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발에 반발을 하려고 올린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우리의 소중한 문화인 태권도를 재대로 알리기 위함입니다.
태권도의 창시자는 최홍희다. 그러나 최홍희가 태권도의 창시자인지, 아니면 태권도 '명칭'만 지은 사람인지 이것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어진다. 그는 함북 화대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어린 최홍희를 택견 고수 한일동에게 보내 한국 전통 무술 택견을 배우게 했다. 이후, 일본중앙대학을 다니면서 가라데도 배운 최홍희는 군에서 복무하며 군대격투기로 공수도를 지도하였다. 그는 독자적인 무술을 만들고자, 한국 고유의 무술 택견식 격투기와 가라데의 시스템을 결합하여 발차기가 유연하며 체중 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무도를 만든다. 당수도·공수도 등 태권도를 지칭하는 명칭이 제각각이자 1954년 명칭제정위원회(名稱制定委員會)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택견과 비슷하다”라는 발언을 따라 민속적인 "택견"의 어감을 포함하는 "태권도(영어: Taekwondo)"를 채택했다는 설이 있으나[출처 필요],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945년 일제 해방이후 국내에 여러개의 도장이 생기게 된다. 크게 6개의 도장이 있었는데(무덕관, 청도관, 송무관, 창무관, 윤무관, 오도관) 이 도장들이 1960년대에 합쳐져서 현대 태권도의 모체가 된다. 여기서 가장 영향력이 큰 도장은 무덕관과 청도관이었다. 청도관은 이원국씨에 의해 설립됬는데, 그는 어렸을때 서울 안국동에서 택견을 수련하고, 이후 가라데를 배우고 중국 상하이와 허난에서 쿵푸를 수련했다. 해방 이후, 청도관은 2번째로 큰 도장이 된다. 가장 큰 도장은 무덕관이었다. 무덕관은 황기에 의해서 설립됬는데, 황기는 어릴때 택견을 배우고, 중국에서 태극권과 쿵푸를 배웠다. 덧붙여 그는 철도 회사를 다니면서 도서관에서 오키나와 가라데 책을 읽고 가라데의 철학을 읽었다고 한다.(※그는 직접적으로 가라데를 배운적이 없다) 1957년, 무덕관 관장 황기는 한국의 고전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한국의 전통 무술, '수박'을 발굴한다. 이 무예서로부터 손과 발의 타격 테크닉을 취해서 무덕관 태권도의 기술을 완성시킨다. 1960년대, 대한 수박도 협회는 한국의 전통 무술로 정부로부터 공식 인증을 받는다. 무덕관은 당시 최대의 태권도 도장이었는데, 1953년과 1970년 사이에, 전체 태권도 수련자의 약 75%가 무덕관에서 배웠다. 무덕관이 현대 태권도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곳이다.
초기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보이지만, 태권도가 가라데에 기초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6] 태권도는 단 한명에 의해 창시된 무술이 아니며, 태권도의 모체가 된, 당시 태권도 9대관 관장중에는 가라데를 배우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중국 권법에 더 능숙한 사람도 있었다.
태권도는 이후에도 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 고유의 무술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있었고, 무예도보통지, 태껸, 수박등 전통 한국 무예에서 발굴된 기술들이 태권도에 도입된다. 비록 초기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대 전통 무예의 재 발굴 작업을 통해, 현대 태권도는 고대 한국 무술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8] 현대의 태권도는 한국의 전통무술 맛이 가미된, 가라데와 매우 다른 무술이며, Kimmo Rauhala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70%의 기술이 킥이며 이 킥 기술들은 기존 무술에 없던 독특한 것이다. 1962년의 대한 태수도 경기 내용을 보면 이미 초기 태권도의 동작은 택견식의 격투술과 유사하며 가라데와 확연히 다르다. 이것으로 볼때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출발해서 점진적으로 지금과 같이 택견과 유사해졌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태권도는 적어도 60년대 초반부터, 그 무술의 이름이 어떤 것이었든, 무예의 기술적인 면에서 지금의 태권도와 유사했었고, 가라데와 다른, 지금의 태권도가 가진 택견과의 유사성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ITF측 설명에 의하면, 오도관 창설자중의 한명이었던 최홍희가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大韓跆拳道協會)의 창립과 함께 태권도 기술이 체계화되면서 현대 태권도가 등장하였다고 한다. 군인이었던 최홍희가 예편하고, 1961년 초대 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기에 대한태권도협회는‘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개칭되었다. 1965년 귀국한 최홍희는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고 회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설립하였다. 19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기태권도라는 휘호를 받고,1973년 국기원(國技院)이 건립되며 태권도는 한국 고유의 무도로서 자리를 잡아갔으며, 사범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해외 진출이 국가와 연맹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73년 최홍희가 캐나다로 망명하여 ITF 본거지를 토론토로 옮기자 대한태권도협회(KTF)는 독자로 세계태권도연맹(WTF)를 창립하였다. 이후 ITF는 초장기와는 달리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심적으로 보급하면서 친북 세력으로 치부되어 최홍희는 국내에 입국하지 못한 채 2002년 숨을 거둔다. ITF 태권도에 끼친 최홍희의 업적은 첫째, 소년기에 한일동 고수 밑에서 택견을 배웠고, 이후 일본 유학시절에 가라데도 수련한 최홍희는, 끊임없는 연구와 개발 속에서 한국의 역사를 담은 천지, 단군, 도산 등 24가지의 틀로서, 가라데와는 다른, 새로운 수련체계를 확립하였고, 둘째, ITF 태권도는 모든 기술에 적용하는 사인웨이브 이론을 확립하여 택견과 가라데와 다른 독특한 무도 시스템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반면 WTF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정식 메달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07년 현재 WTF에는 18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되었고, 약 680여만 명의 유단자가 배출되었으며(국기원),ITF에는 2007년 현재 102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그리고 2008년 9월 4일에는 태권도의 날이 탄생하였다.
여기까지 전문 자료를 찾다가 퍼온 글입니다.
최홍희,이원국, 황기 등 태권도 창시에 중요한 인물들은 전부 택견부터 배웠고, 그 후에 가라데를 배운다던지 아님 가라데문헌만 봤다던지 했습니다. 뭐부터 배웠다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태권도의 발차기는 택견의 발자기에 가라데 라던지 중국무술의 발자기등을 서로 보안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사실로 봐도 알 수 있듯이 중국무술이나 가라데 등이 올림픽에 종목으로 체택되지 않는 이유가 태권도와의 차이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