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싸움의 1인자 조창조
2007년 11월 서울 남산의 하얏트호텔. 머리가 짧은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줄지어 늘어섰다. 곳곳에서 “형님 오셨습니까” 하는 인사말이 들렸다.
이윽고 “큰형님이 도착하셨다”는 외침과 함께 호텔 앞에 검은색 대형 세단이 도착했다. 한복을 입은 백발의 사내가 차에서 내리자 길 양옆에 도열한 청년들이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인사했다. 주먹계에서 ‘큰형님’으로 통하는 조창조씨였다. 이날 조씨의 칠순잔치에 참석한 하객은 어림잡아 2000명.
대구가 낳은 걸출한 주먹인 조창조씨는 ‘싸움의 달인’ ‘실전(實戰)의 황제’로 불린다. ‘싸움 천재’ 시라소니(이성순) 이후 맨손싸움의 1인자로 ‘맞짱’에서 져본 적이 없다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칼과 조직 없이 오로지 맨손으로 최고봉에 오른 그의 이력은 주먹세계에서 아직까지도 신화로 통하는 인물이였다.
현재 한국 주먹계의 최고 원로는 신상현씨와 정종원씨다. 신씨는 1950년대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맞섰던 명동파 이화룡 계열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신상사파의 보스였다. 이정재의 직계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정씨는 지금도 주먹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적어도 족보를 존중하는 주먹들은 두 사람을 최고 어른으로 인정한다. 조씨는 주먹계의 세대교체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열었다.
“신상현, 정종원 형 두 분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어른이에요. 그 밑으로 우리 또래가 있지요. 우리 밑에는 이강환 등이 있고. 내 또래 주먹으로 조일환, 최창식, 구달웅, 대전 목포내기(김기영) 등이 있습니다. 최창식은 건달생활 안 한 지 오래됐지만. 우리 또래 밑으로는 다들 모임을 만들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바로 아래 또래가 주먹계 실세입니다.
대륜중·고의 전설적 ‘가다’
그가 다닌 대륜중학교는 사립치고는 ‘공부 좀 하는’ 학교였다. 입학경쟁률이 7대 1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싸움꾼인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전교생 중에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 잘하는 학생은, 일본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로 불렸다. 학교마다 ‘가다’가 있었다. 대륜중·고의 최고 ‘가다’였던 조씨는 어느 학교의 ‘가다’가 누구다, 혹은 누가 세다 하는 얘기가 들리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학교로 쳐들어가 상대를 불러내 운동장이든 뒷동산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움판을 벌였다. 패싸움은 없었고 전부 1대 1 맞짱이었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의 이름난 ‘가다’들이 모두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엄삼탁, 전경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둘 다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매 좀 맞았죠. 체격만 컸지 싸움할 줄은 몰랐거든요.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싸움으로는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서 진 적은 없느냐”고 묻자 조씨는 허허 웃으며 “운이 좋았던 것 같다”라고 겸손해했다.
“애들 말이, 내가 진 적이 없다니까. 내가 싸움할 때마다 따라다닌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대구 통학권 내인 왜관과 김천, 경주 출신 학생들까지 잡았지요. 당시 칼을 쓰는 애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그 친구들은 따로 놀았어요. 나약한 애들이죠. 그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열외였죠.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대구로 내려간 조씨는 2년 후 다시 상경해 염천시장에 터전을 잡았다. 권투선수 출신인 정기복씨를 만나면서 그의 싸움 실력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조씨와 마찬가지로 월남민인 정씨는 다양한 실전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빠지기였다. 조씨는 빠지기 형과 2년을 같이 지내면서 ‘싸움이 이렇게 묘한 거구나’ 하고 느꼈다.
“빠지기 형의 싸움 스타일이 지금의 종합격투기와 비슷해요. 이마까지 쓰니, 종합격투기보다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죠. 그 형한테 머리와 무릎, 팔꿈치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대가 숙이고 들어올 때는 무릎으로 올려 치는 기술이 좋죠. 태권도는 발차기는 좋지만 실전에선 별로예요. 싸움은 태권도가 아니거든요. 붙잡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스피드죠. 빠르지 못하면 싸움을 잘할 수 없습니다. 빠지기 형은 그런 기술을 시라소니 형님한테 배웠다고 하더군요.”
싸움기술 면에서 시라소니 계보인 셈이다. 조씨가 시라소니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건 아니다. 정기복씨와 시라소니 계열인 김홍빈씨를 통해 알고는 지냈지만, 20년 가까운 나이 차 때문에 같이 어울릴 처지가 아니었다.
1960년대 초반 서울 주먹계는 큰 조직들의 와해 또는 약화로 일시적인 공백기를 맞았다. ‘깡패 소탕’을 내세운 군사정권의 강한 압박 탓이었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1세대 주먹들이 거의 다 퇴장했다.
