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 임금님의 흔한 사생활

메단 작성일 12.10.26 0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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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친아 정조

 

각종 기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니들이 뭘 안다고 이러냐"며 신하들을 까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실제로 정조는 "경들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경연(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며 학문을 배우고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을 폐지하며, 직접 자신이 중하급 관리를 교육해서 발굴하는 초계문신제를 실시한다. 또한 실록에 보면 신하들에게 "공부좀 하시오" 같은 엄마같은 멘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신하들이 몰랐던 역사상의 고사까지 세세하게 들어가며 경연중 신하들 훈계한 임금은 태종 이방원, 세종 이도, 정조 이산이 전부였다.) 훈민정음 창제시절의 세종 정도만이 저런 부문으로 대등하게 평가받을 수 있을 듯 하다.

저런 점만을 보면 정조가 공부벌레로만 보이지만, 찾아보면 대단한 먼치킨이다. 세손시절부터 여러 암살기도에 시달린 탓에 스스로 무예를 익혀서 뛰어난 무예실력을 갖추었다. 활 솜씨도 대단히 훌륭해서 글자 그대로 '백발백중'. 화살 50발을 쏘면 48발, 49발씩 맞추고 나머지 한 발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하들 기죽을까봐라기보다도, 군주는 스스로의 재주를 자랑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곤봉에 놓고 쏘아 10발을 쏘아 모두 명중시키기도 했다. (이성계의 재림이라고도 불림)

 

 

사람은 구업(口業)으로 한 때의 쾌락을 얻으려 해선 아니되느니, 나는 천한 마부에게라도 일찍이 이놈 저놈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人不可以口業取快於一時,子雖予僕御之賤,未嘗以這漢那漢呼之也。

                                                                                                                                

-정조 이산 어록 중-

 

근데 또 자상한 것만은 아니어서 성질이 불같고 쪼잔한데다가 궁궐에서 계속 자라온 탓에 참을성이 별로 없었다. 이 쪼잔하고 불같은 성격이 엄친아적인 능력과 결합되면서 말빨 키보드 워리어(…)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실제로 조선조 역대 국왕 중 언쟁 능력은 극강급. 실제로 정조와 키배 논쟁 한번 벌였다가 유체이탈을 제대로 경험한 조정 중신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즉위 직후 치뤄진 신하들 대상으로 한 시험에서 빽으로 급제한 신하들의 답안지(백지도 있었으며, 그냥 심심풀이로 하는 삼행시도 있었다.) 를 전국 관아에 뿌려서 개망신을 주었다. 역시 말빨 1인자. 이때가 정조의 춘추 스물넷. 세종과 배틀을 붙이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다. 여기에 태종이 끼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나중에 나이 들고서는 좀 더 쪼잔해져서 자기 정책을 공개적으로 깐 어느 선비를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에 임명시키면서 대놓고 "니 주제에 그런 중임을 할 수 있겠니?" 라고 조롱했다. 이런 불같은 면모는 할아버지 영조와 증조부 숙종에게서 잘(?) 물려받은 듯. 순조도 물려받았으면 좋았을껄...


게다가 시서화에도 능했으며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본인이 직접 자신의 병에 처방을 했을 정도였다. 이쯤 되면 정조가 과연 우리와 같은 인간인가 의심스러운 대목. 그러나 정작 정조실록을 찾아보면 서술된 정조의 증세와 처방은 전혀 상관이 없거나,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는 쪽인 경우도 있다. 어설프게 아는 것은, 특히 의학의 경우, 위험하다는 걸 보여주는 일례일지도.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이 처방을 했는데, 그것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설도 있다. 역시 선무당이..

 

또한 자신의 무예실력과 장용영의 특수성이 있었는지 몰라도 무예도보통지(백동수가 편찬에 참여)라는 종합 무예 서적을 발간하기도 한다. 이 책은 요즘도 조선시대 군인의 복식과 무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책을 바탕으로 무술을 연마하는 사람이나 치러지는 행사도 많다.

 

정조의 비밀 편지들

 

2009년 2월 발견된 심환지와 교환한 서신첩인 '정조어찰첩'을 보면 '학자군주'답지 않게 왕의 표현이라 볼 수 없는 표현들을 많이 쓰고 있다. 특히 자유자재로 설과 막말을 구사하는 모습 때문에 화제가 되었는데, 예를 들면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사람 꼴도 못 갖춘 새퀴랑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병진이 감히 그 주둥아리를 놀린다."라거나, 대신 ○○○는 몸에 동전 구린내가 나서 주변이 모두 기피하는 놈이다", "호로자식"이라든지.

어떤 편지에는 '아놔. 내가 새벽 세시까지 잠 못자고 이러고 있다.'란 말 뒤에 '가가(呵呵)'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웃음소리 '껄껄'을 뜻한다. 요즘으로 치면 "ㅋㅋㅋ"나 다를 바 없는 표현. 이런 걸 보면  키보드워리어의 지존  초성체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 창제할 때 집현전 학자들과 신명나게 논쟁을 벌였던 전례도 그렇고, 조선 왕실 혈통에는 어쩌면 키배의 재능(…)이 흘렀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도... 이거 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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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이 편지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 많다. 어떤 편지에는 한자로 쓰다가 너무 격해져서 마땅한 한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갑자기 한글로 近日僻類爲뒤쥭박쥭之時...(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 되었을 때는...)라고 쓴 표현도 있고, 심환지 본인에게도 "갈수록 입조심 안하는 생각 없는 늙은이"라고 면박을 주는 편지도 있다. 한자로 쓴 편지에도 한국어에서 표현하는 속담을 자주 한자로 옮겨서 인용하고, 이두식 표현도 많이 등장한다. 정조 자신이 소설 장르를 탄압하고 이를 따라하는 신하들에게 바른 문체를 강요했다는 점을 생각하다면 참으로 이중적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인 우리 입장에서 본다면야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기 때문에 다행인 일이지만 심환지와 정조 사이의 관계만 놓고 본다면 심히 잘못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자신의 사람이라 믿는 신하에게 이런 편지를 썼을 때 신하는 편지를 다 읽은 후 태워 버리는 게 예의였다. 한 마디로 심환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보험을 들기 위해 남긴 편지, 혹은 정조의 약점으로 잡으려 남긴 편지가 그대로 내려와 현대에 발견된 것. 그러나 사실 군신 관계라는 게 항상 불안정한 정치적 관계이고, 특히 정조처럼 왕이 다혈질일 때에는 신하 입장에서 불안감이 생기고 혹시 모를 일에 대해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을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애초에 다른 신하들이라고 편지를 태웠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편 이 어찰첩이 독살설을 논파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 지속적으로 심환지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눈이 너무 침침해져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라거나 '어디가 아프고 언제 약을 얼만큼 먹고 있는데, 아파 죽겠도다' 하고 병세의 위중함을 호소하는 대목이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처: 엔하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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