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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인에게도움이될게시판] 코로나와의 공존에 대한 이해와 의견 (0902)
정재훈가천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과 교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로 인사드립니다. - 최근 여러가지 감염병과 관련된 과제와 업무가 많아서 글로 소통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했습니다. 또 이렇게 글을 올리는 이유는 그동안의 방식과 달리 최근 언론을 통해 제 의견 중 일부분이 취사 선택되어 전달되어 조금 죄송하기도 하고, 여러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어서 입니다. - 오늘 주제는 '위드 코로나'입니다. 백신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글은 건조하면서도 과학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드릴 수 있었지만 오늘 이야기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고, 과학적으로 설명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다루기 어렵습니다. 오늘 글은 거의 저의 개인적 의견입니다. - 글이 많이 깁니다. 간단한 요약을 끝부분에 남겨두었습니다. 1. 코로나와의 공존, 당연한 결말의 특별한 단어 - 코로나 19 범유행이 시작된 후 대부분의 과학자는 비슷한 의견을 가졌습니다. ‘이제 코로나바이러스-19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번 인류에게 유입된 바이러스를 완전히 제거한 사례는 천연두가 유일합니다. 이는 천연두 바이러스가 가진 특성이 박멸이라는 목표에 매우 적합한 예외적인 상황이며 대부분의 바이러스는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기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감염병 대응의 현실적 목표는 언제나 바이러스의 박멸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의 통제입니다. - ‘With Corona’라는 단어는 처음부터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당연한 결말이지만 코로나가 우리 세상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거대해서 이미 정치, 사회,경제 모두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위드 코로나는 이미 정치적 의미를 가진 수사가 되었고, 우리가 말하는 '코로나와의 공존'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 이제 위드 코로나는 ‘방역완화’와 유의어 내지 동의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와의 공존은 무조건적인 방역완화가 아닙니다. 저는 위드 코로나를 코로나 19가 존재하지 않던 세상, 즉 일상으로의 복귀를 위한 절차로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사회가 코로나 19를 심각하게 여기는 이유는 1) 새로운 바이러스이고 2) 매우 높은 전파력을 가지면서 3) 고위험군에게 높은 치명율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코로나바이러스19를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바이러스로 대하게 되는 순간이 일상으로의 복귀이고 심각한 질환이 아니게 될 수 있는 조건과 대책이 갖추어 진다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 이미 코로나 19는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전세계적인 연구로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성에 대해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보다 더 많이 연구되었습니다. 또한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도 빠르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전파력은 한 단계 더 높아졌지만 감염력을 감소시킬 수 있는 다양한 수단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치명율을 낮출 수 있는 고위험군 백신 접종, 중증 전환을 막아줄 수 있는 약제, 중환자 치료 전략도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거시적인 조건은 거의 갖춰져 갑니다. 문제는 코로나와의 공존의 시기와 방법입니다. 2. 집단면역은 불가능하다는 표현의 오해 - 최근 여러분들께서 가장 많이 접한 이야기는 ‘델타변이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집단면역은 달성이 불가능해졌다.’ 라는 문장이실 겁니다. 저도 이런 제목을 단 인터뷰를 한적도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드리고 사과드려야할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너무 많은 설명이 생략되어 있는 단순한 표현입니다. - 엄밀하게 ‘백신 접종만으로 집단면역 수준에 도달하여 코로나 19를 통제하기 어려워졌다.’가 되어야 그나마 정확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집단면역은 매우 흔히 쓰이는 말이 되어서 어떤 현상이나 상황을 정의하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단면역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이해하고 계신 상황은 ‘감염병의 기초 재생산수라는 개념이 있다. 이것은 한 명의 감염병 환자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 때 새로운 몇 명의 환자를 만들어내냐는 개념인데, 델타 변이바이러스는 이 값이 최소한 5이상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게 봐도 전체 인구 중에서 5명 중 4명 꼴로 면역이 있어 감염되지 않아야 감염병이 더 퍼지지 않은 것이니 100% 효과적인 백신을 전 인구 80%가 접종을 해야 하는데, 100% 효과적인 백신이 존재하지도 않고, 접종율이 전 인구 80%가 되기도 어려우니 집단면역 달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코로나 19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방역도 점차 완화해야 한다.’ 이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 전체적으로는 틀리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이해를 위해 덧붙여야 하는 몇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먼저 기초감염재생산수라는 수치는 어떠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때 평균적으로 나타나는 값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조치가 이루어지는 현실세계에서는 정확한 측정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영국이 방역조치를 대부분 완화했다고 하더라도 예전보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의 비율은 늘어났을 것입니다. 아무런 조치도 없는 상태를 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국가와 지역에 따라서 값들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또 이 값은 평균적인 상태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요양원과 집단합숙소와 같은 장소에서는 더욱 더 전파력이 높을 수 있고, 반면에 도시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값이 더 떨어질 수 있습니다. 즉 집단의 정의에 따라 값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 만약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방역완화 조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일부 분들은 마스크 착용을 더 자주하실 수도 있고, 개인 방역 수칙도 더 잘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기초감염재생산수 자체가 변화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 한가지 예시는 전국민이 백신 접종 또는 감염되어 면역을 획득하는 상황입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백신 접종 후 돌파감염이 되거나, 감염되어서 면역을 획득하는 상황이 된다면 코로나 19의 감염자 수는 유의미하게 감소할 수 있고, 이 또한 집단면역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즉 지금의 상황은 백신 접종만을 통해서 집단면역 수준에 도달해 코로나 19 유행이 관리가능한 통제 수준으로 감소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는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방역조치와 감염을 통한 면역 획득까지 더해 사실상의 집단면역 효과를 달성할 수 있다는 점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과학적 논리가 위드 코로나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1) 백신 접종율을 최대한 높이고 2) 남겨야 하는 최소한의 방역 조치를 찾아내서 보강하고, 3) 백신 미접종자에게는 통제된 감염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여 면역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3. 사회적 거리두기는 무의미한가? - 최근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과가 감소하거나 거의 없다는 연구결과들이 제시되고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용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과에 대해서도 과학적 이해인 설명과 논의가 필요합니다. - 우리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방역 정책은 크게 4가지입니다. 1) 확진자와 접촉자에 대한 방역, 2) 사람 간의 접촉 확률을 줄이는 인구집단에 대한 방역, 3) 해외 유입 차단, 4) 개인 위생입니다. - 확진자와 접촉자에 대한 방역 정책은 확진자와 밀접접촉자를 격리하고, 역학조사를 통해 접촉자를 찾아내어 진단검사를 하고, 선제적인 위험집단에 대한 검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이미 과학적 근거가 축적되어 있고, 우리나라에서 효과도 잘 증명되어 있습니다. 또 해외유입차단도 완전히 유입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간을 벌어주고, 유행 규모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다양한 국가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스크 쓰기와 손 씻기는 이미 무수한 근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 문제는 사람 간의 접촉을 확률적으로 감소시키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불리는 정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접촉 인원 제한(5인 이상집합금지 등), 영업 시간 제한, 학교 휴교, 재택근무 권고 등이 시행되고 있고, 일부 유행이 심각한 국가는 봉쇄 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개별적인 하나하나의 정책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또한 영업시간 제한, 5인 이상 집합금지, 학교 휴교, 재택 근무 등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결과는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효과를 명백하게 제시하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 이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은 한번에 한가지만 시행되지 않습니다.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만 해도 1) 사적모임 제한, 2) 다중 이용시설 집합 금지, 3) 영업시간 제한, 4) 행사 집회 차단, 4) 스포츠 관람 제한, 5) 종교활동 제한 등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과연 이 조치 중 실질적인 효과가 있는 정책과 아닌 것을 분리하여 분석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4차 대유행에서도 예측치와 4단계 사회적 거리두기 후의 유행곡선을 분리해보면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상향은 유행 규모 감소와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어떤 요소가 방역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은 어렵습니다. - 저는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해드립니다. 첫번째는 우리 국민의 뛰어난 반응성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간접적 지표로 활용되는 구글 이동량 분석 결과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확인되는데, 먼저 국내 소매와 여가활동 이동량 감소가 2020년에는 단계 상향과 유행에 따라 큰 폭으로 변화하지만 2021년에는 그 정도의 반응성은 보이지 않습니다. 