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은 역할 대행 서비스의 천국
'가족 역할 대행' 서비스는 가족해체 과정의 자연스러운 현상
파트너 없으면 이상하게 보는 사회가 남편·아내·애인 대행 서비스 만들어
전문가 "때 되면 사라질 서비스… 개인욕구 충족하는 성매매와 구분을"
"남편을 빌려 준다고 해서 문의합니다. 혼자라서 누구를 부른다는 게 내키지 않습니다.
믿을 수 있나요?"
대한민국은 대행 서비스의 천국이다. 돈만 있으면 이사, 청소, 간병 등 익히 알려진 서비스는
물론 잔심부름까지 대행하는 업체를 찾을 수 있다.
일반인만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건 아니다.
대기업도 역할 대행자를 이용한다.
노조 집회를 원천적으로 막으려고 유령집회를 열어 주는 이들을 고용하는 경우다.
몇 년 전부터는 신종 대행업체가 우후죽순으로 문을 열더니 급기야 '애인 대행'이라는 서비스까지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알고 보니 신종 성매매였다.
지난 8월에는 주부가 애인대행 사이트를 통해 만난 남성들과 성관계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다 적발돼 처벌받기도 했다.
이렇듯 온갖 대행 서비스가 넘쳐나는 한국에서도 아직 생소한 게 있다.
돈 주고 남편을 빌리는 '남편 렌털' 서비스다. 흔히 '시급 남편' '남편 대행' 서비스로도 불린다.
'남편 역할' 서비스 유행
다섯 살배기 딸을 둔 이혼녀 김영선(가명ㆍ34)씨. 김씨는 최근 남편 대행 서비스를 이용한
동료 여직원 A씨의 경험담을 주의깊게 들었다.
A씨의 취미는 집 꾸미기. A씨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구 배치 등을 바꾸는 등 인테리어를 손수 해왔는데,
올 가을엔 힘이 부쳐 남편 대행 서비스를 이용했다.
A씨는 김씨에게 "출장비를 포함해 두 시간 서비스 이용료로 12만원이 들었다"며 "남편 대행 서비스를 이용해
냉장고나 장롱 등 무거운 집안 물건을 손쉽게 옮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A씨는 김씨에게 "남자 가사 도우미를 고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정감이 있다"며 힘 쓰는 일이 있을 땐
이용하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A씨의 말에 김씨는 눈이 번쩍 뜨였다.
2년 전 이혼한 김씨는 최근 딸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았다.
제법 큰 딸이 틈만 나면 왜 아빠가 없는지 물었기 때문이다.
딸이 생일 소원으로 "진짜 아빠가 아니라도 좋으니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ㆍ아빠와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고 말하자
김씨는 시급남편을 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김씨는 동료로부터 소개받은 남편 역할 대행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김씨는 "두세 시간 정도 남편 노릇을 해 줄 남자를 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며 "남자의 나이는 물론이고
학력, 신체 특징까지 맞춰주더라"고 말했다.
김씨에 따르면 시급남편 이용 요금은 일당 12만원.
학력과 외모 등에 따라 이용 요금이 달라진다.
김씨는 일당 15만원짜리 '시급 남편'을 구했다.
다시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김씨는 "아빠가 없다는 게 아이에겐 큰 고통인 것 같았다.
아이가 좀 더 크면 달라질 수 있지만 다섯 살짜리 아이가 의기소침해 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며
"대행 서비스를 이용해서라도 괴로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급 남편'이 마음에 들면 다음달에 열리는 동창모임에도 데려갈 계획이라고 했다.
김씨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남편 대행 서비스는 혼자 사는 여성들 사이에선 더 이상 생소하지 않다.
그런데 많은 대행 서비스 중 유독 남편 대행 서비스는 '불순한'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뭔가 음란한 서비스가 아니겠냐는 인식 때문이다.
김씨는 "남편이나 아내 역할을 대행하는 서비스가 성매매 등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건전한 역할 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까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이나 애인 없는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 시선은 차갑다"며 "남편 대행 서비스를
가족 해체(부재)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가족 해체에 따른 사회 현상
김씨 말마따나 한국 사회에서 가족 해체(부재) 현상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통계개발원이 11월18일 발표한 '생애주기별 주요 특성 및 변화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가구주 연령대별
최대 가구 규모는 1990년 4.4명에서 2000년 3.7명, 2010년 3.4명으로 점차 감소했다.
결혼을 미루는 여성도 크게 늘었다. 1956~1960년생(53~57세)
여성은 30~34세 무렵의 미혼율이 5.3%에 그쳤지만, 1976~1980년(33~37세) 여성은 29.1%가 미혼이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조이혼율(인구 1,000명당 이혼 건수)은 2.3건인 데 반해
조혼인율(인구 1,000명 당 혼인 건수)은 수년째 하락하고 있다.
대법원이 공개한 '2013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이혼 건수와 결혼 건수는
각각 11만 4,781건, 32만 9,220만 건이었다. 이혼 건수는 2011년보다 0.7% 늘었고,
결혼 건수는 0.7% 감소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현재 미혼율이 계속 이어질 경우
20세 남성 4명 중 1명( 23.8%)과 여성 5명 중 1명(18.9%)은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은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가족 규범이 변화해 왔지만 한국은
그 진행 속도가 유독 빠르다"며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가족 규범에 저항하는
대응력이 빠르게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전통적인 가족 규범의 잔재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가족 해체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 교수는 "가족 해체 현상과 전통적인 가족 규범이 충돌하면 공백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 갭을 메우는 서비스로 가족 역할 대행 서비스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며 "전통적인 가족 규범이
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런 서비스는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남편 대행 서비스를 가족 해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미혼모나 이혼녀, 나이 든 독신여성이 살기 쉬운 곳이 아니다.
가정과 사회에서는 이들 여성의 곁엔 당연히 남편이나 유사 남편(애인)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런데도 외부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편 대행업체를 찾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다 못해 냉혹하기까지 하다.
전 교수는 가족 역할 대행 서비스 이용자들을 무조건 비판하는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남편 대행 같은 가족 역할 대행 서비스를 활용하거나 만들어낸 사람을 비난하는 시각엔 반대한다"며
"개인욕구를 충족하려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과 외부의 차별적인 시선에 대한
우려 때문에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