에 버금갔는데, 위나라의 모신(謨臣) 정욱 등은 관우와 장비에게는 1만 명을 상대할 만한 힘이 있다고 칭찬했다. 관우는 병사들에게는 잘 대해주었지만 사대부들에게는 오만하였고, 장비는 군자는 아끼고 존경했지만 소인은 보살피지 않았다. 유비는 항상 이것을 경계하여 말했다. "그대는 형벌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벌써 지나치고, 또 매일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그들을 측근에 임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 그러나 장비는 깨우치지 못했다.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장비는 만 명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낭중으로부터 나와 강중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다. 출발하려고 할 때, 그의 막하의 장수 장달(張達) 범강(范疆)이 장비를 살해하고, 그의 머리를 갖고 장강을 따라 손권에게로 달려갔다. 장비 군영의 도독의 표를 올려 유비에게 보고했다. 유비는 장비도독의 표가 있음을 듣고 말했다. "아! 장비가 죽었구나 !!"
장비의 시호를 환후(桓侯)로 추증했다. 맏아들 장포(張苞)는 요절했으므로 차남 장소(張紹)가 후사를 이었는데, 관직이 시중상서복야까지 이르렀다. 장포의 아들 장준(張遵)은 상서가 되어 제갈첨을 수행하여 면죽에서 등애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강유전----------------강유는 자가 백약(伯約)이고 천수군(天水郡) 기현(冀懸) 사람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강유는 정씨(鄭氏:정현)의 학문을 좋아했다. 군에서 벼슬하여 상계연(上計연)이되었고, 주에서 초빙하여 종사로 임명했다. 부친 강경(姜경)은 옛날군의 공조였을때, 강족과 융족의 반란을 만나 직접 군태수를 보호하다가 전쟁터에서 사망했다. 그 때문에 강유에게 중랑의 관직을 주었으며, 본군의 군사에 참여시켰다.
건흥 6년(228)에 승상 제갈량의 군대가 기산으로 향했다. 그때 천수(天水)태수는 마침 밖으로 나와 강유와 공조 양서(梁緖), 주부 이상(이賞),주기(主記) 양건(梁虔) 등의 수행하에 순찰하고 있었다.
태수는 촉나라 군대가 도착하려 하자, 여러 현들이 호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 등이 모두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했다.그리고 한밤중에 도망쳐 상규(上규)를 지켰다.
강유 등은 태수가 달아난 것을 알고 뒤늦게 추격했지만, 성문에 이르렀을 때는 성문이 벌써 닫혀 있었으므로 들어가지 못했다.강유 등은 서로 인솔하면 기현으로 돌아왔지만. 기현 역시 강유 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유등은 그래서 함께 제갈량에게로 갔다. 마침 마속이 가정에서패배했고, 제갈량이 서현을 함락시켜 1천여 인가와 강유등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래서 강유는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다. 제갈량은 강유를 불러 창조연(倉曹연)으로 임명하고, 봉의장군(奉義蔣軍)을 더했으며, 당양정후(當陽亭侯)로 임명했다.그 당시의 나이는 27세였다.
제갈량이 유부장사(留府長史)장예 및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말했다.
"강백약(姜伯約)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 및 계상 등의 사람들도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에서 최고의 인물입니다."
또 말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中虎步兵) 5,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왕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후에 중감군 및 정서장군으로 승진했다.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죽자, 강유는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 및 보한장군(輔漢將軍)이 되어 군사들을 통솔하고, 승진하여 평야후(平襄侯)로 봉해졌다.
연희 원년(238)에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했다. 장완이 대사마로 승진한 후, 강유는 사마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한 군대를 인솔하여서쪽으로 침입했다.
연희 6년(243)에 진서대장군으로 승진했고, 양주자사를 겸임했다.10년(247)에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가 되었다.
이 해, 문산군 평강현(平康縣)의 이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강유는 병력을이끌고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또 농서 및 남안(南安) 및 금성(金城)의 경계로 나가 위나라 대장군 곽회 및 하후패 등과 조수에서 싸웠다.
호왕(胡王) 치무대(治無戴) 등이 부락을 바치고 투항했으므로, 강유는 그들을 데리고 돌아와 안주시켰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西平)으로 출정하도록 했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스스로 서쪽 지역의 풍속에 익숙하며, 겸하여 자기의 재능과 무력에 자부심을 가졌으므로 강족과 호족을 유인하여 자신의 오른쪽 날개로 삼으려고 하며, 농산 서쪽을 위나라에서 끊어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항상 대규모로 출병하려고 하여 비의는 늘 그것을 제지하며, 그에게 준 병력은 만 명에 불과했다.
연희 16년(253) 봄에 비위가 세상을 떠났다. 여름, 강유는 수만 명을 이끌고 석영(石營)을 나와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南安)을 포위했지만, 위의 옹주자사 진대가 포위를 풀고 낙문(落門)까지 이르렀고 강유는 식량을 다 소비하였으므로 물러나 돌아왔다.
다음해, 독중외군사의 직위를 더했다. 다시 농서로 출병하였는데, 적도현을 지키고 있던 장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했다. 강유는 나아가 양무(襄武)를 포위하고, 위나라 장수 서질(徐質)과 교전하여 머리를 베어 적을 격파시켰으므로 위나라 군대는 패하여 물러났다.
강유는 승리의 여세를 타고 진격하여 매우 많은 성들을 항복시켰으며, 하관(河關) 및 적도 및 임조 세 현의 백성들을 빼앗아 돌아왔다.
연희 18년(255)에 또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적도에서 나와 조서에서 위의 옹주자사 왕경(王經)을 크게 격파시쳤다. 왕경의 병사들가운데 죽은 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왕경이 퇴각하여 적도성을 지키자, 강유는 그곳을 포위했다. 위의 정서장군 진태가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포위망을 풀었고, 강유는 퇴각하여 종제(鍾題)에 주둔했다.
연희 19년(256) 봄에 강유는 원정에 앞서 대장군으로 승진했다. 다시 병사와 말을 정돈하고, 진서대장군 호제(湖濟)와 상봉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였는데, 호제가 약속을 깨고 도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강유는 단곡(段谷)에서 위나라 대장군 등애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뿔뿔이 흩어졌으며, 매우 많은 수가 사망했다. 병사들은 이로 인해 모두 강유를 원망했고, 농서 서쪽 지역에서도 소동이 일어나 안정되지 못했다. 강유는 잘못을 사과하고 책임을 지기위해 자신의 관직을 삭탈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군 및 행대장군사로 강등되었다.
연희 20년(257)에 위나라 정동대장군 제갈탄이 회남에서 모반하여 관중의 병사를 나누어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유는 그 틈을 타서 진천으로향하려고 또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駱谷)을 나와 곧장 침령(沈嶺)에 도착했다. 당시 장성(長城)을 점령하고 산에 의지하여 진영을 만들
었다. 사마망과 등애는 위수에 기대 영채를 공고히 하였다. 강유가 몇차례 도전하였지만, 사마망과 등애는 응하지 않았다.
연희 20년(258)에 강유는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비록 《주역》에서 말하는 '중문(重門;문을 몇 겹으로 쌓는다)'의 의미로 적의 습격을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적이 도착할때를 알도록 하여 각각, 곡식을 모아 한중과 악성의 두 성까지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대를 동시에 나아가게 하여 그들의 허점을 살피도록 하십시오. 적
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 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그 결과 독한중 호제를 한수까지 물러나게 했으며, 감군 왕함(王含)에게 악성을 지키도록 하고, 호군 장무에게 한성을 지키도록 했으며, 또 서안,건위,무위,석문(石門),무성(武城),건창,임원(臨遠)에 모두 수비진을 주둔시켰다.
경요 5년(262), 강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한(漢),후화(侯和)로 출병하였다가 등애에게 격파되어 답중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강유는 본래 고향을 떠나 타향(촉)에 목을 기탁하고 해를 연이어 전쟁을 하면서도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환관 황호 등이 조정에서 권력을 잡고, 우대장군 염우(閻宇)가 황호와 결탁하였다. 따라서 황호는 은밀히 강유를 폐하고 염우를 세우고자 했다. 강유 또한 그들을 의심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위험을 느끼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성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경요 6년(263)에 강유가 유선에게 표를 올렸다.
「듣건대, 종회는 관중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공격하여 취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응당 장익과 요화를 보내 각 군대를 지휘하여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로 나누어 지키도록 하여 미연에 방지해야만 합니다.」
황호는 귀신이나 미신의 말을 신용하고, 적군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우선에게 이 일을 진행시키지 말라고 했다. 신하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종회가 낙곡으로 향하고, 등애가 답중으로 진입한 연후에 비로소 우거기(右車騎) 요화를 답중으로 보내 강유의 원군이 되도록 했으며, 좌거기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童厥) 등은 양안관구로 가서 여러 진영의 밖에서 지원부대가 되도록 했다. 음평까지 왔을 때, 위나라 대장 제갈서가 건위(建威)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정지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한 달 남짓 후, 강유는 등애에게 격파되어 음평으로 돌아와 주둔했다.
종회가 한,악 두 성을 공격하며 포위하고, 따로 장수를 보내 관구(關口;안양관구)로 진격하도록 하였으므로, 장서(蔣舒)는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傅僉)은 저항하다 전사했다. 종회는 낙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는데, 관구가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계속 달려 진격했다. 장익과 동궐이 한수에 도착하자, 강유와 요화 또한 음평을 버리고 후퇴했고, 마침 장익,동궐과 회합하여 모두 검각(劍閣)으로 물러나 지키며 종회에게 저항했다. 종회가 강유에게 편지를 보내 말했다.
「공후(公侯)께서는 문무(文武)의 덕에 의지하고, 가슴속에는 세상을 덮을 지략이 있어 파촉,한중에서 공을 세워 명성이 전국에 퍼져, 먼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당신에게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항상 과거로 생각을 달려 일찍이 커다란 교화에 마음을 같이 했습니다. 오나라 계찰(季札)과 정나라의 자산(子産)은 그것으 좋은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강유는 답장을 하지 않고 진영을 배열하여 요새를 지켰다. 종회는 함락시킬 수 없었으며, 식량 운송하는 곳이 멀었으므로 장수들과 상의하여돌아갔다.
등애는 음평으로부터 경곡도(景谷道) 옆을 지나 촉 땅으로 침입하여,마침내 면죽에서 제갈첨을 격파시켰다. 유선이 등애에게 항복을 요청하였고, 등애는 진군하여 성도를 점거했다. 강유 등이 제갈첨이 패했다는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사람은 유선이 성도를 굳게 지키려 한다고 들었고, 어떤 사람은 동쪽의 오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으며, 어떤 사람은 남쪽의 건녕으로 들어가려 한다고 들었다.그래서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광한,처로부터 나아가 허실을 살폈다. 오래지 않아 유선의 칙령을 받고 곧 무기를 놓고 부현의 군영 앞으로 가서 종회에게 출두 했다.
장수들은 모두 분노하며 칼을 뽑아 돌을 잘랐다.
종회는 강유 등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의 인(印), 부절, 거개(車蓋)를 돌려주었다. 종회는 강유와 나가게 되면 같은 수레에 탔고, 앉을때도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수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百約)을 중원의 명사와 비교하면, 공휴(公休;제갈탄),태초(太初;하후현)가 이길 수 없습니다."
종회는 등애를 죄에 빠지게 한 후, 등애가 호송 수레로 소환되자, 그대로 강유 등을 인솔하여 성도에 이르러 자칭 익주목이라 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에게 병사 5만 명을 주어 선봉에 서게 하려고 했는데, 위나라 장수들이 분노하여 종회와 강유를 죽이고, 강유의 처자식도 모두 주살했다.
극정은 강유를 평론하는 글을 써서 말했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의 중임을 맡아 신하들의 위에 있었지만, 초라한 집에 살았으며 여분의 재산이 없었고, 별당에 첩을 두어 불결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후당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오락이 없었고, 의복은 입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수레와 말을 준비하고,음식은 절제했으며, 사치스럽지도 않고 빈곤하지도 않아 관에서 지급하는 비용은 손을 따라 모두 썼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한 까닭을 고찰하면, 탐욕스런 자나 불결한 자를 거세게 질책하고 자기의 욕망을 억제하고 자기의 애욕을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하여 만족하면 많음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견해는 항상 성공을 칭찬하고 실패를 헐뜯으며, 지위의 높음을 기대고 낮음을 떨어뜨리며, 모두 강유가 잘못된 곳에 의지하여 자신을 죽게하고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폄하하고 다시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춘추》에서 말하는 폄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강유처럼 학습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고, 청렴하고 소박하며 절약하는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입니다.
강유와 이전에 촉으로 갔던 양서의 관직은 대홍려에 이르렀고, 이상은 집금오가 되었으며, 양호는 대장추가 되었는데, 모두 촉이 멸망한 때보다 일찍 죽었다.」
유기전--------------------유기. (?~209? 산양군 고평현 출생)
유표의 전처 진씨의 아들로 유표의 장남이자 유종의 형이다. 후에 동생 유종과의 후계자 다툼에서 밀려 강하로 내려갔고,이후 유비와 연합하여 적벽에서 승리하지만 질병에 걸려 죽었다.
유기는 기개가 있고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던 당당한 걸물이었다. 허나 그는 동생 유종에게 형주의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 이유는 유종과는 달리 적극적인 호족의 지지를 받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종또한 유기와 마찬가지로 진씨의 아들이었지만 유종은 유표의 후처 채씨의 질녀(조카딸)에게 장가를 들었다고 《후한서 유표전》에서는 알려준다. 아?이때를 전후하여 유종은 채씨 집안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이는 채씨의 동생 채모와 장윤등이 당파를 만들어 유종을 적극 지지하고 유기를 몰아세웠다는 점에서도 당시 형주의 호족들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유표와도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던 채씨집안이 유종을 적극 지지하며 유표의 마음또한 큰아들 유기가 아닌 유종에게 기울어지게 했음을 알 수 있다. [1]
허나 유기라고 해서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음이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기록된 「유표의 장남 유기(劉琦) 또한 제갈양을 매우 중요시했다. 유표는 후처의 말을 듣고 작은 아들 유종(劉琮)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유기는 항상 제갈양과 더불어 자신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상의하려고 했지만, 제갈양은 항상 그것을 거절하고 함께 계획을 도모 하지 않았다.」라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다.[2]
형주의 대 명사이자 여러 지역 호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제갈량을 중시했다는 것은 유기가 기울인 노력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러나 제갈량이 이를 꺼려했다는 것은 그만큼 채씨집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파의 힘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상기의 내용 중 「유표는 '후처(채씨)의 말을 듣고'...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은 주목할만하다. 확실히 형주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집안이니 말이다. 결국 유기는 후계자에서 밀려 강하로 향하여 후일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허나 유기가 비록 강하로 내려가긴 했으나 동생 유종에게 복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군사적 요충지인 강하에서 독자적인 군권을 획득하며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을 것이다. 아마도 유기의 이동과 함께 그의 지지자들도 상당수 유기를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3]
삼국지 노숙전에 의하면 노숙은 당시 형주의 주요 세력으로 유비, 유종, 유기의 삼세력을 언급하고 있으며 형주의 인사들이 모두 유기와 유종의 두 파로 갈라져 있다고 알려주는데 당시 유기는 이미 강하로 내려간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만큼 형주 내부에 유기의 영향력이 상실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며 강하를 중심으로 새롭게 자신의 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는 조조의 남진에 당시 유표의 본거지였던 양양을 중심으로 하는 형북 일대가 유종을 따라 수많은 인사들이 조조에게 투항했으며 멀리 손권의 양주에서조차 투항의 목소리가 높았던 시점에 당당히 조조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 세력 기반이 유종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세력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조의 남진에 맞서기 위해 당대의 영걸 유비를 맞아들였다.[4]
조조라는 강대한 적 앞에 두 영웅이 힘을 합친 것이다. 유기가 유종과는 달리 반 조조를 향해 움직인것은 결코 그에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분명 당시에 객장의 신분으로 병력은 있지만 땅이 없던 유비를 맞아들여, 조조를 물리치므로 형주를 회복하고 유표를 계승하겠다는 것이 유기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바램은 무참히 깨어지고 만다.
「제갈양이 말했다. "유예주의 군대는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배했지만, 현재 군대로 돌아온 병사와 관우의 수군 정예병사 만 명이 있습니다. 유기가 강하의 병사들을 합쳐도 만 명보다는 적을 것입니다.」-《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이 내용은 제갈량이 조조와 대항하도록 손권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뜻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병존하기 어려운 두 영웅이 나란히 서 있던 시대에 제갈량(유비의 대변자)에게서 나온 이 제안에는 어떤 음모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제갈량은 손권을 설득하여 반조조를 외치며 유기를 폄하하고 유비를 영웅시함으로 반 조조의 동반자로서 유기가 아닌 자신의 주인 유비를 택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유기의 운명이 갈렸다. 반 조조 형주 세력의 리더로서 유비가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적벽대전을 전후하여 유기의 입지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유비는 손권과의 유기적인 군사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남은 형주세력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전장에 임했다. 그 과정 어디에도 유기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외교적인 고립은 전장에서의 군권의 주도권을 잃게 했으며 이는 곧 내부적인 입지의 약화로 나타났다. 적벽에서의 승리 이후 유비에 의해 형주자사가 되지만 그의 영향력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형남 4군의 항복 역시 유비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유기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시점에는 이미 병권을 포함한 유기의 대내외적인 영향력은 미비한 수준으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유비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유기의 죽음 시점은 여러가지로 의문을 낳는다. 정말 그의 사인은 질병이었던 걸까? 철저한 각본이고 드라마가 아닌가? 혹 유비에 의한 제거는 아니었을까? 그의 죽음이 누군가에 의한 제거이든 아니면 말 그대로 질병사이든 그의 마지막은 불우했으리라.
유기는 당대에 보기 드문 기개가 있었다. 강적 조조에 맞서 굴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를 뛰어넘는 모습이다. 그는 유비에 비할 만한 영웅이나 처세에 있어서는 기민하지 못하여 그의 동생 유종보다도 못했다. 그가 자신의 뜻을 크게 떨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이다.
[1]채씨집안이 큰아들 유기가 아닌 유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를 지지한 것은 유기와 유종의 개인적 역량이 차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표는 당시 형주에서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중 하나인 채씨집안의 여자와 결혼하므로 채씨와의 긴밀한 협력체계 위에 형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었다. 이들 채씨집안이 계속해서 형주의 지배력있는 가문으로 남기 위해서는 유표의 후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이러한 현상은 후한 말기 황실의 상황과 유사하다. 외척과 환관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후사를 어리고 유약한 인물이 잇게 하는 것처럼 유기에 비해 비교적 유약한 유종에게 채씨(유표의 후처)의 질녀를 시집보냄으로 대를 이어 외척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분명 유종이 유기보다는 다루기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조조의 남정군에 유종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주변의 의견에 의해 쉬이 항복한것과는 달리 유기는 유종의 투항으로 형주 북부가 완전히 날아가버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유비와 연합하여 굳건히 조조에 대항한 점에서 확실히 동생 유종과 비교해 보았할 때 인물의 기량은 한단계 더 높았다고 생각된다.
[2]제갈량의 큰 누이의 남편은 괴기였고, 작은 누이의 남편은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이었다. 그리고 처의 아버지는 황승언이었고, 황승언의 부인은 유표의 후처인 채씨와 자매이며 채모와는 남매이다. 이렇게 제갈량은 혈연적으로 형주의 실력자들인 괴씨 / 방씨 / 황씨 / 채씨와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의성의 마량과는 의형제를 맺는 등 마씨형제 등과 같은 젊은 인사들과도 깊게 사귀었다.
[3]이같은 상황은 원상과 원담의 경우와 유사하다. 원상이 원소를 계승했으나 원담은 그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고 청주에게 독자적인 세력을 이끌고 원상과 대립했다. 유기와 유종의 관계도 이와 같다.
[4]유비와 유기는 서로 별개의 세력으로 별다른 유대관계는 없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유기가 제갈량은 중시했다 하지만 이는 유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유기와 제갈량과의 관계만을 나타낼 뿐이다. 오히려 제갈량이 손권에게 반조조를 주장할 때 유기를 폄하하는 장면은 유비와 유기가 별개의 세력임을 증명한다. 유비는 남하하는 조조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유기와의 어떠한 연계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채 강릉으로 이동하려 했을 뿐이다. 당시의 강릉은 유종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강하의 유기의 영향력도 적은 양양 - 강릉 - 강하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세력권이었을 것이다. 이 강릉이 조조에 의해 막히면서 유기로의 행로를 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기는 당시 병력은 있지만 땅이 없던 유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적어도 유비가 강릉을 얻지 못한 시점에서는 유비는 유기에 미치지 못했다.
위연전------------------위연.자는 문장으로 형주 의양군 사람이다. 그가 역사에 그 이름을 처음 들어낸 것은 부곡의 신분으로 유비를 수행하고 촉으로 들어갔다는 촉지 위연전의 기록이다. 촉지 선주전에 따르면 형주의 인사들이 대거 유비에게로 향한 시점은 2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유비가 형주에 정착하면서 형주의 호걸들이 대거 유비에게 향한 시점인데 유표가 이를 경계한 점을 고려해볼때 적지 않은 규모였음을 짐작케한다. 또다른 하나는 조조의 군대를 피해 유비를 따라 상당수의 형북 인사들이 남하한 시점으로 이 두가지 시점중 하나의 시점이 위연이 유비에게로 향한 시점일 것이다. 그러나 유비가 입촉할 때부터 위연이 활약하고 있다는 점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쏠리게 한다.
부곡(部曲)이라는 말은 본래 군대의 편성 단위이다. 하지만 동한 말, 명문세족들은 봉건제를 채용하여 자신의 가족ㆍ빈객ㆍ전호ㆍ문생ㆍ고리등을 관할하여 통치하였고 이때부터 사병이 생겨났고, 이들 또한 부곡이라고 칭함으로써 관부곡과 사부곡의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사부곡은 주장(主將)에 종속되어 가병(家兵)이라고도 했다. 위연이 부곡의 신분으로 선주를 수행했다고 하니 아마도 그는 빈객의 신분을 지닌 사부곡의 일원이 아니었을까? 그의 첫 관직이 조운과 같이 측근직인 아문장군이었다는 점과 유비와의 보통 이상의 유대관계가 없이는 발탁될 수 없는 독한중의 지위에 오른 점으로 보아 그가 유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1]
위연은 입촉 후 순탄을 넘어 거칠 것 없는 정치인생을 달리게 되는데 그 절정으로는 219년. 독한중 진원장군 한중태수로 임명된 것이리라. 당시 한중은 유비정권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땅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위와의 북방 경계선으로 익주의 목구멍에 비견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만일 이곳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유비정권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게 된다. 또한 제갈량이 구상한 형주와 익주의 동시 북벌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물론, 강족과 저족등의 융적(戎狄)들을 도모하고 회유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땅이었다. 한중은 경제적으로도 유비 정권에 있어 너무도 필요하고 중요한 땅이었는데, 성도 분지와 비견되는 한중 분지의 경제력과 노동력은 훗날 최소한 촉한 정부 총 병력의 3분의 2 이상이 집결되어 동원되었다는 제갈량의 북벌을 재정적으로는 물론, 병력의 보충 면에서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제갈량이 열악한 촉한의 환경에서도 기적같은 대규모 북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한중과 성도의 양극체제는 위연이 독한중에 임명될 당시에는 성도 분지, 위연의 한중 분지, 관우의 남군 일대로 나뉘어진 3세력이라 양세력으로 나위어진 때보단 들했겠지만, 그 중요성과 의미는 대단했다. 특히 위연이 독한중이 된 219년에 유비가 유방의 선례를 따라 한중왕에 오르면서 이곳은 상징적인 의미마저 띄게 되었으니 이런 중요한 자리에 위연이 발탁되었다는 것은 곧 위연의 정치적 위상이 그만큼 신장되었음을 뜻했다. 단숨에 권력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한가지 특이점은 이러한 예상치 못한 인사조치에 대한 긴장과 혼란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저 멀리서 마초라는 자가 투항했다는 소식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던 관우가 단숨에 권력의 핵으로 오른 위연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관우 뿐 아니라 유비 정권의 그 누구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의아한 일이다. 이같은 점은 사람들이 놀란 이유가 한중태수에 '위연'이 되었다는 점이 아닌 '장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팽양, 요립, 이엄등의 인사들이 퇴출당한 이유는 그들의 권력욕과 시기심에 기인해있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마초, 황충 등의 쟁쟁한 인사들이 장비도 아닌 위연이 독한중이 된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았단 말인가? 황충을 *군으로 임명할 때에도 관우등의 불만을 고려해 이를 말리고 우려한 점을 보아도 그렇다. 비록 관직 면에서는 사방장군직을 받은 이들에 비해 낮다고 하더라도 관직 서열과 권력서열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시기 위연의 실권력은 마초와 황충을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사항은 그가 벼락같이 떠오른 인물이 아닌 그 이전부터 유비정권 내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 같다. 이 시기 유비 정권의 실세들이 모두 유비와의 의협적 관계로 맺어진 이들이엇음을 고려해 보아도 위연이 유비와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간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221년. 유비가 동오정벌을 감행하면서 대규모의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위연의 경우 진북장군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직위명으로 보아 동오정벌을 단행하는 동안 북방의 적 위(魏)로부터의 방위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 같다. 여기서 한가지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당시 유비를 따라 동오정벌에 참여한 황권의 지위 역시 진북장군이었다는 것이다. 그 직위명과 동오정벌 당시 황권이 조위의 공격을 방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는 두가지 점으로 미루어보아 위연과 비슷한 시점에 진북장군이 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사정장군과 사진장군의 경우 같은 관직에 2명 이상이 임명될 경우 경력과 능력 면에서 앞서는 자에게 '대'자를 붙인다. 훗날 230년 위연이 정서대장군으로 임명되는데 위연의 직이 진북장군이었다면 사정장군으로 승진하면서 동시에 '대'자가 들어간 것은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다. 따라서 230년 위연이 정서'대'장군에 된 것으로 보아 유비가 동오정벌을 단행하던 시점 내지는 그 이후 기록되지 않은 시점에 진북대장군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비의 동오정벌로 인해 위연에게는 2가지의 변화가 오게 된다. 먼저 군사적으로는 자신에게 지원을 해주는 입장에 잇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에게 견제와 압력을 주는 존재인 상용의 유봉과 파서의 장비가 제거된 것은 위연을 좀 더 자유롭게 해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유비의 죽음은 위연을 중앙 정치에서 소외시키고 고립시켰다. 이 후 위연이 230년까지 10년동안 계속 진북장군에 머무른 것은 중앙 조직에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 유선의 즉위와 제갈량으로의 권력 집중. 남중의 반란들이 겹치면서 조정은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되고 이러한 혼란은 위연에게도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시기 위나라의 중신들이 제갈량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할 것을 종용한 것을 보아 그 혼란과 불안이 심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위연은 한중군을 장악해 나갔던 것 같다. 지방의 위연으로서는 자신이 있는 한중을 장악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2]
위연이 한중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이 후의 인사이동에서 드러난다. 227년 제갈량을 북벌을 위해 한중으로 올라오는데 한중군을 장악하고 있던 위연이 불편하게 여겨졌던 것 같다. 이때의 인사이동을 보면 위연은 독전부ㆍ승상사마ㆍ양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얼핏보면 승진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독한중이었던 위연을 선봉부대를 담당하는 독전부로 이동시켰으며 촉지 여예전에는 이시기 위연의 한중태수직 역시 여예에게 넘어갔음을 알려준다. 한중을 장악했던 위연의 권력 기반을 붕괴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인사이동이었다. 승상사마라면 승상부의 속한 사마라는 말인데 사마는 6품 내지는 7품의 관료인데 2품의 진북장군인 위연에게는 의미없는 직이다. 비록 속관직이라고는 하지만 위연에게 별다른 의미가 부여될 만한 직은 아닌 것이다. 조정에 별다른 연고나 기반이 없는 위연으로서는 한중군의 권력기반을 와해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 될 수 있었다. 양주자사라는 것 역시 이름만 좋은 명예직으로 의미없는 직으로 봐도 무방하다. 위연에게 있어 이 시기만큼 암울한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221년부터 230년까지 10년동안 그의 장군직이 진북장군에 묶여 있었다는 것 또한 그에게는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갈량이 북벌에 위연을 적극 기용했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그의 직은 선봉대를 이끄는 독전부와 정벌을 담당하는 사마이다. 그러나 정작 선봉이 되어 가정전에 나선 것은 마속이었다. 이 후 계속되는 북벌에서도 제갈량은 애초 중앙에서 대려온 인사들이나 새로 영입된 인물들인 진식, 왕평, 강유등을 적극 기용했지 한중군의 인물들은 이렇다할 활동이 없다. 위연뿐만 아닌 한중군의 인사들중 중책에 기용된 자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은 위연의 세력 와해에 제갈량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반대로 위연의 세력이 한중군 전체에 얼마나 퍼져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3][4]
227년 말에 있었으리라 추측되는 남정에서의 회의에서 나온 속칭 자오도 계책이라 불리는 위연의 작전은 이러한 위연의 절박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단기 5천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이 작전은 분명 뛰어난 작전으로 북벌을 성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책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는 계책이지만 동시에 확실히 위험했다. 특히 실패할 경우 바로 위연 자신의 죽음이 확실시되는 이 작전을 스스로 제안하고 실행에 옮기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좁아진 정치적 위상을 다시 되찾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이 담겨 있다. 여기서 또 하나의 특이점이 발견된다. 이 제안을 거절한 제갈량을 위연이 겁장이라며 비난한 것이다. 당시 최고 집권자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제갈량을 겁장이라며 비난하다니 너무나 간 큰 행동이지 않은가? 더구나 이렇게 비난을 했음에도 그 어떤 압력이나 제제를 받은 흔적이 없으니 더욱 놀랍다. 제갈량같은 이를 비난하고도 퇴출당하지 않은 이는 촉한 정권에서 위연 하나일 것이다. 227년 말이라면 위연이 독한중과 한중태수직을 놓은지 1년도 안되는 시기이니 위연의 한중 세력은 건재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위연으로 인한 제갈량의 견제는 위기의식을 느낀 한중군의 세력이 위연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하는 효과를 낳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을 믿었기에 위연이 저런 비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이 후 230년이 되면 또다른 특이점이 발견된다. 그의 성격적 결함과 양의와의 불과가 언급되고 있는 것인데 특기할만한 사항은 촉지 위연전, 양의전, 비의전에서 모두 이같은 불화를 230년을 기점으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왜 하필 230년일까. 이것이 단순한 그의 성격적 결함이거나 단순한 인간관계의 묘사라면 여러 전들에서 이렇듯 230년을 기점으로 기록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219년 그가 독한중으로 임명될 시점. 그후 8년간 한중을 진무하는 동안.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올라온 시점. 이 세가지 시점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각 전들에서 230년을 기점으로 이러한 내용을 공통적으로 적고 있음은 이러한 문제가 그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닌 230년을 기점으로 발생한 문제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더욱이 비의전에는 ''군사' 위연과 '장사' 양의'의 다툼을 적는데 위연이 군사가 되고 양의가 장사가 된것은 모두 230년의 인사이동에서였다. 따라서 이같은 기록은 특기할 만한 내용이며 단순한 개인의 인간관계로 치부할 것이 아닌 230년 이후 나타난 당시의 정치상황을 고려해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떠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230년에는 촉한 정권 전체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들이 많았던 해였는데 북벌과 관련된 경우 이 해에 조위 정권의 대규모적인 침입을 받았다. 장합ㆍ사마의ㆍ조진등이 3방향에서 들어왔는데 제갈량이 직접 성고ㆍ적판에서 기다려 저지하려 했다. 이 때 조진과 사마의가 남정에서 합류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촉군이 전선을 뒤로 미루어 적군을 깊숙이 끌어들여 저지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조진등이 이끌었던 위나라의 중앙군은 자연재해로 인해 퇴각하였다. 비록 중앙군은 퇴각했지만 옹주의 곽회가 이끌로 내려운 지방군은 남아있었는데 이를 토벌하도록 명받은 것이 위연이었다. 여기서 왜 하필 위연을 기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지금껏 위연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제갈량이 왜 갑자리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일까? 여기서 위연에게 토벌령을 내린 것은 제갈량의 책략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위연의 한중관련 직을 없앰으로 그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했고 그것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위연에게 어느정도 타격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제갈량 자신이 한중에서 따로이 승상부를 열므로 한중군을 장악하면서 한중군의 인사들을 배격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갈량의 이러한 행동은 한중군에 흩어져있던 위연의 세력을 하나로 묶어 단일화시키는 효과를 낳았던 것 같다. 권력의 핵심은 제갈량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위연은 북벌의 중심이 되는 한중군에 있어서 제갈량의 가장 큰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만일 위연이 한중군 영내로 들어온 곽회의 군대를 물리친다면 제갈량으로서는 좋은 일이고, 만약 진압에 실패하거나 어렵게 되면 위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이는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그동안의 북벌에서 왕평, 마속, 진식, 조운, 등지등을 기용하다가 비교적 위험도가 적은 방어에 위연을 기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미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중앙군은 퇴각이 이루어졌고 남아있는 곽회의 군대만으로는 큰 위협으로 다가오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당시 위연과 곽회가 맞붙은 지역은 양계(陽谿)라는 곳인데 여기서 표현된 양(陽)자는 양양이나 남양의 경우와 같이 대체로 강이 있는 곳에 쓰인다. 또한 계(谿)자도 시내 계자이므로 이 양계라는 지역이 강가임일 알 수 있는데 한중군 일대에 강은 한수(면수)뿐이 없으므로 이 전장이 한수 강변까지 밀고 내려온 곽회군과 벌어진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갈량의 예상치 못한 결과가 벌어진다. 당시 전투를 위지 곽회전에 실린 조방의 조서에는 한천의 싸움에서 거의 전멸할 뻔하였다고 적고 있다. 제갈량으로서는 위연의 이러한 큰 전과가 예상 이상의 큰 승리였을 것이다.[5]
그러나 단지 위연이 대승을 거둔 것 자체는 제갈량에게 그리 위협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작 230년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문제는 그 이후 위연의 인사이동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승리를 높이 평가한 후주 유선은 그를 전군사 정서대장군으로 승격시키고 남정후에 봉했으며 가절을 부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연의 지위 격상은 결코 제갈량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이 이러한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갈량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동안 위연을 10년동안 진북장군에 묶어두고는 갑자기 이러한 인사조치를 단행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아무튼 위연은 이 시기 10년만의 장군직 승진으로 정서대장군이 되므로 명실공히 최고의 무장으로 부상했으며 그가 받은 가절을 바탕으로 한중군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군사라는 지위를 통해 북벌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전군사는 승상사마였던 위연의 속관직이 사마에서 전군사로 승격된 것인데 촉지 양의전에서 알려주듯이 군사직은 한가로운 때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지만 당시 한중에서 북벌을 지속적으로 수행중인 상황에서는 상당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요직으로 제갈량을 따르는 한중군에 올라온 승상부 사람들중 전군사 위의 직을 갖고 있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정서대장군이라는 직은 당시 한중군 내에서 가장 높은 장군직이었는데 제갈량이 이 시기 표기장군으로 승진한 이엄에게 한중군의 일을 맡기고 북벌에 나섰던 것은 바로 위연의 한중 세력이 그만큼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여기서 위연이 받은 가절은 특기할만한 점이다. 아마도 위연은 이 가절을 바탕으로 사졸을 양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중군 관련 직이 없는 위연은 가절이 아니고서는 사졸을 양성할 권한이 없었을 것이다. 이 사졸의 양성은 북벌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위연의 세력 강화와 직결되므로 제갈량을 중심으로하는 승상부의 사람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위사람들과의 불화라고 하지만 당시 한중군의 인사들은 제갈량을 따라 올라간 승상부의 사람들로 대체되어 있으므로 230년을 기점으로 나타나는 대립과 갈등은 이러한 점들로부터 기인한 위연의 한중세력과 제갈량을 중심으로 하는 승상부의 사람들과의 갈등을 묘사해놓은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들이 위연을 피했다는 것은 그들의 지위나 역량이 위연과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인데 유독 양의만이 대립했다는 것은 당시 양의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부면이다. 또한 그가 제수받은 작위인 남정후의 식읍은 한중군의 수부인 남정이라는 점으로 보아도 이러한 인사조치는 한중군에서의 위연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상당히 유효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오면서 불거진 다툼은 230년을 기점으로 더욱 심화되어 그 갈등의 폭이 커졌다. 234년 제갈량이 이끌었던 마지막 북벌 때 조직이라는 해몽가는 선봉장인 위연을 속여 이간하고 그의 입지를 줄이려는 시도를 하는데 이와같은 기록은 당시 갈등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제갈량의 후사조치와 위연의 최후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갈등이 심화된 234년 가을. 촉한의 집권자 제갈량은 진중에서 병사했다. 제갈량은 병사하면서 비밀리에 양의, 강유, 비의등에게 철군의 임무를 부여하고 위연에게는 적의 차단명령을 내린다. 이러한 제갈량의 지시는 역시나 위연을 견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제갈량이 맨 처음 한중으로 올라올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위연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제갈량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제갈량은 위연이 따르지 않을시에는 그를 남겨둔채 퇴각할것을 명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조치가 어떻게 위연을 압박했기에 위연이 철군을 반대했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고갈 수 있었을까?
먼저, 제갈량의 퇴각명령은 지금까지는 언제나 한중으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북벌기지인 한중에서 재정비하여 다시 북벌을 시도하기 위한 것으로 사실상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했고, 한중에는 언제나 많은 수의 군대가 주둔했고 제갈량이 부서를 열어 조정의 일을 돌보았으므로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234년. 제갈량이 죽으면서 내린 철군명령은 북벌의 전면적인 퇴각령으로 성도로의 회귀를 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위연이 이라한 명령에 거부한 것은 북벌의 중단보다는 다른것에 더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군의 임무가 부여된 것이 '양의'였다는 것에 있다.
위연이 북벌을 내세운 실제적인 목적은 권력장악에 있었고, 북벌은 허울좋은 명분이었을 뿐이다. 당시 한중군의 세력은 양의로 대표되는 신세력과 비위로 대표되는 구세력. 위연으로 대표되는 한중세력, 오의등의 방관자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다. [6]
이보다 앞서, 양의는 위연과의 다툼으로 위연의 칼에 죽을뻔하였고 양의는 눈물을 흘리며 비의에 의해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이것은 양의의 힘이 위연에게 미치지 못햇다는 것이다. 직위상으로도 그러했고, 능력면에서도 그러했다. 위연에게는 유선으로부터 부여받은 가절이 있었으므로 제갈량 이외에는 그를 제어할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미 위연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했던 양의에게 권력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철군의 임부를 부여하고 위연에게 그 뒤의 일을 맡겼다는 것은 자신의 사후 위연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갈량의 초치였던 것이다. 위연이 그대로 따른다면 위연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있고, 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위연을 따돌린 채 철군을 감행하므로 위연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될 테니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다. [7]
이미 위연과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힘에서 그를 당할 수 없었던 양의는 비의를 위연에게 보내어 그의 동향을 살피도록 했다. 여기서 다른 이가 아닌 비의였다는 점에도 정치적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양의와 같은 이들은 제갈량과 공생관계에 있는 그의 수족과 같은 이들이었다면 비의의 경우는 구세력으로 신세력인 양의등과는 그 정치적 입장에서 차이가 있었다. 비의가 위연과 양의 사이에서 중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양 세력과는 다른 정치세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양의, 강유, 비의중 양의와 강유등은 친제갈량세력이었기에 그들이 갈 경우 위연은 너무 부담스런 존재였으리라.
