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손자병볍(孫子兵法) 13편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그 인물입니다. 본래는 진나라 왕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에게 손자병법을 바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시켰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사실 기록이 거의 전무한데 당대 제일국이던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만 나옵니다. 워낙 행적이 오리무중해 후대의 손빈(孫臏)이 와전된게 아니냐 이런 이야기도 있고 그냥 허구속의 인물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는데 옛 한나라의 무덤에서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동시에 발견이 되어 실체가 확인되었습니다.
손자병법의 여파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데 전차 중심이던 당시의 전투를 보병 중심으로 바꿔 산이든 강이든 가리지 않고 부대의 기동력을 마음껏 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서양에선 근대에 와서야 개념이 나온 대전략이 이 책에서 벌써 묘사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수준입니다(손무의 정확한 생몰년은 확인되지 않으나, 보통 공자와 비슷한 시기로 추측합니다). 그 유명한 2차세계대전의 명장 에르빈 롬멜과 조지 패튼도 손자병법을 보았다고 하네요.
오자(吳子) 오기(吳起)
병법에도 타고난 재능이라는것이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전 가장 재능이 많은 사람으로 주저 없이 오기를 뽑겠습니다. 오기는 정말 특이한 사람입니다. 성공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악랄한 짓도 서슴치 않았지만 능력은 대단했고 능수능란했습니다. '만' 단위 전투만 76회를 치러 그 중 확실히 승리라고 할만한 전투만 64회에 해당했고 12번은 패배라고 보기 힘든 무승부를 기록했습니다. 패배는 한번도 없었구요. 그 중엔 예비군 5만으로 수십대군을 물리친 전투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초나라에선 재상으로 부국강병을 이끌기도 할 정도로 다재다능했구요. 그러나 결국 그 과정에서 반발을 사 죽게 됩니다. 허나 포위되어 화살을 맞아죽는 마지막까지 왕의 시체를 끌어안고 죽어, "왕의 시신을 훼손하면 사형" (오자서 때문에 생겼습니다)이라는 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죽인 사람들도 귀신으로 만들고 마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오기는 본래 저 위대한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삼(曾參)에게 유가를 배우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면때문에 파문을 당했지만, 위나라의 문후(文侯)를 만났을때도 유학자같은 모습으로 만났다고 하는 재미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배운 유가를 병가에 결합시켰는지, 오기가 만든 오자병법(吳子兵法)은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에 관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령 손자병법에선 '점술은 미신이니 참고할 필요 없다' 라고 하지만 오자병법에선 '점술로 병사들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 라는 식이죠. 종기나 난 병사의 고름을 오기 스스로 입으로 빨아주기 까지 합니다. 이에 병사의 부모는 "내 남편이 그래서 죽음도 각오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는데, 이제 내 아들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죽겠구나!" 라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사마천은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을 통해 손자와 오기를 똑같이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병서를 읽히는 자 중에 손자와 오자의 병서를 읽지 않은 자 없다"라고 하니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갑니다.
이순신 장군이 한 명 연설도 오자병법에서 따온 말입니다.
"무릇 전쟁터란 한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
(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
연(燕) 창국군(昌國君) 악의(昌國)
연나라의 장수로, 할아버지는 증산국을 멸망시킨 악양입니다.
제나라 민왕이 맹상군을 쫒아내자 연나라는 연합군을 소집하였고, 연나라에서 악의가, 진나라에서 백기가, 조나라에서 염파가, 한나라에서 폭연이, 위나라에서 진비가 장군으로 출동하고, 악의는 다섯 나라의 상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공격, 여섯달만에 제나라 성 70개를 함락시키고 전국토를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제나라 장수 전단이 남은 두성을 끈질기게 지켜내며 이간계를 써, 왕에게 의심받아 조나라로 달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임금을 원망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제갈량이 관중과 더불어 존경한 인물로도 유명하죠.
진(秦)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
너무나도 유명한 전국시대 최고의 장수죠. 전투에 나가면 무조건 이기고 성을 빼았습니다. 섬멸전의 개념을 도입해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고 한-위나라의 연합군과 동시에 싸워 24만 대군을 패퇴시킵니다. 한-위-조 연합군과 싸워 14만 대군을 물리치고 그 후 그 유명한 장평대전을 통해 40만명의 장정들을 때죽음 시킴으로서 조나라를 멸망시키죠. 어느 정도의 과장과 전략적인 부풀림, 그리고 탈주병들도 포함시킨 개념으로 봐야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가 죽인 병사만 165만명에 달합니다.