즉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피로감이 심해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거나, 우리 사회가 사회적 거리두기에 맞는 생활상에 적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림 1) - 그러나 또 주목할만한 점은 사회적 거리두기 상향이나 하향의 발표보다 국민의 이동량이 선행으로 증감하는 현상입니다. 2021년 7월초 예정된 사회적 거리두기 개편안 적용 시점 이전 이미 우리나라의 이동량은 급증하고 있었고, 7월 초 급격한 확진자 증가가 나타나자 단계 상향 이전에 이동량이 큰 폭으로 감소했습니다. 즉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질적인 단계의 조정보다 국민들이 받아들이는 위기의 정도 또는 정부의 정책 신호가 더 중요하다는 가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림 2) - 두번째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상향이 유행 규모 감소와 관련 있다는 관찰에서 출발합니다.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는 감염재생산수를 30% 감소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림 3) 그러나 수십가지 조치 중 무엇이 확진자수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지 식별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소거법을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험적으로 방역에 가장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스포츠 경기 무관중 관람 등의 조치를 일부 해제해도 방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과가 도출된다면 그 대책은 효과가 없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 즉 현재까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사회적 거리두기는 효과가 감소하기는 하지만 시그널로써의 의미 또는 실질적인 대책으로 아직까지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점진적인 완화를 통해 의미있는 대책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백신 접종율의 중요성 - 앞서 위드 코로나는 ‘과거로의 복귀를 위한 절차’ 또는 ‘코로나 19를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감염병으로 만드는 방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백신 접종입니다. 백신은 감염예방, 중증화 방지에 있어서 뛰어난 효과를 보여주고 있고, 코로나 19의 전파능력과 치명율을 감소시켜 코로나 19를 특별하지 않은 감염병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우리나라 국민의 백신 접종에 대한 참여율은 전세계에서 가장 놓은 수준입니다. 50대 이상은 90%이상이 접종에 참여했으며, 50대 미만 성인도 75%이상 접종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백신 공급 차질로 실제 접종율은 아직 높지 못합니다만, 11월경에는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인 2차 접종율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저출산 고령화로 저연령층이 적은 인구구조로 인해 전국민 단위로 환산해도 매우 높은 접종율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접종율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습니다. 그림 4는 저와 교토대 정성목 선생님이 연구 중인 시뮬레이션 결과입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50대 미만 접종 예약율이 현재 보다 10%만 높아지더라도 방역 완화 시 유행 곡선의 방향 자체가 변화합니다.(그림 4) 높은 접종율은 더 빨리, 더 강하게 방역완화로 나아갈 기반이 되며, 백신 접종율과 방역완화는 비례관계를 가집니다. 5. 위드 코로나의 시점을 정할 수 있는가? - 며칠 전 덴마크에서 코로나 19를 더 이상 특별하게 다루지 않겠다는 선언이 있었고, 영국 등 특정 시점부터 급격한 방역완화에 나선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단기간 내 정확한 시점을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 이미 코로나와의 공존으로 나선 국가와 우리와의 차이 때문입니다. 첫번째 백신 접종율에서 아직까지 큰 격차가 존재합니다. 덴마크와 영국은 현재 전체 인구 중 75%, 65%의 2차 접종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백신 접종율이 정체상태로 더 이상 큰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두번째 이러한 국가는 코로나 19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반면 감염되어 면역을 획득한 사람의 비율이 높습니다. 영국의 연구에서도 백신 접종을 하지 않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감염을 통해 면역을 획득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면역수준은 보이는 접종율 이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위험에 대한 인식과 준비에 차이가 있습니다. 심각한 유행을 경험한 국가는 급격한 완화 후 발생하는 유행 또는 피해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의료붕괴의 상황에 이르렀던 경험으로 코로나 19 중환자와 경증환자 진료체계는 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유행상황이 안정적이었던 우리나라는 의료체계에 대한 개선이 상대적으로 더딘 경로 의존성을 보입니다. - 또 하나 시점을 정하기 어려운 이유는 급격한 완화 이후 대규모 재유행에 대한 우려입니다. 7월초 급격한 방역 완화가 추진되었다 지금 대유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급격한 방역완화 정책과 그에 앞서 나오는 정책적 신호에 국민이 반응하고 델타변이보다 전파력이 높은 바이러스가 결합될 경우 심각한 재유행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국, 이스라엘 등 방역완화에 나선 국가들도 이런 현상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 특정 완화 시점을 정한다는 것은 또다른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화 시점 발표 자체가 가지는 신호로의 의미가 클 것임이 명백하고, 급격한 완화시점을 정할 만큼 국내 백신 수급과 접종 상황이 좋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급격한 완화가 아닌 점진적 접근이 중요합니다. 앞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언급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금 시행되는 방역 조치 중 국민들의 불편이 크면서 실질적인 효과가 적은 정책들을 찾아내서 선행적으로 풀어보는 등의 변화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6. 가장 안전한 ‘위드 코로나’는 무엇인가? - 앞서 말씀드린 이유로 유행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안전하고 보수적으로 코로나와의 공존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 첫번째는 무엇보다 백신입니다. 접종율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 올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원할한 국민들의 접종 예약, 미접종자에 대한 접종 기회 재제공은 당연하고, 이상반응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보상 등 백신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 필요합니다. 백신 접종율을 제고하기 위한 유력한 대안은 접종의 의무화나 인센티브, 미접종에 대한 불이익입니다만 이러한 정책은 백신의 정식 승인과 같은 행정적 절차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국민의 합의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특히 의무화와 불이익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뢰성 제고를 위한 노력과 인센티브 제공이 충분히 이루어진 시점에서야 조심스럽게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단 5%만 접종율이 높아져도 우리 사회가 위드코로나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려드리고 동참을 호소해야 합니다. - 두번째는 적절한 신호관리입니다. 위드 코로나에 대한 정부의 정책적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고 점진적 완화의 모습과 일정을 국민들에게 제시해드린다면 안정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국민들께서 지루하실만큼 코로나 19에 대한 정보를 얻고 계시고,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잘 이해하고 계십니다. 급격한 완화의 신호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상황을 잘 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세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위드 코로나가 한가지 특별한 대책이나 장기적인 대안을 수립한다고 달성할 수 있는 단순하거나 한가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코로나 19와의 공존은 당면한 문제이면서도 매우 복잡합니다. 따라서 특정한 기술의 도입 또는 인프라 구축과 같은 거시적 대책의 필요성은 있지만, 현재 계획은 가지고 있는 자원만으로 급격한 체계의 변화 없이 추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위드 코로나로 접어들면서 예상되는 확진자와 중환자의 증가를 대비한 현실적인 조치입니다. - 마지막으로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가 요구됩니다. 위드 코로나는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를 3단계로 하향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코로나와의 공존은 벌써 시작되었으며 지금이라도 국민들께서 많이 불편해하시면서도 방역적 의미가 떨어지는 조치를 찾아내고 점차 풀어나가야 합니다. 추석을 기점으로 백신 인센티브, 요양병원 면회 등 일부조치의 완화가 논의되고 있으며 저는 이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금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를 오랜 사회적 거리두기와 백신 접종에 동참해주신 국민들이 예상하실 수 있는 형태로 알려드리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 이제 출구가 보이는 시점입니다. 하지만 출구까지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많은 분들의 논의와 노력을 통해 그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요약 - 코로나와의 공존, 위드 코로나는 예정된 결말이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갈것인가? 이다. - 백신만으로 집단면역 수준에 도달하긴 어렵다. 그러나 백신을 주력으로 일부 간단한 방역조치와 감염을 통한 면역으로 사실상의 집단면역 상태에는 돌입할 수 있다. - 사회적 거리두기의 개별적 정책의 효과 평가는 어렵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최소한의 방역에서의 효과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까지 부정하기 어렵다. - 백신 접종율이 몇%만 더 높아도 방역완화의 시기, 정도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 특정 시점 기준 완화는 위험할 수 있다. 점진적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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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문화 대혁명(중국 인민의 역사-마오쩌둥) 1962~1976 3부