위연은 비의로부터 제갈량의 사망소식과 철군의 소식을 듣고 자신을 권력에서 소외시키는 것에 분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상은 비록 죽었지만, 나는 건재합니다. 승상부에서 신임을 받은 관리들은 시신을 운반해 귀국하여 장례를 치러야 합니다. 나는 직접 병사들을 인솔하여 적을 공격할 것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여 천하의 일을 내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 위연이 어떤 사람인데, 양의의 지휘를 받아 후방을 끊는 장수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비의와 함께 떠날 부대와 남을 부대를 구분하고, 비의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와 이름을 나란히 하여 장수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촉지 위연전 中
승상이 죽었지만 자신이 건재함을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연의 위상을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승상부의 신임받는 관리들이란 양의등의 제갈량세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 대립이 북벌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양 세력간의 권력다툼임을 알려준다. 위연은 양의등의 세력만을 내려보내고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제갈량을 계승하려했던 것이고 이 때 비의를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하엿던 것은 그가 바로 제 3세력으로 향후 자신이 권력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간과한 것이 잇었는데 그것은 바로 비의가 위연의 편에 서서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제갈량으로부터 양의등과 함께 철군의 임무를 부여받은 비의가 위연과 함께하기에는 그 이득에 비해 위험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만 이미 비의는 돌아간 뒤였다. 결국 촉군은 위연의 부대를 남겨둔채 철군을 감행한다. 위연이 조정에까지 배척당한 것은 구세력과 신세력 모두를 아군으로 만들지 못한데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조정에 별다른 세력 기반이 없던 위연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위연이 군을 이끌고 촉군과 격돌하게 되는 과정에서는 촉지 위연전과 위략의 내용이 서로 어긋나는데 양 측 모두 그다지 설득력이 높지는 않다. 위연전에 따르면 단지 자신을 따돌리고 철군을 감행했다는 것 때문에 극단적인 군사적 행동에 돌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같은 점들이 분명 위연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있겠지만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할 만큼 중차대한 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제갈량또한 이러한 사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무언가 위연의 행동에 대한 원인으로는 불충분하다. 더구나 위연의 행동을 본다면 더욱 의아함은 커진다. 위연은 양의와의 싸움에서 패한 후 한중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그저 자신을 따돌리는 것에 대한 분노로 일어난 무력충돌이었다면 패한 위연은 타국으로 망명을 가야함에도 한중으로 들어가 죽었다는 것은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 촉지 위연전과 후주전에 인용된 위략에서는 양의와 위연은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위연이 제갈량을 대신해 군사를 지휘하게 되자, 양의는 자신이 살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위연은 군사를 데리고 북(위)으로 투항할 생각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수하의 군사를 이끌고 위연을 공격했다. 위연은 원래 북으로 투항할 생각이 없었는데도 쫓기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위연은 다리를 끊어 양의군의 움직임을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조정에서 양의의 편을 들어주었다. 사실상 이 때 위연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촉한의 대장 위연은 단 한번의 교전에서 무너졌다.
위연이 패한 이유는 워낙 많지만 사실상 이미 패배가 결정된 전투였다. 군사의 양적인 면도 있겠으나 뒤에서는 양의가 밤낮으로 추격해오고, 앞으로 가자니 조정에서는 반역자로 규정하였으니 스스로 포위망 속에 같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추격해오던 양의군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지만 이미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 때 위연의 병졸들의 하평의 질책에 잘못이 위연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흩어졌다는 말은 주목할만하다. 바로 여기에서 위연의 패배의 또 하나의 원인을 알 수 있다. 당시 제갈량 사후 촉군은 퇴각을 하지만 승상 제갈량의 죽음을 공표하지는 않았다. 위연과 양의 등의 고위급 인사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승상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철군을 감행했던 것이다. 더구나 북벌을 내세운 위연으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위연의 사졸들은 하평으로부터 승상의 죽음을 듣기 전까지는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하평의 선전은 주요하여 위연측 병졸들의 전의를 상실시켰던 것 같다.
이 후 위연이 한중으로 돌아 들어간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권력싸움에서 패했다면 응당 타국으로의 망명을 택해야 정상인데 위연은 한중으로 들어갔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위연의 군사적 행동이 단지 양의가 미워서 그랬다는 진수의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그 발단이 된 것은 양의와의 권력 다툼이겠으나 무력 충돌이라는 극단적 움직임으로 치닫게 된것은 단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무력충돌까지 가서 패한 권력싸움이었다면 한중으로 돌아들어갈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연이 자신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것이 무고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데 권력싸움에서 진 상황에서 자신이 무고하든 아니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였을까? 위연이 마지막에 한중으로 들어간것은 여러가지로 의문을 낳는다. 이런 행동은 위연의 무고가 입증될 경우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잇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으며 그렇게 봤을때는 단지 자신을 따돌렸기에 군사를 들어 양의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위연을 확실히 제거하기 위한 양의의 무고로 인한 싸움이었다는 위략의 내용이 더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한중으로 들어간 위연은 결국 죽임을 당했지만, 장완이 그를 장사지내준 점이나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양의와 비의가 한직으로 이동된 것들을 보면 조정 당국으로부터는 자신의 결백이 받아들여졌던것 같다.
[1]위연과 조운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모두 유비와의 개인적 관계를 바탕으로 아문장군을 거쳐 정치적 위상을 높여나갔다는 점인데 한명은 중앙으로 한명은 지방으로 진출한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개인의 역량에 따른 유비의 판단으로 인한 차이였으리라.
[2]유비는 동오정벌을 단행하기 이전 유봉의 죽음과 파서의 장비를 데려오면서 221년. 오일을 관중도독으로 임명하였지만 오일이 위연을 견제하고 압력을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단지 관중도독이라는 그 직위만으로 오일이 실권력을 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위연의 한중관련 직위에 변동이 없고, 이 후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보면 한중의 실권은 위연이 계속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오일의 경우 위연과 함께 한중 방위라는 임무와 함께 위연의 감시정도의 역할이 부여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219년부터 제갈량이 올라온 227년까지의 8년간의 기간을 고려해 보았을 때, 특히 221년부터는 별다른 견제세력이 없었음을 고려해 볼 때 위연의 한중 장악은 시간적으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오일은 위연과 제갈량의 다툼에서 최소한 위연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정도는 했으리라 생각된다.
[3]여예가 한중태수가 된 시점은 명확하지는 않다. 촉지 여예전의 기록으로 보건데 227년에서 230년 사이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편의상 임의대로 227년으로 적어넣었다.
[4]출사표등에서도 나타나지만 227년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가며 시작된 촉한의 북벌은 제갈량에 의해 주도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 제갈량이 한중으로 올라가며 행하진 적지 않은 규모의 인사이동은 당시의 집권자인 제갈량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5]한천이라는 것은 한중군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써 이 싸움이 양계에서 벌어진 위연과의 싸움이었음을 뜻한다.
[6]신세력이란 유비와 함께 입촉한 세력이고, 구세력이란 유비보다 먼저 한중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세력을 지칭한다.
[7]만일 양의가 아닌 위연에게 철군의 임무가 부여되었다면 아마도 위연은 철군을 감행했을 것이다. 위연의 권력 승계에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전----------------------제갈량은 전한 원제 때 부폐한 황실과 대비되게 강직하기로 이름을 떨친 제갈풍의 10대 후손이다.
서기 181년 제갈량은 아버지 제갈규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 났다
황건적이 일어나기 4년 전이고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태어난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제갈량은 그가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었다.아버지 제갈규는 벼슬을 살다가 당시 황실이 썩은걸 알고 낙향해서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공명은 어렸을 적부터 사서 오경을 비롯한 손자나 오자 울요자 같은 병법서를 배운다.
당시는 문무관의 구별이 없던 시기라서 벼슬길에 오르려면 병법서도 배워야 했다.전쟁에서 승리해서 벼슬길에 오르는 길이 제일 빠른
길이 었으리라.당시 사대부 집안 자제들이 읽어야 했던 책은 대충 논어,맹자,역경,서경,예기,춘추 좌씨전 등이있다.
이런 책들의 분량이 또한 어마어마해서 논어가 1만1천705자요,맹자는 3만4천685자, 역경이 2만4천107자에 서경이 2만5천700자이다.
또 시경은 3만9천234자요.예기가 9만9천10자이며 춘추 좌씨전은 19만6천845자나 된다.
우리들이 학교 다닐때 까다로운 시 하나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반면에 당시 사대부 자제들은 그 엄청난 분량을 달달 외고 또 그 의미를 완전히 자기것으로 만들어야 했다.제갈량은 그런 학문을 닦으면서 자라난다.
제갈량은 그때의 학자들과 학문을 다루는 방법이 달랐는데 그때 당시의 일반적인 학자들은 책 한권을 읽더라도 글자 하나하나 신경써 가면서 정독을 한 반면 제갈량은 그 책의 전체 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통독을 했다 한다.이런 제갈량의 학문 다루는 모습으로 봐서 유교 사상이 뿌리 박힌 당시 학풍과는 다르게 실학을 위주로 다루었다고 볼수 있겠다.
제갈량이 수학할 당시의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제갈량이 그의 최대의 라이벌인 사마의와 동문 수학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거암 선생이란 야인이 있었는데 그가 큰 뜻을 품고 세상을 구할 인재를 기르기 위해 제자들을 모으는데 공명이 그 제자에 들어간다.
제자들 중에 사마의도 있었는데 거암 선생은 공명의 재질을 보고 제자들 중 으뜸이었던 사마의와 좋은 라이벌이 되겠다 싶어 그 둘을 좀더 신경써 가르킨다.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서를 그 둘 중 한명에게 전하기로 마음먹고 하루는 그 둘을 데리고 나무를 하러 갔는데 한 나무꾼이 그만 발을 헛딛어 낭떠러지밑으로 떨어졌다.그 광경을 보고 사마의는 의연히 앉아 사부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데
제갈량이 일어나 나무꾼을 구한다.
어느날은 사마의 집에서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전갈이 왔는데 사마의는 자신이 없는 사이에 기서를 공명에게 물려 줄까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승곁에 머무르게 된다.거암선생은 이때 부터 제갈량에게 마음이 쏠리게 되고 고령인 거암선생이 쓰러지자 제자들은 하나둘 떠나고 공명과 사마의 만이 남아서 스승을 간병한다.
공명이 약을 구하러 간사이 스승이 자신에게 기서를물려줄 의향이 없음을 느낀 사마의가 몰래 기서 비스무래한 책을 들고 달아난다.
기서는 스승의 베게맡에 있는 줄도 모르고..결국 거암 선생은 임종직전 공명에게 그 기서를 전하고 세상을 뜬다.
이 내용은 소설 제갈공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아무래도 이 내용을 믿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중요한 내용을 연의나 정사에서는 한마디 언급한 적도 없으려니와 논리적으로 생각 하기에도 너무 허망하다.어쨌든 소설이란게 개연성을 바탕에 두고 쓰는 거니 만큼 그럴 만한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그걸 사실로 믿기엔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실존 인물을 다룬 역사 소설이기에 호기심이 더욱 증대될 뿐이다.
어렸을 적 제갈량의 생활은 불우해서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12살 되는 해엔 아버지 제갈규마저 여의게 된다.
형 제갈근과 동생 제갈균 여동생 제갈경의 4남매는 이때부터 뿔뿔이 흩어져 이산 가족이 되버린다.
공명과 형 제갈근이 각각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된게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공명은 21살의 나이로 당시 천하 박색으로 유명하던 황승언의 딸 황월영과 결혼한다.
황승언의 처제가 당시 형주자사이던 유표의 둘째부인 그러니까 유종을 낳은 어머니 이고 유표의 중신 채모의 누이이다..
공명이 살던 융중이 형주에 있었으니 공명은 자신의 인맥을 넓히기 위해 황승언을 이용 했을 수도 있다.
삼국지 연의에서 나오는 여인은 초선, 오태부인, 감부인, 미부인, 추씨 정도인데 연의에서 황완정의 천하 박색을 설명하기도 한다.
얼마나 못생겼으면...공명이 국사에 전념할수 있었던 이유를 그 부인의 못생김을 드는 사람들도 있다.(色에 빠질 염려가 없어서..)
공명의 부인이 잘생겼든 못생겼든 재주하나는 비상했는데 공명이 남만 정벌때 사용했던 목우나 유마를 그의 부인이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 목우나 유마의 내용은 정사에는 나오지 않고 삼국지 연의 에만 전해지는데 정사 삼국지를 기술할 당시와 연의가 기술된 시간적 차이가 천 몇백인걸로 봐서 나관중이 그가 살던 당시에 나온 것을 제갈량이 고안했다고 우겼다는 설도 있다.
젊었을때 공명은 친구들과의 담소에서 자신을 제나라 명재상인 관중과 연나라 명장인 악의에 비유한 적이 있다.
관중이라면 관포지교란 고사성어에 나오는 바로 그 인물로 제환공을 도와 춘추전국시대의 패자가 되게 했던 인물이고 악의는 강대국이었던 제나라를 쳐서 대승으로 이끈 연나라 명장 이다.
대개 우리들이 어린시절이나 청년이 된 시기에 어떤 인물이 배울만 하다고 생각 되면 그의 사상과 이념을 본받게 된다.
공명이 젊어서 관중과 악의를 존경하고 받들었다면 그의 포부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관중은 내정에 더 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고 악의는 창업에 더많은 공을 세운 사람이다.
공명이 죽은 다음 그의 업적을 살펴보건데 그는 내정과 창업 면에서 관중이나 악의 못지 않은 공을 세운다.
나중 애기지만 유비가 공명을 삼고의 예 끝에 융중에서 끌어내게 되는데 어떤 책에는 공명이 먼저 조조가 공격하면 형주가 위태로울 것을 알고 유비를 찾아가 천하 삼분지계를 논했다는 내용도 있다.공명이 이미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했다면 이 내용도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그만한 포부를 가진 사람이 융중에서 썩을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유비가 자신을 찾지 않았으면 자신의 능력도 말짱 황이었을 테니까..삼고의 예의 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많은데 공명이 유비를 세번 만에야 만나준 이유를 관우나 장비에 비해 유비진영에 늦게 가담하게 된것을 염려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삼고의 예에서 제갈량이 주장했다던 천하 삼분지계라는 것도 당시 선견지명을 가진 뜻있는 학자들 사이에서 공공연 하게 떠돌았다는 내용이 여러가지면에서 증명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기 207년 공명이 27되는 해에 유비의 삼고의 예에 탄복한 공명은 드디어 천하로의 첫발을 내 딛는다.그 첫 걸음이 천하삼분 지계이다.
47세가 되도록 거점하나 마련하지 못했던 유비는 공명을 얻은것을 고기가 물을 만난것에 비유했다.수어지교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공명이 당시 거의 혹실히 자신의 세력을 구축한 조조나 손권을 택하지 않고 유비를 택한 이유는 사나이의 로망도 작용 하지 않았을까?
조조나 손권 수하에 들어가게 되면 그 주변 인물들의 텃새도 심하려니와 자신의 능력을 모두 못 펴게 될 상황도 고려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않은 유비를 택해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려 했던게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어쨌든 공명은 유비에게 형주를 얻을 수 있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천하 삼분지계의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유장이 다스리던 촉을 빼앗아서 그 기반을 확실히 다진다.
공명의 장수로서의 능력보다 정치가로서의 능력이 두드러진 것은 이 파촉을 경영할때 부터이다.
제갈량의 내정을 위한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진다고 할수 있는것이 칠종칠금의 고사로 유명한 대서남의 소수민족을 정복한 일이다.
이게 어떻게 정복사업이 아니고 내정에 들수 있냐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것이라 생각 한다.
그러나 공명이 이 소수민족을 정복하고 나서 그곳에 촉의 인물을 파견해서 직접 관활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수 있다.
이 사업은 촉이 북벌을 대비하여 내정을 안정시키고 경제의 개발로 국력과 국방력을 늘이자는 데 있었던 것이므로 정복활동이라기 보다는 내정을 안정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공명의 남과 다른 내정 능력으로서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내용이다.
공명은 전쟁에서 말대신 사륜거를 이용한다.
기동력 면에서 월등하고 장수의 상징 이기도한 말 대신에 점잖은 사륜거를 사용한 이유는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공격적인 장군이기보다 불안정한 촉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려는 정치가로써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여러번의 북벌을 감행한 이유도 당시 자기 뒤를 바쳐줄 만한 인물이 없는 촉을 보다 안정적인 위치에 올려 노려 함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본다.
서기 223년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치다가 패해 백제성에서 63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런데 문제는 유비가 오와의 싸움에서 국력을 너무 많이 허비하는 바람에 촉의 존망이 위태롭다는데 있다.
그래서 공명은 오와의 동맹을 생각한다.
당시 입장에서는 촉이 오에게 꿀리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깔보이지 않고 동맹을 맺을 필요 성이 있었다.
공명은 등지라는 사람을 택해 오에 사신으로 보내 깔보이지 않고 동맹에 성공한다.
공명의 인물 보는 눈도 뛰어 났다 하겠다.
하지만 마속의 예를 들면 아닌것도 같다.'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때가 있다'라는 말로 변호해주고 싶다.
그래도 공명의 전술중에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전술이 많은걸 보면 그가 사람을 판단하는 능력이 남보다 앞선다는 걸 알 수 있다.
공명의 공명정대한 법 집행을 이 마속의 예를 통해 들수 있겠다 싶어 논해 본다.
마속은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촉나라에서 공명에게 인정 받은 특출한 인재 였다.
마속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두들 알고 있겠다 싶어 설명하지 않는다.
공명의 지위로 보면 마속 정도 살리는 일이야 쉬웠겠지만 법의 준엄함을 세우기 위해 마속을 참하고 만다.
병사들은 법의 엄함을 원망하기보다는 그것이 공평하지 않음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내용에 두서가 없는데 여기서 잠깐 제갈 형제들에 대해서 알아보자.
정사에 나오는 제갈 형제는 제갈 근. 제갈 량. 제갈 균. 제갈 탄. 정도가 될 것이다.
형 제갈근은 오나라를 섬긴 사람이고 사촌인 제갈 탄은 위나라를 섬긴 사람이다.
제갈량은 알다시피 촉을 섬긴 사람이고 셋 모두 그 능력이 뛰어나서 형 제갈근은 손권의 신뢰를 받는 오나라의 중신이었고 사촌 제갈 탄은위나라 군장인 하후현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다.
공명의 아우 제갈 균은 촉나라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관위가 장수교위(4품관으로서 궁중의 경호대장)에 이르렀다.
당시가 전화가 끊이지 않는 어지러운 시대여서 이산 가족이 많은 시기이긴 하나 제갈량의 형제들은 그들의 능력이 뛰어 나기 때문에그 비극이 절실하다.
형주를 놓고 촉과 오가 협상할때 촉측 대표자가 공명이고 오측 대표자가 제갈근이다.
그들은 공식 석상에서 주고받은 말말고 특별히 사석을 마련하지 않고 형제의 정도 느낄 겨를도 없이 헤어진다.
공명이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 제갈 근을 아버지나 다름없이 의지하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 하면 너무도 비극적이다.
쫌생이 같은 유비나 손권들이 의심만 안했어도 형제의 정을 나누지 않았을까?하고 아쉬움을 남겨 본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형제로써의 정을 통하지 않은건 아니다. 이 문제는뒤에 논하기로 한다.
<세설신어><품조>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품조란 일종의 품평을 이른다.
-제갈근과 량, 그리고 그들의 사촌인 탄은 모두 명성이 높았는데 각기 다른 나라를 섬기고 있었다.당시 세상에서 평하길를
"촉은 그중 용을 얻었고 오는 호랑이를 얻었으며, 위는 개를 얻었다."
용은 공명을 말하고 호랑이는 제갈근을 말한다.그리고 개란 제갈 탄을 말하는 것인데 제갈탄은 위나라의 정권이 사마씨 형제들에게 있을때 활약한 인물이다.위나라가 사마씨 형제들에게 휘둘리자 이에 격분해 수춘성에서 반란을 일으킨 관구검과 문흠을 격퇴 하기 위해 사마소는 제갈탄을 출진 시킨다. 제갈탄은 그들을 격파하고 그대로 수춘에 주저 앉아 병력을 불리기 시작한다.
(당시 위나라 정세가 사마씨들이 위나라를 섬기는 대신들을 차례로 주살하던 때라 거기에 불안을 느껴서 취한 행동이다.)
드디어 제갈탄은 심복들의 권유로 반란을 일으키고 반란에 실패하여 죽고 만다.
누가 제갈 탄을 개에 비유했는진 모르지만 일관된 행동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을 두고 그런것 같다.
그래도 마음 씀씀이는 깔끔했는지 마지막 순간에 제갈탄을 따르던 수백명의 장병들은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한다.
이 밖에도 삼국지에는 제갈 성을 가진 이들이 몇몇 등장 하는데 제갈 량의 아들인 제갈 첨과 제갈 근의 아들인 제갈 각이 있다.
제갈씨집안의 계보를 살펴보도록 하자..
제갈량의 아들에는 제갈첨이 있고 제갈근의 아들에는 큰아들 제갈각과 둘째 제갈교가 있다.
또 제갈첨의 아들에는 제갈상 제갈경이 있고 제갈교의 아들에는 제갈반이 있다.
제갈첨은 어렷을적부터 총명하여 아비의 사랑을 받았으나 공명 자신도 큰그릇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촉의 백성들은 공명을 존경하고 사랑한 나머지 제갈첨마저도 아끼고 사랑했다.
의기가 남달라서 위의 등애가 촉을 치기위해 남하햇을 당시 제갈첨을 낭야왕(제갈량의 고향)에 봉할것을 약속하면서그의 항복을 권유했지만 오히려 화를내며 마침내 전장에서 전사하고 만다.
제갈근의 큰아들 제갈각은 어렸을적부터 아주 총명하고 뛰어나 손권에게도 귀여움을 받을정도였으나 품행이 다른이보다
좋지 못해 수많은 공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인기정책을 써서 인기도 좋았지만 오나라 황제에게 주살당하고 만다.
제갈량이 그의 나이 46되는해까지도 자식을 얻지 못했는데 형 제갈근에게 아들이 둘있는걸 알고 둘째아들 즉 제갈교를 양자로 삼을려고 제갈근에게 편지를 띄우고 허락을 받아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가 된다.
제갈교는 형 제갈각과 함께 상당히 이름이 나있었는데 논자들은 제갈교를 말하기를 '교의 재능은 형을 따르지 못하지만 성품은 형 각을 능가한다'고 했다.그러나 명이 길지 못해 제갈량이 한중으로 출진할때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서 병을 얻어
25의 나이로 병사했다.제갈교의 아들 반은 촉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주살당했기 때문에 제갈씨 집안의 자손이 끊길뻔 했는데 그가 다시 오로 건너가 가통을 잇게 된다.
한 집안에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나오기도 참으로 드물 것이다.
제갈 집안이 하나로 뭉쳐 위.촉.오 중 어느 한 나라를 도왔으면 어땠을까?
제갈량은 5번에 걸친 북벌을 번번히 실패하고 서기 234년 8월 말 향년 54의 나이로 오장원에서 죽는다.
삼국지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이건 적게 아는 사람이건 제갈량을 비난 하거나 욕하거나 싫어 하는 사람은 없다.
중국에서는 신으로 까지 추앙받는 관우를 요즘들어 비난 하는 이들이 있는데 반해서 여러 서적이나 그 밖의 다른 문헌에서도 그를 깍아내린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인품이 얼마나 고결 한지 알 수 있다.
공명이 마속을 참할때 마속의 부장인 진식에게도 죄를 물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일이 있다.
알다시피 정사 삼국지는 진수가 쓴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절대 좋은 감정도 없을 뿐더러 촉과 반대 입장인 진나라를 위주로 한 책에서 진수는 공명을 평하기를
"제갈량은 재상이 되자 백성을 위무하고 규범을 보이며 기강을 바로 세웠다. 충성을 다하여 공이 있는 자는 비록 원수진 사이라도 반드시 걸맞은 상을 내렸고, 법을 어기고 직무를 태만히 한 자는 가까운 친지라도 반드시 벌을 주었다. 진심으로 회개한 모범수는 중죄를 지었어도 너그럽게 봐주었고, 주둥이를 놀려 발명만 하는 자는 죄가 가벼워도 중하게 다스렸다.
어진 일을 한 자는 하찮아도 꼭 상을 내렸고, 작은 일이라도 못된 짓을 한 자는 빠짐 없이 벌을 주었다. 이래서 온 나라가 모두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흠모하고 따랐다. 형벌과 정치가 준절했는데도 원망하는 사람이 없었음은 그의 마음 씀씀이가 공명정대했기 때문이다."
가히 최대의 찬사이다.그러고는 진수는 공명이 젊었을 때 자부했던 대로 "다스릴 줄 아는 훌륭한 그릇이며, 능히 관중과 소하에 비길 만하다."고 결론 짓고 있다.
공명은 여러면에서 뛰어난 인물이지만 그의 능력이 더 한층 빛을 발한 이유는 그의 라이벌 들인 주유나 사마의와의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유비전-------------------유비는 전한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그 고을에서 벼슬을 살았는데, 아버지는 효행이 지극하고 청렴했다 하여 효렴에 천거되어 조그만 고을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유비는 그런 아버지를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신발과 돗자리를 팔아 생계를 잇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청렴하다 하여 효렴에 천거될 정도 였으니 돈이란 것을 몰라 재물을 모을줄 몰랐나 보다.
그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어머니는 유비를 동향 어른으로 구강군 태수를 지낸 노식이라는 유명한 학자에게 유학을 보낸다.
후일 그가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공손찬과 동문수학 하게되고 또 다른이들보다 이들은 각별히 더친해 유비는 공손찬을 형으로 대한다.
그러나 유비는 학업을 싫어하고 몸치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다.
촉서는 당시의 유비의 행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선주는 심히 학업을 싫어하고 사냥이나, 음악, 옷 치장 따위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동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양아치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유비는 20도 체 안된 나이에 키가 약 180정도 이고 팔뚝이 길어 손이 무릎에 닿고, 곁눈질을 하면 볼수 있을 만큼 귀가 컸다니 남과 다른 분위기를 지녔고 슬픔과 기쁨을 잘 표현하지 않았으므로 어뜻 보아 거물로 보였다.
그러나 학업에서도 특출나지 못했고 집안도 변변찮은 관계로 별볼일 없이 지내다가 그가 23되는 해에 황건란이 일어 의병을 조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게 된다.
황건적 토벌에서 공을 세운 그는 어렵게 안희현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순탄치가 못해 뇌물을 요구하는 감찰관 독우를 육실나게 패주고 도망길에 오른다.
(이 대목에서의 연의와 정사의 내용이 다르다.연의에서는 장비가 독우를 패주고 유비는 말리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정사에는 유비가 독우를 만나기를 청했는데 독우는 기생들 품에 빠져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이에 격분한 유비가 독우를 패준다고 전한다.오히려 유비를 말린것은 관우와 장비이다.연의의 이같은 설정은 유비의 후덕함을 보이기 위함이고 장비의 단순함을 보이기 위한 허구일뿐이다.)
도망중에 대주의 유희에게 가서 숨었는데 유희의 추천장을 받아 유주의 유우에게로 간다.
거기서 반란군 진압에 참가하여 크게 활약했기 때문에 유우는 유비의 공로를 조정에 상주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감찰관을 패준일이 사면 되고 하밀현의 부지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가지 않았고 다음에는 고당현의 현령의로 옮겨졌으나 황건적과 싸워서 지는 바람에 동문 수학한 공손찬에게로 가서 의지 하게 된다.
그곳에서 공손찬과 원소의 싸움에 공을 세우며 세월을 보내다가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서주를 침략한 조조를 막기 위해 구원을 청해온 도겸에게로 가게 되고 뜻하지 않게 자신의 계책이 조조에게 먹히자 도겸은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 준다.
이때 유비의 나이 34세이고 도원결의를 맺고 세상에 나온지 10년후의 애기다.
유비가 서주로 간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자칫하면 공손찬 휘하에서 돌격대장 노릇이나 하게될 처지에서 벗어난 것이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기반을 잡게 된것이다.
이렇게 얻은 서주도 조조의 계략으로 여포에게 빼앗기고 조조에게 의지하게 된다.
조조의 그늘에서 유비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불러 천하의 영웅에 대해서 논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조조는 유비와 자신을 가르켜 천하에 오직 영웅은 둘밖에 없다고 유비의 큰 뜻을 알아본다.
하지만 조조 자신은 유비가 큰뜻을 가지고 있고 그걸 실천할 능력이 있더라도 자신이 유비를 가두는 큰 물이 된다고 보았음인지원술의 북진을 막기위해 유비를 출진 시키고 유비의 배반으로 서주를 빼앗기고 만다.
애초부터 조조는 유비라는 인물을 잘못보았다고 볼수도 있겠다.유비가 자신과 비견될만큼 뛰어난 인물일진 몰라도 그 유비는 자신의 뜻을 실현 시키기 위해 조조의 그런 호의쯤은 간단히 버릴수 있는 인물이었다.
원소,여포,유장의 예를 보면 충분히 알수 있다.이 부분에서의 유비는 여포의 줏대 없음과 비교할수 있는데 여포와는 달리 천하의
인물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이유는 유비의 배반은 항상 깔끔하고 몸을 빼낸 시기가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주를 빼앗은 것도 원래는 자기땅인 것을 조조의 계략으로 빼앗겼다가 자신의 계략으로 다시 찾은 꼴이니 나쁘게 보는게 더 이상할것이다.
그렇지만 배반이란것 자체가 그리 깔끔한것은 아니다.
어쨌든 서주에 다시 머무르게 된 유비는 원소와 동맹을 맺어 원소와 조조의 관도의 싸움때 후방에서 조조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원소의 무능으로 조조에게 패배하여 원소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이 싸움에서 유비는 관우.장비등 그밖의 부하들과 처자식을 잃게 된다.
원소에게로 간 유비는 원소의 그늘아래서 그의 부장 노릇이나 하며 몇개의 공을 세우지만 조인의 계책을 받아들인 조조에게 다시 패하고 원소도 조조의 약세를 깔보다가 참패를 당해 유비는 다시 형주의 유표에게 가서 의탁하게 된다.
유비의 형주에서의 생활은 그의 일생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로서 그곳에서 제갈량이라는 천하에 으뜸가는 기재를 만나게 된다.
또 서서,방통등의 쟁쟁한 모사들을 맞아들여 유비진영의 참모가 모자라는 결정적인 단점을 보안하게 되어 천하를 얻을 기반을 쌓게 된다.
그러나 유비의 세력은 아직 완전치가 못해 다시 조조의 침략으로 강릉으로 다시 패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손권과 연합해 적벽에서 조조군을 패퇴시킨다.
이 적벽싸움의 전리품으로 계양,영릉,장사등의 형주 남부군을 점령하고 주유는 형주의 북부에 주둔하게 된다.
(삼국지 연의에서는 이 주유라는 인물이 제갈량에게 형편없이 농락당하는 광대역활을 하는데 오히려 정사에서는 유비에게 형주남쪽 지방을 양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제갈량이 유비의 삼고의 예 끝에 융중에서 융중대책의 하나로써 천하삼분지계의 의견을 내놓는데 이 형주 남쪽 지방의 세력 확보는 제갈량이 건의한 그 천하 삼분지계로의 첫 발을 내딛는 시점이다.
형주정벌을 기점으로 하여 세력을 다진 유비는 익주의 유장과 장노,조조와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익주를 빼앗고 만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모두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말하지 않는다.유비가 익주를 빼앗게 된 계기는 물론 유비진영의 확고한 세력기반이 필요해서 이지만 장송이나 법정등의 도움도 컸다.
어쩌면 매국노인 이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유비인데도 유비는 자신의 진영에서 모사로는 제갈량 다음인 방통을 낙봉파에서 잃게 된다.
유비의 조조와는 반대되는 봉건 사상때문인데 그가 유장과 자신은 형제간이라는 이유로 아우의 땅을 뺏지 않고 천하의 인물들에게 비난 받지 않으려는 소의를 접어두고 하루빨리 천하를 정복해 백성들을 평안으로 다스리려는 대의로써 이 일에 매달렸더라면 유비가 천하를 얻는것도 불가능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제갈량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되던 이 방통을 잃지 않고 촉과 오의 싸움인 이릉의 전투에 데리고 가서 방통이 유비의 잘못을 다독였다면 당시 열세에 있던 오나라를 격파하고 조조와의 1:1싸움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됬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본다.
비록 유비가 익주를 얻어 기반을 쌓았지만 방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잃은 것은 그에겐 돌이킬수 없는 커다란 실책이다.)
유비는 이 익주를 빼앗고 내정에(익주는 원래 유장의 아버지 유언이 다스리던 땅으로써 영제때 유언이 익주에 들어와 중원에 힘을 다른곳보다 덜받으며 기반을 쌓던곳이다.
거의 30여년을 유장의 일족이 평온하게 다스리던 곳이라 백성들의 유비에 대한 반발이 커서 엄격한 법률로서 조금한 잘못을 저지른 이라 할지라도 참형에 처했다 한다.)
힘을 기울이며 북벌을 위한 준비를 하는 동안 형주에 남겨두고 왔던 관우가 위와 오의 협공에 무너지고 죽임을 당하자 다시 소의를 내세워 위나라 대신 오나라 정벌에 나서게 되고 유비의 결정적 실수로 말미암아 이릉에서 육손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고 급격히 쇠약해진 몸으로 백제성에 머무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성도의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당부하는데 아들 유선에 대해서
'그 대의 재능은 조비의 10배나 되오.반드시 나라를 안정시켜 큰 일을 이룩할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라.만약 재능이 없다면 그대 자신이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오.' 라며 후사를 부탁하고 향년 62세 223년에 생을 마감한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남긴 후사의 내용을 두고 그것은 유비의 계산에서 비롯된 철저한 유선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라 비난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것은 유비가 제갈량에게 표현한 최대의 신뢰일 뿐이다.
유비의 일생을 말하는 학자중에 유비의 일생을 부도덕과, 위선, 일천한 지적 수준으로 일관된 사람이라고 비난 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런 학자들은 유비의 야망과 꿈을 그리고 그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비록 유비는 제갈량을 얻기 전엔 배신과 배반으로 일관되는 삶을 살아가는 건 사실이다.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야망이 그들(원소,여포,조조)로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의 세력이 확실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다.
후에 제갈량의 도움으로 익주를 얻고 세력을 다졌을 때엔 그러한 행동을 보인적이 없다.
유비의 출발은 워낙에 빈약했고 원소나 조조같이 선대로 부터 내려오는 세력 기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이게 된것 뿐이지 유비의 장수로서의 능력도 그리 많이 떨어지지만은 않았다.
흔히들 유비를 말할때 조조와 비교하기도 한다.물론 유비는 조조에 비하면 형편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단점만큼 유비에게도 그에 필적하는 장점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다.
조조진영에도 아주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있다.그러나 유비의 관우나 장비,제갈량,조운,방통등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한 두단계씩 떨어지는 인물들이다.
게다가 조조는 자신의 세력기반이 빨리 형성되 천하에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 그의 수하에 인물들이 많이 모일수밖에 없었지만 유비는 그렇지 않다.
세력기반도 없었을 뿐더러 조조만큼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인물들을 끌어 모은 것이다.
유비의 남과 다른 매력을 빼놓고는 달리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할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형주에서 조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형주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고도 유비를 따른 예에서도 유비의 매력을 설명할수 있다.
유비의 사람 대하는 방법에서 그가 취한 행동을 철저한 계산 이란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학자들은 제갈량이나 관우등이 유비의 계산에 농락당했다는 의미이므로 제갈량 관우로 대변되는 촉의 진영의 인물들을 무시한 처사라 할 것이다.
오나라======================
엄준전-----------------------엄준은 자가 만재이고 팽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침잠하였고, <시경>,<서경>,삼례에 정통했으며, 또 <설문해자>를 좋아했다.
그는 난리를 피해 강동으로 가서 제갈근, 보즐과 이름을 나란히 하고 우정을 나누었다. 그는 성격이 소박하고 솔직하고 순후하여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완미한 도의로써 성실하게 충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움을 받아 진보하도록 하는데 뜻이 있었다. 장소가 엄준을 손권에게 추천하자, 손권은 그를 기도위 종사중랑으로 임명했다. 횡강장군 노숙이 죽었을 때, 손권은 엄준에게 노숙을 대신해 병사 1만 명을 지휘하여 육구에서 주둔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모두 엄준이 임명된 것을 기뻐했지만, 엄준은 몇 번이나 간곡하게 사양했다.
'저의 본분은 책 읽는 사람으로서 군사에는 익숙하지 못합니다. 재능이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면 허물과 후회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그의 말은 강개했으며 눈물을 흘리기조차 했다. 손권은 마침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엄준의 겸양함을 칭찬했다.
손권이 오왕이 되고 황제로 칭해졌을 무렵, 엄준은 일찍이 위위로 임명되어 사자로서 촉으로 갔다. 촉의 재상 제갈양은 그를 매우 아꼈다. 그는 봉록과 상을 축적하지 않고 모두 친척이나 친구, 인연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집은 항상 넉넉하지 못했다.
광릉의 유영은 엄준과 교분이 있었다. 유영은 한가롭게 집에 있으면서 학문에 정통했다. 손권은 그에 대한 평판을 듣고 초빙했지만, 질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그의 동생 유략이 영릉태수로 있다가 임지에서 죽자 유영은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손권은 이 일로 해서 그가 꾀병을 부렸음을 알게 되었고, 황급히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명령했다.
엄준 또한 유영에게 급히 달려가, 손권에게 사죄하도록 설득했다. 손권은 노여워하여 엄준을 면직시켰지만, 유영은 죄를 사면받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엄준은 상서령으로 임명됐고, 후에 죽었다.
엄준은 <효경전>, <조수론>을 지었으며, 또 배현, 장승과 함께 관중, 계로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 내용은 모두 세상에 전한다. 배현은 자가 언황이고 하비 사람이다. 학문과 품행이 있으며, 관직은 태중대부까지 올라갔다. 배현이 아들 배흠에게 제환공, 진문공, 진이공, 진혜공 네 사람의 우열에 관해 질문하자, 배흠은 자신이 생각한대로 대답하여 배현과 서로 반복하며 논쟁을 하였는데, 각자의 말에는 문채와 이치가 있었다.
배흠은 태자 손등과 사귀었으며, 손등은 그의 문필이 우미하다고 칭찬했다
고옹전------------------
고옹은 자가 원탄(元歎)이고 오군(吳郡) 오현(吳縣) 사람이다. 채백계(蔡伯階)는 삭방군(朔方郡)에서 일찍이 사람들의 원망능 피해오현으로 왔었는데, 고옹은 그로부터 거문고와 학문을 배웠다. 주와 군에서는 표를 올려 그를 추천했으며, 약관의 나이로 합비현의 장으로 임명됐고, 이후에 누현(婁縣)?곡아(曲阿)?상우(上虞)로 전임되었는데, 모든 곳에서 치적이 있었다. 손권은 회계태수를 겸임할 때, 군에는 오지않고 고옹을 군의 승(丞)으로 임명하여 태수의 일을 대신하도록 했다. 그가 도적들을 토벌하여 군의 경내를 안정되게 했으므로 관리와 백성들이 귀순했다. 몇 해 후, 손권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좌사마가 되었다. 손권은 오왕이 되자, 그를 거듭 승진시켜 대리봉상(大理奉常)으로 삼고, 상서령을 겸임하게 하고 양수향후(陽遂鄕侯)로 봉했다. 후(侯)로 봉해지고 관부로 돌아왔을 때, 집안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이후에 듣고는 놀랐다. 황무 4년(225), 고옹은 모친을 오현으로부터 맞이했다. 모친이 도착하자 손권이 와서 경하했으며, 직접 마당에서 모친에게 인사를 했다. 공경 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이후에 태자가 또 가서 축하했다. 고옹은 사람됨이 술을 마시지 않았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거지는 때에 맞게 했다. 손권은 일찍이 감탄하여 말했다. '고군(顧君)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말을 하면 반드시 핵심이 있다.' 연회 석상에서 술을 마시며 즐길 때도, 고옹의 주위 사람들은 술을 마시다 실수하면 고옹이 반드시 보게 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손권은 또 말했다. '고군이 자리에 있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게 하지 않는다.' 그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는 것은 이와 같았다. 이 해에 태상으로 바뀌어 임명되었고, 예릉후(醴陵侯)로 승진하여 봉해졌으며, 손소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고, 상서의 일을 총괄했다. 그가 무관과 문관을 선발하여 임용할 때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임무를 맡겼으며, 자신의 감정에 좌우되는 일이 없었다. 그는 항상 백성들 사이로 들어가 의견을 구했으며, 정치적 일에 마땅히 취해야 할 것이 있으면 비밀리에 보고했다. 만일 그 의견이 받아들여 쓰인다면 공을 손권에게 돌렸고, 쓰이지 않았다면 끝까지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손권은 이 때문에 그를 중시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견을 서술할 때에는 말이나 안색은 비록 공손할지라도 고집하는 주장은 곧았다. 손권은 일찍이 조정의 득실에 관해 자문한 일이 있駭? 장소는 자신이 수집한 의견에 근거하여 진술하였는데, 법령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었고, 형벌은 약간 무거우므로 응당 삭감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손권은 묵묵히 있다가 고옹쪽으로 머리를 돌려 바라보고 말했다. '그대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시오?' 고옹이 대답했다. '신이 들은 것 또한 장소가 진술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손권은 재판 법령에 관해 상의하고 형벌을 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여일(呂壹)과 진박(秦博)을 중서(中書)로 임명하여 여러 관청과 주와 군의 문서를 감독하도록 했다. 여일 등은 이 때문에 점점 위세와 복을 누리게 되었고 마침내 술을 파는 이권과 세금 징수의 권한을 휘둘렀으며, 다른 사람의 죄악을 적발함에 있어 작은 일조차도 반드시 보고하였다. 게다가 중대한 사안도 추악하게 했으며 대신들을 비방하고 무고한 자들을 참언했다. 고옹 등은 모두 그들에게 고발당하여 견책당했다. 후에 여일의 간악한 진상이 드러나 정위에 구속되었다. 고옹은 가서 죄상을 심의했고, 여일은 죄인의 신분으로 고옹을 보았다. 고옹은 화사한 안책으로 그 사안에 대해 질문은 했으며, 옥을 나오면서 여일에게 말했다. '그대의 마음속에는 말하고 싶은 것이 없소?' 여일은 머리를 조아릴 뿐 말하지 않았다. 당시 상서랑 회서(懷敍)가 여일에게 면전에서 욕을 했는데, 고옹이 회서를 꾸짖어 말했다. '관부에는 정해진 법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하시오!' 고옹은 승상으로 임명된 지 19년, 76세의 나이로 적오 6년(243)에 세상을 떠났다. 당초 그의 질병이 가벼웠을 때, 손권은 의원 조천(趙泉)에 명하여 진찰하도록 하였으며, 그의 막내 아들 고제(顧濟)를 기도위로 임명했다. 고옹은 이 일을 듣고 슬프게 말했다. '조천은 생사를 식별하는데 탁월하다. 내가 틀림없이 일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황상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고제가 관직에 오르는 것을 보도록 한 것이다.'
