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무인열전

짱공이시다 작성일 12.10.06 17: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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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 전설의 비도(飛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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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무예도 무예지만 지략또한 매우 뛰어나 당나라를 벌벌떨게 만들엇던 장수



사수대첩때에는 연개소문이 50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서 최고라고 일컷던

 

방효태와 그의 아들들 13명을 단칼에 베어버리며 당나라군을 전멸시킨다


방효태 "연개소문이 고구려인이라는것이 우리한테 아주 큰 비극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검을 논하는 자리에 이런 정치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건, 어쩔 수 없이 


그의 특출난 능력이 '기록'에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름없는 필부들 중에 무술에 특출난 인물들도 많았을 것이다. 


고구려만 해도 검은 옷 입은 무서운 아저씨들이 쫙 깔려있었으니까.


그러나 결국 기록이 없으면 이야기가 불가능하니까, 


그나마 정치인 중에서도 무술이 뛰어났던 자, 예를 들어 장군들을 들 수밖에 없다.


헌데 이 연개소문 아저씨, '그나마'라는 표현을 붙이기가 죄송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검의 대가였단다.


그것도 한손검도 쌍칼도 아닌 5개의 검을 사용했다는데, 말도 안돼. 


내가 만화에서 3검술은 봤어도 5검술은 처음 듣는다.


아저씨 설마... 촉수인간?

 

은 구라고, 다섯개의 검을 다 휘두르는 게 아니라 '던지면서' 싸웠다고 기록에 전한다. 이른바 고구려 무술로 이름난 '비도술'이 바로 그것.


지금은 짤막한 기록들만 전해지고 실전된 무술이지만, 여러개의 검을 휘두르고 던지는 비도술은 중국인들에게 경악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칼 꼬나들고 열심히 치고받고 잘 싸우던 놈이 갑자기 휙하고 칼을 집어던지면 - 게다가 명중까지 하면 상대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 자체로도 당황스러운 기술임이 분명한데, 이 아저씨는 아예 비도술 마스터 랭크를 찍었는지 5차지까지 가능했던 모양이다.


중국측의 사료에 의하면 당시 당나라 사령관이었던 설인귀가 자신의 특기였던 궁술로 연개소문과 1:1 한판을 벌이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무려 신전(神箭)이라 불리는 그의 궁술을 연개소문은 다섯개의 비도를 던지는 것으로 대적, 거의 호각으로 붙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신전이고 나불이고 갖다 버리더라도 설인귀가 사용한 건 무려 '활'이었다. 활이 얼마나 빠른지 아는가?


적중사거리 70미터의 현대 양궁의 화살은 최대 80m/s의 속도로 과녁에 꽂힌다. 한마디로  화살이란 100미터를 1초안에 비행하는 흉기다.


그런 활을 쏘는 적장에게 '칼을 던져' 대적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연개소문의 전투능력을 가늠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에 가깝다.


잡설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사용한 비검술은 일종의 '부메랑' 이거나 


무협지에 나오는 '어검술'이라고 하는데 말이야 이렇든 저렇든


그런 사기스킬을 실재로 구현했든 아니면 걍 체력과 깡으로 묘기를 펼쳤든, 


정치 이력만큼이나 무력도 상당했음은 이미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 그가 살아있을 당시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이름을 두려워했고, 실제로 그 기간동안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에도 건재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실권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들이 서로 반목, 결국 고구려는 내분으로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지금, 중국인들은 아직도 그의 무용을 기억하여 


들의 경극에 다섯개의 칼을 등에 맨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들은 그 장수의 이름을 '비도' - 혹은 '청룡'이라 부른다. 바로 4대 신수 중 동방을 다스리는 일역,


즉 고구려의 지배자를 의미한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의 이야기들에 따르면 고구려 장수들은 실제로

5자루의 검을 들고 전쟁터에서 싸웠습니다. 일반 상식에 따르면 무거운데다

거추장 스러워서 그렇게 많이 들고 싸우러 나간다는 것은 사실 자살행위입니다.

거기다 최근들어 그 검을 날리는 표창으로 썼다는 등 말도 않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단순히 생각해보아도 차라리 가볍고 작은 표창을 수십개 몸에 지니고

나가지 그 무겁고 둔한 것을 5자루나 표창으로 쓰려고 들고 나간다는 설에 저같은

경우는 그냥 웃음이 납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 5자루의 검은 '을병정 삼기검' 즉 '飛鴻劍'을 쓰기 위한 것이며

1자루는 실제로 검으로 쓰고 나머지 검들은 요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상식을

초월한 역활을 위해 쓰입니다. 초월적 역활이란 1자루를 제외한 나머지 검들은

주인의 손을 떠나서 날아다니면서(!)  베거나 막으면서 전장에서 역활을 수행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고당전쟁당시 연개소문과 이세민을 그린 오래된 중국그림 한점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 그림에 보면 연개소문이 차고 있는 5개의

검중 한자루만 들고 있고 나머지 검들은 이세민쪽을 향해서 똑바로 날아갑니다.