프랑크 디쾨터 저/고기탁 역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가? 이는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 마오쩌둥 연대표 1956년 2월 25일제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정권 때 재판 없이 행해진 잔인한 숙청과 대대적인 추방, 처형 비난함. 1956년 여름제8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 중 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에 대한 부분이 삭제되고 개인숭배가 비난받음. 1956년 겨울 ~ 1957년 봄마오쩌둥이 대다수 동료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백화제방 운동을 통해 보다 열린 정치 풍조를 부추김. 중국 전역에서 시위와 저항 운동, 파업이 일어남. 1957년 여름비난 공세가 거세지면서 당의 지배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백화제방 운동이 역화를 일으킴. 방침을 바꾼 마오쩌둥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이들을 향해 당을 무너뜨리려는 <불순분자>라고 비난함. 덩샤오핑을 책임자로 임명한 반우파 투쟁에서 50만 명이 박해를 받음. 당은 주석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몇 개월 뒤 대약진 운동이 시작됨. 1958년 ~ 1961년대약진 운동이 기간 중 모든 농민이 인민공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집단 농장에 소속됨. 이후 몇 년 간 고문과 과로, 질병, 굶주림 등으로 수천만 명이 사망함. 1962년 1월수천 명의 당 간부들이 참가한 베이징에서 열린 확대 회의에서 류사오치가 기근을 인재로 서술. 마오쩌둥에 대한 지지가 사상 최저 수준에 이름. 1962년 여름마오쩌둥이 집단 농장의 토지가 재분할되는 상황을 비난하고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움. 1962년 가을사회주의 장점을 대중에게 교육하고 계획 경제 테두리 밖에서 일어나는 경제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시작됨. 1963년 ~ 1964년류사오치가 사회주의 교육 운동에 거세하고 자신의 아내 왕광메이를 시골로 보내 공작대를 이끌게 함. 거의 모든 성이 <자본주의 노선>을 택했다는 비난을 받음. 500만 명이 넘는 당원이 처벌 받음. 1964년 10월 16일중국 최초 핵실험이 성공함. 1964년 10월 ~ 11월모스크바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 흐루쇼프가 실각함. 몇 주 뒤 크렘린 궁전 환영 연회에서 만취한 소련 장관이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대표단에게 마오쩌둥을 제거하라고 조언함. 1965년 1월마오쩌둥이 사회주의 교육 운동의 지침을 개정하고 <자본주의 노선을 취하는 당내 고위 인사들>을 겨냥함. 1965년 11월 10일야오원위안이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베이징 부시장인 우한의 희곡 [하이루의 파면]을 대약진 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논설을 발표함. 1965년 12월 8일 ~ 15일마오쩌둥이 린뱌오의 조언에 따라 뤄루이칭을 인민 해방군 참모 총장직에서 해임함. 1966년 5월 7일마오쩌둥이 린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군과 인민이 구별 없이 융화되는, 요컨대 군사조적 조직과 정치적 세뇌를 아우르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제시함. 이 편지는 후에 5.7지시라고 불림. 1966년 5월 4일 ~ 27일우한의 상관인 베이징 시장 펑전과 뤄루이칭, 루딩이와 양상쿤이 반당 범죄로 고발됨. 당과 국가의 고위층에 침투해 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5.16통지문으로 알려진 당 내부 문서를 통해 고발됨. 1966년 5월 25일네위안쯔가 베이징 대학교의 수뇌부를 <흐루쇼프 같은 수정주의자 집단>이라고 고발하는 대자보를 교내에 붙임. 1966년 5월 28일천보다가 이끌고 마오 부인(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가 참여하는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구성됨. 1966년 6월 1일전 국민에게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촉구하는 글이 [인민일보]에 발표됨. 전국 곳곳에 휴교령이 내려짐. 1966년 6월 ~ 7월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중등학교와 대학교에 공작대를 파견해 문화 대혁명을 이끌게 함. 공작대는 곧 보다 급진적인 학생들과 충돌하면서 학생들은 <우파>라고 비난함. 1966년 7월 16일마오쩌둥이 양쯔 강에서 수영을 하며 문화 대혁명을 완수하겠다는 투지를 드러냄. 1966년 8월 1일5.7 지시에 고무된 일단의 학생들이 중국을 자본주의로 되돌리려는 공모한 자들과 싸울 것을 다짐하면서 자칭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마오쩌둥이 그들에게 지시 서한을 보냄.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홍위병을 조직하고 출신 성분이 불량한 사람들을 공격함. 1966년 8월 5일마오쩌둥 본인이 직접 쓴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라>가[인민일보]에 실림. 마오쩌둥은 공작대를 파견한 <지도자 동지들>이 <반동적인 부르주아 노선>을 취하고 조직적인 <백색 테러>를 가했다고 비난함. <우파>로 낙인찍힌 학생들이 구제를 받음. 1966년 8월 12일중앙 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린뱌오가 류사오치를 대신해 2인자 자리에 오름. 1966년 8월 18일군복을 입고 홍위병 완장을 두른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100만 명의 학생들을 사열함. 마오쩌둥은 이후 수개월에 걸쳐 총 1200만 명의 홍위병을 사열함. 1966년 8월 23일[인민일보]가 홍위병의 폭력성과 그들이 벌이는 구사회의 모든 잔재를 파괴하려는 운동에 찬사를 보냄. 1966년 9월 5일홍위병에게 교통과 숙박이 무료로 제공됨. 많은 홍위병이 마오 주석의 사열을 받고 베이징을 찾는 가운데 다른 홍위병들은 혁명적 조직망을 수립하기 위해 전국을 종횡하며 지역의 당 권력자들<자자파>라고 공격함. 1966년 10월 3일홍위병에게 공격을 받은 당내 조직들의 지원 요청에 천보다를 주간으로 둔 당 기관지 [붉은 깃발]이 그들을 두둔하기는커녕 오히려 사설을 발표하고 <부르주아 반동 노선>을 따르는 당 내부의 <반혁명 수정주의자들>을 비난함. 1966년 11월 1일<대중을 마치 무지하고 무능력한 존재처럼 취급한다. 라며 고위 당원들을 비난하는 사설이 또다시 [붉은 깃발]에 발표되면서 일반 대중에게 당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촉발하고 저항 조직 결성을 부추김. 1966년 12월 26일마오 부인이 새로 결성된 전국 임시 노동자 연맹 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문화 대혁명이 시작된 이래 당 지도자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람들을 모두 복직시키라고 요구함. 일흔 세 번째 생일을 맞은 마오쩌둥이 그날 저녁에 <내전의 전국적인 확산>을 환영하며 축배를 듦. 1967년 1월 6일장차 <1월 폭동>으로 불리게 될 사건에서 100만 명의 조반파 노동자들이 상하이 당 위원회 권력을 박탈함. 마오 주석이 다른 지역의 조반파도 <탈권>하라고 촉구함. 1967년 1월 23일<혁명 대중>을 지원하라는 명령이 군에 하달됨. 1967년 2월 11일과 16일저우언라이의 주재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원로 사령관들이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을 비판함. 마오쩌둥이 곧장 이들 사령관들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서면서 린뱌오와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보다 막강한 힘을 갖게 됨. 1967년 4월 6일<프롤레타리아 좌파>를 지원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 군이 오히려 당 지도자들 편에 섬. 4월 6일 군에 하달된 새로운 지시에 따라서 조반파에 대한 발포가 금지되고 군 사령부를 습격한 이들에 대한 보복이나 대중 조직을 해산시키는 것이 금지됨. 1967년 5월대개는 군까지 개입된 파벌 간의 폭력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됨. 1967년 7월 20일우한의 두 대립 세력을 중재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 두 명이 조반파를 편드는 듯 한 태도를 보였다는 이유로 지역 군인들에게 납치됨. 린뱌오는 이 사건을 지역 군 사령관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비밀리에 우한을 방문 중이던 마오 주석에게 즉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권유함. 1967년 7월 25일우한에 억류되었던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이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으로 귀환하고 베이징 시민들이 해당 사건을 <반혁명 폭동>이라며 규탄함. 린뱌오가 군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됨. 1967년 8월 1일린뱌오를 마오 주석의 가장 충직한 부하로 묘사하며 군대에서 <주사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설이 [붉은 깃발]에 살림. 서로 다른 파벌의 무력 충돌이 여름 내내 전국으로 확산됨. 1967년 8월 22일저우언라이에 비판적인 조반파가 외교부를 장악하고 베이징 소재 영궁 공관에 불을 지름 1967년 8월 30일마오 주석이 폭력을 제지하고 나서면서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 몇 명에 대한 체포를 명령함. 며칠 뒤 대중 조직이 군대의 무기를 탈취하는 행위가 재차 금지됨. 1967년 9월마오쩌둥이 전국을 순회하며 모든 혁명 세력의 위대한 동맹을 촉구함. 1968년 3월 22일린뱌오가 군 지도자 여러 명을 체포하도록 명령하며 자신의 군대 장악력을 더욱 확고히 함. 1968년 7월 27일 칭화 대학교에 파견된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가 홍위병들을 굴복시키고 징계함으로써 홍위병 시대가 막을 내림. 1968년 9월 7일모든 성과 주요 도시에 혁명 위원회가 수립되고 저우언라이가 전면적인 승리를 선언함. 1968년 여름 ~ 1969년 가을새로운 혁명 위원회가 <당원 정화> 운동을 기회 삼아서 그들의 적을 <스파이>와 <반역자>라고 고발함. 1968년 12월 22일도시 학생들에게 시골로 내려가 재교육을 받으라는 마오 주석의 지지가[인민일보]에 발표함. 1968년과 1980년 사이에 모두 1700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이 도시에서 추방됨. 1969년 3월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가 개최되기 몇 주 전 중국과 소련 군대가 우수리강 유역에서 충돌함. 린뱌오가 중국을 더욱 무장시키는 계기가 됨. 1969년 4월제9차 중국 공산당 전국 대표 대회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됨. 1970년 2월 ~ 11월<일타삼반>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전개된 두 개의 운동이 <반혁명 활동>과 <경제 범죄>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쉰 명 중 한 명꼴로 관련 행위에 연루되었다며 대중을 겁박함. 1970년 여름마오쩌둥이 국가 주석직을 둘러싼 쟁점을 이용해서 린뱌오의 충성을 시험함. 1971년 4월마오 주석이 미국 탁구 대표팀을 중국에 초대함. 1971년 여름남부 지방 순회에 나선 마오 주석이 린뱌오의 이름을 한 번도 거명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권위를 약화시킴. 1971년 9월 12일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옴. 자정이 막 지난 시간에 린뱌오와 그의 아내와 아들이 베이다이허 여름 휴양지 외곽에서 서둘러 비행기에 탑승함. 비행기가 몽골에서 추락하면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함. 1972년 2월 21일 ~ 28일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함. 1972년 8월군대가 병영 복귀함. 이후 수 개월 동안 다수의 정부 관리자와 당 간부가 복권됨. 1973년 11월 ~ 1974년 1월마오 부인과 장춘차오, 왕홍원과 야오원위안이 단결하여 저우언라이에 대항하면서 얼마 뒤 <사인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됨. 저우언라이를 겨냥한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 운동이 시작됨. 1974년 4월마오 주석이 덩샤오핑을 승진시켜 유엔에서 중국 대표단을 이끌게 함. 1975년 1월마오 주석이 승인 아래 저우언라이가 중국의 농업과 산업, 국방과 과학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4대 현대화> 계획에 착수함. 1975년 11월 ~ 1976년 1월마오쩌둥이 자신이 죽고 나면 덩샤오핑이 자신의 유산을 훼손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힘. 덩샤오핑이 여러 당 대회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맡고 있던 대부분의 공직에서 해임됨. 1976년 1월 8일저우언라이 총리 사망. 1976년 4월 4일 ~ 5일저우언라이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인 지지가 톈안먼 광장의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고 경찰과 군대가 폭력으로 진압함. 1976년 9월 9일마오쩌둥 사망. 문화 대혁명 대약진 운동의 실패 이후, 노쇠한 마오쩌둥은 잃어버린 자신의 위상을 회복하고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자본주의적 시장 정책이 공산주의 이념의 순수성을 위협한다는 주장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을 숭배한 홍위병들이 득세했고, 라이벌 당파와의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순수성이라는 이름 아래, 거리는 반자동 무기를 든 군인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인민의 50분의 1을 짓밟은 피의 숙청이 이어졌다. 