손권은 무늬없는 옷을 입고 조문하러 왔으며, 시호를 숙후(肅侯)라고 했다. 맏아들 고소(顧邵)가 요절했고, 둘째 아들 고유(顧裕)는 질병이 심했으므로 막내 아들 고제가 후사를 이었다. 고제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대가 끊겼다. 영안(永安) 원년(258)에 조서가 있었다. 이전의 승상 고옹은 덕망이 지극하고 충성스럽고 어질었고, 예법에 따라 나라를 보좌하였는데, 그의 뒤를 계승할 자가 끊겼기 때문에 짐은 이것을 매우 연민하고 있다. 고옹의 차남 고유에게 작위를 계승하도록 하여 예릉후로 임명했고, 고옹의 과거 공훈을 빛내도록 하라. 고소는 자가 효칙(孝則)이고 경전을 광범위하게 읽었으며 인물 품명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숙부 육적(陸績)과 함께 나란히 이름이 있었다. 육손?장돈(張敦)?복정(卜靜) 등은 모두 그만 못했다. 주나 군의 위대한 현인이나 사방의 인사들은 고소와 왕래하며 서로 만났는데, 어떤 사람은 의론을 말하고 떠났고, 어떤 사람은 두터운 정을 맺고 헤어졌으므로 명성이 사방으로 퍼졌으며, 먼 곳이든 가까운 곳이든 간에 모두가 그를 칭찬했다. 손권은 손책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27세에 집안을 일으키고 예장태수로 임명됐다. 그는 수레에서 내려 이전의 현인 서유자(徐孺子)의 묘에 제사지내고, 그의 후예들을 우대하였다. 음란한 제사나 예의가 아닌 제사는 금했다. 지위가 낮은 관리 중에 자질이 뛰어난 자가 있으면 학문을 하도록 시키고, 그 중에서 성적이 좋은 자를 뽑아 발탁하여 중요한 직책에 배속시켰다. 선행을 들어 가르쳤으므로 정치 교화는 광범위하게 시행되었다. 당초, 전당(錢唐)의 정서는 병졸 출신이고, 양선(陽羨)의 장병(張秉)은 서민 태생이며, 오정(烏程)과 운양(雲陽)의 은례(殷禮)는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났는데, 고소는 이들의 모두 발탁하여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위해 영예를 세웠다. 장병이 중대한 상사(부모의 죽음을 말함)를 만났을 때에는 직접 상복을 입고 마대를 맺다. 고소가 예장으로 가려고 할 때, 마침 장병에게 질병이 있어 전송하러 나오지 못했다. 당시 전송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지만, 고소는 빈객들에게 사과하며 말했다. '장중절(張仲節)에게 질병이 있어, 와서 이별할 수 없음을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를 만날 수 없음을 유감스러워 하니, 잠시 돌아가 그와 이별을 할테니 여러분들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가 아래의 현사들에게 마음을 기울여 곳곳마다 은혜를 편 겻은 모두 이와 같은 종류였다. 정서의 관직은 전군랑장까지 승진했으며, 장병은 운양태수가 되었고, 은례는 영릉태수가 되었으며, 오찬은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고소에게는 인물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고소는 관직에 있은 지 5년만에 사망했다. 아들로는 고담(顧譚)과 고승(顧承)이 있었다. 고담은 자가 자묵(子?)이고, 약관의 나이에 제각각 등과 태자의 네 명의 친구가 되었으며, 중서자에서 보정도위(補正都慰)로 전임되었다. 적오 연간에는, 제갈각을 대신하여 좌절도로 임명됐다. 고담은 항상 문서를 살펴볼 때마다 일찍이 주판을 사용하여 계산한 적이 없고, 단지 손가락을 굽혀 마음속으로 헤아려서 의심이 나서나 잘못된 점을 모두 찾아냈다. 수하의 관리들은 이 일로 인해 그에게 복종했다. 그에게 봉거도위가 더해졌다. 설종(薛綜)이 선조상서(選曺上書)로 임명되자, 고담에게 강력히 사양하고 말했다. '고담은 생각이 치밀하고 행동이 주도면밀하며 도의에 관통하고 미묘한 감정에 밝으며 재능은 다른 사람을 비출 수 있으며, 덕행은 여러 사람의 소망을 허락하고 있으므로, 실재로 어리석은 신이 뛰어넘어 앞에 있을 수 있는바가 아닙니다.'
동습전-----------------동습은 자가 원대이고, 회계군 여요 사람이다. 신장은 8척이며, 완력은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손책이 회계군으로 들어왔을때, 동습은 고천정에서 맞이했다. 손책은 그를 보고 위대하다고 느꼈으므로, 관부에 도착하여 그를 문하적조로 임명했다. 당시 산음에서는 오랫동안 도적 노릇을 한 황용라와 주발이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았는데, 손책이 직접 토벌하러 나갔다. 동습은 혼자 황용라와 주발의 머리를 베었으므로 돌아와서 별부사마로 임명되고 병사 수천 명을 받았으며, 양무도위로 승진했다. 손책을 수행하여 환성을 공격하러 갔으며, 또 심양에서 유훈을 토벌했고, 강하에서 황조를 토벌했다. 손책이 죽은 후, 손권은 어린 나이로 막 정치를 통솔하게 되었다. 태비는 그를 걱정하여 장소와 동습 등을 불러 강동의 보존 여부를 물었다. 동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강동의 지세는 견고한 산천이 있고 토역장군의 은덕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습니다. 토로장군이 기업을 계승하여 크고 작은 관원들은 임명을 받들고 있습니다. 장소는 여러가지 일을 관장하고, 저 등은 수족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지세가 유리하고 사람들이 화합하고 있는 때인 것입니다. 만에 하나도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이 장대하다고 생각했다. 파양의 적 팽호 등이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았다. 동습은 능통, 보즐, 장흠과 함께 각기 별도로 나누어 토벌했다. 동습이 이르는 곳은 언제나 격파되었으므로 팽호 등은 멀리서 그의 깃발을 보자마자 흩어져 달아났다. 열흘만에 전부 평정되었다. 동습은 위월교위로 임명되고, 편장군으로 승진했다. 건안 13년(208), 손권이 황조를 토벌했다. 황조는 두 척의 몽충을 면구에 비껴 놓고 지켰으며, 종려나무의 커다란 새기줄로 돌을 묶어 배를 고정시켰따. 배 위에는 병사가 1천 명이 있었고, 화살을 동시에 발사하여 날으는 화살이 비내리듯하였으므로 군대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동습은 능통과 함께 선봉대가 되었으며, 각자 죽음을 무릅쓴 1백 명의 병사를 인솔하였는데, 사람들은 두 겹의 갑옷을 입고 커다란 배를 타고 몽충속으로 돌진했다. 동습이 직접 칼로 두 가닥의 새기줄을 끊어 몽충이 표류하도록 하였으므로 대군은 전진하게 되었다. 황조는 곧 성문을 열고 달아났지만 병사들이 추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다음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손권은 술잔을 들어 동습에게 권하며 말했다. '오늘의 연회는 새기줄을 끊은 공로를 축하하는 자리요.' 조조가 유수를 침범하자, 동습은 손권을 수행하여 달려갔다. 손권은 동습에게 누선 다섯 척을 이끌고 유수구로 가도록 했다. 밤에 갑자기 폭풍이 몰려와서 누선 다섯 척을 전복시켰으며, 수하의 사람들은 큰 배로 뿔뿔이 흩어져 동습에게 탈출할 것을 요구했다. 동습은 진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장군의 임무를 받아 이곳에서 적을 방비하고 있는데, 어떻게 버리고 떠날 수 있소? 감히 또 이런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베어버리겠다!' 그래서 감히 요구하는 자가 없었다. 그날 밤, 배는 파괴되었고, 동습은 죽었다. 손권은 상복으로 바꿔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며, 매우 풍부한 물품을 공급해 주었다.
손책전-----------------손책은 자가 백부(伯符)이다. 손견이 의병을 처음 일으켰을 때,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현으로 이주했다. 그가 주유(周瑜)와 서로 우정을 맺고 사대부들을 규합하자, 장강과 회수 사이의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향했다. 손책은 손견이 죽은 후, 유해를 갖고 돌아와 곡아에 안장했다. 장례가 끝나자 곧 장강을 건너 강도에 거주했다. 서주목 도겸(陶謙)은 손책을 매우 꺼려했다. 손책의 외숙 오경이 당시 단양의 태수로 있었으므로, 손책은 곧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 곡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여범, 손하와 함께 오경에게 의지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수백명의 병사를 모집했다. 흥평 원년(194), 그는 원술을 따랐다. 원술은 그를 특별히 중시하여 손견의 부대를 그에게 돌려주었다. 태부 마일제는 부절을 갖고서 관동을 위로하고, 수춘에서 예의로서 손책을 초빙하고 표를 올려 회의교위로 임명했다. 원술의 대장 교유와 장훈은 모두 마음을 기울여 손책을 존경했다. 원술은 항상 감탄하며 말했다. '만일 내 자식이 손랑(孫郞)과 같다면 죽어도 또 어떤 한이 있을까!' 손책의 기병이 죄를 짓고 원술의 진영 속으로 달아나 마구간에 숨었다. 손책은 사람을 시켜 쫓아가서 그를 죽이도록 했다. 그는 일을 끝낸 후 원술을 찾아가 사죄했다. 원술이 말했다. '병사들은 반란을 좋아합니다. 우리들은 당연히 함께 그들을 증오해야만 하거늘. 무엇 때문에 사죄합니까?' 이로부터 군 안에서는 점점 더 손책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원술은 처음에는 손책과 약속하여 구강(九江)태수로 임명하였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단양의 진기로 바꾸었다. 이후에 원술은 서주를 공격하려고 여강태수 육강에게 쌀 3만섬을 요구했다. 육강이 주지 않았으므로 원술은 매우 노여워했다. 손책이 이전에 육강을 방문했었지만, 육강은 만나주지도 않고 주부로 하여금 그를 접대하도록 했다. 손책은 항상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 원술은 손책을 파견하여 육강을 공격하도록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진기를 임용했지만, 항상 원래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함을 한스러워 했습니다. 지금 만일 육강을 잡는다면, 여강은 平ㅐ막?그대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손책은 육강을 공격하여 제거했지만, 원술이 또 그의 옛날 관리였던 유훈을 그곳의 태수로 임명했으므로 손책은 더욱더 실망했다. 이 이전에 유요(劉繇)가 양주자사로 임명되었는데, 양주의 옛날 관소는 수춘에 있었다. 수춘은 원술이 이미 점거하고 있는 곳이었으므로, 유요는 곧 장강을 건너 곡아를 관소로 삼았다. 당시 오경은 여전히 단양에 있었으며, 손책의 사촌형 손분 또한 단양도위로 있었는데, 유요가 무력으로 이들을 모두 쫓아냈다. 오경과 손분은 물러나 역양에서 살았다. 유요는 번능과 우미를 파견하여 동쪽의 횡강진에 주둔하도록 하고 장영은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에게 항거하도록 했다. 원술은 자신이 옛날에 썼던 관리, 낭야의 혜구를 양주자사로 임명하고, 다시 오경을 독군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들을 인솔하여 장영 등을 공격하도록 했지만, 몇 해가 지나도록 무찌르지 못했다. 손책은 곧 원술을 설득시켜 오경 등을 도와 강동을 평정시키기를 요구했다. 원술은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折衝校尉)로 임명했고, 진구장군을 대신하게 했다. 병사는 천여 명이 되었고, 말은 수십필이 되었으며, 빈객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명이었다. 역양에 도착한 후에는 병사의 수가 5, 6천명이나 되었다. 손책은 어머니를 먼저 곡아에서 역양으로 옮겼으며, 다시 부릉으로 옮기고 장강을 건너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무찔렀는데 감히 그의 예봉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그리고 군령이 정돈되고 엄숙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상당히 받들었다. 손책의 사람됨은 용모가 수려하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성격은 활달하고 다른사람의 의견을 잘 듣고 사람을 기용하는데 탁월했다. 때문에 사인과 백성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기꺼이 그를 위해서 죽었다.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수들도 모두 성곽을 버리고 달아났다. 오나라 사람 엄백호 등은 각기 무리 만여 명씩을 모아 도처에 주둔했다. 오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격파하려고 즉시 회계에 도착했다. 손책이 이렇게 말했다. '엄백호 등 일군의 강도들은 큰 뜻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을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너 회계와 동야를 함락시키고 곧 엄백호 등을 공격해 격파시켰다. 손책은 이 일대의 지방 관원을 교체시키고, 손책 자신은 회계태수를 겸임했으며, 또 오경을 단양태수로 삼고, 손분을 예장태수로 삼았다. 예장을 나누어 여릉군으로 삼구 손분의 동생 손보를 여릉태수로 임명했으며, 단양의 주치(朱治)를 오군태수로 임명했다. 팽성의 장소(張昭), 광릉의 장굉(張紘), 진송, 진단 등은 손책의 주요한 참모가 됐다. 이때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였으므로, 손책은 편지를 써서 질책하고 그와의 관계를 끊었다. 조조는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임명하고 오후(吳候)로 봉했다. 그후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과 대장 장훈 등은 그들의 부하를 이끌고 손책에게 나아가려고 했는데, 여강태수 유훈이 공격하여 전부 포로로 잡고 그들의 진귀한 보물을 탈취해 돌아갔다. 손책은 이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유훈과 좋은 동맹관계를 맺었다. 유훈이 막 원술의 무리를 얻었고, 당시 예장의 상료가 종교가 같은 백성 1만여명과 강동에 있었으므로 손책은 유훈에게 그들을 공격하여 취하도록 권했다. 유훈이 출발한 후, 손책은 날랜 부대를 파견하여 밤낮으로 습격하여 여강을 점령하도록 했다. 유훈의 무리들은 전부 항복했고, 유훈은 수하의 부하 수백명과 조조에게 귀순했다. 이때 원소가 막 강성해졌으므로, 손책이 강동을 병합했지만, 조조의 역량은 뜻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잠시 손책을 위로하기 위해 조조는 동생의 딸을 손책의 작은 동생 손광(孫匡)에게 시집보내고, 또 아들 조장(=조창)을 위해 손분의 딸을 시집오게 하고, 손책의 동생 손권과 손익을 모두 예로써 초빙하였으며, 또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로 추천했다. 건안 5년(200), 조조와 원소가 관도에게 교전할 때, 손책은 은밀히 허도를 습격하여 한헌제(漢獻帝)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는 비밀리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장수들에게도 임무를 분담시켰다. 그런데 그는 출발하기도 전에 옛날 오군태수였던 허공(許貢)의 문객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보다 앞서 손책이 허공을 죽였고, 허공의 작은 아들과 문객이 장강가로 달아나 숨었었다. 손책은 혼자 말을 달려 나가 결국 허공의 문객과 마주쳤는데, 그 문객이 손책을 공격하여 상해를 입혔던 것이다. 손책의 상처는 매우 심했다. 그는 장소들을 오도록 청하고는 말했다. '중원지역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어 오와 월의 무리와 삼강(三江)의 견고함에 의지한다면,충분히 성패(成敗)를 볼 수 있을 것이오. 여러분들은 나의 동생을 잘 도와주십시오!' 손권을 불러 인수를 차도록 하고, 이렇게 말했다. '강동의 병력을 이끌어 양쪽의 군대가 대치하는 사이에 기회를 보아 결단을 내려 천하의 영웅들과 다투며 충돌하는 것에 관한한 그대는 나만 못하지만, 현인을 선발하고 능역있는 자를 임용하며, 그들 각각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을 지키는 것은 내가 그대만 못하다.' 밤이 되자 죽었는데, 그 당시 26세였다. 손권은 제(帝)를 칭한 후, 손책에게 장사환왕(長沙桓王)의 시호를 추증했고, 아들 손소를 오후로 봉했다가 나중에 상우후(上虞候)라고 고쳐 봉했다. 손소가 죽자, 아들 손봉이 뒤를 이었다. 손호(孫皓)시대에 손봉이 응당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뜬소문이 있었으므로 손봉은 주살되었다
반장전----------------반장은 자가 문규이고 동군 발간 사람이다. 손권이 양선현의 장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가 손권을 따랐다. 하지만 성정이 호탕하고 술을 좋아하였다. 그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외상술을 즐겼다. 빚쟁이가 대문까지 쫓아오면 항상 이후에 부귀해지면 다시 오라고 말했다. 손권은 그를 기이하게 여겨 아꼈고, 그에게 병사를 모집하도록 하여 백여 명을 얻게 되자, 부장으로 삼았다. 산월의 적을 토벌하여 공로를 세웠으므로 별부사마에 임명됐다. 이후에 오군의 큰 저자에서 침입자를 죽이자, 이로부터 도적은 단절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이름이 났으며 예장군 서안현의 장으로 승진했다. 유표가 형주에 있을 때, 백성들은 여러 차례 그들의 침략을 당했다. 반장이 일을 맡은 이후부터 침략자들은 경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웃하고 있는 현인 건창에서 강도들의 폭도가 일어나자, 전임되어 건창을 다스리게 되었고, 무맹교위를 더했다. 그는 사악한 자를 토벌하여 다스려 1개월 만에 전부 평정시켰다. 그리고 흩어져 떠도는 병사들을 소집하여 8백 명을 얻었으며, 그들을 데리고 건업으로 돌아왔다. 합비 싸움에서 장료가 급습했을 때, 장수들은 무방비 상태였고, 진무는 분투하다 죽었으며, 송겸이나 서성은 모두 후퇴하였다. 반장은 후방에 있었지만,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말을 비껴 송겸과 서성의 병사들 중 달아나는 두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모두 돌아와서 싸웠다. 손권은 이 점을 특히 칭찬하여 그에게 편장군을 제수했다. 그래서 백 명의 교관을 통솔하여 반주에 주둔했다. 손권이 관우를 정벌할 때, 반장은 주연과 관우가 달아나는 길을 차단시켰다. 그는 임저에 도착하여 협석에 주둔했다. 반장의 부하 사마 마堧?관우와 관우의 아들 관평과 도독 조루 등을 붙잡았다. 손권은 의도군의 무현과 자귀현 두 현을 나누어 고릉군으로 만들고, 반장을 그곳의 태수로 임명했으며, 진위장군으로 삼았고, 율양후로 봉했다. 감녕이 죽자, 또 감녕의 군대를 주어 합치도록 했다. 유비가 이릉으로 출병했을 때는, 반장과 육손이 힘을 합쳐 대항했으며, 반장의 부하가 유비의 호군 풍습 등의 목을 베었고, 죽거나 부상당한 자는 매우 많았다. 반장은 평북장군, 양양태수로 임명됐다. 위나라 장수 하후상 등이 남군을 포위하고, 선봉 부대 3만 명을 나누어 부교를 만들고 백리주를 건너왔다. 제갈근과 양찬이 함께 병사를 모아 구원하러 달려갔지만, 그 사태에 대처할 바를 몰랐고, 위나라 병사들은 날마다 끊임없이 건너고 있었다. 반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나라의 기세는 방금 흥성하기 시작했고, 강물은 또 얕으므로 그들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병사들을 인솔하여 위로부터 상류로 50리 되는 곳까지 가서 갈대를 수백만 개 베어 커다란 떼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 불을 놓아 부교를 전소시키려 했다. 떼 만드는 작업이 막 끝나 강물이 가득 찬 것을 보고 띄우려고 할 때에 하후상이 이것을 알고 병사를 인솔하여 물러났다. 반장은 말에 올라 육구까지 내려가서 막았다. 손권은 제위에 오른 후, 반장을 우장군에 제수했다. 반장은 사람됨이 난폭하고 사나웠으며, 금령은 매우 숙연했다. 그는 공업 세우기를 좋아하였으며, 통솔하는 군대는 수천 명에 불과했지만 이르는 곳마다 언제나 만 명이나 되는 것 같았다. 정벌이 멈추었을 때는, 즉시 군대 시장을 세웠으며, 다른 군에 없는 것은 모두 반장의 시장에서 충족시켰다. 그러나 그의 성격은 사치스러웠고, 이런 경향은 만년에 더욱 심해져 의복이나 물건은 그의 신분을 넘는 것을 사용했다. 관리들 가운데 부유한 자가 있으면 그를 죽이고 재물을 빼앗을 때도 있었다. 법령을 받들지 않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감시하는 자가 이 일을 들어 상주했지만, 손권은 그의 공을 아껴 항상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반장은 가화 3년(234)년에 죽었다. 아들 반평은 품행이 좋지 않았으므로 회계군으로 쫓겨났다. 반장의 처는 건업에서 살았는데, 밭과 가옥을 하사받았고, 또 소작인 50호의 부세를 면제받았다
주유전----------------주유는 자가 공근이며 여강군 서현 사람이다. 당조부 주경과 주경의 아들 주충은 모두 한나라 태위를 지냈다. 부친 주이는 낙양현의 령을 지냈다. 주유는 건강하고 자태와 용모가 뛰어났다.
처음에 손견이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할 때, 그는 집을 서현으로 옮겼다. 손견의 아들 손책은 주유와 나이가 같았으며, 두 사람의 우정은 남달랐다. 주유는 길 남쪽의 큰 저택을 손책에게 주고 방으로 들어가 그의 모친에게 배례했으며, 서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융통하며 돕고 살았다. 주유의 당부 주상이 단양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그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마침 손책이 역양까지 있었으므로 급히 편지를 써서 주유에게 알렸다. 주유는 병사를 인솔하여 손책을 맞이했다. 손책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를 얻었으니, 전쟁은 순조롭게 될 것이오." 주유는 그래서 손책을 따라 횡강과 당리를 공격하여 모두 함락시켰다. 그리고 또 강을 건너 말릉을 공격하고, 작융과 설례를 격파시켰으며, 방향을 돌려 호숙과 강승을 공격하고 곡아로 진입하자 유요는 달아났으며, 손책의 병사는 이미 수만 명이 되었다. 그래서 손책은 주유에게 말했다. "나는 이 병력이면 오국과 회계군을 취하고 산월을 평정하기에 충분하오. 그대는 돌아가서 단양을 지키시오." 주유는 돌아왔다. 오래지 않아, 원술이 주상을 대신할 태수로 사촌 동생 원윤을 보냈으므로 주유는 주상과 함께 수춘으로 돌아왔다. 원술은 주유를 부장으로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유는 원술에게는 끝내 성취할 것이 없음을 보았기 때문에 거소현의 장이 되기를 구하여서 길을 빌려 강동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원술은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주유는 거소에서 오로 돌아왔다. 이 해가 건안 3년(198)이다. 손책은 직접 주유를 영접하고 아장을 수여하고 즉시 병사 2천명과 기마 50필을 주었다. 주유는 당시 24세였고, 오군 사람들은 모두 그를 주랑이라고 불렀다.
주유의 은덕과 신의는 여강에서 빛났다. 손책은 그를 지방으로 내보내 우저를 지키도록 하고, 후에 춘곡현의 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오래지 않아, 손책이 형주를 취하려고 할때, 주유를 중호군으로 임명하고 강하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주유는 손책을 따라 환현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교공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았는데, 모두 절색이었다. 손책 자신은 대교를 아내로 맞이했고, 주유는 소교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 주유는 심양으로 진격하여 유훈을 격파시켰으며, 강하를 토벌하고 예장과 여릉으로 돌아와 평정하고 파구에 남아서 지켰다. 5년(200)에 손책이 죽자, 손권이 일을 통솔했다. 주유는 병사를 이끌고 조상하러 갔다가 오에 머물러 중호군으로써 장사 장소와 함께 모든 일을 관장했다. 11년(206), 그는 손유 등을 인솔하여 마둔과 보둔 두 주둔지를 토벌하고, 그곳의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나무에 매달았으며, 1만여 명을 생포해 군사를 돌려 궁정을 지켰다. 강하태수 황조가 부장 등룡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이끌고 시상으로 진입하도록 했다. 주유는 추격하여 토벌했으며, 등룡을 생포해 오군으로 보냈다.
13년(209) 봄, 손권이 강하를 토벌하고, 주유를 전부대독으로 임명했다. 이 해 9월,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자, 유종은 수하의 사람들을 들어 투항했다. 조조는 그의 수군을 얻게 되었으며, 그 결과 수병과 보병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오의 장수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두려워 했다. 손권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장군에게 있어서 유리한 형세로 조조를 대항할 수있습니다. 유표는 수군을 훈련시켰고 몽충이나 투함이 수천 대 인데, 조조가 이것을 모두 포획하여 장강가에 늘어놓고 아울러 보병도 움직여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내려온다면, 이때는 장강이 위험하게 되고, 이미 우리와 공동으로 차지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쌍堧?세력은 현저하게 차이가 나므로 또 논할 수없습니다. 가장 좋은것은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주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 장군은 신명스런 무위와 웅대한 재략을 갖고 있고, 겸하여 아버지와 형의 위세이 기대어 강동을 할거하고 수천 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병사는 정예이고 식량은 풍족하며 영웅들은 공업을 이루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웅당 천하를 횡행하며 한왕조를 위해 잔폭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할 때입니다. 게다가 조조는 직접 사지로 보내져왔는데,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을 위해 헤아려보기를 요청합니다. 지금 북방의 영토를 이미 안정시켰고 조조에게 내부의 근심이 없어 시일을 늘려 오랫동안 전쟁터로 와서 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와 수면 위에서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지금 북쪽 땅은 아직 평안하지 못하고, 게다가 마초와한수가 오히려 동관 서쪽에 있으면서 조조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을 버리고 수군에 기대어 오나 월과 다투는 것은 본래 중원에서는 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또 현재는 날씨가 추워 말에게 먹일 꼴이 없고, 중원의 병사들에게 멀리 강호의 땅을 건너도록 하였으므로 물과 땅에 익숙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는 용병의 근심거리입니다.그러나 조조는 함부러 행동했습니다. 장군께서 조조를 잡으려고 한다면, 오늘이 마땅합니다. 저는 정예병사 3만 명을 받아서 하구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원합니다. 장군을 위해 조조를 무찌를 것을 확신합니다." 손권이 말했다. "사악한 적이 한왕실을 페하고 스스로 황제로 일어서러고 한 것은 오래되었소. 단지 원씨 두명, 여포, 유표와 남나을 꺼러했을 뿐이요. 지금 몇몇 영웅은 이미 소멸되었고, 오직 나만 여전히 남아있소. 나는 사악한 적과 양립할 수 없는 형세요. 그대가 당연히 공격해야 한다고 한 것은 나의 생각과 매우 부합하는 것이며,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오." 이때 유비는 조조에게 격파되어 병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려고 생각하였는데, 당양에서 노숙과 만나 함께 상의하고 계획하여 나아가 하구에 주둔하고는 제갈양을 파견하여 손권을 알현하도록 했다. 손궈은 곧 주유와 정보 등을 파견하여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두 군대는 적벽에서 만났다. 당시 조조의 병사들은 이미 질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처음 한 차례 싸움에서 조조의 군대는 패하여 장강 북쪽에 주둔했다. 주유 등은 남쪽 해안가에 있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말했다. "지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기 때문에 오랜 시간 싸우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조조 군대의 배는 앞뒤가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불을 질러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유는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 또 날랜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함께 전진했다. 조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여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군사를 돌려 남군을 지켰다.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또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성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돌아갔다. 주유와정보는 또 남군으로 전진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며 포위해 들어갔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대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손권은 주유를 편장군으로 제수하고, 남군태수를 겸임하도록 했다. 하준·한창·유양·주릉을 그의 봉읍으로 삼게 하고, 강릉에 주둔하여 지키도록했다. 유비는 좌장군의 신분으로 형주목을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 유비가 경까지 와서 손권을 알현했을 때, 주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유비는 용맹하여 영웅다운 자태를 갖고 있으며, 관우와 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놓고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미녀와 진귀한 완구를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우와 장비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같은 자로 하여금 그들을 지휘하여 싸우게 한다면, 대사는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그들이 기반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고, 이 세 사람을 모아 함께 변방 땅에 있도록 한다면, 아마 교룡이 구름과 비를 얻어서 끝내 연못 속의 물건이 안되는 것과 같이 될 것입니다.
손권은 조조가 북방에 있기 때문에 응당 영웅들을 널리 촙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유비를 끝까지 제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유장은 익주목이 임명되었는데, 밖으로는 장로의 약탈과 침략이 있었다. 주유는 경으로 가서 손권을 알현하고 말했다. "지금 조조는 방금 좌절과 고통을 당하여 마침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므로 아직은 장군과 병사를 이어서 서로 싸우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저는분위장군과 함께 촉을 취하러 나가기를 원합니다. 촉을 얻고 장로를 병합한 후에 분위장군을 남겨 그 땅을 단단히 지키도록 한다면, 마초와 동맹관계를 맺을 것입니다. 저는 돌아와 장군과 함께 양양을 점거하여 조조를 추격한다면, 북방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손권은 주유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주유는 강릉으로 돌아와 행장준비를 하고 파구를 지날 때 병사했다. 당시 그는 36세였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하였는데, 주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로 가서 맞이했으며, 모든 비용을 일체 공급했다. 후에 명령을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와 정보의 집안에 있는 손님들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묻지 말라."
당초 주유는 손책에게 좋은 친구로 대우받았고, 태비 또한 손권으로 하여금 형의 예로써 받들도록 했다. 이때 손권의 직위는 장군이었고, 그의 부장들과 빈객들의 그에 대한 예절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주유만은 유독 일찍부터 존경을 다하여 신하로써의 예절을 지켰다. 주유는 성격이 너그럽고 넓어서 대체로 인심을 얻었는데, 오직 정보와는 화해롭지 못했다.
주유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정통하였다. 비록 술을 많이 마신 후일지라도 연주한 음악에 틀린 부분이 있으면 주유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알아내면 반드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가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곡에 잘못된 점이 있으면, 주랑이 돌아본다.'
주유는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의 배필은 태자 손등이었다. 아들 주순은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도위로 제수되었고 주유의 풍모가 있었는데, 요절했다. 주순의 동생 주윤은 처음에 흥업도위로 임명되었고 종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며, 병사 1천 명을 인솔하여 공안에 주둔했다. 황룡원년(229), 도향후로 봉해졌으며, 후에 죄를 범하여 여릉군으로 옮겼다. 적오 2년(239), 제갈근·보즐이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아들 주윤은 지나친 칭찬을 받아 장군으로 봉해짐을 받았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두터운 대우를 받을 수 없을때는 공을 세우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방종하고 사용에 집착하여 매우 빨리 죄를지어 처벌을 초대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주유는 과거 총애와 신임을 받았고, 안으로 들어오면 심복이 되었고, 밖으로 나가면 보좌하는 장수가 되었으며, 명을 받아 출정하면 죽음을 보고 돌아오는 것처럼 했습니다. 때문에 오림(적벽)에서 조조를 패배시키고, 영도(강릉)에서 조인을 도망치게하여 국가의 위험과 은덕을 떨쳐 전국이 진동하였으며 우매한 만형 중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주의 방숙, 한의 한신인 영포일지라도 진실로 그를 뛰어 넘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적군을 꺾고 국가의 어려움을 막아낸 신하로서 옛날부터 제왕들에게 귀하게 여겨지고 중요시되지 않은자는 없었습니다. 때문에 한고조는 작위를 봉하는 서약서에서 말하기를, '설사 황하가 허리띠처럼 되고, 태산이 마모된 돌처럼 되더라도 그들의 봉국은 영원히 존재하도록 하여 후배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아울러 붉은 글로써 맹서 의식을 융숭히 하고, 종묘속에 넣어 두고 영원히 전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공신의 후배들로 하여금 대대로 계승하여 자손뿐만 아니라 더욱 먼 후대까지도 관심을 기울려 신하의 공덕에 보답하고 표창하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권하고 경계하여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죽어도 후회가 없도록하려는 것입니다. 하물며 주유가 죽은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 주윤을 강등시켜 평민이 되게 하였으니, 더욱더 슬픕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고대의 일을 고찰하여 정사를 영명하게 처리하며, 제후국을 일으키고 후계자를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므로 주윤을 위해 청하니, 그의 죄를 사면시켜 주시고 병사들을 돌려주고 작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아침을 잘못알린 닭으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울 수 있도록 하고, 죄지은 신하도 이후에 효락을 펼 수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 손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심복이 되어 이전에공을 세우고 나의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한 자 중에는 주공근이 있었는데, 확실히 잊지 못하오, 옛날 주윤이 나이가 어렸으며, 처음에는 공로가 없었는데도 정예 병사를 받아 지휘하고 왕후 장군의 작위로 봉해진 것은 주공근을 생각하여 주윤에게 미쳤던 것이오. 그런데 주윤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주색에 빠져 스스로 방자하였으며, 앞뒤로 몇 차례 말하여 깨우치게 하려고 하였지만, 일찍이 고친 일이 없었소. 나와 주공근과의 정의는 당신들 두 사람과의 것과 똑같은데, 주윤이 성취하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멈춰 있겠소? 주윤의 죄악을 구명하여 즉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그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여 스스로 알도록 하려는 것이오. 지금 당신들 두 사람이 한고조의 황하와 태산의 맹서를 간절히 인용하니, 나는 부끄럽소. 비록 나의 덕행은 한고조와 같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오. 주공근의 자식이고 두 사람이 중간에 있으니, 고치도록 할 수 있다면 또한 무슨 근심이 있겠소!" 제갈근과 보즐은 누차 표를 올렸고, 주연과 전종 또한 함께 진술하여 요청하였으므로 손권은 비로서 이를 허락했다. 이때 주유는 병으로 죽었다.
주유의 조카 주준 역시 주유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편장군으로 임명되었고, 관리와 병사 1천 명을 인솔하게 되었다. 주준이 죽자, 전종은 표를 올려 주준의 아들 주호를 장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손권이 말했다. "이전에 조조를 달아나게 하고 형주를 개척한 것은 모두 주공근이 한일이니, 영원히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주준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때 주호를 임용하려고 했지만, 주호의 품성과 행실이 음험하다는 것을 들었다. 그를 관리로 임명하면 화란을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주공근을생각하고 있는 것이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감녕전----------------감녕은 자가 흥패이고 파군 임강 사람이다.그는 어릴적부터 기개가 있었고 유협을 좋아하였으며,무뢰한을 모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들은 무리를 이뤄 서로 따랐고,활과 화살을 지니고 깃털을 등에 꽃고 방울을 허리에 찼다. 백성들은 방울 소리를 듣고 즉시 감녕임을 알았다. 사람들과 만나거나 그 성의 지방 관원과 만날 경우에,융숭하게 접대하면 곧 그와 즐겁게 교재했지만,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수하에 있는 자들을 풀어 그의 재물을 빼앗았다. 그래서 지방 관원 중에는 그의 박해를 받아 재산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게 되었다. 이런 행위는 20여 년 간 지속되었다.
