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세계 2차대전 (1939-1945)
그 중,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정책에 의해 사망한 유대인은 약 600만명.
바르샤바 게토 대학살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1943년 5월 10일자 1면 기사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1969년
독일연방공화국(당시 서독)의 제4대 총리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그가 총리로 선출되었을 때. 1,2차대전 전범국인 독일에 대한
유럽과 전세계적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국가의 이미지가 추락해 있는 상황에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급박한 위기상황
그때 빌리 브란트 총리는 결단을 내린다.
30년전 독일이 침공했던 폴란드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빌리 브란트 총리는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찾아간 폴란드 바르샤바
그는 유대인학살 기념비를 찾아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만행에 대한 사죄의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참회의 묵념을 올린다.
바르샤바 유대인학살 기념비에서 사죄하는
빌리 브란트, 1970년 12월 7일 겨울
브란트 총리가 추념비를 방문할 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인들은 서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무릎을 꿇어야 할 용기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무릎을 꿇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우리는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제4대 총리, 골다 메이어
빌리 브란트 총리가 다음날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갈 때,
감동을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 안는다.
결국 진심어린 사과는 독일과 폴란드, 이스라엘의 관계마저도 우호적으로 바꿔놓으면서
세계가 독일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모두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무언가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독일의 숨길 수 없는 악행의 역사를 증언하는 장소에서
나치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저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독일연방공화국의 제4대 총리.
나치정권시절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는 정치활동을 했다.1949년 9월에 귀환, 61년부터 69년까지 독일연방공화국 수도 베를린 시장을 지냈고,
4대 연방총리로 재임하는 기간, 과거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과 화해를 시도하는 동방정책을 실시하는 업적을 남겼고,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일본이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마지막이 될듯한 이 사건.
현대 외교역사상 최초로 한 국가의 정상이
타국가의 도시에서 무릎을 꿇은 이 역사적 사건은 독일의 과거 반성의 상징이 되었고,아직도 많은 유럽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저는 사람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그의 이름 빌리 브란트"
하지만
그들은 왜
하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