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로부터 한푼도 상속 못받은 장남, 소송 결과…
(주)녹십자의 창업주인 허성수 전 회장의 장남이 아버지로부터 한 푼의 유산도 상속받지 못하자 “아버지의 유언은 무효“라며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3부(민유숙 부장판사)는 장남 허모씨(40)가 어머니와 유언의 공증을 담당한 변호사 등을 상대로 제기한 유언무효확인 청구소송에서 “허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분쟁은 허 전 회장의 유언에서 시작됐다. 2008년 2월 뇌종양 진단을 받은 허 전 회장은 수술과 입·퇴원을 반복한 뒤 그해 11월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가족과 변호인들이 지켜보는 중에 유언을 남겼다. 주 내용은 “녹십자와 계열사의 주식을 녹십자가 운영하는 복지재단들에 나눠주고, 나머지는 부인과 2남, 3남에게 나눠준다”는 것이었다.
허 전 회장은 유언을 남긴 지 약 1년 후 세상을 떠났다.
유산상속에서 제외된 장남은 유언의 효력에 문제를 제기했다. 허 전 회장이 뇌종양으로 7월에 수술을 받은 상황이라 11월 당시 유언을 할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유언당시의 상황과 평소 허 전 회장이 남긴 말 등을 토대로 유언의 효력을 인정했다.
먼저 유언 내용이 허 전 회장이 평소 지인들에게 밝힌 뜻과 일치한다고 봤다. 북이 고향인 허 전 회장은 자신을 ‘탈북자 1세대’라고 부르면서 탈북자 지원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실제로 탈북자를 돕기 위한 단체에 재산을 기부하기도 했다. 뇌종양 수술을 받기 전에는 탈북자를 지원하기 위한 재단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총무팀에 직접 사회복지재단 설립에 관한 사항을 검토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장남과의 관계가 생전부터 원만하지 못했던 점도 인정됐다. 소송을 제기한 장남 허씨는 15년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친 뒤 2005년 귀국해 녹십자에서 근무했으나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2008년 초에는 아버지에게 경영기획실장을 시켜달라고 요구했다가 오히려 퇴사당했다.
허 전 회장의 부부와 장남은 논현동 자택에 대해서도 등기관련 소송을 벌이기도 했고, 특히 허 전 회장은 주택이 장남에게 증여될 경우 법정상속분의 선급으로 유류분에서 공제될 것인지 여부까지 검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허 전 회장은 유언으로 남긴 메모에는 독일어로 “(장남이름)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언 과정도 법적인 효력이 인정된다고 봤다. 유언은 병원에서 이뤄졌는데, 허 전 회장이 쓴 메모를 토대로 공증담당변호사가 질문하면 허 전 회장이 답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허 전 회장이 남긴 메모에는 평소 메모습관대로 한자와 독일어가 혼용돼 있었던 것으로 재판부는 확인했다.
유언에 앞서 “북한에서 넘어와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에 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한 허 전 회장은 유언을 마친 뒤 울음을 터뜨렸고 부인과 변호사 등이 그의 곁을 지키며 위로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유언내용은 ‘아들들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줄 의사가 없다’는 점, ‘장남을 수증자에세 배재하겠다’고 한 점, ‘탈북자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겠다’고 한 점 등 생전에 밝힌 의사와 부합한다”며 “유언의 효력이 인정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