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에 올라온 이완용 관련 글에서 거시적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 하던 사람입니다
예전 부터 이런 글 한번 올려보고 싶었는데, 지난번 군가산점 반대글과 마찬가지로
논란 각오하고 글 올려 봅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중심으로 서술해봅니다.
내용은 조금 깁니다 그래도 제 머릿속에서 여태껏 제가 문헌들 찾아보고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결과를 다 적은것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친일이냐 반일이냐에 영웅과 간신으로 나누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물론 그게 아예 틀려 먹었다는건 아닙니다..
적어도 조선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이후 해방전까진 친일 인사들은 진짜 매국노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즉, 강화도조약 이후 191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 대부분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에
매우 감화가 되어있었던 상태였습니다
특히나 급진적 개화파들 눈에는 일본이 대단해 보였는데
서구열강과 맞서서 외교적, 군사적 지위를 누리는것도 모자라
동양의 절대강자로 생각했던 청나라를 청일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었죠
급진개화파는 당시 친청 민씨척족정권이 내세우던 단순한 국왕권 강화와 유지에 머무르는 보수적 개화는
당시의 세계화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거기에서 출발해서 갑신정변에까지 이르게 되지만요
갑신정변의 주도 인물중 하나였던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같은 사람들은
일본이 시행하는 국왕중심이 아닌 내각제를 필두로한 개화정책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실제로 일본에 수신사로 오고가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직접만나 문명개화론을 직접 듣고 그러기도 했죠
여기서 잠시 정리
구한말 조선 지식인은 크게 세가지 파로 나뉩니다..
1. 온건적개화파(친청, 친러)
2. 급진적개화파(친일)
3. 위정척사파(보수사대부)
이 세 세력이 지지고 볶고 싸운건 뭐 제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가장 중요한건 이들에게도 공통점은 한가지 있었습니다
즉 국왕인 고종은 곧 조선이고, 국왕을 부정하고 비판하는것은
곧 조선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실제로 친일이고 친청이고 친러고, 보수유생이고 뭐고 간에 끝까지 고종은 지켰었죠
임오군란, 갑신정변, 아관파천이라든가 할때도 말입니다
심지어 개화와 관련해서 당시 사대부치곤 고종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최익현 선생조차도 을사의병 당시에 국왕의 진위대와 싸울수는 없다 하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자진해서 포박됩니다
외교권이 넘어가고 통감부가 설치되서 본격적인 국정 간섭이 시작되는
즉, 지금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관점에서는 나라가 망했는데도 말이죠-_-;
이걸 봐도 을사늑약의 내용이 뭐 어떻고 자시고 간에
고종만 살아있고 종묘사직만 지켜나갈수 있으면 된다
이게 당시의 보수사대부에서 급진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이르기까지의 공통점이었습니다
심지어 동학농민운동 당시에도 농민운동군이 내세운 이유가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우리 임금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조선의 역사가 600년이 되도록 하나의 가계로 왕권이 유지될수 있었던건
이런 국왕중심의 사대의식이
양반사대부들 뿐만 아니라 평민, 노비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겁니다
어찌됐든 역사는 이렇게 우리가 35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식으로 흘러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건 일본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을 찾아내서 단죄시켜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우리가 이렇게 남의 나라에 의해서 지배를 당했느냐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될수가 없다는것도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역사해석에서 거시적 관점에 대해
조금 논란이 되는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일제식민통치하 독립운동기 일본의 정치거물 암살미수사건은 꽤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처럼 성공한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생의 전체 흔적을 잘 모르고
그의 생의 마지막 3년 즉,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항일 무장투쟁운동에 참가하여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일본에 의해
사형당하기까지의 역사만 알고 있습니다
안의사에 대한 나머지 행적에 대해서 조금 말씀 드려봅니다
안의사는 황해도 출신의 봉건적 양반 가문의 유생의 손자로 태어납니다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은 안의사의 할아버지와는 달리 급진적개화파 청년그룹의 일원이었죠
박영효가 수신사로 왔다 갔다 하면서 약 70명의 젊은 개화지식인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킬때도 선발됐죠...근데 일본유학은 갑신정변 으로 좌절이 됐고요
어쨋든 그 이후로 안의사는 아버지 안태훈과 황해도 본가에서 은둔하는데
10년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는
지역 유지였던 안태훈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버지인 안태훈이 포수를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때 16세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해서 박석골 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농민군을 진압한 관군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까지의 안중근은 민중을 수탈하는 봉건지배계급의 일원이었을 뿐이었던 겁니다(동학사상사료집 466)
3년 후에 아버지 안태훈이 정부문서 기록에 다시 등장합니다
동학농민군이 부패한 양반집을 털어서 민중들에게 나눠줄 쌀 500석을 안태훈이
정부 재가 없이 마음대로 군량미로 썼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런데 이때 안태훈이 천주교회를 찾아가서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는데
이때 부터 안씨 집안이 열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출발점이었습니다
어쨋든 이런 아버지를 따라 안중근은 1906년 대동강 하류 진남포로 옮겨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삼흥학교과 돈의학교를 열어 교육자가 되는데 당시 진남포는 서울 용산과 더불어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첫 상륙한 주둔지였습니다(한일 의정서에 명시된곳 중 한곳)
이 전쟁은 비록 러시아와 일본의 싸움이었지만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민중들이 겪게 되었죠
이런 진남포라는 왜(倭)색 짙은 곳에서 안중근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론의 열렬한 지지자 겸 지방청년들에게 문명개화론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됩니다
이때 당시의 안중근은 그저 일본과 천주교(외세)를 믿는 그저 그런 봉건 양반이었을 뿐이었죠..
