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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고종의 황제퇴위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98년 전인 1907년
7월 18일의 일이었다. 이후 서울에선 민중 봉기(7월 19~20일)가 잇따랐고, 고종 퇴위(7월 20일, 일설은 22일)→군대 해산(8월
1일) 이후 일본에 대한 무장 항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당시 보름 동안을 상세하게 기록한 프랑스 시사주간지가 발굴됐다. 릴뤼스트라시옹(현 파리
마치의 전신) 1907년 9월 7일자 ‘서울에서의 사건들’이라는 기사다.
한국 관련 해외자료 발굴·수입 전문가인 윤형원
아트뱅크 대표가 최근 입수한 이 주간지에는 3쪽에 걸쳐 6장의 사진과 함께 1907년 7~8월 서울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객관적인 필치로
기록했다. “우리는 한 달 반 전 일본에 의해 진압된 서울의 쿠데타에 대한 사진과 기사를 아무런 첨삭 없이 공개한다”로 시작되는 이 자료에 대해
이태진·이상찬 서울대교수(국사학) 등은 “1907년 7~8월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새롭게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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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의 발굴은 그간 사진 속의 상황에 대한 시기와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던 역사적 사건들을 명확히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 예로,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희생된 의병들에 대한 기록으로 알려졌던
사진(맨 위 사진)은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 직후 일제에 항쟁하다가 사망한 조선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바로잡게 됐다. 또 지금까지
고종의 이름(臣 巳火)을 ‘형’으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해왔지만 이 잡지에서 ‘Yi-Hyeung’이라고 표기, ‘형’이라고 읽었음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릴뤼스트라시옹은 ‘현장 취재기’에서 일본의 고종 퇴위 요구와 이어진 고종의 양위, 항의 시위, 군대 해산에 이은
무력항쟁을 ‘조선의 쿠데타’라고 명명했다. 기사는 군대 해산에 저항했던 조선군인들의 영웅적 투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글을 맺고 있다.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용감한 주검들은 서울의 동쪽 대문(광희문) 밖으로 내버려졌다. 평화롭지만 애국적인
한국인들은 침략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이어갈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승리를 되새길 것이고, 반드시 봉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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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용감한 주검들은 서울의 동쪽 대문(광희문) 밖으로 내버려졌다. 평화롭지만 애국적인 한국인들은 침략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이어갈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승리를 되새길 것이고, 반드시 봉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