이후에 그는 이런 행위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으며,제자백가 책을 약간 읽고서 곧 유표에게로 가서 의탁했다. 그래서 남양에서 살았지만,나아가 임용되지는 않았다. 후에 그는 몸을 돌려 황조에게 의탁했다. 황조 또한 보통 사람으로서 그를 공양했다. 그래서 감녕은 오나라로 귀순했다. 주유와 여몽은 모두 그를 천거했다. 손권은 그에게 옛 신하와 같이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감녕이 계책을 진술하며 말했다. '지금 한나라는 매일매일 쇠미해져 가고 있고,조조는 더욱더 교만해져 끝내는 제위를 찬탈하려고 할 것입니다. 남쪽의 형주 땅은 산세가 편리하고 강과 하천의 흐름이 원활하니,진실로 우리 나라 서쪽의 유리한 형세입니다. 저는 이미 유표를 관찰했는데,그의 생각은 원대하지 않고,자식들은 또 모자라서 기업을 계승하여 전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공께서 이것을 일찍 살펴보기만 한다면 조조의 뒤에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토지를 도모하는 계책은 응당 먼저 황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황조는 지금 연로하여 혼미함이 매우 심하고,재물과 식량은 모두 부족하며,수하의 사람들은 그를 속이고 재화를 탐하며,부하 장수들의 이익을 빼앗아 장수들의 마음에는 원한이 있고,배나 무기는 버려진 채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농경에는 게으르고 군대에는 엄한 규율이 없습니다. 공께서 만일 지금 간다면 그들의 패배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일단 황조의 군대를 파괴하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합니다. 서쪽에서 초관을 점령하여 대세를 넓히면 즉시 점차적으로 파군과 촉군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받아들였다.장소는 그 당시 자리에 있었는데,그를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나라는 현재 형세가 위급한데,만일 군대가 과감히 출동한다면 아마도 반드시 어지럽게 될 것이오.` 감녕은 장소에게 말했다. `나라에서는 소하의 임무를 그대에게 맡겼거늘,그대는 남아서 지키면서 혼란을 걱정하고 있으니,어찌 고인을 배우기를 바라시오?` 손권은 술을 들어 감녕에게 권하며 말했다. '흥패,올해 출정하여 토벌하는 것은 이 술과 같은 것이니,결정은 그대에게 맡기겠소.그대가 단지 계략을 짜는 일에 힘써 반드시 황조를 이기도록 한다면 그대의 공이오.어찌 장장사의 말을 의심하시오?'손권은 그래서 서쪽으로 나아갔는데,과연 황조를 체포했고,그의 병사들을 모두 붙잡았다. 손권은 곧 감녕에게 병권을 주고 당구에 주둔하도록 했다. 이후에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에서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공략시키지는 못햇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성을 얻었으며,들어가서는 고수했다. 그 당시 수하에는 수백 명의 병사가 있었는데,새로 얻어서 1천명을 채웠다. 조인은 곧 5,6천 명을 시켜 감녕을 포위하도록 했다. 감녕은 며칠간의 계속된 공격을 받았으며,적은 높은 누각을 세우고 성 안으로 비가 내리는 듯이 화살을 쏘았다. 병사들은 모두 두려워했다. 오직 감녕만은 태연자약하게 담소했다. 사자를 파견하여 주유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주유는 여몽의 계책을 써서 장수들을 인솔하여 포위를 풀었다. 후에 노숙을 수행하여 익양을 진무시키고 관우에게 대항했다. 관우는 3만 명의 병사 중 직접 정예병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상류 10여 리의 얕은 여울에 배치하고 밤을 틈타 냇물을 건너려 한다고 말했다. 노숙이 장수들과 상의할 때 감녕은 당시 3백 명의 병사만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시 저에게 5백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여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노숙은 곧바로 병사 1천명을 선발하여 감녕에게 더해 주었다. 감녕은 그날 밤에 갔다. 관우는 이 소식을 듣고 건너지 못한 채 머물러 있으면서 땔나무를 엮어 진영을 만들었는데,오늘날 이것을 관우뢰라고 부른다. 손권은 감녕의 공로를 칭찬하고 서릉태수로 제수했으며,양신.하치 두 현을 통솔하도록 했다. 후에 감녕은 환현 공격에 참가해 승성독에 임명됐다. 감녕은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올라가 장사들의 선봉이 되어 결국은 주광을 격파시키고 포로로 잡았다. 공로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여몽이 가장 컸고,감녕이 그 다음이었으므로 절충장군으로 제수되었다. 이후에 조조가 유수로 출병했을 때,감녕은 전부독이 되어 병사를 출동시켜 적의 앞 진영을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손권은 특별히 쌀과 술,많은 안주를 하사했다.감녕은 이것을 수하 1백명에게 내려 먹도록 했다. 다 먹은 후,감녕은 먼저 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자기가 두 잔을 마시고,그런 연후에 수하의 도독에게 따라 주었다. 도독은 땅에 엎드려 있었으므로 그 즉시 받을 수 없었다. 감녕은 칼을 꺼내 무릎 위에 놓고 꾸짖어 말했다. `그대가 폐하에게 인정받았다고 하나,어찌 나와 함께 할 수 있소? 나는 여전히 죽음을 아끼지 않는데,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죽음을 아끼시오? 도독은 감녕의 안색이 사나운 것을 보고 즉시 일어나 공손히 술을 받았으며,그런 연후에 병사들에게 각기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이경이 되었을때,나뭇가지로 위장하고 적을 쳐부수러 갓다. 적은 깜짝 놀랐으며,끝내는 퇴각했다. 감녕은 이 때문에 더욱 중시되었고,병사 2천명이 증원되었다. 감녕은 비록 사납고 살생을 좋아했지만,호방하고 맑은 성정과 계략이 있었다. 그는 재물을 경시하고 장사들을 존중했다. 유능한 인물을 후하게 대우했으며 병사들을 훈련시켰다.병사들 또한 기꺼이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건안 20년(215),감녕은 합비 공격에 참가했는데,마침 역병이 유행하여 군대는 모두 물러났고,오직 수레 아래의 호사 1천명과 여몽.장흠.능통 및 감녕이 손권을 따라 소요진 북쪽에 있엇다. 장료는 멀리서 이러한 모습을 관찰하고 즉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급습하였다. 감녕은 적에게 화살을 쏘았으며,능통 등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감녕은 군악대에게 무엇 때문에 북을 치고 피리를 불지 않느냐고 거세게 소리질렀다. 그는 웅장하고 강인했다. 손권은 특별히 그를 칭찬했다.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찌기 허물이 있자 여몽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하고 직접 모친과 당을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잠시후,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을 마친 후,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북을 쳐서 병사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을 들었지만,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여몽의 모친은 맨발로 달려 나와서 여몽에게 이렇게 권했다. `황상께서는 너를 육친처럼 대우하고 국가의 대사를 너에게 위탁하셨는데,어떻게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감녕을 공격하여 죽이려 하느냐?감녕이 죽은 날,설령 황상께서 힐문하지 않더라도 네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법도에 부합되겠느냐.`여몽은 평소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어머니의 말을 듣고는 즉시 허물을 명백히 하고 마음속의 원한도 사그라들었다.그는 직접 감녕의 배로 와서 웃으며 이렇게 외쳤다. `흥패,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빨리 올라오시오!` 감녕은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말했다. `그대를 저버렸소` 감녕은 여몽과 함께 돌아와 여몽의 어머니를 보고 온종일 즐겁게 지냈다. 감녕이 죽은 후,손권은 매우 애통해했다. 아들 감괴는 죄를 범하여 회계군으로 이주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다.
태사자전--------------------태사자는 자가 자의이고 동래군 황현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군의 관소에 임명되어 주조사가 됐다. 마침 군과 주(청주)사이에 틈이 벌어져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하지 않게 되자 조정에서는 먼저 보고하는 쪽의 것을 정확한 것으로 여겼다. 당시 주목이 군수를 탄핵하는 장이 이미 발송되었고,군수는 자신이 주목을 탄핵하는 장이 늦게 도착하게 될까 걱정이 되었으므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 당시 태사자는 21세였는데,선발되어 수도로 가게 되었다. 그는 낮이고 밤이고 길을 갔다.그는 낙양에 이르러 공거(궁궐 남쪽에 위치하여 장이나 헌상품을 받는 곳)의 문까지 왔을 무렵,주의 관리가 막 표를 갖고 가려는 것을 발견했다. 태사渼?관리에게 물었다. `당신은 장을 올리려고 하는가?` `그렇소.` 태사자가 다시 질문했다. `장은 어디 있소?` 관리는 말했다. `수레 위에 있소.` 태사자가 말했다. `장의 겉봉에는 틀린 곳이 없소?가져와 보여주시오.` 관리는 태사자가 동래 사람임을 알지 못했기 떄문에 장을 갖다 주었다.태사자는 벌써 가슴속에 칼을 품고 있었으므로,장을 받자마자 찢어 버렸다.관리는 펄쩍 뛰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나의 장을 찢었다!` 태사자는 그를 수레 중간으로 데려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장을 주지 않았다면,나 역시 장을 찢을 수 없었을 것이오. 때문에 길흉화복이 생길 가능성은 똑같아졌으니,나 혼자만이 죄를 받지는 않을 것이오.어찌 침묵을 지키며 함께 나가서 삶을 죽음과 바꾸는 것과 같겠소.함께 가서 형벌을 받을 필요는 없소.` 관리가 말했다. `당신은 군을 위해 나의 장을 훼손시켜 이미 임무를 완수했는데,또 달아나려고 하시오?` 태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초 군수의 파견을 받은 것은,단지 장이 바쳐졌는지 아닌지를 와서 보면 되는 것이었소.나는 뜻이 너무 지나쳐 비로소 장을 훼손시키게 되었소. 지금 돌아가면,또한 이 떄문에 죄를 추궁받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에 함께 떠나려고 하는 것이오.` 관리는 태사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그날 함께 떠났다.태사자는 관리와 함께 성을 나왔지만,기회를 봐서 돌아가 군수의 장을 올렸다.
주목은 이 일을 들은 후,다시 관리를 보내 장을 올렸다.담당관리는 앞서 장이 왔다는 이유로 다시 수리하지 않았다. 주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불리한 처분을 받았다.이 일로부터 태사자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지만,주로부터는 미움을 받게 되었다.그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 곧 요동으로 피해 갔다. 북해의 상 공융은 이 일을 듣고 태사자를 특이한 인물로 생각하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고,아울러 예물을 보냈다.
이 당시 공융은 황건적이 침입하여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대를 출동시켜 도창에 주둔했다가 적 관해에게 포위되었다. 마침 태사자는 요동에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는 태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공북해를 일찌기 만난 적이 없을 것이다.네가 떠난 후,성심성의껏 나를 돌봐주고 위로해 주었는데,오랜 친구 이상이었다.지금 그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니,너는 응당 그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태사자는 사흘간 머문 후,혼자 걸어서 도창까지 갔다. 그떄는 포위가 삼엄하지 않았으므로 어두운 밤을 틈타 성으로 들어가 공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사들을 내어 적을 격파시키기를 원했다. 공융은 그의 의견을 듣지 않고 외부의 구원병을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구원병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포위망은 나날이 좁혀졌다. 공융은 평원국의 상 유비에게 긴급함을 알리려고 했지만,성 안의 사람들 중에 나갈 만한 자가 없었다.태사자가 스스로 이 임무를 맡을 것을 청했다. 공융이 말했다. `현재 적들의 포위는 매우 엄밀하며,사람들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소.그대의 뜻은 비롯 장하지만,실제로 어려움이 없겠소?
태사자가 공융에게 대답했다. `과거 당신께서는 제 노모에게 마음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노모께서는 이러한 대우에 감격하였고,당신의 위급한 상황을 풀어주도록 저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취할 만한 점이 있소 장래에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만,저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어찌 당신이 두터운 사랑으로 돌봐주신 정의와 노모께서 저를 보내신 뜻이겠습니까? 사태는 이미 황급해졌고,당신이 의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공융은 비로소 태사자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태사자는 가볍게 여장을 꾸리고 밥을 배불리 먹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동개를 두르고 활을 손에 쥐고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명의 기병에게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오도록 하고,각각에게 고삐를 하나씩 쥐고 성문을 열고 곧장 나가도록 했다. 성밖에서 포위하고 있어 양쪽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병마를 동시에 출동시켰다. 태사자는 말을 성벽 아래 참호 안으로 끌고가 기병이 잡고 있던 고삐를 각각 하나씩 세우고 나서 참호 속에서 나아 활을 쏘았다.화살을 다 쓰자 곧장 성문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또 이와 같이 했다.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중 어떤 이는 몸을 일으키고 어떤 이는 누워 있었다. 태사자는 또 고삐를 세우고 화살을 전부 쏜 후에 다시 성으로 들어갔다. 사흘째 되는 아침에도 또 나와서 이와 같이 했는데,또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말에 채찍질을 하여 직접 포위망을 뚫고 질주했다. 적이 이것을 발각했을 때에는 태사자는 벌써 빠져나갔고,또 활에 맞아 몇 사람이 죽었고,모두 활시위에 응하여 엎어졌기 때문에 감히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평원국에 도착하여 유비를 설득하여 말했다. `저는 동래군의 미천한 사람으로,공북해와는 친척관계도 아니며 가까운 고향 사람도 아닙니다.오로지 명성과 지조로 마음을 이끌어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함께 하는 뜻을 맺게 되었습니다.지금 관해가 포악한 행동으로 소란스럽게 하여 공북해는 포위되었고,고립되어 원조가 없어 아침 저녁으로 위험이 있습니다.당신의 인의의 명성을 갖고 있어 다른 사람의 위급함을 구할 수 있으므로,북해에서는 한마음으로 흠모하며 목을 길게 빼고 의지하고 있습니다.저로 하여금 날카로운 칼날을 무릅쓰고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구사일생 중에 당신에게 의탁하도록 한 것은 당신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공손히 대답했다. `공북해는 세상에 유비가 있음을 아는구나!` 즉시 정예병사 3천 명을 보내 태사자를 따르도록 했다.적은 병사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포위를 풀고 흩어져 달아났다. 공융은 구원을 받은 후,태사자를 더욱더 귀중하게 여겼다.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의 어린 시절 친구요.` 사태가 수습되자,태사자는 돌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알렸고,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공북해에게 보답하여 기쁘다.`
양주자사 유요는 태사자와 같은 군 사람이다. 태사자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아직 서로 만난 일이 없었다. 오래지 않아 장강을 건너 곡아로 가서 유요를 만나려 했다.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마침 손책의 군대가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유요에게 태사자를 대장군으로 임명할 만 하다며 권유했다.유요가 말했다. `내가 만약 자의를 쓴다면 허자장(허소)가 당연히 나를 비웃지 않겠소?`
그는 단지 태사자에게 적군을 정찰하도록만 했다. 당시 태사자는 독자적으로 기병 한 명과 출발하였다가 길에서 손책을 만났다. 손책은 기병 13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모두 한당,송겸,황개의 무리였다. 태사자는 곧 앞으로 가서 싸우다가 마침 손책과 정면으로 대하게 되었다. 손책은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태사자가 들고 있는 수극을 빼앗았다. 태사자 역시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이때 양쪽의 보병과 기병이 동시에 달려왔으므로 흩어지게 되었다. 태사자는 유요와 함께 예장으로 달려가야만 했지만,도중에 무호로 달아나 산 속에서 떠돌며너 단양태수라고 칭했다. 이때,손책은 이미 선성 동쪽을 평정시키고, 단지 경현 서쪽 여섯 현만 항복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태사자는 이러한 정세를 보고 경현까지 가서 주둔하여 둔부(군사적인 행정기구)를 세웠고,산월 사람들이 다수 귀속해 왔다. 손책은 직접 공격하여 토벌했다. 마침내 태사자는 포로가 되었다. 손책은 즉시 태사자의 결박을 풀어주고,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정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있겠소?만일 그대가 나를 붙잡았다면 어떻게 했겠소? 태사자가 말했다.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손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일은 응당 그대와 함께 축하해야 할 것이오.
손책은 그 자리에서 태사자를 문하독의 관리로 임명하고,오나라로 돌아와서는 병사를 주고,절충중랑장에 임명했다. 후에 유요가 예장에서 죽자,그 수하의 병사와 백성들 1만여 명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 손책은 태사자에게 가서 그들을 위로하도록 명했다.주위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태사자는 반드시 북쪽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책이 말했다. `자의가 나를 저버리면,또 누구와 함께 할 수 있겠소?` 그는 창문에서 태사자를 전송하고,그의 팔을 잡고 헤어지며 말했다. `언제면 돌아올 수 있소?` 태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불과 16일이면 됩니다.` 태사자는 과연 기약한 대로 돌아왔다.
유표의 조카 유반은 매우 용맹하며,애현,서안등의 현을 여러 번 침공했다. 손책은 그래서 해혼,건창 및 주위의 여섯 현을 나누어 태사자에게 건창도위로 임명하고,해혼에 관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동시에 여러 병사들을 인솔하여 유반에게 대항하도록 했다.유반은 이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다시는 침입하지 않았다.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이며,아름다운 수염이 있었고,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화살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둔과 보둔의 적을 토벌하여 갔었는데,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누각 위에서 욕?했다. 그 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태사자는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혔다. 군영을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만 명의 병사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는 이와 같았다. 조조는 그의 명성을 듣고 태사자에게 편지를 써서 상자 속에 편지를 봉했다. 그가 열어 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단지 당귀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태사자에게 유반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건안 11년(206)에 세상을 떠났다.아들 태사향은 관직이 월기교위까지 올라갔다.
진수:평하여 말한다-태사자는 신의가 있고 의기가 열렬하여 옛 사람의 정의가 있었다.
손권전------------손권의 집안은 대대로 양자강 하류 부춘에서 살면서 호족으로서 명성이 있었다.
손권은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춘추수대의 명장 손무자의 후손이라한다.
조조나 유비와 같이 동탁 토벌에 앞장서서 용맹하기로 이름을 떨친 손견의 둘째 아들이 바로 손권이다.
손견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첫째가 손책이고 둘째가 손권이다.
그가 갓 태어 났을때 사람들은 그의 상을 보고 모두 크게 될 인물로 보았다고 한다.
그의 상은 '머리는 네모나고 입이 크며 눈은 파랗고 수염은 붉다'라고 여러 서적에 기록되 있다.
이런 상을 두고 혹자는 이민족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사실로 믿기엔 어렵다.
손견이 죽고 그의 세력을 손책이 관할할 무렵 한 왕실에서는 멀리 떨어진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공물을 바쳐오는 손책이 가상하여 유완을 사자로 보내 은사품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 때 유완은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가의 자식들은 각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타고난 운이 좀 모자란다.예외는 차남인 손권이다.
용모도 그렇고 골격도 그렇고 보통 사람이 아니다.그 사람은 제왕의 자리에 오를 상이다.
수명도 가장 길 것이다.'라고 하며 수행원에게 손권의 이름을 적어두도록 했다 한다.
삼국인 조조의 '위나라'나 유비의 '촉나라'에 비해 손권이 다스린 '오나라'는 그리 특이할 만한 것이 없다.
이는 '삼국지 연의'의 영향이 지대적인데 한의 정통을 유비의 '촉나라'로 본 나관중은 당연히 조조의 '위나라'를 촉의 반대입장에서 기술했고 따라서 그 두 나라는 부각되고 오나라는 뒤로 둘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조조나 유비와는 다르게 손권의 능력을 형편없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로 알고 있다.
그러나 손권의 능력의 그 두 사람보다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손책이 전쟁을 할때엔 항상 손권이 따라 다녔는데 손권은 형 손책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묘한 계책을 내놓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조나 유비는 창업에 능력을 발휘한 인물들이고 손권은 수성에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창업은 많은 우연과 실력이 조화되어 수성보다는 훨씬 화려한 것으로 보여지지만은 수성은 군주의 실력만으로 승부가 난다고 보아야 한다.
당연히 조조나 유비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광활한 땅에 비해 인구가 훨씬 적었던 강남에서 안전하게 나라를 이끈 손권의 능력은 그들과 비교해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조와 유비와는 그 능력을 발휘한 방향이 틀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권은 조조와는 27세 유비와는 21세의 나이차이가 있다 그 당시는 나이가 곧 연륜이고 경험이었을 시기이다.
숱한 전쟁을 격어오면서 조조와 유비가 쌓았을 경험에 비해 손권이 쌓은 경험이란 것은 극히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극복한 손권의 능력은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손권은 또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관우의 죽음으로 격분한 유비가 대적인 위나라 대신에 소적인 오나라를 치려 할때 손권은 스스로 위나라에 신하가 된다.
어찌보면 그의 행동이 가볍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자기 하나를 낮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나라를 지킨 꼴이니 그의 인내를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하(吳下)의 아몽'을 '괄목상대'할 여몽으로 재 탄생시킨 것은 손권의 힘이다.
손권은 그의 부하인 여몽과 장흠이 무예만을 믿고 학문에는 뜻이 없음을 알고 그 둘을 학문에 힘을 쏟도록 설득한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그 들이 학문에의 자질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더라면 손권 또한 그들을 설득하지 않았으리라 본다.
부하들의 자재력을 끌어 올린 손권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뿐이다.
위나라===============
순유전--------------순유전(荀攸傳)
순유(荀攸)의 자는 공달(公達)이고 순욱의 사촌이다. 조부 순담은 동한의 광릉태수를 지냈다. 순유는 어렸을 때, 고아가 되었다. 순담이 세상을 떠나자, 순담의 옛날 관리 장권이 순담의 묘를 지키기를 원했다. 이 때 순유의 나이 13세였으나, 이를 이상히 여겨 숙부 순구에게 물었다. ?이 관리는 얼굴빛이 보통 사람과 다르니 아마도 간사한 일을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순구가 깨달은 바 있어 곧 다그쳐 물어보니, 과연 그는 살인을 하고 도망친 자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순구는 그를 다르게 보았다. 하진이 정권을 잡은 후, 순유를 비롯하여 국내의 명사 20여 명을 초빙했다. 순유는 조정으로 들어온 후,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 동탁이 관동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가 일어나고, 동탁은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 순유는 의랑 정태, 하옹, 시종 종집, 월기교위 오경 등과 모의하여 말했다. ?동탁의 무도함은 걸주보다도 심하여 천하 사람이 모두 그를 원망합니다. 비록 그가 강한 군대에 의지하고 있을지라도 실제로는 한 명의 필부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직접 그를 죽여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런 다음에 효산과 함곡관을 점거하고, 천자의 명령릉 보좌함으로써 천하를 호령한다면 이는 춘추시대의 패자인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을 눈앞에 두고 발각되어 하옹과 순유는 투옥되었다. 하옹은 근심과 두려움에 자살했으나, 순유는 말을 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 태연자약했다. 때마침 동탁이 살해되어 순유는 석방되었다. 순유는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시 공부에 초빙되고 높은 등금으로 추천되어 임성의 재상으로 승진되었으나. 가지 않았다. 촉한의 지세가 험준하고 굳세며 백성들도 풍부하고 많았으므로, 순유는 촉한의 태수가 되기를 원했으나, 길이 끊어져 이르지 못하고 형주에 머물렀다. 조조는 천자를 영접하여 도읍을 허창에 정한 후에 순유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금 천하가 크게 혼란하니, 지모가 있는 선비가 마음을 수고롭게 할 시기이거늘 그대는 형주에 머무르면서 촉한의 변란을 관망하고 있으니, 너무 오래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조조는 순유를 불러 여남태수로 삼았고, 얼마 후에 중앙으로 불러들여 상서로 임명했다. 조조는 평소부터 순유의 명성을 들었으며, 더불어 말을 나누고 나면 크게 기뻐하며 순욱과 종요에게 말했다. ?공달(순유)은 보통 사람이 아니오. 내가 그와 더불어 일을 계획하면 천하에 무슨 근심이 있으리오!? 조조는 그를 군사(軍師)로 삼았다.
건안 3년(198)에 순유는 조조가 장수를 정벌하는 데 따라나섰다.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장수와 유표는 서로 의지하여 막강하게 되었는데, 장수는 떠도는 군대로 유표에게 걸식하고 있으니, 유표는 장기간 제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형세는 반드시 그들을 분리시킬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핍박하여 그들이 급학하게 되면, 형세는 반드시 서로 돕게 됩니다.? 그러나 조조는 순유의 건의를 듣지 않고 양성까지 진군하여 장수의 군대와 싸웠다. 장수가 위급해지자, 유표가 과연 그를 구하러 왔다. 조조 군대의 형세는 매우 불리했다. 조조가 순유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조조는 즉시 날랜 병사를 갖추어 다시 장수와 싸워 크게 격파시켰다.
건안 3년에 조조가 완성에서 여포를 정벌하러 하비에 이르렀는데, 패배한 여포가 하비성으로 물러나 굳게 지키고 있었으므로, 그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병사들이 피로하여 조조는 귀환하려고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감하지만 지모가 없으며, 지금까지 세 번 싸웠으나 모두 패배했으니 그의 날카로운 기운도 꺾여 있습니다. 삼국은 장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주장이 쇠약해지면 분투할 생각이 없게 됩니다. 지궁은 지모가 있지만 더디게 실행하며, 지금은 여포의 기력이 회복되기 이전이고 진궁의 계획도 정해지지 않았으니, 진격하여 급히 그를 공격하면 여포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기수와 사수의 물줄기를 끌어 성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성벽이 무너졌고 여포는 사로잡혔다.
건안 5년에 순유는 조조를 수행하여 백마에서 유연을 구했고 순유는 계책을 내어 안량을 참수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무제기>에 있다. 조조가 백마를 격파하고 돌아올 때, 치중대를 파견하여 황하를 따라서 서쪽으로 철수시켰다. 원소는 이 소식을 듣고 황하를 건너 추격하여 마침내 조조와 마주치게 되었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조조에게 치중 수레를 버리고 철수하여 군영을 지키자고 했는데, 순유가 말했다. ?이것은 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거늘, 어찌 그것을 버릴 수 있습니까?? 조조는 순유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치중으로 적들을 유인하자 적은 그것을 차지하려고 다투어 진세가 혼란스러웠다. 조조는 즉시 보병과 기병을 출동시켜 크게 쳐부수고 원소 군대의 기병대장 문추를 베었다. 조조는 마침내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군대의 식량이 다 떨어져 갈 때, 순유가 조조에게 말했다. ?원소의 식량 운반용 수레가 조만간에 이를 것인데, 그것을 통솔하는 장수 한명은 날쌔지만 적을 경시하는 인물이니, 습격하면 격파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누구를 보내야 하오?? 순유가 말했다. ?서황이면 됩니다.? 조조는 곧 서황과 사환을 보내 습격하여 달아나게 하고 치중을 불태웠다. 때마침 허유가 항복해 와서, 원소는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식량을 운반하는 것을 영접하도록 하였지만, 장수는 교만하고 병사들은 나태하므로 가히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조의 모사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의심을 품었으나, 오직 순유와 가후만은 조조에게 허유의 계책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조조는 곧 순유와 조홍을 남겨 본부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순우경 등을 모두 베어버렸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망루를 공격하여 태워버리고 투항하자, 원소는 마침내 군대를 버리고 도주했다. 장합이 항복해 오자, 조홍은 의심하며 과감히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순유는 조홍에게 말했다. ?장합은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아 분노하여 온 것인데 당신은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조홍은 곧 그를 거두었다.
7년(202)에 순유는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러 군대를 따라서 여양에 이르렀다.
이듬해(203)에 조조는 마침 유표를 토벌했고, 원담과 원상은 기주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원담은 신비를 사자로 보내 항복을 구걸하며 구원을 요청하였으므로, 조조는 그것을 허락하려고 하면서 모든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대부분 유표가 강하므로 먼저 평정해야지, 원담과 원상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순유가 말했다. ?천하가 바야흐로 혼란하여 일이 생기려는데, 유표는 장강과 한수 일대를 앉아서 지키고 있으니, 그가 사방을 정복할 야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씨 일가는 네 주(기주,청주,유주,병주)의 땅을 근거지로 하여 무장한 병사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으며, 원소는 관대하고 후하여 많은 사람을 얻었는데, 만일 두 아들이 화목하게 그 아버지가 이룩한 대업을 지키려 한다면 천하의 환란을 가라앉을 것입니다. 지금은 형제끼리 증오하고 있으니, 이는 들들의 세력이 둘 다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그 중의 하나가 합병되면 그들의 힘은 전일하게 되고, 힘이 전일하면 평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혼란을 틈타 공격하여 취하면 천하는 평정될 것입니다. 이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조조가 말했다. ?좋소.? 조조는 원담과의 화친을 허락하고, 마침내 군대를 돌려서 원상을 격파했다. 이후에 원담이 다시 모반하자, 순유는 대군을 따라가 남피에서 원담을 참수했다. 기주가 평정된 후, 조조는 순유를 책봉해야 한다는 표를 올렸다. -군사 순유는 처음부터 신을 도와 정벌할 때 수행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신이 앞뒤에서 많은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순유의 계책입니다. 조정에서는 순유를 능수정후에 봉했다.
12년(207)에 조정은 명을 내려 대내적으로 공로를 논하고, 상을 주었다. 조조가 말했다.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치밀한 책략으로 나라의 안팎을 평안히 한 자는 문약이며, 그 다음은 공달이오.? 순유에게 식읍 4백 호를 주니 이전의 것과 합쳐 7백 호가 되었고 중군사로 전임시켰다. 조조가 위나라를 처음 세울 때, 순유를 상서령으로 임명했다. 순유는 생각이 깊고 치밀하며 지혜와 방책이 있었다. 조조가 정벌하러 가는 것을 수행한 이래, 항상 장막(帳幕) 속에서 계책을 모의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과 그 집안의 자제들도 그가 말하는 내용을 알지 못했다. 조조는 항상 일컬어 말했다. ?공달은 겉모양은 우둔하지만 내면은 지혜롭고, 밖으로는 겁이 많으나 안으로는 용감하며, 겉으로는 약하지만 안으로는 강하며,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공적을 내세우지도 않았소. 그의 기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겉모양의 우둔함은 도달할 수 없으니, 비록 큰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둔한 듯 하는 안자나 영무조차도 순유를 능가할 수는 없소.? 그 당시 문제는 동궁에 있었는데, 조조가 말했다. ?순공달은 모든 사람의 사표이니, 너는 마땅히 온 힘을 다해서 그분을 예의로써 공경해야 한다.? 순유가 병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조조는 문병을 가 침상 아래에서 혼자 배례하였으니, 순유가 존경과 특별한 대우를 받은 것은 이 정도였다. 순유는 종요와 절친했는데, 종요가 말했다. ?나는 매번 행동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되풀이하여 생각하며 스스로 바꿀만한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공달에게 자문을 구하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을 문득 발견되곤 했다.? 공달은 열두 조목에 달하는 기묘한 계책을 앞뒤로 그렸는데, 오직 종요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종요는 이것을 편찬하여 묶어보려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모두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순유는 조조를 수행하여 손권을 정벌하러 가는 도중에 죽었는데, 조조는 순유에 대해 말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순유의 장남 순즙은 순유의 유풍을 갖고 있었으니 일찍 세상을 떠났다. 둘째 아들 순적이 뒤를 이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대가 끊겼다. 황초 연간에 순유의 손자 순표를 능수정후에 봉했으며 식읍 3백호를 주었고, 후에 구양정후로 바꿔 봉했다. 정시 연간에 순유를 경후(敬侯)로 추증 하였다.
조창전-------------임성위왕 조창은 자가 자문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수레몰이를 잘 하였으며, 근력이 다른사람들보다 뛰어나 맨손으로 맹수와 격투했으며,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하지 않았다. 여러차례 조조를 따라 정벌에 나섰는데, 의지가 강개함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조조는 일찍이 그 점을 비판하며 말했다. '너는 독서에 전념한다거나 성현의 도를 흠모하는 것은 하지 않고 말을 타고 칼을 차는 것만 좋아하는데, 이것은 한 필부의 쓰임일 뿐 어찌 족히 귀하게 되겠는가!' 조창에게 <시경>과 <서경>을 읽으라고 재촉하자 조창은 주위 사람에게 말했다. '대장부는 응당 위청(전한의 명장)과 곽거병처럼 10만 기병을 이끌고 사막을 질주하며 흉노를 쫓아 공훈을 세워 봉호를 얻어야 하는데, 어떻게 박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조조는 일찍이 그의 아들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물으며 그들 각자 자기가 지향하는 것을 말하도록 했다. 조창이 말했다. '장수가 되고 싶습니다.' 조조가 말했다. '장수가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대답했다. '몸에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몸을 돌아보지 않고 사졸들의 앞에 서며,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어 장려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징벌을 할 것입니다.' 조조는 크게 웃었다. 건안 21년(216)에 언릉후로 봉했다. 23년(218), 대군의 오환이 모반을 일으키자, 조창을 북중랑장으로 임명하고 효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했다. 출발에 임하여 조조는 조창에게 계도하여 말했다.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였으나, 일을 담당했으니 우리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가 되었다. 행동을 할 때는 왕법에 따라서 일을 처리해야 하니, 너는 이 점에 주의해라!' 조창은 북정하여 탁군의 경계지역으로 들어갔는데, 반역한 오랑캐 수천 기병이 갑자기 왔다. 당시 병마는 아직 집결하지 않았고 오직 보병 천명과 기병 수백 명만 있었다. 조창이 전예의 계책을 사용하여 요새를 튼튼히 지켰으므로 적은 곧 퇴각하여 흩어졌다. 조창은 적을 추격하면서 오랑캐를 활로 쏘았는데, 활 시위에 호응하여 거꾸러지는 자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다. 싸움은 반나절이나 계속되었는데, 조창의 갑옷에 몇 대의 화살이 맞았지만 투지는 오히려 더욱 앙양되었다. 승기를 잡아 적을 추격하여 상건현까지 갔을 때는, 군으로부터 2백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장사나 여러 장수들은 모두, 방금 너무 멀리 진군하여 사병도 말도 피곤하고, 또 위나라의 절도를 받아 대군을 지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숙이 진격할 수 없으며, 명령을 어기고 적을 경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조창이 말했다. .. '군대를 이끌어 병사를 나아가게 하는 것은 그곳에서 승리할 수 있어서 가는 것인데 또 무슨 절도란 말인가? 오랑캐는 달아나더라도 멀리 가지 못할 것이니 그들을 추격하면 반드시 무찌를 수 있거늘 명령을 존중하여 지키면 오히려 적을 놓아 달아나게 하는 것이니 훌륭한 장수가 아니다.' 그리고 말에 올라 군중에 명령했다. '늦게 출동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하루 낮 하루 밤을 달려 적을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으며 머리를 베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조창은 즉시 보통 규정의 두 배에 해당하는 상을 장병들에게 주자, 장병들 중에서 기뻐하지 않는자가 없었다. 당시 선비족의 대인 가비능은 수만 기병을 이끌고 전투를 바라보았는데, 조창 군대가 전투를 용감히 하고 가는 곳마다 무찌르는 것을 보고 곧 조조에게 귀순하기를 청했다. 북방은 모두 평정되었다. 당시 조조는 장안에 있으면서 조창을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불렀다. 조창은 대군에서 출발하여 업성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태자 조비가 그에게 말했다. '그대는 방금 공을 세워 지금 서쪽으로 가서 황상을 만나려고 하는데, 자만하지 마시오. 대답할 때는 항상 부족한 것이 있는 것처럼 겸손하게 하시오.' 조창은 장안에 도착하여 태자가 말한 것처럼 하여 공로를 장수들에게 돌렸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조창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수아(조창)가 이와 같다니 의외로구나!' 조조는 동쪽으로 돌아올 때, 조창에게 월기장군을 대행하도록 하여 장안에 남겨두었다. 조조가 낙양에 도착하여 병에 걸리자, 역마를 보내 조창을 불렀는데, 그가 도착하기 전에 조조는 죽었다. 문제가 왕위에 오른 후, 조창과 제후들은 자기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서에서 말했다. <선생의 도는 공신을 임용하고 친족을 친절하게 하고,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들과 함께 나라를 세워 가업을 계승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고 침략을 막고 곤란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창은 이전에 명령을 받아 북벌을 하여 북방의 땅을 완전히 평정했으니, 그 공로가 매우 크다. 식읍 5천 호를 증가시켜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호가 되게 하라.> 황초 2년(221)에 작위를 승진시켜 공으로 삼았다. 황초 3년, 임성왕으로 삼았다. 4년에 수도로 나아가 황상을 만났고, 병을 얻어 수도의 관저에서 죽었는데, 시호를 위라고 했다. 안장할 때, 문제는 천자용 수레, 용 모양의 깃발과 근위병 백 명을 하사하고, 한나라 동평왕의 안장 규격에 따르도록 했다. 아들 조해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중모현으로 옮겨 봉해졌다. 5년에 임성현으로 바뀌어 봉해졌다. 태화 6년에 임성국에 봉하고, 5현의 2천5백호를 갖도록 했다. 청룡 3년에 조해는 황제를 위해 물건을 만드는 중상방으로 사사로이 관리를 보내 금지한 물건을 만들게 했으므로 한 현 2천호를 삭감당했다. 정시 7년(246), 제남으로 봉하고 식읍을 3천호로 했다. 정원, 경원 초년에 연속하여 식읍이 증가해 총 4천4백호가 되었다.
