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부 -
죽을 사야 되나 말아야 되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래! 죽 사주고 점수 좀 따야겠네..-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지만 난 점심도 먹지 않고 바로 죽집에 가서
야채 죽을 하나 포장했다.
그리고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 부근에 늘 그녀를 데려다 줬던 장소에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들뜬 기분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를 않았다.
-죽까지 사왔는데 내가 먹어야 하는 상황인 거 아냐??-
불길한 기분에 또 전화를 했다.
여전히 신호는 가지만 전화는 받질 않았다.
아파트 단지에서 멀뚱히 서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내가 들고 있는
포방된 죽이 들어있는 종이 백을 한 번 보고서는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나가는 그 사람들의 눈빛에서 속마음이 다 들렸다.
-에구..저 남자 여자에게 죽 사다가 바치는 모양이네..-
-어떤 여자인지 부럽네~ -
-남자 망신 다 시키네 저 새끼~-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굴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내 눈에 다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마다 나도 볼 일이 있어 나가는 동네 주민처럼 보이려고
종이 백을 들고 그 동네를 한 바퀴 할 일 없이 돌았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를 돌고나니 배가 고팠다.
-내가 그냥 저기 놀이터에 앉아서 죽을 먹어버려??-
극단적인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가 다시 한 번 전화 해보자는 생각으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 다시 전화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기에 문자를 남겼다.
『현정씨 동네에 죽 사들고 왔는데..전화가 안 되네~ㅠ』
눈물까지 찍어서 보낸 문자에 답장조차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문자를 보냈다.
『아파서 자는 모양이네..그럼 경비실에 맡겨 놓을 테니 이따가 문자 보면 챙겨가~』
이렇게 문자를 보내고 경비실로 걸어갔다.
경비실에서 무언가를 치우고 있는 아저씨에게 현정이라는 여자가 찾으러 오면 주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집으로 왔다.
죽 배달을 하고 너무 배가 고파 집에 와서 짜장 라면 2개를 끓여 먹었다.
배가 좀 불러오니 기분도 좀 나아지는 듯 했다.
-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진짜 볼 수 있으려나?-
그리고 저녁이 되어 어떤 것을 먹을지 전단지를 보고 고르는 중에 전화가 왔다.
왠지 현정이 일 것 같아 날렵하게 휴대폰을 들어서 번호를 봤다.
-아싸! 현정이네...그런데 삐진 척을 해야 하나?-
가라않은 목소리였기에 목으로 음!! 이라고 외치며 목소리가 가라앉아 보이지 않게 하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앙~ 현정씨~~~~~"
나의 징그러운 애교에 역시나 징그럽다는 듯이 현정이는 말했다.
"뭐야~ㅋ 내 전화를 하루 종일 기다린 사람처럼"
"하루 종일 기다렸으니깐 자연스레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거야~"
"치~ 안 그래도 아파서 하루 종일 잤다가 조금 전에 일어나서 문자보고 죽 챙겨서 왔어~"
-아 나의 죽 배달이 성공 했구나..점수 좀 땄으려나..-
"죽 맛있지~ㅋ"
"식었던데~ㅋ"
-아놔! 뭐야~!! 기껏 사줘도...아까 전화를 제 때 받았으면 뜨거운 죽을 먹었을 거 아니냐!!!-
목구멍 바로 밑까지 올라온 외침을 삼키며 기운이 빠진 척 말했다.
"그래서 맛없어??"
"아니 먹을만해~ 전자레인지에 데웠거든~ㅋ"
-뭐야 먹..을만해?? 아나! 어린 게 주둥이는 진시황 급이네..-
그래도 동생처럼 행동을 해야 하기에 꾹꾹 참아가며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나 오늘 현정씨 때문에 일요일 쉬는 것도 쉬는 게 아니네~ㅋ"
"왜? 내가 그렇게 걱정되더나~"
"아니 죽을 경비 아저씨가 먹었을까봐~ㅋ"
"뭐야~ㅋㅋㅋ 에이그~~ 그리고 승훈씨..고마워~"
"고맙긴 뭘.."
"고맙긴 한데~ 다음에는 직접 끓여서 오면 더 고마울 것 같은데~ㅋ"
- 이 여자 뭔가 이상해..뒤 끝 같은 거 장난이 아닐 것 같아..-
"나 죽 못 끊이는데.."
"죽 못 끓이는 남자가 어디 있어~ 누구랑 결혼 할지 모르겠지만 결혼하면 간 큰 남자 되겠다~ㅋ"
-뭐야? 간 큰 남자?? 아후!!! 청소 안하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자냐!!-
가만히 듣고 있는 것보다 이렇게 속으로 대꾸를 하니 그나마 화가 진정이 되었다.
