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애틋했던 연애썰

베스트드렁커 작성일 13.02.19 16: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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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썰즈넷 펌자료입니다.


※ 1,2,완결까지 합친자료입니다. 즐감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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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가 한창 월드컵때였으니 아마 2006으로 기억한다.








처음 시작은 집안 사*으로 유난히 이사를 많이 다녔던 내 사*에 기인한다.






이사를 많이 다녔으나 특유의 능글맞음과 사교성으로 지나온 지역에 남은 친구들도 유난히 많았다.






서울에 태어나, 경기도, 감자국, 고담, 대전, 경주까지...






많은 사이트에서 금칙어로 지정된 그곳을 제외한 어지간한 곳에서 다 살아봤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2006, 월드컵 전에 한창 피씨방 아르바이트(당시 고삐리였다.)를 하고 있던 내게 꽤나 재밌는 상황이 펼쳐졌다.






친구 여동생에게 문자가 온 것이었다. 어렸을때 친구집에 놀러가며 자주 얼굴을 봤던 내게 있어 마치 친동생(친구와 연년생이었다)이었던 아이였기에






난 자연스럽게 답장을 보냈고 아직도 그 내용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오빠야 뭐해요'








그때는 몰랐다.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연애가 시작될줄은.








그렇게 약 한달정도 문자를 주고 받았을까. 무뚝뚝한 친구녀석들 덕분에 문자는 쓸일이 없었고 대체로 친구들과 연락하는 것은 짧은 통화 1~2분이 끝이었다. 모든 사내애들이 그렇듯이








'뭐하노'






'겜'






'어디'






'집앞겜방'






'기다리라'








딱 이 수준이었다. 그런 내게 있어 자연스레 오빠야 오빠야 하는 귀여운 여자아이의 문자는 마치 매주 일요일 아침에 디즈니 만화동산을 기다리는 어린 시절의 설렘을 안겨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연애 감정은 아니었다. 그리 바른 학생은 아니었던 내게 있어 사실 주변 여자아이들의 연애란 개념은 무척 가볍기 그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달동안 문자를 하며, 어렸을때 오빠 노래부르는 목소리가 멋있었다며 쓸데없는 칭찬도 하고는 했다. 그리고 나역시 너 이뻤다는 립서비스도 했었고... 어쨌든 한달의 문자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들은 이 아이가 나와는 다르게 무척 바르게 자라났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어린시절 즐거웠던 시간을 공유한 친동생 같은 아이가 이렇게 바르게 컸다는 것이 기특하기도 했고.








한달이 지나고 어느날, 여자아이의 문자는 왜 갑자기 연락을 한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 오빠 사는 동네로 전학가요.'








사*인즉 내가 현재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오는 것이었다. 그 친구 아버님 고향이 마침 내가 살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쩐지 기쁜 마음으로 여자애한테 빨리 오라 빨리오라, 오믄 니 나한테 꼭 와라. 라고 이상한 다짐이나 받고 앉아 있었다. 아마 그때부터 이 아이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약 두달뒤, 이사를 온다는 아이와 연락을 하며. 나는 어쩐지 좀더 적극적이게 되었다. 연애 감정을 떠나 그냥 그러고 싶었다. 지저분한 농담도 하지 않으며 녀석이 날 '남자'로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에는 하지 않았던 쓸데 없는 걱정과 멋진 척을 하면서.








'오빠야는 노래부를때 빼고는 다 바보 같아서 하나도 안 멋있어요.'








그렇게 어렸을때 부터 좆댓말을 하던 여자애, 집안이 엄하기도 하고 지 오래비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던 아이였기에 그러려니 했으나 어린마음에 왜 그렇게 그게 좋았는지 모르겠으나 별 시답잖은 문자에도 배를 째며 웃기도 했다. 그냥, 아무런 이유가 없이 이렇게 전화 통화를 하고 문자를 주고 받는 시간이 좋았다. 가슴어림이 뜨뜻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위의 녀석의 문자가 오고 나서부터, 어린나이에 대가리에 피도 안마르고 피기 시작한 담배도 끊어가며 노래도 불러봤다. 어디가서 못부른다는 소리는 못들어봤지만 그래도 담배에 쩔어서 인지 목소리가 탁하기 그지 없었다. 문득 예전과는 많이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 그대로, 그 간지러운 목소리와 따뜻하기 그지 없는 그 아이에 비해 나는 너무 한심하게 변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행복했던 그때, 그 어렸을 때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돈걱정할필요도 없이 그냥 즐겁게 놀기만 하면 되던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이라고. 이 아이와 연락하는 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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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이사를 많이 다녔던 이유는 하나였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쫓기고 쫓겨 다녔으며 하루에 한끼를 걱정해야 했다. 그런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듯 나역시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반항도 했었다.


