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7분,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침대 위에서 계속 뒤척이다가,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버렸다.
마음 같아선 병원 밖으로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지만, 현재 몸 상태가 최악일뿐더러 날씨 역시
무척 쌀쌀한 게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그렇다고 누워서 자자니 잠도 오지 않고, 시계만 몇 번째 들여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서는 베개 옆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문자 메시지를 확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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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3:59 a
오빠..나술마셨어
그냥속상하고짜증
나서..잘했지?ㅋ
아프지말고건강해
-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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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 그녀에게서 날라 온 문자였다.
그 전날이 3월 14일 화이트 데이. 훗..
그랬다. 우린 화이트 데이날 함께 여행을 가기로 약속까지 했었는데..난 지키지 못했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문자메시지를 받던 그날에도 병원에서 항암 치료의 후유증과 싸우며 무척 괴로워하던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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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10:57 p
메일보냈어.도대체
전화는왜안받는거
야?
-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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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에서, 그녀는 너무 힘들다고 했다. 너무 힘들어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냉정하게도..그 메일을 읽으면서까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침묵을 지키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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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3:34 p
벌써 8월이야. 살아
있는거니?
-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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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때 난 뭘 하고 있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무려 석 달여 만에 날라 온 그녀의 문자메시지에 무척 설렜던 기억만 난다.
그녀가 아직까지도 날 잊지 않았음에 기뻐하면서도, 가슴속으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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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 1:34 a
미안해.전부미안해.
나 더 이상은...
오빠. 잘지내야돼.
-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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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서 온 마지막 문자메시지..
미안하고, 잘 지내라는 내용.
아마도 그녀는 이때쯤 새 남자친구가 생겼었나보다.
웃었다. 밝게 웃었다. 거울을 보며 내 자신을 향해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소리쳤다.
어차피 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몸으로, 이렇게 썩어가는 몸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그녀 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 마지막을 아름답게?? 훗. 어디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들.
현실은 다르다. 난 완전 미치광이가 되어간다. 하루에도 가족들 앞에서 수십 번씩 짜증을 낸다.
별것도 아닌 걸로 짜증내고, 울고, 소리 지르고, 계속 우울해하고, 물건들 집어 던져버리고..
지금 이런 내가 그녀 앞에 나타나서 뭘 어쩐단 말인가?
난 그녀 앞에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기억들은 이제 추억으로 남겨야 한다.
홍대 어느 2층 bar에서 함께 했던 생일 파티도, 클럽에서 둘이서 마주보며 수줍게 춤을 추던 기억도,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을 켜놓고 서로의 와인 잔 부딪치며 미소 짓던 것도,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며
행복해하던 것도..
이제 이 모든 게 추억으로 남는 거겠지?
모든 것들이..
문자 메시지를 다 읽고 나선..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는 그때그때 확인을 하고 삭제를 하는데..
그녀에게서 온 문자메시지는 하나도 지우지 않고 여태껏 보관을 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말 부질없는 짓이었는데 말이다.
-선택한 메시지를 삭제중입니다.
...................
핸드폰을 툭 던져버리고는 다시 침대위에 누웠다.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들어온다.
“어라 안 주무셨네요~?”
깨어있는 날 보더니 약간 당황한 표정의 간호사, 내 쪽으로 다가온다.
병실 안이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난 그녀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김간호사의 목소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름은 모른다. 그저 동료 간호사들이 그녀를 향해 김샘~ 김샘~ 하고 부르는 걸 우연히 듣고선
알게 된 사실이였다.
그녀에 대한 이런 구질구질한 정보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이유도, 그녀가 병동 내에서 가장 예쁘
고 인기가 많은 간호사로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는 나랑 전혀 친하지 않다는 거~
다른 환자들은 김간호사랑 친해지기 위해 생쇼를 다부리던데..난 그렇게 해서까지 관심을 얻긴 싫었
다.