디쾨터는 이 책을 통해 마오쩌둥의 마지막 시기와 격동의 중국을 교차함으로써, 문화 대혁명의 전모를 밝혀낸다. - 본문 발췌 “우리는 홍위병이다. 당신에게 혁명적 조치를 취하러 왔다!” - 본문 중에서 1966년 6월 1일 [인민일보]에 실린 한 성동적인 사설이 독자에게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촉구했다. 문화 대혁명의 신호탄이 된 이 글은 <반동적인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무력하게 만들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앞잡이들을 고발하라고 요구했다. 스탈린을 닮고자 했던 마오쩌둥은 비스탈린화 움직임에 개인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아울러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위대한 소련에서 흐루쇼프가 어떻게 그처럼 단독으로 완전한 정책적 반전을 꾀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공산주의 논리에 따르면 생산 수단의 소유 문제를 둘러싼 사회주의식 개혁이 일단락된 다음에는 개인주의적인 사고부터 민간 시장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문화의 모든 흔적을 영원히 제거할 새로운 혁명이 필요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데 혁명이 필요한 것처럼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넘어갈 때도 혁명이 필요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문화 대혁명이라고 불렀다. 1부 초기 (1962 ~ 1966) 7,000인 대회 1962년 1월, 약 7,000명의 당 간부들이 인민 대회당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부터 도착했다. 대약진 실패에 대한 성토를 하기 시작했다. 류사오치, 린뱌오 등은 마오쩌둥의 잘못을 당의 잘못으로 돌려 마오쩌둥은 7,000인 대회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당에 대한 주도권을 상실하게 될까 봐 그 어느 때보다 전전긍긍했다. 1934년 당시 소련에서 열린 일명 승자들의 대회 즉 제17차 소련 공산당 전당 대회는 결국 희생자들의 대회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4년에 걸쳐 2,000명의 대의원 중 절반 이상이 처형되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스탈린은 대공포 정치를 통해 자신의 적을 사냥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사회학자 로버트 서비스의 말처럼 <스탈린의 잔인성은 마치 오소리 덫처럼 기계적으로 작동했다>. 마오쩌둥의 경우는 변덕스러운 쪽에 훨씬 가까웠다. 그는 자신의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일부러 사회를 뒤집어엎고 수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부추겼다. 더 이상 대기근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오쩌둥이 취한 첫 번째 행보는 기근의 책임을 계급의 적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표어와 함께 시작되었다. 빈농과 중산층 농민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위원회가 활용되었다. 허베이 성 싱타이 지구에서는 수천 명의 농민들이 조직되어 <자본가>와 <독자적으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은 농촌의 일반 서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수정주의가 중국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요직에 있는 권력자들을 공격해야 했다. 류사오치는 민초를 조사하도록 자신의 아내를 파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국의 대규모 공작대에 합류해서 그녀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하향식 접근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공작대를 잇는 지도자가 일반인의 표적이 되는 상향식 운동을 선호 했다. 그리고 1965년 1월 사회주의 교육 운동 지침을 새로 만들었다. 핵심 내용 중 하나는 <당내 요직에 있는 주자파를 잡아라.> 라는 것이었다. 바로 1년여 뒤에 홍위병은 문화 대혁명에서 이 구절을 철저히 이용하고 문화 대혁명은 사회주의 교육 운동으로 계승하게 될 터였다. 마오쩌둥의 오른팔 린뱌오 1959년 여름 루산 회의에서 린뱌오는 마오 주석을 옹호하는 대열에 합류해서 특유의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오직 마오쩌둥만이 위대한 영웅이며 그 같은 위치는 그를 제외한 누구도 감히 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보다 한참 부족하니 아예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 린뱌오는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대약진 운동이<환상에 기초하고 있으며 완전히 실패>라고 털어놓았을 정도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주석을 최대한 추켜세우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마오쩌둥을 우상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은 터였다. 린뱌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을 마스터하는 지름길로써 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하도록 장려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마오쩌둥 전집에 나오는 짧은 구절들을 암기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1961년 4월부터 [인민일보]는 가장 눈에 잘 띄는 1면에 주석의 말을 인용해서 게재하기 시작했다. 독자들은 인용구를 잘라 내 차곡차곡 수집하기 시작했다. 1964년 1월 그동안 게재된 인용구를 등사판으로 인쇄한 요약집이 출간되었고 5월에는 개정판이 인민 해방군에 배포되었다. 개정판은 조야한 빨간색 비닐 표지가 적용되었고 일반적인 군복 주머니에 쉽게 들어가도록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헌사에는 린뱌오가 레이펑의 일기에서 고른 문구가 들어갔다. <마오 주석의 책을 읽고, 마오 주석의 말을 듣고, 마오주석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고, 마오 주석의 훌륭한 투사가 되자.> 1965년 8월에 개정판이 나왔을 즈음에는 일명 <작은 붉은 책>으로 알려진 [마오쩌둥 어록]이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백만 권이나 배포된 상태였다. 마오쩌둥 어록집 군사적 모델을 향한 열정은 정식 교육에 대한 경시로 이어졌다. 린뱌오의 표어 <정치가 최우선>이었다. 내내 지식인을 헐뜯어 왔던 마오쩌둥은 이제 교육 제도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3년 2월 13일은 온 국민이 중국 설날을 기념하는 춘절 행사에서 그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험을 팔고문에 비유했다. 팔고문이란 청나라 때 과거에 응시한 지원자들이 논증을 펼치기 위해 익혀야 했던 문체였다. <나는 이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문제를 사전에 공개하고 학생들에게 관련 내용을 공부하게 한 다음 책을 참고해서 답을 적도록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다.> 심지어 더욱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했는데 커닝에도 장점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만약 당신이 올바른 답을 적고 내가 그 답을 베낀다면 내가 쓴 답도 옳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교사가 지루한 강의 내용을 장황하게 이야기할 때 조는 학생들의 손을 들어 주기도 했다. <허튼소리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시간에 차라리 머리를 식히는 편이 낫다.> 일부 학생들은 곧장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교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생각이 필요 없는 이론 교육, 암기에 의한 학습 등을 중시하는 억압적인 교육 제도에 짓밟힌 기분이 들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마오쩌둥이 편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미래의 홍위병 말처럼 <수업은 내 시간을 낭비했고 선생님들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석이 불러 줄 때를 기다렸다. 미래의 홍위병들 마오쩌둥은 문학계와 예술계를 향해서도 비난을 쏟아 냈다. 이 축제의 진정한 스타는 그의 아내였다. 마오쩌둥의 4째부인 장칭은 야망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까지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62년 9월 29일 수카르노 대통령의 방문을 받았을 때 장친이 함개 있는 사진이 [인민일보]를 통해 공개되고 본격적으로 정치 입문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정치에 점점 깊이 개입할수록 건강 염려증과 신경 쇠약증이 호전되었다> 마오쩌둥 주치의가 언급했다. 1963년 질투에 사로잡힌 잔인한 군주에게 처형당한 첩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사극은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리고 이에 본격적인 행동에 나선 장칭은 자칭 문화 감시자로서 연극과 음악, 영화 등의 제작에 관련된 지침을 내놓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계급 투쟁을 잊지 말라>라는 슬로건 아래 단결한 류사오치도 문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힘을 보탰다. 문화계에 혁명사상을 고취하고자 당이 조직한 문화 혁명 오인소조라는 단체에 장치 장칭이 합류 단지 희곡 작가 몇 명을 공격하기 위함이 아닌, 문화부보다 더 높은 곳을 겨냥한 훨씬 중요한 임무를 맡길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1965년 2월 그가 비밀 임무를 위해 장칭을 상하이로 보내면서 문화는 다음 단계의 혁명을 시작할 무대가 될 터였다. <4인방>으로 대활약할 마오쩌둥의 4째 부인 장칭 1957년 초 주석이 지식인들을 향해 불만을 표출하며 당원들이 업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했을 때 펑전은 베이징 시장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 운동을 저지했다. 베이징에서 본사를 둔 [인민일보]는 백화 운동과 관련한 마오쩌둥이 가장 중요한 연설을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보도했다. 이 공식 당 기관지의 편집장 덩퉈가 시장의 지시를 따른 까닭이었다. 펑전은 당이 1954년 7월에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정화 임무를 맡기기 위해 조직한 오인소조도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반당 파벌]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며 숙청하기에 이른다. 2부 적색 시대 (1966 ~ 1968) 5월 16일에 당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펑전이 수도인 베이징을 수정주의 요새로 탈바꿈 시켰다는 공지문이 회람되었다. 마오쩌둥은 당 전체에 <당과 정부 기관, 군부대를 비롯한 문화계 전반에 스며든 이런 부르주아의 대변인들과 연을 끊어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혁명에 반대하는 수정주의 세력>이었다. 정권을 잡고 조건이 무르익는 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 독재 체제로 바꾸려는 자들이다. 마오쩌둥은 끔찍한 경고를 내놓았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가 이미 파악했고 일부는 그렇지 못하다. 일부는 우리가 여전히 신뢰하고 우리 후계자로 훈련시키고 있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여전히 우리 곁을 바싹 달라붙어 있는 흐루쇼프 같은 자들이다.> 마오쩌둥의 메시지는 당내 고위층 인사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유력한 베이징 시장이 실각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내 그의 뒤를 따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당원들은 주석의 발언을 놓고 회의하는 자리에서 테이블 너머로 서로를 감시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주석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마오 주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주석을 제외한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 주석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의심해야 한다.