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세력의 성공과 실패
민주주의(democracy)의 어원에는 지방사람(demo-)들의 통치(-cracy)라는 뜻이 있다. demo-는 흔히 민중으로 해석되지만 본뜻은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de-) 지역 사람이라는 뜻이다.
※ demos의 인도유럽어근 de-는 divide의 의미로 endemic, epidemic, dealer 등의 어휘에 흔적이 남아있다. dealer가 ‘나눠주는 사람’을 의미하듯 demos는 나눠진 지역사람, ‘나눠진 개인’의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 원래는 왕이 다스렸다. 전쟁이 일어나자 왕이 군대를 소집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전쟁이 끝났는데도 왕궁 앞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는 이유는 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왕조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일으켰다. 그들은 지방 여러곳에서 몰려왔기 때문에 서로 풍속이 달라서 의사결정이 어려우므로 부득이하게 회의체를 구성하고 참여자 모두의 동의를 구하는 민주적 절차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 demos는 중앙에 몰려있는 민중, 군중, 집단이 아니라 반대로 그 중앙의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즉 낱낱이 나눠진 지역, 조각조각 나눠져 있는 개인을 의미한다.
흔히 다수결이라고 한다. 다수에 의한 지배라고 한다. 그러나 가짜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교육받아왔다면 권력의 계략에 걸려든 것이다. 속았다. 민주주의의 진짜 의미는 개인들의 연대, 소수파의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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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 친구의 공납금 몇 천원을 훔쳤는데 담임이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을 딱 지목하더니 다짜고짜로 불러내서 죽도록 패더라는 거다.
담임은 그 사람이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렇다. 편견이다. 편견이 우연히 적중했던 것이다. 담임 입장에서는 쓸모있는 편견이다. 편견의 유효성이 존재하는 한 편견은 소멸되지 않는다.
그 분은 그 사건을 계기로 크게 깨닫고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살아왔으며 지금껏 남의 물건은 털끝하나 손을 안댔다고 했다. 이런 이야기를 그저 들어서는 안 된다.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문제다. 고아는 소수파에 속한다. 다수파의 잘못은 해결하기 어렵지만 소수파의 잘못은 해결하기 쉽다. 몽둥이로 패면 된다. 소수파는 그냥 배제하면 된다. 득달같이 달려와서 항의할 친부모도 없으니까.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자. 재일교포가 일본의 관습을 지키지 않으면 어떨까? 일본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귀엣말로 수군수군 한다. 그렇게 수군수군으로 형성된 마을의 공론은 그 재일교포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재일교포를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낀다. 그 좌절감이 환멸로 발전할 때 물리력으로 제재하는 쉬운 방법을 쓰게 된다. 마을에서 내쫓아버리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차별로 나타난다.
이런 류의 배타성은 한국에도 많이 있다. 아직도 시골마을에는 ‘각성받이’라는 것이 있다. 씨족촌에 성이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이장자리도 내주지 않는다. 동네사람이 다 한 통속이 되어서 여러가지로 괴롭히고 차별한다.
문경은 신씨, 예천은 황씨, 영주는 박씨가 거의 주름잡는다. 안동은 권씨가 상석에 앉고 경주는 김씨가 해먹는 걸로 되어 있고 하는 식으로 대략 정해져 있다. 이런 관습은 깨기 어렵다. 아직도 순흥에는 차별받는 백정마을이 있다. 이웃동네 사람과 결혼을 못한다. 지독한 수구 관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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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영 딜렘마! 표피만 보고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누구도 까고 싶지 않은, 쳐다보기도 싫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본질의 문제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표피를 논함은 허무할 뿐이다.
왜 dj는 수 십년간 대통령이 될 수 없었는가? 빨갱이? 친북좌익? 이건 표피의 구실이고 본질은 따로 있다. 진보냐 보수냐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가 아니다. 본질은 다수파와 소수파 사이의 의사소통의 문제다. dj가 소수파인 호남출신이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가 된다. 박정희도 빨갱이 출신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좌익전력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왜? 경상도 출신이니까.
dj정권에서 별 것도 아닌 옷로비가 왜 문제로 되었는가? 털어보니까 아무 것도 안 나왔는데 왜 그 때문에 지지율이 추락했고 또 한번 추락한 지지율은 진실이 규명된 후에도 왜 다시 복구되지 않았는가? 비리 그 자체를 문제삼는게 아니다. 한국 사람들은 원래 비리에 관대하다. 이명박의 시리즈 비리에 비하면 옷로비는 별 것도 아니다.
그 이전에 한광옥이 구로을에서 50억 썼다는 보도가 문제로 되었다. 옷로비는 작은 것이고 문제는 구로을 보궐선거 전후로 여당이 하는 것을 보고 ‘아 저 사람들은 정권을 저런 식으로 하는구나’ 하고 낙인을 찍어 버린게 원인이다. 근본적인 소통의 장벽이 있다. ‘저 사람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하는게 문제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의견을 반영시키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버리는게 문제다. 특히 그 대상이 소수파일 때 문제가 된다.
