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프 기습작전 - 실패한 상륙작전.

케이즈 작성일 14.01.31 1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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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 당일이지만 정작 나는 여유롭고 할 일 없는 와중

심심하기도 하고 읽을거리라도 써볼까 끄적이는 중임다.

 

썰을 풀 꺼리는 2차세계대전.

그중에서도 실패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비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전을 말해보고자 함니다.

이거슨 군사이야기이기 때문에

밀리터리전문가들이 좀 더 자세히 알고 계실 것이며

읽다가 '뭐야, 그거 아닌데?'라는 부분이 있으면 많은 분들을 위해서

'친절히'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

 

디에프에서 죽은 한 사람의 병사는 그로부터 2년 후, 노르망디에서 10명의 병사를 살려냈다.

-마운트 배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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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이 유럽본토로 보낸 대륙원정군은 처참한 패배를 맛보고

이를 구출하기 위해 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작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땅한 대공무기도 없어 몇대 안되는 전투기에도 철저히 능욕당하며 굴욕을 맛보고 철수하던 때,

처칠 수상은 의회에서 이런 연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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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우리는 싸움을 계속 할 것이다. 바다에서, 육지에서, 적이 있는 모든 곳이 우리의 싸움터가 될 것이다.

마지막 한 사람의 영국인이 남는 그 날까지. 그리고 우리는 다시 유럽 대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43년, 이탈리아 상륙이 이루어짐에 따라 그 선언은 실현되었지만

이탈리아는 독일본토와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고, 그마저도 지지부지한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이 잘싸워서가 아니다!!)

게다가 스탈린은 동부전선-

그러니까 소련군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서부전선을 펼쳐달라며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다.

 

디에프 기습작전이 펼쳐지기 위한 배경, 1942년 중반의 상황을 짚어보자.

아프리카 전선에서는 몽고메리가 부임하여 참패를 입고 사기가 떨어진 제8군의 전열을 가다듬기 바빴고,

동부전선에서는 독일군 '폰 파울루스'대장이 스탈린 그라드를 향해 독일 제6군을 돌입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두 전선은 예상을 뒤엎고 영국군과 소련군이 압승을 거두며 반전을 이룩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훗날의 이야기였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어디에서도 희망적인 조짐이 한가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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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희망이었던 U-보트)

 

대서양에서는 U-보트에 의해 수송선단이 대피해를 입고 있었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군이 연전연승을 거듭해 인도공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유일한 좋은 소식이라면 영국군의 폭격기들이 드디어 독일본토 폭격을 하고 시작했고

미국 폭격기들이 여기에 가세하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고사하고 현재 전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운 시기였지만

영국군은 무모하지만 야심적이고 모험적인 작전을 계획했다.

이른바 주빌리 작전이라 불린 이 계획은 프랑스 디에프 해안에 특공대를 상륙시켜서

독일군 수비대에 통격을 가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잊지말자. 돌아오는 작전이었다.

 

즉, 유럽 본토 진공계획과는 전혀 무관한 작전이며

그저 코만도 특공대에게 실전경험이나 쌓고
앞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질 상륙작전에서 발생될 문제점에 대해 체크해보는 정도의 '연습게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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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로 치면 적과 나의 상황을 체크해보기 위한 소규모 접전 정도로 생각한 작전이었다)

 

이 공격의 주력은 연영방 캐나다군 제 2사단으로

여러 전선에 파견된 영국군을 대신하여 영국 본토를 지키고 있던 사단이었다.

1939년 이후로 계속 영국군에 주둔하던 이 부대는 맹훈련을 거듭해왔기에

'영국에서 가장 잘 훈련된 예비부대'라는 평을 얻고 있었다.

거기에 코만도 특공대, 해군이 모두 참가하는 이 작전은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이지만

실제로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일단 최고지휘관이 없었다.

이 작전에 참가하는 육군과 해군 지휘관은 서로 동격이므로

자칫하면 불협화음을 일으킬 가능성이 다분했다.

게다가 공군의 선제폭격이나 해군의 함포사격도 예정에서 지워져있었는데

이유는 디에프 '기습'작전이기 때문에 이런 사전작업을 하게 되면 기습의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같은 이유로 공수부대도 작전에서 고려되지 않은 사안이었다.

 

상륙부대는 그저 몸하나만으로 적진에 뛰어들어야했다.

 

게다가 규모도 어정쩡했다.

1940년 6월경 120명의 코만도 대원이 볼로뉴해안을 기습하여 대성공을 거둔적이 있었지만

이런 작은 규모로는 전세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느새 상륙할 병력이 7000여명 가까이로 늘어났고 1개 전차연대까지 편성되었다.

그 외에도 상당수의 예비병력이 동원되기로 되어있었는데,

'병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거 아니야?'하는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짚어보자면

이 작전은 '돌아와야 하는 전투'인 것이다.

히트앤런 전법을 구사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그렇다고 본토를 향해 진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런 병력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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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저글링 한부대와 히드라 여섯마리 정도를 입구로 밀어넣는 형국이랄까?)

 

게다가 주어진 임무는

'디에프 시를 점령하고 그 근방에 있는 독일군의 비행장과 사령부를 기습하여

가능한 많은 포로와 기밀문서를 획득하여 돌아돈다는 것으로

규모나 작전의 성격 만큼이나 애매한 임무였다.