우금전--------우금전(于禁傳) 우금은 자가 문칙(文則)이고 태산군(泰山郡) 거평현 사람이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포신(鮑信)은 병력을 소집하였고, 우금은 그에게 의탁하고 따랐다.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자, 우금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조조를 만나 도백(都伯:대장)이 되어 장군 왕랑(王朗)에게 소속되었다. 왕랑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는 우금의 재간이면 대장군에 임명될 수 있다면서 조조에게 추천했다. 조조는 그를 불러 이야기를 해보고 군사마(軍司馬)의 관직을 주었고, 병사를 인솔하여 서주로 가서 광척(廣戚)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이곳을 함락시켰으므로 함진도위(陷陣都慰)로 임명했다. 조조를 따라 복양으로 가서 여포를 토벌하고, 따로 병사를 이끌고 성남쪽에서 여포의 두 진영을 무찔렀으며, 또 별도로 수창(須昌)에서 고아(高雅)를 무찔렀다. 조조를 따라 황건군 수장(壽張)?정도(定陶)?이호(籬狐)를 공격하고, 옹구에서 장초를 포위하여 공격했는데, 모두 함락시켰다. 우금이 조조를 따라 황건군 유벽(劉僻), 황소(黃邵) 등을 정벌하러 판양(版梁)에 주둔하고 있을 때, 조조의 진영으로 황소 등이 야습해 왔는데, 우금이 부하를 인솔해 그들을 무찌르고 황소 등을 죽였고, 황소의 부하들은 전부 투항했다. 평로교위(平虜校慰)로 승진했다. 조조를 따라 교현에서 교유를 포위하고 공격하여 교정 등 네 명의 장수를 죽였다. 그리고 완성(宛城)까지 가서 장수를 투항시켰다. 장수가 또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그와의 싸움에서 유리하지 못했으므로 군대를 패하여 무음(無陰)으로 돌아왔다. 이때 군 안에서 큰 혼란이 있어 장수들은 각각 조조를 구하러 갔는데, 단지 우금만이 부하 수백 명을 지휘하여 싸우고 물러났다. 이후 형세는 긴박할지라도 분산되지는 않았다. 적의 추격은 점점 완만해졌으므로, 우금은 부대를 조용히 정돈하여 북을 울리며 물러났다. 조조는 아직 주둔할 곳이 없었는데, 길에서 우연히 상처를 입은 나신의 몸으로 도주하는 10여 명을 만나게 되었다. 우금은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되었는지 물으니 그들이 대답했다. '청주(靑州) 병사들에게 약탈당했습니다.' 이전에 조조에게 투항한 황건군을 청주병이라고 불렀으며, 조조가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들은 과감하게 약탈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우금은 크게 노하여 그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청주병도 똑같이 조공의 부하이거늘, 감히 도적질을 하다니!'' 그리고 청주병을 토벌하고 그들의 죄상을 추궁했다. 청주병은 조조에게로 달려가 우금의 죄상을 고했다. 우금이 도착한 후, 먼저 보루를 세우고 불시에 조조를 알현했다. 어떤 사람이 우금에게 말했다. '청주병이 이미 당신에 관해 조공에게 말했으니, 속히 조공을 만나 일을 처리해야 됩니다.' 우금이 말했다. '현재 적은 또 뒤에 있으니, 아무때나 추격할 수 있고, 먼저 방비를 세우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지하여 적을 받아 싸우겠소? 하물며 조공은 명찰(明察)하거늘 무슨 연고로 무고하겠소!' 참호를 파서 진영을 안정시키고, 들어가 알현하고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조조는 웃으며 우금에게 말했다. '육수 싸움에서 실패한 후, 우리는 모두 매우 조급했었소. 장군은 혼란중인데도 오히려 부대를 정돈시키고, 폭도들을 토벌하고, 진영을 공고히 하였으며, 동요되지 않는 절조(節操)가 있었소. 고대의 명장이라도 어찌 이 이상이 되겠소?' 따라서 우금 전후의 전공에 근거하여 익수정후(益壽亭侯)로 봉했다. 또 조조를 따라 양(穰)으로 가서 장수를 공격하고, 하비에서 여포를 붙잡았으며, 사환(史渙) 조인(曺仁)과 사견(射犬)에서 쉬고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쉬고를 참수했다. 조조가 처음으로 원소를 정벌할 때 원소의 병력은 강성했는데, 우금이 선봉에 서기를 희망했다. 조조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고 보병 2천 명을 파견하여 우금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고, 연진(延津)을 지키면서 원소에 대항하도록 하고, 조조는 병사를 인솔하여 관도로 돌아왔다. 유비가 서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는 동쪽으로 가서 그를 정벌했다. 원소가 우금을 공격했으나, 우금이 굳게 지켰으므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 또 악진 등과 보병 기병 5천 명을 인솔하여 원소의 외부 군대를 공격하였으며, 연진 서남쪽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급(汲), 획가(獲嘉) 두 현에 이르기까지 30여 개의 보루를 불태웠고, 죽은 자와 포로가된 자가 각기 수천 명이었으며, 원소의 장수 하무(何茂) 왕마(王摩) 등 20여명을 항복시켰다. 조조는 또 우금에게 단독으로 병사들을 인솔하게 하여 원무(原武)에서 주둔하도록 하고, 두씨진(杜氏津)에 주둔하고 있는 원소의 다른 진영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그는 그들을 무찔렀다.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하였고, 후에 조조를 따라 관도로 돌아왔다. 조조는 원소와 진영을 이어 토산(土山)을 쌓아 대치했다. 원소가 조조의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도록 명령하였므으로, 사졸들 중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군중의 사람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금이 토산을 지휘하여 막고 힘껏 싸웠으므로 전의가 더욱 발분해 원소는 실패하고 우금은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기주가 평정되었는데 창회가 또 모반을 하자, 우금을 보내 그를 정벌하도록 했다. 우금은 창회를 맹렬하게 공격하였는데, 창회와 우금은 과거에 우정을 나눈 사이였으므로 우금에게 투항했다. 많은 장수들은 모두 창희가 이미 투항했다고 생각하고 조조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우금이 말했다. '여러분들은 조공의 일관된 법령을 모르는군요. 포위당하여 공격을 받은 후에 투항한 사람은 사면시키지 않습니다. 군법을 준수하고 명령을 집행하는 것은 군주를 섬겨 받드는 절개와 지조인 것입니다. 창희는 비록 나의 옛 친구이지만, 이 우금이 어떻게 절개와 지조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친히 가서 창희와 결별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였다. 이때, 조조는 순우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탄식하며 말했다. '창희가 항복하여 나에게로 오지 않고 우금에게로 간 것은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금을 더욱더 중시했다. 동해가 평정된 후, 우금은 호위장군에 임명되었다. 후에 장패 등과 매성을 공격하였고 장료와 장합 등은 진란을 토벌하였다. 우금이 도착한 후, 매성은 부하 3천여 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투항한이후에 또 모반을 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진란에게로 달아났다. 장료 등은 진란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지만, 군량미가 적었다. 우금은 군량미를 수송하는 수레의 앞뒤를 서로 연결시켰고, 장료는 진란과 매성을 죽였다. 식읍이 2백 호 증가되어 이전 것과 합쳐 총 1천 2백 호가 되었다. 이때 우금과 장료 악진 장합 서황은 모두 명장이었고, 조조가 정벌할 때마다 선봉에 섰고, 병사를 물릴 때는 뒤에서 지켰다. 우금은 군사들을 엄하게 다스렸고, 적의 재물을 얻어 자기 소유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 또한 특히 많이 받았다. 그러나 법률에 의거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렸으므로 병사들의 환심을 많이 얻지는 못했다. 조조는 항상 주령(朱靈)을 증오하여 그의 부대를 빼앗으려고 했다. 우금은 위엄이 높았으므로 우금에게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명령서를 갖고 가도록 했다. 우금은 직접 주령의 군령으로 달려가 그의 군대를 빼앗으려고 했는데, 주령과 그의 부하들은 감히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령을 우금 아래의 한 지휘관으로 임명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복종하였다. 그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승진시키고 절월(節鉞)을 주었으며, 식읍 5백 호를 주고 한 아들을 열후로 승진시켰다. 건안 24년(219)에 조조는 장안에 있으면서 조인에게 번현(樊縣)에서 관우를 토벌하도록 하였고, 또 우금을 보내 조인을 돕도록 하였다. 가을에 비가 억수같이 내려 한수가 범람하여 평지의 물이 몇 길이나 되고, 우금 등 칠군(七軍)은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은 여러 장수들과 높은 곳으로 올라?물의 기세를 바라보았는데, 돌아가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관우는 이 기회를 틈타 큰 배를 타고 우금 등을 공격하였으며, 우금은 결국에는 투항하였는데, 오직 방덕(龐悳)만은 굴복하지 않아 살해되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애통해 하다가 말했다. '내가 우금을 안지 30년이 되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위험에 처하여 오히려 방덕만도 못하단 말인가!' 마침 손권이 관우를 붙잡아 그의 부하들을 포로로 얻었다. 우금 또한 오나라에 있었다. 문제가 죽위한 후 손권을 시하로 일컬었고, 우금은 돌려보냈다. 문제가 우금을 불러 만났는데, 그는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되었고 용모가 초췌했으며,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문제는 순림보, 맹명조(孟明祖)의 고사를 비유로 들어 위로하고 안원장군(安遠將軍)으로 임명했다. 그를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려고, 먼저 북방의 업성으로 가서 고릉(高陵)을 참배하도록 했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미리 어릉(御陵) 건물에 관우가 전쟁에서 승리한 것, 방덕이 분노한 것, 우금이 항복할 때의 상황을 그리도록 했다. 우금은 그것을 보고 참회하고 한탄하다가 병이 나서 죽었다. 아들 우규(于圭)가 익수정후를 계승했다. 시호를 여후(慮侯)라고 했다
등애전------------등애는 자가 사재이고, 의양군 조양현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며, 조조가 형주를 격파했을 때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길렀다. 열두 살때,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러 태군의 장 진식의 비문을 읽고 말했다. '문장은 세인들의 모범이 되고, 행위는 선비들의 준칙이 된다.' 등애는 마침내 스스로 이름을 범으로 바꾸고, 자를 사칙이라고 했다. 후에 종족 중에서 그와 이름이 같은 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개명했다.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었지만 가난하여 간좌(문서를 다루는 각 부서의 보좌관)도 할 수 없어 도전수총초리가 되었다. 같은 군 관리의 부친이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재물을 후하게 주었지만, 등애는 처음부터 사례도 표하지 않았다. 그는 매번 높은 산과 큰 못을 볼때마다 군영 설치에 적당한가 헤아려서 그림으로 나타냈는데,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그를 비웃었다. 후에 전농강기가 되었으며, 상계리가 되었다. 때문에 태위 사마선왕을 만날 수 있었다. 사만선왕은 그가 보통 사람과 달리 기이한 면이 있음을 알고는 불러서 속관으로 임명했으며, 상서랑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밭을 개간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적국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 등애를 진과 항의 동쪽인 수춘지역까지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했다. 등애는 생각했다. '토지는 좋지만 수원이 적어 땅의 이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겠군. 응당 운하를 개통해야 돼. 그러면 물을 끌어서 관리할 수 있겠어. 그렇게 되면 군대 식량을 대량으로 비축할 수 있고, 또 식량을 운송하는 길을 개통할 수 있지.' 그래서<<제하론>>을 지어 그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는 황건족을 격파시킨 것을 계기로 둔전을 실행하고, 허도에 곡식을 비축하여 사방을 제어했었습니다. 지금 세 방면의 변방은 이미 평정되었으나, 회수 남쪽만 남아 있습니다. 매번 대군이 정벌하러 출동할 때, 식량을 운송하는 병사가 절반을 넘었고, 막대한 비용이 들어 거대한 노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과 채 사이의 땅은 낮고 밭은 기름지므로 허창 주위의 모든 논을 없애고 물을 대면 동쪽으로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회북의 둔병 2만명과, 회남의 둔병 3만 명을 10명중 2명씩 돌려가며 쉬게 하고, 항상 4만 명에게는 한편으로는 밭을 갈게 하고 한편으로는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인원이 풍족하여 항상 서쪽 지역보다 세 배를 수확할 것이고, 경작 비용을 제외하고 계산해도 매년 5백만 석이 군대의 비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6,7년 사이에 3천만 석이 회수의 연안 지역에 쌓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10만 병사가 5년간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이런 역량으로 오나라를 공격하면 원정하더라도 승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마선왕은 그의 진언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이 일을 모두 시행하였다. 정시 2년(241), 곧 운하가 넓게 개통되었는데, 매번 동남쪽에 일이 발생하면 대군이 출동하여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회수에 도착하였음, 물자와 식량이 회복되어 있고 수해가 없었으니, 이는 등애가 세운 공로였다. 등애는 지방으로 나가 참정서군사가 되었고, 남안태수로 승진했다. 가평 원년(249)에 등애는 정서장군 곽회와 함께 촉나라의 편장군 강유를 막아냈다.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가 말했다. '적군은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응당 병사들을 나누어 의외의 일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마선왕은 등애를 남겨 백수 북쪽에 주둔하도록 했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파견하여 백수 남쪽으로부터 등애를 향하여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다. 등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강유는 지금 갑자기 돌아왔고, 우리는 병사가 적소. 병법에 의하면 적은 당연히 물을 건너야 하지만 다리를 만들 수는 없소. 이것은 강유가 요화를 보내어 우리를 견제하여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이오. 강유는 반드시 동쪽으로부터 조성을 습격할 것이오.' 조성은 백수 북쪽에 있었으므로 등애와는 60리 떨어져 있었다. 등애는 밤에 몰래 군사를 움직여 곧장 조성에 이르렀다. 강유는 과연 물을 건넜지만 등애가 먼저 도착하여 조성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는 데 실패하지 않았다. 등애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으며, 토구장군의 관직을 더하였고, 후에 성양태수로 바꿔 임명하였다. 이 당시 병주에 있던 우현왕 유표가 흉노를 합병하여 한 부족으로 받들자, 등애가 표를 올려 말했다. <융적은 야수의 마음을 갖고 있으므로 도의로써 친하지 않습니다. 강대하면 침범하여 잔폭하게 굴고, 쇠약하면 중앙으로 향해 순종하며 의지합니다. 때문에 주선왕 시대에는 험윤의 침입이 있었고, 한나라 고조 시대에는 평성에서 흉노의 침입이 있었던 것입니다. 흉노가 일단 강성해질 때마다 이전 시대에는 중대한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선우가 중국의 밖에 있은 이후부터 그들의 부족장과 민중들을 견제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그들을 유인하여 국내로 오게하여 의탁하게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강이는 통솔자를 잃었고, 모이고 흩어지는 일에 만리가 하나의 규범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지금 국경 내에 있는 선우의 권위는 나날이 감소해가고, 외지에 있는 이민족들의 위엄이 점점 높아만 간다면, 북방 오랑캐에 대해 깊이 대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유표의 부하 중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가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반란을 틈타서 그들을 두 나라로 분할하여 세력을 나누도록 하십시오. 거비는 이전의 조대(무제 시대)에서 공적이 역력하였지만, 그의 자손은 사업을 이을 수 없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에게 고귀한 칭호를 더해 주어 안문에 거주하도록 하십시오. 흉노의 나라를 분리하여 세력을 약하게 하고, 옛날의 공훈에 대하여 추적하여 기록하는 것, 이것이 변방을 제어하는 장기간의 계책입니다.> 또 진술했다. <강호 중 민중과 같은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응당 축출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염치의 교화를 숭상하도록 하여 간사하고 악한 길을 막아야 합니다.> 대장군 사마경왕(사마사)은 이제 막 정치를 보좌하게 되었지만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등애는 여남태수로 전임하였다. 등애가 여남에 이르자 과거에 자신을 후하게 대우했던 관리의 아버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관리를 보내 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선물을 보내주었으며, 그의 아들을 추천하여 계리로 임명했다. 등애가 다스린 곳은 황량한 벌판이 개간되었고, 군대와 백성은 모두 풍족한 생활을 했다. 제갈각이 합비의 신성을 포위하였지만,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는데, 등애가 사마경왕에게 말했다. '손권은 이미 죽었고, 대신들은 새로운 군왕에게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나라의 명가와 호족은 모두 자기의 사병을 갖고 있으므로 병사의 세력에 의지하면 제위를 찬탈하기에 충분합니다. 제갈각은 방금 국정을 담당하였고, 내부에는 아직 걸주가 없습니다. 그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어루만져 근본을 공고하게 할 생각은 못하고 외부의 일로 바쁘며, 그 백성들을 잔폭하게 사용하고, 나라의 전 병력으로 위나라의 견고한 성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여 죽은 사람이 만 여명이나 되고, 화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제갈각이 죄를 받을 날인 것입니다. 옛날에 자서,오기,상앙,악의 등은 모두 당시의 군주에게 임용되었지만, 군주가 죽자 실각했습니다. 더욱이 제갈각의 재능은 네 명의 현인에 미치지 못하고, 큰 재난에 대한 근심도 없으니, 그의 멸망은 기다릴 만합니다.' 제갈각은 귀국하자 과연 주살되었다. 등애는 연주자사로 옮겼으며, 진위장군을 더하였다. 표를 올려 말했다. <나라의 긴급한 업무는 오직 농업과 전쟁뿐입니다. 나라가 부강하면 병력이 강대해지고, 병력이 강대해지면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농업이 승리의 근본입니다. 공자는 정치에 대해 질문을 받자 '식량을 풍족히 하고 병사를 풍족히 하라'고 하여, 식량을 병사보다 앞에 두었습니다. 위에서 작위를 설치하여 경작을 권하지 않으면 아래서 재산축적의 공이 없게 됩니다. 지금 정치적 업적을 고찰할 때의 상을 곡식을 축적하여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자를 중심으로 하여 내린다면, 교류의 길은 끊어지고, 겉표면을 수식하는 풍조는 막히게 될 것입니다.> 고귀향공이 제위에 오르자, 등애를 승진시켜 방성정후로 봉했다.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 잘 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등애가 그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가게 하고 우선 악가성으로 달려가 부교를 만들었다. 사마경왕이 도착하자, 그대로 악가성을 점거했다. 문흠의 대군은 위의 대군보다 늦게 왔으므로 성 아래에서 패배하였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추격하였고,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오나라 대장군 손준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정원 2년(255), 등애는 소환되어 장수교위로 임명되었으며, 문흠 등을 격파시킨 공로가 있었으므로 나아가 방성향후로 봉해졌으며, 안서장군을 대행했다. 등애는 적도에서 포위당한 옹주자사 왕경을 풀어주었고, 강유는 물러나 종제에 주둔하였다. 그래서 등애를 안서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가절,영호동강교위가 되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강유의 병력은 이미 다하여 병사를 내어 다시 공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등애가 말했다.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 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비었고, 백성들은 갈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증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이유입니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은 각기 지켜야만 합니다. 적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남안과 농서를 향한다면 강인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일 기산으로 향한다면 1천 이랑이나 되는 잘 익은 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오래지 않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서 상규로 달려갔다. 등애는 강유와 단곡에서 교전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감로 원년(256), 조서를 내려 말했다. <역적 강유가 해마다 교활한 행동을 하여 백성들과 만족을 동요시켜 서쪽 땅은 편안할 수 없었다. 등애는 이치에 맞는 계획을 세우고, 충절과 용기를 떨쳐 일어나 적장 20여명을 죽였고, 죽인 적군의 병사는 많다. 국가의 위엄을 파와 촉에 떨치고, 무용의 명성을 장강과 민강에 흐르게 했다. 지금 등애를 진서장군, 도독농우제군사로 삼고, 나아가 등후로 봉한다. 그의 식읍 5백 호를 떼어 아들 등충에게 주어서 정후로 삼으라.> 2년(257), 등애가 장성에서 강유를 방어하자 강유는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정서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앞뒤로 증가한 식읍은 총 6천 6백 호나 되었다. 경원 3년(262), 또 후화에서 강유를 격파시켰으며,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4년 가을, 조서를 내려 각 군대가 촉나라를 정벌하도록 명령했고, 대장군 사마문왕이 모든 지휘를 하고, 등애로 하여금 강유와 전선에서 대치하도록 하였고, 옹주자사 제갈서에게 강유의 퇴로를 끊어 강유가 돌아갈 길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 등을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으며, 농서태수 견홍 등을 보내 강유군대의 앞에서 싸우도록 하고, 금성태수 양흔등에게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제군대가 이미 한중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양흔 등은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다. 강유가 패하여 달아났는데, 옹주가 벌써 길을 막고 교두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공함곡으로부터 북쪽 길로 들어가서 옹주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여 30리를 돌아갔다. 강유가 북쪽 길로부터 30여리 진입하였는데,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곧 돌아서 교두를 통과했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했다. 강유는 곧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물러나 검각을 지켰는데, 종회가 강유를 공격하였지만, 이길 수는 없었다. 등애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지금 적군의 역량은 찢겨지고 훼손되었으므로 응당 이 기회를 타서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성으로 간다면, 검각의 서쪽 백 리를 지나 성도로부터 3백여 리 되는 곳에서 기습병이 적의 중심부를 뚫을 수 있습니다. 검각의 수비군은 반드시 돌아서 부성으로 달아날 것이고, 이와 같이 되면 종회는 곧 큰 길을 따라 전진할 수 있습니다. 검각의 군사가 돌아가지 않으면 부성을 구원하는 병사는 적을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 병서에서는 '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공격하고,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을 뚫어라'고 했습니다. 지금 적의 공허한 곳을 습격하면, 그들을 격파시키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겨울 10월, 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선두 진영이 강유(江由)에 도착하자, 촉나라 수비대장 마막이 항복했다. 촉나라 위장군 제갈첨은 부성에서 면죽으로 돌아와 진영을 나란히 정렬하고 등애를 기다렸다. 등애는 아들 혜당정후 등충 등에게 적의 오른편에서 출격하도록 하고, 사마 사찬등에게는 적의 왼편에서 출격하도록 했다. 등충과 사찬은 전세가 불리했으므로 나란히 퇴각하여 돌아와서 말했다. '적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등애는 화를 내며 말했다. '존망의 구분은 이 한 싸움에 달려있다.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곧 등충과 사찬을 질타하고 그들의 머리를 베려고 했다. 등충과 사찬은 급히 돌아가 다시 싸워 크게 격파시키고 제갈첨과 상서 장준 등의 머리를 베고, 락까지 진군했다. 유선이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와 인수를 받들고, 등애에게 편지를 써서 투항을 청했다. 등애가 성도에 도착하자, 유선은 태자와 제왕 및 신하 60여 명을 이끌고 결박을 하고서 군문에 출두했다. 등애는 부절(군사권)을 쥐고 결박을 풀고 관을 태우고, 그들을 받아들여 용서했다. 등애는 촉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한 일이 없고, 항복한 자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옛 사업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등애를 칭찬했다. 후한 초,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촉나라 신하들은 각자 지위의 고하에 따라 왕의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사찬을 익주자사대리로 임명하고, 농서태수 견흥 등이 촉나라 안의 각 군을 대신 관리했다. 사람을 보내 면죽에 누대를 건축하여 경관을 만들어 전공을 빛내는데 사용했다. 전쟁중에 사망한 병사들은 모두 촉나라 병사와 함께 매장했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이 탁월하다고 뽐내면서 촉나라 사대부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나를 만났기 때문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오나라나 한나라 같은 무리들을 만났다면 이미 주살되었을 것이다.' 또 말했다.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식견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12월,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군의 위엄을 나타내고 무력을 떨쳐서 적지 깊숙이 들어가 적장의 목을 베고 깃발을 빼앗고, 악한 사람들을 죽였다. 제왕이라고 참칭한 군주로 하여금 머리를 땅에 박고 목을 빼게 하였다. 몇 대를 걸쳐 처벌을 면제받았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평정되었다. 병사를 사용함에 있어서 시간을 넘지 않았으며, 싸움에 있어서는 하루를 다 사용하지 않고, 구름을 자르고 자리를 마는 것처럼 파와 촉을 평정하였다. 비록 백기(전국 시대 秦의 명장)가 강대한 초나라를 격파하고, 한신이 강력한 조나라를 이겼으며, 오한이 자양(공손술)을 잡았고, 아부(전한시대의 명장)가 일곱 나라를 멸망시켰을지라도, 공적을 계산하고 성과를 논하면 이번 훈공에 비교할 수 없다. 등애를 태위로 임명하고 식읍을 2만 호를 증가시키고, 아들 두 명을 정후로 봉하여 각기 식읍 천 호 식을 주도록 하라.> 등애가 사마문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병사를 다룰 때에는 먼저 성세를 조성한 후에 실제 행동을 해야 합니다. 현재 촉을 평정시킨 형세를 타서 오나라를 공격하면, 오나라 사람은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니, 오나라를 말아버릴 기회입니다. 그러나 크게 일으킨 이후이므로 장수와 병사들은 피로하여 곧 용병할 수 없으니, 이 일을 늦추십시오. 농우의 사병 2만 명과 촉나라 병사 2만 명을 머물게 하여 제염과 철주조를 흥성하게 하고, 군사와 농업의 긴급함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배를 만들어 물의 흐름을 따라가 공격할 준비를 한 연후에 사절을 보내 그들에게 이해관계를 설명하도록 한다면, 오나라는 반드시 귀환하여 정벌하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응당 유선을 후하게 대우하여 손휴를 오도록 하고, 촉나라의 병사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여 먼 곳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순하게 해야 합니다. 설령 곧 유선을 수도로 보내 오나라가 그를 버린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귀순하라고 다시는 권하지 못하게 됩니다. 응당 잠시 머물면서 다음해 가을과 겨울을 기다리면 오나라 또한 충분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유선을 부풍왕으로 임명하고, 재산과 재물을 내려 그의 수하들을 돌보도록 하십시오. 부풍군에는 동탁오가 있으므로 그에게 궁전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의 아들을 공작과 후작으로 봉하고 부풍군 내의 현을 다스리도록 하고 귀순하여 투항하면 총애를 받을 수 있음을 나타내십시오. 광릉, 성양을 열어서 오나라 사람을 기다리면, 당신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망에 감사하여 바람을 바라보고 따를 것입니다.> 사마문왕은 감군 위관으로 하여금 등애에게 말하도록 했다. '이 일은 당연히 보고해야 하므로 즉시 시행하지는 못하오.' 등애는 재차 상소를 올려 말했다. <저는 명령을 받아 출정하여 지휘 계책을 받든 결과, 원흉은 이미 항복하였습니다. 조서를 받고 임시 관원이 되기를 청하여 새로 귀순한 사람들은 안무한 것은 당시 형세에 부합되는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촉나라 백성들은 전부 귀순하였고, 영토는 남해에까지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오회에 접해 있으니, 응당 빨리 진압하여 평정해야만 합니다. 만일 국가의 명령을 기다린다면, 길가에서 오가며 시간을 끌 뿐입니다. <<춘추>>의 대의는, 대부는 국경을 나와사직을 안정시키고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에는 독단적으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오나라는 아직 순종하지 않고 있고, 그 지세는 촉나라와 이어져 있으므로 일상적인 규정에 구애되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을 수는 없습니다. 병법에서는 나아가 명성을 구하지 않고, 물러나 죄를 피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 등애는 비록 고인의 절의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불만으로 인해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종회,호열,사찬등은 모두 등애의 행동은 반역에 해당되고 변란의 징조가 있다고 아뢰었다. 조서가 내려져 죄인을 수송하는 수레로 등애를 불렀다. 등애 부자가 이미 구금된 후, 종회는 성도로 가서 먼저 등애를 보낸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가 벌써 피살된후, 등애의 본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은 등애를 가둬 싣고 가는 수레를 추격하여 등애를 영접하여 돌아왔다. 위관은 전속 등을 파견하여 등애를 토벌하도록 하고, 면죽 서쪽에서 만나 등애를 죽였다. 아들 등충은 등애와 함께 죽었고, 낙양에 있는 그밖의 아들은 전부 살해되었다. 등애의 처와 손자는 서역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당초, 등애가 촉나라를 토벌할때, 산 정상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는 꿈을 꾸었었다. 진로호군 원소에게 이꿈에 관해 묻자, 원소가 말했다. '<<역>>에 괘에 의하면, 산위에 물이 있는 것을 건이라고 합니다. 건의 괘사에는' 건은 서남쪽에는 유리하고 동북쪽에는 불리하다'고 했고, 공자는 '건이 서남쪽에 유리하다는 것은 전진해 공로가 있는 것이고, 동북쪽에 불리하다는 것은 그 길이 다했다는 의미이다' 라고 했습니다. 가면 반드시 촉나라를 무찌를 수 있지만, 아마 돌아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등애는 망연한 채 불쾌했다. 태시 원년(265), 진 왕실이 제위에 오르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옛날에 태위 왕릉은 제왕을 폐위시키려는 계획을 하였고, 제왕은 결국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정서장군 등애는 공훈을 과시하여 절의를 잃었으므로 사실상 당연히 큰 죄를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체포하라는 조서를 받았을 때는, 부하들을 멀리 보내고 손을 묶어 죄를 받았다. 살기를 구하고 악한 일을 한 자와 비교하면 진실로 또 다르다. 지금 대사면을 내리니 그들의 가솔들을 돌아오게 하라. 만일 자손이 없는 경우에는 후사를 세우게 하여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3년(267), 의랑 단작이 상소를 올려 등애를 변호하는 말을 했다. <등애는 지극히 충성스런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반역자라는 이름을 짊어지게 되었고, 파와 촉을 평정했지만 전가족이 주살되는 죄를 받았으므로, 신은 사사로이 그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등애가 모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유감입니다! 등애는 성격이 강직하고 급하였으므로 고아한 사람과 속인을 쉽게 범하여 동료들과 합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은 감히 등애가 모반할 수 없는 실정을 말씀드립니다. 옛날 강유가 농우를 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을 때, 등애는 수비를 정돈하고 엄격히 지키며 곡물을 축적하고 병력을 강하게 했습니다. 흉작과 가뭄이 있는 해에는, 등애는 직접 경작을 하고, 검은 색 옷을 입고, 손에는 보습을 쥐고 장수와 병사들을 인솔하였습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서로 감동을 받아 힘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등애는 지절을 갖고 변방을 수비하고 수만명을 통솔하였는데, 노복으로 하여금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며, 관리와 백성들의 노역을 가중시키지 않았습니다. 절의를 갖고 충성과 근면함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때문에 낙문과 단곡의 싸움에서는 적은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을 공격하여 강한 적을 격파시켰던 것입니다. 이전의 황제께서는 그가 임용될만한 사람임을 아시고, 조정의 승리를 위임하고 훌륭한 책략을 주셨습니다. 등애는 명령을 받고는 자신의 몸을 잊고 말을 메어놓고 수레를 이어서 직접 사지에 몸을 던졌는데, 그의 용기는 구름을 덮었고, 병사들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나아갔으므로 유선의 군신들로 하여금 직접 손에 결박을 하게 하고, 우리에게 두 손의 손가락을 서로 어긋물제 끼고 무릎을 꿇도록 하였습니다. 등애의 공명은 벌써 이루어졌으므로, 마땅히 그의 공적을 대나무나 비단에 적어 만세까지 전해야만 됩니다. 일흔 살의 노인이 모반을 하여 무엇을 구하려 했겠습니까! 등애는 실제로 양육의 은혜에 기대어 마음속에는 스스로 의심하는 것이 없었으며, 잘못 전해진 명령이 조정의 조서라고 말하고 받아 사직을 안정시키려고 도모했습니다. 비록 통상적인 법령을 위배할지라도 옛날 의미에 부합되는 것이 있으며, 그의 본심에 근거하여 죄를 정하면 본래 상의할 만한 것은 있습니다. 종회가 등애의 위엄과 명성을 시기하여 이런 일을 만든 것입니다. 충성을 했지만 주살당하고, 신의를 다했지만 의심을 받은 것입니다. 등애의 머리를 말시장에 걸고 아들들이 함께 참수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탄식을 했습니다. 폐하께서 제위에 올라 커다란 도량을 분명하게 하시어 갖가지 의혹들을 풀어주었으며, 주살당한 사람의 가족 또한 구애됨이 없이 임용했습니다. 과거 진나라 백성들은 백기의 무죄를 불쌍하게 여겼고, 오나라 사람들은 자서의 억울한 참변을 가슴 아파하고, 모두 그들에게 사당을 세워주었습니다. 지금 천하의 백성들이 등애를 애도하고 통한해 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신은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들판에 버려져 있는 등애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고, 그 전택을 유족에게 돌려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촉나라를 평정한 공훈으로써 계속하여 그의 손자들을 봉하고 관을 덮은 후에 시호를 정하게 하시면 죽었지만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황천에 있는 등애의 영혼을 사면시켜 주시고 후세에 신의를 얻게 하십시오. 한 사람을 안장하여 천하 백성들이 당신의 덕행을 흠모하게 하고, 한 영혼을 매장하여 천하 사람들이 당신의 인의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하시는 일은 적지만 기뻐하는 자는 많을 것입니다.> 9년(273), 조서를 내렸다. <등애는 공훈이 있고, 벌을 받았을 때 형법을 피해 달아나지 않았으나 자손들은 평민이나 노예가 되었다. 나는 항상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지금 장손 등랑을 낭중으로 임명하라.> 등애가 서쪽에 있을 때, 변방의 경계선이 되는 성벽의 관새를 수리하고 성과 보루를 쌓았다. 태시 연간, 강족이 큰 반란을 일으켜 여러 차례 자사를 살해하고 양주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관리와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등애가 쌓은 성과 보루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등애와 같은 주의 출신인 동료 남양의 주태 또한 공업을 세우기를 좋아하고 용병에 뛰어났다. 관직은 정로장군과 가절도독강남제군사까지 이르렀다. 경원2년(261)에 세상을 떠났고, 위장군으로 추증했으며, 시호를 장후라고 했다
이통전--------------이통은 자가 문달이고 강하군 평춘현 사람이다. 의로운 행동과 협기로써 장강과 여수 사이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는 같은 군 사람 진공과 함께 낭릉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했다. 그 당시 주직(周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부하가 2천여 가구나 되었다. 진공과 이통은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었으나, 속으로는 틈이 벌어져 있었다. 이통은 진공에게는 과단성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독자적으로 계책을 정하여 주직과 회합을 열어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주직을 살해했다. 사람들은 큰 소동을 벌였지만, 이통은 진공을 이끌고 그 도당의 두목을 주살하고, 그 진영을 모두 병합했다. 후에 진공의 처남 진합이 진공을 죽이고, 그의 부하들을 다스렸다. 이통은 진합의 군대를 공격하여 무찌르고, 진합의 머리를 베어 진공의 무덤에 제사지냈다. 또 황건군의 대통사 오패를 사로잡았고 그의 부하들을 투항시켰따. 마침 대기근을 만나자, 이통은 집이 기울 정도로 베풀고 가산을 모두 흩어 구제하고, 사졸들과 함께 거친 음식을 먹었으므로, 모두 다투어 그를 위해 공을 세우려 했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은 감히 그를 침범하지 않았다.
건안 초, 이통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허창에서 조조를 알현했다. 조조는 이통을 진위중랑장(振威中郞將)으로 임명하고, 여남 서쪽 경계 지역에 주둔하도록 했다. 조조가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 유표가 병사를 보내 장수를 도왔으므로 조조의 군대가 불리했다. 이통은 병사를 이끌고 밤에 와서 조조를 만났으며, 조조는 그의 부대를 다시 출전시키고, 이통이 선봉을 담당하도록 하여 장수군을 크게 이겼다. 조조는 이통을 비장군으로 임명하고 건교후(建巧侯)로 봉했다. 여남군을 두 현으로 나누고, 이통을 양안도위로 임명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이통 아내의 백부가 법률을 범하였으므로, 낭릉(朗陵)의 장 조엄(趙儼)이 체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 그 당시 죽이고 살릴 수 있는 권한은 목(牧)이나 태수 손에서 결정되었으므로, 이통의 아내는 울면서 그의 목숨을 구제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이통이 말했다. '나는 조공과 함께 대업을 완성하려고 힘을 다하고 있소. 절대로 사사로운 정 때문에 공적인 법을 버릴 수는 없소.'
이통은 조엄이 법을 집행하는데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려는 것을 가상히 여겨 그와 좋은 친구 관계를 맺었다.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가 사자를 보내 이통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했고 유표가 몰래 또다시 이통을 불렀으나 이통은 모두 거절했다. 이통의 친척과 부하들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은 고립되어 위험한 상황에서 단독으로 지키고 있는데, 강대한 원조를 잃으면 지키며 기다릴 방법도 없으니, 빨리 원소에게 돌아가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이통은 칼을 움켜쥐고 그들을 질타하며 말했다. '조공은 현명하고 이치에 밝아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이오. 원소는 비록 지금은 강성하지만, 함부로 임용하고 계책도 없으니 결국에는 조공의 포로가 될 것이오. 나는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조공에게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소.'
즉시 원소의 사자를 죽이고, 인수(印綬)를 조조에게 보냈다. 또 군 안에 있는 도적 적공(翟恭),강궁(江宮),심성(沈成) 등을 공격하여 남김 없이 무찌르고 그들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그리고 회하와 여수 일대를 평정하였으니 도정후로 바꿔 봉하고, 여남태수로 임명했다. 이 때 도적 장적(張赤)등 5천여 명이 도산(桃山)에 모였는데, 이통이 그들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이통은 도중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그 해 42세였다. 식읍 2백 호를 추증하여 이전 것과 합쳐 4백 호가 되었다. 문제가 제위에 즉위한 후, 시호를 강후(剛侯)라고 하였으며, 조서를 내렸다.
--- 옛날에 원소가 병사를 일으켜 어려웠을 때, 허(許),채(蔡) 남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이통은 도의를 지키고 다른 것을 돌아보지도 않았으며, 마음 속에 두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충심을 따르도록 하였으므로 짐은 그를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불행하게도 일찍 죽어 아들 이기(李基)가 비록 작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공훈에 보답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기의 형 이서(李緖)는 이전에 번성에 주둔하였고, 또 전공을 세웠다. 지금 그의 공로를 중시하여 이기를 봉의중랑장으로 임명하고, 이서를 평로중랑장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특별히 총애하라. ..
조홍전---------------조홍의 자는 자렴이고, 조조의 사촌 동생이다. 조조는 의병을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려고 영양까지 왔지만, 동탁의 대장 서영에게 패배했다. 조조는 타고 가던 말을 잃었고, 적군의 추격은 너무도 빨랐다. 조홍이 말에서 내려 자기 말을 조조에게 주자 조조가 사양했다. 조홍이 말했다. "천하에 저 조홍은 없을 수 있지만, 당신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도보로 조조를 수행하여 변수가로 왔는데, 뜻밖에도 물이 너무 깊어 건널 수 없었다. 조홍은 강가를 따라가서 배를 찾아 조조와 함께 물을 건너 초현으로 달려왔다. 양주 자사 진온은 평소 조홍과 친하게 지냈으므로, 조홍은 사병 천여 명을 인솔하여 진온이 있는 곳으로 가서 병사를 모아, 여강군의 정예 무장병 2천여명을 얻었고, 동쪽으로는 단양에 가서 또 수천 명을 얻어 용강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 장막이 연주를 내주어 조조를 배반하고 여포를 맞이했다. 그 당시 대기근이 있었지만, 조홍은 병사들을 앞쪽 으로 두고 나아가게 하여 먼저 동평과 번을 점거하고 식량을 모아 병사들에게 나눠주었다. 조조가 복양에서 장막과 여포를 공격하니, 여포는 패하여 달아났고 조홍은 동아를 점거하고 병사들을 돌려 제음·산양·중모·양모·경·밀 등 10여 현을 공격하여 모두 점령했다. 조홍은 앞뒤의 전공으로 응양교위로 임명되었으며, 또 양무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천자는 수도를 허창으로 정하고, 조홍을 간의대부로 임명하였다. 유표를 정벌하도록 하여 제양·음엽·도양·박망 등지에서 유표의 부하 장수들을 물리쳤다. 전공이 있으므로 여봉광군으로 승진되고 국명정후에 봉해졌다. 조홍은 여러 차례 정벌하였으므로 훗날 관직이 도호장군으로 되었다. 문제가 즉위하자, 조홍을 위장군으로 삼았다가 표기장군으로 승진시켰고, 나아가 야왕후로 봉해 식읍을 1천 호 내렸으므로 이전의 것과 더하면 2천1백 호가 되었다. 특진의 자리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도양후로 봉해졌다. 본래 조홍은 집이 부유하였지만 성품은 인색했다.
문제는 어렸을 때 조홍의 집에서 재산을 빌리고 싶었지만 말은 하지 못하고, 항상 그를 미워했다. 즉위한 후 조비는 조홍의 식객이 법을 어긴 것을 구실로 조홍을 옥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했다. 많은 신하들이 함께 그를 도우려고 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문제의 생모 변태후가 곽후에게 말했다. "조홍을 오늘 죽게 한다면, 나는 내일 문제에게 칙령을 내려 당신을 황후의 자리에서 내쫓도록 할것이오." 그래서 곽태후는 눈물을 흘리며 몇 차례에 걸쳐 조홍을 대신하여 애원하고 간청하여서 조홍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작위를 말소시키는 관대한 처분을 받게 되었다. 조홍은 선제(무제)의 공신이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은 문제의 이와 같은 박해에 대해 대부분 불평했다.
명제가 즉위한 후, 조홍은 다시 *군이 되었고, 낙성후에 봉해졌으며, 식읍이 1천 호로 특진의 자리로 승진하였고, 또 표기장군이 되었다. 태화 6년(232)에 조홍이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공후라고 했다. 조홍의 아들 조복이 후위를 이었다. 조조 때에는 조홍의 영지를 분할하며, 아들 조진에게 나누어 주고 열후로 봉했다. 조홍의 재당숙 조유는 신중하고 근명하며 성실했는데, 관직은 위장군에 이르렀고 열후에 봉해졌다.
방덕전------------방덕은 자가 영명이고 남안군 훤도현 사람이다.
젊었을 때 군리와 주의 종사가 되었다. 초평 연간, 마등을 따라 모반한 강족과 저족을 공격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으므로 교위까지 승진했다. 건안 연간, 조조가 여양에서 원담과 원상을 토벌하였을 때, 원담은 곽원, 고간 등을 보내 하동을 공격해 점거하였고, 조조는 종요로 하여금 관중의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게 하여 그들을 토벌했다. 방덕은 마등의 아들 마초를 따라 평양에서 곽원과 고간을 방어했는데, 방덕이 선봉에 서서 곽원과 고간을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으며, 직접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중랑장에 임명되고, 도정후로 봉해졌다. 후에 황건군의 일당인 장백기가 홍농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방덕은 또 마등을 따라 장백기를 토벌하러 갔는데, 두 효산 사이에서 그를 무찔렀다. 매번 전투 때마다 항상 선봉에 서서 적의 진영을 함락시켜 적군을 퇴각시켰으므로, 마등의 군중에서 가장 용맹스러웠다. 나중에 마등이 조정의 부름을 받아 위위로 임명되자, 방덕은 남아 마초에0게 귀속되었다.
조조가 위남에서 마초를 공격하자, 방덕은 마초를 따라 한양으로 달아나서 기성을 지켰다. 후에 또 다시 마초를 따라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를 따랐다.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방덕은 사람들을 따라 함께 투항했다. 조조는 평소 방덕의 용맹함과 위엄있는 무예를 들었으므로, 입의장군으로 임명하고 관문정후에 봉했으며, 식읍을 3백 호 주었다. 후음과 위개 등이 완성을 점거하고 조조에게 모반하자, 방덕은 부하들을 인솔해 조인과 함께 완성을 공격하여 후음과 위개를 참수했다. 남하하여 번성에 주둔하여 관우를 토벌했다. 번현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당형이 한중에서 유비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방덕을 의심했다.
방덕이 항상 말하길, "나는 나라의 은혜를 깊이 입었으므로, 뜻을 세워 나라를 위해 죽겠소. 나는 몸소 병사를 이끌고 관우를 공격할 것이오. 올해 내가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그가 나를 죽일 것이오."
후에 친히 관우와 교전하였고, 화살로 관우의 이마를 맞추었다. 그 당시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탔으므로, 관우가 있는 번성의 군사들은 그를 백마장군이라고 부르며 모두 두려워했다. 조인은 방덕을 보내 번성 북쪽으로 10리 쯤 되는 곳에 주둔하도록 했는데, 마침 10여 일간 비를 만나 한수가 범람하고, 번현의 물이 땅 위로 5,6척이나 올라왔으므로, 방덕은 여러 장수들과 물을 피해 제방으로 올라갔다. 관우가 배를 타고 그들을 공격하였는데, 큰 배의 사면에서 제방위로 화살을 쏘았다.
방덕은 몸소 갑옷을 입고 활을 갖고 쏘았는데 빗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장군 동형, 부곡장 동초 등이 투항하려 하자, 방덕은 그들을 죽였다. 날이 밝을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웠지만, 관우는 더욱 급속도로 공격하였고, 화살을 모두 사용하자 짧은 병기로 싸웠다. 방덕은 독장 성하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훌륭한 장수는 죽음을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삶을 살려 하지 않고, 열사는 절개를 훼손시켜 생존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오. 오늘이 내가 죽는 날이오."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고, 기세는 더욱 웅장해졌다. 물이 점점 불어났으므로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투항했다. 방덕은 휘하 장수 한명, 오백 두명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조인의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물살이 급하여 배가 전복되고, 활과 화살이 모두 떨어지고, 오직 배만 껴안고 물 위에 떠 있었으므로 관우에게 붙잡혔으나, 서 있을 뿐 무릎도 꿇지 않았다. 관우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 형이 한중에 있으니, 나는 당신을 장수로 삼으려 했는데 무엇 때문에 일찍 투항하지 않았소?"
방덕은 관우에게 심하게 욕하며 말했다.
"이놈, 무슨 투항을 말하는가! 위왕은 병사 백만을 거느리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있다. 당신의 유비는 용렬한 인물에 불과한데, 어떻게 위왕과 필적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찌 국가의 귀신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적의 장수가 되겠는가."