아무리 병원에서 이러고 사는 환자라지만...스물일곱의 자존심, 아직 무너지진 않았다 -_-
“이동훈님. 혈압 체크 좀 할께요.”
하루의 시작은 항상 간호사들의 혈압체크로 시작된다.
내 팔에 청진기를 묶고는 공기를 주입하는 간호사.
아....근데 무슨 향기가 나는 데....이건??
간호사 쪽에서 향기가 난다. 아주 좋은 향기가...
열심히 내 혈압을 체크하던 간호사..
어느새 체크가 끝났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얘기한다.
“어라 동훈씨. 혈압이 60에 40으로 많이 낮네요. 혹시 머리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괜찮았어요.”
난 간호사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음..그러면 혈압이 낮으니까 이불위에 다리 좀 올려놓고 있으세요. 많이 해보셨죠?”
하고 내 얼굴을 스윽 올려다보던 간호사,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내 눈과 마주치자 얼굴을 붉힌다.
“에..왜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
“아니 그건 아니구요. 그냥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뭔데요?”
“혹시 샴푸..케라시스 쓰세요?”
그 말에 깜짝 놀라는 간호사였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남자들 대부분이 잘 모르던데..”
“아. 그냥요.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 아무튼 그럼 오늘도 숙~”
“네? 숙이 뭐예여??”
“아, 그, 그게...수고하라는 말을 줄여서...하하..ㅈㅅ;;”
“잉..ㅈㅅ은 또 뭐예요..?”
넌 집에서 컴퓨터도 안 하니?! -_-+
아니면..내가 많이 하는 건가?
그렇게 간호사를 향해 웃어주곤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누워서 병실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나.. 언제부턴가 케라시스 향에 너무 민감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부탁 하나만 할 게요. 우리 오빠 옆에서 잘 보살 펴 주세요. 나 아니면 이렇게 찾아올 사람도 없거
든요.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어요..그쪽은 어떨지 모르지만. 후훗. 잘 자요. 리버풀 작가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는 그 말. 진심이었을까? 그냥 인사치레로 해본 말은 아니었을까.
하긴 아무려면 어떤가. 어찌됐든 간에 신경 쓸 거 없잖아?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마주볼 수 없는..다른 세상 속이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바닥에 있는 슬리퍼를 신었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이나 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일어서자마자 내 몸은 휘청거렸고, 현기증이 몰?都?
“어라 동훈씨. 혈압이 60에 40으로 많이 낮네요. 혹시 머리 어지럽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간호사가 내게 했던 충고가 이제야 피부로 와 닿는다.
마치 머릿속에 벌레 한 마리가 들어가 주변을 계속 도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난 단지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이게 뭐야. 이런 별것도 아닌 움직임조차 내 뜻대로 이행
할 수 없는 이 몸이 너무나 저주스럽다..
앞으로도 내 앞엔 더 큰 벽들이 가로막고 설 텐데.. 그럼 난 또 그때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겨
내야 할 텐데..
자신이 없다. 점점 자신이 없어져간다.
-노트북-
친구가 찾아온 건 오후가 되어서였다.
병실 안으로 들어와 날 보면서 웃음부터 터트리는 이 친구..
범생들이 주로 끼고 다니는 은색 안경에, 눈썹까지 내?윱?앞머리, 순하게 생긴 얼굴.
그의 이름은 서기다. 6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커온 나의 20년 지기 친구...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녀석이고, 심지어 날 낳아준 우리 부모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녀석이기도 하다.
우린 항상 붙어 다녔던 것 같다.
그 이유인 즉, 뭐 뻔한 거 아니겠는가? 둘 다 항상 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_-;
내가 여자가 없는 이유야 뭐 대충 그렇다 치고..