‘조선 제일의 주먹’ 김두한은 정계에 입문하면서 주먹계에서 입지가 좁아졌고, 자유당 정권을 등에 업고 최강자로 군림하던 동대문사단은 두목 이정재가 5·16 직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분열됐다. 동대문파에 맞섰던 명동파도 보스 이화룡이 군사정권의 조사를 받고 나서 일선에서 물러난 후 주춤거렸다. 명동파와 가까우면서도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싸움의 귀재’ 시라소니는 이정재의 사형에 충격을 받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서대문 일대를 장악했던 최창수도 군사정권의 서슬에 뒷전으로 물러섰다.
이후 다시 상경한 조씨는 무교동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교동에서 호남주먹들의 후견인 노릇을 하던 오종철씨가 조씨를 형님으로 모시며 뒤를 돌봐줬다. 오씨를 비롯한 호남주먹들은 조씨가 염천시장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서울 주먹계에서 가장 센 조직은 신상사파였다.
“당시는 명동이 중심이었어요. 그때는 아직 호남세라는 게 없었습니다. 명동을 장악한 신상사는 이화룡의 직계였습니다. 서울에서 조직이라 할 만한 건 신상사파밖에 없었어요. 동대문도 서대문도 다 허물어진 상태였거든요. 신상사 이전 주먹들은 5·16을 기점으로 다 물러났습니다.
무교동에 오종철과 내가 있었고, 충무로 모 호텔을 근거지로 정종원 선배가 일정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개인 간 싸움이 있었을 뿐 조직 간 충돌은 없었습니다. 조직끼리 싸운 건 사보이호텔 사건 이후입니다. 그때부터 호남주먹들이 본격적으로 서울로 올라오고 서로 죽고 죽이는 조직 간 전쟁이 벌어졌지요.”
널리 알려졌다시피 사보이호텔사건은 조양은씨를 주축으로 한 신진 호남세력이 사보이호텔에 있던 신상사파를 기습한 사건이다. 1975년 1월2일 발생한 이 사건은 주먹사에서 신상사파 몰락과 호남파 득세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조창조씨 얘기에 따르면 신상사파의 몰락이라는 표현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신상사파의 아성에 금이 갔다’라는 정도의 표현이 어울릴 듯싶다.
사보이호텔사건의 *점은 전남 해남(혹은 목포) 출신인 이경o이라는 호남주먹이 신상사파의 연말 송년회 자리에서 시비가 붙어 몰매를 맞은 일이었다. 그를 패는 데 앞장선 사람은 조씨와 같은 또래인 구달웅씨와 정경식씨였다. 정씨는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씨의 친구였다.
오종철씨의 친구인 이경o씨는 조씨를 형님으로 받들고 있었다. 당시 무교동에는 뒷날 김대중 정부 시절 주먹계 실세로 통한 정학모씨가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이씨는 정씨가 아끼는 후배이기도 했다.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
그 유명했던 조양은사건..
당시 무교동 조직의 서열은 조창조-정학모-오종철-은석-조양은 순이었다. 좌장은 오종철씨였고, 조양은씨가 행동대장 격이었다. 조창조씨는 “당시 양은이를 따르던 아우가 8명이었는데, 그 세력이 막강했다”고 회고했다.
“사건이 난 후 나는 이쪽과 저쪽(신상사파) 서로 10명씩 내세워 1대 1로 승부를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학모도 내 의견에 찬성했죠. 그런데 동생들이 ‘그런 건 옛날 방식’이라며 반대했어요. 결국 학모와 내가 목욕하러 간 사이 오종철과 조양은이 일을 저질렀던 겁니다. 실제 행동은 양은이가 했죠.”
조양은씨와 동생들은 명동 식구들이 신년하례차 모여 있는 사보이호텔 커피숍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몽둥이와 주먹을 휘둘렀다. 신상사의 처남 김수o씨가 중상을 입는 등 신상사파 조직원 몇 명이 다쳤다. 하지만 정작 신상사는 현장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 화장실에 가 있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보이호텔사건이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지적에 대해 조씨는 “엄청난 과장이 있었다”라고 시인했다.
“사실 달걀로 바위치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요. 사보이호텔사건으로 신상사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신상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건이 나자 서울사람들의 응집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평상시 숨어 있던 신상사파의 방대한 세력이 드러났습니다. 힘으로도 돈으로도 백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양은이가 20대였습니다. 뭘 알겠습니까. 다만 총명하긴 했죠. 그 총명함이 그를 불행한 길로 이끌었지만. 태촌이는 양은이보다 나중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선배들한테 잘했어요.”
권상우사건으로 잘 알려진 서방파두목 김태촌
그의 철저한 몸 관리는 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도 화제였다.