마침내 관우에게 살해되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하며 눈물을 흘리고, 그의 두 아들을 열후로 삼았다. 문제가 왕의 자리에 즉위한 후, 사자를 방덕의 묘로 보내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책(위왕의 조서)에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선진이 머리를 잘리고, 춘추시대의 왕촉이 다리를 잘린 것은 몸을 훼손시켜 절개를 지킨 것으로 이전 조대에서는 그들을 찬미했다. 오직 그대만이 과감하고 강인함을 나타내고, 어려움에 직면하여 몸을 던져 공명을 성취했다. 명성은 그 당시에 가득 찼으며, 의로움은 옛날 사람보다 높으니, 과인은 그대를 안타까이 여겨, 시호를 장후라고 하노라.>
또 방덕의 아들 방회 등 네명에게 관내후라는 작위를 주고, 식읍을 각 백 호씩 주었다. 방회의 용맹함과 강인함에는 부친의 풍모가 있었으며, 관직은 중위장군에까지 이르렀고, 열후에 봉해졌다.
조조전-----------동파지림에서 왕팽상이 말하기를 '마을의 아둔한 어린 아이들은 집안에서 귀찮은 존재이므로 곧 한데 모아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국의 고사를 이야기할 때에 유현덕이 패배하였다는 말을 들으면 이맛살을 찡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으며, 조조가 패배했다는 말을 들으면, 곧 기뻐하곤 하였다' 고 했다.
나관중이 삼국지 연의를 쓸 당시에도 이와 같은 옹유반조 사상이 두드러져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에서의 조조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인이오 간웅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때 당시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의 우리들은 조조의 모습을 그렇게 나쁘게 만은 보지 않는다.
하루빨리 전국을 통일해서 백성들을 평온으로 이끌기 위한 군주의 모습으로 보면은 조조의 행동이 절대 나쁜게 아니라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조조의 그런 모습은 당연시 되고 있다.
조조는 모든 면에서 두드러진 인물이다.
나관중 자신도 조조의 그런 두드러진 모습을 그려 내고 있다.
조조는 정치가로써 문인으로써 장수로써 일반인들이 따르지 못할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조조의 정치가로써의 모습은 그가 전쟁을 치르고 나서 자기 고향을 지나다가 부하장수에게 자신을 위해 싸우다 죽은 고향 병사들의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라고 지시한 면에서도 찾아 볼수 있다.
이런 제도는 세계 최초라 한다.(어떤 제도인지 이름이 생각이 안납니다.어디서 본것인지도 까먹어서 그냥 적습니다.)
군량의 조달과 백성의 편의를 위해 둔전제란 것도 만들어서 많은 성과를 올리기도 한다.
전쟁중에도 시흥이 돌면 시를 읊조리고 문장을 남기는등 문인으로써도 인정 받는다.
문인으로써의 조조의 모습은 그가 가진 여러 가지 능력에 비해 떨어지므로 당대 최고라 말 할 수는 없으나 일반 범인이 따를 수 없는 경지였다.
하지만 조조의 문인으로써의 재질은 그의 세째 아들 조식에게 그대로 이어져 지금도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는 '칠보시'를 남긴다.
번외로 칠보시는 당시 왕위를 계승한 조비가 자신의 동생인 조비를 죽이기위한 핑계로 일곱 발자욱을 떼기 전까지 하나의 시를 지으라 해서지은 시라한다.
그 내용이 너무도 애절하기에 조비는 조식을 살려 주었다 한다.내용은 '낳기는 한가지에서 낳는데 어찌도 그리 핍박하냐'
뭐 그런 내용이다.조조의 장수로써의 모습도 역시 두드러진다.
장수로써 두드러진 모습 중에 몇 가지 만을 들기로 하자.
첫째로 과단성을 들 수 있으리라.
조조는 장수를 뽑는데 있어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자신의 능력만을 보고 장수를 뽑는다.일례로 전위나 허저 서황같은 이들을 들 수 있겠다.
당시 시대가 아무리 어지러운 시대라 하나 봉건 사상이 뿌리 박힌 시기에 귀천 없이 장수를 가린다는 것은 과단성 없이는 부족한 면일 것이다.
참모들이 내놓은 의견과 자신의 의견이 부딪힐때 자신의 의견이 잘못 됬다 싶으면 주저 없이 참모들의 의견을 따르는 면도 예로 들 수있겠다.
서주 침략을 놓고 그 그릇됨을 간하는 순욱이나 곽가의 의견을 따른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조의 이런 모습은 그의 주변에 많은 인물이 모여 들어 천하를 통일 하는데 기반을 쌓을수 있는 밑받침이 됬다.
유비의 가식적인 면의 일면과 대비해 볼 때 한단계위의 전술이라 생각 할 수 있다.
둘째로 끊임없는 노력을 들 수 있겠다.
생각해보라 그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 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니 남보다 나아짐은 당연 할 것이다.
조조는 일국의 지도자로써 그바쁜 와중에도 낮엔 병서를 밤엔 경서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 하니 그가 얼마나 노력파인지 알 수 있으리라.
세째로 그의 재치를 들 수도 있겠다.
병사들이 배고픔과 목마름에 허덕인적이 있었다. 그때 조조는 채찍으로 먼산을 가리키며 메실이 있다면서 병사들의 목마름을 해소
시킨적이 있다.또 병사들이 행군하는데 민폐를 끼칠가봐 병사들에게 보리싹을 밟는자를 목벤다고 명한적이 있는데 그 자신의 말이 메추리에 놀라서 날뛰는 바람에 자신이 내린 군령을 자신이 어긴게 되었을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병사들에게 보였던 적도 있다.
(재치면에서는 이것말고도 여러가지를 더 올릴 수도 있겠으나 알고 있는거 자꾸 말하면 짜증내 할까봐 삼가기로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조조의 이런 면을 가볍다느니 편협하다느니 하며 비난하곤 한다.
그래서 재치라는 가벼운 단어로서 표현한다.
조조의 재치를 생각할때 빼놓을수 없는 일화가 있어 올려 본다.
조조의 집안이 원채 있는 집안이라 당시 명문 가문이었던 원소와도 친하게 지냈던 적이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오렌지족 같은 망나니 짓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하루는 이웃 마을에 신부를 겁탈하기 위해 잔치 자리에서 소란을 피운 다음 신부방에 가서 신부를 납치해서 도망치다가 원소가 잘못해서 탱자나무숲에 빠져 움직이질 못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혼자 도망 가든지아니면 구한다고 미적거리다가 둘 다 잡히든지 할 텐데 그때 조조는 원소를 가리키며 "도둑이 여기 있다"고외쳤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원소가 살이 찢어지는 것도 돌볼 겨를 없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숲을 빠져나와 도망쳤다.(-세설신어-)
그 외에도 조조는 무예에도 능했다.
운동신경이 뛰어나 나는 새를 맞춰 떨어뜨리고 맹수를 생포한 일도 있으며 남피라는 곳에서 사냥 할 때는 꿩을 63마리나 잡았다고 하니 무예면에서도 뛰어났다.
조조는 평소에 사치를 싫어해서 방장이나 병풍이 찢어지면 수리해서 쓰도록 했을 만큼 검소한 면도 있었다.
논공행상이 분명해 공이 있는자에게는 천금도 아끼지 않았으나 공이 없는 자에게는 한푼도 주질 않았다.
조조는 강서땅 초군 사람으로 자는 맹덕이다.그의 아버지 조숭은 본디 하후씨 였는데 시종 환관인 조등의 양자로 들어갔고, 그때 부터 조씨가 되었다.조조는 아명을 아만, 또는 길리라 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1억전을 주고 태위 벼슬을 살만큼 부유하게 자란다.조조가 젊은 날에 방탕한 길로 빠졌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거니와
아마도 그가 그런길로 빠져든게 집안 사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억전이라면 왠만한 갑부들도 만저보기 힘든 엄청난 돈인데 그런 돈을 어디서 어떻게 구했겠는가! 모두 백성들의 땀이요 피가 아니었겠는가..집안의 그런 비리(?)를 조조의 의기가 그냥 넘기지 않았으리
라..조조는 20을 갓 넘긴 나이에 수도 경비대장으로 임명된다.이것도 아버지 조숭의 후광으로 낙하산 인사라 할 것이다.
낙하산이야 어쨌든 조조는 대장으로 임명되자 그 일에 충실하고 그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낙양의 4대문을 보수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을 어기는 자는 엄중히 다스린다.어느날 십상시의 한사람인 건석이라는 자의 아저씨벌 되는 인간이 법을 어기고 야간 통행을 감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십상시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는데도 조조는 그 인간을 때려 죽이고 만다.
아무리 날고 기는 십상시라지만 이미 정해놓은 법을 어겨서 법대로 처리한 일가지고 어떻게 해볼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조의 벼슬을 올려주고 변방의 지사로 임명해 수도에서 쫓아 낸다.하지만 워낙에 뛰어난 인물이 변방에서 썩을리 없다.
임명된 그해 다시 수도 낙양으로 돌아 온다.돌아온 그는 환관의 소행을 보다 못해 황제에게 상서하지만 워낙에 썩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황실이라 번번히 가로 막히고 만다.
조조의 인생과 우리들이 삼국지 연의를 보고 느끼는 조조의 이미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조조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당시 인물 감정을 잘한다는 허자장이란 사람이 조조를 보고"태평한 시대라면 유능한 신하가 될 것이고 ,난세에는 간사한 영웅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조조의 젊은 시절 모습만으로 유추해 보건데 조조는 충분히 한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유능한 신하가 될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어지러운 세상에 태어난게 죄라면 죄랄까 어지러운 시대가 조조를 필요로해서 그의 행동이 한 황실과 반대되는 입장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삼국지 연의의 인물 형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을 꼽으라면 제갈공명과 유비 관우 조조를 꼽을수 있겠다.
역사상 조조란 인물이 걸출한 정치가요, 군사가이면서 한편 잔혹한 압제자였던 사실과 부합되게 소설에서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 적인 측면을 동시에 지닌 양면적인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다.
조조는 그 어지러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인물이다.
사마의전------------------사마의는 낙양 동북쪽에 있는 효경리 사람이다.
그의 형제들이 또한 모두 뛰어나 당시에는 그들 형제를 일컬어 사마팔달이라 하여 그들을 칭송했다.
사마의는 형인 사마랑을 필두로 사마팔달의 둘째였다.
사마의는 20전후에 이미 이름을 날려 여러사람으로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가 22살 되던 해에 그의 이름은 조조에게까지 전해져 조조의 부름을 받지만 중풍이 들었다 핑게대고 나가려 하지 않았다.
당시 조조의 세력은 한창 무르익는 단계였는데 원소를 분쇄하고 여남의 유비마저 깨뜨려 삼공의 자리에 앉아 있을때다.
녹록한 위인 같았으면 관운이 틔었다 좋아라 달려 갔겠지만 명문집안에서 자라난 사마의가 환관의 손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얼마 후 조조는 다시 사람을 보내어 사마의를 부르게 되는데 조조의 성미를 아는지라 이번에도 거역하면 제명에 죽지 못할것이 두려워 이번에는 조조의 부름에 응하게 된다.
이때가 사마의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정사에 기록되는 처음이다.
정사의 기록에 사마의를 '낭고상(狼顧相)'이라고 말하고 있다.
'낭고'란 이리가 뒤를 잘 돌아본다 하여 사람도 누가 쫓아올까봐 두려워서 뒤를 자주 돌아보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경우도 보통 사람 같으면 목뿐 아니라 몸전체를 돌리는 게 상식인데 낭고상의 사람은 몸은 그대로 앞으로 가면서도 얼굴만 돌려 뒤를 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마의가 그런 인물있었는데 <진서>의 기록에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조조가 사실인지 아닌지 실험해 보는 애기가 나오고 실험결과 사실임을 확인하는 내용이 나온다.
조조는 사마의를 처음 불러올때 부터 그를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처음 사마의를 불렀을때 그가 중풍을 핑계로 나오려 하지 않자 자객을 보내어 그의 말이 거짓일 경우엔 죽여버리도록 명령한 일화에서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사마의는 조조보다 24살이나 어리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여간해서는 표현하지 않는..어찌보면 음흉하게 까지 보이는 사마의의 성격은 조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조조의 그같은 염려는 사마의가 훗날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둔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흔히들 제갈량과 사마의를 많이 비교하는데 실제를 보면 사마의와 제갈량이 각국의 대표장수로써 직접 대면한 것은 제갈량이 전후 출사표를 쓰고 5회에 걸친 북벌의 후반 2회에 부딪힌 것이 전부이다.
그런데도 사마의하면 '아!공명의 라이벌..'이라는 생각이 먼저 연상되는 이유는 그들의 싸움이 너무도 리얼하고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삼국지 연의 전편을 통틀어 제갈량의 계획을 사마의처럼 철저히 막아낸 사람은 없다.
정사의 내용과는 틀리게 삼국지 연의에서 제갈량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는 주유라는 인물도 실상을 알고보면 제갈량에게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지 만은 않은 일류 장수로 등장하지만 제갈량의 뜻을 꺽진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사마의는 삼국지연의의 후반부에서 제갈량을 그리도 철저하게 막아내고 있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하다.'라는 고사는 너무도 유명하다.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정설이다.
공명이 아무리 전시에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지만 사후의 일을 정리하지 않고 그냥 죽었을리는 없다는 생각에 자신의 병력의 출혈을 없에기 위해 달아나는 촉군을 쫒지 않았다는게 그 내용이다.그리고 '공성지계'라 하여 2천5백의 군사로 사마의의 15만 대군에 맞서서 달아나게 했다는 것도정사를 되 짚어 보면 있을 수 없는 내용이다.
'공성지계'란 사마의가 공명의 허허실실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내용으로 공명의 첫 원정때 마속의 실수로 가정에서 패한 공명이 군량의 수송을 위해 서성에서 2천5백의 소군으로 사마의의 15만 대군을 거문고만으로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의 모태는 배송지의 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배송지 자신도 이 주를 달면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미리 밝히고 있다.
연의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공명의 공성지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마의에게 주어진 한 사건에 대해 남보다 더 신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연의에서의 화려한 공명과 중달의 싸움에 비해 너무도 허무하게 싸움다운 싸움없이 지구전만을 꾀하다가 공명의 돌연한 죽음으로 공명과 중달의 지략싸움은 막을 내리고 만다.
공명의 도전을 물리친 중달은 약 3년간 그대로 장안에 머물러서 촉한의 움직임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그 중달에게 명제로 부터 호출이 왔다.요동태수 공손연이 자칭 '연왕'이라 일컬으며 조정에 반기를 들었기에 이를 막으라는 내용이다.
당시 공손연은 오나라와 연합해서 위나라의 세력에 반기를 든 것인데 '연'과 '오'가 위,아래에서 위협을 가하면 아무리 중국의 요충을 점령한 위나라이지만 그 존망이 위태롭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 싸움에 사마의를 출진 시키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나라가 위,아래로 위협받는 만큼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기도 하려니와 날로 높아만 가는 사마의의 명망을 두려워하여 그를 최전선으로 보냄으로써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그의 세력확장을 막기 위함이었다.
속사정이야 어찌됬든 사마의는 연의 정벌에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대승을 거두고 다시 회군한다.
당시 위나라는 이미 망국으로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황제인 명제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술과 색에 빠져 몸져 눕고 그 뒤를 이어 불과 8살짜리 황태자 조방에게 제위를 물려주며 어린 태자와 모든 후사를 조조의 아들인 연왕 조우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연왕 조우는 사마의가 혹시 자신에게 반기를 들까 두려와 그를 멀리 장안으로 보내려 했으나 연왕 반대파들의 조작으로 수도로 돌아오게 된다.
연왕 반대파들은 다시 조씨 일족이며 중신인 조상과 사마의를 황태자의 보좌로 천거하게 된다.
그러나 사마의의 세력이 점점커지자 조씨 일족들 안에서 사마의를 경계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마의를 태부로 임명해 병권을 빼앗아 조상이 모든 병권을 갖게 된다.
또한 조상은 사마의에게 자기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마의가 격퇴하지 못한 촉을 자기가 직접 상대하지만 결과는 참패로 끝났다.
조상 일파에 의해 점차 국정이 어지러워지자 위기의식을 느낀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두 아들과 함께 낙향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사마의는 다시 재기할 때를 노리고 조용히 기다리는 중에 이승이라는 사람이그를 방문해 그의 상태를 감시하지만 사마의는 멋지게 따돌리고 때를 기다리다가 249년 1월,폐제(조방)가 선제의 묘소를 돌보고자 행차할 때를 노려 순식간에 낙양을 점령해버린다.
이 사태로 조상과 그의 일당은 모두 참수당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으며,이때부터 사마의가 모든 정권을 장악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70줄의 노인으로서는 대단한 인내이며 도박이라고 볼 수 있다.
251년 사마의는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후에 5호16국으로 분열되기는 하지만 진나라를 세운 기틀은 이 사마의가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서쪽으로는 촉한을 막고,동쪽으로는 요동을 평정하여 그공로로 명제때 선왕으로 봉함받고,말년에는 혼자 위나라에 대항하는 정변을 일으켜 아들 사마사, 사마소가 권력을 계승하게 했으니 그의 신중함과 침착함은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마의의 행적을 살펴보면 위 무제 조조의 행적과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둘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이고 권모술수에 능했다.
그리고 둘다 자신들의 세대에서 찬탈을 꾀할 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맡기고 있다.
지식이 짧아서 그들의 심리상태까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뛰어난 인물만이 가지는 그런 특별한 뭔가가 있나보다.
사마의와 조조모두 손자병법에 능했는데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를 달만큼 손자병법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고 사마의도 그가 썼던 전법을 살펴보면 모두가 손자병법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리석은 생각일지 모르나 사마의의 인생은 조조의 복사판과 같은 인상을 받는다.
사마의는 자신을 닮은 조조를 연구하며 그의 행로를 정하지나 않았을까?
(사마의와 조조가 닮았다고는 하나 조조의 성격이 양성적인데 반해 사마의의 성격은 음성적인 면이 있다.)
하후돈전----------------하후돈의 자는 원양으로 패국 초 사람이다.
조조의 사촌뻘이 되는 사람이다.(원래 조조의 할어버지는 환관이다.환관은 남자로써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당시 환관은 이런 이유로 양자를 들여 자신의 세력을 세습할수 있도록 되어있었는데
조조의 아버지 조숭을 양자로 맞아 들인다.본시 조숭은 하후씨 집안의 사람이었고 하후돈은 조조의 아버지의 생가로 따져 조조의 사촌이 된다.)어렸을적부터 품성이 맑고 검소하여 인근에 이름을 떨친 사람이다.
그가 14살때 서당에 나갔는데 어느 날 누가 자기 스승을 욕하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때려 죽여 버린일이 있었다.
그때 부터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하후돈은 조떠?처음 거병할때부터 그의 비장의로써 거의 모든 전투에 나가 공을 세우고 190년에는 동군 태수가
된다.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갔을때 하후돈을 복양에 머무르게 하여 복양의 수비를 맡긴 적이 있었다.
이때 장막.진궁등이 모반하여 여포를 맞아들일 때 조조의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는데 여포가 원체 무식한 인간이라
조조의 가족을 헤칠까봐 가볍게 무장한 수하장병을 이끌고 여포와 전투를 벌이는 중에 여포의 계교에 빠져 여포에게 사로잡히고 만다.(이 부분에선 삼국지 연의와 내용이 틀린데 연의에는 하후돈의 부하장수가 잡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정사 삼국지에는 하후돈이 잡히게 되는 것으로 나온다.)
하후돈을 사로잡은 여포는 하후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하후돈과 보물과 맞 바꾸자는 제안을 하게 되는데(이 것은 단순히 여포가 보물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하후돈진영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대장이 보물과 맞바뀌게 되면
당연히 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이 전투에서 패할것은 두말 하면 자소리인 것이다.)
이때 하후돈의 부장 한호는 그런 제의를 하러온 사자를 목베고 하후돈을 구출하게 된다.
서주 침공을 하던 조조가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달려오고 하후돈에게 대군을 주어 여포를 정벌하게 하는데 이 전투에서 하후돈은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눈이 된다.연의에는 하후돈이 그 눈알을 먹어 버렸다고 나오나 정사에는 없는 걸로 봐서 허구일 가능성도 있다.그러나 하후돈의 성품으로 보아 충분히 있을수 있는 애기다.
애꾸눈이 된 하후돈은 맹하후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하후돈은 이별명을 매우 싫어해 거울을 볼때마다 거울을 깨뜨렸다고 한다.하후돈은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그에 따라 벼슬이 복파장군에까지 오르고 식읍이 2천5백호에 이르게 된다.
위왕이 된 조조는 하후돈을 불러 항상 수레에 함께 타고 행동했으며, 특별히 친근하고 존중하여 침상에 까지 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다른 장수와는 비길바 없는 조조의 신임을 받은 것이다.
조조가 죽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하후돈은 대장군에 임명되나 몇개월 후에 병을 얻어 생을 마감한다.
후에 문제는 하후돈에게 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하후돈이라 하면 아까 말한 것처럼 여포와의 싸움에서 자신의 왼쪽 눈에 화살을 맞자 그대로 화살을 뽑아들고 '부모가 준 이몸을 어찌 함부로 버릴소냐!'하며 그대로 삼켜버린 일로 우리 기억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인물이다.
잘못 생각 하면 단순 무식하게 보이는 대목이나 하후돈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그런 인물 이었다.
진수는 그의 성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후돈은 비록 군중에 있었으나, 스승을 직접 영접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그의 성격은 청렴하고 검소 했으며, 남는 재물이 있으면 곧 사람들에게 나누어 베풀었고,부족하면 관청에서 도움을 받았으며,재산관리를 일로 삼지는 않았다.
순욱전-----------------순욱은 낙양근처의 영천군 영음현 사람이다.
순욱의 조부 순숙은 자가 계화이고 낭릉현의 령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아들 8명이 모두 뛰어
난 재능이 있어 '8용'라는 소리를 들었다.
순욱은 그의 아버지가 제남의 상을 지냈었고 그의 숙부 순상은 삼공의 하나인 사공이라는 최
고의 벼슬에까지 오른 명문집안 사람이었다.
순욱은 어릴적 부터 신동이란 소릴 들었는데 남양의 명사 하옹이 그를 보고 '왕을 도와 큰일
을 할 인물'이라고 했다한다.
그는 영한 원년에 효렴에 천거되어 수궁령에 임명되었는데 동탁의 행패가 심하여 낙향하여
고향사람들에게
"영천은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곳입니다.천하에 정변이 있으면 이곳은 항상 군대가 충돌
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마땅히 이곳을 빨리
떠나야만 됩니다.오랫동안 머물지 마십시오."하며 떠날것을 말하지만 고향에 집착하던 사람
들은 순욱의 말을 듣지 않다가 후에 동탁의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는 등
험한꼴을 당하게 되고 만다.
당시 기주자사 한복이 순욱의 명성을 듣고 그를 초청하지만 순욱이 한복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엔 이미 한복은 원소에게 영토를 빼앗긴 후였다.
원소또한 사람보는 있어 순욱을 최상급의 손님으로써 예우했다.
이때 같이 한복을 찾아 나섰던 이둘중에 동생 순심과 같은 군 출신인 신평과 곽도는 모두 원
소에게 임용되었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의 인물됨을 헤아리고 그가 결국엔 큰일을 이루지 못할 인물임을 알고 몸
을 빼내 191년에 당시 분무장군이 되어 동군에 있던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조조는 순욱을 얻은 것을 전한(前韓) 고조(유방)의 모사 장량에 비유하여 '나의 장자방이로
다.'라고 했다하니 순욱의 재능을 알아본것이다.
그때 순욱의 나이 겨우 29에 불과했지만 조조의 탁월한 인물보는 눈이 순욱의 재능을 꾀뚫어
본것이다.
어느날 조조는 동탁의 행패가 날로 심해 지는 것을 보고 순욱에게 이에 대한 의논을 한 적이
있는데 순욱은 동탁 내부에서 내분의 조짐이 보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하니(동탁은 그
의 부하 여포에게 죽임을 당한다.) 순욱의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운 경지였다.
조조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서주를 공격했을 당시 그를 대신해 본거지인 견성을 순욱
에게 지키게 했는데 배신이 비일비재 하던
시기에 조조에게 여간한 신임을 받은게 아니었다.
조조의 수하에 있던 진궁,장막등이 조조의 서주 침략시의 대량학살을(조조는 아버지의 원수
를 갚는다는 명목하에 서주의 무고한 백성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한다.) 못마땅히 여기다가 드
디어는 할일 없이 놀고 있던 여포를 불러들여 모반을 꾀한 사건이 벌어졌다.
하후돈 조인등의 맹장들도 여포의 군대앞에 맥을 못추고 쫓겨오는 판국이었는데 오직 순욱과
정욱이 지키던 몇개의 성만이 그들의 공격에서 무사히 성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조조는 서주 침략에 많은 병력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본거지인 견성의 수비병력은 미미
한 것이었는데도 순욱은 그의 탁월한 재능과 식견의로 책임을 완수하게 된다.
조조와 원소의 관도의 싸움때 조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무능으로 일진일퇴의 접전을
벌이고 있을 당시 조조는 아무래도 강대한 원소를 상대로 그를 깨칠 자신이 없어 후퇴할까를
생각하여 순욱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순욱은 원소진영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후퇴의 부당
함을 조조에게 인식시키고 총명한 조조또한 이를 받아들여 결국엔 원소를 무찌르게 되는데
순욱의 조언이 아주 합당했다고 볼 수 있다.
관도의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그 싸움의 일등공신을 순욱이라 칭찬하며 열후에 봉하는 동
시에 자기의 딸을 순욱의 장남인 순운에게 시집보내 사돈을 맺었다
.
순욱은 또한 조조에게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여 그를 돕게 했었다.
순유나 곽가등 조조진영에서 1,2위를 다투는 명 참모들을 모두 순욱이 천거한것이다.
순욱의 인물감정 능력또한 남과 다름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조가 관도의 싸움으로 기주를 평정하고 다시 형주마져 평정한 조조를 동소등이 그의 업적
을 기려 조조의 작위를 국공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의 예물을 갖추도록 해주자는 의견이 나왔
을때 순욱은 그일이 타당하지 못함을 간하다가 조조에게 미움을 사게되 병이나 수춘에 머무
르는 중에 조조로 부터 빈그릇을 받고 자결하란 뜻으로 알아듣고 자결했다 한다.
그의 나이 50세이고 서기 212년의 일이다.
순욱의 죽음에 대해 의심이 가는 곳이 많은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과연 조조가 순욱을 자결하
도록 유도했는지 이다.
삼국지연의에 빠져있는 우리들은 무심코 받아 들일 내용이지만 연의의 내용을 그대로 믿기엔
아무래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조조가 아무리 나세의 간웅이라고는 하지만 서주침략당시 자신의 본거지를 순욱에게 맡길 만
큼 그를 신뢰했었고 어려움이 있을때 마다 순욱의 적절한 조언의로 난국을 헤쳐나간것이 한
두번이 아닌데 조조같은 사람이 자신의 욕심을 책우기 위해 그의 일등공신을 죽였다는 것에
는 이의를 달지 않을 수 없다.
순욱의 죽음에 관하여는 정사의 내용과 연의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정사에는 그냥 구석의 특전 문제로 조조에게 미움을 사 수춘에서 병사했다고 전하고 있고 연
의의 내용은 아까도 말했듯이 조조가 자결하도록 유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연의의 이같은 설정은 아무래도 배송지의 주에서 떠온 것 같다.
배송지의 주에는 연의의 내용처럼 조조가 자결하도록 유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순욱이 조조에게 조언을 할 때는 많은 부분이 편지로 이루어 지고 있다.
순욱은 이같은 편지 내용을 간직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모두 태워버렸다 한다.
따라서 그의 뛰어난 책략과 치밀한 계획은 세상에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고 선현들은 아쉬워
한다.
조인전-----------------조인은 조치의 아들로서 조조의 4촌 동생이다.
젊을때 부터 활쏘기 말타기등을 좋아하여 나라가 어지러울 당시 호걸들이 일제히 궐기하자
조인도 인근의 힘께나 쓰는 젊은이들 천여명을 모아서 조조의 수하에 들어간다.
무용이 출중하여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항상 기병을 인솔하여 선봉에서 서서 많은 공을 세
운다.
그는 어렸을때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나 성장하여 장수가 되면서 엄격히 법령을 받들
어, 항상 법조문을 옆에 놓고 그것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한다.
장수로써의 능력이 또한 출중하여 원소와 조조의 관도의 싸움때 조조의 남쪽 지방에서 유벽
등이 모반을 일으켜 원소의 편에 서게 되었는데 이에 원소가 유비를 보내어 돕도록 하자 남쪽
지방이 위태롭게 되었던 상황이 벌어졌다.
조조가 어쩔줄 몰라하며 불안해 하고 있는데 조인이 나서서 조조에게 유비를 먼저 칠것을 진
언하고 머리회전이 빠른 조조가 이를 받아들여 조인을 출진 시키니 유비의 부대는 조인의 부
대앞에 참패를 당하고 물러 나고 만다.
또 조조가 적벽의 싸움에서 유비와 손권의 협공앞에 참패하고 허도로 돌아가며 조인에게 강
릉의 수비를 맡겼는데 오나라가 적벽의 싸움의 승세를 몰아 주유를 시켜 강릉을 치게 하였다.
오나라의 군사 수천이 몰려 오는데 조인의 부장 우금으로 하여금 수하장병 몇백기를 데리고
적의 기세가 어느 정도 인지 알아 오라며 시찰 보낸다.
그러나 얼마 못가 우금의 부대가 오나라의 수천 병력 앞에 포위당하고 만다.이때 열받은 조인
이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금을 구하러 몇십기만을 데리고 적진의로 돌진한다.
그 기세에 눌린 적이 주춤하는 사이 조인은 재빨리 우금을 구하고 돌아오는데 아직도 적진에
서 헤메이는 아군을 보고 다시 적의 포위를 뚫고 들어가 나머지 병사들마자 데리고 돌아오는
데 희생자가 몇명에 불과했다 한다.
처음 조인이 출진하려할때 옆에서 말리던 진교등 다른 부하들은 조인의 그런 목습을 보고
'장군은 정말로 하늘에서 내린 사람이구나.'했다 한다.
우리의 조자룡이 장판에서 감부인과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출해온 장면과 흡사함을 알수 있
다.
조자룡과 조인의 무용을 비교하라면 어느쪽을 꼭 집어서 더 낫다고 할수가 없다.
둘이 직접 싸워서 상대를 쓰러뜨렸다는 말은 정사나 연의에서도 안나오기 때문에...
그당시 천하에 촉측에서는 조자룡이 조조측에서는 조인이 각각 그 무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무예가 아닌 다른 장수로써의 능력을 살펴보건데 조인과 조운 둘중에 조운이 훨씬 더
낫다고 할수 있다.
당시 강릉을 수비하던 총 대장은 조인이었는데 줄잡아도 만여명을 거느린 한 부대의 우두머
리이다.
조운이라면 처음부터 조인처럼 그러한 무모한 짓(수천 병력앞에 수백의 시찰부대를 내보낸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설혹 내보냈다
하더라도 단신으로 나가서 모험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인이 그 싸움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그때 죽어 버렸더라면 훗날 마속의 예에서 처
럼 조조의 계획에 커다란 착오를 가져왔을 지도 모른다.
조운이 장판파에서 적진속에 뛰어들어가 감부인과 아두를 구출해 낸것은 그 당시 조운은 유
비라는 총대장이 있었고 그 밑에 있는 한낱 부장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부대의 사기에 미치는
영향이 조인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조인의 흠이 있을 수 있지만 역시 비범한 장수임은 틀림이 없다.
219년 관우가 번성에 있는 조인을 공격할때 한수가 법람하여 꼼짝 못하는 상황에서도 끝내
번성을 지켜내고야 만다.
그런 조인도 죽음앞에서는 무력해서 223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문제는 조인에게 충후라는 시호를 내린다.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은 배송지는 조인에 대해서
'그의 용맹스러움은 고대의 용사였던 맹분과 하육도 미칠수 없었으며,장료도 그보다 못했
다.'고 했다.
조인은 장수로써 조조진영에서 그보다 더 할 수 없는 출중한 인걸이었다.
하후연전------------------하후연은 조조의 8촌뻘 되는 사람이다.
그가 젊었을 때 조조가 현관에게 죄를 지었다. 하후연이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였는데
나중에 조조가 나서서 빼준일이 있었다.
하후연의 의기가 남다름을 보여주는 일화인데 그런 일화가 또 있다.
하후연이 젊었을 때 식량 기근이 있자 자기 자식을 버리고 죽은 동생의 딸을 살린 일이 그것
이고 후의 애기지만 하후연의 황충에게 목이 잘려 전사하게 되는데 동쪽 지방에서 촉군을 맞
아 싸우던 장합이 고전하자 자신의 군사에서 반을 떼어줘 장합을 돕게 한일도 하후연의 남과
다른 의기이다.
하후연은 장수로써의 능력이 아주 빼어나 조조와 원소의 싸움인 관도의 싸움에서 신출귀몰한
활약을 보여 그를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또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뒤 하후연에게 연주.예주.서주의 군량미를 관장하게 했는데 당시
군중에 식량이 모자라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때 하후연이 끊임없이 식량을 수송해와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되는 일도 있었다.
무용이 출중하고 물러설줄 모르는 기개를 가져서 오랑캐와 싸울때 구름처럼 몰려오는
오랑캐를 보고 다른 장수들은 겁을 먹고 수비할것을 건의 하지만 하후연은 그대로 돌진해 그
기새에 눌린 오랑캐들을 괘멸 시킨 일이 있다.
또 포한과 승건이라는 자들이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한왕이라고 일컬으며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조조는 하후연으로 하여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들을 치게 했다.포위 작전을 벌인
지 한 달 만에 적의 수괴 송건 이하 간부들을 모두 참해버려 그 지역을 평정했다.
보고를 받은 조조는 하후연에게 후한 상을 내리며 치하하기를
'송건이 난리를 일으킨 지 30년이나 되는데 하후연이 하루아침에 없애버렸으니 아마 무인지
경을 간 모양이지.'했다 한다.
하후연은 남과 다른 기개에 물러 설줄 모르는 용맹으로 많은 전투에서 혁혁환 공을 세우지만
조조는 하후연의 이런 모습을 항상 경계해 대장이 된 자는 두려워하고 약함이 있어야 하며,
단지 용기만을 의지 할 수는 없는 것이오.
대장은 마땅히 용기를근본으로 삼아야 되지만, 행동으로 옮길 때는 지혜와 계책을 사용해야
되오.만일 오직 용기에 의지 할 줄만 안다면 일개 필부의 적수에 불과할 뿐이오.'라 했다 한
다.
그런 조조의 염려가 들어 맞아 하후연은 219년 양평관에서 촉군과 싸울때 자신의 무용을 믿
고 자신의 운명을 믿었음인지 자신도 위태로운데 동쪽 경계선을 지키던 장합이 고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병사중 반을 떼어 그곳으로 보내고 안그래도 위태롭던 하후연의 군대는
괴멸되고 마침내 하후연도 황충에게 목이 달아나는 신세가 되고 만다.
황충이 일개 필부는 아니지만 조조의 염려대로 큰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전사한 것이다.
조조는 하후연에게 민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하후연은 조조와 특별한 인척 간이었는데 그 자신이 조조의 8촌뻘이 되고 하후연의 아내는
조조의 처제였을 뿐더러 맏아들 하후형은 조조의 동생 해양애후의 딸을 아내로 맞아 들인다.
그러니까 사돈이고 팔촌이고 처남이고..등등 복잡하다.
그외 나라=================
장수전------------장수전(張繡傳)
장수는 무위군(武威郡) 조려현(祖려縣) 사람으로서 장제(張濟)의 같은 종족의 아들이다.
변장과 한수가 난을 일으켰을때 금성 사람 국승이 고려의 우두머리 유준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장수는 현의 벼슬아치로 있었으나 국승을 암살하니 군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행위를 의롭다고 하였다.
장수는 장제가 동탁의 복수를 할때부터 따라다녔다.
군공에 따라서 건충장군으로 승진하고 선위후에 봉해졌다.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지만 식량이 부족하여서 남쪽으로 내려가 양성을 공격
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죽고 말았다.
그후 장수는 부하들을 이끌고 완성에 주둔하여서 유표와 연합하였다.
조조가 장수를 공격할때 장수는 항복하지만 조조가 장제의 아내를 후궁으로 삼자 원한을 품는다.
그 사실을 안 조조는 장수를 암살하려 하지만 장수가 눈치채고 조조를 급습한다.
결국 조조는 두 아들을 잃고 군대를 잃고 만다.
장수는 그후에 양성으로 돌아가서 양성을 지켰다.
조조는 그후에 매년 장수를 공격하였으나 계속 실패하고 만다.
후에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할때 장수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서 조조
에게 항복을 해서 중용을 받는다.
이일은 <가후전>에 나온다.
장수가 도착하자 조조는 큰 환대를 한다.
아들 조균을 장수의 딸과 결혼을 시키기도 하고 장수를 양무장군으로 임명한다.
관도싸움에서 장수도 참가를 한다.
장수는 관도싸움에서 분투하여 공을 세워서 파강장군으로 승진한다.
또,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할때 참가하여 식읍이 2천호로 증가한다.
다른 장수들은 식읍이 1천호도 안 되지만 장수는 다른 장수들보다 높이 대접을 받는 것이였다.
후에 장수는 오환을 정벌할때 참가를 하나 도중에 죽어서 시호를 정후(定侯)라고 한다.
그후 그의 아들 장량은 작위를 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위풍의 모반에 가담하여서 주살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
1.고향:무위군 조려현
2.같은 일족:장제
3.아들:장량------위풍의 모반으로 죽음
4.활약 <1>.장제의 부하로 활약 [장제를 도와서 동탁의 원수를 갚음]
<2>.개인세력 [유표와 손을 잡음] [조조를 무찌름]
<3>.조조에게 항복 [관도전투에서 활약] [남피전투에서 활약] [오환전투에서 사망]
5.식읍 [2천호]----다른 장수들보다 훨씬 많이 받음
6.죽음 [오환전투에서 사망]
7.시호 [정후]
여포전--------------여포는 자가 봉선이라 하고 오원군 구원현 사람이다.
용감하고 싸움도 잘하여 병주에서 벼슬했다. 병주자사 정원이 기도위가 되어 군대를 하내에 주둔시켰을 때 여포를 주부로 임명하였으며 매우 잘 애해 주었다.
영제가 세사을 떠나자 정원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로 들어와 하진과 공모하여 모든 환관들을 주살하여록 모의하여 집금오에 임명되었다. 하진이 실패하자 동탁은 수도에 들어와 바야흐로 환난을 일으켜 정원을 죽이고 그의 군대와 군사들을 손에 넣으려고 했다.
동탁은 여포가 정원에게 신임을 얻고 있음을 알고는 여포를 유인하여 정원을 살해하도록 했다 여포는 정원의 머릴를 베어 동탁에게 바치니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로 삼고 그를 매우 아끼고 신임하였으며 부자의 서약을 맺었다.
여포는 활쏘기와 말타기에 익숙하였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팔힘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을 비장이라고 불렀다. 그의 관직은 얼마 후에 중랑장에 이르렀으며 도정후에 봉해졌다. 동탁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예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모해할까 두려워 밖을 나갈때나 집에 있을 때 항상 여포에게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동탁의 성격은 강퍅학 모든 일을 제멋대로 하였으며 화가 나면 자신의 위험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조그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화극을 여포에게 던졌다. 여포가 팔힘과 민첩함으로 그것을 피하고 동탁에게 고개숙여 사죄하면 동탁의 분노는 즉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런 일로 말미암아 여포는 자신도 모르게 동탁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탁은 항상 여포로 하여금 중합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사통하였는데 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마음은 절로 불안했다.
이전에 사도 왕윤은 여포가 자신과 같은 고향사람이고 건장한 인물임을 알고 그를 후하게 대접하여 친해 두었다. 나중에 여포는 왕윤을 만나기를 청하여 동탁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 당시 왕윤은 복야 사손서 와 함께 동탁을 주살하려고 몰래 모의 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여포에게 알려 여포로 하여금 스스로 응하도록 하니 여포가 말했다.
"나와 그는 부자의 관계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소?"
왕윤이 말했다.
