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J. 심슨 사건은 통계에 대한 몰이해가 한 살인자를 무죄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O. J. 심슨Orenthel James Simpson(1947~)은 70년대 미프로 미식축구를 주름잡았던 영웅이었다. 러닝백으로 뛰었던 그는 대학 시절 뛰어난 활약으로 1969년 남캘리포니아 대학(USC)을 전미 챔피언으로 끌어올렸고 대학 미식축구 선수 최고의 영예인 하이즈만 상을 받고 졸업 당시 스카우트 랭킹 1위로 명문 프로팀인 버팔로 빌즈에 입단, 1979년 은퇴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즈 팀 등 명문 프로팀에서 각종 기록들을 세우면서 미식축구 스타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은퇴한 뒤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고 NBC-TV 미식축구 해설가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영화 <총알탄 사나이(Naked Gun)> 시리즈에서 '노드버그'라는 흑인 형사로 출연하기도 했다.
1994년 6월 13일 로스앤젤로스 고급 주택가 브렌트우드에 있는 대저택에서 심슨 전처 니콜 브라운 심슨Nicole B. Simpson(1959~1994)과 그녀의 남자 친구인 로널드 골드먼Ronald Goldman(1969~1994)이 온몸이 난자 당한 채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목격자는 없었으며 심슨의 집에서 피묻은 장갑이 나왔고 DNA 검사 결과 희생자의 혈액임이 입증됐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심슨과 경찰 사이의 100여km에 달하는 고속도로 추격전은 TV로 생중계돼 당시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심슨은 로버트 샤피로 등 유명한 변호사들로 이른바 '드림팀'을 구성, 장갑이 손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사건 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으며 담당 형사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등 다양한 정황 단서들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해 95년 형사 재판에서 무죄 평결을 받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피해자 가족들이 제기한 민사 소송에서는 유죄가 인정돼 법정 비용과 배상금을 대느라 집은 물론 선수 때 받은 트로피마저 팔았다고 한다. 현재 그는 니콜과의 사이에서 둔 1남 1녀 자녀와 함께 살해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 이 사건은 돈과 권력, 스포츠 스타, 인종 문제, 가정 폭력, 언론의 광기가 어우러진 20세기 미국 최악의 범죄로 기록되고 있다.
이 사건이 확률론적으로 흥미를 끄는 대목은 심슨의 변호인단이 제기하는 몇 가지 주장들이다. 피해자의 변호인단측이 '평소 O. J. 심슨이 아내를 때리고 폭력을 일삼았다'는 증인들의 주장을 토대로 O. J. 심슨의 살인 가능성을 주장하자, 심슨의 변호사 중 하나인 알랜 더쇼 위츠는 이에 맞서 줄기차게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실제로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 아내 중에서 자신을 때린 남편에 의해 살해당할 경우는 천 명 중의 하나, 즉 0.1%도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소 O. J. 심슨이 아내 니콜을 때렸다는 사실이 O. J. 심슨이 아내의 살인범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템플 대학교 수학과 교수이자 우리에겐 <수학자의 신문읽기>(1995)로 유명한 수학 이야기꾼 존 알랜 팔로스John Allen Paulos 교수가 이 문제에 대해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지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계산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범하는 오류라고 한다. 만약 매맞는 아내가 있다고 하자. 이 여자가 자신을 때리는 남편에 의해 죽을 확률은 얼마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심슨의 변호사가 주장하는 내용이 맞다. 0.1%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나 O. J. 심슨 사건의 경우에는 이미 아내가 죽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매맞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녀를 평소 때리던 남편이 범인일 확률'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럴 확률은 무려 80%가 넘는다. 따라서 심슨이 평소 아내를 때렸다는 사실은 심슨이 아내 살인범일 가능성에 대해 충분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범행 현장에서는 심슨과 발 사이즈가 같은 발자국도 발견됐다. 피해자의 변호인단은 이것을 증거의 하나로 제시했다. 또 범행 현장 바닥에는 범인의 발자국 왼쪽에 범인이 흘린 핏자국이 있었다. 그런데 O. J. 심슨 역시 왼쪽 손에 칼에 베인 자국이 있었다. 피해자의 변호인단은 이 역시 중요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심슨의 변호인단은 심슨과 같은 발사이즈를 가진 사람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발 사이즈가 같다는 것은 증거가 되지 못하며, 왼손을 다친 사람의 수도 충분히 많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이러한 흔적들이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존 알랜 팔로스는 그의 책 <Once Upon a Number>(1998)에서 이 문제 역시 심슨 변호인단의 확률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비판했다. 심슨과 같은 발사이즈를 가진 사람이 넉넉잡아 15명에 한 명꼴로 있다고 가정해보자. 또 하필 심슨처럼 그 시기에 왼손에 상처가 나 있던 사람이 충분히 잡아 1만명 중 한 명쯤 됐다고 가정해보자(존 알랜 팔로스는 1,000명 중의 하나로 가정 했으나 1/1000은 너무 큰 확률이다).
그렇다면 심슨처럼 그 당시 왼손에 상처가 나 있었으며 발 사이즈도 심슨과 같은 사람은 몇 명쯤 될까? 겨우 15만 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 각각에 대해서는 일어날 확률이 높지만 독립된 두 사건이 함께 일어날 확률은 그 곱에 의해 표현되기 때문에 발생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따라서 이 단서 역시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다.
O. J. 심슨 사건에서 사용되어 큰 주목을 받았던 DNA 테스트 역시 확률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내의 피살 현장에서 체취된 DNA는 심슨의 것과 일치했다. 통상 DNA 분석에서 두 사람의 DNA가 우연히 일치할 확률은 1만 분의 1이라고 한다. 검사측은 심슨이 99.99%의 확률로 살인자라고 몰아붙였지만, 변호사측은 로스앤젤로스 인근의 인구가 300만 명이므로 이중 약 300명이 DNA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에 심슨이 살인자라는 결론은 99.7%(1/300) 오판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옳은 이야기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인구 백만 명의 도시에 오직 두 명만이 하얀 턱수염을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이 도시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는데 사건 현장에서 하얀 턱수염이 발견됐다. 따라서 하얀 턱수염을 가진 두 사람 중 한 명이 살인자이며 다른 한 명은 무고한 사람이다. 따라서 하얀 턱수염을 가진 사람 중에서 무고한 사람은 (두 명 중 한 명이므로) 50%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 하얀 턱수염을 가질 확률은 얼마일까? 무고한 사람 999,999명 중에서 1명만이 하얀 턱수염을 가졌으므로 그 확률은 극히 미미하다. 이처럼, O. J. 심슨의 변호인단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착각하고 있다. 지금 그들은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이 여러가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가질 확률'이 매우 낮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여러가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가진 사람이 아무 죄가 없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심슨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결국 재판부는 O. J. 심슨 변호사측의 손을 들어주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확률에 관한 오해로 인해 재판부가 변호인단의 말장난에 넘어가 살인자를 무죄 석방해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