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민이 스스로 역사 연구자료도 안믿는게 엽기

짱공이시다 작성일 12.10.28 03: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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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의회 보고서 논란 예상…‘고구려는 중국사’ 왜곡 내용도 담겨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298457


美의회, `中-한반도 관계' 보고서..논란 예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899409

美의회 보고서 "고구려·발해는 당나라 지방정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899409








중국 한족이 이민족에게 지배 받은 기간은 2천년, 중국 역사의 절반

2004426152515_110000000000_2.jpg- 동아시아 역사는 어떻게 왜곡되어 있나?



20년 넘게 고대 한일관계 자료를 찾다보니까 여러 가지의 역사책들을 들여다보게 됐다. 내 생각으로는 동아시아 역사는 중국 중심으로 이천년 이상 왜곡이 되어 왔다. 객관적인 사실은 중국 한족이 이민족에게 지배를 받은 기간이 지난 2천년 중국역사의 절반 가까이 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보아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등 세 지역 간 작용-반작용의 역사다. 만리장성 남쪽의 중국대륙은 한족, 만리장성 북쪽은 투르코-몽골족의 본거지였다.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만주의 서부 초원지역은 선비-거란족의 본거지였고, 중부 평원지역은 예맥족, 동부 산림지역은 숙신-말갈-여진족의 본거지였다.

지난 이천년 동안 중국 땅에 다섯 개의 정복왕조를 수립한 이민족들이 있었는데, 그 중 네 개가 만주 출신이었고, 한 개가 몽골고원 출신이었다. 이 다섯 왕조가 천년 가까이 중국을 지배했다. 5호16국의 혼란기 중 선비족의 전연(349-70년)이 화북의 동쪽지역을 잠시 점령했었다. 하지만 북중국 전체를 점거한 최초의 이민족 왕조는 선비족의 북위(386∼534년)다. 그 다음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916-1125년)다. 거란족은 선비족의 후예다. 그 후 금나라(1115-1234년)가 북중국을 지배했다. 금나라는 만주 동부의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여진족은 요를 깨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몰아냈다. 그 다음이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1271∼1368)이다. 마지막으로 청나라(1616∼1912년)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나라이름을 후금이라 했다. 모두 합치면 이민족 통치가 869년 간이다. 여기에 5호16국(302-439년)과 5대10국(902-960년)의 혼란기를 감안해야 한다.

동아시아 역사는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간의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

2004426152515_110000000000_3.jpg- 중국 한족이 동아시아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비근한 예를 들어 보자. 많은 사학자들이 220년에 후한이 멸망한 후 618년에 등장한 당나라를 중국한족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시대로 간주하는데, 사실을 좀 보아야 한다. 당 고종(618-26)이 수나라를 승계하고, 당 태종(626-49년)이 사방을 정복할 때 고구려에게는 크게 패했다. 660년에 정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고종(649-83)을 내세워, 혹은 자신의 아들들을 내세워 간접통치를 하다가 690년에는 아예 주나라를 세워 710년까지 자신이 직접통치를 했다. 그 후 755-63년의 안록산-사사명 난을 전환기로 907년에 완전히 망할 때까지 당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그런 당나라를 온 세상의 사학자들이 얼마나 미화를 했나? 그 이후를 보면, 명나라가 276년간 통치한 것을 빼고 한족이 제대로 중국대륙의 주인노릇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이와 같은 분석의 틀은 나 혼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이런 내용을 담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에는 이 비슷한 내용도 없다.

- 그렇다면 몽골고원-만주-중국대륙 세 지역 사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나?



진시황 이후 한족 중에서도 몇 차례 무력정복의 위업을 세운 황제들이 나오는데 전한 무제(전141-87), 당 태종(626-49), 명 영락제(1402-24) 등이다. 이들 당대에는 북방 이민족들이 꼼짝을 못했다. 그렇지만 잠시 뿐이었다. 이들이 죽고 나면 다시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고 각종물자를 바쳤다. 당나라 때에는 위구르-터키족에게도 온갖 물자를 갖다 바치면서 내란이나 다른 이민족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통사정 했다. 안록산의 난 때도 위구르-터키족이 와서 평정을 도와줬었다. 

