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 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봄.
중간고사가 막 끝나고 황금같은 주말을 맞이하여,
밤에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던
옛 선현들의 말씀에 따라
야심한 시각까지 만화책을 보며 자빠져 있었다.
중딩이던 동생놈은 꿈나라로 로그인한지 오래였고
아버지 또한 다음날의 출근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셨다.
어머니만이 늦은 시각까지 티비를 보시는 중이었다.
거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귀찮긴 했지만 만화책을 든 채로
어기적어기적 기어나갔다.
“왜?”
“엄마가 갑자기 맛동산이 먹고 싶어졌다. 가서 맛동산 한봉지 사와라.”
“......”
시계를 보니 이미 열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이야 다리 하나만 건너면 번화가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우리 동네는 개발지역이었던 터라
집 근처에 편의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네 슈퍼는 모두 셔터를 내렸을 시간이고
옆 동네에나 있는 편의점까지는
나의 에어맥스를 장착하고도 20분은 족히 걸렸다.
왕복이면 40분 이상이 소요될 터였다.
야심한 시각인데다
나도 다음날 아침에는 일찍 등교해야 하므로
어머니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는 뜻을
정중하게 밝혔다.
“캬아악! 안 가! 못 가! 내가 왜 가! 맛동산 똥개!”
“......”
너무도 정중했던 탓에
엄마도 다소 긴장하시는 표정이었다.
조용히 나를 쳐다보시더니
알았다며 들어가라고 하셨다.
돌아서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아부지 보내지 뭐.”
“......”
우리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이시다.
언제나 과묵하시고 행동력이 있으셨다.
말보다 주먹이 앞섰다는 소리다.
내가 딸이었다면 다행이겠지만
하필이면 고추였던 관계로
언제나 아버지의 포스에 눌려 살아야만 했다.
유독 엄마한테만 약한 모습을 보이시기는 했으나
이 야심한 시각에, 그것도 주무시는 분을 깨웠다가는
그 화는 고스란히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 뻔했다.
“나 나도 쪼꼬바 한 개만 먹을게;”
“두 개 먹어도 된다. 맛동산만 잘 데려오너라.”
그리하여 나는
야심한 시각에 맛동산을 찾아
정처없는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당시 개발이 한창이던 우리 동네는
채 깎지 못한 동산이 군데군데 있었고
여기저기 깔린 것이 아파트 공사현장이었다.
한밤중의 불꺼진 공사현장과 울창한 나무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모르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가로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어설픈 조명이 공포심을 더욱 극대화시키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옆 동네 편의점에 당도하여
쪼꼬바 한 개와 맛동산 한 봉지를 사들고
다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밤인데다 에어맥스도 미처 장착하지 못했으므로
예상소요시간을 훨씬 초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밤길을 더듬어 우리 아파트단지 입구까지 와서야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동네가 무서운 것은
비단 공사현장과 깎다 만 산들뿐만 아니라
바람따라 구름따라 떠돌아다니는
양아치새1끼들 탓도 있었다.
다행히도 녀석들과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퀘스트를 수행해냈다.
녀석들도 내일을 위해 취침중인 듯했다.
현관문 앞에 도착해서 문고리를 돌리는데
아뿔싸,
문이 잠겨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온다는 생각에 열쇠를 챙기지 않았고
그러므로 문을 잠근 적도 없는데 잠긴 걸로 봐선
건망증이 심하신 울 엄마께서
아들놈을 심부름 보냈다는 사실을 깜빡한 채
문을 잠그신 것 같았다.
자고 있을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하는 수 없이 벨을 눌렀다.
“......”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잘못하다간 따뜻한 집을 눈앞에 두고
노숙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번 잠이 드시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엄마의 특성상
가능성은 더욱 증폭되었다.
한번 더 벨을 눌렀다.
“......”
역시나 감감무소식이었다.
이대로는 x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벨을 다시 누르려는 순간,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를 하고 있으니
‘철컥’ 소리와 함께 조용히 문이 열렸다.
문을 열어주신 것은 아버지였다.
