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권유로 잠시 아파트 경비를 했었습니다.(스압)

메밀밭파수꾼 작성일 14.11.11 2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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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파트 경비가 잠시 화두되었었죠.

3년전 마흔도 안된 나이에 매출감소이유로 권고사직 후 

일자리 구하려 노력했으나 내세울 스펙도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어 전전긍긍하며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감정으로 얽혀야할 연인관계가 이해관계로 얽혀

여자친구와도 틀어지고 하루하루가 정말 죽을것만 같은 와중에

작년 정월에 스님을 찾아가니 

'밑바닥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너 그리 나쁘지 않다'

라는 말을 듣고 내가 할 수 있는일이 뭘까 찾아보았습니다.

스님이 '그리 나쁘지 않다' 라고 한 이유는 스님 찾아가기 전에

무속인에게 너무 안좋은 말을 듣고 스님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그 무속인을 미워하거나 욕하진 않습니다. 

덕분에 제가 어찌하던 움직이고 고민하고 돌아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까지 왔기 때문 입니다.

신도시 아파트 경비는 보수가 꽤 큰걸 보고 지원해서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오는 만큼의 진상주민은 없었지만

하여간 주민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경비는 '나의 발밑에 있는 사람' 이라는 심리가

발동하는건 사실 입니다.

그나마 다른 아파트에 비해서 업무환경이 꽤 좋았던 아파트에서

경비생활하며 겪었던 일들을 적어 보겠습니다.


1.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쉽니다.


2. 24시간 근무이기 때문에 식사시간은 두번이고 도시락을 싸 가야 합니다.

다른 아파트는 두개의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며 싸늘하게 식은 밥을 눈치봐가며 얼른

먹어야 합니다.

제가 다니던 곳은 경비실장이 사비로 쌀을 사다놓아 경비들은 각자 집에서 반찬만 가져와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밥을 해 먹었습니다.


3. 휴식시간은 법적으로 4시간이 보장됩니다. 거기에 식사시간도 포함 됩니다.

그래서 식사시간 한번에 30분, 두번이니까 한시간 쓰이고 나머지 세시간이 수면 시간이 됩니다.

24시간 근무중 세시간 수면은 너무 작으므로 경비들끼리 '짜고' 몰래 조금씩 더 잡니다.

그런데 그걸 감시하기 위해 가끔 동대표가 돌아다니다 적발되면 골치아파 집니다.

제가 다니던 아파트는 그나마 수면실이 좋았습니다. 

노인정이 매우 커서 노인정에 있는 방 하나를 경비 수면실로 이용했으며 냉, 난방이 잘되고

넓찍하고 쾌적했습니다. 일반 아파트는 꿈도 못꾸는 수면실 입니다.

3시간을 오바해서 자는 것이므로 사람이 잠잔다는걸 숨기기 위해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불을 절대 안켜고 스마트폰도 안켜고 바로 누워서 자야 합니다.

하여간 그렇게 모자란 잠 때문에 밤엔 의자에 앉아 조는게 일상다반사 입니다.


4. 신도시 주민은 원래 부자이거나 부자인 척 하는 사람들이 공존 합니다.

대체적으로 부자인 척 하는 사람중에 진상이 많고 경비에게 안하무인, 인격비하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졸부의 경우도 마찬가지)

원래 부자인 사람들은 본인 자식 또는 며느리 등이 경비에게 말이라도 함부로 하면

그걸 나무라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호되게 혼내는 경우도 봤습니다.


5. 노인들이 경비에게 말을 함부로 하거나 트집잡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할머니들이 더하고

그 할머니들 중 절반 이상은 며느리부터 구박을 받거나 안좋은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7. 주상복합식 고층 아파트는 사다리차가 안됩니다. 이사철이 되면 경비들 죽어납니다.

엘리베이터에 보양재라 해서 흠집 방지용 매트를 붙이는데 그거 굉장히 무겁고 귀찮습니다.

비오는날 이사 있으면 비 줄줄 맞으며 리어카에 보양재 싣고 왔다갔다 하다 보면

굉장한 피로감을 느낍니다.

일단 신도시 아파트 같은 경우는 경비가 우산을 쓰지 못하게 합니다.


8. 경비는 감시/단속 업무가 주 업무 입니다.

하지만 감시/단속 업무에 권한도 없습니다. 아이러니 하지요.

누굴 조사하거나 단속하거나 완력/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이런거 하면 안됩니다.

아파트에 일이 생기면 우선 112나 119에 전화하는게 더 효과적이고 빠릅니다.