하지만 상황은 1907년을 기점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것처럼 정미7조약으로 고종퇴위와 맞물려서 군대해산이 되자
의병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일본에 맞서 싸우게 되어 마침내는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했죠
여기서도 보시는것처럼 알수있지만 안중근도 그 당시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고종이라는 존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반일제 무장투쟁기에 안의사는 10년전 개화파 친일 세력이었던 아버지와 자신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수탈에 못이겨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때려잡는 관군 안중근이
어떻게 민중과 화해했는지는 우리 역사책은 가르쳐 주지 않죠..
게다가 안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면서 꿨던 이상이
억조창생의 조선왕조 복원이었는지, 조선 민중 전체의 해방이었는지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안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쏴 죽였으니 민족의 영웅이라고 서술할 뿐입니다
안의사에 대한 행적중에 몇몇 부분에서 그의 친일적이고 봉건적인 사상이 드러나는데
그의 저서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죄로 재판을 받을때 동학농민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냅니다
실제로 재판에서는 동학농민운동군은 나라를 망하게 한 좀도둑들이라고 이야기 까지 하고요..
아래는 안의사의 저서에서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그의 인식입니다
"그 무렵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郡縣)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 ……
그때 나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단결하고 격문을 뿌려 의거를 일으켰다.
포수들을 불러 모으고 처자들까지 대열에 편입시켜 정예병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
청계 산중에 진을 치고 동학당에 항거했다. ……
그때 나는 동지 6명과 함께 자원하고 나서서, 선봉 겸 정탐독립대가 되어 전진 수색하면서
적병의 대장이 있는 곳에 아주 가까이 다다랐다."
<안응칠의 역사 - 응칠, 안중근의 자>
또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로 재판받을 당시 안의사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첫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번째 고종황제폐하를 강제퇴위 시킨 죄
세번째 7조약(정미7조약)을 통해 군대를 해산시킨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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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현 천황폐하(메이지 일왕)의 아버지(고메이 일왕)를 시해한 죄
위의 세가지에서는 그의 봉건적 유생으로서의 인식을 알 수 있지만...
마지막 문구는...자뭇 친일적 의식이 드러나죠...
꼭 일왕과 그의 아버지는 조선과 친하게 지내려 했는데
이토히로부미가 꼬드겨서 일이 이지경이 되었고 나는 그를 쏠 수 밖에 없었다 이런식으로요
그리고 결정적인것은 안의사가 인종주의자 였고 친일적 관점을 가진 증거는
여러군데서 발견이 됩니다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발췌하자면....
안중근 역시 인종주의자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
황인종이 백인종을 누른 쾌거'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안중근이 반일로 돌아선 이유는 바로 이등후작의 배신 행위 때문이다."....라고
박노자는 그의 책에 기록하면서 이상하게 변질된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이런 관점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친일파로 규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장지연은
"백인(서구열강)에 맞서 싸우려면 황인(동아시아 전체)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된다"
라고 이야기 한것과 사실상 일맥상통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지연을 친일인사로 분류한건
결정적으로 일제로 부터 억압받던 민중해방이 아니라 왕조복위를 우선 했다는점이 가장 큽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것 외에는 장지연과 일맥상통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안의사도 엄격한 관점에서 보면 친일파로 규정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안의사 본인 혼자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흘러오고 있고
그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전혀 읽지를 못했다는 점은 그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공통적 특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