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중인 생전의 이항녕 박사 중앙일보, 서울신문의 기자를 거쳐 오마이 뉴스 편집장을 지냈던 정운현씨의 회고입니다. 다년간 친일파 군상들을 탐사취재 해왔던 그는 독특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바로 홍익대 총장을 지냈던 故 이항녕 박사였지요.그는 일제 시절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를 봐서 2차례에 걸쳐 군수직을 역임합니다.당시의 군수는 지방의 고등관으로 꽤 높은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운현 선생의 말을 요약하자면... 1. 해방 이후 자신의 친일행적을 글로 속죄한 사람은 거의 없다. 2. 대다수의 친일파는 해방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투신해서 부귀영화를 그대로 누렸다. 3. 美 군정은 해방 직후 조선인 관리의 '현위치 고수'를 지시했다. 군정으로부터 도청 과장직을 발령받은 이항녕 박사는 오히려 사표를 내던졌다. 4. 그는 사찰로 내려가서 낮에는 근처 학교로 가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밤에는 사찰에서 반성과 수행을 하며 근신했다. 5. 이후에도 기회가 될 때마다 수필, 소설, 기고문을 통해서 반복해서 자신의 친일행적을 사죄했다. 친일파 취재를 위해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기꺼이 응하더랍니다.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관리가 되겠다고 고시를 보게된 동기, 군수로 있으면서 식량공출을 비롯한 일제의 시책을 지방행정에서 적극 실천에 옮기기 위해 친일행위에 가담했던 내용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 당시 고시공부는 주로 직장을 얻기 위한 방편이었습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입신출세를 위해서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 군수 부임 후 대우는 어땠습니까? “당시로선 비교적 많은 봉급을 주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인에게만 주던 가봉(加俸)을 조선인에게도 지급해 봉급 차이도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군수 몇 년을 지낸 것을 가지고 친일파로 자처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자 이항녕 박사는 서슴없이 명쾌하게 '친일파' 정리를 해줍니다. '나는 민족의식도 없이 단순히 입신출세를 하고픈 생각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맡았던 친일파가 맞다'고... - 본인의 ‘친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합니까? “식량공출이나 노무자 징용, 학병 권유, 징병제 독려 등에 대한 방침이 도(道) 군수회의에서 결정이 되면 군수는 다시 면장회의를 소집하여 그 내용을 하달, 독려했습니다. 결국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셈이지요.” - 그 같은 일은 당시 군수의 기본적인 직무가 아닙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그러나 그 같은 직무를 수행하는 군수 자리를 직업으로 택했다는 자체가 ‘친일’입니다” - 항간에는 일제 말기에 군수 노릇 몇 년 한 사람을 ‘친일파’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도덕적 평가 이전에 지식인의 민족의식 문제라고 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상부기관의 결정사항을 집행한 것도 그렇지만 더러는 출세 목적으로 부풀려 집행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훨씬 권한과 재량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런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재임기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적어도 고등관 이상의 관리는 친일파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정운현 블로그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49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