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조금 빠르다. 내 예상으로는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길거리 응원전에 맞춰 태극기로 중요 부위만 가린 여성들의 사진이 뜰 줄 알았다. 하지만 출정식이 있었던 지난 16일 에콰도르전에서 한 여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아마 자사의 연예인 지망생으로 ‘월드컵 마케팅’을 준비했던 수 많은 연예 기획사에서는 땅을 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괜히 광화문 응원전에 맞춰 준비했어. 괜히 그리스전에 맞춰 준비했어. 우리도 에콰도르전에 나설 걸.’
이번에는 ‘상암동 응원녀’란다. 다들 한 외모하시는 분들이라 그녀들의 외모는 비교 대상에서 빼더라도 지난 두 차례의 월드컵에 등장했던 ‘미스 월드컵’이나 ‘엘프녀’보다는 일단 작명 센스가 너무 떨어진다. 월드컵이 거듭되고 있지만 오히려 그녀들의 마케팅 센스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다. 참 웃긴 게 처음에는 사진만 올려놓고 “그녀의 정체는?”이라면서 궁금증을 잔뜩 증폭시킨 다음 “알고 보니 누구누구더라. 이러이러한 활동을 하더라”고 정체를 밝히는 수법까지도 비슷하다.
<사진1 : 한국 축구와 월드컵이 어느 한 명의 상업적인 이익을 위해 휘둘려야 하는가. 한국 축구를 응원하는 이들이 이렇게도 많은 데 말이다. ⓒ연합뉴스>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라는 것도 마케팅?
‘상암동 응원녀’는 말한다. 내 이런 인터뷰 올라올 줄 알았다.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란다. “연기자나 가수가 될 마음은 없다. 나는 연기에 재능도 없고 노래도 잘 못한다. 순수하게 태극전사들을 응원하기 위해 아는 언니들과 동행했을 뿐”이란다. 하지만 “모델 활동과 더불어 뮤직비디오, CF 모델 등은 기회가 닿으면 하게 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연기나 노래를 하면 ‘노이즈 마케팅’이고 모델 활동과 뮤직비디오 찍는 건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라는 판단인가보다.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판단이 잘 되지 않아 한 마디 하겠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게 다 노이즈 마케팅이거든요.”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엘프녀’로 뜬 한 여성의 측근은 ‘노이즈 마케팅’ 논란이 일자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뜨기 위한 조작이니 하는 말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럴 뜻은 전혀 없었다. 그저 응원 당일 사진을 미니 홈피에 올린 것 뿐이며 사진이 널리 퍼지게 된 것 역시 본인의 의도가 아니었다. 연예계 진출 생각은 전혀 없다.” 이상하다. 아마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사진이 유포됐다면 초상권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게 맞을 텐데 이 여성은 그냥 참았다. 그리고 결국 월드컵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수로 데뷔했다. ‘시청녀’라는 별명의 한 여성은 이후 높아진 인지도로 섹시 화보를 크게 홍보했다.
2002 한일 월드컵 때 ‘미스 월드컵’이라는 이름으로 뜬 뒤 가수로 데뷔한 여성은 얼마 전 이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이제는 ‘미스 월드컵’이라는 딱지를 떼고 싶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애초부터 이 가수는 ‘미스 월드컵’이라는 별명이 없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는 ‘미스 월드컵’이라는 별명이 부담스러운가.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닌가. 종합해서 정리해 보자면 사진으로 주목받아 월드컵 관련 별명하나 만들고 ‘노이즈 마케팅’ 논란이 있으면 부인하다 이름을 알린 뒤에는 “이제 그 꼬리표는 떼 주세요”라고 하는 게 공식이다.
독자는 안중에도 없는 스타 만들기 놀이
이런 현상을 보는 일반 축구팬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건 당연하다. 4년에 한 번씩 튀어나와 자기가 무슨 축구의 아이콘이라도 되는 마냥 온갖 이득을 취하는 꼴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한 상업적으로 월드컵을 이용해 먹으면서 대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본심을 드러내는 것도 무척 기분 나쁘다. 월드컵이 무슨 당신들 뜨게 하려고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줄 아는 건가. 축구팬들이 당장 피해를 입는 건 아니지만 이거 무척 기분 나쁘다.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여성들이 K-리그를 보지 않는다고 뭐라 할 말은 없다. 축구팬 입장에서야 이런 아리따운 여성이 K-리그 경기에까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지만 월드컵은 축구에 관심이 없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즐기려면 즐기는 수준으로 적당히 좀 하자. 연예인 지망생이 월드컵으로 뜨려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뭘 하건 상관할 바가 아니다. 경기장에서 사진 기자가 들고 다니는 렌즈만 해도 엄청난데 그 큰 걸 들이대도 자연스레 연기하고 나중에는 “그냥 친구들과 응원하러 갔을 뿐”이라고 답변하는 모습은 참 속보인다. 또한 항상 그녀들이 사진을 찍히는 1층 난간은 규정상 사람이 서 있을 수 없는 곳이다.
또 기분 나쁜 건 언론의 월드컵을 이용한 스타 만들기 놀이에 철저하게 독자들의 의견은 무시된다는 것이다. 기자가 사진 찍고 기자가 궁금증 만들고 기자가 정체 밝히고 다 한다. 독자들은 끼어들 틈도 없다. 입만 벌리고 있으면 떠 먹여 준다. 아니 먹기 싫어도 입 벌리고 쑤셔 넣는 꼴이다. 아이콘은 기자가 만드는 건가. 내가 “내일부터 월드컵 응원가의 아이콘은 <승리의 축가>로 하겠습니다”하고 지정하면 되는 건가. 또한 스타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실력으로 승부하기보다는 한 방에 신데렐라가 되려는 시도는 연예계로서도 참 서글픈 일이다.
<사진2 : 에콰도르전이 방송되던 시각, 바로 옆 채널의 모습이다. ⓒKBS 1TV ‘도전! 골든벨’ 캡쳐>
‘상암동 응원녀’와 ‘골든벨 서울남’의 차이
‘월드컵 아이콘’, ‘한국 축구의 아이콘’ 막 만들어내지 말자. 단순히 외모만 수려하면 누구나 아이콘이 되는 것인가. 상업성에 찌든 이들에게 ‘월드컵 아이콘’을 허락한다면 그간 각계각층에서 한국 축구와 월드컵을 위해 노력하고 고민한 이들은 뭐가 되는가. 국립국어원은 ‘아이콘’의 순우리말을 ‘상징’으로 정했다. 과연 ‘미스 월드컵’이나 ‘엘프걸’, ‘상암동 응원녀’가 ‘월드컵의 상징’,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에콰도르전에서 월드컵 인기에 편승한 여성들이 자신의 얼굴을 알리던 시각, KBS 1TV <도전! 골든벨>에서는 오히려 더 가슴 찡한 홍보 활동이 있었다. 최후의 1인으로 남은 한 학생의 진심을 담은 글귀는 축구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학생의 정답판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FC서울 파이팅, 철인 6호 김진규. K-리그 공중파 중계 좀 T.T’ 한국 축구의 아이콘은 바로 ‘상암동 응원녀’가 아니라 ‘골든벨 서울남’이다.
footballavenue@nate.com
위험을 무릎쓰고 네이트에서 기사 퍼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상암동응원녀란 제목의 글을 보고 저런 미인을 두고 왜 저렇게 마녀사냥들이실까? 하고 잠깐 오해했었는데
속이 다 시원합니다. 궁금증도 다 풀렸구요. ^^ 이 기사를 읽고 월드컵을 악용하는 것에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