차례대로 던졌다면 줄기모양으로 날아갈 것인데 그 그림에는 4자루가 병렬로

날아갑니다. 즉 차례대로 날린것이 아니고 동시에 날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일부 전통무예 연구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하던 검이나 도를 던지는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또는 비검술)의 실상이다. 그림에서 연개소문이 던지는 칼은 신통력으로 날아다니는게 아닌 그의 무술 실력 때문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 · 당군은 고구려 장수들의 ‘비도술’에 혼이 빠졌을 것이다. 옛 싸움에서 장수들의 무예 실력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장수들의 무예가 그 군대의 승패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이나 칼을 가지고 덤빈 중국 장수들은 열이면 열 고구려 장수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이나 칼이 닿기도 전에 묵직한 칼이 번개처럼 목을 관통했거나 갑옷을 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경극에 묘사된 것처럼 연개소문의 비도술에 혼쭐이 났으며, 그 어느 장수도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비도술은 연개소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나 전사들의 검술이었고, 연개소문은 비도술에 가장 정통한 무장이었을 것이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고사』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술-




 

중국 경극의 특징은, 인물의 복장과 얼굴화장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 가운데 '독목관', '어니하', '사츠먼' 등의 경극에 등장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연개소문의 이야기를 그린 수많은 중국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다양한 민간문학들이 남아있는데, 거기서 연개소문은 뛰어난 무예를 지닌 용맹한 장수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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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는 커다란 칼을 포함해, 등에 4개의 칼을 더 차고 있다. 이것은 옛날 연개소문이 온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는 기록에서 온 것 같은데, 다섯 자루의 칼이 그저 단순히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투용이었다면, '비도(飛刀)' 즉 '날아다니는 칼'이라는 그 이름을 본다면, 틀림없이 고구려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던져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 독특한 검술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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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에는 4자루의 칼과 함께, 이 깃발을 메고 있다. 이것은 중국 경극에서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인물을 나타낼 때 쓰는 상징이다. 그가 한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 즉 고구려인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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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희한하게 청룡이 장식된 옷을 입고 있다. 중국의 전설에는 사람들이 동굴에 갇혀있던 커다란 청룡을 풀어주었더니 그 청룡이 동쪽으로 날아가 연개소문의 몸에 들어갔다고 한다. 단순히 방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은 그를 '청룡'이란 신비한 짐승에 빗대어 말할 정도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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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얼굴과 수염을 보면, 우선 수염이 붉다. 붉은 수염은 피[血], 즉 살기(殺氣)를 나타낸다. 경극에서 붉은 수염은 성격이 잔혹하고 사람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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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얼굴화장이다. 얼굴화장에 쓰인 푸른색은 위엄과 함께 사나움을 나타낸다.


 

- 무력 평가치 : ★★★★☆

- 후세의 명성 : ★★★★☆

  

  

   

 

척준경 - 한국 육군사 최강의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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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무인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호방뇌락한 성격 전투시에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맹함을 보인다


충성심, 효성이 강하고 인간을 초월한 무예의 달인, 한국사 최강의 맹장중 하나


정치력은 발군은 아니지만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보면 필요충분한 소양은 충분히


갖추고 있어 인종의 해몽을 세세히 해주었던 일화도 있다 



(“깨는 한자(漢字)로 임(荏)이요, 임(荏)은 임(任) 자와 음이 같으니, 임(任) 자 성을 가진 후비를 맞을 징조요, 그 수가 다섯이란 것은 다섯 아들을 둘 상서입니다. 황(黃)은 황(皇)과 음이 같으니 임금의 황(皇)과 같은 뜻이고, 규(葵)란 것은 바로 규(揆)와 음이 같으니 도(道)로 다스린다는 의미의 규(揆)와 같고, 황규(黃葵)란 것은 임금이 도로써 나라를 다스릴 상서요, 그 수가 셋이 된 것은 다섯 아들 가운데 세 아들이 임금이 될 징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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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그야말로 소드마스터의 칭호가 아깝지 않은 장수, 척준경은 고려시대를 풍미했던 '오랑캐 분쇄기'였다.


당시 고려는 무(武)를 숭상하는 국가였다. 건국과정에서부터 무력을 통한 삼국 통일을 거쳤고, 대외적으로는 북벌을 추진했다.


비록 권력을 움켜쥔 호족 문신들의 전횡이 날로 심해지고 있었지만 상무의 정신은 여전히 강성했던 시대였다.

 

하급 무관이었던 척준경에게도 그것은 기회의 시대였다. 그는 북방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전란 속에서 자신의 전설을 만들었다.


한 줄글로 나열하기 힘드니 다음의 리스트로 그의 믿기지 않는 전공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 1104년, 패퇴하는 고려군 행렬을 뚫고 단신으로 적진에 침투, 적장을 참하고 다시 기병 


100기를 몰아 장수 둘을 더 죽였다.