재미있는 것은 만주-중국대륙 관계와 몽골고원-중국대륙 관계의 성격상의 차이다. 몽골고원의 흉노-돌궐 유목민족들은 인구가 조밀한 만리장성 이남의 정주농경지대를 정복하고 통치한다는 것이 체제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단순히 한족을 약탈하고 겁줘서 필요한 물자를 갈취하는 전략을 택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와 살육-파괴를 하면 한족들이 화친-조공이란 체면치례 하에 매년 비단, 술, 양곡, 돈, 공주까지 바치면서 화해를 했다. 이는 만리장성 국경을 지키는 비용이었다.

그런데 만주족들은 기회만 생기면 중국대륙을 점령하고 직접 통치하려했다. 역사학자들의 이론 전개가 재미있다. 몽골 고원은 농경사회가 아닌 유목사회여서 정주 농경민족을 다스리는 법을 몰랐는데 만주에 사는 민족은 송화강-요하 유역의 농경문화 존재 덕분에 정주농경사회를 통치하는 비법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만주 서부 목초지의 선비족이 강성할 때는 요하 유역의 도시와 농촌을 점령해 중국식으로 관료적 통치를 했었다. 군사조직은 유목민족 고유의 시스템을 지키고, 비군사 관료조직은 중국식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선비 모용씨가 요하지역을 다스릴 때 개발하고 모든 만주정복왕조가 애용한 이원체제(Dual System)이다.

이와 같은 이원체제를 발전시키니 강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도 농경민족을 통치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북위가 이 방법으로 북중국을 통치할 때, 몽골고원의 유목민족들은 만리장성 부근에 접근도 못했다. 막강한 북위 기병이 오히려 몽골 유목민들을 계속 핍박 했었다. 북위가 망한 것은 너무 중국화 되어 군조직과 기강이 문란하게 되었을 때였다. 선비족 후예인 거란족이 요나라를 세웠을 때도 이원체제를 고수했다. 여진족의 금나라,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몽골고원 유목민족 중 예외가 있다면 원나라를 세운 몽골족이다. 과거 흉노-돌궐 족이 만리장성 아래 중국한족을 협박하면 겁을 먹고 알아서 온갖 물자를 받쳤는데, 징키스칸이 쳐들어 올 당시에는 만주 출신 금나라가 북중국을 점거하고 있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동부만주 산림 속에서 보통 독하게 산 족속이 아니었다. 몽골족의 협박에 굴복하기 보다는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계속 싸웠다. 이 와중에 몽골족은 금나라의 시스템을 배우고 중국을 통치하는 법을 터득했다. 몽골은 당시 중앙아시아를 이미 정복했었는데. 그 곳에서 위구르-터키 족 전문가들을 데려와 중국통치 관료조직에 이용할 수 있었다. 원나라가 중국 전 대륙을 정복한 것도 당시 몽골의 유라시아대륙정복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고 나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할 수 있느니 없느니 하는 얘기가 나올 여지가 없다. 중국 한족은 이민족한테 침략과 통치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지금처럼 영토가 커진 것도 원나라의 쿠빌라이칸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청나라 건륭, 옹정, 강희 세 만주족 출신 황제들의 활약 덕분이다.

