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노무현을 떠나보내며..
이 청년을 아십니까?
고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청년...
하지만, 이 청년은 본인의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습니다.
판사라는 최고의 직업에 만족하지 못한 청년은 변호사가 되어
군부독재의 악랄한 학생탄압이었던 '부림사건'을 통하여 '인권변호사'라는
영광스러운 별칭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에 찌든 세상은 그의 청렴함에 돌팔매를 던지기 시작합니다.
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 씨의 시신부검과 임금협상을 거들어 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독소조항인 '3자 개입' 금지 혐의로 그는 구속됩니다.
세상은 이토록 그에게 참기 힘든 굴욕과 고통을 주었지만
그는 그 어떤 강압적인 힘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른쪽 마이크 들고 있는 사람이 노무현입니다>
<1992년 5월 부산 칠성시장 앞-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중>
그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지역 경찰서장은 노무현에게 혀를 내둘렀습니다
'최루탄이 터져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경찰들과 혼자서 대치하던
독종 노무현'
노무현의 힘은 이런 우직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바보 같은 우직함, 바보 같은 미련함.
당시 사람들은 노무현을 기억합니다.
최루탄 파편이 튀어 피를 흘리면서도 당당해하던 그의 모습을…
그는 결코 그른 것을 옳다 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언제나 외로웠습니다.
하지만, 뜻있는 사람들이 그를 외롭지 않게 했습니다.
그를 우리는 국민 후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해장국 한 그릇 못 얻어먹었지만
정성들여 자기 자식의 과자 값을, 내일 아침 반찬 값을, 어머니의 수술비를
'희망돼지'라는 돼지 저금통에 차곡차곡 모아서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갖 부정과 부패로 그를 막아서던 세력들과 당당하게 싸워 이겼습니다.
그러나 부정부패에 길든 세력들은
그를 쫓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흔들었습니다.
그는 선거유세 때 '국민에게만 빚진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또 국민에게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를 그리워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는 다시 우리들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우리들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반세기 동안 걸어서 넘지 못했던 그곳을 걸어서 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습니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한 핏줄임을 확인했고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5년이란 기간 동안 그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위상을 드높였으며
가장 평화로운 체제를 유지하여 외국인들이 투자하게 만듦으로
경제적으로도 부흥을 꾀하기도 했습니다.
5년이란 기간 동안 맘에 안들 때도 있었습니다.
5년이란 기간 동안 실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5천만 명 모두에게 항상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를 믿었고 우리는 그를 옹호 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간다고 아주 가는 것은 아니지만…
쉬이 믿음이 가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 맡기고 떠난답니다
언론은 이미 예전부터 '명비어천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고
언론은 당신께서 내려가 살게 될 조그만 시골집마저
아방궁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퇴임 사저 바로 앞에 1층과 2층 건물 두개가 퇴임 사저와 비슷한 색과 질감으로 맞추어 만들져 있었습니다. 이것도 아직 다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 경호원 숙소라고 합니다.
당신을 잡고 싶습니다.
당신을 잡아 두고 '한 번 더!!!' 라고 외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법
국민의 이름으로 당신께 휴식을 드립니다.
5년 동안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이제 고향에서 그리운 흙냄새 맡으시며
푸성귀 기르는 재미를 느끼셔도 되겠습니다.
5년 동안 감사합니다.
어느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어느 누구도 반대세력에 그렇게 초연하게 견뎌내지 못했을 텐데
당신이어서 가능했을 겁니다.
당신이어서 참았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