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터키 형제의 나라 드립이 먹힌다는게 엽기

깜장바위 작성일 11.08.26 22:3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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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터키가 형제국이 된 것은 고구려와 돌궐의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spc.gif

터키가 한국을 형제국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진 건 2002년 한일월드컵 였던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환단고기라는 판타지 소설책의 내용을 사실인양 홍보하던 붉은악마란 단체가 터키 응원을 주도하면서 퍼뜨렸던 것이 그 시작이었던 것 같네요.

 

당시 주위엔 중국, 일본, 북한 등 우리 역사에 아픔을 주었던 이웃들 뿐이었고, 가장 강력한 우방이라는 미국도 당시 벌어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으로 인해 반미감정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라 한국인들은 꽤나 고립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마침 등장한 '터키가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는 그런 한국인들에게 아주 반갑게 다가왔을 겁니다. 가깝지는 않더라도 이 지구상에 한국을 지지해주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소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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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퍼지게 된 이 이야기는 급기야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관중석에 대형 태극기와 아이일디즈(터키기)가 동시에 펼쳐지게 만들었고, 이는 방송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터키까지 전해져 터키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기에 이르렀죠. 그리고 그 덕분에 터키인들이 터키를 여행하는 한국인들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었음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왜 터키가 우리를 형제국으로 생각하는가에 집중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형제가 아닌 칸가르데쉬, 즉 피를 나눈 형제로 생각하는지 말이죠. 

6.25 전쟁때 터키가 미국에 이어 2번째 규모로 파병을 단행했던 것이 그 첫번째 이유로 꼽혔습니다. 15000명을 파병한 터키군에서는 3500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발생했죠. 대단한 희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대체 왜 터키가 한국에 파병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나온 주장이 '원래 터키는 고구려 때부터 우리를 형제로 생각해왔고 그때문에 형제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파병을 하게 된 것이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의 정통을 이어받은 국가를 남한으로 한정했다는 그 발상도 웃기지만, 아무튼 그 자세한 내용을 보면, 중국의 수당시절 고구려와 터키의 전신인 돌궐이 동맹을 맺고 중국에 대항을 했었고, 터키에서는 그것을 잊지 않고 자국의 역사교과서에서도 관련 내용을 교육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그럴듯한 내용은 순식간에 각종 게시판과 커뮤니티에 옮겨져 사실인 양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주장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을 인터넷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제 조카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다니는 중학교에서도 국사교사란 양반이 이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합니다.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고구려와 돌궐이 형제를 운운할 정도로 깊은 동맹관계였던 적이 있었는가? 과연 터키교과서에 그러한 내용이 기술되고 있는가?

제가 가진 역사지식 속에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저는 관련 자료들을 뒤지며 역사를 다시 되짚어 보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돌궐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에 그나마 찾아볼 수 있는 몇가지 기록을 살피며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

 

우선, 동로마제국의 역사가 Theophylactus Simocatta가 613년에 저술한 《Historiam》이란 역사서의 <VII. Origin of the Avars>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222222222_kfaction_copy.jpg?type=w1 ...대륙의 북부 전체를 지배했던 강력한 유목민족인 Avars는 그들의 서쪽 관할구에서 흥기한 신흥민족 Turks에게 멸망당했다.그리고 그 잔당들은 Turks로부터 동남쪽으로 1500마일 떨어진 Taugast로 달아났다. Taugast는 India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주요국가인데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는 barbarian들은 매우 용감하고 그 수가 많아 세상에 대적할 나라가 없었다. 그곳에서 Avars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Taugast의 공격을 받고 다시 한번 비참하게 몰락하여 Taugast와 동쪽으로 이웃해있는 Mouxri로 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 Mouxri라 불리는 나라의 국민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일상처럼 행해지는 혹독한 군사훈련으로 그 투지가 매우 높았다.

...So, when the Avars had been defeated (for we are returning to the account), some of them made their escape to those who inhabit Taugast. Taugast is a famous city, which is a total of one thousand five hundred miles distant from those who are called Turks, and which borders on the Indians. The barbarians whose abode is near Taugast are a very brave and numerous nation, and without rival in size among the nations of the world. Others of the Avars, who declined to humbler fortune because of their defeat, came to those who are called Mucri; this nation is the closest neighbor to the men of Taugast; it has great might in battle both because of its daily practice of drill and because of endurance of spirit in danger.

http://faction.co.kr/140095546231

  

 

여기서 일반적으로 Avars는 유연, Turks는 돌궐, Taugast는 북제(탁발선비), Mouxri는 고구려로 비정합니다.

