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Porn그라피를 P그라피로 쓰겠습니다.
그럼 P그라피 이르나 P@rn@ 라는 말에 대체 언제부터 사용하게 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용돼왔는지
그 역사를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P그라피는 늘 존재해왔던 자연물이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때 발명된 발명품입니다.
그전의 어떤 문화권에서도 존재하지 않던 개념입니다.
고대 로마와 빅토리아문화가 충돌하면서 P그라피역사가 시작되는데,
빅토리아문화는 현재도 영국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폼페이 발굴이었습니다.
18세기중반, 이탈리아 농부가 폼페이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1700년전에 베수비오 화산폭발로 묻힌 로마도시였죠.
고대 로마의 생활양식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될수록 발굴자들은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합니다.
불편한 심기는 분노를 거쳐 공포심까지 느끼게 합니다.
그들이 고전이라 믿었던 숭고한 고대세계는 사실 모든것이 외설로 오염돼 있었습니다.
도시의 모든벽과 가정집의 벽, 성곽 모든곳에 성.1교의 행위가 그려진 벽화들이 즐비했고,
여러 조각상들이 발견되게 됩니다.
(교과서에도 실리는 벽화지만, 자체 검열을 합니다.) - 관리자님 삭제하지말아주세요.
특히 최고의 발굴품중 하나가 대리석 조각상입니다.
로마의 목신 '판'이 염소와 성.1교를 하는 조각상인데,
당시 빅토리안들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글에는 첨부하지 못하지만, 노골적인 성행위와 성기를 모사한 조각품들부터 벽화까지
엄청난양의 외설적인 발굴품이 쏟아져 나오자 당시 사람들은 이것들의 처리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이를 부인했다가 그것이 불가능하자 모든것을 감췄습니다.
숭고한 고전문학의 산실로 여겼던 고대 로마의 생활양식에 큰 충격을 받은 빅토리아인들은
이른바 비밀 박물관에 보관해두기로합니다.
이러한 조각상들은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일상사였지만, 빅토리아인들에게 또한 현대인에게조차 두려운 물건입니다.
이 판의 조각상은 오늘날에도 그 원본은 공개되지 않고있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빅토리아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건 이러한 외설들이 노동계층에 미치는 영향이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인들은 학식이 적고, 지위가 낮은 인간일수록 동물적 본능이 더 크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래서 성직자, 학자들만이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도덕성으로 이겨낼수있다고 믿었고,
이러한 고위계층들만이 비밀박물관에 들어가 작품들을 감상할수있었습니다.
강력한 성적 이미지가 질서를 교란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폼페이 발굴로 인해 사람들은 방 한 가득, 벽면 가득히 사람의 성.1교장면을 담은 그림을 볼수있게 해놨다는
사실을 깨달앗습니다.
당시 유럽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전문학의 뿌리를 캤는데, 폼페이 발굴과 그 외설성은
고대세계에대한 관념뿐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고전문학에대한 생각까지도 위협했습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조각상입니다. 13세이상 출입가능한 박물관에 나온작품이니, 삭제처리 하지 말아주세요)
남녀의 성행위를 모사한 조각상 뿐만아니라, 남자의 성11기를 표현한 커다란 조각상부터
남자와 남자의 성행위를 모사한 조각상까지 현대인이보기에도 공포를 느낄만한 수많은 조각품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영국 비밀박물관과, 나폴리 근처 보르고니코 박물관의 밀실로 옮겨졌습니다.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수1간부터 적나라한 성행위의 조각상까지 당시 로마인들에겐 가벼운 기분전환 거리
정도로 이해됐습니다.
오늘날 P@rn@ 라는 개념은 로마인들에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성행위는 감추는 대상이 아니었고, 집안 어디에서나 볼수있고, 할수있고, 얘기할수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의 생활상을 감추면서 P의 개념이 탄생하게 됩니다.
대중들에게 감출려고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범위와 범주를 정해야하고, 그 정의를 내려야했습니다.