> [인민일보]를 읽는 일반인들은 권력의 회랑에서 모종의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마오쩌둥이 한동안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의혹을 더욱 부추겼다. <문혁 초기 중앙문혁소조의 영도자들: 왼쪽부터 장칭(江靑), 천보다(陳伯達), 캉성(康生), 장춘차오(張春橋). 마오쩌둥은 1966년 천보다를 중앙문혁소조의 조장으로 임명했다./ 공공부문> 그사이 마오쩌둥은 펑전이 이끌던 오인소조의 해체를 위해 움직였다. 오인소조 대신 마오쩌둥의 심복들로 구성된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등장했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곧 문화 대혁명의 전 과정을 지휘하면서 모든 상위 결정이 내려지는 가장 중요한 정치 기구가 되었다. 황제가 대신들의 반대를 우회하기 위해 만든 내부 조직처럼 중앙 문화 혁명 소조는 당과 정부와 군대 위에 군림할 터였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는 장칭과 캉성, 야오원위안과 장춘차오를 비롯한 주석의 몇몇 심복들이 포함되었다. 국제 어린이날이기도 한 6월 1일에 중앙 문화 혁명 소조가 첫 번째 폭탄을 투하했다. 천보다는 [인민일보]에 발표한 선동적인 논설에서 서민들을 향해 <모든 괴물과 악마를 척결하라!>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자신들의 반동적인 공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속이고 기만하고 멍청하게 만들려는 하는> 부르주아의 대변자들을 척결하라는 외침과 함께 문화 대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천보다의 논설은 <사상계와 문화계> 전반에 자리 잡고 있는 <부르주아 출신의 전문가들>, <학술계의 권위자들>, <신망 있는 대가들>을 콕 찍어서 지목했다. 이제 중국은 곳곳에서 발견되는 반혁명적인 음모에 맞선 공격적인 정치 운동에 휘말려 있었다. 1966년 6월 1일 베이징 대학교를 고발하는 네위안쯔의 글이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의 사무실과 공장과 학교에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당 간부들이 중학교부터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수도 전역의 교육 기관 내 공작대에 합류하도록 보내졌다. 전국의 다른 지역들도 수도와 경쟁에 나섰고 서둘러 공작대를 파견했다. 공작대가 어디를 가든 그들의 관리 아래 있는 학교나 대학은 온통 대자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공작대는 <괴물과 악마>를 비난하도록 학생들을 부추겼다. 앞서 [인민일보]에 발표된 논설에 따르면 그들은 문화계를 독점해서 노동자들을 억압하려 했다. 일부 학생들은 이미 자신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몇몇의 출신 배경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시작하였다. 공작대의 자극에 고무된 학생들은 초기에 교사들을 비난했다. 증오로 가득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설전은 공작대에 의해 지목된 표적을 향한 물리적인 공격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어떤 희생자는 바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고 어떤 희생자는 목에 <자본주의 앞잡이>나 <흑방 분자>, <제국주의 스파이> 또는 그 밖의 죄목이 적힌 팻말을 매달고 다녀야 했다. 학생들에게 떠밀려서 때로는 잉크까지 뒤집어쓴 채 학교 안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교사들도 상당수 목격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보 모자는 더욱 길고 무거워졌고 목에 매다는 팻말도 더욱 크고 묵직해졌다. 때로는 팻말이 돌멩이를 가득 채운 바구니로 대체되기도 했다. 링컨이 다니던 학교의 교장의 목에 깊은 상처를 냈을 정도였다. 교장과 다른 교사들은 부서진 징이나 냄비를 치면서 그리고 자신의 죄를 외치면서 맨발로 학교 안을 행진해야 했다. <나는 흑방분자다!> 공작대는 공장도 엄하게 단속했다. 상하이 제 17방적 공장에서는 조만간 사인방 중 한 사람으로 영전할 왕훙원이라는 젊고 잘생긴 보안 책임자가 문화 대혁명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는 생산량을 늘릴 목적으로 고정급이 아닌 능률급을 지불하는 행태를 비난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8,000명의 공장 노동자에게 불만을 부추겼다. 6월 말이 되자 반격을 위한 공작대가 파견되었고 불만을 제기했던 사람들을 핍박했다.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반당 분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왕훙원에게는 <이기적인 출세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류사오치는 단시간에 중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휘하의 공작대들은 수많은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다.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문화 대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양쯔 강에서 수영하는 마오쩌둥. 1966년 7월 16일 마오쩌둥은 세간의 이목을 피해 몇 달 동안 연속으로 아주 은밀하게 전국을 여행하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보를 보였다. 동료들조차 그가 어디에 있는지 항상 알지 못할 정도였다. 사회주의 교육 운동 기간에 <아버지는 가깝다, 어머니도 가깝다, 그래도 마오 주석이 제일 가깝다>라는 짧은 노래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 지도자는 먼 사람이었다. 라디오에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고 공개된 자리에 좀처럼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1966년 7월 16일 주석은 양쯔 강에서 그 유명한 수영을 함으로써 공적인 생활에 복귀할 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양쯔 강의 거센 물살을 타고 하류로 떠내려가다가 한 시간 뒤 강 건너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상기되고 잔뜩 들뜬 얼굴>이었다. 마오쩌둥은 공작대를 견제하기 위해서 중앙 문화 혁명 소조 원들을 파견했다. 베이징으로 복귀하는 길에 난징에 들른 마오쩌둥의 부인은 공작대를 지지하는 수뇌부가 꼭 주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녀는 <공작대를 맹신하지 말라>라고 설명했다. <근본적으로 우리 편인 이들 공작대의 지휘자들은 권한이 강화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반대하는 지휘자들의 권한은 몰수되어야 한다.> 7월 24일에는 하얀색 잠옷을 입은 마오쩌둥이 거처로 사용하는 다오위타이 국빈관 1층에서 당 지도층 인사들을 맞이했다. 그는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 라며 그들을 질책했다. 주석은 공작대를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해방자로 여겨졌다. 총회 중에 중앙 위원회가 내놓은 가장 주목할 만한 성명은 8월 8일에 대대적으로 홍보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에 관한 결정문>이었다. 결정문은 주된 공격 목표가 <자본주의 노선을 선택한 당내 권력자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럼에도 진짜 권력은 지도부가 문화 대혁명을 재가하자마자 중앙 문화 혁명 소조에게로 넘어갔다. 마오쩌둥은 중국의 의사 결정 기관들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했다. 여름 동안 <우경 세력>과 <반동분자>로 고발되었던 사람들이 이제 주석을 중심으로 뭉쳤다. 8월 8일 문화 대혁명 지침을 방송하면서 라디오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비롯한 전문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에게 불리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거라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학생들에게 직접 다가갔고 그들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은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았고 조종하기가 쉬웠으며 싸우고 싶어 했다. 무엇보다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열망했다. 주석은 자신의 주치의에게 <반란을, 혁명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들 악마와 괴물을 굴복시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고 털어놓았다. 8월 1일 마오쩌둥은 칭화 대학교의 한 부설 중학교에 다니는 일단의 어린 학생들에게 친전을 보내서 그들을 지지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들에게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고 조언했다. 해당 학생들은 두 달 전에 자체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홍위병이라는 이름을 지은 터였다. 이제 주석의 허락까지 얻자 홍위병 그들은 죽을 때까지 마오 주석과 혁명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아울러 충실한 투사를 자청한 까닭에 사복을 버리고 군복을 입기 시작했다. 몇몇은 가족 중에서 나이 든 구성원이 입었던 군복을 찾아 입었다. 지나치게 딱 맞는 군복이나 때깔이 좋은 옷은 부르주아적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언제든 계급의 적에게 쉽게 채찍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죽 허리띠는 필수였다. 붉은 면직물에 황금색으로 <홍위병>이라고 적힌 완장까지 더해지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모든 사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순수한 혈통을 가진 사람들만이 홍위병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원로 혁명가의 자식인 그들만이 문화 대혁명을 이끌기 위해 꼭 필요한 계급적 배경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애초 공산주의자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부르주아에게 저항하고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권력은 아들에게로 이어져야 한다. 이른바 세습이라는 것이다.> 출신 배경이 나쁜 사람은 누구든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한 쌍의 대구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버지가 영웅이면 그 아들도 영웅이다. 아버지가 반동이면 그 아들도 잡종이다.>혈통을 바탕으로 한 이 배타적인 조직의 회원 자격을 갖춘 중학생은 베이징에서 다섯 명 중 한 명꼴도 되지 않았다. 홍위병은 마오쩌둥의 <저항은 정당한 행위다>라는 선전 포고를 듣자마자 교사들과 관리자들을 향해 물리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마오쩌둥의 격려문을 받은 지 3일 뒤인 8월 4일 칭화 대학교 부설 중학교 학생들은 그 학교 교장과 교감을 <흑방의 우두머리>라고 비난하며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웠다. 뒤이은 며칠 동안 홍위병들이 돌아가면서 그들을 폭행했다. 어떤 학생은 곤봉을 사용했고 어떤 학생은 채찍이나 구리 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선호했다. 누군가가 교감의 머리에 불을 질렀다. 베이징 사범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어떤 여학교에서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볜중윈 교감은 이미 6월 말에 공작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차례 고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흙을 먹이고, 머리에 바보 모자를 씌우고, 손을 등 뒤로 묶은 채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 공작대가 물러난 뒤로 홍위병은 부르주아 세력을 학교에서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8월 5일 오후가 되자 홍위병은 <흑방>을 조직했다는 이유로 학교 관리자 다섯 명을 고발했다. 볜중윈은 몇 시간에 걸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기절했다. 그리고 그대로 쓰레기차에 버려졌다. 두 시간 뒤에 마침내 길 건너편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는 그녀에게 사망 진단이 내려졌다. 중앙 문화 혁명 소조원들은 내내 홍위병들을 만나고 돌아다녔다. 이 학교에서 한 팀을 만난 다음에 저 학교에 가서 또 다른 팀을 만나는 식이었다. 이미 7월 28일에 마오 부인은 베이징 대학교를 방문해서 군중을 향해 <우리는 사람을 때리는 행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설령 사람을 때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인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에게 맞으면 맞을 만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맞으면 칭찬은 선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때리면 그것은 오해 때문이며 반드시 풀어야 한다.