돌궐은 시베리아에 있었던 고구려의 강력한 동맹 유연을 멸망시키며 등장한 유목국가였습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유연의 잔존 세력들은 돌궐에 쫓겨 북제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도 쫓겨 결국 고구려에 망명을 요청합니다. 이 내용과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돌궐이 자신들의 적과 동맹이었던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입니다. 고구려로서도 돌궐의 등장은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양원왕 7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가을 9월에 돌궐이 와서 신성을 에워 쌌다가 이기지 못하고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므로 왕이 장군 고흘을 시켜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대항하게 하여 이기고 적 1000여명을 살획하였다.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양원왕 7년은 A.D.551년으로, 552년 초 돌궐이 지금의 하북성 북단인 회황진 북쪽에서 유연을 격파하였으므로 551년에 돌궐이 신성까지 진출하긴 어려울 것이란 이의 제기를 할 수 있으나, <수서> 권84 돌궐전 문제 개황 2년(A.D.582)의 조서내용에 "왕년에 돌궐의 이계찰이 고려 말갈에 크게 격파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는것으로 보아 시기가 정확히 맞지 않더라도 돌궐의 동방진출 초기인 582년 이전 양자간에 어느정도의 충돌이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신라 진흥왕이 함흥까지 진출하는 상황에서도 고구려가 그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건 서북방의 돌궐이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겠죠.

 

또, 당시 고구려 주변국들의 동향을 살펴보아도 돌궐과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구당서> 권199 말갈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습니다.

 

 

...말갈은 무릇 수십 부로 나뉘어 있으며, 그 각각에 추수(酋帥)가 있어 혹은 고려에 복속하고 혹은 돌궐에 신속하였다.

其國凡爲數十部, 各有酋帥, 或附於高麗, 或臣於突厥.

 

 

기존에 대체로 고구려의 세력권 안에 있던 말갈의 일부 세력이 돌궐에 신속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돌궐의 영역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말갈은 속말말갈(후에 발해를 세운 말갈인 대조영의 출신부, 구당서 권 39 지리지 2 하북도 신주 및 여주조에 속말말갈을 부유말갈로도 적고 있고, 후에 속말말갈의 돌지계가 부여후로 책봉된 것으로 보아 속말말갈은 멸망한 부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임)로, 마침 돌궐이 실위에 지방관인 토둔을 두며 고구려 서북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6세기 후반 고구려를 자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수서 권81 동이 말갈전)

 

 

속말부는 고려와 접하고 있으며, 승병이 수천이고 대부분 용맹하여 자주 고려에 침공하고 노략질하였다.

粟末部, 與高麗相接, 勝兵數千, 多驍武, 每寇高麗中

 

 

그런데 동시기 속말말갈은 돌궐과는 싸운 기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속말말갈의 북쪽에 위치한 실위까지 남진한 돌궐에 속말말갈이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면 돌궐에 신속했다는 말갈(或臣於突厥)은 이 속말부가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583년 돌궐이 양분되어 수에게 대파되는 시기, 속말말갈은 고구려에게 패해 돌지계 등이 속말말갈의 8부 승병 수천명을 이끌고 수에 내부하게 됩니다(태평환우기 권 71 하북도 연주조 인용 북번풍속기). 이는 속말말갈이 그간 돌궐의 후방지원에 힘입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줍니다.

