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통신사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에서 발췌 -
1764년 1월 22일 오사카
숙소 곁에 높은 난간 위에 앉아 사면을 바라보니,
지형도 신기하고 인구도 많을시고 백안이나 되어 뵌다.
우리나라 도성 안은 동에서 서에 채 십리가 못되는데
부귀한 재상들도 백간집이 금법이요, 다 모두 흙기와를 이었는데
장할 손 왜놈들은 천간이나 지었으며,
그 중에 부유한 놈 구리기와 이어놓고, 황금으로 집을 꾸며 사치하고,
남에서 북에 오기 백리나 거의 되되, 가옥이 빈 틈 없이 빽빽이 들었으며
한 가운데 낭화강이 남북으로 흘러가니, 천하에 이러한 경치가 또 어디 있단 말인고?
북경을 본 역관이 일행중에 와 있으되, 중원의 장려하기 이에 낫지 않다네.
이러한 좋은 세계 해외에 배판하고, 더럽고 못쓸씨로 구혈을 삼아 있어
주평왕 때 입국하여 이제까지 이천년을 흥망을 모르고서
한 성으로 전하여서 인민이 생식하여 이처럼 번성하니,
하늘도 모를 일이라. 탄식하고 한탄한다.
가옥도 많고, 흔한 것이 대밭이다. 토지가 기름 져서 전답이 매우 좋네.
이십리 실상사가 삼사상 조복할 때 나는 내리지 않고고, 왜성으로 바로 가니,
인민이 부려하기 오사카 만은 못하여도 서에서 동에 가기 삼십리라 하는 구나.
관사는 본룡사요, 오층 문루 위에 열 아문 구리 기둥이 하늘에 닿았구나.
수석도 아름답고, 죽수도 부드럽네. 왜왕이 사는 데라 사치가 셀 수 없다.
산형이 웅장하고 수세도 둘러싸여 기름진 들판이 끝없이 생겼으니, 아깝고 애닳다.
이리 좋은 하늘이 준 땅을 왜 놈의 것이 되어 스스로 황제를 칭하여 자손이 부르니
개 같은 왜인들을 다 모두 소탕하고 사천리 육십주를
조선땅으로 만들어서 예의국을 만들고 싶다.
1764년 2월 3일 나고야
육십리 나고야를 21시에 들어오니 번화하고 장려하기 오사카와 같다.
밤빛이 어두워서 비록 자세히 못 보아도 산천이 광활하고 생식이 번성하며
전답이 기름지고 가사에 사치하기가 일로의 제일이라.
중원에도 흔치 않으니, 우리나라 삼경을 갸륵하다 하건마는 이곳에 비하여 보게되면 매몰하기 가이 없네.
(중략) 그 중에 계집들이 일색이라 샛별 같은 두 눈이 주사같은 입시울에
이는 백옥 같고 눈썹은 나비 같고 뼈오리 같은 손과 눈으로 무어 낸듯
사람의 혈육으로 저리 곱게 생겼는고 조비연 양귀비를 만고에 일커르나
예다가 놓으면 응당히 무색하리 월녀천 하백이 진실로 옳을시고
1764년 2월 16일 에도(도쿄)
십육일 우장 입고 에도로 들어갈 때 왼편은 가옥이요, 오른편은 바다로다.
피산 대해 하여 옥야천리 생겼는데, 누대제택 사치함과 인물남녀 번성하다.
성첩이 정장한 거소가 교량주즙 기특한 것이 오사카보다 삼배나 더하구나.
좌우의 구경꾼이 무수하니, 서어한 붓 끝으로는 아무것도 기록을 못하겠구나
삼십리 오는 길에 빈틈없이 묶었으니, 대체로 세어보면, 백만이 여럿일세
여색의 아름답고 고운 것이 나고야와 같다.
일본 에도시대
1773년 11월 26일
http://www.kabuki-za.com/syoku/no12.html
1774년 2월 3일
http://www.kabuki-za.com/syoku/no19.html
1775년 8월 16일
http://www.kabuki-za.com/syoku/no17.html
매일 매일 메뉴 기록까지 보존되어 있음
에도시대 일본인들이 가부키 극장 관람후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무엇을 먹었는지 현재에도 알 수 있다.
랭킹표
가장 잘나가는 스모선수 , 가장 잘 팔리는 술 종류
이런걸 순위로 만든 랭킹표가 에도시대에 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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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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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0년 (1810년) 4월
내년에 조정에서 일본 측으로 통신사를 보낸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내가 거기 함께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왜놈들에게 관심이 없다. 불과 이백 여 년 전에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던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그들이 사는 도시를 얼핏 들어본 바는 있다만
그것은 너무 과장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도시는 있을 수도 없다.
소북 계열인 그 놈이 무엇을 알겠으며 십여 년전 유배를 간 것도 다 그 이유가 있으리라 싶다.
중화를 멀리하고 왜놈을 높이 샀던 것은 반역의 음모도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순조 11년 (1811년) 10월
우리 통신사 일행은 일본에서 보내온 안내인을 따라서 부산을 떠나 쓰시마 북단에 있는 와니우라로 가는 중이다.