   그 공으로 천우위록참군사의 벼슬을 받는다.


- 1107년, 갑주로 무장하고 단신으로 여진족의 석성(石城)을 타고 올라 오랑캐 추장들을 쳐죽였다.


 이후 성은 고려군에 함락된다.


   그 공으로 비단 30필을 하사받는다.


- 1108년, 북벌군 사령관 윤관이 적에게 포위당하자, 


척준경이 10인 결사를 이끌어 적진을 뚫고 이를 구출하였다.


   그 공으로 합문지후에 봉해지고, 윤관과 부자의 연을 맺는다.


- 1108년, 여진족이 성으로 진격해오자 척준경이 성문을 열고 나가 적들을 위압하니 여진족 2만이 도주하였다.


- 1108년, 여진족이 성을 포위하자 병졸로 위장하여 성을 탈출, 인근 성읍에서 


군세를 몰아 성을 포위하던 적군 괴멸시켰다.

 

 

이건 뭐 최종병기 그놈도 아니고. 오죽이나 무서웠으면 '그놈 목소리' 듣고 여진족 2만이 성 앞에서 도망을 쳤을까.


게다가 계략까지 써서 포위하고 있던 적의 배후를 치기까지... 군졸을 통솔하는 장수로서도 제법 유능했음이 분명하다.


한마디로 삼국지로 치면 거의 여포급의 먼치킨이었으니, 오죽하면 당시 북벌군 총사령관이었던 윤관이 부자의 연을 맺기를 청했을까.

 


만일 그가 이자겸을 택하지 않고 고려조정에 충성했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쌓아온 무훈을 유지만 했더라도 그는 위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태조 왕건의 덕장(德將)이었던 신숭겸처럼 사후 천신(天神)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을까? 


  사례 요약 

사례 1 
여진족이 점거한 성이 워낙 난공불락이라 전황고착.
지휘관이 개떼러시로 안되니까 척준경한테 니가 해결해보라고 함.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 칼들고 달려가서 여진족 추장 2-3명 황천행 시키고 ?적의 진형을 까부숴 흐트려트림.아군 돌격해서 승리 ?

?사례 2 ?
고려군이 매복에 걸려 8천의 병사가 다 죽고 대원수 윤관과 100여명의 병사만 고립됨.
(8천을 반몰살시킨) 여진군을 향해 척준경이 부하 10명만 데리고 그냥 돌진.
대원수 윤관을 구해내고 적진을 휘젓는 사이 구원군이 도착했고
오히려 도망가는 여진을 추격해서 적장(적군아님) 36명 죽임 

?사례 3 ?
여진족이 2만명 파병하자 딴사람들이 성에서 버티자고 함.
척준경이 이를 거부하고 부하 100명과 함께 2만한테 돌진.
2만 vs 101인데 2만이 개발리고 적장 19명 시망. 

?사례 4 ?
옹주성이(척준경 나와바리) 여진족 수만에 포위됨.
지원군이 온다온다 하면서 안옴.
척준경이 빡돌아서 혼자 100km가 넘는 포위뚫고 멀리있는 구원부대를 이끌고 옴.
바로 성으로 안 가고 멀리 떨어진 지원부대를 먼저 침.
지원부대와 포위부대 사이에 관문이 많았지만 (10분저지선같은거) ?파죽지세로 몰아붙여서 포위부대도 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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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간이 또 공을 세우려고 교련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오직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 척준경(拓俊京)이 병기ㆍ 개마(介馬 갑옷을 입힌 말)를 임간에게 요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가  그 장수 한 사람을 베고, 사로잡혔던 두 사람을 빼앗았다. ?
<고려사절요>     ?1104년(숙종 9년) 북방의 여진족이 그 세력을 확장하자, 고려 조정은 평장사 임간(林幹)을 보내 ?
동여진을 공격하게 합니다. 하지만 임간은 전공을 탐내어 ? 무작정 여진군을 추격했다가 대패를 입고, ?
오히려 정주성까지 내어준 채 선덕관까지 패퇴합니다. 그 때였습니다. ? ?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에 지나지 않던 척준경은 임간에게 무장한 말과 병기를 청합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임간은 청을 승낙했고, 척준경은 홀로 패퇴하는 고려군 사이를 비집고 
적진으로 들어가 단숨에 적장을 베어버립니다. ?? 이로써 여진군이 혼란에 빠져 퇴각하자, ??
척준경은 다시 기병 일백기를 이끌고 재차 공격하여 ?적장 2명을 참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고 ?
?유유히 개선합니다. ?
이 싸움으로 척준경은 천우위록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의 벼슬을 제수받습니다.           134951109476271.jpg