 

또한 547년 이후 물길의 퇴조와 함께 끊겼던 중국에 대한 조공이 563년부터 말갈이란 이름으로 다시 시작(위서, 북제서, 책부원구 조공문에 의해 노태돈이 작성한 표 참고)되는데요, 고구려사의 권위자 노태돈교수는 물길(勿吉)과 말갈(靺鞨)의 고음운이 똑같이 Mat-kat으로 같은 민족을 지칭한다고 해도 그 음사의 변동은 그 정치적 주체가 바뀐데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한다며 그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고구려와 극렬한 항쟁을 한 속말말갈로 꼽았습니다. 노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속말말갈이 조공을 하러 가기 위해선 고구려의 세력권인 요동을 거쳐 현재의 랴오닝성 차오양 지역인 유성에 진입하는것이 가장 빠르나 고구려가 이를 허락할리가 없고, 거란을 통과하자니 당시 속말말갈과 거란은 해마다 전투를 치루는 적대적 관계(其國西北與契丹相接, 每相劫掠, 수서 말갈전)에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거란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우회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루트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곳은 돌궐의 영역이었으므로 돌궐을 우방으로 두지 않았다면 이를 이용하는것이 불가능했습니다.

 

또 수서 거란전에 의하면 거란 역시도 고구려와 돌궐의 핍박을 받으며(當後魏時, 爲高麗所侵, 部落萬餘口求內附, 止于白比河. 其後爲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각각에 차례로 복속되다 수가 강해지자 수에 내부하게 됩니다. 즉 고구려와 돌궐이 전쟁을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두개 뿐이지만, 속말말갈과 거란의 당시 동향을 보았을때 양자는 계속해서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적이었던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구당서> 권75 위운기전과 <신당서> 권116 위운기전, <자치통감> 권180 수기 4 양제 대업 원년(A.D.605)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거란이 영주지역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위운기에게 명을 내려 돌궐의 병사를 이끌고서 거란부락을 토벌하도록 보냈다. 돌궐의 계민가한이 병사 2만명을 동원했다. (중략) 운기가 거란의 경계에 들어갈 때에 돌궐의 병사 2만을 상인단으로 위장시켜 유성에서 고려와 교역하러 간다고 거란에게 속이고, 무리 가운데 수나라 사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고 감히 말하는 자는 죽여버렸다. 거란이 방어를 하지 않았다.
會契丹入抄營州, 詔雲起護突厥兵 往討契丹部落 啓民可汗發騎 (중략) 雲起旣入其界, 使突厥詐云向柳城郡 欲共高麗貿易. 勿言營中有隋使, 敢漏泄者斬之. 契丹不備 

 

 

거란이 동돌궐과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2만명 규모의 교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도 이러한 교역이 몇차례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구려와 돌궐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죠.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607년, 수 양제는 동돌궐의 수장 계민가한이 고구려 사신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합니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18년, 내용 길어 원문 생략). 두 나라의 연합 가능성에 격분한 양제는 고구려에게 위협을 가하고 결국 4년 후 고구려를 친다는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수에 지나치게 굴종적인 계민가한의 태도와 돌궐이 고구려를 도운 흔적이 없는것을 볼때 돌궐과 고구려의 연합은 시도 단계에서 끝나버린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수가 내부분열을 일으켰을때 돌궐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강성해져 고구려따위(?)와 연합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고, 곧이어 중국에 새로이 등장한 당 왕조에 굴복해 당의 고구려 원정에 다수의 돌궐인들이 동참(호쇼촤이담 퀼테긴비문)하게 됩니다.

 

즉, 고구려와 돌궐이 우호적, 혹은 적대적이지 않은 관계였던 기간은 길어봤자 돌궐이 수에게 굴복하기 시작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의 20여년 뿐이었고, 이 기간 내에서도 동맹이라고 까지 불릴 만한 관계가 형성된 적은 없었다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돌궐이 고구려와 피를 나눈 형제라 수당과 함께 맞서 싸웠었고, 이런 역사를 터키에서도 교육해 지금도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국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인 양 퍼지고 있으니 참 어이가 없는 것이죠. 정말 터키 교과서에서 그러한 내용을 실었나 궁금하여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미 터키 대사관에 누군가 질문글을 올려놓은것이 있었습니다. 이미 대사관측의 답변도 되어 있었구요.