독자 - 대충 그렇다 치긴 뭘 쳐? 확 싸대기를 치뿔라..-_-
녀석은 얼굴도 호남 형에, 키도 180cm로 적당하고, 전공도 [영어] 인지라 여자들과 만날 계기도
분명 꽤 있었을 텐데..왜 아직까지 여자 친구가 없는 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 사실 이해는 된다..-_-;
서기는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날 마주보고선 말했다.
“담당 의사가 너 컴퓨터 하러 1층까지 내려가지 말라며?”
“응.”
“그럼 너 어떻게 사냐?ㅋㅋ 컴퓨터랑 인터넷 없으면 못 사는 찌질이가?”
또 시작했다. 서기는 항상 오자마자 시비부터 건다.
나의 취약점이나, 감추고 싶은 부분, 숨기고 싶은 부분을 사람들 앞에서 어김없이 들춰낸다.
“너 또 오자마자 짜증나게 한다? 적당히 해라.”
하고 녀석 앞에서 짜증을 내보는 나.
그리곤 얼굴도 마주하기 싫다는 것처럼 고개를 tv쪽으로 휙 돌려버린다.
“아 새끼. 장난 한 번 쳐본 거 가지고 또 왜 그래? 사람 존나 무안하게시리..”
“....................”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항상 하던 장난 인데..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을 일인데..
아픈 뒤부터 신경이 너무 날카로워지고 예민해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서기의 행동과 장난에 벌써 몇 번째 화를 내고 짜증을 낸 건지 모르겠다.
난 그게 항상 마음에 걸렸고, 서기에게 미안했다.
친구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기는 또 왜 이렇게 힘든지.
“야 너 오늘 나한테 존나 고마워해야 될 거다. 내가 특별히 널 생각해서 가져온 게 있거든.”
“뭔데?”
어느새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우리.
물론 이 모든 건 서기가 나의 짜증을 잘 받아주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줬기에 가능한 일 일거다.
“쨘~”
하는 소리와 함께 서기가 나에게 내민 것은.....
“야 이건??”
“좋냐? ^^”
그랬다. 서기가 나에게 내민 건 노트북이였다.
“이걸 갑자기 어떻게?”
“아~ 이거..나 공부할 때 쓰던 건데..시험도 끝나고 이제 쓸 일도 없을 것 같아서..이녀석은 지금 자신
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
“너 주는 거니까, 쓰고 싶은 글이 있으면 여기서 마음껏 써라. 너무 무리하진 말구. 알았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 친구.
정말 난 미친놈 같다. 툭하면 짜증내다가..어느새 또 이렇게 눈물을 머금고 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친구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참 힘든 것 이지만..고맙다는 말을 꺼내기도 만만치 않다는 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갤 푹 숙인 채 노트북만을 쳐다보고 있는데..
“친구한테 고맙단 말 좀 해라.”
옆에서 tv를 보던 병태 아저씨가 나의 팔을 툭 건들며 그런 말을 했다.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야. 이렇게 아프고 힘들 때 옆에서 있어 주는 친구..진짜 몇 없다.
니 진짜 좋은 친구 뒀네. 어서 고맙다고 해라. 어서!”
밝게 웃으며 나에게 어서 말을 하라고 강요하는 병태 아저씨.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서기도 한 마디 거든다.
“봐라. 들었지? 어서 나한테..”
“넌 좀 닥치고 있어 주겠니??”
“어? 어..그러지... -_-;”
다시 고개를 숙여서는,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정성스레 노트북을 만지다가 서기를 향해 물었다.
“컴퓨터 속도는 빵빵하겠지?”
“씹새끼 진짜..-_-”
컨셉인 걸 알지만...표정이 심하게 굳어지는 서기였다.
“하여튼 니는..*노마. 인간의 새끼가 양심이 없어요~ 양심이. 누가 생각해서 이런 걸 해주면... ”
“고맙다.”
“에? 뭐라고?”
“못 들었으면 끝.”
“야!!!!!!!”
노트북을 켰다.
부팅 하는 소리가 들?육? windows xp화면이 뜬다.