급식비를 걱정했고, 매일 새벽 노가다를 나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슬펐고 식당일을 나가시는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에 슬펐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들었는지 시도때도 없이 싸웠고 시비를 걸었으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태웠다.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오시고, 사과를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고. 나는 징계를 먹었다.


그리고 밤에는 피씨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심하기 그지 없는 내 생활에서, 그 아이의 한마디로 시작된 노래 부르는 일은 절대로 빼먹을 수 없는 일과로 자리잡았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혼자 노래를 부르고 그 아이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일분 일초, 답장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마저도 설레였고 즐거웠다. 마치 실컷 놀이터에서 실컷 놀고 집에 들어와 시원한 음료수를 가져다 주시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런 편한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저런 일들을 그아이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었어요.'


'이해해요.'


'화내지 말아요. 한번만 참아봐요.'


'바보 같은 오빠가 그러는 거 하나도 안어울려요.'




그 아이의 한마디 한마디가 우스개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마음에 새겨졌다. 그렇게 위안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고 의지가 되었다. 그러다 하루, 연락이 안되는 날이 다가왔다. 미.친.놈 처럼 하루종일 핸드폰만 보고 있었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면서 기다렸다. 몇번을 걸었을까, 이렇게 연락하는 내가 무섭지는 않을까, 분명 부담스러웠을거야. 얘도 어린데...




오만가지 생각을 다하며 10번째 전화를 거는 늦은 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그 아이에게 버럭 화를 냈다.




'니 왜 전화 안받나, 니 내 죽일라카나.'




'미안해요... 오늘 아파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 평소와 다른 너무나 힘 없는 그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났다. 아 내가 왜 이 아이한테 화를 내는 걸까.


멍한 머리로 끅끅 거리는 내 전화를 끝까지 들으며 그 애는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연락 못받아서... 너무 아파서 이제 일어났어요. 정말 미안해요 오빠...'




뭐가 그리 미안한건지, 끅끅 거리며 우는 내게 자꾸만 미안하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울면서도 행복했다. 그때야 알았다. 난 이 아이를 정말 좋아한다고.




그렇게 한참을 아무런말없이 전화만 들고 있다가, 녀석의 한마디가 내 귀를 울렸다.




'기억나요? 나 어려서 감기 걸렸을때, 오빠가 노래불러준거?'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려서 몸이 약하던 녀석은 잔병치레가 심했고 친구집에서 살다시피 했던 나는 그런 녀석에게 가끔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내 노래를 너무나 좋아했던 것이 그 뒤를 이어 떠올랐다.




'기억 난다. 기억나... 왜 노래 듣고 싶나?'


'응,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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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오래비랑 함께 놀던 때 살던 곳은 서울 용산구였어. 용산구에서 12년 살다가 1년 경기도, 1년 감자국, 1년 경주, 1년 고담...이렇게 살다가 다시 감자국에 살게 된 때였거든.




초등학교 1학년때 부터 친구였던 걔 오래비 덕분에 못 볼꼴 다 보여준 애였어 그야말로 흑역사지.




'됐다. 뭔 노래나. 아픈건 괜찮나.'


'..응... 괜찮아요.'




그렇게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고 난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게 뭐라고. 그냥 쪽팔고 노래한번 불러주는게 뭐 어렵다고. 얘가 아프다는데 뭐가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다음 날 그 아이와 문자를 주고 받고, 전화를 주고 받고... 생각해봤다. 정말 좋아하는 이 아이에게 내 감정을 털어놓고 싶은 건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지내고 싶은 건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말하고 싶었다. 이런 행복한 시간이 모두 사라진데도 전하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싸구려 엠피쓰리를 사서,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연락으로 이 애가 이승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이승기 노래를 유난히 많이 불렀다. 한곡을 수십번 불러보기도 하고, 어쩌다 잘뽑히면 그걸 남기고... 그게 그 아이가 이사오기 한달전의 이야기였다. 웃긴 건 유난히 기억에 남고 그 아이가 가장 좋아했던 내가 부른 노래는 하울의 앵무새라는 노래였다.




