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키보드 워리어 정조 대왕

점적천석 작성일 12.03.16 23: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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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은 조선의 왕 중에서도 몹시 입이 험한 편이었는데

이 사실은 최근에 발견된 비밀 편지 299통으로 밝혀졌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서영보에게 "호로 새꺄(胡種子)"

김매순에게 "입에서 젖비린내나고 사람 같지도 않는 놈이 경박하고 어지러워서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는구나!"

황인기와 김이수에게 "이놈들이 어떤 놈들이기에 주뒹아리를 함부로 놀리느냐!"


서매수에게 "늙고 힘없는"

김의순에게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하고 졸렬한"

이노춘에게 "약하고 물러터진 X"

심환지에게 "갈수록 입조심을 안하는 생각없는 늙은이 같으니.."

  

그외에 '개에 물린 꿩 신세’ ‘볼기까고 주먹 맞기’ 등의 속담도 마구 구사하였다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다"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



그리고 "近日僻類爲뒤 쥭박 쥭之時, 有時有此無根之"

말하다가 너무 빡쳐서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안났는지 한글로 뒤 쥭박 쥭이라 적어주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빡치느라 마구 쓰다보니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5경이 지났다. 내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건 마치 너무 황당하고 화가 나 정신없이 천플을 달며 키배를 벌이다 보니 새벽이 된 이치와 같다



편지를 쓰다가 중간에


呵자를 세번 써서 呵呵呵 

이 단어의 의미를 찾자면 껄껄껄 요즘 식으로 하면 "ㅋㅋㅋㅋㅋㅋ"






그는 경연 중에 "경들에게는 더 배울것도 없다." 하며 경연을 폐지하기도 하였으며

신하에게 대놓고 "공부 좀 하시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담배를 정말 사랑하여 신하들의 빗발치는 금연 상소도 물리치고 끝까지 담배를 피웠으며

심지어 조선의 대학자들을 모여놓고 시험 주제로 담배를 내기도 하였다.


 










정조 대왕이 했던 담배 예찬론



"여러 가지 식물 중에 사용함에 이롭고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는 남령초만 한 것이 없다.

이 풀은 『본초(本草)』에도 실려 있지 않고 『이아(爾雅)』에도 보이지 않지만,

 후세에 나와서 약상자 속의 필수품이 되었다.

일찍이 맛보니, 그 맛은 제호탕보다 낫고 향기는 난초향보다 나으며,

술에 비교하면 취해서 실언하는 잘못은 없으면서 선왕들이 말씀하신 합환의 즐거움이 있으며,

차에 비하면 입에 맞지 않아 억지로 마시는 괴로움은 없으면서 도가에서 말하는 상쾌함이 있다.

……민생에 이용되는 것으로 이만큼 덕이 있고 이만큼 공이 큰 것이 어디 있겠느냐?"




"화기(火氣)로 차가운 담(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를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편안히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 뒤엉켜서 산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을 비추듯 바로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붓방아를 찧을 때에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고뇌를 편안하게 누그러뜨리는 것도 그 힘이다."






또한 정조 임금은 과연 신궁이라 이름이 높았던 이성계의 후손이라서인지, 대단한 활실력을 자랑하였다.


1792년의 기록 10월 12일의 기록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巡)에 41발을 맞혔다


1순은 다섯발을 뜻한다. 즉 50발을 쏘아서 41발을 맞추었다는 이야기다.
정조 임금은 이달 20일에 또 화살을 쏘아 41발을 맞추었다.

그런데, 10일이 지난 30일에는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그러면서 스스로 하는 말은,

"나도 천성이 활쏘기를 좋아하고 또 그것이 선업을 이어가는 한 가지 일이라는 생각도 들어 젊은 시절에는 활쏘기를 자주 했고 쏘았다 하면 40여 발을 맞힌 적이 자주 있었으나, 중간에 10여 년은 그만두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10여 년 동안에도 때로 혹 활쏘기를 하긴 했어도 매번 몇 순(巡)에서 그쳤고 10순을 다 쏘아본 적은 없었다."


즉 10년 가까이 거의 화살을 만져보지도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런 상태에서 근 10여년만에 처음으로 50여발을 쏘았는데, 41발을 맞춘것이 정조의 활 실력이었다.



그리고 그 뒤의 기록들은 실로 무시무시한 수준인데,


1792년 11월 21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1월 22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1월 23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1월 25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 정조 대왕은 충격적인 말을 신하들에게 하였는데,

“내가 요즈음 활쏘기에서 49발에 그치고 마는 것은 모조리 다 명중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신하들에게 말하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15발을 쏘아 14발을 맞추면서 이것이 허풍이 아님을 증명해보였다.
일설로는 이렇게 일부러 50발을 모두 맞추지 않은것은 신하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정조 대왕의 "일부러 49발만 맞추기" 는 그 후로도 계속 되었다.

1792년 12월 4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2월 11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2월 16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2월 19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1792년 12월 22일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활쏘기에 있어서는 또 타고난 천분이어서 50발 중에 49발쏘았는데, 이때 왕은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가득차면 못쓰는 것이다."
했었다.

 

─ 천릉지문 中

 

 

사족 : 임진왜란의 영웅 충무공 이순신 같은 경우에는 50발 중에 42발을 맞추고는

         좋은 기록이라고 생각해 몹시 흐뭇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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