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공에서 가끔 역사 이야기도 했는데(지난번엔 안중근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지만요)
저도 고교 시절까지만해도 국정교과서로 국사를 배우면서
찬란한 역사에 대해서 많은걸 배웠습니다
물론 조선역사에서 배울점도 많습니다
비교적 단일성 단일계의 왕조중심 국가로 발전하면서 좋은점들도 있었죠
일련의 과학기술의 발전도 그렇고 유교적 철학과 문화의 발전도 그렇고요
그런데...그것을 넘어서 환상을 가지신 분들이 너무 많다는걸 오늘 또 깨달았는데
오늘은 세종에 대한 이야길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조선왕조 실록을 찬찬히 훓어보시면...저도 물론 그 많은 양을 읽어 보진 못했고
큰 부분만 좀 읽었었죠...요즘엔 박시백의 만화조선왕조실록 까지 완간되면서
더 접하기도 쉬워졌고요
어쨋든
세종조를 아주 유교적 이상국가화 된 태평성대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요
실제로는 관학파 사대부 즉, 훈구파 사대부(태조 이성계를 따랐던 역성파 사대부)에게는
그런 세상이었겠죠...근데 백성들의 삶은 우리가 태평성대라 믿던 세종조때나
미쳐돌아가는 연산군 시절이나 남의 나라에 의해 침략당했던 선조, 인조 시절에도 그렇고
피폐한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세종조때 특히 일반 백성들한테 피해가 극힘히 간 몇가지 큰 사건을 언급해드릴게요
첫번째는 사대정책입니다
조선초기 친원파와 온건파 사대부를 숙청하면서 등장한 태조 시절에는
종계변무(이성계가 실제로는 이인임의 아들이다라는 명나라 측의 기록) 문제와
철령이북 지역에 대한 문제 때문에 명나라와의 사이가 굉장히 껄끄러웠습니다
근데 태종조 때부터 이런 기조가 많이 바뀝니다
어쨋든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형제들을 죽이거나 혹은 축출해내서 왕이 된 사람이기 때문에
명나라에서 내려주는 고명과 인신을 받으면 자신의 정통성이 확립될거라고 생각해서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에 다소 시큰둥한 제스처를 취한것과 달리
스스로 조선과 자신을 제후국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명나라를 극진히 모시게 됩니다
정부인이었던 원경왕후 민씨 외에 후궁들을 거느릴때
제후들은 첩을 얼마나 둘수 있는지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내용까지 나옵니다
어쨋든 이런건 백성들에게 큰 무리가 가는 내용이 아니니 그렇다 치는데
문제는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빈도수가 태조 시절에 비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명태조 주원장이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말년에 조선을 좀 길들여야겠다 싶었는지
무리한 조공을 많이 요구하게 됩니다...(이때는 태종의 세제 시절)
기록에 따르면 금, 은, 인삼, 모시, 종이, 말도 모자라 해동청을 잡는답시고
농번기 백성들을 동원까지 합니다...
이런 기록이 태종시절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태종은 상왕시절 항시 세종에게 중요한 몇가지를 언급하는데
그중 하나가 명나라를 극진히 사대할 것이라는 거였습니다
명태조 홍무제가 죽고 건문제가 즉위하고 나서 이런 양상이 조금 줄어들긴 했는데
영락제가 쿠데타로 황제에 오르면서 또 상황이 바뀌게 되죠
영락제도 말년에 좀 나아져서 그렇지 조선에 미친듯이 조공을 요구합니다
그 조공내용에는 심지어 환관과 공녀까지 포함되어있었어요
그게 다 어디서 나오는겁니까...양반들 사재 털어서 가져다 줬을까요??
죄다 백성들 고혈을 쥐어짠 결과에서 나온거였습니다....
우리가 원나라 시절...청나라 시대때 원과 청의 무리한 공물요구로
얼마나 백성들이 핍박받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근데 국사책에서는 명나라에 공물 바친건 기껏해야 합리적 사대정책의 결과 였다고
자기 위안하고 있습니다
그 공물 사절단이 일년에 대체 몇번 가신줄 아십니까??
공식적으로(제가 알고 있는것만 언급 드리겠음)
6차례인가 7차례 였을겁니다...
중국 설날인 춘절, 황제 탄신일, 황태자 탄신일, 황후 탄신일, 추절(추석), 동짓날...하정사를 비롯해서
비정기적인 횟수까지 포함하면 일년에 수십차례 공물을 싣고 명나라로 왔다 갔다 합니다..
