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의 조선군 표준장비
조선전기의 화약무기는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에 대해 신무기이자 위력이 컸던 대표적인 병기였다. 조선시대의 화약무기는 한편에서는 실전을 대비하기 위한 주요 병기로 개발에 적극적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주변 민족에 대한 금비책으로 인해서 화약무기 발달에 크게 저해되는 요인으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조선군은 고려시대 몽고의 간섭으로 군사력 증강을 억제당해왔고
이 와중에 몽고를 통해 알게된 화약병기는 고려후기와 조선시대를 이르러 화포덕후의 기질을 발휘하게했다.
이 화포에 대한 애착은 훗날 대한민국 정부 국방부(라부르지만 포방부라 불리는)가 정신을 계승한다.
비격진천뢰는 조선시대 화포덕후기질의 정점에 오른 무기중에 하나라 볼수 있다.
대포에 넣어 발사하면 멀리날아가 땅에 처막혀 안에 넣은 철조각를 터뜨리며 사방의 적을 찢어버린다.
생긴건 그냥 평범한 대포알이라 이걸 모르는 일본군들이 개무시하다가 시간차 폭발로 인해
끔살당한 임진왜란의 기록이 있다.
성능이 우수한 궁시류를 제조하는 데는 재료의 습득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화기의 제조에 비해서는 그 수준이 낮았다. 궁시는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상당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일단 기술을 익히면 사격속도와 사거리를 증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특히 궁시는 훈련 여하에 따라서 적에게 단시간 내에 연속적인 집중사격이 가능하며, 그 중량이 비교적 가벼워서 개인행동에 유리하고 매복작전시에는 기습의 효과를 증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궁시는 여름과 장마철에는 그 탄력이 약해져서 성능이 저하되는 결점이 있었다. 또한 갑주를 착용할 경우에는 살상효과가 현저히 떨어지는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환도식 배형도는 중국에서도 당나라 이후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실 한중일 검중 무엇이 가장 강하냐를 논하는 것은 힘들다. 왜냐하면 각 국가마다 검의 특징을 구별할 만한 뚜렷한 특징
을 찾는 것도 힘들고 중국, 조선 , 일본은 각각 자신들의 검을 수입/수출하며 군대를 무장시켰기 때문이다.
조선도의 특징이라하면 일본도처럼 고유의 형식을 중시해서 만든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실용적인 병기로서 만든 나라라 할 수 있다.
급했던 경우에는 그냥 빼앗은 일본군의 일본도를 손질해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는 마당.
칼날 단면의 형태도 다양하기는 하지만 일본처럼 특정한 형식을 정해 따로 구별하지는 않았다, 개화 부근의 기록을 따르면 아예 서양함선에서 노획한 세이버도 환도로 묶어서 기록해 놓고, 그에 영향을 받은 서양식 외장의 스타일을 참고한 변종환도도 나오니. 충공깽
조선군의 환도에는 특이한 잠금장치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비녀장이라 불리는 칼집에 뚫린 구멍에 잠금장치를 넣는 식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 전기 이후 버튼식 잠금장치를 썼다니 꽤나 놀랍다.
애기살은 높은 관통력을 자랑하는 조선시대의 비밀병기였다.
하지만 다른 문명에서도 많이 쓰인 무기이며 일반 화살보다 더 높은 전문성을 요구했다.
애기살은 보통의 화살보다 훨씬 짧은 것이 특징이며 이 때문에 덧살을 덧붙여 그것을 가이드레일로 삼아 발사한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은 조총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고 하는 건
사실 거짓이다.
<그림은 나선정벌 때의 조선 조총ㅂ>
애초에 조선은 조총과는 비교도 안돼는 폭음과 파괴력의 대포를 주력으로 운용하고 있었고 조총과 비슷한 무기인 승자총통을 만들어낸바 있기에 조총을 보고 놀랄 이유가 없었다. 이일이 조총을 처음 본 듯이 번쩍이는 불빛을 내는 막대기라고 부르자 신립이 조총도 모르고 어찌 장군이라 할 수 있겠느냐며 분노하는 게 나온 바 있다.
당시 조선은 조총에 장점이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 단점 역시 명확했기에 당장 양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고 군기시에 보관해 놓았다고 한다. 실제로 조총은 쓰는 법이 쉽긴 했지만 장전과 조준이 활에 비해 몇배로 느렸고 사거리나 명중률에서 낫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실록에 나온 대화를 보면 한쪽은 양산이 빠르고 쉽다는 점에 주안점을 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같은 조건이면 활이 유리한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냐는 쪽으로 흘렀다. 그러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효율적으로 조총을 운용한 일본군 전술에 그 위력을 실감하고
양산에 들어갔다.
조총보다는 조총을 잘 활용한 일본군에게 한방 크게 먹은 것이다.
임란 이후 빡친 조선군은 조총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운영하나 쌍령전투에서 또한번 병크를 일으킨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총은 조선군에게 큰 인상을 남겼고, 조선군은 몸으로 체험한 조총의 위력에 질려 전후에 조총 양산에 열을 올리게 된다. 덕분에 17세기에 들어서 보병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게 된다(숙종대 충청도 군적부를 보면 개임무기가 명시된 1,300여 명의 속오군 보병 중 76.5퍼센트가 조총수였다). 다만, 창병의 비율이 매우 낮고 총검도 없어 기병에 대응할 수단이 다소 부실하였고, 덕분에 훨씬 다수의 총병을 보유했던 조선군이 청의 기마대에 모조리 털려버리는 쌍령전투의 병크를 저질렀다. 이 약점은 18세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래도 청군은 조선군의 사격 실력을 높이 샀는지 훗날 효종 대의 나선 정벌에 조선은 조총병을 파병하기에 이르고 러시아군에 맞서 두 차례의 큰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조선 조총수가 러시아에서도 알려졌다. 그 당시의 머스킷으로는 일반적인 서양식 전술 대형을 갖추고 일정한화망을 구성하여 적을 살상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조선 조총수들은 머스킷으로 뛰어다니며 사람을 조준하여 죽였다고 한다.
당시 파병했던 조총수들은 전국에서 고르고 고른 특등 사수들로서 일정거리 이내에서 목표를 향해 3발을 쏴서 2번 이상 표적에 맞추어야 파병될 수 있었고 이것은 다른나라의 조총수와 비교해서 2배이상 높은 명중율이었다.
<출처 :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etc/327/read?articleId=18799780&bbsId=G005&itemId=145&pageIndex=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