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비애:김상진 투수를 기억하십니까?

7423946 작성일 09.10.25 2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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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학도 사치였던 고교 유망주

  서림초교를 졸업한 김상진은 1989년 광주 진흥중학교로 진학했다. 강의원 진흥중 감독이 스카우트했다. 강 감독이 진흥고 감독으로 부임하며 김상진도 자연스럽게 진흥고 유니폼을 입었다. 강 감독은 이후 진흥고 감독을 맡으며 김상진과 6년간 사제지간으로 지냈다.

“그즈음 있는 집 아이들은 대개 광주 충장중이나 무등중으로 진학했다. 진흥중 야구부는 반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았다. 상진이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어찌나 가난한지 회비를 거르게 일쑤였다. 용돈도 없어서 감독인 내가 손에 쥐여줄 정도였다.”  

2.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에 빛나는 아기 호랑이

  1995년 11월 김상진은 해태와 계약금 1억 원, 연봉 2천만 원에 입단계약을 맺었다. 당시 해태에 ‘1억 원’은 2, 3억 원 가치의 거액이었다. 하지만, 이해 해태는 휘문고 포수 황*와 충암고 내야수 장성호에게도 1억 원씩 안기는 모험을 감행했다. 결과적으로 황*를 제외하고 김상진과 장성호는 머지않아 해태의 주력선수가 됐다.

고졸 신인 김상진은 팀에서 ‘리틀 이대진’으로 불렸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대진의 진흥고 3년 후배인데다 성격까지 비슷했기 때문이다.

3.삶의 마운드에 찾아온 강력한 타자, 암

  김준재 kia 트레이너는 1998년 10월 9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해태 트레이너였던 그는 다음날 예정된 김상진의 mri 촬영을 준비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해 상진이가 6승 11패 평균자책 3.87로 다소 부진했다. 2년 연속 9승을 따내던 친구라 10승이 기대됐지만, 오히려 성적이 떨어졌다. 목 통증으로 투구균형을 무너진 탓이 컸다. 시즌 중 수차례 목 통증을 호소했기 때문에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정규시즌을 끝내고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 10월 9일 mri 촬영을 예약했는데, 그날 저녁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김 트레이너에게 전화를 건 이는 김상진의 친구였다. “안녕하세요”란 안부인사도 없이 김상진의 친구는 다급한 목소리로 “상진이가 밥을 먹다가 피를 토했다”며 “지금 전남대 병원 응급실로 갔다”고 안절부절못했다.

“감이 이상했다. 그래 전남대 병원으로 바로 쫓아갔다.” 김 트레이너가 도착했을 때 김상진은 두통을 호소할 뿐 별다른 특이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감이 맞았다.

정밀검사 결과 3번 목뼈 척추에 종양이 발견됐다. 김상진은 일주일 뒤 3번 목뼈 주위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병원측은 약물치료와 휴식을 통해 빠른 회복이 가능하다며 김상진을 안심시켰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목뼈 척추에 난 종양의 발원지가 위임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위암이 척추까지 전이된 셈이었다.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통보한 병명은 말기 위암이었다.”   11월 중순 들어 상진이가 조금씩 눈치를 채는 듯싶었다. 하지만, 반신반의했던 모양이다. 막상 ‘암이다.’ 이야기하니까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어리벙벙해했다. 나중에 저도 확인했는지 자신이 말기 암이란 사실을 정확히 안 다음 날부터 갑자기 병세가 악화했다.” 김 트레이너는 며칠씩 밥을 굶는 김상진을 보며 심장이 녹는 듯했다  

4.22살 청년 김상진의 슬픈 기억과 사랑

 

호전될 것 같던 김상진의 병세는 1999년 봄부터 급격히 악화했다. 3월 초 통원치료를 해오다가 갑자기 각혈과 하혈로 응급실로 실려와 4시간의 큰 수술을 받고 4월부터 눈에 띄게 체력이 떨어졌다.

누구보다 앞장서 김상진의 투병을 도왔던 김준재 트레이너에게 하루는 김상진이 “형님, 바람…좀…쐬고 싶어요”라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디 가고 싶니?” 김 트레이너가 물었다.
“63…63빌딩에…가고…싶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상진이 대답했다.

김상진을 휠체어에 태우고 김 트레이너는 63빌딩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때였다. 김상진이 계속 두리번거리면서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김 트레이너가 “상진아, 어디 보고 싶은 데라도 있니?”하고 물었을 때 김상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잠실야구장”이라고 했다.

김 트레이너가 잠실구장이 보이는 쪽으로 휠체어를 놓자 김상진은 한동안 창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침 갓 뽑아낸 밀크커피처럼 따뜻한 봄볕이 김상진의 이마를 내리쬐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상진이 항균용 마스크를 입에서 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김상진의 외출은 한 번 더 있었다. 장소는 고향 광주. 그러나 야구장은 아니었다. 김상진이 찾아간 곳은 광주구장 옆 작은 카페였다.

김 트레이너는 김상진이 한창 건강할 때 “형님 500cc 맥주 한 잔만 사주세요”하고 매달린 통에 함께 술을 마신 기억이 있다. 그때 김상진은 친형 같던 김 트레이너에게 자신의 여자 친구를 소개했다.

“예쁘고 참한 친구였다. 어찌나 둘이 잘 어울리던지,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다 환해질 정도였다.”

힘들고 고달픈 투병생활 동안 김상진의 유일한 낙은 여자친구와의 휴대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 교환이었다. 그러나 투병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여자친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남자친구에 대한 변심이었을까. 아니다.

“상진이가 여자 친구에게 짜증을 많이 냈다. ‘왜 찾아오느냐’고. ‘찾아와서 뭐하느냐’고.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고. 여자친구도 상진이 병세가 악화할까 봐 애써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김상진은 여자 친구를 눈에서 보내는 대신 가슴에서 키웠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찾은 광주구장 옆 작은 카페가 바로 여자 친구와 자주 가던 카페였던 것이다. 카페에서 김상진은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이고 카페 밖을 바라봤다고 한다. 간간이 여자들이 지나칠 때마다 바이올린 현처럼 가늘게 눈을 떨면서   취재를 마칠 무렵. 김상진이 마지막까지 삶의 끈을 놓지 않으며 투병생활을 했던 강남성모병원의 관계자를 만났다. 그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김상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유명 야구선수가 암 투병 중이었다. 병문안이 끊긴 밤이면 불 꺼진 병실에서 매일같이 비디오로 야구경기를 봤는데 늘 같은 경기였다. 하루는 그 경기가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이겼던 경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기 전에 꼭 팀이 우승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야구를 몰라서 하는 말인데…그 팀 우승했나?”

“형님. 저기가…1997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제가…제가 완투승을 거둔 곳이 맞지요?”

김 트레이너는 휠체어에 앉아 멍하니 잠실구장을 바라보는 김상진의 뒷모습을 보며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김 트레이너와 김상진의 마지막 외출은 그렇게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슬프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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