한 명의 장수로서는 두 말할 나위 없는 사람이었지만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구요. 죽을때 그 모든걸 후회하면서 죽었지만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진 않죠. 그때문에 미움을 받았는지 민담 등에서는 죽은 뒤에 소로 환생해서 평생동안 고생을 하였다, 이런 이야기도 있더군요.
조(趙) 상경(上卿) 염파(廉頗)
역시 유명한 장수죠. 노장의 대명사로 많이들 알려졌는데 정확히 따지자면 젊어서부터 장수였는데 워낙 강건해서 나이를 먹고도 장수를 계속 하였습니다. 당시 조나라는 전국 4군자중 한명인 평원군, 인상여, 조사 등과 함께 염파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미 칠십이 되서 맞은 장평의 전투에서, 왕흘에게 처음에는 패배하나 수비를 굳히고 노련하게 버티어 전황을 유리하게 끌었지만 진의 특기인 정치 공작에 의해 해임되고 결국 장평의 참살이 일어나면서 조나라는 쇠퇴하게 됩니다.
후에 왕이 염파를 다시 쓰려고 사람을 보내지만 그 사람은 매수가 된 뒤였고, 염파는 마음이 들떠 밥 한말과 고기열근을 먹으며 노익장을 과시하지만 사신은 왕에게 "염 장군도 늙어서 밥 한끼 먹을 동안 화장실을 세번이나 가더라"는 말로 쓰지 못하게 됩니다. 이 처절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에게 깊은 아쉬움을 주어, 후에 남송의 당대 제일의 호방파(豪放派) 시인 신기질(辛棄疾)은 비분강개하여 이렇게 읆었습니다.
"염파 늙었으되, 밥은 잘 먹는가 누구에게 물어보랴."
진(秦) 왕전(王翦)
사실상 춘추전국시대를 종결시킨 무장이라고 알려져있죠. 한번 싸우면 성을 수백개는 빼았앗고 출동할때마다 국가를 멸망시켜 초, 조, 연 세 개의 국가를 망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초를 멸망 시킬때는 60만명의 병력을 요구하여, 진왕이 너무 많지 않느냐고 묻자 춘추시대의 전쟁과 지금의 전쟁은 규모에서 차원이 다르다 역설하고는 대군을 이끌고 나가 장장 1년간의 장기전 끝에 초나라의 마지막 명장 항연(項燕)을 패퇴시키고 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그 공으로 몽씨 가문과 함께 진나라의 제일 가는 무인가로 명성을 떨칩니다.
허나 사마천은 왕전을 비판하면서, 오직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한 권세가 있었음에도 왕의 악행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조(趙) 대장군(大將軍) 이목(李牧)
염파의 추천에 의해 북방의 무시무시한 흉노(匈奴)의 무리와 무려 10년을 싸워 조나라 국경에 얼씬도 못하게 만든 명장입니다. 당시 조나라는 간신배들의 농간에 쇠퇴의 시기였음에도 불구 연나라를 이겼고 진나라와도 연달아 싸워 물리쳤습니다. 그 물리친 장수 중에 무려 왕전의 이름도 있지요. 허나 다른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끝이 좋지 않아, 진나라의 특기인 정치공작에 의해 반역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몇달 안가 조나라도 망하게 되구요.
진(秦) 대장군(大將軍) 몽념(蒙恬) 의미상으로 전국시대를 마무리지은 인물이죠. 육국 중 마지막으로 남은 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웁니다. 그보다 진짜 공적은 후에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물리치고 만리장성을 만든 일입니다. 그때 잃은 땅을 흉노는 위대한 대선우(大單于) 묵돌(冒頓)이 나타나기 까지 되찾지 못합니다. 유방이 흉노족에게 개 맞듯이 털리던걸 생각하면 대단한 능력을 지녔다고 봐야겠죠.
허나 마지막이 좀 찌질한데 백기처럼 "내가 왜 죽어야 되나? 아, 허나 내가 죽을 이유가 있기는 있다" 하는데 이유가 "내가 만리장성 만들면서 땅의 지맥을 끊었으니 죽어야겠다" 였습니다...사마천은 왕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왕의 폭정을 막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습니다.