우리 일행의 배는 총 6척으로 일본인 선원들이 같이 타고 있다. 상사선과 부사선에는 각각 세 명, 3선과 4선에는 각각 두 명, 5선과 6선에는 각 한 명이 나누어 탔다.
바람이 부드럽다. 바닷새가 우리 주변에 몰려든다.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참 좋다. 쓰시마로부터 작은 배 여섯 척이 환영차 마중을 나온 듯싶다.
우리 배를 둘러싸며 호위하며 선두에 섰다.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온 하늘에 울러 퍼지고 깊은 바다에 스며든다.
그 진동에 물속에 있는 물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다. 굉장히 인상적이다.
순조 11년 (1811년) 11월 7일
해가 돋았다. 선실을 나가 문설주를 잡고 섰다. 사면이 바다다. 굉장하다. 세상에 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싶다.
온 우주에 사방에 물결만이 있다니, 과연 신은 존재하는구나 싶다.
순조 11년 (1811년) 12월
오사카라는 도시는 정말 굉장하다. 수만 아니, 수십만이나 되는 집이 모두 기와집이다.
여기 부자라는 놈들의 집은 조선의 부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 집의 규모는 마치 조선의 왕과 같이 넓고 그 집의 높이도 층층이 높다.
저렇게 높게 쌓아 올린다면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 나는 올라가기를 꺼렸으나 탑처럼 생긴 집들은 그 견고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내부의 여러 곳이 황금을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사치스러움이 조정에도 있었던가? 아니다.
조정도 흉내 내지 못할 것들이 여기 일개 왜인의 집에 이렇게나 많다. 도시의 크기는 한양만하다.
모두가 이다지 번영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으려면 땅이 넓어야 되는데 그것도 아니다.
왜인들은 도대체 어떤 발전을 하고 있길레 한양의 발전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러한 풍요를 누리고 있는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너무나도 궁금하다.
혹시나 조선통신사가 온다고 이 지역만 특별히 이렇게 꾸며놓은가 싶어 다른 지역도 가보았다.
아니다, 오사카의 모든 곳이 이렇다. 그래, 박제가가 옳았다. 그가 옳았다!
그의 기술은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조선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순조 11년 (1811년) 12월
여기는 교토이다. 이 도시는 오사카 정도는 아니지만, 왜왕이 사는 도시인지라 사치스럽긴 마찬가지이다. 왜왕의 성벽마저 사치스럽다.
아니다 사치보다는 아름답다. 나도 이 풍요에 길들여 져버린 것인가.. 더 이상 사치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왜국에 있고 왜국의 눈으로 이 풍요를 보기 시작했다. 강에 모인 아녀자들이 매우 아름답다. 여자들이 입고 있는 베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순조 13년 (1813년) 1월
나는 재작년 조선 통신사의 서기로 갔다. 온 이후 아직 그 풍요의 충격에 있다..
일본을 무로서 대하던 관점을 탈피하여 문의 일본을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이를 ‘실사구시’ 라고 한다.
순조 13년 (1813년) 2월
날이 추워진다. 백성들은 가난에 굶주리고 먹을 걱정만 하고 있다. 왜인들은 겨울을 어떻게 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시 그곳으로 가서 구국의 길을 모색하고 싶다.
나같이 역사적 통신사로서 일본에 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일본을 보고 배울 기회가 전혀 없다.
일본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오늘부터 내가 보고 배운 것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해사일기, 일본록, 승사록, 화국지 등 일본에 관련된 모든 자료를 읽고 수집하여 나의 관찰과 집대성하고 하고자 한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대규모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고 방대한 견문록이 저술되긴 하였으나 이들의 기술력을 제대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것은 고작 물레방아나 고구마 재배 등에 국한되었다는 것이 난 믿기질 않는다.
이는 우리가 일본을 너무 성리학적 테두리에 가둬놓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이며 한계일 것이다.
왜놈들의 일본 경제상에 대해서 내심 경탄하면서도 우리는 왜 화이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대체 알 수 없다.
이들이 강력한 무기를 가져와 쳐들어온다면 우리는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서로를 마음으로는 경멸하면서도 외교를 하고 있었다. 가면을 써가면서 까지 왜 거기서 배우지 못했냐는 말이다.
일본은 무에서 한국은 문에서 강세를 띠며 대등한 외교관계를 하고 있었다.
대일외교관계를 담당한 조엄이라는 작자는 어떻게 이러한 발전상을 보고도 혹평하였는지 궁금하다.
일본의 물레방아, 절구, 제방 공사 등을 견학하고 도입하려 했던 것은 높게 사나 그는 정말 현상을 볼 줄 모르는 인물이다.
왜인들이 만들어 논 사회를 봤어야 옳다. 조엄 이놈은 역사에 남을 죄인이다.
순조 13년 (1813년) 3월
박제가가 유배생활을 끝으로 어디선가 죽었다고 한다..
팔을 걷어 올리고 일본을 따라잡아야 할텐데 조선은 대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