억지부리는 중국 한족

2004430111830_110000000000_2.jpg- 말씀을 듣고 보니 중국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한족이 만주 전체를 먹은 건 1912년 이후다. 그 이전에 요동 근처에 여러 번 왔다 갔다 하기는 했다. 한 무제가 고조선 치고 한사군을 설치했지만 오래지 않아 대부분 쫓겨났다. 수나라 때도 요하까지는 몇 번 왔었다. 그 다음 당 태종이 시도를 해보았고, 나중에 측천무후가 백제, 고구려를 정복하고 도독부들을 세웠지만 신라에 의해 678년에 한반도로부터 모두 쫓겨났고, 요동은 발해의 땅이 되었다. 안록산의 난 이후에는 당의 영향력이 발해에 밀려 산해관의 만리장성 뒤로 물러났다. 도대체 한족이 요동 근처를 얼쩡댄 게 얼마나 된다는 말이냐. 지난 3천년간 900년도 안된다.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 중국을 점령한 것이지 한족이 만주를 차지한 게 아니다. 청나라 때 만주족들은 중국한족들이 만주에 얼쩡거리는 게 보기 싫어서 수 백리에 달하는 도랑을 파고 제방위에 버드나무를 심어 한족진입을 금지했다. 만주 땅은 만주족들이 말 타고 사냥하면서 상무정신을 키우는 곳이지 한족이 가서 농사를 지으라는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주는 18세기 말까지 거의 무주공산의 빈터 같이 보였다. 청나라가 쇠망하면서 중앙정부 통제력이 사라지니까 한족들이 만주로 대거 진입했다. 그래서 만주 인구의 90% 이상이 한족이 되어버렸다. 옛날에는 100-200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는 한적한 땅이었다. 우리나라 중고등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 같은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다. 

만주지역의 영향은 현재 중국의 표준어라는 만다린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중국어의 표준말인 만다린어는 원래 요동 근처에서 돌아다니던 중국말이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알타이어 계통에 속하고 본래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어들은 중국-티벳트 어족 계통으로 분류된다. 청나라 사람들이 처음 만주족을 동원해 만든 군사조직이 팔기군인데, 후에는 몽골족, 한족의 팔기군도 만들었다. 한족 팔기군은 전체 청나라 병력 중 사분의 삼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한족 팔기군의 핵심은 원래 요하 유역에서 살던 한족들인데 만주 땅에서 만주 민족들과 오래 어울려 살다보니 자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중국어 자체도 상당히 알타이어화 됐다.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하고 중국대륙을 통치를 하려고 보니 이들 요동의 한족들이 사용하던 중국어가 가장 귀에 익고 의사소통이 편하기 때문에 청조의 상용어로 쓴 것이다. 즉 청나라가 요동에서 가지고 온 말이 만다린어다. 알타이어 특징이 중국어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고 또 어미변화가 굉장히 많다는 것인데, 만디린어 역시 중국방언 중 어미변화가 가장 많다. 그래서 일부 언어학자는 이 만다린어를 중국어가 아니라 만주어로 분류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한다. 

홍교수는 1981년 오사카대 모리시마 경제학 교수가 쓴 ‘왜 일본은 성공했는가(Why Japan has succeeded)’란 책을 읽다가 일제 때 국민학교 역사 교과서에 나왔음직한 얘기를 그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모리시마가 고대에 마치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 같이 서술하는 것을 보고 한일 고대사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왜 관심을 가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또 잘 모르고 있는 고대사를 어떻게 하면 제대로 알게 할까 하는 고민으로 각종 역사서적을 탐독하며 한일 고대사 연구를 시작한 그는 ‘일본은 백제가 세웠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일본의 역사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북아는 한바탕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섣불리 감정을 앞세워 대응하다가는 장기간에 걸쳐 조직적으로 왜곡된 논리에 어이없이 당하기 십상이다. 홍교수가 한일 고대사와 동북아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만이 21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구현한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4성수는 중국벽화에 나온적이 한번도 없다 그러며서 자기거라고 한다

고구려 박제는 4성수 많이 나온다 일본신의 90%는 한국인이다

가장오래된쌀한국에서나왔다 

가장오래된배한국에서나왔다

가장오래된무덤한국과유프라테스강유­역에서나왔다

누가 漢족이 가장오래됬다고 하는가 가장오래된건 유프라테스강유역문명이다 

그 다음이 이집트 다음이,적산문명 다음이 황하다 적산은 한국식 문물이 가장 많다 

즉 고조선과 가장 가깝다 이글에 욕할껀 친일 친중 한나라당 뉴라이트들 뿐이다

고구려 705년 백제698년 신라 1000년 고려 400년 그러면서 가장 중국에서 긴나라가 290년 뿐이다

누가 중앙 정부가 되야 할까?