      2. 드디어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가지고서 적중에 돌입하여 추장 두서너 명을 쳐 죽이자,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는 좌군과 더불어 공격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 ?
《고려사절요》 ???   1107년(예종 2년)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은 정평성과 보음성을 점령하고, 다시 북진하여 
오늘날의 함흥지역에 해당하는 석성(石城)을 공략합니다.
??하지만 여진족의 저항이 강하여 감히 점령하지 못하자, 다급해진 윤관은 척준경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해는 기울고 사태는 급하니, 너(척준경)는 장군 이관진과 함께 이 성을 공격하라." ??
이에 척준경은 주저않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추장 두세명을 베어넘기니, ? 윤관은 대군을 이끌고 ?
총공격하여 성을 점령합니다.
?이 싸움으로 척준경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비단 30필을 하사받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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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적이 윤관 등을 몇 겹으로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거느리고 
?…중략… 적진을 뚫고 들어가 10여 명을 격살하니 최홍정ㆍ이관진(李冠珍) 등이 산골짜기로부터 ?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구하였다. 
?《고려사절요》 ? ? ??? ???   1108년(예종 3년) 윤관과 오연총은 8천의 정병을 이끌고 출정하여,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진군합니다.?
?그러나 동녀진의 매복에 걸려 고려군은 궤멸되고,윤관의 주위에는 ? ?부상당한 연총과 10여명의 군졸만 남게 됩니다.?
?이를 본 척준경은 아우 준신(俊臣)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
?10여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수만의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군10여명을 격살하고 윤관을 구출합니다. ?
?마침 최홍정, 이관진의 군사가 당도하므로 여진군은 비로소 포위를 풀고 물러납니다. ?
이 싸움으로 척준경은 윤관과 부자의 연을 맺고,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임명됩니다   .   134951145853628.jpg

4. ?결사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병과 싸워  19급을 베니 적이 패배하여 북으로 달아났다. ?
?준경은 북과 피리를 울리며 개선하였다.
윤관 등이 누대에서 내려와 이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을 하였다. ?
《고려사절요》     같은 해에 여진족이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영주성을 공격해 옵니다. 
윤관과 임언등은 적의 수가 많고 아군의 수가 적음을 들어 농성을 주장합니다만,
?척준경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나가 싸워야 한다며 ? ?결사대를 이끌고 나아가 여진군을 공격합니다.  ??
?싸움은 대승이었습니다. 척준경은 북과 피리를 불며 유유히 개선하였고, ?윤관은 직접 나와 이를 맞이합니다.   ????   134951144646633.jpg

?   ???5.? 척준경이 군사의 해진 옷을 입고 밤에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가, ? 정주로 돌아가서 군사를 정돈하고 ?
?통태진(通泰鎭)을 통과하여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에 이르러
적을 맞아 싸워 크게 부수니, ?
성 안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고려사절요》     같은 해에 여진족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출병하여 웅주성을 포위·공격합니다. 
최홍정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가 적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지만, 갈수록 적군의 포위가 길어지자 ?
척준경은 밤중에 홀로 성을 빠져나와 정주성으로 갑니다. 
척준경은 그곳에서 병사들을 정비하여 이끌고 나아가, ?길주에 이르러 적군과 접전하여 대승을 거둡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기록들은 죄다 야사가 아니라 엄연한 정사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온 내용이라는 것이다  


 

- 무력 평가치 : ★★★★★

- 후세의 명성 : ★☆

 

 

 

 

정기룡 - 조자룡에 비견된 국지전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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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전투의 달인으로 살벌강직한 성격 용맹하고 담력이 컸다


어렸을때 부터 전투놀이에서 두각을 나타내 모두가 두려워 했다고 한





땅 위의 이순신이라 타이틀을 붙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역시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60번을 싸워서 60번 모두 이겨낸 초인이다. 그냥 60번의 싸움이면 올ㅋ하고 말겠지만 생각해 보라, 상대는 왜놈들이다.


바다에서야 조선군 특제 화포로 후두려 갈기면 어느정도의 수적 열세는 감당할 수 있다. 그러나 왜놈들의 칼솜씨는 그렇지가 않다.


애초부터 종특이 칼질인 놈들, 게다가 막 전국전쟁의 피맛을 보고 온 놈들이라 면면이 강호순 유영철 같이 흉흉한 놈들 투성이다.


이런 놈들을 육지에서 60번 싸워 60번을 이긴다고? 이건 미x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겠어...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사람 써는 걸 업으로 여기던 왜놈들도 이 아저씨 앞에서 육회가 되었다.


기록을 보면 이 분도 척준경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모르는 맹장의 포스를 풍긴다. 포위된 아군을 구하려 적진을 뚫는 건 예사요,


싸울 때는 말에서 내려 손수 적을 베고 다녔다고 한다. 장수로서 누릴 수 있는 안전함보다는 직접 싸우는 길을 택한 것이다.


검술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왜적들을 상대로 저런 식으로 백병전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당시의 모든 전황이 그러했다.


