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원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택당 이식(1584-1647)이 지은 시장(諡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덕수 이씨로 좌의정 이행의 현손이며 청음 김상헌과 함께 척화론(斥和論)을 펴다 심양으로 잡혀간 절신(節臣)이다. 그는 대제학을 지냈으며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로 존경을 받았다.[48] 그는 여기서 이순신의 시호를 청하는 글에 이순신을 옹호하면서 원균을 비난하였다.
이에 앞서 원균이 배 한 척을 타고 공에게 와서 하소연하자 공이 연명으로 승첩을 아뢰곤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공의 공적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을 승진시켜 통제사로 삼았던 것인데, 원균은 공의 아래에 있게 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이때부터 공에게 두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까닭에 공이 항상 부드럽게 포용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은 사납게 굴고 제멋대로 화풀이를 하면서 공의 절제(節制)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49]
이에 공이 대사를 그르칠까 염려한 나머지 자신의 허물을 들어 인피(引避)하며 체차시켜 주기를 청하자, 조정에서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여겨 원균을 충청병사로 전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원균은 쌓인 감정을 풀지 않은 채 조정의 고관들과 결탁하고는 온갖 방법으로 공을 무함하기 시작했다.[49]
8.
-난중잡록-
권율은 도원수가 되면서 이순신과 원균을 휘하에 두게 되었다. 말없이 묵묵하게 자신의 할 일만 하는 이순신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냈으나 매일같이 불평만하는 원균과는 사소한 충돌이 많았다. 게다가 원균은 관직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위인이였고 이순신이 지형(암초)과 기후(역풍)의 문제로 인하여 칠천량에 출전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간첩 요시라의 말만 믿은 윤근수 윤두수 형제가 이순신을 모함하자 여기에 호응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그 후임으로 원균이 들어오자 원균은 오히려 그 동안 해온 모든 주장들을 번복하고 이순신이 내세웠던 주장을 그대로 내세웠다.
이 일에 대해 권율은 칠천량에 출동할 수 있다면서 출동하지 않는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원균에게 곤장을 때렸는데 권율이 원균에게 곤장을 때린 진짜 이유는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얻으려고 감히 조정과 임금을 갖고 놀았기 때문에 이것이 너무나 괘씸해서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린 것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일기인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아래와 같이 비판했다.
朝報及元兇緘答則極爲兇譎, 口不可道. 欺罔之辭, 有難形狀. 天地間無有如此元之兇妄.
조정에서 보낸 편지와 원흉이 보낸 답장이 지극히 흉악하고 거짓되어 입으로는 말할 수 없었다.
기만하는 말들이 무엇으로도 형상하기 어려우니 하늘과 땅 사이에는 이 원균처럼 흉패하고 망령된 이가 없을 것이다.
난중일기 전체에 원균에 대한 비판이 많은데 특히 휴전 기간과 백의종군 후 권율 휘하에 들어갔을 때에 집중돼 있다. 위의 인용은 2008년 충무공유사 를 해석하던 중 발견한 내용이다.[50]
장계에서도 이순신은 지속적으로 원균을 비판했는데 각 출동에서 원균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