그때부터 내 입가에 맴돌기 시작하는 웃음..
“이새끼? 웃는다? 너 지금 웃는 거지? 그렇지??”
이럴 줄 알았다. 이래서 이 녀석이 짜증난다는 거다.
이럴 때 입 좀 닥쳐주면 참 고마울 텐데..
“엥간히 좋은가보다?? 좀 전까지 짜증내고 아주 생쇼를 하더니..컴퓨터만 켰다하면 애가 죽어요~”
여기서 독자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얘기하지만...나 그렇게까지 컴퓨터에 미친놈 아니다-_-;
다만 그때 내 상황은 참으로도 절박했었기에..그랬다는 것만 알려주고 싶다.
특유의 배경음악 소리와 함께 윈도우즈 바탕화면이 뜬다.
그러자 서기가 손에 마우스를 쥐고는 뭔가를 클릭한다.
“보여줄 게 있다. 잘 봐. 내가 너 글 쓰다가 스트레스 풀라고 게임도 저장해놨지롱~”
그런 서기를 향해 말했다.
“음. 서기야. 너 있잖아.”
“응?”
“다 좋은데 말이야. 뭐 했지롱~ 이런 말투 쓰면 노트북으로 대가리 찍어버린다. 알겠지?”
“음..그래. 생각해보고..-_-;;”
잠시 후, 노트북 화면에 게임이 실행이 되어 지고, 입에선 “아..” 하는 탄성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아주 익숙한 이 게임 화면은??
지도, 그리고 소설책과 만화책에서 자주 보던 이름들..
유비, 조조, 손권..
그랬다. 그 게임은 삼국지2 였다.
아주 예전에 koei사에서 만든 게임으로..386컴퓨터를 쓸 때..한창 즐겨했던 게임이였다.
녀석은 날 놀려먹고 싶었던 건가?
"난 또 무슨 게임인가 했네. 지금 이런 걸 누가해?”
하지만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우릴 계속 지켜보던 병태 아저씨가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어라 이거 삼국지2 아냐?”
-_-..?
“이야 이거 진짜 재밌겠다. 너희들 모르지? 나 예전에 이 게임 때문에 매일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컴퓨터 하다가 집에서 쫓겨날 뻔 했잖아. ㅋㅋ 근데 그 오래된 게임을 여기서 다시 보네..이야..”
“.................”
“5번에 1번에 10번에 2번..너희 이게 뭔지 아냐??”
“아뇨.”
“천하장수 여포를 꼬시는 명령어의 순서잖아. 하하하..”
이 아저씨. 보기와는 다르게 은근히 상태가 안 좋다.
케라시스 같은 그 아름다운 애인을 두고선, 뭐가 5번에 1번이고, 뭐가 여포 꼬시는 명령어란
말이더냐?
그런 아저씨의 갑작스런 행동에 난 벙찐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서기 역시도 꽤나 당황한 표정이
였다.
“전 당장 컴퓨터 쓸 일은 없는데..게임하실 거면 아저씨가 컴퓨터 쓰실래요?”
별 생각 없이 꺼낸 그 말 한마디에..
그가 저녁이 되도록 노트북만 붙잡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더랬다..-_-;;
창밖을 보니 날이 벌써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서기가 옷을 챙겨 입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아. 나 슬슬 일어날련다.”
그런 그를 보며 물었다.
“갈려구?”
“너도 피곤할 거 아냐? 잠 좀 자둬라.”
“아니. 야 잠깐만.”
“왜?”
“사실은...”
말을 하다 말고, 서기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였다.
“너한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는데...”
그러자 분위기 파악 못하고 큰 목소리로 떠드는 서기.
“누군데? 여자야?”
“야 미친색기야. 조용!”
옆에 있는 병태 아저씨를 살짝 쳐다보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노트북에 너무 몰입이 되어 있어 그런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다시 서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여잔데..진짜 괜찮은 사람 같아서 말이야. 혹시 내 눈이 착각을 일으킨 건지, 나만 이렇게 느끼
는 건지 그게 궁금해서..”