육지에서 왜적이 이긴 전투는 대부분이 백병전으로 끝났고, 조선군이 이긴 전투는 지형지물과 궁시를 이용한 싸움이 대부분이었으니,


조선군이 단병접전으로 왜적을 상대하는 건 그만한 검술실력과 패기가 없고서야 불가능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심지어 '왜적을 눈 앞에 두고 적의 배를 갈라 간을 씹어먹었다' 고 하니, 이미 패왕색 패기의 절정을 찍었다고 말할 수밖에.


상상해 보라, 쪽.발이 처지에서 보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감당못할 작자인가. 실제로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장군은 그 기세를 몰아 7일간  7백 병력으로 25개 일본군 부대를 괴멸시키는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 무패의 맹장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그 첫번째 이유는 그의 당시 나이였는데, 전후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이순신, 권율에 비해


너무나 나이가 어렸던 게 흠이었다. 전란이 끝난 그 해 정기룡의 나이는 31세. 그 젊은 나이에 엄청난 살육전을 벌인것도 대단하지만


단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조정의 논공행상에서 소외당한 사연도 그에 못지않은 서프라이즈가 아닐지?


더하여 '영웅만들기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던 박정희 정권때에도 이순신과 같은 고전영웅에 비해 평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은 점도 있다.


최근에 들어 정기룡 재조명 작업이 곳곳에서 진행중이라는 소식이 반갑게 들린다. 그러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 그의 무훈 대부분이 기록된 사료들의 진정성 검증을 두고 많은 논쟁이 예상되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토왜군의 선봉으로 북상하는 일본군을 치기위해 30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상도 성주로 이동했다.


8월, 정기룡은 척후.장 이희춘과 황치원에게 기병 400여명을 주어 정찰케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정찰대를 맞아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수급 100여개를 얻는 전과를 올린다.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정기룡의 조선군과 1만2천여명의 일본군이 고령의 용담천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정기룡은 왜적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들과 만행을 이야기하며 아군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정기룡도 2차 진주성 전투때 자신의 아내를 잃어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극도로 치달았다.


계속된 신경전 끝에 먼저 움직인 쪽은 조선군이었다. 갑자기 군사의 수가 줄어들더니 순간, 


군사의 태반이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놓칠리 없는 일본군 장군은 전군을 이끌고 조선군을 추격했다.



 

 일본군이 고령 이동현까지 추격하자, 퇴각하던 조선군이 갑자기 멈춰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순간 3면에서 복병이 일어나 일본군을 고립시켰다. 조선군의 퇴각은 정기룡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일본군이 조총으로 공격하려 하자, 조선군은 화약무기를 던져 조총을 무력화 시켰다. 


그러자 편곤과 장창을 든 기병대가 순식간에 일본군 진형을 쇄도하였다. 왜군의 머리는 편곤에 의해 수박깨지듯


깨치고 장병겸과 장창에 의해 내장과 피를 쏟아냈다. 본래 단병접전에 능하지 못한 조선군이었지만 명군에 의해


보급된 새로운 무기인 편곤과 장창, 당파등으로 무장하여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무기나 전략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나가 맞써 싸우는 


불굴의 정신이었다. 조선군의 광폭한 모습에 일본군은 칼한번 못 휘둘러보고 무너져 내렸다. 후


방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은 미리 매복하고있던 기마궁사들의 표적이 되었다.


 결국 조선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일본군 1만 2천명은 전멸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토막내고, 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냈다. 이 전투에서 수습된 일본군 시신은 큰집 6채와 맞먹었고,


 정기룡은 이들의 귀를 모두 잘라 전공에 보고하였다. 이 일로 일본군은 물론 명나라군과 장수들도


 정기룡을 두려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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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도보통지의 마상편곤

편곤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기병의 주력무기로 자리잡았다.

 

 

 이후 정기룡은 합천, 의령, 울산 등 무수한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전투마다 승리를 하자 도체찰사 이원익이 “어느 곳에서 이 같은 명장을 다시 얻겠는가?”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전공으로 절충장군 겸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제수받았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도


김해부사, 밀양부사 등의 관직에 나아가 백성들을 보살피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1605년 4월에는 그 동안의 전공으로 선무공신 1등에 기록되었으며, 9월에는 오위도총관, 12월에는 경상좌병사 등의 벼슬을 내렸다. 


장군은 경상좌병사를 2번, 경상 우병사를 3번이나 맡았으며, 1617년에는 2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수사의 직을 맡았다. 


육군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았으니


그 용맹은 당대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622년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인 통영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장군이 세상을 떠난 후 상주에서는 충렬사를(忠烈祠) 세워 은혜를 기리고 있고, 고향인 하동에서는 경충사를 세워 그 공을 추모하고 있다.

이후 1773년, 영조가 정기룡의 공을 높이 사 "충의공(毅公)"으로 격상하였다.

 

총 60전 전승의 공을 올린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그는 살아있는 "편곤"이었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때 60여차례에 걸친 왜군과의 전투에서 한번의 패전도 없이 모두 


승리했으며 조금도 부상을 입은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의 힘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천대 위에 있는 바위인데 왼쪽 네모진 것이 용마의 말구유통이고 


오른쪽 동그란것이 정기룡장군의 세수통이랍니다.  