질문: 터키역사교과서에서 '돌궐과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 사실인가요? [ 등록일 : 2006.06.15 ]

 

답변: 질문하신 내용과 유사한 질문을 저희 공관 홈페이지에 남기신 분이 있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터키 교육부에 현재 사용중인 교과서를 요청, 확인해 본 결과, 고구려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형제의 나라라는 말도 당시에 쓰여졌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투르크가 돌궐의 다른 발음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만, 터키역사에서는 '굑 튜르크'로 알려진 국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터키인들은 터키를 튜르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튜르키예'라고 부르며, 튜르크는 터키인을 말합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http://www.mofat.go.kr/incboard/minwondetail.jsp?txtBoardId=M0023&txtBoardSeqNo=142505&txtCurrPage=1&txtLineNo=10&txtSerItem=TITLE&txtSerStr=고구려&txtPwd=&Category=tur-ankara&txtResultURL=sciconfirm.jsp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고구려와의 동맹에 관련된 내용은 커녕 고구려 자체가 언급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인들(물론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고 계신분들도 많지만)이 사실처럼 믿고 있었던 이야기가 완벽한 날조였던 것입니다.

 

사실 터키인들이 한국을 '피를 나눈 형제'로 부르게 된 배경에는 이슬람권 특유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슬람권인 터키인들에게 피를 나눈 형제, 즉 칸가르데쉬라는 표현은 굉장히 흔하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사람 뿐 아니라 자국의 이익과 관계되는 나라들에는 사이가 가깝고 멀고를 떠나서 모두 칸가르데쉬로 부른다고 합니다. 터키와 인접한 주변국들은 물론 유럽 국가, 중국 일본에게도 이러한 표현을 자주 씁니다. 터키는 한국전쟁에 참전했을때 미국과의 관계에서 큰 실익을 보았습니다. 한국 역시 터키에게 이익을 주는 수많은 형제국중 하나인 칸가르데쉬 코리아가 된 것이죠.

 

몇달 전, 우리나라로 치면 파코즈하드웨어에 해당하는 터키의 컴퓨터 관련 커뮤니티 Donanim Haber에서 "터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형제국가는(En sevdiğiniz kardeş ülke hangisi)?" 이란 주제로 설문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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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forum.donanimhaber.com/m_28302100/mpage_2/tm.htm

 

  

아제르바이잔, 파키스탄, 한국,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알바니아, 이탈리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기타의 항목중 한국은 14%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태극기보다 큰 대형 터키기를 흔들며 형제를 반겼던 한국인들에겐 굉장히 실망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설문의 댓글들에는 일본, 쿠바, 핀란드, 폴란드, 노르웨이 등 수많은 나라들이 형제국으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를 식민지배 했던 일본의 경우 수차례 언급되며 강한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한국이 14%나 차지하며 선전한 건, 월드컵때의 기억 때문일 겁니다. 결국 터키인들에게 한국은 고구려 돌궐 관계사와는 관계없이 그저 한국전쟁때 인연이 있었던 친근한 국가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터키와 한국이 돌궐과 고구려 때부터 혈맹국이었다는 날조문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작성했던 걸까요?

 

저는 사실 엉터리 선동문을 작성한 주인공보다, 날조된 내용에 감동받아 사실관계를 파악지도 않고 퍼다 나르기에 열심히였던 한국인들의 고질적 습성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습니다. 지금도 네이트나 아고라에 상주하는 네티즌들의 행태를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게시판과 댓글란엔 각종 음모론과 루머가 넘쳐나고 읽는 사람들은 먼저 의심하기 보단 고개를 끄덕이며 추천 버튼부터 닥치는대로 눌러댑니다. 2002년과 비교해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요.

 

학생에게 먼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가르쳐주는대로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 주입식 교육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같은 대한민국의 멍청한 상태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출처:http://faction.co.kr/140113894243 시원한냉면님 블로그

 

요약: 형제의 나라(칸카르데쉬) 는 외교적 언사이다. 고구려와 돌궐은 그다지 친한 외교관계가 아니다. 터키교과서에는 우리나라를 가르키지 않는다.

 625전쟁에도 형제의 나라라서 참전한게 아니라 당시 흑해를 둘러싼 소련과의 마찰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거기에 서방국가와 친밀한 관계유지를 위해서임. 덕분에 전후에 터키는 바로 나토가입함.

625참전국 중 2위가 아닌 4위에 해당하는 참전국

미국 1,789,000
영국 56,000
캐나다 25,687
터키 14,936
호주 8,407
필리핀 7,420
타이 6,326

물론 625전쟁시 도움은 상당한 은혜인건 사실이고 양국간 외교관계도 상당히 친밀한 것은 맞지만 궂이 왜곡까지 하면서 이유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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