한(漢) 대원수(大元帥) 한신(韓信)
작고하신 고우영 화백께선 한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大)전략가. 전쟁의 천재. 배포는 바다. 재주는 하늘." 한신을 나타내는데 이 만한 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신은 정말 천재라는 말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한신이 소하(蕭何)의 추천에 의해 대원수 직을 맡을 때까지 군대를 이끈 경험이 없었지만, 그 순간 바로 그는 삼진의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세명의 왕을 순식간에 물리쳤으며 은왕 사마왕과 하남왕 신양을 물리치고 이후 별동대로 따로 움직여 소하나 유방의 도움없이 오직 개인의 힘으로 조나라를 물리치고 용저를 참살하며 제나라를 무력화 시키고 광무산에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야전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줍니다. 중국의 역사가 넒다하나 그 정도의 스케일로 마치 천하를 제 장난감 부리듯이 다룬 사람이 전에도 없고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영웅도 죽을때는 너무나 허무했죠.
대선우(大單于) 묵돌(冒頓)
흉노의 제 2대 선우로 자신을 제거하려는 아버지를 물리치고 선우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후로 동호의 군주를 죽이고 그 땅을 빼았는것부터 시작해서 서쪽의 월지를 격파하고 남쪽의 누번, 백양을 점령하고 혼유, 굴석, 정령, 격곤, 신려 5개국을 복속 시켜 과거 몽념에게 빼앗겼던 땅을 모조리 되찾아 옵니다. 이후 한왕 유신을 공격하여 투항시키고 그걸 도와주러온 황제 유방가지 요격해 사실상 항복에 가까운 조건으로 돌아가게 해줍니다. 이후에도 여후를 희롱하고 서방 26개국을 평정하였습니다. 한나라와 형제국을 맺는데 흉노가 형이 될만큼 압도적이었죠. 그 공적을 따지자면 결코 한신의 아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漢) 전장군(前將軍) 이광(李廣)
중국 한무제때의 명장으로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나중에 여포가 그 말을 듣게 되죠. 역시 명궁으로 이름이 높은데 한번의 화살로 돌을 꿰뚫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에 다시 한번 더 시도해선 실패로 끝나지만.... 흉노에 산채로 붙잡혔다가 기회를 틈타 적을 죽이고 말에 타서 도망친적도 있을 정도로 범상한 무공을 지닌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허나 대 흉노 전선의 영웅으로 활약한 곽거병, 위청등과 비교해서 이상할 정도로 공과가 상쇄되어 출세하곤 인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한(漢) 표기장군(驃騎将軍) 곽거병(霍去病) &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 한무제때 장수로 길지도 않은 인생을, 오직 흉노족과 싸우기 위해 태어났던 사람입니다. 처음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갔을때가 겨우 18살이었는데, 이때 적에게 포위되지만 지휘부를 노려 괴멸 시키고 승리를 거둡니다. 그후로는 그야말로 잠시도 쉬지 않고 흉노족과 싸워 6일 동안 다섯개의 부족을 괴멸 시키고 두명의 왕을 죽이는가 하면 한번에 2000명이 넘는 포로를 붙잡고 혼야왕을 항복시켰으며 위청(衛靑)과 함께 흉노 땅 일천리를 가로질어 7만명의 포로를 붙잡고 좌현왕을 공격했습니다. 그 모든 어마어마한 공적이 겨우 24살이 되기전까지의 일입니다. 그리고 요절하고 맙니다.
평소에 안하무인으로 굴고 오만한 성격에 병사들이 굶어도 자기 막사에서 호화롭게 식사를 했던 인물이지만 병사들의 충성도는 절대적이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라이벌 격인 위청은 싹싹하게 굴고 친절하게 사람들을 대했지만 오히려 병사들에게 너무 굽신거리는 놈으로 찍혔다고....왕이 하사한 술을 강물에 뿌려 병사들이 나눠 먹게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창이 존경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위청의 어머니인 위온은 본래가 노비였고, 아버지는 평양후, 즉 초한지의 조참의 증손인 집안의 관리였습니다. 둘은 사통을 해서 위청을 낳았는데 당연히 신분이 한미하기 짝이 없었죠. 어린시절에도 괄시를 당하며 양치는 일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진시황제가 지은 감청궁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그곳의 죄수가위청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귀인이다! 후에 크게 될 것이다."