> 8월 13일이 되자 베이징 공인 체육관에 군중 집회가 준비되면서 부추김은 더욱 심해졌다. 수만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몇 주 전에 홍위병을 위협했다는 일반인 다섯 명이 무대 위로 끌려 나와서 <무뢰한>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구타와 허리띠를 이용한 채찍질도 가해졌다. 투쟁 대회를 지켜보던 저우언라이와 왕런중은 폭력을 중단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마오주석에게 완장을 채워주는 쏭야오 가장 큰 지지 행사는 8울 18일에 열렸다. 100만 명이 넘는 어린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쏟아져 나온 날이었다. 그날 행사의 절정은 쑹빈빈이라는 한 여학생이 주석의 소매에 홍위병 완장을 채워 주는 특별한 영광을 누린 순간이었다. 그녀는 한원로 장군의 딸이었고 2주 전에 볜중윈이 고문으로 사망한 학교의 학생이었다. 쑹빈빈을 비롯하여 홍위병을 이끄는 지도부 학생들은 베이징 시 당위원회에 해당 사실을 개인적으로 보고한 터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마오쩌둥이 그녀에게 빈빈이라는 이름이 무슨 뜻인지 물었다. 그녀가 <우아하다>라는 뜻이라고 대답하자 주석은 <군인답다>라는 의미의 야오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제안했다. 쏭야오는 단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홍위병에 둘러싸인 마오쩌둥 린뱌오 문화 대혁명의 초기 단계에서 수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의 많은 학생들은 아직 어느 수준의 폭력까지 용인될 것인지 확인이 없는 상태였다. 홍위병의 진정한 조직으로서 행동에 나선 것은 구사회의 유물을 파괴하려는 운동을 통해서였다. 8월 18일에 마오 주석과 나란히 연단에 모습을 드러낸 린뱌오는 학생들에게 <착취 계급의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전통, 낡은 관습>을 타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봉건적 이념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생각을 구속해 온 상황에서 이제 중국의 혁명적인 색깔이 결코 바래지 않도록 확실히 하려면 이런 문화적 유물이 청산되어야 했다. 전통이란 산 사람에게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과거의 죽은 손이었고 완전히 박살 내야 할 어떤 것이었다. 해방 전부터 공산당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했고 당 지도층 인사들과도 많이 알고 지내던 미국인 시드니 리튼버그는 이런 분노 섞인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온통 박살 낸다는 말뿐이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 지난 20년 동안 이룩한 모든 것을 정말로 파괴하려는, 산산이 부수고 새로운 어떤 것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낡은 세상에서 전쟁을 선포한다 린뱌오의 호소는 널리 퍼져 나갔고 이튿날이 되자 베이징의 홍위병은 낡은 세상에 전쟁을 선포한다는 대자보를 당당히 내걸었다. <우리는 모든 낡은 사고와 낡은 문화, 낡은 관습과 낡은 습성을 비난하고 박살 내고자 한다. 이발사와 재단사, 사진사와 거리에서 책을 판매하는 행상을 비롯해서 부르주아 계급에 봉사하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낡은 세상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다!> 홍위병은 하이힐과 화려한 헤어스타일, 짧은 치마, 청바지, 볼온 서적이 즉시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8월 19일에 이런 선동적인 발언이 실린 신문 수천 부를 찍어 유포했다. 8월 20일 저녁이 되자 홍위병들이 여러 무리로 나뉘어 베이징 거리를 배회하면서 구체제의 냄새를 풍기는 대상을 닥치는 대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존의 표지판 위에 새로운 혁명적인 이름을 써 붙이면서 기리 이름도 바뀌었다. 양복점이나 이발소처럼 서비스 업종에 속하는 가게들이 공격받으면서 가게 주인들도 모욕을 당하거나 때로는 폭행까지 당했고 강제로 가게를 닫아야 했다. 8월 22일 오전이 되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홍위병이 강제로 머리를 깎고 바지통을 찢거나 하이힐 굽을 자르면서 일반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신화 통신은 <마오쩌둥의 어린 장수들>이라며 홍위병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고 낡은 문화를 청산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칭송했다. 그 결과 8월 23일부터 26일까지 전국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홍위병은 과거를 상기시키는 모든 대상을 향해서 폭력을 휘둘렀다. 그로 인한 여파는 장차 수개월 동안 지속될 터였다. 1966년 8월 말부터 폭력 사태가 진정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시 당국이 홍위병을 좋아하지 않으며 시 차원에서 홍위병을 진정시킬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학생들은 여전히 무리를 이루어 거리를 행진하면서 혁명가를 부르고 심벌즈를 울렸지만 불같은 열정은 이미 죽어 있었다. 많은 표어들이 담장과 창문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상점들은 다시 문을 열었다. 집을 습격당했던 다른 많은 희생자들처럼 정녠은 엉망이 되어 버린 자신의 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살인 사건이 집중되어 발생한 베이징에서는 9월 초부터 홍위병의 공공연한 폭력 행위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완전히 중단된 듯 보였다. 경찰도 다시 본연의 임무에 복귀했다. 시민들은 10월 1일 국경절 행사에 맞추어 도시를 단장하느라 바빴다. 3부 암흑 시대 (1968 ~ 1971) ……… 4부 잿빛 시대 (1971 ~ 1976) ……… 로 이어집니다. Epilogue 수천만 명이 죽어 가는 동안에도 중국이 붕괴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한 가지는 공산당 이외의 가능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산재한 비밀 종파든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지하당이든 간에 기존 정권을 제외한 무엇도 이 광대한 땅덩어리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군 내부의 쿠데타 가능성은 1959년 루산 총회 뒤 린뱌오가 실시한 광범위한 숙청으로 미연에 방지 되었다. 공산주의 역사는 숙청의 역사이기도 하다. 끝없는 숙청을 통한 견제 세력의 약화, 공포를 통한 시민들의 우민화를 꾀한다. 마오쩌둥 사상 학습반부터 5.7 간부 학교에 이르기까지 끓임 없는 재교육 운동은 물론이고 가택 수색과 분서, 공개 굴욕, 수많은 숙청 등에도 불구하고 낡은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문화 대혁명은 개인의 가장 내밀한 생각과 사사로운 감정을 비롯하여 개인의 삶을 둘러싼 모든 측면을 개조하고자 했지만 많은 경우에 표면적인 순응을 이끌어 냈을 뿐이었다. 대중은 기만에는 기만으로, 거짓에는 거짓으로, 공허한 빈말에는 공허한 표어로 맞섰다. 그들은 순응하는 척 연기하면서 주어진 순간에 자신에게 기대되는 대사를 정확히 읊을 줄 아는 뛰어난 배우들이었다. 마오쩌둥 사망 후 개방, 개혁, 서방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덩샤오핑은 민주사회로 가는 듯 했으나…….1989년 6월에 덩샤오핑은 군대를 동원했다. 베이징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직접 명령했고 그에 따라 탱크가 톈안먼 광장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날의 학살은 야만적인 힘과 철권통치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생산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일당 국가의 독재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이상 인민 3부작을 완료 하였습니다. 중국의 역사 지식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09-30추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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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간단했으면 좋았을)세계 코로나 상황과 국뽕의 웃픈 근거
코로나 19로 세계가 뒤집어진 지금
세계 여러나라의 혼란상 속에서 우리나라의 대처가 빛을 발하면서 국뽕 글들이 날마다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빛나는 모습만을 보는 것은 이제 슬슬 물리실 듯 하여, 1. 세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혼란속에 놓여있는지. 2. 이렇게 우리나라가 대처를 잘 할 수 있는 숨어있는 이유를 되짚어 봄으로서, 우리나라의 웃픈 현실을 재조명 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 게시글은, 3프로 tv의 소 코너,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내용을 토대로 함을 미리 밝혀드립니다.
이탈리아)
익히 ㅈ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굳이 언급을 해야 할까 싶냐마는.... 유럽 대륙에서 시범적으로 ㅈ되고 있는 케이스이다보니, 언급을 안하고 넘어갈 수가 없네요. 유럽 다른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확진자수 증가 양태를 따라가고 있으니, 유럽의 코로나 유행과 소강, 그리고 극복의 시금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상황을 모니터링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이탈리아의 통계치를 2주 텀으로 따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한풀 꺾일랑 말랑 하고 있긴 한데, 최근까지는 확진자가 매일 10%씩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총 확진자의 10% 씩)
이탈리아는 사망률이 10%입니다. 이렇게 사망율이 높은 이유는 저번 게시글에도 밝혔다시피, 트리아지라는 전상자 처치법을 통해 환자를 분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탈리아에서 코로나 증세를 느껴 병원에 간다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질문이 “60세 이상이세요?”라고 합니다.
거기서 “YES”라고 대답하셨다면.... 당신의 팔엔 검은색 표딱지가 붙게 될 것입니다. (검은색 : 기대 / 죽을 날만 기다릴 것)
이건 나름의 고육책인 것이, 워낙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다보니, 치료를 위한 설비가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고, 생명의 무게를 “선별”해야 할 정도의 상황까지 몰리게 된 것이죠.
젊은이라면 산소마스크를 2일만 써도 회복이 되는 반면
노인의 경우 산소마스크를 7일 넘게 써도 간당간당 하다면
“공리주의적”으로 의사는 젊은이를 위주로 의료행위를 할 수 밖에 없겠지요. 아마 이탈리아에서 의사로 활동하신다면..... 참 PTSD가 우려되는 상황이겠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증가세는 정점을 찍은 듯 합니다만.... 그 상태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하고 있습니다.
기승전전전전전전전....같은 상황이죠. 하루에만 사망자가 1,000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지옥의 한 복판에서 희망을 찾아 애를 쓰고있는 이탈리아를 응원합니다.
스페인)
이탈리아는 기승전전전전전.....이라면, 스페인은 기승ㅈ....의 상황입니다.
스페인은 짱공 게시판에도 사건 하나가 조명되서 잘 알려져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스페인 노인 요양 시설에서 집단 사망자가 발생했다지요?
노인들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었는데, 의료진들이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수습도 못하고 죽어간 사건 말입니다.
그 요양시설에 음식물을 납품하던 업체 직원이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경찰 선에서 도저히 수습할 수가 없어, 군대에 시신 수습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비교적 덜 알려진 사실인데요. 날강두의 도시 마드리드에서는 도시내 아이스링크를 시신 안치소로 쓰리고 있다고 합니다. 시신을 소각해야 하는데 도시내 소각 시설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아, 그곳에 임시 보관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윽...... ㄹㅇ 이건 전시를 넘어서 지옥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 스페인은 특히 심각한 것이 “의료인의 감염”이 높습니다. 하루에 1,500명의 “의료진”감염이 발생하고 있어요.
