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메일주소 좀 알려줄래?”
쭈뼛쭈뼛 수줍게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새 학기를 시작하고 아직은 낯선 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메일주소 교환’이었다. 개인휴대전화(PCS)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90년대 후반, 메일주소는 요즘의 핸드폰 번호만큼이나 중요한 소통의 실마리가 됐다. 1997년 5월, 한메일넷(현 다음)에서 국내 최초 무료 웹메일 서비스인 ‘한메일’을 제공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시절 한메일에서 생애 첫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다는 대학원생 서유정(26)씨는 “친한 친구들과 일주일에 5~6통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새로 온 메일을 확인할 때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아련하다”고 회고했다. 한메일은 도입 1년 만인 98년에 가입자 수 100만 명을 넘어서며 명실 공히 ‘국민메일’로 부상했다. 한메일은 이후 다음메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2012년 현재 가입자 수 3700만 명, 하루 이용자 수는 400만 명가량이라고 다음 측은 밝혔다.
▲ 1997년 한메일넷 초기 화면, 2000년 다음 초기 화면과 메일 창 화면. ⓒ다음
토종 포털 ‘다음’, 글로벌 거인 ‘야후’를 꺾다
사실 한메일의 성공은 국내 인터넷 시장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한메일이 서비스를 시작한 1997년 당시에는 야후(yahoo)나 라이코스(lycos) 등 미국계 검색포털 기업들이 인터넷 시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료 웹메일을 앞세운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사의 핫메일까지 들어오면서 우리의 인터넷 영토가 빠른 속도로 외국계 기업들에게 점령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은 드넓은 인터넷 시장을 그대로 외국계에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로 무료메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한메일이라는 이름은 ‘넓고 크다(澣)’는 뜻과 우리 민족을 나타내는 ‘한(韓)’을 상징하는 것으로, 민족주의적 의식을 드러냈다.
다음은 민족주의 전략을 마케팅에서 적극 활용했다. 1997년 당시 한메일넷의 초기화면에 는 태극문양이 등장했고, ‘재외동포에게 태극기 보내기 운동’이 추진되기도 했다. 1999년 중앙일간지에 게재된 다음의 인쇄광고는 더 노골적이었다. “광개토대왕님, 야후는 다음이 꺾겠습니다”, “이순신장군님, 야후는 다음이 물리치겠습니다” 등의 도발적인 광고로 당시의 ‘대세’ 야후에 도전장을 던졌다. 다음은 그해 11월 기술주 중심의 주식거래소인 코스닥에 상장됐고, 2003년에는 회원수 3400만 명을 기록하며 야후를 꺾었다.
▲ 미국계 포털 '야후'를 넘어서기 위한 '다음'의 신문 인쇄 광고.
다음의 인기 요소 중 또 하나는 1999년 등장한 ‘다음 카페’였다. 다음 카페는 피씨(PC)통신의 커뮤니티를 웹으로 옮겨놓은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포털의 특성상 PC통신 보다 자료 올리기나 회원관리 등이 쉽고 접근성도 높았기 때문에 하이텔, 유니텔과 같은 PC통신 동호회가 대거 이동했다.
다음 카페는 정보 교류를 넘어 젊은 세대의 ‘문화 트렌드(흐름)’를 주도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 ‘얼짱(얼굴짱)’ 열풍을 일으킨 곳도 다음 카페였다. ‘5대 얼짱(cafe.daum.net/5i)’이란 이름의 다음 카페에 이른바 ‘훈남훈녀’로 부를 만한 외모의 일반인들이 소개되면서 ‘얼짱’이라는 말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이 카페는 2012년 현재 회원수가 34만 명이 넘는 초대형 커뮤니티로 성장했는데, 정기적으로 후보 추천을 받은 다음, 네티즌 투표 등 까다로운 과정을 걸쳐 얼짱을 선발한다. 연예기획사들이 이를 눈여겨보다가 연기자나 가수 등으로 캐스팅 하는 경우도 많다.
이 같은 경로로 스타가 된 ‘얼짱 1세대’로는 배우 구혜선 박한별 강은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제 네티즌은 스타를 직접 발굴하는 주체로 등장했고, 이를 계기로 얼짱과 관련된 카페들이 여러 포탈에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러나 ‘얼짱 신드롬’에는 부작용도 있었다. 얼짱 카페에 초중고생이 장난삼아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가 인신공격성 댓글이나 안티카페 등의 협박에 시달린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당시 언론들이 보도했다.
네티즌의 ‘애정남’으로 등장한 '네이버 지식인'
한메일과 카페로 포털 문화를 이끌던 다음의 독주를 막아선 것은 네이버였다. 1999년 6월 첫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한동안 큰 호응을 얻지 못하던 네이버는 2002년 10월 지식검색서비스인 ‘지식인(iN)’을 개설하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2003년에는 검색 시장의 1인자로 등극했다. ‘지식인’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시작한 것은 독특한 광고 때문이었다. 당시 TV와 신문 등에 등장한 지식인 광고는 사소하지만 모두가 호기심을 느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버스에 타면 왼쪽 손잡이와 오른쪽 손잡이 중 어디를 잡아야 하나요?”
“영화관의 컵 받침대는 어느 쪽을 사용해야 하나요?”