이에 위청이 웃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남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매질과 욕설을 안 당하면 다행인데, 어찌 벼슬 자리를 바라겠습니까."
헌데 누이인 무사황후 위자부가 한무제의 황후가 되면서 완전히 상황은 달라지게 됩니다. 여차여차해서 BC130년 거기장군의 신분으로 흉노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때 명장인 이광을 비롯하여 다른 한나라 장수들이 전부 패하는 상황에서도 위청은 혼자서 전과를 올립니다. 이때부터 대흉노전쟁의 중심으로 활약하며 허타오 지역을 빼앗아 정착지를 건설하고, 삭방(朔方)과 오원(五原)군을 설치하는등 많은 공을 세웁니다.
한(漢) 복파장군(伏波將軍) 노박덕(路博德) 복파장군 하면 마원이 떠오르지만, 이복파사(二伏波祠)는 복파장군 노박덕과 복파장군 마원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시기로 치면 노박덕이 먼저죠. 한무제때의 다른 명장들, 곧 곽거병 위청 이광 이릉 등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명성을 떨쳤다면 노박덕은 남월 정벌에서 명성을 떨쳤는데, 남월의 국도를 함락시키고 남월을 95년만에 멸망시킵니다. 그 전에 곽거병의 따라 공훈을 세운적도 여러번 있었죠.
한(漢) 광무제(光武帝)유수(劉秀) 중국에서 가장 군사적인 업적이 많은 왕이 누구냐, 가장 최고의 장수가 누구냐, 하면 말이 많겠지만 가장 최고의 지휘관이던 왕이 누구냐 하면 광무제라는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그 유명한 곤양의 싸움에서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삼십만 대군에 맞서 고작 12기의 기병으로 돌파하여 오천명을 끌어모아 격파하기도 합니다. 후에 사실상 사지로 보내는 화북원정에서 동마, 청독, 대동, 우래, 녹림의 세력들을 모조리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농서의 외효, 하서의 두융, 마지막으로 촉의 공손술을 무찌르고 거병한지 10년만에 천하를 평정하게 됩니다.
또한 광무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인품이 뛰어나고 온화한 군주중에 한명이기도 했는데 대략 이와 같습니다.
신시병과 평림병등이 유씨 형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자 가진 재물을 모두 풀어 그들에게 주어 인망을 끌어 모음
황제가 된후 고향에 돌아가서 고향 사람들과 크게 잔치를 벌이다가 동네 아낙들이 "폐하께서는 어릴 적엔 말수도 적고 숫기도 없으셨는데 천자가 되셔서 돌아오셨습니다" 하고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고 묻자 "온화함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호화롭게 음악 듣는걸 좋아하지 않고 귀중품이나 사치품을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음
가지고 다니는 보검은 부하에게 줘버리고 외국에서 귀한 말을 바치자 마차끄는데 씀
사냥을 다니다가 밤늦게 들어와서 궁궐의 관리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다른 문을 통해 들어오고는, 다음날 문을 열어주지 않은 관리는 벼슬을 높여주고 문을 열어준 관리는 한단계 강등시킴
황제가 된 후 친구인 엄자릉이 보고 싶어서 오기 싫다는데 사정사정해서 데려오자, 엄자릉이 황제가 된 유수에게 보통 친구 사이처럼 마구 막말하며 허물없이 굴어도 웃기만 함. 심지어는 자다가 엄자릉이 자다가 광유수의 배에 발까지 올려 놓아도 탓하지 않음.
개국공신들을 숙청하는 대신 토지와 재물을 하사하되 정사에는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피를 흘리지 않음
죄인들을 석방시키고 수리사업을 일으킴
중국 역사상 가장 직접 사령관으로 전쟁을 잘하는 군주였음에도 통일 후엔 전쟁이란 말도 못 꺼내게 함.