이 이야기는..... 병원마다 하루에 적게는 1/3 ~ 많게는 1/2에 달하는 의료인들이 자가격리를 당하고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일이 잘 풀릴래야 풀릴 수 없는 대 환장의 사이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감염된 의료인 모두가 사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각을 다루는 전염병 창궐 상황에서 전염병이라는 적군과 맞서 싸워야 할 병사들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요.
독일)
독일상황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환자에 대한 검진은 그럭저럭 하지만 사망자에 대한 검진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망율이 낮다고 하지요. 그래도 유럽대륙에서 잘 막아내는 편이라고 해요. 하루 신규 확진자가 3,000여명 선이라고 합니다. 잘 막아내는게 이정도면.... 말 다했다고 보는게 맞겠네요.
여기에 추가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점들을 제시하자면,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을 경우, 우리나라는 1339 등을 이용하지만 독일은...... 무려 “팩스”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번호는 “단 하나”라고 합니다. 즉..... 독일 전역에서 벌어지는 코로나 감염을 집계하는 창구는 딱 하나라는 이야기죠.
일화를 하나 들자면, 독일에 한 학교에서 선생님이 코로나에 감염이 되어서, 이걸 보고하고 휴교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팩스를 돌렸는데..... 하루종일 해도 팩스를 보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선진국 독일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되는 순간입니다.
여담으로 하나를 더 이야기 하지면, 독일 베를린 법원에서는 최근까지 “윈도우 95”를 써 오다가 랜섬웨어에 의해 그간의 전자자료들이 인질로 잡힌 사태도 겪었다고 해요.
21세기가 된지 몇년인데 윈도우 95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스위스)
스위스는 최근에 감염자 수를 우리나라를 제꼈다고 합니다. 스위스 인구를 생각하면 (2019년 850만명) 엄청난 수치인 겁니다. 여기는 존엄사/안락사가 가능한 나라인데요. 코로나 19로 인해 최근들어서 유언을 남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해요. 예컨대 연명시술을 받을지 말지에 대해서 말이죠.....
코로나 공포가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터키)
여기는 이제야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승전결의.... “승”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누적 확진자가 3,000여명 정도인데, 하루 확진자가 1,000여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감염자수 증가가 30%라.... 이제 막 롤러코스터의 초입에 들어온 셈이지요.
영국)
영국은 떠오르는 신흥 감염국입니다. 이탈리아보다 2주정도 뒤쳐져서 따라가는 상황이지요. 영국 의료진은 그야말로 패닉 상태인데요. 마스크도 마스크지만, 방호복은 특히 최악의 상황입니다.
영국 최고 공공의료기관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 병원인) NHS에서는 방호복을 구할 수 없어서 경리 직원이 자기 돈으로 쓰레기 봉투를 200여장 사 온 뒤에, 거기에 구멍을 내서 “방호복”으로 사용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저번에 짱공에서 게시물을 올렸을 때 “메르켈 발언”을 영국 총리가 한 발언이라는 댓글이 나왔었는데요. 방송을 들어보니 영국 총리도 60프로 감염되야 이 일이 끝난다 라고 하긴 했었다고 합니다. 죄송해요.
어쨋건, 영국은 “집단 면역으로 이걸 극복하자”라는 상당히 병x같은 주장을 했고, 그래서 초기엔 “휴교? 안해!” “프리미어 리그? 열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제가 해외 축구는 몰라서 지금도 하는지는.... 팩트체크 부탁드립니다.)
어쨋건, 이런 행보를 보이자, 영국내에서 감염병 관련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학자분이..... 자기 직을 건 보고서를 냅니다. 보고서의 요지는
“영국 총리 마! 너 이따위로 하면 영국에서 최소 40만명은 죽어. 너 그거 감당 할 수 있겠냐?” 였습니다.
지금까지 코로나 감염자 대비 사망자 비율은 1%라고 해요. 영국 인구는 2018년 기준 6,600만명입니다. 이중에 70프로는 약 4,600만이지요. 그중 1%는 약 46만명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초중고등학교가 13,000여개가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로 치면 학교당 30명 넘게 죽어야 이 일이 끝날 거라는 다소 충격적인 보고서가 나온 거지요.
그래서 움찔한 영국은 그때부터 엉덩이를 질질 끌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쓰레기 봉지 방역복” 사태인 것입니다.
프랑스)
이후에 세계 여러나라의 상황을 언급하면서 이야기 하겠지만,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물자 사태”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프랑스도 감염자를 근절하기 위해선 손소독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손소독제를 대량 생산하도록 했다고 해요. 문제는.....
병원에 구비한 손소독제가 누군가에 의해 빼돌려지고, 빈 병에 물을 채워서 넣는 이른바 “가짜 소독제” 사태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한국에선 교회 사모가 소금물로 소독하다가 집단 감염이 됐다지만..... 이건 그냥 맹물 소독제라니. 한술이 아니라 몇십술 더 푸는 사태가 벌어진 셈입니다.
어쨋거나, 이대로 ㅈ될 수 없다고 판단한 프랑스는 샤넬에서도 손 소독제를 만들고 있다고 해요. 손 소독제 자체는 만드는건 쉬운데, 그걸 담을 병을 따로 구할 시간이 없던 샤넬은...... 자신들의 제품을 담던 향수병에 손 소독제를 담아서 병원에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엽게에서도 보셨죠? 구찌 마스크.... 그것도 이런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미국)
드디어 트럼프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팔 걷어부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선 검사의 자동화로 연구소 하나가 하루에 8,000여명씩 검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걸 감당할 의료 시스템이 존재 하냐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미국은 영국의 “쓰레기 봉지 방역복”까진 아니지만, 앞치마 식으로 두르는.... 즉, 앞만 가리고 뒤는 뻥하니 노출된.....우리나라의 D레벨 방호복에는 한참 모자라는 수준에 노출되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하나의 병크로 지목되는 것이..... 의료진의 리타이어를 막기 위해 의료진 중에 확진자가 나와도, 3일 지켜봐서 증상이 안나오면, 다시 현장에 복귀하도록 지침을 내렸다고 합니다.
미국의 병원.... 과연 안전할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의약품”은 현재, 인도의 감염자 확대로 인해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응? 대체 인도랑 뭔 상관이여? 하실 분들이 있을 텐데요. 후술할 인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인도)
인도는 이제서야 셧다운이 시작됐습니다. 기간이 좀 길어요. 3월 말도 아니고 4월 말까지 입니다.
힌두어를 필두로 엄청난 수의 언어들이 공용어로 인정받는 인도에선 “우리나라 오늘부터 셧다운 1일~” 이라고 전달 하는 것 마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세계 공용어 “바디 랭귀지”를 사용하기로 했답니다.
최근 짱공유 엽게 짤로 등장한, “사람 패는 인도 경찰” 아시죠? 인도에선 그런 식으로 셧다운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뚜까 패서 집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합니다.
아 그리고 미국을 언급하면서 앞서 말씀 드렸던, “인도의 셧다운이 미국 제약계에 큰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발언의 근거를 말씀드리자면
인도는 “제너릭” 즉, 복제약의 천국입니다.
미국에선 제약 회사들이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인도의 제약회사들에게 하청을 주고 있다고 해요. 어느정도냐 하면, 미국에서 유통되는 의약품중에서 인도산이 4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인도가 전국민을 뚜까 패가면서 가택에 몰아넣는 다면...... 미국의 의약품 사정은......
세계 각국의 현상)
이쯤되면 왜 대체 무엇때문에 못막나 싶을 텐데요.
저번 게시물에도 언급했지만, 집계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퍼져있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시기에 계절성 독감이 유행을 하니..... 코로나 감염자도 자신이 설마 코로나에 걸렸을 거란 생각을 못하고 병원을 방문한 것이지요. 이것의 근거가 바로 “지나치게 높은 의료진 감염”인 것이지요.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의료진들을 위한 “방호장비”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공정마스크로 배포하고 있은 kf-94마스크는 세계적인 희귀템이 되어버렸습니다. 의료진들은 kf-94는 꿈도 못꾸고 그냥 면 마스크를 쓰고 있습니다. 독일 마저도 그 면마스크에 이름을 주기해서 퇴근시 소독하고 걸어두고 간 다음, 익일에 출근해서 재활용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앞서 영국 사례에서 언급 되었지만 방호복 상황도 최악이지요. 쓰레기 봉투가 아니면 편의점에서 팔 법한 일회용 우비 조차도 방호복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정도니까요.
마스크를 더 이야기 하자면.... 마스크는 이제 세계 제일의 전략 물자가 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이탈리아에게 구호품으로 마스크를 보냈다는 뉴스를 엽게에서 접하셨을 텐데요. 이탈리아가 중국을 거쳐간 사람들 까지 일체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중국 직항 노선이 폐쇄되었습니다.
결국 마스크는 직접 날아가는 대신, 다른나라를 경유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체코에서 일이 터져버렸습니다.
체코 세관 당국이 마스크 70만장을 압류해 버리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이 일로 이탈리아와 중국이 동시에 체코에게 항의를 하니, 체코에선 “어멋 실수 미안해”라고 하면서
마스크를 10만장만 돌려주었습니다.
나머지 60만장은요? 라는 질문이 나올텐데요.
그건 짱공인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독일 같은 경우는 마스크를 60만장을 주문했는데요. 마스크를 싣은 비행기가 뜬금포로 케냐를 경유해 가더니...... 마스크만 증발해 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세상에, 버뮤다 마스크 지대도 아니고 말이지요. 마스크가 비행기만 타면 증발해 버리는 신묘한 현상이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판입니다.
프랑스는 아까 손 소독제에 대해서 언급하긴 했지만, 여기도 마스크에 대해서 병크가 터졌으니 언급을 안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프랑스도 온갖데에 수소문 끝에 마스크를 구했습니다. 그 소중한 “전략물자”인 마스크를 남미대륙의 프랑스령인 불령 기아나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이 소중한 “전략물자”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서 제일 엄중한 요새인 우주센터 핵심 시설에 보관을 해놨는데
누군가가 들고 튀었다고 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개판이 완성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보니, 마스크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고 해요. 우리나라에선 1,500원인 kf-공정마스크가 코로나 이전의 유럽에선 개당 69센트이던게 코로나 사태 이후론, 개당 18~20유로(개당) 그리고 암시장에선 30유로(한화 30,000원 가량)로 거래되고 있다고 합니다.