집안 전체에 불이 꺼진 것으로 보아
내 예상대로 엄마가 깜빡 하고 문을 잠그고는
주무시고 있을 것이 뻔했다.
“...다녀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잠그고는
신발을 벗고 깜깜한 벽을 더듬으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눈에서 불똥이 번쩍 튀었다.
"커억!“
예상치 못한 공격에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요 매콤한 손맛은 아버지의 것이 분명했다.
죵니 당황스러웠으나 당황할 새도 없이
일어서자마자 원투 펀치가 날아들었다.
퍼억 퍽 퍽!
아버지는 과묵한 성격 그대로
묵묵히 펀치만 날리셨다.
그렇다고 해서 나까지 묵묵히 맞고 있을 수는 없기에
나는
“아악! 어억! 커억! 케엑! 큭!” 했다.
x나게 맞았다.
“헉, 헉.” 하는 아버지의 가쁜 숨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나는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몇시냐.”
“......”
“지금까지 어디서 뭘하다 이제야 기어들어와, 이 샹노무새키야!”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론해낼 수 있었다.
단 세 글자만으로
굉장히 효율적인 언어를 구사하시는 분이었다.
“한시요.”
라고
덩달아 세 글자의 효율적인 언어를 썼다가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영원히 로그아웃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논리적으로 침착하게 구체적인 경위를 설명해 드렸다.
“흐윽...윽...윽...엄마가...흐윽...맛동산...윽윽...편의점...흐윽...”
“......”
그다지 논리적이진 못했다;
갑자기 거실에 불이 켜지며
밝은 빛이 나의 안구를 강타했다.
엄마가 반쯤 눈을 뜬 자다 일어나신 표정으로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계셨다.
아들놈 심부름 보낸 것도 깜박한 채
세상 모르고 주무시다가
밖에서 들리는 개잡는(?) 소리에
잠이 깨서 나와보신 듯했다.
이미 맞을만큼 맞은 뒤였지만
이제라도 엄마가 나오셨으니
모든 오해는 풀릴 수 있었다.
엄마는 잠시 동안 나와 아버지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시다가
뒤늦게야 상황파악을 한 듯
조용히 말문을 여셨다.
“...어디 갔다오냐?”
“......”
“......”
조질나게 처맞았다.
이리저리 불꽃이 튀고
천사들이 눈앞에서 막 날아다녔다.
그대로 세상 하직하는 줄 알았다.
보다못한 엄마가 달려와서 아버지를 말렸다.
“어이구, 그만 좀 해요. 이러다 애 잡겠네!”
“......”
“넌 얼른 방에 들어가거라.”
“......”
나는 말없이 일어나서
오른손에는 맛동산 봉지를 움켜쥔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 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난 왜 맞은 거지?
이 맛동산은 뭐지?
한참을 넋놓고 앉아 있는데
끼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리고 있는 문틈으로
엄마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이제서야 본인이 심부름을 보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미안한 마음에 내 방에 들어오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는 벌써 죽도록 처맞은 후였다.
나는 잽싸게 일어나서
눈에 잘 뜨이는 침대 한복판에
맛동산을 던져놓고
방바닥으로 내려가 돌아앉았다.
내가 죵나게 삐졌다는 사실을
엄마한테 보여줄 생각이었다.
엄마가 어떤 말로 사과를 해도
절대 뒤돌아보1지 않을 생각이었다.
특히나 침대 위의 맛동산을 보며
자신의 한순간의 실수로 인해
아들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아파하시길 바랬다.
그렇게 해도 안 풀릴 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다면 영원히 엄마랑 안 놀 생각이었다.
“......”
“......”
등뒤에서 분명히 인기척이 있었지만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씀이 없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역시나
맛동산을 보고 가슴아파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삐진 상태였다.
절대로 뒤돌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을 깨고 엄마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아들.”
“......”
그러나 나는 돌아* 않았다.
내 마음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그냥 묵묵히 입다물고
무언의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게 일찍일찍 좀 다니지 그랬니.”
“......”
......
무슨...
“니 아부지 성질 뻔히 알면서...”
“......”
“씻고 자라.”
“......”
탁.
“......”
맛동산을 먹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