음려화가 아들을 낳은 후에 곽황후가 질투를 심하게 부리자 황후 자리는 바꾸지만 벼슬을 한단계 내렸을뿐 다른 처벌을 하지 않고 오히려 곽황후의 아들들을 왕에 봉함. 곽황후의 친척들을 탄압하지도 않음 곽황후의 모친이 죽자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가서 문상을 올림
잠팽을 시켜 적들을 공격하게 할때 “사람들의 욕심은 끊임이 없다. 농을 얻는다면 다시 촉을 바라볼 것이다. 군사들을 전쟁터에 내보낼 때마다 나의 머리에는 흰 머리털이 늘어간다.” 하며 병사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냄
광무제의 누님인 호양공주가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황제의 총신인 송홍이라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생겨 그래서 광무제에게 자신과 그 남자를 연결 시켜 줄것을 부탁하였는데 문제는 송홍은 이미 유부남이라는것
광무제는 누님을 병풍 뒤에 숨게 하고 송충을 불러서
"사람 신분이 높아지고 부유해지면 아내를 바꾸는 것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던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옛부터 가난할 때 사귄 친구를 잊어서는 안 되고 가난할 때 함께 고생을 한 아내는 버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貧賤之交不可忘,糟糠之妻不下當. 신이 벼슬이 올라 부귀를 누린다고 해서 술지게미와 쌀겨를 함께 씹어먹던 아내를 어찌 내치겠습니까?"
그러니까 광무제는 병풍 뒤의 누님을 웃으면서 돌아보며 조용히 소근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안되겠습니다. 누님."
영양성을 공격하던 도중 경시제 유현이 유씨 형제를 의심하여 형인 유연을 죽였을때, 방에 들어가서 마구 울었으나 바로 대군을 이끌고 유현을 공격하는대신 유현에게 사죄하며 죄를 뉘우치는 태도를 보이자 유현이 부끄러워 하며 파로대장군에 삼음
경시제 유현이 유수의 형인 유연을 토사구팽해서 죽였을때 슬픔을 참지 못해 홀로 울었으나, 유수가 황제가 되고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가 유현이 처자식과 함께 의복조차 갖추지 못하고 도망가는 모습을 보자 "유현을 회양왕에 봉하고, 누구라도 그를 해친다면 대역죄로 처리하겠다" 고 말함
12명으로 40만 군대를 돌파하여 8천명을 모아 적을 격파한 곤양 대첩의 결과에 대해 사람들이 물어보면 "내가 잘 싸운게 아니라 병사들이 잘 싸운것 뿐입니다."
광무제의 신하인 운대이십-팔장이나 마원같은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광무제가 좋다고 벼슬자리나 가지고 있는거 다 버리고 헐레벌떡 도와주러 오러 뛰어와서 합류하거나
혹은 잠팽이나 풍이처럼 적이었다가 항복하고 반해서 절대충성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더군요.
한(漢) 서역도호(西域都護) 반초(班超)
후한의 장수인데 본래 장수가 아니라 반초는 문관의 길을 걷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그에게 이런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변방에서 흉노족이 날마다 침입하며 백성들을 죽이니, 백성들이 비탄에 빠져 살아갈수가 없다."
이에 분노하고 슬퍼한 반초는 붓을 꺾으며 소리쳤습니다
"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집안에서 편안하게 붓만을 잡고 있겠는가?"
이로인하여 투필종군投筆從軍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나게 되었죠.
평생동안 붓만을 잡아본 그는 끓어오르는 협기와 의기만을 가지고 일생처음 문인이 아닌 무인으로서 흉노 원정군에 자원하게 되었는데, 우역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흉노족을 성공적으로 격퇴한 그는 31년간 서역(西域)에 머물며, 선선(躇善) ·우전(于蚊:코탄) ·소륵(疏勒) ·구자(龜玆:쿠차) ·언기(焉耆) 등지의 오아시스 국가를 정복하고 부하 감영(甘英)을 흑해(灣) 방면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습니다. 본래 감영은 로마에까지 가기로 하였으나 한나라와 로마가 직접적으로 교류하는것을 두려워한 파르티아 인들의 방해로 실패하였죠.
한나라의 군대의 기지는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이란)과 며칠 거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의 바그다드와 52km 거리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 군대는 이 지역을 몇 년간 다스렸습니다. 116년 로마의 황제 트라이아누스는 파르티아로 진격하여 크테시폰으로 진격을 했는데, 한나라의 요새와는 하루 거리였지만, 직접적인 접촉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선국에 사자(使者)로 갔을 때 흉노족의 사신들이 머물던 곳을 기습하여 섬멸하였는데 이때 '호랑이굴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결코 호랑이 새끼를 잡을 수 없다'(不入虎穴不得虎子)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지금도 자주 인용됩니다.