1794년에 편찬된 홍량호(洪良浩)의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 


수록된「정기룡전」에  나타난 그의 용마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정기룡은  담력과  용력이  뛰어나고  두  눈이  횃불처럼  빛났다.  그가  적지에 

뛰어들어  적을  무찌를  적에는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  같았으며,  왜적이 총들을 
한쪽으로  모아  일제히  쏘아도  그를  명중시키지를  못했다.  그는  전투를  벌이다
가 목이 마르면 왜적의 배를 가르고 그 간을 씹었다.  용기가 북받쳐 오를 적에는  그가  탄  신마(神馬)가  여섯  길이나  되는  참호를  능히  뛰어  넘고,  가파른  절벽이나 위험한 언덕길도 매나 소리개처럼 날아올랐다.”




“정기룡은  일찍이  기병  8명과 함께  거창 객사에  머물러  있었다. 
밤중에 왜적
이  대량으로 들이닥쳐  정기룡 일행을  포위하였다.  그  때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으나  정기룡만은  가만히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
다.  날이 밝은 뒤에 기병들을 이끌고서 말을 몰아 담장을 뛰어 넘어 적의 포위
를 돌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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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엔 충위공 정기룡(1562∼1622) 장군이 있었다.

22전 22승의 이순신과 60전 60승의 정기룡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전쟁 임진왜란(1592∼1598)을 승리로 이끈 쌍끌이 장군이었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적선을 보이는 족족 깨부셔 왜군의 보급로를 완전 차단했고, 


정기룡은 뭍에서 까부숴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치려던 왜군을 독 안에 든 쥐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7년간의 임진왜란을 승리로 마무리한 이듬해 추진된 전쟁 공신 명단에서


성웅 이순신과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은 물론 패장 원균까지 '선무 1등 공신'에 추품


됐으나, 정작 가장 화려한 전공을 세운 정기룡 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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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룡 장군님이 사용하던 칼


경북 상주를 중심으로 60전 60승을 거둔 육군의 정기룡 장군은 1599년 공신도감에서 처음 추품한 전쟁 영웅 26명 명단에는 당당히 이름이 올랐으나, 공신도감이 최종적으로 내놓은 9단계 109명의 명단에는 빠져 있다.

1605년, 선조는 도승지 신흠을 내세워 정기룡 장군을 슬그머니 선무 1등 공신에 추품한다는 교지를 발표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7년 만이다. 정기룡이 순국한 지 151년이 흐른 1773년엔 영조가 '충위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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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상주 정기룡 장군의 묘소. 




일화)



전설에 따르면 정기룡 장군의 어머니는 홍역에 걸려 출산 중 죽게 되는데, 가족이 염을 하던 중 그의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가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할 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살기가 느껴지더니 사흘 후 어머니는 사망하고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정기룡이라고 한다. 


정기룡은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울음 소리를 내고 하늘엔 무지개가 떠 마을 사람들은 영웅이 탄생한 것이라 믿었다. 정기룡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용감하였으며,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강씨 부인을 잃는 슬픔에도 용감히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강씨 부인을 잃은 후 다시 결혼하게 되는데 그의 부인(권씨)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며 나이가 들수록 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씨는 아버지의 설득에도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 어느새 노처녀가 되고 정기룡 장군을 만나고 나서야 정기룡 장군과 결혼하겠다고 하였다. 정기룡 장군은 전란 중의 상황과 그의 옛 부인을 떠올리며 고민했지만 결국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의 부인(권씨)은 말을 키우고 있었는데 날쌔고 힘이 세어 정기룡 장군이 타고 다녔다고 하며, 이 말이 장군이 공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기룡 장군의 본명은 정무수로 정기룡이 된 사연은 이렇다. 정무수는 과거를 보러 서울로 떠나게 되는데, 그 당시 임금인 선조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종각에서 용이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종각에 있는 사람을 데려오라 했더니 정무수였다고 한다. 그가 무과 시험에서 무용이 출중하여 선조가 기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무력 평가치 : ★★★

- 후세의 명성 : ★★★ 




 

<연개소문과 칼 다섯 자루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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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섯 자루의 칼은 고구려의 생활 풍습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님으로써 독재자의 위엄을 과시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차고 다닌 칼 다섯 자루는 독재자의 위엄이 아니다. 이것이 과연 독재자의 증거가 될까?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독재만 생각했지, 왜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는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연개소문은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그 답은 『한원』이라는 사료에 있다. 