동북공정의 결과는? 한족은 동의족의 노예였소 일것이다

수많은 증거가 중국보다 한국이 가장 길다라는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다른나라에서는 고인돌을 보고 이렇게 빠른 강한 집권자가 있던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한다




최근 중국이 고구려 역사 왜곡을 하는 이유가 약 60년 전 북중국과 만주 지역에서 발견된 피라미드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북중국과 만주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100개 이상이다. 평균 25∼100수십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큰 것도 있다. 제작 시기도 이집트보다 2천년은 앞선다. 
이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 명이 소요된다고 한다.(이집트 카이로 근교 기자 피라미드군은 BC2,700?∼BC2,200? 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로 그 중 쿠푸왕? 피라미드가 최대로 높이 146.5m이고 기부(基部) 한 변의 길이는 230m이다.) 

광개토대왕릉과 같은 실체가 분명한 왕릉을 제외하고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았는데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 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 피라미드임이 밝혀졌다. 
1963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해 측정해보니 5,000년∼7,000년 전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피라미드들은 황하문명(양사오문명 BC4,000∼BC2,000)보다 1,000년 정도 빠른 것이다.(진시황은 BC259∼BC210 생존) 

현재, 이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어 외국학자의 학술적인 조사가 불가능하며 중국 학자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중국 당국이 1960년대∼1970년대 이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東夷)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하 문명보다 우리 문명이 빨랐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발굴을 중단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정치적 안보적인 전략으로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들에 접근을 금지시키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포함시키는 소위 동북공정 작업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크랴샤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어느 도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 있던 북중국과 만주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중국 공안당국은 이들의 촬영 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 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검거 직전에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어 북중국과 만주의 피라미드 실체를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을 수 차례 보내고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적 유목민족과 기마 민족들만이 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계속되는 서구 학자들의 발굴 요청과 서구의 한 케이블 TV가 몰래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 사회에 방영하는 노력에 힘입어 최근 중국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그들은 아직 발굴 기술과 유물 보존 기술이 부족해 다음 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와 동시에 중국 정부에서는 소위 동북공정사업이란 것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켜 자국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전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 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 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의문을 가지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5,000년~7,000년 전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누구일까? 그 당시 한족(漢族)은 아직 황하 상류의 남쪽 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황하 중류로 이동을 한 것은 훨씬 후기이다. 따라서 한족(漢族)은 물론 아니다.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들도 유목민으로서 정착 문명과 관련이 없으며 당시 그들은 몽고 서쪽 초원지대 알타이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5,000년~7,000년 전 이 지역에 관련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서 이 지역에는 고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 만주에서 4400년 전에 제조된 청동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른바 '황하문명'의 가장 오래된 청동기는 4200년 전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우리 민족의 문명이 중화 문명보다 앞섰으며 중국 문명은 우리 민족의 문명을 받아서 된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자 중국 당국이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정부는 역사적인 면보다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장기적 전략을 수립하여 중국 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소위 동북공정사업이란 것을 추진하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켜 자국 학생에게 가르치고 전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 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 정권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 역사에 대한 왜곡이 성공하였다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 고조선의 피라미드들을 그들의 역사인 양 대대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려 할 것이다. 우리 중국이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라고… 


저번에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맹주라는 말은 쪽팔린다느니 어떻다느니 하시는 분들 계시는데위와 같은 글을 읽어보면 동아시아에서 중앙정권은 어느 나라가 현실적으로 가깝다고 보십니까아직까지 중국사학에 지배되어 있는 현실을 보면 씁쓸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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