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별과제 만들던 복학생

으캬하하하 작성일 12.05.27 17:4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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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년전이다. 내가 갓 입학한지 얼마 안 돼서 기숙사에서 살 때다. 그런데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조별과제가 포함된 토론과목을 반드시 이수해야했다. 같은 조 사람 중 나이가 적어도 30은 되어보이는 복학생이 있었다. 조별과제를 어떻게 분담할지 정하기로 했다. 프리라이딩을 하려는 것 같았다.

"글이라도 좀 써 주면 안 되겠습니까?"

했더니,

"글만 잘 써서 무엇하겠소. 난 ppt나 만들테니 정 급하면 당신이 직접 하시오."

대단히 무뚝뚝한 복학생이었다. 역할 분담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ppt나 잘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ppt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빨리 만드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애니메이션 효과를 넣고 아트워크를 수정하며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고치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발표날이 가까워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수정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발표할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고친단 말이오? 복학생, 외고집이시구먼. 발표 준비할 시간이 없다니까요."

복학생은 퉁명스럽게,

"다른 조 가쇼. 난 못하겠소."

하고 내뱉는다. 이미 조 다 나눴는데 뭔 헛소리란 말인가. 발표 날 맞추기는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교수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발표날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하쇼."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ppt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고치다가 관두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ppt를 아이패드에 띄워 놓고 태연스럽게 학관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ppt를 맥북에서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메일로 보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ppt다.

발표날을 미루고 다음 날 발표해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조별과제를 해 가지고 학점이 나올 턱이 없다. 조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조직생활도 모르고 불쾌하고 무뚝뚝한 복학생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복학생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학생회관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아싸다워 보였다. 청바지와 가죽잠바, 담배연기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복학생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발표날 ppt를  내놨더니 교수님께서는 이쁘게 만들었다고 야단이다. 다른 조가 한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조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니, ppt가 한 페이지에 너무 많은 양을 담고 있으면 보기가 불편하고, 그렇다고 너무 양이 적으면 집중도가 떨어지며 디자인도 지나치게 요란하거나 수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요렇게 꼭 알맞은 ppt는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복학생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레포트는 혹 스테플러가 떨어지면 딱풀을 써서 붙인 후 다시 스테이플러를 찍어서 쉬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요새 레포트는 테이프로 붙여서 내고 심지어 포스트잇으로도 붙여서 내니 한 번 떨어지면 주체할 수가 없다. 예전에는 레포트를 쓸 때, 질 좋은 참고문헌을 도서관에서 잔뜩 찾아서 참고하여 쓰곤 했다. 그리고 나서도 고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제출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해피레포트에서 검색해서 다운받아 이름만 바꿔 제출한다. 금방 쓸 수는 있다. 그러나 걸리면 F학점이고 국회의원직도 위험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자기가 직접 레포트며 논문을 쓰는 사람이 있을리 없다.


족보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고 나서 사람들이 족보를 만들어 복사실에 맡겨 놓으면 교수별, 수업별로 족보를 찾아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문제지를 걷어가 기억에 의존해서 올려놓은 족보가 있었다. 복원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실제 이것이 족보가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정성들여 족보를 복원할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 학점 올려줄지도 모르는 족보를 제공하는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학점은 학점이요 장학금은 장학금지만, 공부를 하는 그 순간만은 오직 자신의 실력을 쌓는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레포트를 만들어내고 조별발표를 하였다.

이 PPT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복학생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학점을 받아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복학생이 나 같은 신입생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조별과제가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복학생을 찾아가서 치킨에 맥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수업시간에 가서 그 복학생을 찾았다. 그러나 그 복학생이 앉았던 자리에 복학생은 있지 아니했다. 고시공부를 위해 휴학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복학생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복잡하고 안타까웠다. 맞은편 학생회관의 지붕 추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복학생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어차피 휴학할 거 조별과제 엉망이 돼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거구나.

오늘 수업에 들어갔더니 교수님께서 조별과제 성적을 나눠주고 계셨다. 이젠 내가 복학생이 되서 PPT를 만드는 입장이 되어보니, 4년전 그 복학생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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