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서부로 갔던 사람들은
왜, 어떤 루트로 서부에 가야만 했던 걸까요?
우수에 찬 눈빛
사나이들의 마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캐릭터와 컨트리 음악이 등장하는데요
이러한 영화들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바로 ‘서부 개척시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의 남북전쟁을 전후로 발생했던 서부 개척 붐을 표현한 영화이죠.(서부극이라고도 하죠)
어디선가 한번 즈음은, 거친 사막을 가로지르는 카우보이와 그들의 머스킷 총을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사실 서부 개척시대의 미국 역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미화’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1. 미국의 젊은이들이여!! 서부로 가자!
차례로 흡수하며 미친듯이 영토확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문명은 건국 초기부터 북미 대륙의 동쪽에 정착을 했던 지라,
지역 개발은 자연스럽게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서부 땅들은 전혀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매우 척박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서부를 개발하고 싶어도 ‘개발 할 인구’가 없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미국 정부는 아메리칸 드림 신화를 유럽인들에게 퍼뜨려 이주를 적극 장려했고,
동쪽에 있는 국민들의 서부 이주를 권장하기 시작해요.
게다가, 1849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면서 ‘골드 러시’로 이어져, 수많은 국민들이 서부로 이주를 했습니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서부 이주가 위험한 리스크를 갖음에도, 그것을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겼어요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서부로 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미국의 서부란 어떤 땅이며 무엇을 경계로 갈라져 있었을까요?
2. 서부는 무슨 땅?
: 현재와는 다른 그 시대의 ‘서부’
위 사진은 북미 대륙의 지도예요.
잘 보시면, 서쪽에는 로키 산맥이 있고 동쪽에는 애팔래치아 산맥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오늘날 미국은 이 두 산맥을 경계로, (서부/중부/동부)로 구분합니다.
다시 말해서, 태평양 연안에서 로키 산맥까지를 ‘서부’
로키 산맥에서부터 애팔래치아 산맥까지가 ‘중부’,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대서양 연안까지의 미국 영토를 ‘동부’라 구분합니다.
그러나 서부 개척시대에는 이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오늘날 중서부 지역을 몽땅 ‘서부’라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동부 사람들 입장에서는 중부 지방도 어차피 개발해야 할 땅이라 서부로 간주해 버린 것이죠
그러나 대도시가 밀집되어 있던 동부에서 서부는 약 4,500km 이상 떨어진 엄청나게 먼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미국 국민들은 서부 이주를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물리적, 정신적 희생을 감수해야 했어요
잘 알려진 루트만 5가지(캘리포니아 통로, 질라 통로, 모르몬 통로, 오리건 통로 등)가 넘었죠
그러나 그 시대에도 ‘꼼수’는 존재했습니다.
이 꼼수란 남들보다 좀더 빠르게, 그리고 최대한 많은 이득(예컨대, 가는 길에 동물 사냥)을얻으면서 갈 수 있는 지름길을 말하는데요.
하지만 이 지름길을 잘못 선택한 경우 ‘재앙’이 찾아왔습니다.
일례로, 1846년에 서부개척에 떠난 ‘도너 일행’은 지름길이라고 괜히 따라갔다가 요단강 익스프레스에 탑승했습니다.
그들은 산맥을 넘다가, 갑자기 거친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캘리포니아 통로에 갇혀 조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식량이 떨어지자 이주민들은 나뭇가지, 동물 뼈, 심지어 구두까지 먹었습니다
마침내 구조대가 도착했을 땐, 초기 일행 중 절반이 죽어있었죠
실제로 서부 개척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멋진 영웅 스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고, 강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죠.
그래서 미국인들은 그 당시 개척민들의 용기와 개척 정신을 기리며
‘프런티어 정신(The Frontier)’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4. 카우보이, 그들은 누구인가?
각종 대중매체에서 카우보이(Cow Boy)는 아주 흥미로운 소재로 쓰입니다.
마초적인 남성성과 담대함, 명예 등과 같은 단어는 카우보이를 상징하고 있죠
카우보이는 뭘까요?
그리고 정말, 카우보이는 그 당시에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받는 선망의 대상이었을까요?
그런데 카우보이는 그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엄연한 직업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목장을 운영하는 관리자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카우보이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소 떼를 기차역으로 몰고 가는 일을 했었죠.
카우보이가 소 떼를 기차역까지 몰고 가면, 소들은 기차에 실려 동부의 대도시로 팔려 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서부 지역은 온갖 범죄가 일어나는 무법 지대였고,
틈만 나면 야생 동물들이 소 떼를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히곤 했어요
그래서 카우보이는 그러한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총기를 소지하고 총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만 했죠.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카우보이가 매력적인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소 떼를 몰고 가느라 하루에 최소한 열 몇 시간을 말의 안장 위에서 보내야 했어요.
실제로, 카우보이 임무를 수행한 5명 중에 살아 돌아온 숫자는 1~2명에 불과해요. 그만큼, 카우보이 임무가 위험한 일이었죠.
그래서 카우보이는 실제로 그 시대에서 전혀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우 가난한 젊은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카우보이를 한 경우가 많았어요.
사실, 카우보이의 전성시대는 1800년대 후반의 약 20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왜냐하면, 1887년에 철조망이 발명되고 열차 노선이 연장되면서 굳이 카우보이가 있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죠
5. 캘리포니아 주를 놓고 싸우는 북부와 남부
한편, 캘리포니아에 금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전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리다 보니,
1849년의 캘리포니아는 정식으로 미 연방에 ‘주’로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 자격이란, 그 영토에 소속된 성인 남성의 인구가 ‘6만 명’ 이상이 되는 것이었죠.
그러나 캘리포니아의 ‘주 편입’에 대한 논의는, 북부와 남부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졌어요
북부 사람들 曰
: “캘리포니아 주는 노예 제도를 금지하고 있으니, 자유 지역으로 포함되는게 맞아!! 알겠음?”
반면, 남부인들은 이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죠.
그러다가 1805년, 절충안이 만들어졌어요. 이 절충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는 자유 주로 편입한다. 대신, 뉴멕시코와 유타는 노예 제도를 허용하기로 한다.”
이 절충안은 잘 풀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도망 노예 송환법’이 말썽을 일으킵니다.
이 노예 송환법은 북부로 도망간 노예를 주인이 쫓아가 붙잡을 수 있게 보장하는 법이었어요.
그러나 이 법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만약, 원래 북부에서 자유 신분으로 살고 있던 흑인에게 누군가가 ‘도망 노예’라고 모함을 했을 경우,자칫하면 남부로 끌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죠
즉, 이 법이 시행되면 미국 내의 흑인은 세상 어디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노예 송환법을 놓고 북부와 남부의 대립은 더욱 커져만 갔고,
북부와 남부인들은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 의식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출처-이토랜트