 

디에프를 하루 이틀정도 해방시킨다고 그게 전세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이며

전투병력은 멀쩡히 있는데 적 사령부를 기습하여 참모장교 몇을 죽인다 한들 그게 무슨 타격이겠는가.

차라리 이 작전의 본래 성격인 '연습게임'정도로 끝나려면 상륙하자마자 퇴각하는게 더 현실적이었다.

 

어쨌든 1942년 8월 18일 밤, 작전은 시작되었다.

 

이튿날 새벽, 선단이 상륙용 주정을 내려놓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이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하필 더럽게 운이 없게도 그 시각에 그곳을 통과하던 독일군의 화물선과

그것을 호위하던 3척의 무장 호위함에 딱 걸렸다.

다음 순간 밤바다를 밝히는 조명탄이 쏘아올려졌고 상륙정은 침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수송단을 호위하던 영국군 구축함과 독일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기습'은 그 시점에서 이미 날아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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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X되었다.)

 

제3코만도의 잔존 병력들이 5시경 가까스로 해안에 당도했지만,

독일군의 십자포화에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이들의 임무는 해안진지를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접근하는건 고사하고 살아남는 것 조차 힘겨웠다.

 

시체가 쌓이고 쌓이던 도중 다른 해안포대로 향했던 제4코만도가

'로뱃 프레이저'중령의 탁월한 지휘에 힘입어 6문의 해안포를 무력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작은 성공이 더 큰 화를 불렀는데

자신들을 공격해야할 해안포대가 침묵하는 것을 본 해군이

주력 캐나다군을 예정대로 상륙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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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여가는 시체들.)

 

해안에서 펼쳐지는 살육의 현장을 못볼수가 있었을까?

맞다. 못봤다.

독일군의 집요한 십자포화+탄막사격에 멀쩡한 무전병이나 무전기가 남아나지도 않았고,

함대는 함대대로 자신의 위치를 감추기 위해 해상에 연막탄을 터뜨려놓았기에

해안을 관측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땅히 해안진지를 파괴할거라 믿었던 신형 처칠전차는

해안에 설치된 대전차 장애물에 막히고 말았고 그런 전차에게 대전차포가 쏟아졌다.

그런 식으로 해변에 상륙하자마자 3~40%의 병력이 날아가고 있는 상황.

 

그런데 어이없게도 해안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포성을 듣고

이 기습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캐나다군 사단장이

1개연대와 코만도부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이 추가 투입된 상륙정이 연막층을 벗어나자마자 본 것은 일방적인 학살의 현장이었다.

상륙정이 타고 있던 코만도 대대 지휘관 필립스 대령이

그제서야 자신들이 호랑이 아가리에 아무 의미없이 병사들을 집어넣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속 주정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짓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돌아가! 방향을 돌려!"

해안에서 날아온 총탄이 그의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그렇게 외쳤고

연만뒤에 숨었던 함대도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하게 되었다.

작전은 완전한 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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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미 9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무려 네시간동안 의미없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축함이 서둘러 연막을 헤치고 달려나가 함포를 발사했고

부상병들을 구조하기 위한 구조정이 사이렌을 울리며 해안으로 내달렸다.

확성.기를 통해 '작전 중지, 전원 철수'를 알리자마자

절벽과 포탄 구덩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생존자들이 해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허리케인 전투기가 날아와 연막탄을 투하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날아온 독일 전투기에 의해 큰 지원은 하지 못하고 곧바로 공중전으로 돌입해야했다.

 

철수작전은 더욱 처참했다.

철수용 주정에 너무 많은 인원이 매달려 침몰하기도 했고,

그 위로 박격포가 쏟아지기도 했다.

 

그 와중 구축함 칼프는 해안을 관측하던 도중 못볼 것을 보고 말았다.

해안의 높은 벼랑위에 설치된 독일군의 전투 지휘소에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독일군의 장교들이 와인잔과 시거따위를 손에 들고

여유있게 '관전'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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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과 연합군의 상황은 딱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 와중 놀라운 소식이 날아왔다.

모두 구조를 마쳤다고 판단하고 오후 한시경 뱃머리를 돌렸을 때,

에섹.스 스코티시 연대의 극소수 병력이 이 아비규환을 뚫고

예정대로 디에프시내와 비행장까지 진출해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훈과는 별개로 그들을 구출할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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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출되지 못했다면 포로 혹은 죽음 뿐이었다.)

 

이 한번의 작전 실패로 캐나다군 제 2사단은 사실상 괴멸당했지만 독일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을 통해서 영국군은 많은것을 배우게 되었다.

 

이를테면 상륙작전에 기습따위는 개나 줘 버리고 최대한 함포사격과 항공지원을 통하여 화력지원을 하여

해안진지를 두들기는게 더 낫다던가,

제공권을 장악하는 쪽이 해안진지를 무력화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던가,

해상함대는 연막뒤에 숨어서 눈과 귀를 스스로 막아서는 안된다던가,

상륙부대와 함대사이에 지속적이고 긴밀한 연락수단이 유지되어야한다던가 하는 것들.

 

실패를 통해 배워가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영국군을 '착실한 모범생'에 비유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이 디에프 작전을 통해 영국군은 많은 것을 배웠고

성공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이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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