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적 배경
노론(서인) 장기집권의 역사
: 선조 때 분파되어 처음 등장(서인) ---> 이순신과 갈등, 이순신을 모함하여 입옥시킴 ---> 선조 사망 ---> 광해군 즉위 ---> 광해군의 실리외교, 대동법, 왕권강화 목적으로 외척, 서인당 사사하거나 탄압 ---> 인조반정, 광해군 폐위(서인당 다시 정권 잡음) --->그 뒤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장기집권 ---> 숙종 즉위 ---> 숙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은 장희빈의 배후세력으로 남인 등장, 숙종의 환국으로 서인 몰아냄 ---> 숙종의 변심, 인현왕후 복위 ---> 남인정권 몰락, 서인 재집권, 최숙빈 등장 ---> 장희빈 사사문제로 반드시 죽여야 된다는 급진파(노론), 세자의 모후이니 살려야 한다는 온건파(소론) 갈림 ---> 장희빈 사사 ---> 동평군 사사 ---> 숙종 사망 ---> 경종즉위, 희빈장씨 칭호문제와 예우 문제로 노론과 대립 심화 ---> 경종의 환국으로 노론 다시 몰아냄 ---> 경종의 급작스런 죽음 ---> 이복동생 연잉군 영조 즉위, 노론 재집권 ---> 이인좌의 난 진압하면서 남인, 소론 대거 사사, 유배 --->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 어씨와 영조 대립 ---> 선의왕후 사망 ---> 소론의 지지를 얻던 사도세자 모함하여 결국 사사시킴, 소론 완전 몰락 ---> 영조 사망,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즉위 ---> 정조의 탕평책,남인(정약용 등) 재등용 등으로 노론과 갈등 심화, 수차례 암살 위협에 시달림 ---> 정조 즉위기간 동안 노론 세력 약화 ---> 정조 사망 후 다시 재집권 --->이후 안동 김씨 세도정치 등과 자생적 협력 하에 고종 대까지 장기집권 ---> 흥선대원군의 탄압 ---> 고종 대에 급진 개혁파, 온건파로 나뉨 ---> 급진개혁파(이완용, 이승만,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서재필 등등) 중 일부 세력 친일파 화하며 을사조약, 한일합방 주도(노론 총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2.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사사된 장희빈이 남긴 비극의 씨앗, 경종과 선의왕후, 사도세자까지 이어지다
남인 몰락 후 지지기반이 약해진 장희빈은 노론 세력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게 됩니다
결국 장희빈 사사 왕명이 떨어집니다
그녀의 아들 경종은 노론대신들의 옷자락을 부여 잡고 제발 어미를 살려달라고 간곡하지만 결국 장희빈은 사사되고 맙니다
어머니의 죽음 뒤 우울증과 병환을 얻은 경종은 세자 폐서를 주장하는 노론의 거센 공격에 견디며 끝끝내 숙종말기 수렴첨정을 한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왕에 오른 경종이 제일 심혈을 기울인 건 바로 그의 어머니 장희빈을 다시 왕후로 추대하여 칭호를 높이는 것. 이와 문제로 노론과 대립하게 됩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모함한 노론에 분개한 경종은 김일경 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노론 4대신을 유배보내고 노론을 몰아냅니다
하지만 경종이 하룻밤 사이 갑자기 죽으면서 그가 왕세제로 책봉시킨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이 왕위에 오르고 노론은 재집권합니다
3. 경종의 죽음은 영조와 노론의 독살인가-- KBS역사스페셜 2003년 3월 22일 방송
경종이 평소 우울증과 병환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복동생인 연잉군에게 수렴첨정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정도의 위중한 병환이 아니였음에도 1724년의 그날 밤은 너무도 이상했습니다.
영조(연잉군)는 왜 병석에 있는 형에게 게장과 생감, 인삼과 부자를 잇따라 먹게 했을까요... 이는 한의학에서 같이 먹으면 독이 되는 음식들로 당시 어의도 이를 두고 영조와 대립했으나 끝내 영조는 그의 형에게 인삼차를 먹이고 맙니다... 그리고 그날 밤 갑자기 죽은 경종... 경종은 지병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갑자기 승하한 것에 대한 의문이 확산되었습니다... 도성마다 괘서가 붙고 이는 훗날 반란(이인좌의 난)의 전초가 됩니다.