31년동안 서역을 지키던 반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조정에 탄원서를 내어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마쳤습니다. 반초가 돌아간 후 흉노는 활발하게 정복 활동을 벌이고 서역은 곧 흉노의 세력에 떨어졋습니다. 그 후 한은 몇 번이나 서역에 군대를 보내지만, 반초가 있던 시절의 영토는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반초의 누이인 반소가 또 엄청난 여인이죠...
한(漢)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잠팽(岑彭)
광무제의 부하로 운대이십-팔장중의 한명입니다. 본래 광무제의 적이었으나 항복하고 이후에 합류하죠. 이전의 상관이던 주유를 설득해 귀순시키고 형주 정벌에 큰 공을 세웠으며, 촉나라 공손술의 군대를 격파하며 승승장구 하다가 그만 자객의 암습에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잠팽이 군대가 형문에서 출발에 촉 땅에 도달할 때까지 군기가 엄정하고 약탈이 없었다고 합니다.
위(魏) 태조(太祖) 조조(曹操)
말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죠. 적벽대전의 패배로 중국사에서도 세손가락 안에 들 기회를 놓쳐버렸지만 그래도 대단하긴 합니다. 중요한것은 조조의 거점이 중원이었다는 것이죠. 그 수많은 적대적인 세력들 속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듯 한명 한명씩 물리치고 결국 하북 4주와 서주, 예주, 중원, 형주를 모조리 손에 넣는 기염을 발휘합니다. 사실상 후대의 서진이 거의 위를 물려받아 새로운 왕조의 패기같은게 전무한 나라였다는걸 생각하면 중국 통일에 가장 기여한 사람이 됩니다. 간웅(奸雄)이라는 칭호가 주는 그 미묘함은, 항우 조차도 들은적이 없는 소리죠.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0는 한신과 백기를 조조에게 비교하였습니다.
한수정후(漢壽亭侯) 관우(關羽)
너무 유명한 사람이죠. 정사 내용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원소가 대장(大將) 안량(顔良)을 보내 동군(東郡)태수 유연(劉延)을 백마(白馬)에서 공격하자, 조공은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先鋒)으로 삼아 이를 공격하게 했다. 관우는 안량의 휘개(麾蓋-병거에 달린 대장기 덮개)를 멀리서 보고 말을 채찍질해서 달려가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刺) 그 수급을 베어 돌아왔다. 원소의 제장(諸將)들 중 당해낼 자가 없었고 마침내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조공(曹公)이 표를 올려 관우를 한수정후(漢壽亭侯)에 봉했다
즉 병사들 사이에 둘러 쌓인 안량에게 혼자서 달려가 목을 베고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죠. 그 외에도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을 보는듯한 장면도 많습니다. 관우는 화살에 맞아 왼팔을 관통하자 상처는 치유되었으나 몹시 흐리며 비오는 날이면 늘 뼈가 아팠다고 합니다 의원이, “화살촉에 독이 있어 이 독이 뼈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응당 팔을 갈라 상처를 내고 뼈를 깎아내 독을 제거해야 하니 그 연후에야 이 통증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우는 이내 팔을 뻗어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르게 했는데, 이때 관우는 때마침 제장들을 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함께 하고 있었는데, 팔에서 피가 흘러 반기(盤器-대야, 접시)에 가득찼으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잔을 끌어당겨 담소를 나누며 태연자약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이 정사에 나와있는 내용입니다.
그 절정은 방덕전에서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쏘아 맞췄다는 것인데, 그러고도 그것때문에 관우가 크게 다쳤다거나 이런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머리에 화살까지 맞고도 오히려 얼마뒤 우금의 7군을 수몰시키기까지 합니다. 이 정도면 거의 무슨 터미네이터 수준이네요.
정로장군(征虜將軍) 장비(張飛)
다른 부분에서 장비의 무용이 크게 들어나지는 않으나 가장 압권은 장판파의 장면이죠. 조조군의 대군 앞에서 홀로 "내가 연인 장비다. 나와 겨루자!" 고 말하였으나 조조군이 전부 한명에게 압도당해 달려들지 못하는 장면이 정사에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게 들렸는지 기대승이 "삼국지연의에서 그런 장면이 나온다는데,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일이냐." 라고 말을 합니다. 이로 인해 알 수 있는건 기대승은 정사 삼국지는 안 읽어본듯 합니다. 나관중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됬는지 장비가 매복을 부리는등의 계교를 썻다고 소설적으로 꾸며주긴 하는데, 그게 실제로는 없으니 더 신기한 노릇이죠.