난 정말 그게 궁금했다.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남들도 나처럼 이렇게 느끼는 건지..
그녀만 보면 숨이 콱 막혀오고 두근거?육?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병실 안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드는 게 나만 그런 건지..정말 너무나 알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그 감정을 밝혀낸다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그의 연인으로서 끝까지 변치 않을 것이고, 난 항상 이렇게 그녀를 기다리고 가슴속으로만
애태우다가..모든 상황은 끝이 나버릴 것이다.
“아는 애냐?”
슬그머니 관심을 갖는 서기.
“아는 사람이냐고?”
나야 말로 내 자신에게 묻고 싶다.
그녀와 나는 아는 사이가 맞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사이인 걸까..?
“글쎄.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대화를 잠깐 나누긴 해봤는데...뭐 한 가지 확실한 건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지.”
“이런 미친..그럼 도대체 나한테 왜 소개를 시켜주는 건데? -_-”
“야 그러지 말고 진짜 부탁이다.”
“아씨.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아무리 골키퍼 있어도 골 들어가는 세상이라지만..지금 니 꼬라지를
봐라. 골이 들어가겠냐?”
“..................”
“알았다. 알았다고! 그래서 걔가 언제 오는데?!”
“음..한 11시쯤? 11시 좀 넘어서 올 거야. 항상 그때쯤 왔으니까.”
그랬다. 그녀는 항상 11시 이후에 병원을 찾아왔다.
겨우 두 번 밖에 못 봤지만 그녀의 인상은 내 머릿속에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서..긴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동훈아. 컴퓨터 그만 가져가라. 아따~ 징하게 했네. 유비로 해서 통일 거의 다 시켰다.”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병태 아저씨.
“유비로 하면 천하통일 금방 하죠. 신군주로 해보세요. 신군주로 하면 난이도가 어?熾?”
“아..그러냐? 그럼 내일은 신군주로 해봐야겠다. 하하..”
어차피 그 멘트는 낚시멘트였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근데 아저씨. 그 여자분 있잖아요..”
“응? 여자라니? 누구 말 하는 거야?”
“아니 어제 병문안 왔었던 그 여자분...”
“아아. 걔? 걔가 왜?”
“그러니까 지금 제가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절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구요..”
“..벌써 이상하게 들리려 한다. -_-”
“혹시 그 여자 분이랑 무슨 사이세요?”
그러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병태 아저씨.
“여자친구.”
“지, 진짜요? 하하...너무 아름다운 커플이시다..”
아름다운 커플은 개뿔...;;
“뻥이고..실은 내 친동생이야.”
“에?”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뭐가 에야?”
“아, 아뇨. 그냥..아 갑자기 머릿속이 어지럽네. 아아.. 정신 좀 차려야지!”
모르겠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아 갑자기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지금 이 순간 확실한 것 한 가지는 나 지금 무지 오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크흐흐. 짜식. 넌 걔가 내 애인인 줄 알았나보다? 왜 얼굴 보면 여기저기 많이 닮았잖아.”
“전혀요..-_-”
“지금 그 말..칭찬이야? 욕이야?”
“...............”
10시 정각. 그녀가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남았다.
낮엔 살짝 찌르듯이 아프던 엉덩이 쪽의 통증이 밤이 되자 엄청난 고통을 몰고 왔다.
담당의는 치질이라고 확신했었는데, 난 절대 아니라고 부정했었다. 왜 부정했을까?
이미 간 전체에 암세포가 쭉 깔린 새끼가..그깟 치질 한 번 걸린 게 뭐가 부끄러워서??
좌욕을 하라던 담당의의 말을 그냥 무시했더니..지금 그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아 어떻게 해야 되지? 정말 병원에서 좌욕까지 해야 하나?? -_-;
통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침대 밑에 있던, 세숫대야를 챙겨들었다.