최근 한국방송(KBS) 개그콘서트의 ‘애정남’이 애매한 것들을 정리해 인기를 모았던 것처럼 지식인 서비스는 일찌감치 포털계의 애정남 역할을 했다. 사실 네티즌이 묻고 네티즌이 답하는 지식문답 서비스는 지난 2000년 인터넷 한겨레가 ‘디비딕’이란 이름으로 가장 먼저 시작했다. ‘묻고 답하는 커뮤니티’라는 구호를 내세워 운영되던 디비딕은 그러나 수익창출이 어려워지면서 2002년 엠파스에 인수돼 ‘지식거래소’로 운영되다가 네이버 지식인에 밀려나고 말았다. 지식인은 재미삼아 하는 질문 뿐 아니라 학습과 건강, 지리 등 다양한 분야의 실용적 정보와 지식이 오가는 공간이 되면서 네이버에 대한 이용자들의 충성도를 높여주었다. 네이버는 성실하고 수준 높은 답변을 해주는 이용자에게 감사패와 기념품을 증정하는 등 다양한 인센티브도 마련했다.
▲ 지식검색의 원조로 불리는‘디비딕’사이트 로고. ⓒ 디비딕 캡처
▲ 디비딕을 인수한 뒤 처음으로 지식검색을 선보인 엠파스 지식거래소. ⓒ엠파스
▲ 네이버가 포털1위로 등극하는데 큰 역할을 한 지식인. ⓒ 네이버
지식인은 한동안 질문에 대한 답변 수준이 떨어지면서 '초딩'들의 놀이터가 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2008년경 치과의사 출신의 ‘핫바 할배’ 조광현(77)씨가 인생 상담을 펼치는 등 새로운 ‘답변 스타’들이 등장하면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조씨는 “여자가 핫바를 씹어 먹지 않고 빨아먹는 건 저와 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인가요?”라는 질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꽃뱀이 아닌가 확인해봐야 합니다”라고 답변해 ‘핫바 할배’로 불리게 됐다. 이후 조씨는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등에 대해 직설적이면서도 연륜이 담긴 답변을 꼼꼼히 달아 적잖은 추종자를 만들었다.
네이버가 지식인 서비스를 계기로 포털 문화를 주도하면서 다음의 카페 이용자들도 네이버카페로 많이 이동했다. 그래서 현재 다음에는 구성원들의 연령대가 40~50대로 높은 동호회나 동창 모임 위주의 카페가 많이 남아있다. 반면 네이버 카페는 회원들의 연령대가 상대적으로 젊고 네이버의 ‘파워 블로거’들을 추종하다 관련 카페 활동을 하게 된 이용자들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다음 카페에는 가장 많은 회원수를 자랑하는 ‘엽기 혹은 진실’이나 여성들의 패션, 성형, 화장 커뮤니티인 ‘소울드레서’, ‘쌍화차 코코아’, ‘화장발’ 등 이른바 ‘여성 삼국’이 사회 현안에도 뚜렷한 목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또 다음의 토론마당인 ‘아고라’는 2008년 광우병 촛불 시위 등 중요한 정치사회적 쟁점이 부상할 때마다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광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네이버가 명실상부 1위 포털이 된 데에는 뛰어난 검색 기능도 한 몫 했다. 세계적 검색엔진인 구글에 비해 정보량은 부족하지만 훨씬 간편하고 정확하게 검색이 되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통합검색은 입력된 키워드에 대해 지식인, 카페와 블로그, 사전, 이미지, 동영상, 음악, 최신 뉴스, 지역, 책, 쇼핑 등 관련된 모든 자료를 섹션별로 분류해 보여 준다. 이런 검색 방식은 네이버가 국내 처음으로 시작했는데, 현재는 다른 포털도 대부분 이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검색과 지식인의 인기를 바탕으로 네이버가 2012년 현재 1일 방문자 1800만 명을 기록할 정도로 성장하는 동안, 네티즌의 뉴스 읽기 방식도 달라졌다. 종이신문을 읽거나 신문방송의 홈페이지를 찾아가는 대신,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의 뉴스캐스트를 통해 여러 언론사 기사를 한꺼번에 읽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뉴스 편집 기능을 수행하는 포털을 언론사로 봐야 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언론관련 심의기구 등에서 벌어지고 있기도 하다.
2세대 만화 ‘웹툰’의 전성시대 활짝
재미를 찾아 포털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웹에서 볼 수 있는 만화, 즉 ‘웹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2004년 강풀의 <순정만화>가 다음에 연재돼 인기를 모으면서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다양한 웹툰이 등장했다. 출판만화계의 인기작가들도 속속 웹툰으로 진출했다.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던 <풀하우스>의 원작 작가인 원수연과 <샤베트>를 그린 최경아 등이 그들이다. 원수연은 네이버웹툰에서 <매리는 외박중>을, 최경아는 <크레이지 커피캣>을 연재했다. <매리는 외박중>의 경우 KBS2 TV에서 드라마로 제작했고, 강풀의 <이웃사람>이 최근 영화화하는 등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영화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매일 다양한 웹툰들을 선보이고 있는 네이버,다음 웹툰. ⓒ 각 포털 화면 캡처
또 만화가를 꿈꾸는 일반인들이 작품을 올리는 네이버의 ‘도전만화’, ‘베스트도전’ 등의 코너를 통해 신인작가들이 속속 웹툰계에 등단했다. 재능만 있으면 웹툰 작가가 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야후 카툰세상>에서 ‘열혈 초등학교’를 연재하는 귀귀, <다음 만화속 세상>에서 ‘다이어터’를 그리는 캐러맬, <네이버 웹툰>에서 ‘치즈인더트랩’을 연재하는 순끼가 대표적인 신인들이다. 과거 유명만화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골방에서 일을 배우던 지망생들이 이제는 ‘웹투니스트’를 꿈꾸며 포털로 모여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