한원 고려조를 보면 남자들이 허리에 은띠를 차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칼 다섯 자루는 고구려 남성들의 일상 풍습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남성들은 왜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아마 생활상의 필요(사냥)와 함께 각종 무술 연마를 하기 위해 차고 다니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나라였고, 상무정신이 고구려의 기본 정신이었기 때문에, 무술연마, 사냥을 위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 볼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닌 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대로 독재자의 위엄이 아닌 고구려 남성의 평범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가지고 독재자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비도와 연개소문의 칼 다섯 자루 


①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泥河)> 등 확인된 종류만해도 네 종류나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빛의 얼굴 화장은 위엄이 있는 그의 모습과 아울러,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경극을 보면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있어 진주성 대첩은 치욕스러운 전투이고, 그런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잘 다룬다 하겠다. 연개소문을 두려워 한 그들의 심리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전설의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사용했다는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②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와 설인귀의 신전(神箭)

앞에서 연개소문의 상징 다섯자루의 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상생활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비도(飛刀)’이다. 송원 때의 『사략』에는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자,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장에서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극 <독목관>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칼’을 사용하는 연개소문과 맞붙는 설인귀의 무기는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으로 이는 무기를 통해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연개소문의 ‘비도’는 권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다. 


사략은 연개소문에 대해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赤?馬)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매고,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실전에 나섰을 때 모습으로 여차하면 목숨을 잃는 전장에 나서면서 거추장스런 권위용 칼을 다섯 자루씩 지고 나갈 장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다섯 자루 칼이 실전용이라는 것은 이 칼이 ‘비도’라는데서 알 수 있다. 경극에서는 날아다는 칼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칼이라면 한 자루면 충분하지 다섯 자루일 이유가 없다. 비도는 고구려 고유의 ‘비도술(飛刀術)’, 또는 ‘비검술(飛劍術)’을 위한 무기인 것이다.


③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일부 전통무예 연구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하던 검이나 도를 던지는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또는 비검술)의 실상이다. 그림에서 연개소문이 던지는 칼은 신통력으로 날아다니는게 아닌 그의 무술 실력 때문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 · 당군은 고구려 장수들의 ‘비도술’에 혼이 빠졌을 것이다. 옛 싸움에서 장수들의 무예 실력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장수들의 무예가 그 군대의 승패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이나 칼을 가지고 덤빈 중국 장수들은 열이면 열 고구려 장수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이나 칼이 닿기도 전에 묵직한 칼이 번개처럼 목을 관통했거나 갑옷을 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경극에 묘사된 것처럼 연개소문의 비도술에 혼쭐이 났으며, 그 어느 장수도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비도술은 연개소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나 전사들의 검술이었고, 연개소문은 비도술에 가장 정통한 무장이었을 것이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고사』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술- 



④ 청룡의 화신 연개소문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의 복장을 홍포(紅袍)로 묘사한다. 『사략』에서 연개소문의 복장을 ‘진홍색 사복(獅服)’으로 묘사한 것이나,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 연개소문을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이라고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중국인에게 있어 붉은색은 각별하다. 그들은 광적으로 붉은 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경극에서도 붉은 색은 긍정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검은색은 지혜로운 인물, 푸른색과 녹색은 민간의 영웅호걸, 금색과 은색은 신이나 귀신을 나타내는데, 연개소문이 홍포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설인귀가 백포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경극 <분하만> 서두를 보면 연개소문이 영혼으로 등장해 "나는 본래 청룡으로서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라며 자신을 청룡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인귀는 백호(白虎)로 등장한다. 청룡과 백호는 풍수나 고대 천문학의 사상(四象)에서 동쪽과 서쪽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동쪽을 지키는 사방신으로 승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중원의 서쪽과 동쪽이 당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온 군영에서 두 장군(연개소문과 설인귀)을 환호하니,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강하게 하네/ 당조(唐朝)가 이 두 장군을 얻는다면 천하가 태평지 않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의 신과 같은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그를 중국의 장수로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동쪽을 지키는 청룡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룡의 화신이라 평한 것이다.




≪翰苑≫ (卷 30, 蕃夷部 高麗)을 보면, 고구려의 일반 남자들은 누구나 몸에 칼 다섯 자루와 숫돌까지 차고 다닌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보면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찼다는 것은 위압감과 공포감을 주었다는 면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다만 그는 고구려의 보통 남자들이 하는 대로 그렇게 했을 따름이다.

 

또 고구려의 일반 남자들이 칼을 많이 차고 다닌 것은 여러 용도의 칼을 차고 다닌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는 초기 산악지대에 입지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수렵을 통한 육식이 많이 이루어졌고, 따라서 사냥에 필요한 여러가지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 사냥후 이루어지는 짐승의 분배나 조리등에 필요한 칼이 보통 2~3종으로 볼때 일반적인 고구려 남자들이 차고다니는 칼 5자루는 전투용 칼 2~3(공격1, 방어1, 기타-투척용 혹은 예비)자루와 사냥이나 기타 다른 목적의 칼 2~3종으로써 충분히 5자루의 사용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추측컨대 그 종류로는 마상 전투용 장검(흔히 말하는 서양의 long sword,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환두대도 등으로 잘 알려진 大刀종류)1자루, 백병전용 단검 1~2자루 등을 들 수 있다.

