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붕당정치 자체를 진보냐 퇴보냐로 놓고 양분화 시키는 문제가 과연 바람직한가는 의심스러우나,
그러한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붕당정치가 정치운영체제로서
그 전의 체제와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할것이다.
붕당정치가 본격적으로 정치운영의 기제로서 작용되기 시작한 것은 훈구의 몰락 이후 정
국운영의 주도 세력이 사람으로 대체 되면서 이뤄져갔다.
훈구와 사림으로 대립하던 조선전기에는 당이란것에 대한 인식 자체가 상당히 좋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전기 법의 기초가 되는 대명률에 의거하여 당파를 형성한다고 지목되는 것만으로도 반역죄에 해당하였다.
그러한 조선전기의 인식은 아무래도 중국의 붕당론에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던 것인데
아직 소학의 내재화가 추진되고 이뤄져갔던 조선전기 사회에 잇어서는 명의 부정적인
붕당관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보급이 이뤄짐에 따라 보다 긍정적으로 당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사람이 생각하기 에는 소인당이 훈구요, 자신들이 군자당이 되는것이었다.
때문에 동서 분당이후에 율곡같은 이가 원래 하나의 당이었으므로 서로 나뉘어져 대립해서는
안된다고 본 경우가 이에 근거한것이다.
조선의 붕당정치는 그 시발점으로 아무래도 분당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 보는것이 일반적이다. 동서분당 남북분당등등...
끈임없이 정치적 알려관계 신념외에도 개인적인 사유등으로 분당된것을 확일할수 있다만
분당자체가 붕당정치 면면의 정부는 아니며 그렇다고 그들이 본질적으로 같은 사림이 아닌것은 아니었다
또한 붕당이란는 것이 그 전후의 정치 운영체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해명하지 못하면
이것이 가지는 특성을 제대로 파악할수 없게 되는것이다
따라서 쉽게 분당만을 놓고 붕당정치를 보았을떄는 이것이 당쟁으로 비화되기 쉽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실상 운영원리로서의 붕당은 치열한 논리싸움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서로에 맞는 의견을 개진함과 동시에 붕당에서 왕을 설득시키느냐 어떠한 논리로써
상대 정파를 비판하고 우리를 합리화 하느냐는 상당한 정치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었다.
(논리적 토론은 진보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활동은 중앙정계에서만 이뤄진것이 아니라 지방에 존재하고 있는 산림, 산림을 다르는 지방유생들,
그리고 학맥에 기반하여 동족부락을 결성하고 중앙정계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했던 재지사족등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어가며 이뤄진것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체제를 붕당으로 규정한 이태진의 선생의 견해가 존재하지만, 정만조 선생이
사림정치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된것도 이에서 비롯한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두가지 모두 왕조국가에서 왕의 역할을 상정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왕조국가였고 때문에 신하들의 공리공론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갔음에도
최종결정자는 국왕이었다.
따라서 국왕이라는 존재를 배제하고 정치 운영원리로써 단독으로 붕당이라는 단어를 상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위에 사설은 우선 제쳐두고 본론으로서, 발전이라는것이 정치적 발전에 한다면
당연히 발전이라고 볼수 밖에 없다
이전 시기의 왕을 비롯한 소수 문벌 귀족-무신 및 권문세족등에 의해 행사되던 정치권력이
성리학적 명분이라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이타적인 체제로 변모해 갔고
위정자들에게 청렴의 정점을찍는 도덕정치를 강요해 갔다.
이는 당연히 전 시대 정치운영체제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정치체제의 발전이었다.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치열한 논쟁이 현재 철학의 분열을 가져왔는가?)
이것이 마치 조선시대 자체를 퇴보시키고 발전을 저해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운영실행 상에 빚어지는 새로운
모순의 창출이지, 운영체제 자체로서는 전 시기에 비해 충분히 발전된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붕당이라는것이 명분과 의리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외교적 손실, 탁상공론으로 인한
민생의 불안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이것 자체체가 퇴보로 연결되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민생의 불안은 구태여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발생했다기 보다는 조선 전 시기에 있어 존재해왔으며,
외교적 손실의 예로 등장하는 침략전쟁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붕당이 현실 이해문제에 휩쓸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햇다고 보는 경우도 있는데, 현실정치에서도 그러하듯이
정치란것의 본질자체가 이해관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붕당정치 자페를 세도정치와 이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앞선시기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붕당정치와 차이가 있듯 붕당과 세도정치는 그 성격상
또한 집권세력상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 세도정치가 왕의 역할이 축소되고 외척에 의한 극소수의 가만에
의한 지배라면 붕당정치는 국왕에 의해 중재되는 범주안에서 이뤄지던 공론정치체제였다.
결국 붕당정치라는 것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성장한 명백한 사승관계및과거합격자 출신의 사람층에 의해
주도되었던 붕당간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운영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의리 도리에 기반하여 이타적인(민을위한)명분을 내세워 갔던 정치운영원리라 하겠다.
따라서 분명히 발전되었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발전이 의미하는 바가 여럿이듯이 조선사회 전반에 걸친삶의 질적 수준의 향상을 이야기 한다면
확실히 대답하기 어려운것은 사실이다. 붕당정치 자체가, 아니 중앙에서 이뤄지는 정치운영원리 자체가
사회전반의 발전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히 중앙정부의 개방적인 태도만이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붕당정치 자체가 내부에서만서로 치고 박고 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식민지배를 당한것이고
그래서 조선왕조는 퇴보했다라고 보는 사고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약육강식의 논리와 사회 진화론의 논리에 사로잡혀서 약자는 강자에게 당연히 먹효도 된다 라는,
약했기 때문에 식민지배를 당하는것이 당연하다는것은
강자의 침략 이데올로기를 약자에게 합리화 시킨 것 뿐이다.
(일본의 유명한 대학자 후지와라 세이카
전국시대 일본 문명의 미개함에 치를 떨며
조선에서는 학자를 소중히 하며 과거를 통하여
길을 열어준다고 한다며
조선에 가고 싶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도쿄(東京)대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교수는 말한다.
“조선 퇴계 이황의 경사상은 도쿠가와(德川) 정권 이데올로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메이지(明治)유신의 원동력이 됐던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학파, 요코이 쇼난(橫井小楠)과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 등은 퇴계를 신처럼 존경했다. 이런 사실을 오늘날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을 잊는다면 일본 문화가 발딛고 서 있는 그 정신적 기반을 완전히 도외시해 버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은 퇴계의 경사상이 교육을 통해 보급됨으로써 가능했다.
서양 문명이 물밀 듯 밀려드는 메이지 초기는
공·맹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한편 국수주의 복고주의가 일어났다.
그런 양극단 사이에서 천황을 보좌한 모토다 나가자네다. 교육을 바로잡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가 없다고
생각한 천황은
메이지 12년 모토다에게 ‘교학대지(敎學大旨)’를 내리게 명하고,
그 ‘교학대지’는 메이지 23년 ‘교육칙어’로 공포되어 퇴계의 경사상이 일본 근대 교육에 구체적으로 도입되기에 이른다.
막스 베버는 한국의 선비를
“부도덕과 도덕의 모호한 경계를 선명하게 가르고 행동했던 문인 신분층”
이라고 우러렀다
당시 폭군들에 의해 백성들이 고통을 앓았던 서양은 당시 교류하던 나라 중
백성을 위해 국가를 운영하던
명나라를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세종대왕이 한글까지 만들며 백성들에게 보급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당시 조선이
뛰어나고 수준높은 문화와 인식을 가졌었는지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