"그래~ 나중에 배워서 꼭 끓여 줄 테니 내가 죽 끊이는 거 배울 때까지 아프면 안 돼~ 알았지~?"
"치~ 말만 잘하는 거 같애~"
"내일 아침에 현정씨 집으로 데리러 가면 되는 거지?"
"응.."
현정이랑 통화를 하고 나서 내일 뭘 입어야 할까라는 고민에 옷을 이것저것 꺼내어
보면서 기분 좋게 저녁을 보냈다.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목욕탕에 갔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예전보다 2kg가 쪘다.
-아..요즘 괜히 배가 나온 거 같더니만..오늘 하루 종일 배에 힘주고 있어야겠네..-
목욕하고 면도하고 배 때문에 신경이 쓰여 아침밥도 안 먹고
집에서 기다리다가 9시쯤 되어 현정이에게 전화했다.
"승훈씨네.."
"일어났어?"
"응 밥 먹고 있는 중~"
밥 먹는다는 소리에 군침이 돌았다.
"승훈씨는 밥 먹었어~?"
"응..."
"그럼 밥 먹고 준비할 테니깐 나 데리러 와~"
"지금 출발할께~"
"그랭~"
아침부터 목욕해서 힘도 없고 밥까지 안 먹어서
허기진 배를 쥐고 현정이 집으로 운전해서 갔다.
어제 신경 써서 코디한 옷을 현정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차에서 내려
현정이에게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차 앞에 서서 현정이를 기다리는데 바람이 많이 불었다.
-아..헤어스타일 오늘 이쁘게 됐는데 바람이 왜 이리 불지..-
한 5분정도 지나니 저 멀리서 현정이가 작은 가방과 종이 백을 들고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많이 불어 고개를 숙여서 걸어오는데 긴 머리칼이 옆으로 날리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큰소리로 현정이를 불렀다
"현정씨~ 여기~"
고개를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서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차에 태우고 옆에 앉아 있는 현정이에게 텔레비전에서 봤던
안전벨트 내가 해줄께 스킬을 쓰려는데 차에 타자마자
본인이 스스로 먼저 안전벨트를 맸다.
-차 같은 거 많이 타본 거 같네..-
현정이의 손에 든 종이 백을 보며 뭐냐고 물었다.
"그거 뭔데?"
"이거 오늘 야외에 놀러 가면 점심 먹어야 하잖아~ 이 누나가 특별히 유부초밥이랑 김밥을.."
"이야~! 유부 초밥이랑 김밥을 아침부터 나를 위해 아픈 몸으로 만든 거야?"
현정이가 빙긋 웃더니 혀를 쭉 내밀며 말했다.
"아픈 몸으로 김밥천국에 사러 갔어~ㅋ"
"아...사러 갔구나.."
-나에게는 직접 죽을 끓이니 마니 그래 놓고..-
이 생각할 때 현정이가 내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왜? 무슨 생각해? 혹시 어제 죽은 직접 끓여주라고 그러고 난 김밥을 사 가지고 왔다는 표정이네?"
-뭐지?? 독심술인가??-
"아니...그게..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에 딱 다 보이는데~ㅋ"
"솔직히 좀 그래서~ㅋ"
"그래서 먹기 싫어?"
-아~ 마치..내가 아침 안 먹은 것을 알고 협박하는 거 같아..-
"아니아니~!! 먹을 꺼야~!! "
그러면서 현정이는 호떡을 쥐듯 내 뺨을 꼬집으며 빙긋 웃었다.
"그래야 착한 승훈이지~ㅋ"
웃으면서 내 뺨을 꼬집을 때는 진짜 미친 여자 같았다.
-나중에 네가 진짜 나 좋아하게 되면 이 공주병부터 뜯어 고치리..-
이런 짧은 결심을 했다.
현정이가 나에게 물었다.
"어디 아는 곳 있어?"
"글쎄...아~!! 맞다~ 여기서 2시간만 가면 포천계곡 나오는데 거기 다녀올까?"
"거기가 어딘데?"
"차로 가기도 좋고, 여름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지금은 날이 추워 사람도 없고 바람 쐬기 좋을 꺼야~"
"그래 가자~"
-흐..사람들이 없으니 눈치 보며 또 뽀뽀나 해야징~ㅋ-
므흣한 상상에 살짝 미소가 보였는지
"사람 없다고 이상한 짓 하면 안 돼~알았지?"