또한 훗날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경종은 무슨 죄입니까?”라고 따져 물었다가 뒤주에 갇혀 죽고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4.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여태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운의 여인 선의왕후 어씨
장희빈만큼이나 당쟁 역사의 피말리는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한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경종의 두번째 아내 선의왕후입니다. 그녀는 17세의 나이로 왕비가 된 여인임에도 총명하고 그녀의 남편의 경종을 잘 따르고 인덕했다고 전해집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집안은 어유구를 중심으로 일가가 모두 노론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 자신은 남편인 경종을 따라 소론에 호의적이였고 소론,남인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인 경종을 보필하게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때문에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과의 갈등이 심했다고 합니다
병약한 경종과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그녀 스스로 세종의 혈통 소현세자의 직통 후손인 밀풍군 탄을 입양하여 양자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훗날 세자로 봉해 경종의 후계를 잇게하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경종이 급작스레 죽으면서 물거품이 되고 그녀와 갈등을 밎던 영조가 왕에 즉위합니다. 그녀는 겨우 21살의 나이로 왕대비가 됩니다
부군의 의심스런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있다고 생각한 그녀는 영조와의 갈등이 더더욱 극심해집니다
결국 그녀는 경종의 복수를 갚고 후계를 새로 하기 위한 마지막 반격을 준비합니다
결국 그녀는 경종의 의심스런 죽음에 백성들의 소문이 흉흉해진 틈을 타 이인좌 등에게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 잡으라"는 비밀 문교를 내려 예전에 양자로 입적시키려던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반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인좌의 난으로 파죽지세로 한양도성까지 진격하는 듯 했으나 결국 진압되고 이에 결탁한 소론, 남인 세력은 그야말로 씨가 말리도록 몰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밀풍군 또한 사사되고 맙니다
선의왕후의 두번째 계획마저 실패하고 그녀 스스로 경종의 죽음에 대한 한이 맺히고 영조와의 갈등은 극에 치닫습니다.
5.선의왕후는 효장세자 죽음의 배후자인가
영조와의 갈등이 극에 달아던 그 시기, 당쟁 또한 격화되던 그 시기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가 갑자기 죽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궁녀의 추국 끝에 결국은 병사한 것이라 결론냈지만 대신들은 선의왕후 쪽 궁녀의 일이라며 주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현재 선의왕후 그녀가 직접 죽였다는 설 또한 있습니다
6.선의왕후 죽음의 다양한 설
선의왕후 죽음에 대한 기록은 그녀가 왕후였음에도 실록에 아주 간단한게 표기만 되어있고 그녀가 죽을 때 목놓아 울었다는 기록만이 있습니다. 그녀가 우는 이유를 영조가 묻자 어의는 그녀가 미쳤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왕대비였던 그녀가 죽었음에도 영조는 후궁과의 혼인 잔치를 여는 등 관심 밖의 일이라 여겨 백성들과, 심지어 노론 대신들의 원성을 샀다고 합니다
선의왕후 죽음에 대한 실록상 기록은 이와 같으며 현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여러가지 야사들에 의해 전해오는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1) 가장 유력한 설: 1730년 4월 15일에 발생한 영조 암살 시도 사건의 배후로 선의왕후가 지목되고 이에 분개한 영조는 그녀를 어조당(희빈장씨가 사사된 취선당 맞은편)에 유폐시키고 경비를 세워 밖에 못나오게 하였다. 이에 격분한 선의왕후는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 아사하였다
2) 병환설: 그녀가 병환이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 병환이 무엇인지는 끝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3) 자결: 유폐된 선의왕후가 단검 또는 스스로 목을 매 자결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4) 사약: 영조는 끝까지 대립하던 선의왕후에 어조당에서 사약을 내렸고 이를 마시고 사사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녀가 어찌 죽었건 간에 25살의 나이로 죽을때까지 격정의 당쟁 역사 시기에 그녀 집안 당색을 거부한 채 그녀의 부군이였던 경종을 따라 소론으로 당색을 바꾸었고 경종의 의심스런 죽음을 되갚고자 끝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여인임에는 분명합니다. 장희빈이 남긴 비극의 씨앗은 경종, 선의왕후에서 멈추지 않고 결국 사도세자라는 또다른 희생자를 낳으며 노론의 강력한 권력장악의 필수적인 순서 중 하나가 됩니다. 이후 노론은 정조 시절을 제외하고 그야말로 1당 독재의 탄탄대로를 걷게 됩니다
7.역사 재평가
드라마 이산의 사도세자
2000년대 들어오면서 친일역사사학의 일환으로 간주되어 노론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이에 노론의 희생양이였던 광해군, 장희빈 등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조에 대해서도 세종대왕만큼이나 대왕 칭호가 어울릴만한 왕이라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쟁의 희생양인 선의왕후까지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