 

"연개소문이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고 말을 타거나 내릴 때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을 밟고 오르내려 백성들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그 기본 토대가 중국의 기록임에 따라 중국의 입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로 볼때 위의 기사는 唐 태종 이세민에 의한 연개소문의 인간성에 대한 여론조작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당시 연개소문의 국권 전횡과 이에 따른 태종의 고구려 침략에 앞선 정보 활동인 것이다.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다니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고, 명예나 권위를 상징하는것은 아니었다. 또한 연개소문에 대한 여러가지 비방성 기록들은 당시의 고구려 남자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헤게모니 장악과정에서 연개소문이 보여준 잔인함 등을 연개소문 개인의 인간성에 대해 여론을 조작한 당태종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에서 보여지는 잔인한 행동이나 공포 분위기는 비단 연개소문만의 것이 아니다. 당태종의 경우만 들어보아도 자신이 제위에 오르기 위해 골육상쟁을 벌였다. 결국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일반 남자일뿐이고, 단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현재까지 존재하는 역사서를 남긴 唐에 적대했다는 이유로 잔인무도한 인물이 되고 말았다. 만약 고구려의 역사서가 지금까지 존재했다면 그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다.




흑치상지 - 조국의 부흥을 꿈꾼 백제의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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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서부(西部) 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신장 7척의 장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였다고 한다 또한 지략까지 겸비한 문무 최강의 장수중 하나

자신의 이익보다는 공적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실천한 매우 공명정대한 성격,

용맹한 성격이지만 부하와 타인에게는 온화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아래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자기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상지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흑치상지의 집안은 원래는 부여씨로 백제 왕족이지만 나중에 왕으로부터 흑치라는 성을 물려 받았다고 합니다. 그 집안은 대대로 달솔의 벼슬을 이어서 했는데, 달솔이란 지금의 국방부 장관과 같은 겁니다


흑치상지는 백제의 달솔로 풍달군장(風達郡長)을 겸직했는데, ‘자사’는 지방 장관들이 고을 일을 잘하는지를 감시·감독하는 관리로, 현재로 치면 도지사급 따라서 풍달군장은 풍달군을 책임진 관리이며 백제의 2등급 관직에 종사

이처럼 흑치상지는 백제의 고위 관리였는데, 백제가 멸망할 적에 의자왕을 따라 당의 장수 소정방에게 항복했지만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들이 늙은 의자왕을 괴롭히며 약탈을 일삼자, 이에 분개하여 임존성을 기반으로 백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흥 운동에 나섰고, 당시 흑치상지 진영에는 3만 정도의 백성들이 있었는데, 그는 이들을 무장시켜 백제의 200여 성을 회복하는 등 기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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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고종은 흑치상지가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줄 알고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싸움을 벌이자 부흥 운동 자체에 실망했으며, 그는 나·당 전쟁 이후에 당나라로 건너가 당의 장수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그 이름을 중국 땅에 크게 떨치기도 하였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크게 날린 흑치상지

흑치상지는 당나라에서 30년 동안 전투에 참가하면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토번은 현재 티벳 지방으로 당나라 초기에 이곳 사람들이 당의 국경을 자주 침범해 와, 

당의 3대 임금 고종은 678년, 토번 공격에 대대적으로 나섰다

그런데 전투 도중에 당나라 군대는 늪지대에서 포위되어 전멸 직전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흑치상지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백 명의 적을 사살하며 당군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 전투 이후 흑치상지는 초고속으로 승진하여 마침내는 연나라를 책임지고 다스리는 제후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흑치상지는 배신자인가, 아니면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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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가 억울하게 죽은 뒤 10여 년이 흘렀다. 아들 준은 이제 스물세 살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준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당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로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들었다. 사신을 보내 준에게 돌아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구나. 이제 다시 살펴보니 반역하였다는 증거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 ([신당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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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백제유민 예식진의 묘지석. 중국 지역에서 발굴되는 백제인의 묘지석은
망국의 한을 품고 당나라로 건너간 백제 유민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드디어 준은 아버지의 묘를 낙양의 북망산으로 이장하였다. 황제는 장례에 드는 물건과 일할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뒤 불과 7년 뒤인 706년, 상지의 아들 준이 낙양에서 죽었다.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같은 북망산에 장사지냈다.

 

흑치상지와 그 아들 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그들은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것을 보면 배신자요, 출중한 능력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보면 성공자이다. 세운 전공이나 올라간 벼슬로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7대 장수로 손꼽혔다.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백제부흥운동의 끝자락에 희망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였다고 해야 옳을까. 마지막에 모함을 받은 것은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벼슬 때문에 당한 견제였다. 그렇다면 배신자도 성공자도 아닌 비운의 장수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상지가 얼마나 아랫사람을 인자하게 다스렸는지 유명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한번은 병사가 상지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이를 보던 어떤 사람이 상지에게 엄히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상지는, “말도 소중하고, 병사도 소중하지. 그러나 사사로운 실수이거늘, 어찌 병사를 매로 다스리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아래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자기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상지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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