어쨌든 그렇게 한달동안 쌓인곡은 딱 6곡. 엠피쓰리 값은 톡톡히 뽑았다. 남은 곡은 6곡이지만 하루에 못해도 6곡은 부른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엠피쓰리를 들고, 그 아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녀석이 왔다. 그 아이가 눈에 보이자마자, 진즉에 문자로 어디라고 주고 받았으면서 달려가 녀석의 손에 엠피쓰리를 쥐어줬다. 뭐가 그리 반가** 난 막 웃었다. 고백? 머리속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고 내게 위안을 주고 위로를 해준 그 목소리가, 지금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에 난 너무나 행복했다.




목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유는 있었다. 이 아이이기에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날 너무나 행복하게 웃게 해주는 이 아이였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내 손을 떠난 엠피쓰리를 쥐어주고, 덥썩 녀석의 손을 잡아 끌었다. 가고 싶은 곳이 한 두곳이 아니었다. 그 아이를 눈앞에 둔 순간, 무려 5년에 가까운 시간의 거리감은 모두 사라졌다. 어릴 적 같이 동네 놀이터에서 놀고 게임기 앞에 서서 웃고 떠들던 어릴 적의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당황하더니, 이내 나를 보고 웃으며 따라와 밥을 먹고 얘기를 하고 그렇게 해가 질 무렵까지 그 아이를 끌고 다니다 녀석의 집앞에 가까워지는 거리에서 나는 뭐가 그리 당당한 건지 녀석의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못하고 되는 데로 내뱉었다.




'니가 좋다. 정말 너무너무 좋다. 이유는 하나다. 너라서 너무 좋다.'




아마 이런 말들이었을 거다. 묵묵히 내 눈을 바라보며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던 녀석이 작게 입을 열었다.




'너무 빨라요.'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은,




'하지만 좋아요. 대신에 이렇게 빠르게 헤어지는 일 절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과 함께 내가 평생을 담아갈 연애가 시작 되었다.




그 아이와 정식으로 만나면서, 그 전에 만난 여자들과 했던 것은 모두 백지화. 엄청 버벅거렸다. 어디 가자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뭐 먹자는 것도 조심스러웠으며 한마디 한마디 말하기 전에 곱씹어보고 얘기하고... 되는데로 내뱉던 내 모습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아이는 내게 하나의 길이 되었다.




밤에 피씨방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싫다고 해서 그만 두었다. 마침 그 무렵 집안일이 잘풀리기 시작하여 적어도 급식비를 걱정할 일은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만나면서 쓸 돈은 없었다. 한달 두달이 지나고, 모아둔 돈이 떨어지고도 우리의 만남은 원활했다. 돈이 없는 나를 보며 웃으며 했던 그 아이의 말 때문이었다.




'내 돈이 오빠돈. 오빠돈이 내돈. 대신 나중에 멋진 곳 데려가 줘요. 나중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어찌나 고마**, 아니 그때도 너무나 고마웠다. 밥을 먹으러 가도 화장실 가는 척, 지갑도 두고 가서는 카드만 주머니에 넣어서 계산 하고 오고... 가끔 내가 돈이 있을때는 아무런 말하지 않고 웃으며 팔짱도 끼고...


고작 나와 한살 차이지만, 어른스러웠다.




세달째 되는 달. 한달치 급식을 빼고 그 급식비로 반지를 하나 샀다. 당시 내 입장에서는 제법 큰 돈이었다. 작은 반지 하나, 남은 돈으로 녀석과 간단하게 군것질을 하고 야자가 끝나고 집에 데려다 주는 녀석의 손에 쥐어주고 웃는데 갑자기 우는 그 아이도 너무 이뻤다.




나와 다르게 지 오래비를 닮아 공부를 잘하던 녀석은, 가끔 막히는 것을 어째서인지 내게 묻고는 했는데 그것을 답해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한심해 공부를 시작했다. 꼴통 학교에서도 꼴통이라 불리던 내가 공부를 하는 모습에 은사님들도 기겁하고는 했었다.




맑은 주말에는 시외버스를 타고 놀러다니기도 했고, 방학에는 모아둔 돈을 털어 놀이공원에 가기도 했다. 물론 돈은 둘이 합쳐서였다. 내가 내고 싶었지만, 나 혼자 돈을 낸다고 하자 화를 내는 그 아이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꼴통학교인 만큼 야자랍시고 명목만 있던 8시까지의 자습을 끝내고, 그 아이의 학교앞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그 애의 손을 꼭잡고 근처 공원을 걷기도 하고...방학에는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있는 그 아이를 양손에 캔커피를 들고 기다리다 같이 걷는 날도 많았다.




그 애가 아픈 날에는 외출나와 그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도 하고...




언제나 너무나 좋았던 것은 그런 나를 보며 항상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환하게 웃어주는 녀석의 모습이었다.