석유를 넘어서는 기축통화가 되려는 모양입니다.
또한 앞서 영국에서 언급한 “집단면역”이 얼마나 개소리인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집단 면역이라는 이름의 방치를 하게되면 과연 “코로나 감염자”만 죽게 될까요?
병원이 마비되면, 당장 수술이 필요한 사람들 + 신장투석이 필요한 사람 등, 기저질환이 있던 사람들은 의료시스템 붕괴로 죽을 수 밖에 없어집니다. 즉 안 죽을 수 있던 사람들도 시류에 희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와 감염된 나라 개많아 영국 이탈리아 어쩔? 유럽 ㅈ망이네 ㅉㅉ. 이란은 그리고 또 어쩐다냐?”하실 분들이 있을 텐데요.
이란의 감염자와 사망자수가 보여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이란이 중동지역에선 그나마 의료 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걸 반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미국/이탈리아/영국/스페인..... 이렇게 감염자가 나날이 늘어나는 나라들은 “세계에서 그나마 의료 시스템이 돌아가는 나라”들인 겁니다. 코로나 감염자 집계, 사망자 집계가 나오지 않는 나라들은, 그걸 집계할 의료 시스템 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들인거지요.
아프니까 -> 병원을 가고 -> 거기서 검사를 받고 -> 확진이 나고 -> 치료를 받거나 사망을 하거나 -> 수치가 기록 된다.
즉...... 세계적으로 안전지대는 없습니다. 그걸 드러낼 용기가 있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옆의 뉴클리어 몽키즈 같은) 들만 있을 뿐인거에요.
국뽕의 근거)
이제 세계가 이렇게 ㅈ됬다는 걸 알았으니, 왜 우리나라만 유독 이렇게 잘 해쳐나가고 있는가를 이야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현 대통령의 과감한 드라이브, 질본을 위시한 관료들과 의료인들의 헌신, 국민들의 적극적 협조가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도 나름의 기반이 있어야 작동을 하겠지요. 이젠 그 “기반”이 무엇이었는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저도 팟캐스트를 들으며..... 참 웃프구나 싶었습니다.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인식되던 것이
이런 재난 상황에서는 극복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것이 말이지요.
1 . 마스크 / 방호복에 관하여
영국 NHS의 사례를 들었지만 세계가 마스크와 방호복이 없어서 몸살을 앓는 와중에, 왜 우리나라는 유독 우주복 수준의 방호복을 갖출 수 있었던 걸까요?
방호복의 경우는...... 아이러니 하게도 “메르스” 덕분이었습니다. 메르스가 우리나라를 휘저어 놓으면서 얻은 교훈이었던 것이지요. 세계 여러나라는 괜찮을 동안 우리나라 혼자서 메르스에 쥐어터진 경험이..... 반대로 우리나라 혼자서 평온 하고 세계 여러나라가 코로나로 쥐어터지는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에서 새로운 것을 미루어 안다는 “온고지신”을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메르스의 뼈아픈 기억이 우리나라에겐 코로나의 예방주사가 된 격이지요.
메르스가 준 교훈을 더 들자면
선별 진료소의 필요성 / 검사 채취 / 음압병실 / 레벨 D 방호복이 되겠습니다.
마스크를 이야기 하자면, 우리나라는 유통되는 마스크 중에 kf-94, 95의 비중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나라입니다. (대만의 공정 마스크는 부직포 마스크)
왜 이게 가능했을까요?
웃프게도...... 중국발 미세먼지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연중 미세먼지를 보내다 보니..... 마스크를 쓰려는 사람이 연중 존재했고,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선 마스크가 꽤 큰 산업이 되어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마스크)제조업 기반이 있었던 것이.... 지금의 마스크 생산을 가능하게 한 셈이지요.
참고로 kf-94 마스크의 핵심 재료인 MB필터가 의외로 생산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근데 우리나라는 그걸 생산할 기술이 있었던 거지요. MB필터는 휴지나 애기용 귀저기에도 쓰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휴지 사재기가.....)
그럼 유럽은 생산 안해?라고 하실 분이 있을 텐데요. 세계화의 단점이 여기에서 발휘되었습니다. 유럽등은...... “귀저기 그 비싼 인건비 들여서 만드느니 그냥 수입하자” 한 거에요. 유럽에서 휴지를 만드는 회사는 스위스에 있는 것 하나 뿐입니다.
그동안은 서플라이 체인이 돌아가서 이상이 없었으나, 지금같은 비상 시국에는.... 무력화가 된 셈입니다. 우리나라는 화성, 안산, 포천등 각종 공단에서 “핫산”들을 고용해서 어떻게든 생산을 이어갔던 것이..... 지금의 화를 모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국내 외국인 노동자 분들에게 감사를 표해야 할 순간이지요)
2 . 의료 시스템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대하여 까는 분들은 참 많습니다. “미국 시스템과 유럽 시스템의 좋지 않은 것들을 모으면 한국 의료 시스템이 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지요.
암같은거 걸려도 제대로 보장도 안되는 한편
감기만 걸려도 병원가서 약받고, 나이롱환자들이 건강 보험을 갉아먹고, 간호사들은 살인적인 업무강도에 시달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의료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들이 이번 만큼은 우리나라를 구원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유럽은 의료 시스템이 선진적이라고 알려있어요. 병 걸려도 공짜로 다 치료해줘..... 참으로 부럽죠. 이번에는 그것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의료가 공짜가 되려면 그것을 “세금”으로 운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국자 입장에서 “효율적”으로 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정말 필요할 때만”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게 만들면 될 겁니다. 예컨대 복지국가로 알려진 스웨덴에선 내가 아프다 싶으면 “병원 간호사”에게 전화를 합니다.
목이 아파요 출근하기 힘들어요.
아 그래요? 한 삼일 쉬다 오세요.
통화 종료.
전체 시스템이....하루에 받는 환자수가 제한 되게 운용 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의료인력들이 고강도 업무에 취약합니다.
짱공인들도 보셨겠지만 이탈리아에 코로나가 번져갈 때, 간호사가 유튜브에 호소하는 동영상을 올렸어요. 거기서 뭐라고 했냐.....
“너무 힘들어요.... 하루에 자그마치 10시간 연속해서 이틀동안이나 일을 했다구요.”
9시 출근 -> 7시퇴근을 이틀이나 했다구요....잉잉 ㅠㅠㅠ
우리나라는 반면..... 코로나 터지자 마자 3일 밤을 새서 근무하셨습니다...... 당장 질본의 정은경 질본 본부장님만 봐도.....허..... 참 웃픈 일이지요. 혹사의 일상화가..... 지금 한국을 구했다는게 말이죠.
또한 3분 진료로 알려진 한국의 진료 시스템.... 감기만 걸려도 오는 환자들 때문..... 이런 이야기 자주 들어보셨을 텐데요.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에 의료인들이 익숙해지고 진료 체계가 갖춰지면서 “빠른 진단과 간호사들의 재빠른 처치.....”로 이어지는 효율적인 진단 시스템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허..... 이거 참 이것마저도 웃프네요.
거기에, 각종 질병에 대한 의료가 보장된다는건, 의사들이 공무원화 된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러다보니 능력이 있고 욕심있는 의사들은 돈을 잘 벌 수 있는 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우리나라는..... 왜 암이 보장이 안돼냐. 이런 각종 희귀 질환들이 왜 보장이 안돼냐 힘들다..... 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것들이 보장이 안된다는 건 그것으로 의사선생님들이 한국에서도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으로 연결 되어.....그로인해 상대적으로 실력있는 의료진의 해외 유출을 막는...... 크흡 ㅠㅠㅠ 이거 참.... 국뽕이라고 해야할지....
한편 나이롱 환자들도 아이러니하게 도움이 된 것이..... 그들을 입원 시키려면 어쨋건 병원이 존재해야겠지요. 그 비효율들이.... 전염병 창궐 상황에선 의료 시스템이 무너지지 않는 범퍼가 되어준 것입니다.
3. 의약품에 관하여.....
우리나라의 제약계는 물론 셀x리온 등이 신약을 개발한다 뭐한다로 잘 나가고 있지만 여전히 신약 개발에 뒤쳐진건 사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앞서 인도에서 말씀 드렸던 “제너릭”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생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또한 의약품 제조업 기반이 남아있는 덕분인 겁니다. 특히 화성시에는 아예 제약 산업단지가 자리하고 있지요.
화성시를 “살인의 추억”으로만 기억할게 아니라, 우리나라가 감염병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최고의 병참기지로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치며)
다소 두서가 없이 정리하여, 여러분들께서 읽는데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듭니다. 그래도 나름 정리한다고 한 건데, 죄송합니다.
국뽕의 근거 파트의 맨 처음에 언급했다 시피, 우리나라가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 “질본과 의료계의 헌신” 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것이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받쳐줄 것”이 없어선 안됐고, 그것이 아이러니 하게도
옆나라의 민폐, 한국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점들, 외국인 노동자등 소외자들, 빈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제조업 기반들 이었다는 것을 환기하고 싶었습니다.
타산지석이라고도 하고
새옹지마라도도 할 수 있을 것이고
외국의 종교 지도자가 말했던 “석수장이가 버린 돌이 건물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비유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 사회가 성공을 이루는데는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함께 시너지를 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고요.
이건...... 뭔가 광고 같아서 안하려고 했지만
엄연이 원전이 있으니 언급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남기자면
제가 정리한 이 글의 원전은 유튜브 “3프로tv”의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임을 밝힙니다.
갑과을작성일 2020-03-29추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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