다수파의 비리는 다 함께 잘못한 것이니 함께 반성하고 조금씩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명박의 비리는 다 같이 잘못한 것이니 함께 고민하면 된다고 여긴다. 소수파의 비리는? 배제라는 편한 방법이 있는데 왜 함께 그것을 고민해?
왜 이러한 본질의 문제에 대해 긴장하지 않는가? 왜 이것이 소수파의 문제라는 본질을 꿰뚫어* 못하는가?
dj정권 말기에 많은 비리사건이 일어났다. 구속된 사람이 수 십명이다. 그 비리는 왜 일어났는가? 호남사람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비리가 일어났는가? 오해다. 비리와 호남은 관계가 없다. 그런데 누가 그 오해를 풀어줄 수 있지? 비리라곤 모르는 노무현이다. 오직 노무현만이 호남의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다.
그렇다. 호남은 ‘호남이 집권해도 비리가 일어나지 않더라’는 증거를 원했다. 그런데 고건이 총리에서 물러난 후 참여정부=호남정권이라는 본질이 희석되었으므로 ‘호남이 집권해도 비리가 없더라’는 반대증거를 만들 기회를 호남은 잃었다. 억울함을 풀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등을 돌린 것이다.
정동영은 권노갑을 씹어서 떴다. 정풍운동을 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호남에 정권을 줬더니 저 사람들이 정치를 저런 식으로 하는구나’ 하고 환멸을 느껴 등을 돌리고 돌아섰을 때 ‘그 모든 비리의 주범은 권노갑이다’ 하고 특정인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그러자 여론이 변했다. ‘비리주범 권노갑이 사라졌으니 이제 저 사람들이 정권을 저런 식으로 안하겠구나. 그렇다면 우리 의견을 반영시킬 수 있겠구나’ 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결과가 우리당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다.
그랬더니 정동영이 총선에서 공천을 말아먹었다. ‘어라? 정동영도 딱 권노갑 스타일로 정치하네’ 이렇게 된 것이 우리당 몰락의 원인이다. 정풍운동 해서 뜬 정동영이 탁풍정치 한 시점에 우리당은 사실상 파산선고를 받은 것이다. 물론 호남사람들도 할말이 있다. ‘노무현에게 정권 내줬더니 친노386 저 인간들이 정치를 저런 식으로 하네. 저기에 내가 낄 자리는 없겠네. 내가 잔소리 해봤자 씨도 안먹히겠네.’ 하고 돌아섰다. 피장파장이다.
정동영은 호남출신이다. 그리고 호남은 소수파다. 소수파의 핸디캡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고아출신의 그분은 왜 이를 갈고 그때부터 남의 물건에는 손끝하나 대지 않았겠는가? 왜 정동영은 그러한 자신의 약점을 깨닫지 못하는가? 온 세상이 다 비리로, 조직으로, 패거리로, 동원으로 개판으로 하더라도 호남출신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운명적으로 소수파의 멍에가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친노386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온 세상이 다 조작하고, 협잡하고, 뒤로 사바사바해도 노무현 측근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기명, 명계남, 염동연, 이강철, 안희정, 이광재, 문성근, 노건평, 강금원, 문재인.. 이분들은 운명적으로 소수파의 낙인이 찍혀져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 그 고아출신과 같은 운명이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소수파의 문제는 ‘배제’라는 편법이 있고 그 편법이 자신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어떻게 했나? 희희낙락이었다.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자신이 천길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필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직후 ‘노건평씨는 청와대 경내에 가둬두라’고 썼겠는가? 이건 경고였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다들 안이했다. 칼날 위에서 깨춤을 추었다. 왜 자신의 발에 채워진 족쇄를 * 못하는가? 왜 그렇게도 철이 없나?
왜 사람들이 이명박의 비리에는 관대한가? 다수파 출신인 이명박은 공론과 평판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일본인들끼리 우물가에서 수다를 떨며 공론을 조성하여 그 사람이 속한 가문의 평판과 위신을 떨어뜨리는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재일교포는 말이 안 통하니 통제할 수 없다. 풍속이 다르니 통제할 수 없다. 가문이라는 것이 없으니 통제할 수 없다. 소수파는 통제할 수 없다. 고아는 통제할 수 없다. 아니 통제할 필요도 없다. 그냥 배제하면 되는데 뭣하러 힘들게 통제해? 부모없는 고아는 죽도록 패면 되는데 왜 힘들게 설득해?