"당신은 본래 성이 여씨이니 그와는 본래부터 혈연관계는 아니오 지금 그대는 언제 죽을지 몰라 근심하는데 무슨 부자관계를 말하시오"
여포는 이 말을 듣고 드디어 그 일을 도모할 것을 허락하고 동탁을 찔러 죽였다. 이 일은 <동탁전>에 실려 있다.
동탁을 죽인 후에 왕윤은 여포를 분무장군에 임명하고 부하의 처벌권을 나타내는 절을 주었으며 삼공과 같은 의례를 해주고 그를 온후로 봉하고 함께 조정의 정치를 맡았다.
여포는 동탁을 죽인 후 동탁의 출신지인 양주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증오하였으며 양주 사람들 역시 여포에게 원한이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동탁의 수하에 있던 이각 등이 드디어 서로 결탁을 맺어군대를 모아 장안성을 공격했다. 여포는 막아낼 방법이 없었고 이각 등은 드디어 장안에 들어왔다.
동탁이 죽은 지 60일 지나 여포 또한 패배하였다.
그는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무관을 빠져나가 원술에게 가려고 하였다. 여포는 스스로 그가 동탁을 죽인 것은 원술을 위해 복수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때문에 원술이 그의 은덕에 감격해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원술은 그가 반복하여 배반한 것을 증오하여 거부하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북쪽의 원소에게 갔고 원소는 여포와 함께 상산에 있는 장연을 공격했다. 장연은 정예군대 1만여 명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여포는 적토라고 불리는 좋은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다. 여포는 그와 친하게 지내는 성렴과 위월등과 함께 예봉을 꺽고 진지를 부수고 드디어 장연의 군대를 쳐부쉈다.
이후에 여포는 원소에게 군대를 충원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게다가 여포의 장사들이 약탈을 일삼자 원소도 여포를 두려워하며 기피하였다. 오래지 않아 여포는 원소이 속마음 을 알아차리고 원소에게 그가 떠날 수있도록 요청했다. 원소는 여포가 돌아와서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하며 자객을 보내 밤에 여포를 암살하도록 했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이 분명해지자 여포는 하내로 달아나 장양과 합세했다. 원소는 병사들에게 여포를 추격하도록 명령했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서려는 자가 없었다.
장막은 자가 맹탁이고 동평군 수장현 사람이다. 어려수부터 의협의 기질이 있어 이름을 나렸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주고 위급한 사람을 구해주는 데 있어서 집안을 기울일 정도로 재산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선비 중의 대다수가 그에게 귀속되었다.
조조와 원소는 모두 장막과 친구가 되었다. 장막은 상공의 부서에 초빙되었으며 뛰어난 능력이 있어 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진류태수로 영전되었다.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조조는 장막과 함께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변수의 싸움에서 장막은 부하 위자에게 군대를 주어 조조를 수행하도록 했다.
원소는 맹주가 된 이후에 교만하고 오만하 기색을 드러냈으므로 장막은 정론을 펴서 원소를 질책했다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도록 했으나 조조는 듣지 않고 원소를 꾸짖어 말하였다.
"맹탁은 친구이므로 그가 옳든 그르든간에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오 지금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자신들끼리 상대방을 위험에 빠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장막은 이 사실을 알고서 더욱 조조에게 은덕을 느꼈다. 조조는 도겸을 토벌하러 갈 때 집안 사람들을 계도하여 말했다.
"내가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맹탁에게 가서 의탁하라"
조조는 나주에 돌아와서 장막을 만나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울움 터뜨렸다. 그들이 친밀함은 이와 같았다.
여포가 원소를 버리고 장양을 따라갈 때 먼저 장막을 찾아가 만났으며 이별할 때 두사람은 악수하며 맹세하였다 원소는 이 일을 듣고서 매우 증오했다.
장막은 조조가 결국에는 원소를 위하여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마음이 스스로 불안했다.
흥평 원년에 조조는 다시 도겸을 토별하러 가는데 장막의 동생 장초가 조조의 장수 진궁 종사중랑 허범 왕해등과 공모하여 조조를 모반하였다. 진궁이 장막에게 말하였다.
"지금 영웅호걸이 모두 일어나 천하는 나뉘어지고 붕괴되었는데 당신은 사방 천리나 되는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서도 칼을 어루만지며 바라만 보고 있고 도리어 다른 사람들에겍 제압당하고 있으니 넘 비굴하지 않습니까? 지금 주군은 동쪽으로 출정가서 그곳은 텅 비어 있고 여포는 장사이니 그이 앞에 적이 없듯이 잘 싸울 것이니 만일 그를 영접하면함께 연주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천하의 형세를 보고 일의 변하고 통함을 기다려 보건대 사람들 가운데서 호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이는 또한 천하를 마음대로 다스릴 유일한 기회입니다"
장막은 진궁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조조가 막 진궁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군에 주둔하라고 했을 때 진궁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부터 여포를 맞이하여 연주목이 되었으며 복양을 점거했다.
각 군과 현이 여포에게 호응하였는데 단지 견성 동아 범현등에서만은 조조를 위하여 지켰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여포와복양에서 싸웠는데 조조의 군대가 불리한 가운데 백여 일 동안 서로 대치했다. 그 당시 기후가 건조하고 병충이 있었고 식량이 적어 백성들은 서로를 잡아먹기도 하였는데 여포는 동쪽 산양에 진을 치고 있었다.
2년 동안 조조는 많은 성을 탈환하였으며 거야에서 여포를 쳐부셨다 여포는 동쪽으로 달아나 유비에게 갔다. 장막은 여포를 따라가며 장초에게 가족을 맡기고 옹구에 군대를 주군시켰다. 조조는 몇 개월 동안 공격하여 그들을 죽이고 장초 및 그의 모든 가족을 참수했다.
장막은 원술이 있는 고을로 가서 구원병을 요청했으나 구원병이 오기도 전에 그 자신도 부하의 병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유비는 동쪽으로 향하여 원술을 공격하였고 여포는 하비성을 습격하여 취하였으며 유비는 돌아와서 여포에게 귀의했다. 여포는 유비를 파견하여 소패에 주둔시켰고 여포는 스스로 서주자사라고 일컬었다. 원술은 장수 기령등과 보병 3만 명을 파견하여 유비를 공격했으며 유비는 여포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여포의 여러 장수들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항상 유비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지금은 원수의 손을 빌려 죽이십시요"
여포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없소 원술이 만일 유비를 쳐부수면 북으로 태산의 여러 장수를 연합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원술의 포위망에 있게 되므로 부득이 유비를 구해주어야 하오"
여포는 곧 굳센 보병 천명과 기병 2백명을 데리고 유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기령 등은 여포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모두 거두고 다시는 공격하지 않았다. 여포는 소패의 서남족 1리 떨어진 곳에서 주둔했는데 하수인을 보내어 기령 등을 불렀으며 기령 등도 여포를 초청하여 함께 마시고 먹었다. 여포는 기령 등에게 말했다.
"현덕은 나의 동생이오. 동생이 여러분의 의해 곤경에 처했으므로 그를 구하러 온 것이오 나는 성격상 서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만 싸움을 중재하기를 좋아할 뿐이오. " 여포는 문지기들에게 진영의 문 가운데 있는 화극 하나를 가져오라고 명하고는 말했다.
"여러분은 내가 화극의 소지를 쏘는 것을 보시오. 한번 쏜것이 중심에 맞으면 여러분은 마땅히 화해하고 돌아가고 맞지 않으면 남아서 싸워도 되오"
여포는활을 들어 화극을 쏘니 화극의소지에 명중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놀라서 말했다.
"장군께서는 정말로 하늘의 위세를 갖추고 있소이다"
다음날 다시 즐겁게 모여서 연회를 베푼 이후에 각자 싸움을 그만두었다.
원술은 여포와 친분을 맺어 구원군으로 삼을 생각으로 곧 아들에게 여포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고 여포는 그것을 수락했다. 원술은 사자 한윤을 파견하여 참람되게도 황제의 칭호를사용하여 여포에게 논의하고는 아울러 며느리를 맞이할 것을 요청하였다.
패국의 재상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사돈을 맺으면 서주와 양주가 연합하게 될 것이며 이는 장차 국가이 재난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여포에게 나아가 말했다.
"조공은 천자를 받들어 영접하고 국가의 정사를 보조하고 있으므로 그 위세는 헤아리기 어렵고 명성은 세상에 드높으며 장차 천하를 정복하려고 하고 있으니 장군께서는 마땅히 조공과 협력하여 책략을 세워 태산과 같은 안정을 도모해야 합니다. 지금 원술과 사돈지간이 되면 천하에서의 의롭지 못한 명성을 얻게 되며 반드시 계란을 쌓아 놓은 것과 같은 위험에 놓이게 됩니다."
여포 또한 원술이 처음에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것을 원망하였다 딸은 이미 길을 떠난 뒤였으므로 그는 딸을 뒤쫓아가 돌아오게 해 혼인약속을 파기하고 한윤에게는 형틀을 채워 호송하여 허현의 저자에서 머리를 베어버렸다. 진규는 아들 진등으로 하여금 조조를 만나게 하려고 했으나 여포는 그를 파견하도록 승낙하지 않았다.
때마침 조조의 사자가 와서 여포를 좌장군에 제수했다. 여포는 매우 기뻐하여 진등이 조조를 만나러 간다는 것을 듣고는 중장을 가지고 가서 은혜에 보답하도록 했다. 진등은 조조를 만나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고 배반하고 의존함을 가볍게 여기니 일찌감치 그를 제거하는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니 조조가 말했다.
"여포는 야만스런 마음을 갖고 있는 이리 같으므로 진실로 오래 받들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의 정황을 살필 수가 없었소"
즉시 진규의서열을 2천석으로 끌어올리고 진등을 광릉태수로 임명하였다. 서로 헤어질 때 조조는 진등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동방의 일은 단지 그대에게 달려 있소"
조조는 진등로 하여금 은밀히 부대의 군대를 모아 내통하도록 한 것이다.
본래 여포는 진등을 통하여 서주목이라는 지위를 요구하였는데 임명되지 못했으므로 진등이 돌아오자 매우 화를 내며 화극을 뽑아 상을 쪼개며 말했다.
그대의 아버지께서는 내게 조공과 협력하라고 권하였으므로 공로와의 결혼을 파기하였으나 지금은 내가 요구한 것 중에서 한가지도 얻은 것이 없소. 그런데도 그대 부자들은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그대들에 의해 나는 팔렸을 뿐이오 그대가 나를 위해서 한 그 말은 무엇이오?"
진등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며 천천히 여포에게 깨우치며 말했다.
"저는 조조를 만났을 때 장군을 대하기를 마치 호랑이를 기르듯 해야 합니다. 호랑이는 고기를 먹어 배가 불러야 하지 배부르지 않으면 사람을 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니 조조가 말하기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지 않소 비유컨대 매를 기르는 것 같소 굶주리면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배부르면 그것을 날려보낼 것이오라고 했으니 그의 말은 이와 같았습니다."
여포는 마음속의 분노가 곹 가라앉았다.
원술은 화가 나서 한섬과 양봉 등과 세력을 합하여 대장 장훈을 보내 여포를 공격하였다. 여포는 진규에게 말했다.
"지금 원술의군대를 불러들인 것은 그대 때문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되겠소?"
진규가 대답했다.
"한섬과 양봉등의 군대는 원술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모아진 군대일 뿐이니 계책과 모략이 평소에 만들어지지도 않았으머 유지해 나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제 아들 진등이 이 일을 처리할 것입니다 비유컨대 뀡과 닭이 한군데 모여 있으면 함께 둥지를 틀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포는 진규의계책을 받아들여 사람을 파견하고 한서모가 양봉을 설득하여 자신과 힘을 합쳐 원술의 군대를 공격하자고 하고는 가지고 있던 군사물자를 모두 한섬과 양봉에게 보내주었다. 따라서 한섬고 양봉은 그르 따랐고 장훈은 크게 패하였다.
건안3년(198)여포는 다시 원술과 연합하여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고순을 파견하여 소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쳐부쉈다. 조조는 하후돈을 보내어 유비를 구하도록 했으나 고순에게 패하였다 조조는 직접 여포를 정벌하기 위해 여포의 성아래에 이르러 여포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조와 결합하는 것과 원술과 결합하는 것의 이해관계를 설명해주었다.
여포가 투항하려고 하자 진궁 등은 자신들이 지은 죄가 깊다는 것을 생각하여 그의 생각을 저지하였다. 그런데 여포가 사람을 파견하여 원술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원술은 스스로 기병 천 여 명을 이끌고 전쟁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달아나 돌아가서는 성을 지키고 감히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원술역시 여포를 구원할 수 없었다. 여포는 비록 용맹스럽지만 무모하고 의심과 질투가 많고 그의 부하를 통제할 수도 없었으며 단지 몇몇 장수들만 믿었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도 서로간에 의견이 같지 않아 서로 밎지 않고 이로 인하여 싸울 때마다 대부분 대패하였다.
조조가 참호를 파고 포위한 지 석 달만에 여포의 진영에 있는 사람과 위아래에 있는 사람과의 마음이 달라 그의 장수 후성 송헌 위속은 진궁을 묶어버리고 그들의 부하를 이끌고 와서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직속 부하들과 함께 백문루에 올랐다 포의망이 좁혀어자 여포는 하는 수없이 내려와 항복했다 드디어 여포를 사로 잡았는데 여포가 말했다.
"너무 꽉 조이게 묶었으니 조금 느슨하게 하십시요"
조조가 말했다.
"큰 호랑이를 묶었으니 부득이 꽈 조여야 한다."
여포가 요청했다.
"명공께서 근심으로 여기던 것중세나 나 여포보다 더 지나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이미 항복을 했으니 천하에 근심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명공께서 보병을 거느리고 나 여포로 하여금 기병을 거느리게 하면 천하를 쉽게 평정할 것입니다"
조조는 의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유비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명공께서는 여포가 정건양과 동태사를 섬기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이 말을 듣고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는 손가락질하며 유비에게 말했다.
"이 녀석은 가장 믿지 못할 놈이구나!"
결국 여포를 목매달아 죽게 했다. 여포와 진궁 고순등은 목이 베어 허장까지 옮겨졌으며 그런 후에 그들을 매장했다.
조조가 진궁을 사로 잡았을때 진궁에게 그의 노모와 딸을 살려주어야 할지 죽여야 할지를 물으니 진궁이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천하를 효로서 다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피붙이를 끊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노모가 살고 죽는 것은 명공에게 달려 있지 제 뜻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조는 그의 노모가 여생을 마칠 때까지 불러서 봉양해 주었으며 진궁의 딸도 시집을 보내 주었다.
진등은 자를 원룡이라고 하며 광릉에서 위엄과 명성이 있었다. 또 여포를 견제한 공적이 있어 복파장군까지 겸했으나 나이 서른아홉에 죽었다. 나중에 허범과 유비가 형주목 유표의 식객이 되었는데 유표가 유비와 천하의 인재에 대하여 논의할 때 허범이 말했다.
"진원룡은 남방의 인물이지만 오만한 기풍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유비가 유표에게 말했다.
"허군의 견해는 옳은 것입니까,그른 것입니까?"
유표가 대답했다.
"그르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 사람(허범)은 뛰어난 선비이니 마땅히 헛말은 아니 할 것이오 만일 옳은 말이라면 원룡의 명성은 천하에 울리고 있는것이오"
유비가 허범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가 오만하다고 말했는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허범이 말했다.
"옛날에 나는 전란을 만나 하비성을 지나다가 원룡을 만났습니다. 원룡은 주인과 손님의 예의도 없었으니 오랫동안 서로 말도 없이 혼자 큰 침상 위에 눕고 손님으로 하여금 침상 아래에 누워있게 하였습니다."
유비가 말했다.
"당신은 국사라는 명성을 갖고 있으며 지금 천하가 크게 혼란스러워 천자는 거처할 장소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국가를 근심학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머물만한 전원에 관심을 둘 뿐이며 말을 해도 받아들일 만한 점이 없으니 이는 진원룡에 의해서 거리낌받는 바이니 어떤 화제를 인연으로 하여 당신과 더불어 말을 하겠습니까? 만일 저 같으면 백 척 높이의 누각에 누워 당신으로 하여금 땅 위에 누워있게 했을 것인데 어찌 침상 위와 침상 밑의 구분뿐이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유표가 크게 비웃었다. 유비가 이 웃음에 탄식하며 말했다.
"진원룡처럼 문무를 겸비학 담력과 웅지를 갖춘 인물은 마땅히 고대에서 찾을 뿐이니 창졸간에 그와 비견될 만한 인물을 찾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유표전-------------劉表傳
유표(劉表)의 자는 경승(景升), 산양(山陽) 고평(高平)사람이다. 어려서 지식으로 이름이 나서 '팔준(八俊)'으로 불렸다.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준수하였다. 대장군의 하급관리인 북군중후(北軍中候)가 되었다. 영제가 죽자 왕예(王叡)를 대신하여 형주자사(荊州刺史)가 되었다. 이 때 산동(山東)에서 동탁(董卓) 토벌군을 일으킬 때 유표 역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합하였다. 원술(袁術)이 남양(南陽)에 있을 때 손견(孫堅)과 연합하여 유표의 영지를 빼앗고 손견으로 하여금 유표를 공격케 하였다. 손견이 유시(流矢)를 맞고 죽자 원술군은 패하였고 결국 유표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각(李 )과 곽사(郭 )가 장안으로 들어갔을 때 유표와 연합하여 도와주려 하였고, 유표를 진남장군(鎭南將軍), 형주목(荊州牧)에 삼고 성무후(成武侯)에 봉하여 천자의 부절을 보냈다. 천자가 허(許)에 도읍하자 유표는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으며, 북쪽의 원소와 동맹을 맺었다. 치중 등희(鄧羲)가 유표에게 간언을 하였지만 유표는 듣지를 않아, 결국 등희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 유표대에 죽었다.(終表之世) 장제(張濟)가 군사를 이끌고 형주경계의 양성(穰城)을 공격하였으나, 유시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형주의 관리들이 모두 축하하였으나, 유표가 말했다. '장제는 궁하여서 왔는데 주인이 무례하여 싸움을 벌였으니, 이는 나의 뜻이 아니로다. 나는 조문을 받지 축하는 받지 않겠다.' 장제의 군사들을 들여보내게 하니 모두들 듣고서 기뻐하였으며, 결국 유표에게 복종하였다. 장사태수(長沙太守) 장선(張羨)이 유표를 배반하였는데, 유표는 포위한지 몇 년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장선이 죽자, 그 아들 장역(張 )을 세웠다. 유표는 결국 장역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남으로 영릉(零陵), 계양(桂陽), 북으로 한천(漢川)을 거두어 땅이 수천리에 이르고 병력이 10여만에 이르렀다.
조조(曹操)가 원소(袁紹)와 이제 막 대치하고 있을 때, 원소는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여, 유표가 허락하였으나 이르지 못하고 또한 조조를 도운 것도 아니었다.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사이를 보전하여 천하의 변란을 관망하였다. 종사중랑(從事中郞) 한숭(韓嵩)과 별가(別駕) 유선(劉先)이 유표에게 설득하였다. '호걸들이 병립하여 다투고 조조와 원소가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천하가 중대해짐은 장군께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장군께서 패업을 이루시려면 그 피폐함을 타고 일어나시고, 만약 그렇지 않으신다면 진실로 따를 자를 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1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서 편안히 앉아 천하를 관망하십니다. 무릇 현명함을 보고서도 돕지를 아니하고, 화의를 청했는데도 얻지 못함은 양쪽의 원망이 장군께로 모이게 되어, 장군은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조조는 명철하여 천하의 인재들이 모두 그에게 몰리고 있으며, 원소를 깨뜨린 후에 강한(江漢)지역으로 향할 것이니, 장군께서 막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장군의 계책을 실행하려면 고을을 들어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장군을 중히 쓰실 것이고, 오래 복을 누리시다가 후사를 물려주면 되니, 이를 만전(萬全)의 책이라 하겠습니다.' 대장 괴월( 越)도 또한 유표를 권하니, 유표가 의심스러워 한숭을 조조에게로 보내 허와 실을 관찰하게 했다. 한숭이 돌아와서 조조의 큰 덕에 감화되어 유표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자고 설득했다. 유표는 한숭이 조조에게 돌아갔음을 의심하여 매우 화를 내며 한숭과 그의 수행원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한숭이 다른 의도가 없었음을 알고는 그만 두었다. 유표는 비록 외모는 선비처럼 단아하였지만 마음에 의심과 꺼림이 많으니, 모두가 이러한 무리들이다.
유비(劉備)가 유표에게로 달아나자, 유표는 후하게 대접했지만 쓰지는 않았다. 건안(建安) 13년(209) 조조가 유표를 정벌하니, 이르기도 전에 유표는 병들어 죽어버렸다. 처음에 유표와 처는 아끼는 작은아들 유종(劉琮)을 후사로 세우려 하였고, 채모(蔡瑁)와 장윤(張允) 등이 당파를 만들어 큰아들 유기(劉琦)를 강하태수(江夏太守)로 내보내니, 모두들 결국 유종을 후계자로 받들었다. 유기와 유종은 원수가 되었다. 괴월과 한숭과 동조연(東曹 ) 부손(傅巽) 등이 유종에게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하였다. 유종이 말했다. '여러분들과 함께 초(楚)땅(형주 양양지방은 옛날 춘추시대의 초나라 자리임)에 웅거하여 선군의 유업을 지켜왔는데, 천하를 관망하여 보니, 어찌 불가한 것을 한단 말인가.' 부손이 대답했다. '거스르고 순응함은 마음에 있고, 강함과 약함은 세상을 정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신하로서 군주를 막는 것은 반역이며, 새로 초나라를 건설하여 국가를 통제함으로 조조의 세력을 막을 수 없으며, 유비가 조조의 적수가 된다 하나 또한 당해낼 수 없습니다. 이 세가지 모두 단점이어서 조조의 군대를 막으려 한다면 반드시 패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유종이 말했다. '난 그렇게 못하겠소.' 부손이 말했다. '진실로 유비가 조조를 막아낼 수 없으면 비록 초땅을 보존한다 할지라도 스스로 존립할 수 없으며, 진실로 유비가 조조를 막아낸다고 한다면 유비는 장군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소서.' 조조군이 양양에 이르자, 유종은 항복하였고, 유비는 하구(夏口)로 달아났다. 조조가 유종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고 열후에 봉했다. 괴월 등 제후가 된 사람이 15명이었다. 괴월은 광록훈(光祿勳), 한숭은 대홍려(大鴻 ), 등희는 시중(侍中), 유선은 상서령(尙書令)이 되었으며, 그 나머지 많은 이들이 큰 벼슬을 받았다.
유언전-----------------유언은 자가 군랑이고 강하군 경릉현 사람이며 한 대 노나라 공왕1)의 후손이다. 유언의 선조가 장제 원화 연간에 경릉에서 봉해졌으므로 분가하여 이곳에 정착했다. 유언은 어려서 주와 군의 관리로 근무하였고, 종실의 자제로서 중랑으로 임명되었지만, 이후에 스승 축공이 세상을 떠나자 복상을 이유로 관직을 떠났다. 그는 양성산에 살면서 학문을 쌓고 사람들을 가르쳤으며, 현량방정으로 추천되고, 사도의 막객이 되었으며, 낙양령 기주자사 남양태수 종정 태상을 역임했다. 유언은 후한 영제의 정치가 부패하여 혼란스러워지고 왕실에 여러 차례 변고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조정에 건의하여 이렇게 말했다. '자사나 태수는 뇌물로 관직에 올라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마음이 떠나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청렴하고 명망있는 중신을 선발하여 지방의 장관으로 삼아 나라를 진정시켜 안정되게 해야 합니다.' 유언은 내심으로는 교지목이 되기를 희망하고, 세상의 혼란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논의를 거친 그의 의견은 즉시 시행되지 않았다. 시중 광한사람 동부2)가 사사로이 유언에게 말했다. '수도는 장차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익주의 분야(전국시대 때 천문가가 중국의 전 영토를 하늘의 이십팔수에 배당하여 나눈 칭호)에 천자의 기운이 있습니다.' 유언은 동부의 말을 듣고 익주에 마음을 두게 되었다. 마침 익주자사 극검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여 백성들의 원망이 먼 곳까지 들려왔고, 병주에서는 자사 장일이 살해되고, 양주에서는 자사 경비가 살해되었으므로 유언의 계획은 실현되었다. 유언은 지방으로 나와 감구사자가 되었고 익주목을 겸임하였으며, 양성후에 봉해져 극검을 체포하여 그 죄를 취조하는 일을 맡았다.3) 동부 또한 촉군 서부의 속국도위가 되기를 희망하였고, 또 태창령 파서 사람 조위도 관직을 버리고 함께 유언을 따랐다. 이 당시 익주의 역적 마상, 조지 등은 면죽현에서 자칭 황건이라고 부르는, 역무에 지친 백성들을 불러모아 하루 이틀 사이에 무리가 수천 명이 되었으며, 먼저 면죽현의 현령 이승을 죽이고 관리와 백성들을 규합하여 총 1만여 명이 되었다. 그들은 계속 진격해 낙현을 파괴하고, 익주를 공격하여 극검을 살해하였다. 또 촉군, 건위에 도착하여 한 달 만에 삼군을 파괴했다. 마상은 스스로를 천자라고 불렀고, 인솔 병력이 수만 명이나 되었다. 익주의 종사 가룡은 사병 수백명을 이끌고 건위 동쪽 경계 지역에서 관리와 백성 천여 명을 수하에 들어오게 했다. 그리고 마상 등을 공격하여 며칠만에 패주시켜 익주 안은 평온을 되찾았다. 가룡은 관리와 병사를 선발하여 유언을 영접했다. 유언은 관청을 면죽현으로 옮기고, 반란을 일으켰던 자들을 다시 받아들여 관용과 은혜를 베푸는 정치에 힘쓰며 은밀히 독자적인 계획을 추진하였다. 장로의 어머니는 처음에 무술을 사용하여 항상 젊은 모습을 하고 유언의 집을 왕래했다. 때문에 유언은 장로를 독의사마로 임명하여 한중으로 파견해 골짜기의 다리(장안으로 통하는 길목)를 끊고 한나라 사자를 살해하도록 했다. 유언은 조정에 편지를 올려 말했다. -미적(오두미도의 신봉자)이 길을 끊어놓아 수도와 연락을 할 수 없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일을 빌려 익주의 호족 왕함, 이권 등 십여 명을 죽이고 자기의 권력 의욕을 나타냈다. 건위태수 임기 및 가룡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유언을 공격하였지만, 유언은 임기와 가룡을 격파시키고는 살해했다. 유언의 마음은 점점 강렬해져 천자가 타는 수레와 용구 천여 대를 만들었다. 형주목 유표는 유언에게 자하가 공자가 죽은 후 서하에서 성인처럼 논의할 방법이 없음을 회의한 것과 같은 점이 있다고 상주했다. 그 당시 유언의 아들 유범이 좌중랑장으로, 유탄이 치서어사로, 유장이 봉거도위로 있었는데, 모두 헌제를 모시며 장안에 있었다. 단지 작은아들 별부사마 유모만이 줄곧 유언을 모셨다. 헌제는 유장을 보내 유언을 계도하도록 했는데, 유언은 유장을 머물게 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당시 정서장군 마등은 미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반을 했다. 유언과 유범은 마등과 내통하여 일을 도모해 병사를 이끌고 장안을 습격했다. 계획한 일이 누설되자 유범은 괴리로 도망쳤고, 마등은 패하여 물러나 양주로 돌아갔으며, 유범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유탄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의랑 하남 사람 방희는 유언과 대대로 교제가 있었으므로 유언의 자손들을 불러 촉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이 당시 유언은 낙뢰를 맞아 성을 불태웠고, 수레 용구를 모두 탕진하였으며, 민가에까지 폐를 끼쳤다. 유언은 관서를 성도로 옮겼지만, 죽은 아들에 대한 비통함과 또 하늘에서 내린 재난으로 상심하다가 흥평 원년, 등에 악성 종양이 나 죽었다. 익주의 고위 관리 조위 등은 유장의 성품이 온후하고 인자함을 탐내, 함께 유장을 익주자사로 임명하라는 편지를 올렸다. 조서를 내려 유장을 감군자사로 임명하고 익주목을 겸임하도록 했다. 조위를 정동중랑장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통솔하여 유표를 공격하도록 했다.
황권전---------------황권은 자가 공형이고,파서군 낭중현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군리가 되었으며, 주목 유장이 불러내 주부로 삼았다. 당시 별가 장송은 응당 유비를 영접해야만 되므로, 황권을 시켜 장로를 토벌하자고, 건의했다. 황권이 간언하여 말했다. '좌장군(유비)은 용맹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이르도록 요청하더라도 부하로서 그를 대우한다면,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것이고, 빈객으로 접대한다면, 주인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은 위험을 갖게 될것입니다. 단지 국경을 페쇄하고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릴수밖에 없습니다.' 유장은 황권이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사자를 파견하여, 유비를 맞이하였으므로,황권을 밖으로 내보내 광한현의 장으로 임명했다. 유비가 익주를 습격하여, 탈취했을때. 그의 장수들은 나누어 군현을 공격했으며, 군현은 그림자가 형제를 따르듯 유비에게 귀순했는데, 황권은 성을 닫고 견고하게 수비하다가...유장이 항복하는 것을 기다린 연후에야 비로서 유비에게 귀순했다.유비는 황권을 거짓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장로를 격파하자 장로는 도주하여, 파중현으로 들어왔는데, 이때 황권이 간언했다. '만일 한중을 잃게 된다면, 삼파는 힘이 약해질것입니다. 이것은 촉군의 수족을 자르는 것이 됩니다.'그래서 유비는 황권을 호군으로 임명하고,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장로를 영접하도록 했다.장로는 벌써 남정으로 돌아가 북쪽으로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두호,박호를 격파하고, 하후연을 살해하고 한중을 점거했는데, 이는 모두 황권의 계획이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익주목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황권을 치중종사에 임명했다. 유비가 제라고 칭하며, 동쪽으로 오나라를 정벌하려 할때. 황권이 간언하여 말했다. '오나라 사람은 용감하여 전쟁을 잘하고, 또 촉의 수군은 물의 흐름을 따라 행동하므로, 전진하기는 귀워도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먼저 가서 적군의 허실을 살피고, 페하께서는 응당 뒤에서 지키시기를 청합니다.'
유비는 황권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황권을 진북장군으로 임명해, 강북의 군대를 통솔하여 위나라 군대를 막도록 했으며, 유비가 직접 장강 이남으로 갔다. 오나라의 장군 육의가 물의 흐름을 타고, 갑자기 포위하자 강남의 촉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유비는 군대를 인솔하여 후퇴했다. 그러나 이때 길이 끊겼으므로, 황권은 돌아올수 없었기 때문에 장수들을 이끌고, 위나라로 투항했다.
담당관리가 법을 집행하면서, 황권의 처자식을 체포해야 한다고, 아뢰자. 유비가 말했다.'내가 황권을 져버렸지... 황권이 나를 져버리지 않았다...' 유비는 황권의 식구들을 이전과 똑같이 대우했다. 위문제가 황권에게 말했다. '그대가 천의를 배반한 군주를 버리고, 천의에 순종하는 군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진평과 한신(진평과 한신은 항우를 버리고, 한고조에게 갔던 인물.)을 따르려는 것이오 ?' 황권이 대답했다.
'신은 유주로부터,과분한 대우를 받아, 오나라에 항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촉으로 돌아가는 길이 없어서, 귀순한것입니다.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한 군대의 장수로서, 죽음을 면한 것은 다행스런 일인데 어찌 고인을 따라 흠모할수 있겠습니까 ?'
문제는 황권의 대답에 감동하여 전남장군으로 임명하고, 육양후 로 봉했으며, 시중의 관직을 더하고, 그로 하여금 수레에 함께 타도록 했다. 촉나라에 투항한 사람중 어떤이가 황권의 처자식이 처형되었다는 말을 했지만, 황권은 그말이 거짓임을 알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 후에 상세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과연 황권이 말한대로였다.'
유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위나라 신하들은 모두 기뻐했는데, 황권만은 그렇지 못했다... 위문제는 황권이 도량이 있다고 판명하여, 그를 놀래키려는, 생각으로 주위사람을 보내,황권에게 출두하라는 칙명을 내리고, 도착하기까지 사이에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다.말을 탄 사자가 질주하여 길에서 교체했다. 황권 수하의 기종으로 혼비백산 하지 않은사람이 없었는데, 황권의 행동거지와 안색은 태연자약했다. 후에 황권은 익주자사를 겸임하였고, 옮겨 하남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장군 사마선왕은 그(황권)를 매우 중시했다.사마선왕이 황권에게 질문을 했다...
' 촉나라에는 그대와 같은, 사람이 어느정도나 됩니까 ?'
황권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명공께서 저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깊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
사마선왕은 제갈양에게 주는 편지에서 말했다.
'황공형은 호바한 남자입니다. 항상 앉으나 서나 그대를 칭찬하였는데, 말을 빌려 어떤 구실을 찾을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초 3년 (239)즉 촉나라 연희 2년에 황권은 거기장군,의도삼사,로 승진했다. 다음해, 세상을 떠났으며,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아들 황옹이 후사를 이었다. 황웅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작위는 끊겼다. 황권이 촉에 남겨두었던 아들 황숭은 상서랑이 되어 위장군 제갈첨을 수행하여 등애를 방어했다. 부현에 도착하자, 제갈첨은 주저하여, 전진하지 못했다. 황숭은 제갈첨에게 응당 신속하게 가서 요충지를 점거하여 적군의 평지 진입을 저지하도록 여러차례건유했다. 제갈첨은 결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황숭은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다.
마침 등애가 신속하게 전진해왔다. 제갈첨은 퇴각하면서 싸워 면죽까지 이르렀다. 황숭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필사의 각오로 싸우다가 전쟁터에서 죽었다...
동이전---------------'서경'에서 말하길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접한다.'라고 하니, 이는 그 구복의 제도를 얻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칠은 지역의 바깥에도, 중요한 역사들이 이르렀으나, 발자취와 수레바뀌가 미치지 않으면, 그 나라의 풍속과 타국을 알 수 없다. '우'에서 '주'에 이르기 까지 서융은 백환을 받침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의 조공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대에 이르르는 것이니, 멀고 먼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한'에 이르러 '장막'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황하'의 근원에 다다르고, 여러나라를 지나니, 이르러 도호를 둠으로써, 이를 다스렸다. 그러한 이후로 서역의 일이 보존하게 되고, 고로 사관들이 자세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었다. '위'가 일어나자, '서역'이 비록 능히 煥?이르르지 못했으나, 그 큰 나라인 '구자', '우치', '강거', '오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가 속하니, 세세토록 조공을 받치지 않음이 없으니, '한'의 옛일과 같은 다스림이었다. '공손연'이 아버지, 할아버지부터 삼대를 '요동'에 있으니, 천자가 그 지역과 단절하고, 해외의 일을 내버려 두었다. 이에 '동이'와 단절하고, 여러 나라들은 통함을 얻지 못하엿다. '경초'중에 군사를 크게 내어 '연'을 베고, 군사를 죽이니, '낙랑'과 '대방'의 고을을 거두어 들이니, 후에 바다가 고요해 지고, 동이가 굴복하였다. 후에 '고구려'가 모반을 하자, 또 군사를 파견하여 치고, 멀리까지 쫓아가니, '오환'과 '골도'를 넘어, '옥저'를 지나, '숙신'의 땅까지 밟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늙은 노인이 말하길,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해가 떠오르는 곳 가까이 있다 하여, 두루 여러 나라를 보아 그 법과 풍속을 얻으니, 크고 작은 구별이 있고 각각 이름이 있어 가히 얻어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조두모양의 그릇이 있다. 중국에서 예를 잃어 버리면, 사이에서 구한다 하는 것은 역시 믿을만 한 것이다. 고로, 그나라의 일을 기록하여, 같음과 다름을 열거하여 과거의 역사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하려고 하는 것이다.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다. '현토'에서 천리를 간다. 남으로 '고구려'가 있고, 동쪽으로 '읍루'가 잇으며, 서쪽으로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가히 이천리이고 호수는 팔만호이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으며, 산과능선이 많으며, 연못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과격하고, 크다.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삼갈 줄 알고,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옹이 있고, 모두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는데,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모두 노비로 하였다. 여러 '가'의 주인은 각각 사방을 다스리는데, 도가 큰자의 주인은 수가 천집이고 작은자는 백집이다. 음식을 먹음에는 모두 조두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 이를 '영고'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나라에서 옷에 흰색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개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 신발은 가죽으로 한다. 나라에서 나갈때는 비단옷을 입기를 숭상한다. 성인은 여우, 원숭이,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 때는 모두 꿇어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 형벌을 사용함에 엄하고 급하여,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배로 갑으며,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이를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위에 두고 썩힌다.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로 갚은후 옮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데, '흉노'와 풍습이 같다. 나라에서 좋은 소(제사용)을 기르고, 이름있는 말, 붉은 옥과 담비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온다. 구슬이 큰 것은 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써 병기를 하고,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무기가 있다. 나라의 늙은 노인이 말하길, 옛날 망명인들이 성을 지을 때 성책을 둥글게 하니, 감옥과 같았다. 밤낮 길을 가며 노인과 아이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그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다. 굽이 풀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쳐져 있으면 길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으면, 모든 '가'들이 스스로 전쟁을 하는데, 아래 백성들은 양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이를 먹였다. 그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으면, 백명이나 되었다. 장사는 후하게 치루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략'에 그 풍속에 장사는 오개월이나 되는데, 오랠수록 성한 것이다. 망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채로 하는 것도 있고, 익히는 것도 있다. 상주는 빨리 하고자 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강제로 잡아당겨 다투면서 이를 한다. 상에 거할 때, 남녀는 모두 하얀 옷을 입고, 부인은 베옷을 입고, 목거리와 패물을 때어 놓으니, 대체적으로 중국과 비슷함이 있다. '부여'는 본래 '현토'에 속하였는데, '한'말에 '공손도'가 바다 동쪽에서 크게 일어서자, 바깥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속시켰다. 부여왕 '위구태'는 다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하자, '공손도'가 '부여'가 두 오랑캐 사이에 있자, 종실의 여자를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섰다.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가 있어, '위거'가 죽자 여러 '가'들이 함께 '마거'를 세웠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위거'이니, 대사로 하였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선을 배푸니, 나라사람들이 따랐다. 세세토록 사신을 파견하여 서울에 이르러 공물을 바쳤다. '정초'중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구려'를 벌하고, '현토' 태수 '왕기'를 부여에 보냈는데, '위거'가 대가를 보내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군량을 보태었다. 계부인 우가가 두 마음이 있자, '위거'가 계부의 아비와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기록하고, 염송관으로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 가뭄이 들고,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갑자기 그 왕을 책망하는데, '혹 바뀜이 마땅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라고 말한'마여'가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가 여섯 살로 왕위에 올랐다. '한'때에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공손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늙은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라 한다. [위략에 말하길 그 나라는 몹시 부유하니 선대부터 왔다.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그동장의 글자에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스스로 '망인'이라 하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위략에서 말하길 예날 북방에 '고리'국이 있었다. 그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어,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자 시녀가 말하길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 내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기운으로 덥히고,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들도 이와 같아, 죽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하늘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기르게 명하였다. '동명'은 궁술에 능하자,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이네 흩어지자, 쫓던 병사들은 건널수가 없었다. '동명'은 이로 인하여, '부여'의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로, 사방 이천리 이며 호수는 삼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다. 산과 골짜기를 따라 거주하며, 계곡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비록 힘써서 밭을 경작하지만,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다. 풍속에 음식을 절약하고, 집을 관리하는 것을 즐겨 그 거하는 곳에 큰 집을 좌우에 세우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낸다. 그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그 나라에 왕이 있고 관직이 있어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선인'이라 하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각각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의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 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다. 그러나, 그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본래는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에서 대를 잇는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밭을 갈지 않는데,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공손히 보태준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린다.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명'이라고 한다. 공적인 모임때의,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들이 모여 의논하여, 이를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스스로의 신분을 밝힌 후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데, 보통 두세번 한다. 여자의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 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 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이에 마땅히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결혼만 하면, 조금씩 죽어서 입을 옷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죽은자에게 보낸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들은 모두 작아, 산을 오르기에 편하다. 나라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힌다. '옥저', '동예'가 모두 속하였다. 또한 '소수맥'도 속하였다. '구려'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북쪽에 소수가 잇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이라 한다.