하체운동인 앉았다 서기를 한 번에 700회, 엎드려 팔굽혀펴기도 한 번에 270회씩 했다고 한다. 팔 두께가 46㎝, 가슴둘레가 128㎝였다. 웬만한 주먹들은 그의 근육만 보고도 주눅이 들었다.
“운동을 안 하면 불안했어요. 앉았다 서기를 몇백 번 하면 괜찮아졌지요. 젊은 사람들이 따라 했습니다. 내가 만 53세에 들어가 61세에 나왔으니…. 안동교도소에서는 놀라죠. 저 영감 저러다 쓰러진다고. 달리기도 젊은 사람들보다 잘했어요. 돌이켜 보면 우습죠. 인생을 철없이 산 겁니다.”
교도소에는 전국 각지의 주먹이 모여 있다. 이래저래 싸움이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큰형님인 조씨는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이 세계의 상징적 인물이니, 나한테는 누구도 못 덤벼들죠. 나이 차이도 있고. 일반인도 큰 어른한테는 예의를 지키잖아요. 우리 세계도 그런 게 있습니다. 나한테 기어오른다는 건 상상도 못하죠. 할 얘기는 아니지만, 교도소가 건달 양성소예요. 그곳에서 애들이 훈련하고 인맥을 쌓게 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거기서 왕이에요. 양은이가 그래서 큰 것 아닙니까.”
“창조 형을 모시고 있었다”
조씨는 안동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300여 명의 주먹에게 신비한 존재요, 경외의 대상이었다. 교도관이 그에게 함부로 대했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를 따르는 주먹들이 가만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교도소에서 재소자는 각자의 취향에 따라 종교행사에 참여한다. 조씨는 천주교 신자다. 미사 시간이 되면 수많은 주먹이 그를 가운데 두고 호위하듯이 삥 둘러앉았다. 다른 종교를 믿는 주먹들도 미사에 참석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보기 위해서였다. 젊은 주먹들은 출소해 바깥세계로 돌아가면 “창조 형을 모시고 있었다”고 자랑했다.
“전국 40여 개 교도소에 있는 오야붕들이 ‘가장 큰 형님이 안동에 계신다’고 애들한테 교육을 했습니다. 성탄절이나 연말이 되면 카드가 수백장씩 날아왔어요. 그중에는 사회 나와서 가까워진 애도 많아요. 나 때문에 큰 애도 많고. 어떤 애가 괜찮으면 그 오야붕을 불러 말해줍니다. ‘나하고 몇 년 같이 지냈는데, 사내 기질도 있고 쓸 만한 놈이더라. 잘 돌봐줘라.’ 젊은 애들에게는 내가 우상이죠. 같은 세계에서 공존했으니.”
그의 휴대전화기가 수시로 울렸다. 문자메시지도 자주 날아왔다. “우리는 사람 많은 걸로 살잖아”라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대구와 서울을 오가며 매일같이 많은 사람을 만난다. 기자는 그를 호텔 커피숍에서 몇 차례 만나면서 그가 마당발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이런저런 부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누굴 소개해 달라, 정치인한테 얘기 좀 해달라…. 때론 답답하기도 해요. 나도 일을 해야 하는데, 후배들이 자꾸 찾아오니…. 한번은 휴대전화를 끊어봤어요. 난리가 났었습니다. 아예 집으로 찾아오더라고.”
평생 특정 조직을 거느린 적이 없으면서도 주먹계의 대부로 인정받은 것은 한국 주먹사에서 특이한 사례다. 수많은 주먹이 몰려든 그의 칠순잔치는 시라소니의 적통인 맨손주먹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고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친구들한테는 내가 1대 1 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는 것이 신화로 각인돼 있습니다. 윗 선배들이 나에 대해 좋게 얘기해준 거지요. 나는 이 세계에서 라이벌이 없어요. 조일환이나 구달웅이나 다툴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다들 나이가 들어 친구로 좋게 지냅니다. 그 친구들이 한 가지 인정하는 게 있어요. 싸움으로는 나한테 안 된다는 것. 그걸로 저는 만족합니다. 그렇게 인정해주니 고맙지요. 나도 그들을 존경하고. 또 바로 밑의 이강환 또래가 나를 좋아하고, 나도 그들을 좋아하고.”
이제 한 시대를 풍미한 주먹대부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에게 ‘마지막 멘트’를 주문하면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조용히 살려고 합니다. 솔직히 젊은 친구들이 이 길로 가는 걸 원치 않아요. 좋은 길이라면 내 자식부터 이쪽으로 가도록 이끌었겠죠. 하지만 좋은 길이 아니잖아요. 나만 해도 떠밀려서 여기까지 온 건데…. 내 인생이 아니지. 이게 뭐 좋은 직업이라고. 칠순 때 후배들에게 미안했습니다. 건달 아우들아, 가슴으로 안으마. 머리로는 절대 안지 않으마. 그들을 가슴으로 안고 끝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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