양(梁) 주서(注書) 진경지(陳慶之)
남북조 시대 본래 신분은 일개 시종이었습니다. 성격도 신중하고 검소한데다 음악이나 즐기는것도 전혀 좋아하지 않고, 무장임에도 궁술이나 검술에 거의 조예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주인이 부르면 한밤중에도 달려오는 전형적인 비서 타입이었는데 그 주인인 소연이 황제가 되자 군을 지휘하게 되어 기적같은 전공들을 세우게 됩니다. 적과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순간의 기습으로 패퇴시키고 이후 고작 7000명의 병사로 수십만이 버티고 있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수십개의 성을 빼았고 마음껏 활보하게 됩니다. 비유를 하자면 삼별초가 중국으로 건너가서 원나라의 성들을 마음껏 빼앗고 계속 옮기는것과 비슷할까요. 남북조 시대 때 남조의 유일하게 북조와 대등하게 버틸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죠.
양(梁) 보국장군(輔國將軍) 위예(韋叡)
진경지와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명장으로(정확히 말하면 진경지의 아버지 세대) 그런데 진경지처럼 몸이 허약했는데 이 양반은 한술 더 떠 가마에 올라 지휘를 했다고 합니다. 허나 하도 잘 싸워 북위 사람들은 위호라고 부르며 두려워 했다더군요.
삼국시대부터의 요지로 북위가 무려 120년동안이나 지키고 있던 합비성을 수공을 이용해 함락시키고, 양대안등이 북위군 80만을 100만 대군이라 이끌며 종리에서 그들을 격퇴해 10만을 수장 시키고 10만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리를 거둡니다. 남북조 시대 최대의 전투인 종리 전투인데, 양대안은 덕분에 한동안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시작을 하죠.
평소에 자비심이 강하며 고아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키우고, 집안의 재물은 전부 친지에게 나눠주어 집에 재화가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정로장군(征虜將軍) 양대안(楊大眼)
진경지가 뛰어난 명장이면서 동시에 약골이었다면, 양대안은 괴물같은 맹장이었습니다. 강족 출신으로 어렸을때 혼자서 호랑이를 잡은 적도 있고, 처음에 장수가 된것도 자기를 장수로 써달라고 직접 달리기 시범까지 보일 정도로 육체파였습니다. 전투에서는 장군이면서도 항상 선두에 써서 싸웠다고 하는데,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관우, 장비보다도 위에 있다." 는 당대 사람들의 평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마누라 역시도 말을 잘 타는등 범상하지 않아 싸움터에 나와도 같이 말을 타고 달릴 정도였는데, 마누라가 바람을 피웠다고 하네요. 호구?
북제(北齊) 곡율광(斛律光)
곡율광은 북제의 명장으로, 고장공 단소 등과 더불어 북제를 든든하게 지키던 명장이었습니다. 특히 북주군을 상대로 그는 가히 저승사자와도 같았는데 수십번을 싸우면서도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북주는 작전을 바꿔 그를 모략으로 제거하기로 했고, 음모에 말려된 왕은 곡율광은 의심해서 죽인뒤 그 후에야 실책을 깨닫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곡율광이 죽은뒤 집안을 수색해 보자 단 하나의 칼, 화살, 활도 없었고 쌓아놓은 재물도 전혀 없었거든요.
북주의 무제는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대사면령을 내려 죄수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딱 5년뒤, 곡율광에 한번도 못 이기던 북주의 군사들이 업성을 함락시키고 북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곡율광을 추모하여, 무제는 자신을 그토록 물 먹인 곡율광을 상주국 숭국공의 지위에 추서하며 말했습니다.
"곡율광이 살아 있었더라면, 내 어찌 제나라에 발을 디뎠겠는가!"
북제(北齊) 고장공(高長恭)
븍제의 황족으로 보통 난릉왕(蘭陵王)이라고 불리우죠. 북주의 군이 낙양을 공격한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여, 병사들에게는 대단히 인상적인 모습으로 기억에 남게 되는데 그를 위한 가요까지 만들어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허나 곡율광이 제거된 후 본인이 열심히 남아 싸우지만 그 역시 제거되고 북제는 멸망하고 맙니다. 야사에 따르면 대단한 미모를 가지고 있어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사기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가면을 썻다고 하네요.