'왕망'초에 '고구려'병사를 일으켜 '호'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았다. 강제로 다그쳐 이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거기에서 살해 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에게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으나, '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자, '추'가 이르자 이를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의 이름을 '하구려'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마땅히 이때부터 후국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이 수차례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현토'가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궁'이 두 고을에 해가 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궁'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와 관리와 백성을 죽였다. 후에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이를 토벌하려 했지만, 군사가 패하고 말았다.'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섰다. '순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겨향'을 약탈하고, 또한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길위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얻어,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포로 수백의 머리를 베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가평'중에 '백고'가 '현토'에 속하길 빌었다. '공손도'의 웅지가 바다동쪽에 이르자, '백고'가 대가 '우거'와 주박 '연인'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이다. '발기'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때에 수차례 '요동'을 침략하고, 또한 망한 '호'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공격하여, 그 나라를(고구려)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가'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에 항복하고, '비류수'로 돌아와 살았다. 항복한 '호'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인 '교위거'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음란하여 아들을 낳으니,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싫어 하였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의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이라 하였다. '위궁'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삼년 '궁'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오년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깨졌다. '검전'에 있어 전한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호수는 오천이다. 큰 군장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 각각에 '장사'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와 크게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 '한나라'초에 '연'의 망명인 '위만'이 '조선'에서 왕노릇할 때 '옥저'가 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을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사군을 두었는데, '옥저성'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와 '맥'이 침입하여, 마을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에 있는 옛 마을이 이것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한'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를 두고, '불내성'에서 다스렸다.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를 없엤다. 그 후로 현에 있는 거사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내', '화려', '옥저'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히려, '불내'와 '예후'는 '공조'와 '주박제조'를 두었다. 이는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의 여러 읍락의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 삼로라 칭하는데, 즉 옛날 현국의 제도인 것이다. 나라가 작고, 큰나라 사이에 있어 궁핍하여 신하로써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다시 대인들을 사자로 삼았는데, 사는 주인인 것이다. 또한 대가들이 조세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포와 물고기, 소금 과 바다음식이다. 천리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받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와 첩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비와 같은 것이다. 그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오곡에 마땅하며,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작고, 창병과 보병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와 같음이 있다. '위략'에서 말하길, 그 시집가고 장가드는 법에 여자는 십세가 되면, 이미 허락을 한다. 사위되는 집에서 이를 맞이하여, 클때까지 길러 부인으로 삼는다.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다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위집으로 돌아온다. 장사지낼때는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세로 죽은자는 모두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 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는다. 죽은자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을 넣고, 곽의 출입구 한쪽에 메어둔다. '관구검'이 '구려'를 칠 때, '구려왕 궁'이 '옥저'로 달아났는데, 진격하여 이에 이르러 부딧쳤다. '옥저'의 읍락이 모두 깨지고, 포로와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이 '북옥저'로 달아났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이다.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그 풍속은 남북이 모두 같다. '읍루'에 접해 있다.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 함을 즐기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 하여 여름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있으면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이에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에게 부대를 나누어 궁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그 나라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얻었다. 올라가 보니 사람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또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가운데에 있다.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에 얼굴이 또 있었다. 살아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안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읍루'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에 닿고, 그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그 땅은 산이 험하고 많으며, 그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와는 다르고 '구려'와 같다.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다.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처하면서 항상 동굴에서 산다.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그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 여름에는 곧 벌거 벋고, 한척되는 천으로 앞 뒤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사람들이 깨끗하질 못하여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거한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든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다. 푸른돌로 화살촉을 만들니, 옛날부터 '숙신씨'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모두 눈을 맞치고, 화살에 독을 발라 사람에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이제 읍루초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한'의 말기에 '부여'의 신하였다가, '부여'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니, '황초'중에 모반 하엿다.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사람들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 하여 병사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 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거리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는 아니었다.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예'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이다. 동쪽으로 큰 바다가 있고, '조선'의 동쪽은 모두 그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이르러 팔조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 않고 백성들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에 '조선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을 배신하였다. '연','제', '조'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인 '위만'이 있어 상투틀고 이족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하였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와 '한'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부터의 관직에, '후', '읍군', '삼노'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다.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다. 남녀의 옷은 모두 분명하게 옷깃이 굽었고, 남자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을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서쪽은 '낙랑'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다.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한'의 말에는 다시 '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그 풍속에 산과 천을 중하게 여기어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어서, 서로 들어와 허망함을 바라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하니,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빨리 버리고, 옛집도 버린다.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짓는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래의 풍년들 것임을 미리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하였다. 또한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짓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명하여,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이 적다. 창은 길이가 삼장이나 되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가 나온다. '한 환제'때에 이것들을 받쳤다. 신하 '송지'가 말하길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가히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간다. 고로 과하라고 하는 것이다. '박물지', '위도부'에서 보았다.
'정시' 육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이 '동예'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내'를 '예왕'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고하였다.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로 한다.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 사방 사천리이다.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이고, 둘은 '진한'이고, 셋은 '번한'이다. '진한'은 옛날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백성들은 토착을 하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각각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고탄자국>·<고리국>·<노람국>·<월지국>·<자리모로국>·<소위건국>·<고원국>·<막로국>·<비리국>·<점리비국>·<신흔국>·<지침국>·<구로국>·<비미국>·<감해비리국>·<고포국>·<치리국국>·<염로국>·<아림국>·<사로국>·<내비리국>·<감해국>·<만로국>·<벽비리국>·<구사오단국>·<일리국>·<불미국>·<지반국>·<구소국>·<첩로국>·<모로비리국>·<신소도국>·<막로국>·<고랍국>·<임소반국>·<신운신국>·<여래비리국>·<초산도비리국>·<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무릇 오십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 정도이다. 총 10여만 호 정도이다.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린다. '신지' 혹은 '가우'를, '신운견지'라 부르는데, 안정됨을 지키고, 정도에 벗어남을 멀리하고, 신하를 받들어 주는 것과, 아이에게 베푸는것이 사됨이 없어 비교할수 없다. '진지'는 겸손한 호칭이다. 그 관직은 위나라를 따라서,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다.
'후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 '위략'에서 말하길, 옛날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약해짐을 보고, '연'이 스스로를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가 이를 간하여, 멈추게 되고, '예'를 서쪽으로 보내어 '연'에게 말하니 '연'도 이를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이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하였다.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이 약해지게 되었다.'진'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가 섰다. '진'이 엄습할까를 두려워 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섰다. 이십여년후에 '진', '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시름하였다. 점점 '준'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로 삼았다. '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호'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이에 이르러,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망명인으로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머리로 하였다. '만'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 방비하기 위해 들어가니, 돌아서서 '준'을 공격하였다. '준'이 '만'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하였다. 스스로 '한왕'이라 하였다.[위략에 말하길 그 아들이 나라에 있어, 성을 '한씨'라 하였다. '준'이 바다가운데 있은 후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로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인이 오히려 그를 제사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에 '낙랑군'에 속하게 되고, 사시 조알하였다. [위략에, 처음 '우거'가 깨어지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 '역계경'이 간하였지만, '우거'가 쓰지 않았다. 동쪽의 '진국'은 이때에 백성들이 따라나온자가 이천여호나 되었고, 역시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때에 이르러, '염사착'이 '진한'의 우수거가 되었다. '낙랑'이 땅이 좋고, 백성들이 부유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 와서 항복하였다. 그 읍락에서 나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는데, 말이 '한'인이 아니었다. 이에 물으니, 남자가 말하길, '우리는 '漢'인이다.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의 무리는 천오백명으로 나무를 베려다, '韓'인에게 붙잡여서 모두 머리를 깍이고, 종이 되었다. 삼년이나 되었다.' '염사착'이 말하길 '나는 '한의 낙랑'에 항복할 것이다. 당신도 같이 가겠는가?'하니 '호래'가 말하길 '좋다'했다. '염사착'이 '호래'와 '함자현'에 이르러, 현에서 군을 말하니, 군에서 '착'을 통역으로 삼고, '금중'으로 나아가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갔다. 역시 '호래'와 함께이다. 항복받은 무리 천명을 얻었으나, 그 오백명은 이미 죽었다. '착'이 이때 '진한'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오백명을 돌려 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병사 만으로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하니 '진한'이 말하길 '오백인은 이미 죽었다. 나는 마땅히 재물로써 값겠다.'하고, '진한'에서 만오천명과 '변한'에서 포 만오천필이 나오니, '착'이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군에서 '착'에게 공로를 표시하고, 관책과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자손이 수대에 내려오다가, '안제 연광' 사년때에 옛날 복재를 받았다. '환제', 와 '영제'말에 '한예'가 강성해지자, 군현들이 능히 제도 하질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으로 들어갔다. '건안'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모',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예'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나오니, 이후로 '왜'와 '한'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두군의 바다를 건너서,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 읍군의 인수를 하사하고, 다음으로 읍장에게 하사하였다. 그 풍속에 옷과 두건을 좋아하는데, 하호들이 군에 조알할때에 모두 옷과 두건을 한다. 이제 하사한 옷과 두건을 한자가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한국'을 통일했다고 해서 '진한'의 팔개국을 나무어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하는데 다르고 옳음이 있어 전해지자, 신지 '첨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로 쳤는데, '준'은 전사하고, 이군은 '한'에 멸망하게 되었다.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나라의 읍에 비록 주인이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고, 능히 제도하거나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다. 꿇어 앉아 엎드려 절하는 예의도 없다. 거처는 흙으로 만든 집에 풀로 지붕을 올리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다. 그 문은 위로 내고, 가족이 함께 그 가운데 있다. 어른과 아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 장사는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소와 말타는 것을 알지 못하여, 소나 말은 사람이 죽었을 때 보내져 쓰인다. 구슬 목걸이를 보내로 삼는데, 혹은 옷에 꾀메어 씀으로 꾸민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한다.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고,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 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그 나라에 일이 있으면, 관가에서 성곽을 쌓토록 시키고, 용감하고 건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이를 묶은후, 큰 나무에 붙들어 맨후 종일 지껄이며, 고함을 치며, 힘을 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 힘쓰는 것과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 항상 오월 씨뿌릴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춘다. 밤낮없이 쉴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다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 나라에서 각각 천신에 제사지내는 주인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천군'이라고 한다. 또한 여러 나라 각가가에는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고, 귀신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에 돌아오지 못한다. 도둑이 일어나기에 좋다. '소도'의 뜻은 '부거'와 비슷한테 선악을 행하는 것에는 다름이 있다. 그 북방 군과 가까운 나라들은 예의 풍속이 조금 있고, 먼 곳은 죄인과 같이 노비들과 서로 섞여 산다. 다른 보배는 없고, 짐승들과 초목들도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오는데 크기가 배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는 닭이 있는데, 그 꼬리가 오척이나 된다.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한다. 또한 '주호'가 있는데, '마한'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사람들이 작고, 언어는 '한'과 같지 않으며, 곤두 함이 '선비'와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옷에는 위는 있지만 아래는 없어 벌거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과 교역을 한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秦'의 사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에 왔다. '마한'이 그 동쪽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을 '방'이라 하고 '궁'을 '호'라 하고, '적'을 '구'라 하고, '행주'를 '행상'이라 하였다. 서로 불러 무리로 하니 '秦'나라 사람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과 '제'의 사물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사람을 '아잔'이라 하고 동쪽 사람을 '아'라고 하는데, '낙랑'사람은 본래 그 남은 세력이다. 이제 그 이름을 '진한'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육국이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나라가 되었다. '변진' 역시 열두나라이다. 역시 여러개의 작은 별읍이 있다. 각각 거사가 있으니 큰 자의 이름은 '신지'이고 다음은 '험측'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라 하고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라 한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번', '진한'을 합쳐 이십사개국이다. 큰 나라는 사오천가를 이루고 작은 나라는 육칠백가를 이룬다. 총 사오만호이다. 그 열두 나라는 '진왕'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진왕'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위략에 말하길 밝음이 이주민에게 있어 고로 마한의 제도가 되었다.] 땅은 좋고, 오곡과 벼에 알맞으며, 양잠과 겸포를 하고, 소나 말을 탄다. 결혼하는데 예절이 있으며 남녀는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자가 날아 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략에 그 나라는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얽어 매는데 감옥과 비슷하다.] 나라에 철이 나오고, '한','예','왜',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저자에서 돈을 사용함이 중국의 돈사용과 같아, 두군에서도 넉넉히 사용하였다.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고, 음주함을 즐긴다. 거문고가 있는데,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면, 역시 소리와 곡률이 있다. 아이나 태어나면 돌로 그 머리를 눌르는데, 머리를 모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진한'사람이 모두 '편두'이다. '왜국'과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을 한다. 보병전을 하고 병사의 무기는 '마한'과 같다. 풍속에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만나면, 모두 길을 비켜준다. '변진'은 '진한'과 섞여 산다. 역시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서로 유사함이 있으나, 귀신에 제사함은 다른데, 부엌신을 문에서 서쪽에 두는 것이다. '독노국'은 '왜'와 접해 있다. 열두나라역시 왕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다. 의복은 정결하고, 머리를 길른다. 역시 폭이 넓은 가드다란 포를 짓고, 법과 풍속은 특히 엄하다.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의 읍이 있다. 예로부터 백여개의 나라가 있어, '한'나라 때에는 알현하는 자가 있었다. 이제 그 역관이 통하는 곳이 삼십나라이다. 군에서 나아가 '왜'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이 나오고, 남쪽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의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 칠천여리나 된다. 처음 하나의 바다를 건여 천여리에 '대마도'에 이른다. 그 큰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거리가 사백여리이다. 땅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호수는 천여호이고 좋은 밭은 없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 스스로 생활하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리에 일명 '한해'를 건너면 큰 나라가 하나 있는데, 역시 관리를 '비구'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한다. 사방 삼백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많은 산림을 이루니, 삼천가정도가 있으며 차이는 밭이 있어 밭을 경작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역시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에 이르는데 사천여호가 있으며, 산기슭의 바다에 거처한다. 초목이 너무 우거져, 길을 갈 때 앞사람을 볼수가 없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하는데 물이 깊이 않고 얕아 자맥질하여 이를 잡는다. 동남쪽 육지를 따라 오백리에 '이도국'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 '병모고'라 부른다. 천여호가 있으며, 세세토록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에 속해 있어, 고을에 사신이 왕래하고, 항상 머물러 있다. 동남으로 백리에 '노국'이 있는데 관리를 '시마고' 부관을 '비노모리'리 부르는데, 호수가 이만여호이다. 동쪽으로 백리에는 '불미국'이 있어, 관리를 '다모'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며, 호수는 천여가이다. 남쪽으로 '투마국'이 있어 물로 이십일을 간다. 관리를 '미미'라 하고, 부관을 '미미나리'라 부르는데, 가히 오만여호이다. 남쪽으로 '사마대국'이 잇어 여왕이 거하는 도읍으로 물로 십일을 가고 육지로는 한달이 걸린다. 관리를 '이지마'라 하고 다음을 '미마승', 다음을 '미마획지', 다음을 '노가제'라 하니 가히 칠만여호이다. 이 '여왕국'의 북쪽에 있는 나라의 호수와 길를 가히 얻어 기록한 것인데 그 나머지 주변의 나라는 너무 멀어 끊어져 가히 자세히 얻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사마국>, <이백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사마국>, <궁신국>, <읍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이 있는데, 이 여왕을 경계의 끝이다. 남쪽에 '구노국'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관리를 '구고지비구'라 하는데, 여왕에 속해 있지 않다. 이 군은 '여왕국'에서 만 이천여리나 된다. 남자들은 애 어른 없이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는데, 예로 내려온 것이다. 사신이 중국에 이르러 스스로를 대부라 칭하였다. '하후 소강'의 아들을 '회계'에 봉하였는데,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함으로써 교룡의 해를 피하였다. 이제 '왜'의 사람들이 자맥질하여 물고기와 조개잡기를 좋아하니 문신으로 큰 물고기와 바닷짐승이 싫어하게 하여 후에 점점 꾸미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은 각각 다르다. 혹은 왼쪽에 있고, 혹은 오른쪽에, 크고 자고, 신분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다. 그 길을 계산하는데 마땅히 '회계'와 '동치'의 동쪽에 있다.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고,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무명으로 머리를 감싼다. 그 옷은 다만 가로로 하여 서로 연결하여 동여메는데 바느질 하지 않는다. 부인들도 머리를 올려 묶고, 통채로 옷을 지어 중앙에 구멍을 뚫고 머리부터 옷을 입는다. 벼가 있고, 모시 삼 양잠이 있어 길쌈하고, 가는 모시와 비단이 있고, 그 땅에 소와 말, 호랑이, 돼지, 양, 까치가 없다. 병기로 창과 방패, 나무활을 쓰고, 목궁은 아래는 짧고 위가 길다. 대나무로 화살에 쇠나 혹은 뼈로 화살촉을 하기도 하는데, '담이'와 '주애'와 같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다. '왜'의 땅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여름음식과 반찬이 나오며, 모두 맨발이다. 집이 있어 부모형제가 함께 거하지만 거처는 다르다. 붉은색 진흙같은 것을 몸에 바르는데, 중국의 분가루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하는데는 '변두'를 사용하고 손으로 밥을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이 있느나 곽은 없이 흙으로 무덤을 만든다. 처음 사람이 죽흐며 십여일을 상을 치루는데 마땅히 이때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곡을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마치면, 집안이 모두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연욕'과 같다. 사신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갈때는 한 사람이 머리에 빗질하지 않고, 이나 서캐도 잡지 않고, 의복은 더럽게 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부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상을 치루는 사람과 같다. 이를 '지쇠'라고 한다. 만일 길을 가는 자가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재물을 그 사람에게 주고, 만일 질병이 있거나, 나쁜해를 당하면 이를 죽일려고 하는데, '지쇠'가 삼가지 않았다고 그런 것이다. 진주와 푸른옥이 나온다. 산에는 단사가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저·예장·유력·투강·오호·풍향 등이 있고, 대나무로는 가는대와 조지가 난다. 생강과 귤, 산초나무와 양화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줄 알지 못한다. 원숭이 와 검은 꿩이 있다. 그 풍속에 일이 있으면 이르는 곳이 있는데, 뼈를 불살라 점을 치는 것이다. 길흉을 점칠 때 먼저 점치는 곳에 고하는데 그 법이 거북점과 같다.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모임에서 앉아서 하는데, 부자와 남녀의 차이가 없다. 사람들 성질에 술을 즐긴다. [위략에 그 풍속에 정확히 해와 사절기를 알지 못한다. 다만 봄에 밭갈고 가을에 거두는 것으로 그 해의 기준으로 삼는다] 어른에게 공경을 보이는 것은 단지 손을 잡고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수명은 혹은 백살이요 혹은 팔구십살이다. 풍속에 나라의 어른들은 모두 사오명의 부인이 있는데, 하호들도 혹 이삼명의 부인이 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 하지 않는다. 도둑이 없고, 송사가 적다. 법을 범하면 가벼운자는 그 처자를 죽이고, 무거운 자는 그 집안에서 종족까지 멸한다.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으니, 복종해야 한다. 세금을 거두고, 문설주가 있다. 나라에 시장이 있어 교역이 있는데 '대왜'가 이를 관리한다. '여왕국'의 북쪽에 특별히 큰 기관하나를 두는데, 여러 나라를 살피는 것으로 여러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하고 꺼린다. '이도국'을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와 같은 것을 항상둔다. 왕이 경도나 '대방군' 여러 '한국'과 '왜국'의 군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에게 하사하는 물건과 문서를 보내와 전하는데, 섞임이 없었다. 하호들이 길에서 대인을 만나면 뒷것을질쳐 풀속에 들어간다. 전하는 말로 혹은 웅크리고 있거나 엎드려있는데 양손을 땅에 댄어 공경을 나타낸다. 대답할때는 '아' 그러는데 이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 나라는 본래 역시 남자가 왕이었다. 칠팔십년후에 '왜국'에 난이 이서 서로 공격하고 벌하며 지내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일명 '비미호'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이미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다. 남자 동생이 있어 나라를 다스림을 도왔다. 왕으로써 왔는데 보았다는 사람은 적다.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여왕국'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의 종류이다. 또한 그 남쪽에 '주유국'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사척으로 '여왕국'에서 사천여리이다. 또한 '나국'과 '흑치국'이 그 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배로 일년을 가야 이른다. 모두 '왜'의 땅으로 바다 가운데에 섬으로 끊어져 있고 혹은 연해 있기도 하니 사방 가히 오천리이다. '경초'이년 유월 '왜여왕'이 대부 '난승미'등을 보내어 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언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그해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에게 말하길 친위왜왕 '비미호' '대방태수 유하'가 당신이의 대부 '난승미'와 다음사신 '도시우리'를 보내와 남자 4명과 여자 육명, 포 두필이장을 받치니 이에 이르렀다. 당신이 있는 곳이 먼데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니 당신의 충효가 이와 같아, 내가 슬프기까지 하다. 이제 당신을 '친위왜왕'을 삼는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 에게 보내는 것이니, 당신은 백성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당신이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를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를 솔선교위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보내는 바이다. 그리고 강지교룡금 오필과 [ 신하'송지'가, 땅에 비단을 상응하게 한 것은 '한 문제'가 검은옷 입은것과, 두터운 비단을 취한것을 말했으니,이것이다. 이 글귀가 없는것은 위나라때 빠뜨린것이 아니라, 이전에,베껴쓰던 자들의 착오이다], 강지추속계 십장, 청강 오십필, 감청 오십필을 주어 당신이 받친 공물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 보내는 터이니, 너희는 이를 갖다가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여 주어서 우리 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하라. 그래서 정중하게 이 같은 좋은 물건을 너희에게 하사하는 바이다] 했다. '정시' 원년 '태수 궁준'이 건중교위 '제휴'등을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왕'에게 절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사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팔인을 보내서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다. 이에 '액사구' 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육년에 조서를 내려 '왜국'의 '난두미'에게 황기를 주고, 부군을 주었다. 팔년에는 태수 '왕기'가 와서 보고하기를, '왜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해서 '왜국'에서는 '재사', '오월' 등을 보내서 그들의 서로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에 중국에서는 색조연사 '장정'등을 보내서 조서와 황기를 내려 '난승미'에게 벼슬을 주고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비미호'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 명을 순장했다. 뒤를 이어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희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서 이 때 죽은 사람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비미호'의 일가 딸이 되는 '대여'를 세웠다. 이 때 대여의 나이는 겨우 십삼세였는데 비로소 나라안의 인심이 정해졌다. '정' 등이 '대여'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더니, '대여'는 '왜국'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삼십명을 '정'에게 보내 와서 뵙고 포로 삼십명과 흰 구슬 오십덩이, 청대구주 두장, 이문잡금 이십필을 바쳐 왔다.
원소전------------원소(袁紹)는 자가 본초(本初)이고 여남(汝南) 여양(汝陽)사람이다. 고조부 원안(袁安)은 사도였다. 원안 이래로 4세가 삼공의 지위에 올라 천하를 진동하게 하였다. 원소는 용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었으며 아랫사람에게 절도가 있어 선비들이 그를 따랐으며 조조(曹操)와는 어려서부터 교분이 있었다. 대장군이 시어사(侍御史)로 삼았으며 중군교위(中軍校尉),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이르렀다.
영제(靈帝 : 劉宏 재위 168∼190)가 죽자, 태후의 오라비인 대장군 하진(何進)이 원소와 함께 모든 환관들을 죽이려 했으나 태후가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동탁을 불러 태후를 협박하려 했다. 내시들은 그 소식을 듣고 하진에게 살려달라고 하였다. 이 때 원소는 하진에게 재삼 결단을 내릴 것을 권했으나, 하진은 듣지 않았다.
원소는 낙양지역의 관리(군관, 아전, 법관)들에게 환관을 압박하도록 하였고, 아우인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 원술(袁術)에게 200여명으로 궁궐을 수비토록 하였다.
중상시(中常侍) 단규(段珪) 등은 태후의 명이라 거짓으로 하진을 불러 죽이니, 궁궐은 큰 혼란에 빠졌다. 원술은 군사를 거느리면서 남궁(南宮), 가덕전(嘉德殿), 청쇄문(靑 門)에 불을 질렀으며, 단규 등을 추격하였다. 단규 등은 탈출에 실패하자 천자와 천자의 아우 진류왕(陳留王) 협(協)을 납치하여 소평진(小平津)으로 달아났다. 원소는 목을 벤 환관들을 사예교위 허상(許相)에게 맡겨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여러 궁인들을 체포하게 하였으며 노소를 따지지 말고 죽이게 했다.
어떤 이는 수염이 없어 오인되어 죽는 자도 있었고, 스스로 성기를 보여주고 죽음을 모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환관 중에는 행실이 착하고 스스로를 잘 다스리는 사람도 이와 같이 하니, 군사들의 학살이 이와 같았다. 죽은 자만 2천여 명이었다. 원소의 군대는 단규의 무리를 추격하였는데, 단규의 무리는 모두 황하에 투신자살을 하여 황제의 일행은 환궁할 수 있었다.
동탁(董卓)이 원소를 불러 천자를 폐하고 진류왕 협을 옹립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원소의 숙부 원외(袁 )가 태부(太傅)였는데,
원소가 거짓으로 허락하여 말하였다.
"이는 큰일이라 나가서 태부와 상의하겠습니다."
동탁이 말했다.
"유씨의 종족은 살려두어서는 안될 것이오.(소제를 죽이겠다는 말)"
원소는 응하지 아니하고 읍을 하고 물러 나와 그 길로 기주(冀州)로 도망쳐 버렸다. 시중(侍中) 주비(周毖), 성문교위(城門校尉) 오경(伍瓊), 의랑(議郞) 하옹(何 ) 등은 모두 명사여서 동탁이 신임하고 있었는데, 몰래 원소를 위해서 동탁을 설득했다.
"모름지기 천자를 폐하고 세우는 일은 큰일인지라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원소는 대체에 이르지 아니하여 무섭고 두려워 달아난 것이지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금 급하게 수배령을 내리신다면 원소의 세력은 (반란으로) 변할 것입니다. 원씨 가문은 4세 동안이나 조정의 은혜를 입어 천하에 두루 집안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는데, 만약 호걸들을 거둬 세력을 만들고, 영웅들이 그로 인해 봉기한다면 산동(山東)지역은 공의 소유가 될수 없을 것입니다. 원소를 사면하고 군수자리 하나 주면 원소는 죄를 면함에 기뻐할 것이니, 반드시 아무 걱정 없을 것입니다."
동탁은 그렇다고 여겨 발해태수(渤海太守)에 임명하고 항향후( 鄕侯)에 봉했다.
원소가 발해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죽이려 했으니, <무기(武紀:무제본기 인듯)>에 기록되어있다. 원소는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하고 맹주가 되어 기주목(冀州牧) 한복(韓馥)과 함께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를 천자로 세우려 했으나, 유우는 받지 않았다. 한복은 안평(安平)에서 공손찬(公孫瓚)에게 패하였다.
공손찬은 병력을 기주로 이끌면서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아래 한복을 습격하려 하였다. 동탁이 장안(長安)으로 들어가자, 원소는 연진(延津)으로 회군하였고 한복도 황망히 돌아오니 진류(陳留)의 고간(高幹)과 영천(潁川)의 순심(荀諶)이 한복을 설득했다. "공손찬이 승세를 타서 남하한다면 모든 고을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원소 장군은 동쪽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데 그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장군을 위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복이 말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순심이 말했다.
"공손찬은 연(燕)과 대(代)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그 날카로움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원씨는 한 시대의 걸출한 인물로써 장군 밑에 있을 사람은 아닙니다. 모름지기 기주는 천하의 중요한 요충지라서, 만약 두 세력이 병립하면 기주에서 교전이 벌어지게 되어, 위협이 없어짐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다. 원소는 장군과 친구 사이여서 또한 동맹을 맺어두면 당장 장군의 계책대로 기주를 원소에게 양보함만 못하는 것입니다. 원소가 기주를 얻으면 공손찬과 맞붙지 않을 수 없으니, 반드시 장군께 덕이 두터워질 것입니다. 기주에 들어와 친교를 맺어두면 이는 장군이 양현지명(讓賢之名)이 있어 태산(泰山)에 편안히 살수 있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한복이 평소에 겁이 많아 그 계책을 그렇게 여겼다. 장사(長史) 경무(耿武), 별가(別駕) 민순(閔純), 치중(治中) 이력(李歷)이 한복에게 간하였다. "기주가 비록 시골이라 하나, 병력은 백만이요 군량은 10년을 버틸 수 있습니다. 원소가 곤궁한 지경이라 우리를 바라보며 숨쉬는 것이 마치 팔에 안겨있는 어린아이와 같아 젖을 끊으면 굶겨 죽일 수 있습니다. 이 고을을 어찌 원소에게 주려 하십니까?" 한복이 말했다. "내 원씨 집안 밑에 있었고, 또한 재주가 본초(本初)에 미치지 않아 덕을 헤아려 양보하는 것이며 옛 사람이 귀한 것인데, 그대들은 유독 병이라 하는가!!" 종사(從事) 조부(趙浮), 정환(程奐)이 군사를 동원하여 막자고 하였으나, 한복은 듣지 않았다. 한복이 원소에게 양보하여 원소는 기주목(冀州牧)이 되었다.
종사(從事) 저수(沮授)가 원소에게 설득했다. "장군께서는 약관의 나이에 조정에 등용되어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천자를 폐하고 세우는 일에 충의로 분발하여 단신으로 도망쳐 나와 동탁이 두려워하였으며, 황하 이북의 모두가 발해(渤海)에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습니다. 한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주의 인민을 꺾으니, 위세가 하북에 진동하였고 이름은 천하에 위중(威重)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황건(黃巾)이 어지럽히고, 흑산적(黑山賊)이 발호하여도 군사를 동쪽으로 돌린다면 청주(靑州)를 평정할 수 있으며, 돌아오면서 흑산적을 토벌하면 장연(張燕)을 멸할 수 있고, 북쪽으로 돌리면 공손찬은 반드시 죽게 될 것이며, 융적(戎狄)의 이민족을 협박하면 흉노(匈奴)의 이민족은 반드시 따를 것입니다. 황하(黃河)이북을 아우르고 4주(冀,靑,幷,幽)의 땅을 병합하여 천하의 인재들을 거두어 백만의 군사로 서경(장안)에서 천자를 맞아 종묘를 낙양(洛陽)으로 한 후에 천하를 호령하여 아직 수복하지 않은 땅을 토벌하여 이로써 예봉을 다툰다면 누가 대적하겠습니까? 수년동안 견주어 보아도 공을 세우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원소가 기뻐서 말했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로다."
곧바로 표문을 올려 저수를 감군(監軍),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았다. 동탁이 집금오(執金吾) 호모반(胡母班)과 장작대장(將作大匠) 오수(吳修)에게 조서를 주며 원소를 꼬드기려 했지만, 원소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왕광(王匡)을 시켜 그들을 죽여 버렸다. 동탁은 원소가 관동(關東)지역(장안 동쪽지역)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소의 일족인 태부 원외의 가족을 모두 죽여버렸다. 이 때에 의협호걸들이 원소에게 의지하였고, 모두들 복수할 생각으로 각 고을이 봉기하려 하니, 그 명분에 거짓이 있을 수 없었다. 한복은 두려움을 느껴 장막(張邈)에게로 의지하였다. 훗날 원소는 장막에게 사신을 보내 의논할 것이 있는 것처럼 귓속말을 하니, 한복이 그 자리에서 목격하고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게 화장실에서 자살하였다.
처음에 천자의 위치는 원소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가가 하동(河東)에 있자 영천의 곽도(郭圖)를 보내었다. 곽도는 원소에게 업에 천자의 도읍을 할 것을 설득했지만,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조조가 천자를 맞아 허(許)에 도읍을 하여 하남(河南)땅을 거두었고 관중 땅이 모두 따르게 되자, 원소는 후회를 하고 조조에게 자신과 가까이 있는 견성( 城)으로 천도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조조는 거부하였다. 천자는 원소를 태위(太尉)로 삼고 바꾸어 대장군, 업후( 侯)에 봉했지만, 원소는 제후를 사양하여 받지를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공손찬이 역경(易京)을 공격하여 병합하였다. 장자 원담(袁譚)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아 내보내니, 저수가 원소에게 간하였다. "반드시 화(禍)의 시작일 것입니다."
원소는 듣지 않고 말했다.
"내가 여러 자식들에게 각기 한 주(州)씩 거느리게 하려 함이네."
또한 둘째 아들 원희(袁熙)를 유주(幽州)에, 조카 고간을 병주(幷州)자사로 삼았다. 병력이 10만에 심배(審配)와 봉기(逢紀)에게 군사를 통솔하고, 전풍과 순심과 허유(許攸)는 모사를,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는 군사를 거느리니, 대강 정병 10만에 기병 1만으로 허를 공격하려 했다.
먼저 조조는 유비(劉備)를 서주(徐州)로 보내 원술을 막게 했다. 원술이 죽자,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이고 군사를 패(沛)에 주둔하였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도와주었다. 조조는 유대(劉岱)와 왕충(王忠)을 보내 공격을 했지만, 이기지 못했다. 건안 5년(201) 조조가 몸소 유비를 정벌했다. 전풍은 원소를 설득하여 조조의 후방을 습격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원소는 아들의 병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다. 전풍은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했다. "대저 우연한 찬스는 얻기도 어려운데, 어린아이의 병으로 기회를 잃을 줄이야!! 애석하도다!!" 조조는 유비를 격파하였고, 유비는 원소에게로 달아났다.
원소의 군대는 여양(黎陽)으로 진격하여 안량을 보내 백마(白馬)에서 유연(劉延)을 공격하였다. 저수가 또한 원소에게 간하였다. "안량은 성격이 급하고 속이 좁아, 비록 용감하다고 하나 혼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원소는 듣지 않았다. 조조가 유연을 구하고 안량과 싸워 안량의 목을 베었다. 원소는 황하를 건너 연진(延津) 남쪽에 주둔하고 유비와 문추를 보내 도전하였으나 조조가 문추를 참하였다. 다시 전투를 감행하였지만 원소의 대장이 사로잡혀 원소군은 크게 동요하였다. 조조가 관도에 돌아간 후에 저수가 원소에게 말하였다. "우리 북군은 수가 많으나 남군에 비해 굳세지 못하고, 남군의 군량은 우리에 비해 부족하여 남군은 단기전에 유리하고 북군은 지구전에 유리합니다. 마땅히 지구전을 펼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게 하십시오." 원소는 듣지 않았다. 군대를 앞으로 전진시켜 관도 근처에서 교전을 벌였다.
조조군은 이기지는 못했지만 방벽을 회복하였다. 원소는 높은 망루를 흙산에 세워 조조군 진영에 활을 쏴대니 조조군은 모두 방패를 뒤집어 쓴 채 두려워하였다. 조조는 '발석거(發石車)'를 만들어 망루를 쏘아 부셔버렸다. 원소군은 이것을 '벽력거(霹靂車)'라고 불렀다. 원소는 땅굴로 조조의 진지를 습격하려 했으나, 조조가 진영 안에 긴 참호를 파 막아버리고 특공대(奇兵)를 보내 원소군의 군량수레를 부수고 군량을 불살랐다. 조조와 원소가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백성들은 궁핍해졌고 원소편을 들어 반란하는 자도 많았으며 군량도 모자랐다. 원소는 순우경(淳于瓊)과 일만의 군사를 보내 원소군의 군량수레를 맞이하도록 하였으나, 저수가 말했다. "장기(蔣奇)를 보내 따로 군사를 편성하여(支軍) 조조의 약탈을 끊으시옵소서." 원소는 또한 듣지를 않았다.
순우경이 오소(烏巢)에 숙영하였는데 본대와의 거리는 40리(현대의 도량형은 약 20km정도)였다. 조조는 조홍(曹洪)은 수비군으로 남겨두고 보병 5천을 거느리고 밤에 몰래와서 순우경을 공격하였다. 원소는 기병을 보내 구원하였지만 패주하였다. 조조는 순우경 등을 죽여버렸다. 조조가 돌아오기도 전에 원소의 장수인 고람(高覽)과 장합 (張 )등이 군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원소군은 크게 무너져 원소와 원담은 단기로 황하를 건너 달아났다. 남은 병력들이 거짓 항복을 하자 모두 묻어 버렸다.(약 8만 명) 저수는 원소를 따라 건너지 못하고 잡혀 조조에게 보내졌으나 조조가 후하게 대접하였지만, 후에 원소에게 달아나려 하자 죽임을 당했다.
처음에 원소가 하남에 있을 때 전풍(田豊)이 말했다. "조조는 용병을 잘하여 변화가 끝이 없고 군사는 적지만 가볍게 볼 수 없으니, 지구전을 함만 못합니다. 장군께서는 산과 황하의 견고함에 웅거하시고 4주의 군사를 거느리시며, 밖으로 호걸들과 결탁하고 안으로 농업과 군사를 힘쓰신 연후에 정예병을 간추려 나누어 특공대를 조직하여 빈곳을 타고 교대로 나와 하남을 교란하시어 우측을 구원하려 하면 좌측을 치시고, 좌측을 구원하려 한다면 우측을 공격하여, 적으로 하여금 명령에 의해 피곤하게 하고 인민들이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는 피로하기 전에 저들이 이미 지치게 되면 2년도 되지 않아 앉아서 이길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승리하는 방법을 일러드렸는데, 한번에 승패를 결정지으려 하신다면 그 계책대로 함만 못하거니와 후회해도 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전풍이 간간이 간언을 하였지만 원소는 매우 화를 내며 저수와 같이 취급하여 형구를 씌워버렸다. 원소군이 패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당신을 중히 쓰실 겁니다." 전풍이 말했다. "만약 우리 군이 이겼다면 살지만, 이제 우리 군이 패했으니 나는 죽을 것입니다." 원소가 돌아와서 좌우에게 일렀다. "내가 전풍의 말을 듣지 않아 과연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결국 전풍을 죽여버렸다. 원소는 겉으로는 기품이 있고 상황을 헤아릴 줄 알며 근심과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남을 많이 꺼리고 해치려드니 모두가 이러한 종류들이다.
기주의 성읍들 중 반란이 많았지만 원소가 다시 회복하여 평정하였다. 패전 후 병이 생겨 건안 7년(203)에 질병으로 죽었다.
화타전------------어떤 사람이 청룡 연간에 산양태수로 임명된 광릉의 유경종을 만났다. 유경종은 중평시대(184~189)에 자주 화타와 만났는데, 그기 병을 치료하거나 맥을 잴 떄는 신처럼 적중시킨다고 했다.
낭야의 유훈이 하내태수로 있을 때, 스무살 가까이 되는 딸이 있었는데 왼쪽 다리와 발에 종기가 있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종기는 수십 일 있다가 또 재발하기를 7년이나 계속했다. 화타를 맞이하여 그 다리를 보도록했다.
화타는
"이것은 간단히 치료하면 됩니다. 누런 빛이 나는 검정개 한 마리와 잘 달리는 말 두필이 필요합니다."
라고 했다. 줄을 개머리에 매고 말에게 개를 끌고 달리도록 하였다. 한 필이 피곤해지면 다른 말로 교체시켰다. 말이 30여 리 쯤 달렸을 때, 개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이번에는 또 사람을 시켜 개를 끌고 걷게 하니, 이전 것과 합쳐 50리 가까이되었다. 그리고 약을 아가씨에게 마시도록 하였다.
아가씨는 편안히 잠을 자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리고 큰 칼로 개의 배를 뒷다리에 가까운 곳까지 자르고, 잘린 곳을 종기 입구로 향하게 하고 2~3촌 떨어지게 했다.
그대로 잠시 멈추었더니, 뱀같이 생긴 것이 종기 속에서 나왔다. 철로 된 방망이를 사용하여 뱀의 머리를 옆으로 베었다. 뱀은 피부 아래에서 오랫동안 요동을 쳤는데,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곧 끌어냈더니, 길이가 3척이나 되었고, 온전한 뱀이었는데, 단지 눈이 있는 곳에 동자가 없었고, 바늘이 역으로 나 있었다. 고약을 붙이고 7일만에 완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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