성적인 표현에대한 범위와 범주를 정하고 정의를 내리는 과정이 이 발굴품들은 숨기면서 생겨나게 됩니다.
대중의 성적이미지를 억압하기위해서 였죠.
19세기 중반까지도 P라는 존재하지않았습니다. 성적인 이미지를 묘사하는 단어도 없었죠.
그런 단어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P그라피는 매춘부증가현상을 기록한 의학적 용어였으나, 이 단어가 생긴지 5년이 채못돼 우리가 알고있는
뜻의 P그라피로 자리잡게 됩니다.
빅토리아 시대때 P라는 단어가 생겨났으나, 그당시 이단어는 문화를 단속하는 수단의 단어였습니다.
빅토리아인들은 노동자계층이 성적표현물을 접하게되면 자위에 집착하게되고, 중독돼 더 많은 성적표현물을
요구하게되고 결국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고 계층적 일탈현상이 나타날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빅토리아인들은 로마인들은 자위행위를 싫어한다고 정보를 왜곡하게됩니다.
당시 빅토리아인들은 로마인들이 이런 그림을 자위에 이용 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집들은 전부 공개가된 구조였고, 그 당시에는 사생활이라는 단어도 없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P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것입니다.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P라는 개념도 존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에겐 사생활이 주요 요소였습니다.
비밀장소에서 책을 읽었고, 비밀스런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빅토리아시대의 법은 대개 비밀보장을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에반해 로마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얘기를 했고, 성행위는 공공연한 대화 주제였습니다.
그래서 P가 생길만한 비밀스런 사적영역이 없었습니다.
1857년 사전에 처음으로 P라는 단어가 생기면서 빅토리아인들은 공식적으로
외설을 규제하기 시작합니다.
의회는 외설적 작품 판매를 금하는 외설 출판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최초로 국가가 성적인 표현 문제에 개입한 일은 19세기 가장 극적이고 영향력있는 사건으로 기록됐습니다.
외설에대한 범위와 범주를 내리고 구분하는 과정에서 P그라피의 개념은 자리를 잡게 됩니다.
P그라피가 시작된건 성적인 이미지를 통제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부터가 됩니다.
로마시대엔 성적인 이미지가 사방에 널려있었고, 성행위는 평범한 일상사였습니다.
고대시대엔 개개인의 자제력에 맡겨두었지만,
근대 세계에서는 법으로 성을 제약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상 그 자체에대한 제약이 아니라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제약입니다.
사람이 성적으로 흥분하는것을 법으로 금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사진,영상의 발달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상매체를 통해 P그라피 환상을 충족시키고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P그라피는 단지 영상매체에 국한된것이 아니고, 영상은 하나의 투사체에 불과합니다.
그것에 사전적 정의를 내리기전, 법적 제약을 내리기전에 이미 태고부터 존재를 해온 인간의 정서성과
고유의 환상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오직 사진이나 영상만이 P그라피라고 생각하는것은 집착하는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투사체에 불과할뿐
상상, 체취, 촉감 모든것이 인간의 P그라피가 될수있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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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에 av제작과정글에 위선자의 탈을 벗으라는 댓글도 있던데,
저 또한 av를 봅니다. 가끔 시간날때, 또는 보고싶을때 혼자있을때보죠.
그러나 여전히 av합법화에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오래전 김본좌가 있었고, 제가 본 av중에서도 김본좌 덕에 볼수있었던 영상들도 있었을것입니다.
그럼에도 김본좌의 검거가 올바른 일이냐고 묻는다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위선적이거나, 가식이라고 말할수있겠지만,
인간의 P그라피라는것은 단순히 사진이나 영상매체에 국한된게 아니고
사진이나 영상매체는 인간의 P그라피 환상을 충족시켜줄 일부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투사체를위해 일하는사람들이 P그라피충족이라는 편의성을 제공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대시대부터 계속돼온 여러 투사체들에 불과할뿐,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될것이고 그 과정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투사체는 변하지만, 인간의 정신에 자리잡은 P그라피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