"이상한 짓 한다고 당할 현정씨가 아닐 건데~ㅋ"
"그건 그래~ㅋ"
-뭐지..진짜 무당집 딸내미인가...-
현정이를 보며 농담 삼아 물었다.
"혹시~ 취미로 팬티 모으나?"
"뜬금없이 무슨 팬티?? 아 진짜 변태 같애~"
"아니 점쟁이 팬티 같은 거~ 너무 내 마음을 뚫어 보는 듯해서^^"
이 말에 개그 지수가 낮은 현정이는 차안에서 또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포천계곡으로 가는 길에 그녀를 창밖을 보며 아무 말 없었고 나는 그냥 운전만 했다.
포천계곡 입구에 들어서자 좔좔 흐르는 계곡물을 보자 나도 속이 좀 후련해지는 듯 했다.
올라가던 중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우고 현정이에게 말했다.
"바람도 쐴 겸 차에서 내릴까?"
"응~ 그러자~"
차에서 내린 현정이는 나를 아래위로 봤다.
-역시 어제 옷을 고르고 자기를 잘했네..ㅋ-
그러자 현정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승훈씨는 옷 입는 거 보면 ..참..."
-흐흐 빨리 옷 잘 입었다고 말해~!! 어서!!-
이렇게 속으로 외쳤다.
현정이가 말했다.
"옷 입는 게 참...나이 많은 사람 같아~ㅋ"
-엥??? 이게 뭐야??-
"정말??"
"아니 농담~"
-진짜인 거 같은데...아 평소에 젊은 애들 옷 입는 걸 봐둘 걸..-
차에서 내리니 바람 부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내리자마자 둘 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다시 차에 탔다.
내사 머쓱해서 혼잣말을 했다.
"바람 많이 부네.."
그 혼잣말을 듣고서는 현정이도 말했다.
"그러게~"
-음..바람이 많이 부니 사람도 없고 차에 단 둘이 있고..아싸 흐흐흐흐...오늘 계탔넹..ㅋ--
그리고 약간 야릇한 눈빛으로 현정이를 봤더니 현정이가 종이 백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김밥먹자~"
배가 고프니 머리는 야릇한데 몸은 야릇하고 자시고 그런 것도 없었다.
"콜~!!!"
이 말을 하던 중에 영화 대사가 생각났다.
-입은 뇌보다 빠르다~?-
현정이가 꺼낸 도시락을 정말 허겁지겁 먹었다.
현정이는 거의 먹지도 않고 웬일로 내 눈치를 보았다.
헨델과 그렌델을 보면 아이들을 살찌우는 모습을 보는 마귀 마냥 나를 보는 듯했다.
차안에 김밥 냄새가 나서 차문을 열 때 현정이가 말했다.
"승훈씨.."
난 먹으면서 말했다.
"쩝쩝..응??"
"나 미안해.."
먹는 것을 일시 중지하고 현정이를 보았다.
"뭐가 미안해??"
"나 속인 거 있어.."
-엥??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설마 혹시.. 현정이도 나이가 속여서 나보다 더 많은 거 아냐???-
-만약 현정이가 나이를 속였다면 나도 내 나이를 밝혀야 하나??-
이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데 현정이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 금요일 날 승훈씨랑 헤어지고 그 사람 만났어..."
"언제??"
"금요일 날 승훈씨랑 헤어지고 집에 가는데 그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
-아..그때 전화가 통화 중이였을 때구나..-
갑자기 힘이 빠졌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정이가 말을 이었다.
"어제도 아침부터 우리 집에 찾아와서 차에서 이야기를 했었는데.."
"했었는데...?"
힘없이 현정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차에서 죽 사들고 오는 승훈씨 봤어..와따가따 하는 거까지.."
좀 창피했다.
그러나 궁금한 거는 물어야 했기에..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
"모르겠어.."
한 편으로는 가슴이 아프고 한 편으로는 오늘 뽀뽀는 물 건너 같네 라는 생각을 할 때
조수석에 앉아있던 그 녀가 내가 앉아 있는 왼쪽으로 약간 기대면서 말했다.
"지금은 승훈씨가 더 좋은 거 같애.."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나 사실 전에 그 사람 아직도 못 잊고 있어.."
"그런 거 같아.."
현정이랑 두 번째 만났을 때 그 사람 때문에 울먹거리던 표정이 생각났다.
"이해해 줄 수 있지?"
"응.....아마도 이해를 해야겠지? 더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기에 내가 약자니깐.."
"............."
"내가 보니깐 현정이도 그 사람에겐 약자인 것 같애.."
내가 말하고도 가슴이 아려오는 이 물음에
그 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5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