경비는 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 권한도 없고 업무 수칙에 그저 '주민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라는 항목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경비가 그런 월급과 대우를 받고 일하며 주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9. 경비가 가끔 이상한 짓을 하면 그건 대부분 관리실에서 시키는 겁니다.

어느날 갑자기 주차에 대한 참견이 심해지거나 애완동물에 대한 참견이 심해지거나

이런다면 그건 관리실에서 명령이 떨어진겁니다.

경비가 이상해진게 아닙니다.



10. 처음 입사했을때 경비복을 받았는데 전임자들이 입다 버리고 간 옷들 중

내 몸에 맞는것을 찾아서 입습니다.

그 냄새가 말도 못하게 고약하여 집에 가져가서 세탁해 입었는데

하루가 지나니 같은 냄새가 납니다.

청소지원, 시설관리지원, 행사지원 등등 땀 흘리며 일하는 일이 많으니 그리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일을 하니 감시/단속이니 주민안전이니 하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개따위에게 줘 버리게 됩니다.


11. 택배는 경비실에 받아서 일지에 하나하나 적어 둡니다.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인터폰으로 연락하고 안받는 집은 한두시간 후 다시 한 후

그래도 안 받으면 보관했다가 다음날 다시 인터폰을 합니다.

굉장히 짜증나고 시간 잡아먹는 일입니다.

지가 시킨 택배를 안찾아가는 인간이 간혹 있습니다.

한달후에 찾아간 인간도 보았습니다.


12. 경비원 중 이상한 사람 있습니다. 정신상태가 살짝 이상해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사람이

어쩌다 간혹 있습니다. 그런 사람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제가 아주 짧은 경비시간 동안 그런 사람과 일했는데 오래 일하지 않고

해고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말하기 힘든 사건이 있는데 하여간 조심해야 합니다.


13. 경비실에 화장실과 세면기가 있는데 온수가 잘 나왔습니다.

이렇게 잘 갖추어진 경비실은 많지 않다고 합니다.


14. 흡연에 대해선 크게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급적 주민들 보이는데서 흡연은 하지 말아야 하므로

잘 안보이는곳에 숨어서 흡연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끊었지만 그땐 그게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15. 간혹 아파트 비리나 이런거 말하면 경비도 뭔가 챙기는 줄 아는분 있던데

경비는 그런것에 별로 연루 안됩니다.

하지만 경비실장은 어느정도 개입이 됩니다.


16. 말 나온김에 경비들이 가끔 저지르는 비리는 대부분 폐가전, 가구, 자전거 등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래봐야 몇천원이고 스티커도 붙이지 않고 버리는 주민들이 많다보니

경비들은 수거업체에 전화해서 팔고 그 돈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17. 앞서 잠시 언급 했지만 감시/단속 업무를 하는 경비를 감시/단속하기 위해

동대표들이 돌아다닙니다.

굉장히 비 합리적인 일입니다.


18. 경비도 휴가를 낼 수 있습니다.

하루 쉬고 하루 일하기 때문에 휴가를 내면 자동적으로 3일휴무가 됩니다.

좋은 듯 보이나 하루 휴가내면 대체 근무자에게 일당을 대신 내주어야 합니다.

한달 보름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당만 주어도 꽤 데미지가 큽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겪은 사건들은 이거 말고도 매우 많습니다.

짧은 기간동안 하루하루가 매일 다른 이벤트의 연속이었기 때문 입니다.

여튼 이렇게 일을 하다가 어느날 회사에 일자리 생겼다고 친구가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고 취업했습니다.

이 회사에 와서 저는 그냥 솔직히 말했습니다. 아파트에서 경비 했었다고.

그게 소문이 나서 회사 경비실에서 마침 경비원 증원계획있다고 저더러 아는 사람 있으면

추천해 달라기에 같이 일하던 두명의 경비를 회사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 두 사람은 가끔 고맙다며 인사도 하고 그럽니다.

회사 경비가 그렇게 정보가 빠른 줄 몰랐습니다.

가끔 제가 데리고온 경비들이 인사정보나 공장 증설계획 다른 지방 공장과의 인원 교체 정보

등등 회사 운영 정보들을 어디서 듣고는 알려줘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을 읽는 분들중에서도 나이들고 나면 경비를 해야할 입장에 놓이실 분도 있으실 겁니다.

경비는 나쁜 직업도, 천한 직업도, 특수한 환경의 사람들이 하는 직업이 아닙니다.

누구나 살다보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모쪼록 아파트 경비 아저씨에게 뭐 잘 대해주고 인사하고 이런거까지는 안해도

인격적인 모독은 하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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