명백히 이중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중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고 항의해봤자 허무할 뿐이다. 그 담임선생이 단지 그 분이 고아라는 이유만으로 편견의 색안경을 끼고 급우의 공납금을 훔친 범인으로 지목했고 그 방법이 실제로 통했듯이 ‘소수파는 배제하면 된다’는 편리함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울역앞 노숙자는 형제복지원에 잡아가둬 버리면 간단히 해결된다. 전과자 문제는 청송보호감호소에 가둬버리면 간단히 해결된다. 장애인은 건물마다 턱을 두어서 휠체어가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면 해결된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항의하면? 518 학살로 겁주면 된다. 전두환은 이 사악한 방법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이 소름끼치는 방법이 실제로 현장에서 먹혔다는 말이다.
이 나쁜 방법이 실제로 현장에서 먹히는 한 우리가 논쟁만 가지고는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죽어도 소수파의 연대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오직 이 하나의 방법이 있을 뿐이며 그 외에는 희망이 없다. 세상의 모든 약자들과 소수파의 단결을 이끌어내야 한다. 먼저 자신이 힘 없는 소수파에 속한다는 사실을 절절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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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파의 핸디캡이 있다. 그 사실을 인정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긴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동영은 어떻게 했는가? 친노386들은 또 어떻게 했는가? 이광재, 안희정, 이기명, 명계남, 이강철, 염동연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당은 그래서 망했다. 그런데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소수파의 약점이 있는 만큼 반대로 소수파의 장점도 있다. 역이용 할 수 있다. 호남은 다수파가 아니라 소수파다. 호남의 힘만 가지고는 되는 일이 없다. 한국인들이 다수파인 영남출신의 비리는 봐주고 호남출신의 비리는 눈꼽만큼도 안 봐주기 때문이다. 조중동이 옷로비 정도 사소한 사건을 가지고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그 수법이 실제로 먹히기 때문이다.
‘소수파인 호남출신이 비리를 저지르면 배제를 당해서 당장 죽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잘 아는 호남출신이 설마 비리를 저지르겠는가?’ 이런 논리로 가야 했다. 거꾸로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대중도 노무현도 이 논리로 대통령이 되었다. ‘소수파는 대화가 안되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는 만큼 ‘소수파는 힘이 없으므로 오히려 통제하기 쉽다’는 강점이 있다. 이 강점을 적극 활용했어야 했다.
한나라당이 국회의 과반을 지배하면 어떻게 되나? 아무도 통제할 수 없다. 다수파의 횡포는 통제가 불가능이다. 반면 우리당은 설사 과반이 된다 해도 국민에 의해 충분히 통제가 된다. 왜? 우리당은 다양한 세력이 모여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내부분열의 약점이 있다. 개혁파와 실용파로 쪼개져 있어서 한쪽으로 급격하게 쏠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당은 국민의 공론에 의해 충분히 통제가 된다.
반대로 한나라당은 내부에 그러한 다양성이 없다. 저들이 권력을 잡으면 무소불위가 된다. 그들은 극도로 획일화된 집단이다. 그러므로 저들 다수파에게는 애초에 권력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가 다수파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우리가 이 논리를 적극 홍보해야 한다. * 개를 대로에 풀어놓아도 유분수지 이제 이 마당에 누가 저 미쳐 날뛰는 조중동과 수구떼를 통제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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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 정치권력의 본질은 국민에 의한 통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소수파의 연대에 의한 지배다. 다양한 내부구조를 가진 소수파의 수평적 연대에 의한 정권만이 국민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
노무현 정권은 한국의 지성이 그 수준으로 과연 소수파의 연대라는 힘겨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시험대였다. 결론은 드러난 바와 같다. 노무현이 성공한 만큼 한국의 지성은 성공했고 실패한 만큼 한국의 진보는 실패했다.
오마이뉴스, 한겨레, 프레시안, 학계, 시민단체, 운동권 그들은 어떻게 했나? 소수파 정권에 어떤 도움을 주고 어떤 신뢰를 쌓았나? 손 잡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말이 통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을 주는데 성공했나?
모두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demos의 지배이다. demos에는 나눠진 지역, 나눠진 소수파, 나눠진 개인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나눠진 지역이 힘을 합치고 나눠진 소수파가 힘을 합치고 나눠진 개인이 힘을 합쳐야 한다.
지난 5년간 오마이뉴스, 한겨레, 시민단체, 학계란 것들, 지식이라는 것들은 모두 한 통속으로 ‘며느리 발뒷축이 밉다’는 시어머니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자신이 소수파 출신이라는 본질을 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엘리트 지식인이기 때문에 혹은 잘난 언론이기 때문에 노무현을 통제할 권한이 자기네에게 있다고 여겼다. 소수파의 수평적 연대라는 개념은 머리 속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처럼 본능적으로 약자를 물어뜯었다. 손에 칼이 쥐어져 있으니 일단 휘두르고 본다는 식이다.
‘소수파의 연대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이심전심으로 전해질 공식과 전범을 확보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기어이 모두가 신뢰를 잃었다. 결론적으로 지난 5년간 그들의 수준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나는 그들과 싸울 것이다. 소수파의 연대에 의한 지배라는 목표를 버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