교복 카라에 살짝살짝 스치는 단발, 가끔 그 단발을 귀뒤로 넘기고 환하게 웃는 그 아이는 빛이 나곤 했다.




그 엠피쓰리를 주고 받으며, 서로가 연락할 수 없는 때에 잠깐 잠깐 녹음한 목소리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1년이 되는 날에는 그 아이에게 선물했던 반지와 비슷한 디자인의 반지를 선물받기도 했다.




전에 헤르만 헤세의 말을 왜 썼는가,




알에서 태어났지만, 그 알을 깨야하는 자는 얼마나 슬픈지를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알은 얼마나 아플지, 전하고 싶었다.




누가 봐도 이쁘고 착하던 그 아이와, 온갖 더러움은 다 뒤집어 쓴거라 자기를 비하하던 나는 마치 빛과 그림자 같았다.


항상 함께 있지만... 나는 어느새 그 아이를 구속하고 있었다.




학교 친구와 이야기 하는 것도, 고향 친구와 이야기 하는 것도...


모두 마음에 안들었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이 아이의 세계는 오직 나만이 존재하길 바랬다.




자격지심. 이 한마디가 날 표현하기 가장 쉬운 말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환하게 빛나던 그 아이도 차츰 빛을 잃어갔다. 나에 대한 감정도, 우리의 감정도 처음과 같았지만


나는 점점 더더욱 탁하게 변해갔다. 집착이었다. 태어나 마지막으로 손에 쥔 보물이라는 생각에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그 아이를 몰아 붙이다...


한번도 내 앞에서 울지 않았던 그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내 감정은 이 아이가 이유였던 그 행복들은 끝났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느새 이 아이가 목적이 되어있었다. 변한 것이다.




그 아이를 달래서 집에 들여 보내고 집으로 오는 내내 울었다.


울다가 주저 앉고... 그렇게 집에 들어와 한참을 더 울었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




나는 처음처럼 이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다. 구속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 변화를 알아 챈 녀석은 또 한번 울었다.




왜 그러냐고, 무섭다고...




난 어느새 이 아이가 두려움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여겼다.




그렇게 하루하루, 거리감을 늘려갔다.


매일 매일 연락을 않하는 시간보다 하는 시간이 많았던 우리는


하루에 한두번...이틀에 한번.... 그렇게 멀어졌다.




마침 내가 수능이라는 핑계가 있었기에 더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그 아이때문에 시작한 공부를 놓지 못하고.


그 아이때문에 읽기 시작한 책도 놓지 못하고.


그 아이 때문에 부르던 노래도 버리지 못하고.




난 내신 9등급, 수능 평균 3등급으로 어떻게 대학을 들어가게 되었다.


원래 내 성적으로는 꿈도 못꿀 학교.




수능이 끝나고, 성적이 나오고.




그 아이에게 연락했다.




잘 지냈느냐고.




내 목소리를 듣고 그 아이는 또 울었다.




미안하다고.




그렇게 내 첫경험도, 내 첫사랑도 아니면서... 평생을 가슴에 담고 갈 연애가 끝이 났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얼마전 녀석의 오래비와 술을 먹는데, 진지하게 결혼 생각하는 남자와 교제 중이라고 한다.


30살의 공무원.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마 내년 결혼하고자 날짜를 잡고 있다고 한다.


늦어도 늦가을에는 약혼식을 치룰 거라고...




그리고 친구가 내게 전해준 말은, 지금 그 남자 만나기 전에 단 한번도 다른 사람 만난 적 없다고.


아직도 그 아이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내가 녹음한 노래 파일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그 남자가, 내 친구와 술을 마시며 나보고 참 고맙고 부러운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생각하면 저릿한데, 그 아이에게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날은 진탕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가 잠도 못이뤘었다.




짧게 끊어내려고 기억하는 나도 괴로워 많은 이야기를 쓰지는 못했다.




벚꽃 구경가서 내 볼에 입맞추던 순간도.


새벽 눈 내리던 날, 눈을 밟으며 환하게 웃던 너의 얼굴도


내게 수줍게 웃으며 건낸 그 반지도


내앞에서 처음으로 울던 그때도...




아직 너무나 생생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제대로 연애를 못하고 있다.




지금은 차츰 아름다운 추억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목적이 없는 그저 이유만 있던 사랑이 내게 큰 가르침을 준 것 같다.


아마 나중에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난 그 순간의 모든 것을 바탕 삼아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너희도 아름다운 연애 했으면 한다.




너무 길었지 이만 줄인다.


오늘은 아마 잠자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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