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사 출신의 독립군

lkajs 작성일 12.12.06 23: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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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김장군,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일본군 대위 출신의 독립군 사령관 김경천
1920년 대 그는 백마 탄 김장군이란 별명으로 조선민중들의 영웅이었다.

소비에트 당국에 압수되었던 친필일기 「경천아일록」은 
1920년대 초반 연해주에서 치열한 조국광복전쟁을 치룬 김경천의 전투일지이자 고뇌에 찬 지식인의 증언이다. 
그런 식민지 조선의 희망이었던 김경천은 왜 전설로만 남았는가? 
역사 속에 묻힌 할아버지의 과거를 찾는 증손녀를 따라 
독립전쟁의 영웅의 비장한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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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의 유랑! 카자흐스탄의 독립군 사령관 후손들

1937년 강제이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김경천의 후손들. 김올가씨는 카작인들과 슬라브인들 사이에 이방인처럼 존재하고 있는 고려인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최근 발굴된 할아버지의 한글 일기「경천아일록」에서 김올가씨는 할아버지의 고뇌를 느낀다. 할아버지는 왜 그런 어려운 길을 갔을까? 돌아가신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찾지 못한 할아버지의 무덤과 유해를 찾기 위해 김올가씨는 긴 여정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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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관련 기록                                    ▲할아버지의 일기를 보고 있는 올가 

■ 김경천은 누구인가?

“2천만 전 민족을 통틀어 보아도 나만큼 국가를 위한 학문을 배운 자가 없다.”
무관 집안에서 태어나 나폴레옹을 동경하여 군인이 되고자 했던 김경천. 그는 관비유학생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나 재학 중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망해버린다. 지키고자했던 나라가 망한 것에 크게 상심한 김경천은 일본의 군사진식을 배워 만주로 탈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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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병장교시절                    ▲밑에서 두 번째 줄 맨 오른쪽이 김경천

■ 마침내 전선에 서다


1919년 6월, 일본육사 3년 후배 지청천장군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김경천은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이 된다. 이 후 당시 가장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일본의 사주로 한인촌을 약탈하는 중국 마적을 소탕한다. 이만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군신 김장군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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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혁명광장                       ▲마적에 대항하는 독립군들

■ 시베리아의 전설로 사라진 전사
 

“만약에 한국 사람들이김경천 장군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인가.”
김경천은 소비에트군과 한반도로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후 러시아는한인 독립군을 지원하지 않았고 김경천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스탈린 시기 1936년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된다. 3년 뒤 석방되었으나 인민의 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체포되어 김경천은 1941?년 북부철도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중 영양실조로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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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인 유정화씨와 김경천          ▲러시아에 거주 중인 후손들

일본군이 되어 민족을 배신한 다른 한국인 출신 장교들과 달리 김경천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군 장교가 되지만 한평생의 부귀가 보장된 삶을 버리고 고난에 찬 항일무장 투쟁에 나섰다. 70년이 지난 지금 민족해방전쟁의 영웅 김경천은 시베리아 벌판에 고혼이 되었고 그 후손들은 고난에 찬 삶을 살고 있다. 반면 민족반역자의 길을 걸었던 일본군 장교들은 국립현충원에 묻혀있고 그 후손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가로 떵떵거린다. 김경천 장군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무서운 역사의 아픔을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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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선생 보도기사,<동아일보> 1923년 7월 29일자“빙설(氷雪) 쌓인 시베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 한 실지 경험담(實地 經驗談)”이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간단한 이력과 러시아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벌인 일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어렸을 때의 이름(아명)은 김현충(金顯忠), 본명은 김광서(金光瑞)이고 김응천(金應天)이라고도 불리었다. 1888년 6월 함경남도 북청에서 대한제국 때 군기창장(軍器廠長)을 지낸 김정우(金鼎禹)의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기병(騎兵) 중위로 복무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창생인 이동천(李東天)·지청천(池靑天)과 함께 그해 6월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단둥현[丹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이 창설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이 체포되자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초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연해지방로 이동하였다. 

3월에 러시아의 적군(赤軍)과 연합하여 반혁명군인 백위군(白衛軍)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이들의 세력에 밀려 연해주의 수찬(현재의 파르티잔스크)으로 퇴각하던 중 동포를 괴롭히던 중국의 마적들을 소탕하였다. 이때부터 시베리아에서 명성을 얻어 동포 사이에서 '김장군(金將軍)'이라 불렸다.

수찬에서 마적을 섬멸한 뒤 동포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 군정과 민정(民政)을 실시하였으며, 1921년 봄 수찬의 인접 지역인 올가에서 통합빨지산부대 건립에 동참하고 사령관이 된 뒤, 그해 9월 러시아 빨치산 부대의 제의에 따라 수찬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고 나머지 대원들은 아누치노로 이동시켰다.

10월 러시아의 적군과 연합하여 수찬의 백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1922년 1월 이만에서 백위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적군의 사령관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김경천은 수찬의병대와 러시아 적군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으며, 1922년 3월 백위군을 우수리스크로 쫓아냈다.

1922년 7월 김경천이 백위군을 몰아내자 연해지방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포시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같은해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무장해제를 강요당하였다. 이에 1923년 2월 상하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으나 회의에 실망하여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치다가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숙청 때 체포되어 주거제한을 받던 중 사망하였다.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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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역사스페셜에 나온 김경천 장군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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