북제(北齊) 단소(段韶)
남북조 시대 북제의 명장으로, 곡율광 고장공 등과 함께 나라를 굳건히 지킨 장수입니다. 평소에도 앞에 서서 적의 선봉을 활을 쏘아 죽일 정도의 무예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장으로서의 재기발랄함 역시 갖추고 있었습니다. 북제의 적인 북주는 돌궐과 자주 손을 잡고 북제를 공격하였는데, 돌궐족과 싸우기만 하면 이겼다더군요.
위지경덕(尉遲敬德)
당태종의 유명한 맹장으로 고작 스무명 남짓한 병사들과 함께 적군을 기습해 적장을 사로잡는걸 무슨 밥먹는것 처럼 했던 인물입니다. 본래 천민 출신이었지만 삭이라는 무기를 쓰는데 매우 능해 처음에는 당태종의 적이었지만 나중에는 당태종이 신뢰하는 장수가 됩니다. 왕세충군의 공격으로 당태종이 포위되자 적장 단웅신을 직접 죽이고 포위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왕세충의 군대와 싸울때 겨우 2명을 데리고 돌격, 왕세충의 조카 왕안과 그가 타고 있던 명마를 잡아 이세민에게 바치기도 합니다. 유흑달이 난을 일으켜 포위당하자 힘 쎈 장사들을 이끌고 직접 포위망을 뚫기도 하고 현무문의 변이 일어났을때는 70의 기마병을 데리고 가 직접 이원길을 쏘아죽이는등 활약했지만 고구려 원정에는 직접 출정하지 않고 한 쪽의 군사를 보내자고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은퇴 후에는 한가롭게 부인과 금을 타고 놀며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당(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위국공(衛國公) 이정(李靖)
당태종의 명장으로 돌궐 정벌, 토욕혼 정벌등에 큰 공을 세웠고 이례적일 정도로 호전적이었던 당나라군대의 기틀을 잡은 인물입니다. 또한 무경칠서 중에 하나인 병법서 이위공문대의 저자이기도 하죠. 능연각 24공신중에 하나.
당(唐) 이적(李勣)
본래의 이름은 서세적입니다. 17세의 나이로 반란군에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연에게 귀순하여 당 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우고 이세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죠. 이세민의 밑에서 명주도독으로서 이민족 토벌에서 활약하고 고구려 평양성 함락에도 공을 세웁니다. 이정이 죽기전 가지고 있던 병법서를 넘겨준 인물입니다.
토번(吐蕃) 재상(宰相) 가르친링(論欽陵)
당과 대적하던 토번의 명장으로 통일 제국인 당을 완벽하게 버로우 시킨 인물입니다. 669년, 당고종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설인귀를 대장으로 삼아 토번의 정벌을 명령하자 말 그대로 전멸시킵니다. 그리고 설인귀등을 붙잡아서 죽이지도 않고 실컷 꾸짖고 돌려보내는 굴욕을 주고, 이후 당은 복수를 위해 18만 대군을 투입하지만 역시 눈 녹듯 녹아버리고 또 장수들이 사로잡힐 뻔한걸 백제 출신의 장수 흑치상지가 결사대를 꾸려 저항하여 간신히 도망치게 됩니다. 고종의 뒤를 이어 측천무후 역시 10만 군을 보내지만 또다시 전멸하고, 이후에 왕효걸(王孝傑)에게 명을 내려 30만 병력을 먼저 보내고 후에 누사덕(婁師德)에게 10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지원하도록 합니다. 이때 가르친링의 병력은 고작 3만 밖에 없었지만, 놀랍게도 대승을 거두고 완벽하게 전멸을 시키고 맙니다. 이후 토번의 위상은 극도로 높아져, 당에서 토번에게 서신을 보낼때 "서쪽 정부"라고 일컫을 정도로 저자세로 나가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명장들의 숙명처럼 끝이 안좋은데, 토번의 치둑숭첸에게 자결을 명령받자 호수가에서 군말없이 자결을 합니다. 그가 남긴 시가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많은 작은 새가 한 마리 매에 의해 살해되며 많은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의 수달피에 의해 죽임을 당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