명나라가 요구한것도 사실이지만 조선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진상을 하죠..
그저 세종이 하는 말이라고는
어쨋든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섬기는데는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길 마련이다
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한다...이말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세종조의 실책을 들어보자면
북방 사민정책이었습니다
태종조 부터 시작해서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북방을 개척해서
4군과 6진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춥고 얼어붙은 동토를
지키려면 주민들이 살아야 하는데 날은 항상춥고 농사도 안되는 지역에
어느누구도 가지 않으려했던겁니다...
그러다 보니 세종조때 사민정책을 실시하는데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 지방의 백성들을 함경도 일대로 강제 이주를 시키게 되는게
이게 정말 말이 변방의 안정을 위해서 백성들을 이주시킨다는거였지
가기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잡아서 보내게 됩니다
세종조 기록에 따르면
하삼도민에 대한 초정입거는 많은 소요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정부는 부득이한 사정을 내세워 사민에 대한 특전과 안집대책을 제시했으나,
유교사회에서 선대의 유업과 조상의 분묘를 버리고 친척들을 떠나 강제로 이주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너무나 가혹한 일로 간주되었었죠...
이에 입거를 피하기 위해 신체를 자해하거나 일가족 전체가 자살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사민 대상자들은 선발 후에나 입거지에 가는 도중에,
입거지에 도착한 연후에 끊임없이 도망하였다는 기록까지 나옵니다
이렇듯 4군6진과 사민정책이 정권의 강화와 대의명분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수도 있지만
일반 백성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통이었던 정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화폐개혁에 관한 내용입니다
태종 이방원때 저화라는 것을 만들어서 시중에 유통하게끔 하는데
물물교환 중심의 농본사회였던 조선에서 백성들은 화폐라는것을 불신했죠
그런데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화폐 사회로 이끌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강제로 화폐를 사용하길 강요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삐걱대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이 물물교환 하는게 걸리면 곤장에 가산몰수에 벌금형까지
때리는 통에 그 벌금을 내기 위해 빚을 내는데 그 빚을 못갚는 경우도 생기고
가산몰수에 따른 궁핍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백성들까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세종은 끝까지 화폐 사회로 가는것을 끝까지 고집하는데
결국에는 실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공업이 천시되고 발전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굳이 화폐가
필요없었기 때문이죠...즉 주변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던 엄청난 실책이었던 겁니다
16세기 들어서 대동법이 제정되면서 공인과 사상이 등장하고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면서 백성들 스스로 화폐 사회로 진입하게 된 역사를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종조의 가장 큰 실책으로 뽑히는것이 부민고소금지법입니다
세종 2년 예조판서 허조의 건의로 유교적 신분사회의 확립을 위한다는 이유로
백성이나 아전들이 고을의 수령이나 관찰사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드는데
이것도 정말 골때리는 법이었죠...단지 신분사회 확립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령의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지 못하게 되니...이런 기조가 조선 말까지 이어집니다...
몇몇 생각있는 집현전 학사들을 비롯한 원로 대신들도 이 법이 굉장히 부당하다고 건의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세종은 끝까지 이 법을 고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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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까지가 여러분의 지극한 환상을 깨줄만한 왕조사회에 대한 팩트입니다...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내용이니 찾아보시면 바로 바로 나옵니다
물론 조선시대 세종은 개.객.끼야 라고 하는건 아닙니다
한글창제, 과학기술의 중흥 등 많은 것을 이뤄낸 훌륭한 군주죠...
근데 그건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조선"왕조"시대의 사대부의 입장에서 훌륭한 군주로 평가 받을수 있다는거지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굶주림과 역병, 심지어 떠돌이 생활을 감수해야했던것이
조선민중들의 삶이었습니다..
아까 어느분 글에서 댓글에 세종조에 대한 환상을 갖지 말라고 했더니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세금을 걷었던 실세결수나 나라 곳간에 고려말에 비해
몇배는 더 많이 곡식이 쌓였는데 왜 백성들 삶이 고단해라고 항변하시는 분이 있으셨는데
그거 전부 양반 사대부들한테나 돌아간거지 백성들에게 돌아간건 쥐뿔도 없습니다
제발 왕조사회에 대한 환상과 교과서에서 이야기 해주는 사실만 진실로 받아들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