그러자 옆에서 tv를 보던 서기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묻는다.
“그거 들고 어디갈려고?”
“좌욕 좀 하러 갈까 해서..”
“풉. 너 치질 걸렸냐? ㅋㅋㅋㅋ”
순간 녀석의 그 말에 병실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쪽을 쳐다본다.
“인정할게. 미안..;”
아나..진짜 이 새끼는 개념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무튼 난 좌욕하러 갈 테니까..니가 병실 좀 지키고 있어.”
하지만 그때 옆에서 들?윱?병태 아저씨의 목소리.
“야. 좌욕 할 거면 따뜻한 물 받아놓고 병실 안에서 하면 되지, 추운데 뭐한다고 화장실까지 가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 침대에 있던 어떤 아주머니께서도 그 말을 거든다.
“맞다 총각! 뭐가 부끄러워서 그래요? 여기 이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이래봤자 전부 아버지뻘이
고, 어머니뻘인데..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여기서 해요.”
옆에 있던 서기까지 거든다.
“맞다 맞다. 커텐 다 치고 침대 위에서 하면 되겠네.”
“넌 아가리.”
“응. 미안.;”
어떻게 해야 하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몹시 고민하고 있는데..
맞은편 쪽에 있던 아주머니께서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씀하신다.
“총각. 어차피 병원은 다 낫고자 오는 거 아니가? 치질은 누구나 다 걸리는 병인데..뭐가 부끄러
워서 이러나? 내가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 받아서 줄 테니까..커텐치고 침대위에서 볼일 봐라.”
“...........그, 그래도..”
“아니 좌욕을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나을 때까지 계속 해야 될 텐데..그럼 매일 화장실 가서 고생
할 거야?”
“..............”
“그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이 아줌마 말대로 하그라.”
그 말을 끝으로 세숫대야를 가져가버리는 아주머니...-_-
아 큰일이다...정말 이 안에서 해도 되는 건가??
사실 아주머니 말씀대로 여기 병실 안에 있는 사람들 앞에선 부끄러울 게 없었다.
매일 보는 사람들이고, 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기에.
하지만 혹시 간호사라도 병실 안에 들어오게 된다면......?
커텐치고 뭐하냐고 물어보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아 모르겠다. 어차피 몇 분만 할 텐데..마음 굳게 먹고 얼른 끝내버리자.
잠시 후 아주머니께서 뜨거운 물이 담긴 세숫대야를 침대위에 올려놓자, 서기가 ㅋㅋㅋㅋ 하고 지랄
같이 웃으며 커텐을 친다.
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비록 커텐이 쳐져 있어 아무도 지금 내 모습을 볼 수 없다 하여도, 병실 안에서 엉덩이를 까고 좌욕
을 한다는 건...보통 쉬운 일이 아니였다. 참 많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갈 때까지 가버린 이 빌어먹을 몸인데..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혹여 병실 사람들의 귀에 바지 내리는 소리라도 들릴까봐 아주 조용히 환자복 바지를 벗어내렸다.
그리곤 뜨거운 물에..엉덩이를 푸욱 담궜다.
아 * 진짜 쪽팔려..ㅠ_ㅠ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나와 달리 병실 안은 무척이나 조용하다.
볼륨을 낮춘 tv소리가 여전히 멀리서 들?육?있었고, 보호자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그렇다. 나만 아무렇지도 않게 이 상황을 넘겨버린다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3분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난 이쯤 했으면 됐다는 생각에 슬슬 바지를 올려 입으려던 찰나
였다.
“안녕들 하세요~”
이 목소린....?
옆 침대에 있던 병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쨈?
“어라 오늘은 일찍 왔네?”
..........................
.......................................................
............헐.............
...이건 본드걸이 아니라 내가 죽었다..*;
..계속.
written by lovep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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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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